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에 출간된 책 중에서 올해의 책을 보통 고르지만, 나는 올해 출간된 책을 많이 읽지 않았기에 22년에 내가 읽은 책 중에서 올해의 책을 골라봤다. 순서는 그냥 무작위로 적은 것이다.


  1. <옥스퍼드 세계사>, 교유서가, 2020

문명사가 아닌 진정한 의미의 글로벌 히스토리를 쓴, 현 시점에서 가장 완벽에 가까운 세계사 서적이다.




2. 토니 주트, <재평가>, 열린책들

6~7월에 읽으면서 대가의 필체에 감탄하면서 역사의식의 중요성에 대해서 지적 자극을 많이 받았던 책이다. 특히, 20세기의 역사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에 대해 많은 참조가 되었다.








3. 이정철, <권력 이동으로 보는 한국사>, 역사비평사

이 목록에 있는 다른 책은 서평을 썼는데, 이 책만 서평을 쓰지 않아 조금 자세히 감상을 말해보려 한다.

이 책은 올 1월에 사서 부분부분 읽다 2월에 완독하였다. 이때는 알다시피, 한국에서 중요한 사건을 앞두고 있던 때였다. 한치 앞을 알지 못하던 그때에, 여론의 대세는 지난 5년에 대한 비판적, 회의적 평가였다. 나 자신에게도 과연 그간 개혁은 옳았을까? 라는 물음이 가시지 않았던 때 이 책을 읽었다.(이정철 교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사 연구자이기도 하다, 이분이 쓴 단독 저술은 다 소장하고 있다)

이 책은 7세기경 삼국시대부터 조선왕조의 성립 때까지 정치적으로 중요한 개혁이 행해졌던 역사적 국면을 촘촘히 다룬 책이다. 저자는 아직 개혁이 옳았는지 논하기에는 이르다면서 이 책을 통해 개혁은 어떤 과정을 통해 일어났는지 설명한다.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현재의 정국을 염두에 둔 서술도 많이 보이며, 다각적으로 한국사의 중요한 정치적 전환기를 살펴보는 저자의 촘촘하고 섬세한 분석에 흐릿한 머릿속이 또렷해졌다. 좋은 책은 읽으면 머리가 개운해진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이 내 올해의 책이다.





4. 마사 누스바움, <시적 정의>, 궁리

문학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이론적이면서도 감동적인 필체로 잘 서술하였다. 문학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새로운 감각을 일깨워줄 것이다.

​마사 누스바움은 (흔한 출판사의 상술 문구가 아니라 정말로) 문예이론, 정치학, 페미니즘 이론 등에서 뛰어난 업적을 많이 남긴 학계의 석학인데, 그녀의 다른 저서도 번역이 많이 되어 나왔다.






5. 폴 우드러프, <최초의 민주주의>, 돌베개

매우 탁월한 민주주의 입문서. 민주주의 이념을 일곱 가지로 간결하지만 대범하게 정리하면서도, 주요 논점들을 놓치지 않았다. 민주주의를 공부하고 싶다면, 우선 이 책의 내용부터 숙달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자주 다른 책의 내용과 연결 짓게 되었는데, 좋은 책은 역시 다른 좋은 책들을 불러온다.



6. 매슈 윌리엄스, <혐오의 과학>, 반니

혐오가 만연한 현재에, 혐오와 혐오범죄의 원인과 그 심리를 이해할 수 있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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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는 영화사에서 길이남을 걸작일 뿐만 셰익스피어의 드라마나 그리스 비극과도 같은 인류의 고전이다. 무엇을 고전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고전은 우선 잘 만들어진 이야기다. 이야기란 재현(mimesis)이다. 이때의 재현은 복사기처럼 대상의 모든 부분을 완벽하게 똑같이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이야기의 창작자는 자신이 드러내고자 하는 특성을 부각하여 자신이 만든 인물과 세계에 투영한다. 그리고 단순히 투영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처음과 중간과 끝이라는 형식에 맞추어 인물의 행동과 심리를 묘사해야 한다. 즉, 고전이 되기 위해서는 내용과 형식이라는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야기의 수용자는 잘 짜여진 고전을 보며 인간 존재의 어떤 특성을 이해할 수 있게 되고, 나아가 나 자신에 대해서도 성찰할 수 있다. <대부>를 고전이라 부른다면,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겠다. <대부>는 무슨 이야기이며, 그 주인공은 어떠한 인간형을 보여주며, 최종적으로 어떠한 주제를 전달하고자 하는가.

