일본인 이야기 2 - 진보 혹은 퇴보의 시대 일본인 이야기 2
김시덕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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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 <일본인 이야기 1>은 가톨릭을 중심으로 전국시대 말기부터 도쿠가와 막부가 세워지는 시기까지를 다루었다. <일본인 이야기 2>는 도쿠가와 막부가 세워진 다음 시기, 즉 에도 시대를 다룬다. 시리즈 제2권의 부제는 ‘진보 혹은 퇴보의 시대’이다. 이러한 부제가 붙은 이유는 1권 내용과 연결되어 있다. 1권은 16~17세기 가톨릭과의 접촉이 일본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발전시켰는지에 대해서 다루었다. 그러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가톨릭 세력을 탄압하며 가톨릭이 자랄 수 없게 아예 싹을 잘라버렸다(물론 그 와중에도 살아남은 아주 극소수의 카쿠레키리시탄들이 있었다). 1권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된다. “오다 노부나가의 손자인 오다 히데노부의 포교 사례에서 보듯이 당시 일본 지배층 구석구석까지 가톨릭 신앙이 침투되어 있었던 상황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무사 집단의 권력 독점을 위해 일본의 국가 성장을 멈추는 길을 택한 것입니다.” (<일본인 이야기 1>, 393p)

이 내용의 연장선상에서 저자는 “센고쿠 시대에 유럽과 동시대적으로 교류했던 일본은 자기 집안과 지배층의 정치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 국가의 발전을 정지시키기로 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결정에 따라 갑자기 유럽과 단절했습니다. 여러 항구에서 유럽인들과 자유롭게 교류했던 때와 비교하면, 나가사키의 데지마와 정치 수도인 에도에서만 네덜란드와 교섭하게 된 변화는 발전이 아니라 퇴보입니다.”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 책은 “네덜란드를 제외한 그 밖의 유럽 세력을 추방하고 유럽으로부터의 고립을 택한 일본이 어떻게 2백 년간 퇴보했으며, 지배층이 초래한 이 퇴보 상태에서 일본의 피지배민들이 어떤 움직임을 취했는가”라는 문제의식 하에서 에도 시대 일반 농민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3권은 주로 난학의 군사학적 측면과 상인들의 이야기라고 한다)

에도 시대에 크게 주목을 끄는 요소 중 하나가 난학의 발달이다. 일본의 발전을 논할 때에 난학이 중요하게 거론된다. 그러나 저자 김시덕은 난학, 더 정확하게는 난의학은 지나치게 과대평가되었다며, 실제 에도 시대에서 난학의 영향력은 극히 제한적이었음을 강조한다. 잠시 그의 설명을 들어보자. “지리학 서적과 해부학 서적은 지적 차원에서 에도 시대의 일부 지식인에게야 도움이 되었겠지만, 실제로 백성의 삶을 더 낫게 만들었는가 하는 차원에서는 한계가 뚜렷했습니다. 지리학 서적을 읽거나 그 내용을 입에서 귀로 전해 들어서 해외의 정보가 백성들 사이에 퍼지기는 했어도, 막부가 원양 항해가 가능한 대형 선박을 만들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여전히 표류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난의학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해부학 서적을 번역해서 새로운 세계관을 얻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곧바로 해부와 외과 수술이 활발해질 수는 없습니다.”

기술의 발전이 수반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지식의 수용은 무용지물이다. 쇄국의 영향으로 가장 크게 질이 떨어진 분야가 의학이었다. 전국시대, 자선 정신과 유럽식 육아법을 바탕으로 세워진 고아원, 최신 수준을 자랑한 외과 수술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은 에도시대에 옛말이었다. 그런 와중에 난의학이 의학 발전에 영향을 미쳤지만, “에도 시대에 난의학이 가장 큰 효과를 발휘한 병은 천연두” 정도였다. 난학이라는 새로운 지식은 실용적으로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한 듯하다. 일본의 퇴보는 항해술에서도 발견된다. 위 인용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서양 국가와 왕성한 교류를 펼쳤던 시대의 일본은 먼 바다까지 항해할 수 있는 배를 건조할 기술력을 갖추었다. 그러나 도쿠가와 막부가 출항을 엄격하게 금지하면서, 대형 선박 제조술은 로스트 테크놀로지가 되었다.