<대부>는 마이클 콜레오네의 파멸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주인공 마이클 콜레오네는 가족을 위해 폭력의 세계에 발을 담궜다가 타락해버리고 만다. 마이클 콜레오네의 아버지 비토 콜레오네는 뉴욕 5대 마피아 조직 중 하나인 콜레오네 패밀리를 이끄며, 본명보다도 통칭 '돈 콜레오네' 혹은 '대부'라고 더 많이 불리운다. 비토는 목적을 위해 협박이나 살인 등 온갖 수단도 가리지 않는 잔혹함을 보이지만, 누구도 반항하지 못하게 하는 카리스마와 지도력, 그리고 자신의 편에게는 한없이 인자한 인망을 보유하고 있다. 그는 인격적 관계를 맺은 사람의 부탁은 들어주면서도, 자신의 적에게는 총을 들이밀 줄도 안다. 그런 그에게는 소니, 프레도, 마이클, 코니, 이렇게 네 명의 자녀가 있는데, 그의 자녀들도 조직의 일에 몸 담고 있었다. 그러나 마이클은 예외였다. 마이클은 아버지가 음지에서 하는 활동을 알고 있었지만, 늘 거기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가족과 거리를 두며 살아왔다. 그는 콜레오네 가족 중 유일하게 범죄에 연루되지 않았고, 전쟁에 참전하여 공을 세운 전쟁 영웅이었을 뿐만 아니라 연인 케이 애덤스에게 한없이 자상한 남자였다. 비토 역시 그가 자신처럼 되지 않기를 원했다. 마이클은 그렇게 살았을 것이다. 그 일만 없었다면.

비토 콜레오네는 마약상 바질 솔로초의 마약 사업 합루 제안을 거절한다. 비토는 바질을 감시하기 위해 자신의 부하를 스파이로 보내지만, 바질과 손을 잡은 다른 뉴욕 마피아 세력인 타탈리아 패밀리에 의해 부하를 잃고 비토 자신도 총격을 당해 사경을 헤매게 된다. 일련의 사건이 벌어지는 동안 마이클 콜레오네는 케이와 데이트를 즐기다가 길거리 신문에 아버지의 사고 소식을 접했고, 아버지를 쏘고 가족을 위험에 빠뜨린 이들에 대한 복수를 다짐한다. 마이클 콜레오네는 연기한 알 파치노는 캐릭터에 대한 깊은 이해와 자신의 풍부한 연기력으로 이를 표현한다. 마이클은 이 시점부터 웃지 않게 되고, 그의 표정은 한결같이 차가워진다. 이제 그에게서 이전과 같은 인간적인 모습은 볼 수 없게 된다. 관객은 마이클의 내면에 무언가 변화가 생긴 것을 감지한다. 그는 이전의 선한 마이클 콜레오네가 아니다.

마이클 콜레오네가 본래 멀리하였던 패밀리의 일에 연루되면서 <대부>의 본격적인 이야기가 펼쳐진다. 가족이 큰 위험에 빠질수록 마이클은 패밀리의 일원이 되고, 그럴수록 그의 영혼도 타락해버린다. 그 표정처럼 냉철한 판단력으로 마이클은 콜레오네 패밀리가 처한 난국을 타개할 방법을 궁리한다. 결국 마이클은 바질 솔로초와 그의 뒤를 봐주던 경찰 서장을 총살하고 시칠리아로 피신한다. 마이클은 안전한 시칠리아에서 몸을 숨기고 있었지만, 뉴욕에서는 바질의 사망으로 마피아 세력 간 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콜레오네 패밀리의 장남인 소니가 기습을 당해 사망해버렸다. 가족이 한 차례 더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 비토는 총격 때문에 아직 회복 중이다. 차남 프레도는 믿음직스럽지 못하고, 여성인 코니는 애초에 패밀리의 일을 맡아본 적 자체가 없다. 이 상황을 어떻게든 해결하여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는 마이클밖에 없다. 마이클은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고 비토의 뒤를 이어 콜레오네 패밀리의 새로운 '돈 콜레오네'가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토 콜레오네도 사망한다. 마이클 콜레오네는 아버지의 사망을 계기로, 가족의 위협이 되는 마피아 세력의 두목을 모두 처치하기로 결심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세례식 장면'이다.

장소는 한 성당. 마이클은 코니와 카를로 사이에서 난 아들의 세례식에 아이의 대부로서 참석한다. 아이의 맑은 울음소리와 유아세례식을 준비하는 신부의 분주한 손이 교차되는 이 신성하고 경건한 가족행사 바깥에서는 뉴욕 5대 두목의 처형식이 준비되고 있었다. 코폴라 감독은 교차편집을 치밀하게 활용하여 무의식적으로 두 이야기 사이의 연관을 확립하고 유아세례식과 처형식의 대비를 더욱 선명히 한다. 세례식과 처형식은 서로에 대한 거울이다. 신부가 세례용 기름을 가지러 카메라 왼쪽으로 이동하면, 그 다음 쇼트에서 카메라 오른쪽에 있는 신부의 손이 아이의 얼굴에 기름을 뿌린다. 그 다음 씬에서 이발사가 카메라 왼쪽에서 면도용 크림을 가지러 가고, 카메라 오른쪽에서 이발사는 마이클의 부하에게 면도 크림을 바른다. 이러한 연출을 통해 감독은 서로 다른 두 공간의 서사를 하나로 이어지게 만든다. 그리고 두 서사의 중심에 마이클 콜레오네가 있다. 마이클은 세례식을 관찰하며 참여한다. 하지만 코폴라가 연결시킨 두 서사에서 마이클의 눈은 또한 처형식을 응시하고 있기도 하다. 그는 부재하면서 부하들에게 감시한다. 그는 세례식에서 사탄의 유혹을 끊어내겠다고 선언함과 동시에 꼴레오네 패밀리의 적들을 끊어낸다. 이런 연출이 지시하는 것은 명백하다. 직접적으로 마피아 두목을 죽인 것은 부하들이나, 실질적으로는 마이클 콜레오네가 그들을 죽였다. 가장 경건한 장면과 가장 폭력적인 장면이 교차되는 이 시퀀스에서 마이클은 불안해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그저 차갑게 눈앞의 상황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패밀리를 배신한 살 테시오와 가족을 배신하여 소니를 죽게 만든 매제 카를로도 살해한다. 바로 그 카를로 아들의 세례식 날에. 마이클 콜레오네는 더 이상 '대학생 샌님'이라 놀림받던 선한 인물이 아니라 가족을 지키기 위해 어떤 짓이라도 저지를 수 있는 냉혈한 마피아 조직의 보스가 되었다.

세례식 시퀀스를 길게 서술한 이유는 이 장면이 <대부>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를 직설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마이클 콜레오네가 마피아 세계에 가담하게 된 동기는 아버지와 큰형의 사망으로 위태로워진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의 행위 목적에는 언제나 가족이 있었다. 그 목적은 정당하고 선한 것이었지만, 그 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마이클이 택한 수단은 살인과 폭력이었다. 그러한 선택의 결과는 마이클의 영혼의 타락이다. 왜냐하면 마이클이 서로 모순된 두 세계에 몸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그와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의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마피아 패밀리의 세계이다. 두 세계에 사는 마이클은 또한 두 개의 정체성을 가진다. 한 가정의 아버지라는 정체성과 마피아 조직의 두목이라는 정체성. 마이클의 행위 목적은 전자의 세계와 정체성이나 그 수단은 후자의 세계와 정체성이다. 그렇지만 가족의 세계와 폭력으로 돌아가는 마피아 패밀리의 세계는 양립할 수 없다. 마이클의 목적과 수단은 애초부터 조화를 이룰 수 없었던 것이다. 마피아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피는 피를 부른다'라는 인과응보적 폭력의 원리이다. 누군가를 죽이면, 더 큰 복수를 불러오고, 그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는다. 이러한 폭력과 복수의 연쇄에 빠져들면 거기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때문에 그가 이 세계에 더 깊이 연루될수록 사실 가족을 더 위험에 빠뜨리게 된다. 따라서 그의 목적과 수단은 처음부터 내재적으로 붕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목적과 수단의 이율배반으로 인하여, 가족을 지키기 위해 폭력을 사용한 대가로 마이클의 내면은 파탄나고 역설적으로 그 때문에 가족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된다. 마이클을 '돈 콜레오네'라 부르며 그의 손에 입을 맞추는 부하들과 이 광경을 불안하게 쳐다보는 케이 애덤스의 흔들리는 눈빛이 두 세계의 금방이라도 무너질듯한 위태로운 긴장을 드러낸다.