이처럼 도쿠가와 막부가 지배하던 에도 시대는 전체적으로 진보라기보다는 퇴보의 시대였다. 일본이 퇴보하게 된 데에는, 오직 지배층의 안정만을 중시했던 논리가 깔려있다. 앞서 말했듯이, 도쿠가와 막부는 정권에 위협 세력이 될 수 있는 가톨릭의 싹을 잘라 버리고 시작했는데, 비단 가톨릭뿐만이 아니라 조도신슈, 니치렌슈와 같은 “도쿠가와 막부라는 현실의 지배 체제보다 종교를 우위에 두는 모든 종교 체제를” 진압하면서 시작된 “군사 독재 정권”이었다.

이 책의 주요 주제는 바로 이러한 쇄국으로 인하여 “물질적 혜택, 특히 의료 혜택을 박탈당한” 에도 시대 피지배민의 이야기이다. 1장 ‘백성들의 이야기’는, 에도 시대 경제적 착취를 당하며 살았던, 지배층에 의해 저항의 논리를 빼앗겼음에도 저항하였던 농민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2장 ‘의사들의 이야기’는 평범한 사람들을 치료하는 에도 시대 의사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의술과 의학이 어떻게 발전했는지, 그리고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의사들의 삶은 깊은 울림을 준다. 그리고 2장에서 쇄국 이후 쇠퇴한 일본 의학과 제한적이었던 난의학의 성과를 지적하면서, “퇴보의 기간 중에 괴로워하고 죽어간 사람들, 그리고 퇴보를 회복하기 위한 불필요한 노력”에 안타까워한다. 그가 난의학의 성과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네덜란드를 제외한 모든 유럽 국가와의 관계 단절을 선택함으로써 일어난 쇠퇴와 그 결과 피해를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씁쓸할 뿐이다.

<일본인 이야기>는 일본사 통사 책이 아니다. 중요한 부분을 선택하여 일본인의 참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이 책의 목표이다. 책 뒷면 소개 문구를 인용하면, “그동안 에도 시대를 말할 때 부각되지 않았던” 역사를 부각하였다. 그래서 이 책만으로는 일본사나 에도 시대 전체상을 아는 데에 한계가 있다. 이러한 한계는, 이계황의 <일본근세사>(혜안)나 일본사학회의 <아틀라스 일본사>, 그리고 아사오 나오히로의 <새로 쓴 일본사> 등을 읽으며 채워나갈 수 있겠다.

여담. 1권 달리 2권에서는 참고문헌이 수록되어 있다. 1권에서는 후주만 달려 있었다. 아마 참고문헌도 넣어달라는 요청이 꽤 있었나 보다. 늘 흥미로운 책과 연구를 많이 소개해주니, 참고문헌이 생긴 것은 반길만한 소식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번 독서를 통해 얻은 소소한 수확은, 후쿠자와 유키치가 <문명론의 개략> 9장에서 비판하는 도쿠가와 시대 학문과 종교에서의 ‘권력의 편중’을 보다 잘 이해하게 된 것이다. 후쿠자와는 일본의 신도나 일본 학문, 특히 유학은 권력자와 지배층을 위한 학문과 종교였지, “독일개인(獨一個人)의 기상(individuality)”을 고취하지 못했다고 광범위한 비판을 날린다. 이는 복수의 중심 속에서 자유의 기상이 발달할 수 있었다는 그의 서양 문명 이해와 맞닿는 비판이다. 도쿠가와 막부는 저항의 가능성을 제거하면서 시작된 정부였다. 이렇게 싹 다 정리했으니, 남은 것은 위협적이지 않은, 다시 말해 체제에 순응적인 종교들 뿐이었을 터이다. “종교는 사람 마음의 내부에서 기능하는 것으로서, 가장 자유롭고 가장 독립적이며, 털끝만큼도 남의 제어를 받지 않고, 털끝만큼도 다른 힘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세상에 살아 있어야 마땅한데 우리 일본에서는 곧 그렇지 않다(<문명론 개략>, 소명출판).”라는 후쿠자와의 일본 종교 비판은 이러한 맥락 위에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본 서평은 부흥 카페 서평 이벤트(https://cafe.naver.com/booheong)에 응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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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번역가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 번역을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노경아 외 지음 / 세나북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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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책을 무척 좋아하여 가끔 책에 둘러싸여 있는 직업을 꿈꿔봅니다. 이를 실현하고 싶다면,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일하는 것, ‘니은서점’의 노명우 선생처럼 책방을 운영하거나, 혹은 이 책을 쓰신 5명의 저자분들처럼 번역가를 선택할 수 있겠습니다. <도서번역가의 세계로 초대합니다>는 9~10년 정도 번역에 몸담으신 베테랑 프리랜서 번역가분들이 직접 번역가로서의 삶을 얘기한 책입니다. 박소현 번역가님과 김희정 번역가님을 제외하면, 다른 저자분들이 번역한 책을 한 번씩은 읽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내가 읽었던 책을 번역한 분이 이런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어 신기한 책이었습니다.

책의 형식은 옴니버스 식이지만, 대체로 다음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 도서 번역가가 된 계기와 과정, 2) 번역가의 일상, 3) 이 직업의 고충과 보람, 4) 번역가를 꿈꾸는 이들을 위한 조언.

특히, 어떻게 인적 네트워크를 만들 수 있을지, 한 분야에만 갇혀 있지 말고 여러 분야로 자신의 역량을 확장해볼 것, 시간 관리 능력을 기를 것 등 꽤나 실질적인 조언들이 많이 들어가 있었고, 번역가가 되고 싶은데, 당장 뭐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유용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번역가에게 필요한 자질로, 거의 똑같이 얘기한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 책을 좋아하거나 최소한 읽는 것에 부담감이 없어야 할 것. 둘째, 외국어 실력만큼 한국어 지식도 빠삭해야 할 것. 셋째, 시간 관리 능력이 있어야 할 것. 마감 엄수와 신뢰는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넷째, 일본어 전문 번역자라면, 일본의 문화나 역사, 그리고 자신이 번역하는 도서의 분야(의료 등)에 대해서도 공부할 것. 이를 종합하면, 번역가는 끊임없이 공부해야 하는 직업이며, 시간관리 능력이 번역 능력만큼 요구되는 직업인 것 같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번역가의 삶도 고충이 많습니다. 저자분 모두 프리랜서이니 공통으로 얘기하는 부분인데, 프리랜서의 자유는 있기는 하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작업시간이 매우 불규칙적이며 더더욱 체계적인 시간 관리가 필요해집니다. 넋놓고 놀고 있다가는, 마감일을 지킬 수 없게 되기 때문이죠. 결혼하시고 아이도 있으신 노경아님과 김지윤님의 경우는, 육아와 집안일, 번역을 병행하는 고충을 토로하시기도 했습니다. 또 책을 읽는 거야 좋지만, 늘 일에 치이니 정작 자신이 정말 읽고 싶은 책을 읽을 시간은 잘 나지 않을 수도 있으며, 고정 수입이 있는 것도 아니라 일을 쉬면 그대로 수입도 없어집니다. 그리고 앞에서도 말했듯이, 좋든 싫든 공부를 끊임없이 하게 되는 직업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번역가를 직업으로 택하기를 잘했다고 말하며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모두 자신이 번역한 책이 출판되었을 때를 가장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라고 꼽았습니다. 어떤 분 말로는, 책만 받으면 번역하면서 느낀 모든 불만은 싹 사라진다고. 사실, 저자 이름 바로 옆에 자신의 이름이 있는 느낌. 상상만으로도 짜릿할 것 같습니다. (여담으로, 경력 단절의 우려가 없다라는 장점은, 우리 사회에 대해 다소 씁쓸한 느낌을 준다)

유익한 조언들과 편안한 문체, 도서번역가는 이렇게 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던 재미난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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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덤, 어떻게 자유로 번역되었는가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야나부 아키라 지음, 김옥희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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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개인, 자유, 권리 등등. 

모두 현대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단어들이다. 심지어 방금 쓴 한 문장에도 '사회'가 사용되었다.  이 단어들을 쓰지 않는다면, 글 하나 제대로 못 쓸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단어들을 모르고서는 책 한 권 제대로 읽기도 힘들어진다. 그렇지만 이것들의 유래를 아는 것이 과연 어떠한 가치가 있을까? 야나부 아키라는 "학문과 사상에서 쓰이는 기본 용어가 일상어와 분리"된 현실을 지적하며, 이러한 개념어들이 책이나 공부할 때나 필요한 단어인 것처럼 여겨지는 현실에 안타까워 하지만, 왜 이를 알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뚜렷하게 말해 주지는 않는다. 


번역자 김옥희는 조금 더 설득력이 있는 대답을 해준다. "이 책에서 다룬 열 개의 개념어는 전부 우리말에서도 쓰이는 것들이다. 따라서 이런 번역어들 속에 '일본적'으로 변질되거나 가공된 서양의 개념들이 담겨 있다는 사실에 우리도 무관심할 수만은 없는 형편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단어는 사회, 개인, 근대, 미, 연애, 존재, 자연, 권리, 자유, 그/그녀인데, 앞의 6가지는 메이지 유신기에 만들어진 신조어이고, 나머지는 기존 일본에 쓰이던 일상어를 번역어로 새롭게 쓴 것이다. 모두 한국에서도 자주 쓰는 단어들이다. 일본에서 번역될 때 이미 한번 의미가 미묘하게 달라진 이러한 단어들을 한국은 다시 한국만의 역사적/문화적 맥락에서 수용하였다. 일종의 중역인 셈이다. 우리는 사실 단어들의 의미를 정확히 알지 못한채 사용할 수도 있다. 이 책이 우리에게 의미 있게 다가오는 지점일 것이다.


먼저 사회를 살펴보자. 사회, society에는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좁은 의미의 society로 동료나 친구들끼리의 사교, 모임, 둘째는 더 넓은 의미로, "같은 종류의 사람들끼리의 결합...조화를 이룬 공존을 목적으로 하거나 상호 이익, 방어 등을 위해 개인의 집합체가 이용하는 생활 조직이나 생활 방식"이다. 첫번째 의미는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문제는 society의 두 번째 용례였다. 이는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에는 없는 관념이었기에 번역하기 매우 까다로웠던 단어였다. 대응되는 관념이 없다는 것은, 그 관념을 반영하는 현실이 없다는 뜻이다. society를 이해하기 어려웠다는 것은, 일본에 society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socety의 번역은, 일본에 society를 만들겠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일본의 양학자들도 society의 의미를 좁은 의미의 사교 정도로만 알았지, 수평적 관계를 전제하는 넓은 의미의 society를 이해하지는 못했다. 후쿠자와 유키치 정도가 예외인데, 그는 society를 '인간교제'라는 말로 번역했다. 이는 우선 교제의 주체로서의 인간을 명확히 함으로써 society가 가진 포괄적인 의미를 사용하고자 한 것이다. 그의 의도는, society가 가진 수평적 관계의 요소를 일본에 만들어내려 했던 것이다. '인간교제'는 어느 정도 저항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단어였다. 왜냐하면, 봉건적 신분질서를 전제하지 않는 단어였기 때문이다. 후쿠자와는 나중에 '군신교제'라는 조어까지 시도하여 자신의 의도를 더욱 강화하였다. "교제는 인간에게도, 가족에게도, 군신에게도 통할 수 있는 상위의 개념으로 추상화되어 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정착된 단어는 오늘날까지 쓰이는 '사회'이다. 이는 모임을 의미하는 두 단어 '社'와 '會'를 합친 것인데, 각각의 단어 자체는 이전에도 쓰였던 것이고, 특히 '사'는 메이지 유신 직후 일본에서 일종의 유행어처럼 쓰였다. 그러나 두 단어를 아무 맥락없이 합쳐 놓은 결과, 두 단어가 가지는 고유한 의미가 없어져 버리고 society가 가지는 원래 의미에는 다가갔을지언정, 단어 자체가 너무나 추상적이어서 실질적으로 society와 "통하는 부분 역시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순엉터리 번역어가 정착된 것이다. 


유사한 과정이 individual의 번역 과정에도 나타난다. Individual은 서양에서도 그 용례가 오늘날과 같은 비슷한 것으로 확립된 것은 19세기 중반 존 스튜어트 밀에 의해서다. 밀의 <자유론> 제3장의 제목은 'individuality(개별성)'인데, 밀은 여기서 여론, 집단과 대조적인 의미로서, 어떠한 외적 권위나 요소에 의해서 침해받지 않는 인간의 가장 고유한 요소인 개별성을 옹호한다. 밀의 저서를 탐독했던 후쿠자와 유키치는 individual의 이러한 의미를 '사람'이라는 단어를 써서 표현하고자 했다. 그의 대표 저서 <학문의 권장>은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고, 사람 아래에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고 한다."라는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미국 독립선언서의 한 단락을 번역한 이 문장에서 그가 의미한 '사람'은 기존 일본에서 통용되던 의미가 아니라, 서양의 individual과 같은 의미, 즉 "신에 대해 혼자인 인간, 그리고 사회에 대해 궁극적인 단위로서 혼자인 인간"을 염두에 둔 것이다. 후쿠자와의 번역 방법론은 의미가 모호한 한자 조어를 만드는 대신 일상에서 쓰이는 단어를 차용하되, 거기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1876년에 출간된 <문명론의 개략>에 이르러서는, '독일개인(獨一個人)'이라는, 그의 기존 번역 원칙과 위배되는 한자 조어를 만들었다. 야나부 아키라는, 이때 후쿠자와 유키치가 사고의 한계에 부딪쳤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또 다른 대표작 <문명론의 개략> 제9장 '일본 문명의 유래'는 일본 사회를 분석하면서, 일본은 종교도, 학문도, 무사 계급도, 힘과 권력이 있는 자에게 붙어 약자를 억압하는 '권력의 편중' 현상이 너무 심각하다고 광범위한 비판을 날린다. 그가 봤을 때, 도쿠가와 시대까지의 일본은 정부, 다른 말로 지배자만 있었지 일본이라는 나라도 없었고 일본 국민은 더더욱 없었다. 모든 사람이 힘있는 사람에 의해 지배받는 일본의 상황에서는, society와 individual이 생길리 만무했다. 후쿠자와는 이러한 결론에 다다르면서 '사람'으로 individual을 표현하는 것에 한계를 느꼈고, 뜻이 모호한 '독일개인'이라는 번역어를 탄생시켰다. 이후 '독'과 '일'이 빠지고 '개인'이라는 단어가 정착된다. 그러나 수를 세는 단위를 뜻하는 '個'에 사람을 합친 단어는, 한자 감각에서는 대단히 어색한 조어였다. 후쿠자와는 독일개인을 통해 "자신의 사고가 겪고 있는 어려움이 해결되리라" 기대했지만, 그따위 엉터리 단어를 보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후쿠자와 같은 배웠다는 사람뿐이고, 서양의 사상을 번역을 통해 이해해야만 했던 사람들은 그 뜻을 단번에 알아차릴리 없다. 당장 그의 제자였던 유길준도 개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의미가 더 생생하게 전달되는 '인간교제'나 '인간' 같은 단어 대신 정착된 것일까? 저자 야나부 아키라는 매우 재미난 단어로 이를 설명한다. 카세트 효과라는 것이다. "카세트란 작은 보석상자를 의미하며, 내용물이 뭔지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매혹하고 끌어당기는 물건이다. '사회'도, 그리고 '개인'도 일찍이 이런 '카세트 효과'를 발휘한 단어였으며, 그 효고는 정도의 차는 있을지언정 오늘날의 일본인들에게도 여전하다고 나는 생각한다(50p)." 정확히 뭔지 모르겠지만, 뭔가 있어보이는 단어. 그것이 오늘날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쓰고 있는 개념어들의 모습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를 비롯한 일본의 지식인들은 "단어는 문제가 없다. 현실이 문제일 뿐이다."는 식의 번역적 연역논리에 도망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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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0-11-06 0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로운 내용이네요 ^^

김민우 2020-11-06 13:36   좋아요 0 | URL
네 얇지만, 내용이 알차고 주제도 흥미로워서 읽을만 합니다
 

좋은 책이 출판되었다. 

임진왜란은 단순히 조선과 일본 간의 전쟁이 아니라, 명나라까지 개입하였던 동아시아 국제 전쟁이었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명나라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였고, 관련된 책도 적었다. 그런 상황에서 명나라의 입장에서 임진왜란사를 기술한 이 책이 나온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1권의 부제는 출정 전야, 2권은 평양 수복이다. 아마 1권에서는 임진왜란 참전까지를, 2권에서는 평양 수복 등 실제 전투 과정을 담은 것 같다. 


"국립진주박물관은 임진왜란과 관련, 상대적으로 국역이 되어 있지 않은 중국 명나라와 일본의 자료들을 검토하였고, 이 과정에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명군의 최고 지휘관이었던 송응창의 <경략복국요편>과 형개(邢玠)의 <경략어왜주의(經略禦倭奏議)>에 주목하였다."


기왕에 말이 나왔으니, 임진왜란의 모습을 알 수 있는 당대의 기록들을 정리해보도록 하겠다. 


1. 이순신, 난중일기

첫 번째는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의 <난중일기>다.


서해문집의 번역은 가독성 좋게 번역되고 편집되어 읽어볼만하다. 


노승석 선생님의 번역이 아마 가장 최고의 번역본이지 않나 싶다. 이분은 난중일기 연구로 학위를 받으시고, 10년 넘게 난중일기 연구에 집중하신 권위자시다. 충실한 각주, 정확한 번역, 그리고 해제에선 난중일기의 판본을 전체적으로 검토하여 더 깊게 공부하고 싶은 분들에게는 안성맞춤인 책이다. 


<난중일기: 유적편>은 사진 자료를 늘려 조금 더 접근하기 쉽게 만든 판본인 듯하다. 


글항아리에서 나온 박종평의 <난중일기>는 <친필 일기>, <서간첩> 같은 자료들과 더불어, 이순신의 조카 이분이 쓴 이순신 전기까지 수록하였다. 1200쪽이 넘고, 가격도 6만원대라 부담스럽지만, 다른 데에서는 번역되지 않은 글들이 많아 한번쯤 읽어볼만하다. 







2. 류성룡 징비록

다른 번역본은 어떤지 모르지만, 일단 이 세 개의 번역본이 평가가 좋다. 


오른쪽부터. 

위즈덤하우스에서 나온 이재호 역본 징비록. 이재호 선생님은 조선사의 대가라 하신다. 

두 번째 판본은, 논형에서 나온 <판본비교 징비록>으로, 한학자들이 모여서 여러 판본들을 대조해가며 번역하였다. 그렇게 비교한 원문도 수록했다. 

마지막은 김시덕 번역의 징비록이다. 김시덕 선생님은 한중일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게 포괄적이고 입체적으로 동아시아의 역사를 연구하신다. 이 역본도 그러한 관점이 잘 드러나는데, 특히 일본이 어떻게 징비록을 수용했는지 알 수 있는 책이다. 


3. 고대일록

<고대일록>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책인데, 이 책도 무엇 못지않게 중요한 기록이다. 

이 책은 경남 함양의 의병장 정경운이 쓴 일기인데, 전쟁 상황의 모습을 소상히 적었으며, 정경운의 개인적인 감정과 생활상도 알 수 있어 <난중일기> 못지않은 전쟁 문학의 백미이다. 


서해문집 판본은 현재 아쉽게 절판되었다. 태학사에서 나온 <고대일록>의 번역자는 박병련, 설석규, 신병주, 정우락, 한명기 등 기라성 같은 연구자분들이 참여하셨다. 그러나 총 3권에 8만원이라 부담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고전번역원에 전문 번역이 되어있으니, 관심이 있다면 이쪽을 참조하시길!


4. 쇄미록

선비 오희문이 임진왜란 기간 동안 피난 생활을 하며 지은 일기를 묶은 책이다. (1591~1601)

다음은 문화재정의 책 소개 문구 인용

"장수현에서 보고 들은 각 지역의 전투현황과 각 의병장들의 활약상, 왜군의 잔인한 살인과 약탈행위, 명나라 군대의 무자비한 약탈과 황폐화, 전란에 따른 피난민사태, 군대징발, 군량조달 등 다른 자료에서 찾아보기 힘든 기사들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당시 민중의 생활상과 지방행정의 실태 등 임진왜란에 관계되는 사료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사회전반의 경제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들이 다양하게 포함되어 있으며, 민간인으로서 생활체험적 기록이기 때문에 더욱 그 가치를 더해준다."



5. 일본 측 기록

- 루이스 프로이스

루이스 프로이스는 16세기 후반 일본에서 활동했었던 예수회 선교사이다. 


<일본사>라는 방대한 분량의 역사서를 저술했는데,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도 가까이 지내 그들의 모습에 대해 알 수 있는 책이다. 단, 루이스는 임진왜란 때 직접적으로 한국에 오지는 않았기에 다른 이들을 통해 임진왜란에 대해 기록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 케이넨 

케이넨은 일본의 승려로, 정유재란 이후인 1597년 6월부터 1598년 2월까지 약 9개월 동안 조선에 군의관으로 종군한다. 

노예로 팔려가던 조선 인민들, 일본군의 만행으로 고통받던 조선 인민들의 모습에 가슴 아파하며, 그들의 고통을 증언한 책이다. 



6. 전쟁 문학 (일기 제외)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최척전>, <김영철전>, <강로전>, <전생기우기>를 수록하였다. 


역자인 박희병 선생님은 고전문학 전문 연구자이신데, 현재 남아 있는 모든 고전 자료를 비교하여 신뢰할 수 있는 번역본을 내놓으셨다. 


참고로 이 시리즈는 여러 권이 있으니, 고전 문학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찾아보시길 바란다. 



7. 임진왜란 관련 서적 추천

- 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도올옹 유투브 채널에 한명기 교수의 임진왜란 특강 총 8개의 동영상이 올려져 있는데, 임진왜란에 대해 전반적으로 그리고 깊이 알 수 있으니 같이 보시면 좋을 듯하다












- 김시덕


























- 임진왜란 동아시아 삼국전쟁

여러 학자들의 논문을 하나로 엮은 책이다. 존 B. 던컨 등 서양 학자도 참여했다.

김시덕의 책과 마찬가지로, 임진왜란을 조선의 관점뿐만이 아니라 일본, 명에 대해서도 분석했으며, 임진왜란이 누르하치에 미친 영향에 대한 글도 있다. 그리고 각국이 임진왜란에 대해 어떠한 기억을 가지고 있으며, 왜 그러한지에 대해서도 심도 있는 논의들이 이어져 임진왜란에 대한 이해를 한층 더 깊게 해준다. 






- 한반도 분할의 역사

이 책은 임진왜란만 다룬 것은 아니지만, 독특한 시각에서 임진왜란을 연구했기에 추천해본다. 임진왜란 중 명과 일본은 조선은 배제한 채로 강화협상을 하는데, 이때 일본측이 내건 조건 중 하나가 한반도 남부를 일본의 할지화였다. 그런데 그때 요구한 영토들을 보면, 오늘날의 38선과 얼추 일치한다. 어떤 의미에서 한반도 분할 구상의 시작이 임진왜란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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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버리다 -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가오 옌 그림, 김난주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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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김난주 옮김, 고양이를 버리다, 비채, 2020

 

이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쓴 매우 짧은 소책자이다. 하루키가 어린 시절 매일 봐오고 가장 기억에 많이 남던 아버지의 모습은, 아침마다 죽은 전우와 적이었던 중국인을 위해 경을 읊던 모습이다. 그 매일매일의 업무”(그것이 하루키의 아버지의 표현이다)를 할 때, 아버지의 모습은 너무도 엄숙하였고 강하게 몰두하여 말을 걸기조차 쉽지 않았다고 한다. 하루키의 아버지, 무라카미 지아키는 1917년생으로, 중일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을 군인으로서 겪었던 인물이었다.

 

1938년 그는 징집 통보를 받고 제16사단 치중병 제16연대에 배치되었고 중국에서 여러 전투에 참여하였다. 1939, 1년 만에 전역한다. 하지만, 전역한 지 1달 만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결국 그는 1941년에 다시 소집 명령을 받고는 처음에는 보병 제20연대에, 직후 제53사단 치중병 제53연대에 편입된다. 이 제53사단은 전쟁 말기에 임팔 작전에 참가한 부대였으며, 이라와디 회전에서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지아키가 속했던 제20연대도, 제16사단도 부대원 대부분이 전투 중 전사하고 만다. 처참한 전황 속에서 지아키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어떤 모종의 이유로 2달 만에 소집 해제되었기 때문이었다. 19456월 세 번째 소집 통보를 받아 국내 근무 부대로 배치되었지만, 2달 뒤 전쟁이 끝났다. 그는 목숨을 건졌다라고 회상했다고 한다.

 

지아키는 약 12개월간 전쟁을 겪었으며, 이는 원래 징집병의 의무 복무 기간인 2년보다도 짧은 기간이다. 그러나 그 시간이 지아키의 인생에 남긴 자국은 평생토록 남았다. 그는 다행스럽게도 살아남았지만, 그가 소속되었던 부대의 부대원들은 대부분이 전투 중에 전사하였다. “혼자만 목숨을 건지고 과거의 동료 병사들이 그렇게나 먼 남방의 전쟁터에서 허망하게 목숨을 잃어간 것”. 이 사실이 무엇보다 그를 힘들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마음에 새겨진 또 하나의 전쟁 경험은 중국인 병사 포로의 처형이었다. “중국 병사는 자신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소란을 피우지도 않고, 그저 눈을 감고 조용히 거기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참수되었다.하루키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말이다. 하루키의 기억이 애매하게 남은 탓에 정확히 그것이 무슨 상황이었고, 지아키가 무슨 감정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것이 그가 유일하게 아들에게 속내를 털어놓은 경험이었다는 데에서 추측건대, “그의 마음에 크나큰 응어리였음은 사실일 것이다. 죽은 전우들, 비록 적이지만 전사한 중국의 병사들. 그는 이들을 위해 매일 아침마다 그토록 엄숙하게, 마음을 다하여 경을 읊었다. 평생동안 지아키의 마음속에서 그들은 떠난 적이 없던 것이다

 

한국은 바로 67년 전까지 전쟁을 치룬 국가이고, 오늘날까지도 한국전쟁을 겪으신 분들이 생존해 계신다. 한국전쟁 자체는 휴전 상태이지만, 전쟁이 남긴 잔상은 아직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하루키가 전달하고자 한 전쟁이 한 인간의 삶과 정신을 얼마나 크고 깊게 바꿔놓을 수 있는가라는 메시지는, 한국에도 유효한 메시지로 읽을 수 있겠다. 나에게는 할아버지/할머니 세대, 나의 아버지/어머니 세대에게는 자신들의 아버지와 어머니 세대의 이야기가 이 책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


그는 책의 말미에서 '나'라는 존재는, 아주 우연하게 생겨난 하나의 빗방울이라고 말한다. 이 빗방울 하나하나에는 저마다의 역사가 있다. 그는 그 역사를 계승되어 이어가야 함을 역설한다. 

하나의 정경으로, 더 나아가 하나의 의사 체험으로, 달리 말하면, 아버지 마음을 오래 짓누르고 있던 것을 아들인 내가 부분적으로 계승한 셈이 되리라.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이어지는 것이고, 또 역사라는 것도 그렇다. 본질은 ‘계승’이라는 행위 또는 의식(儀式) 속에 있다. 그 내용이 아무리 불쾌하고 외면하고 싶은 것이라 해도, 사람은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 P51

한 방울의 빗물에는 한 방울의 빗물 나름의 생각이 있다. 빗물 한 방울의 역사가 있고, 그걸 계승해간다는 한 방우로서의 책무가 있다. 우리는 그걸 잊어서는 안 되리라.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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