그 파탄과 모순은 <대부> 제2편에서 절정에 이른다. 2편에서도 마이클을 움직이는 원리는 하나다. 가족 혹은 패밀리를 배신하고 위협하는 존재를 가만두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가족에게 총을 겨눈 하이먼 로스를 잔혹하게 살해하고, 오해가 있어 패밀리를 배신했던 프랭크 펜탄젤리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 명령하였으며, 더 나아가서는 자신의 형인 프레도마저 사살한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가족을 죽인 것이다. 심지어 프레도는 굳이 죽이지 않았어도 되었다. 어머니는 형제간의 갈등을 싫어하였고, 코니도 프레도를 용서해달라고 빌었다. 마이클은 프레도를 용서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어머니의 장례식 이후에 프레도를 죽인 것이다. 이 지점에서 그 모든 행위를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마이클의 논리는 도저히 해결될 수 없을 정도로 모순된다. 심지어는 마이클 자신도 이 때문에 고민한다. 2편 후반부에 마이클이 어머니에게 자신의 고민을 토로하는 장면은, 1~2편을 통틀어 유일하게 그가 자신의 내면을 고백하는 중요한 장면이다. 그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강해지다가 가족을 잃어버리지는 않는지를 묻는다. 어머니는 가족은 잃을 수 없다 하지만, 실제 벌어진 사태는 달랐다. 케이 애덤스는 변해버린 마이클에 실망하고 질려버려 그를 떠나버렸다. 마이클이 친형처럼 여기던 집안의 고문 톰 헤이건도 강압적인 그의 일처리 방식에 불만을 품는다. 하나 남은 친형 프레도는 마이클이 죽였다(정확히는 암살 지시를 내린다). 그의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이 모순된 남자의 삶의 끝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바로 그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 가족의 상실이다. 이것이 제3편의 주제이자 플롯이다. 3편은 마이클의 속죄와 인과응보의 이야기다. 그는 불법적인 사업을 대부분 정리하여 합법적인 사업으로 전환하였고, 그의 사업은 승승장구하지만 그의 내면은 공허하다. 마이클 콜레오네는 육체적으로나 심적으로나 늙고 지치었다. 친형을 죽였다는 죄책감은 그를 고통스럽게 하였고, 평생을 냉혈한으로 살았던 탓에 모든 가족에게 외면받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마이클은 자신의 삶에 회의를 느낀다. 이제 그에게 유일한 삶의 희망은 딸 메리 콜레오네뿐이다. 메리 콜레오네는 아버지가 그토록 위험한 세계의 인물임을 알지 못한다. 마이클이 딸에게만큼은 자신의 과거를 숨긴 것이다. 메리는 비토 콜레오네 재단의 이사장으로 일하면서 아버지의 사업을 도와주는데, 그에게 마이클은 사랑하는 아버지이다. 마이클에게 딸은 자신이 몸 담고 있던 세계를 영원히 모르고 또 이쪽 세계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하는 존재이다. 그렇기에 그는 메리가 패밀리의 일원인 빈센트와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을 막을 수밖에 없었다. 메리는 순수하며, 더럽고 음험한 마피아 세계에 물들지 않은 가족의 세계에 속한 인물이다. 따라서 마이클에게 메리는 자신이 그토록 지키고자 한 '가족'이라는 목표의 최후의 보루였던 셈이다.

하지만 마이클이 완전히 마피아 세계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이 목표와 안정은 지킬 수 없다. 그리고 이미 폭력의 세계에 너무 깊이 연루된 마이클로서는 애시당초 그 목표를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아들 앤소니의 오페라 데뷔 공연을 계기로 케이와 관계를 개선하고, 빈센트에게 '돈 콜레오네'직을 물려주면서 마피아 세계에서 은퇴한다. 그렇다고 이 남자의 불행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아들의 오페라 공연날, 마이클을 죽이려 하는 암살자가 그를 향해 총격을 가한다. 마이클은 부상을 입는 정도로 끝났지만, 그의 딸 메리가 암살자의 총에 맞고 사망하고 만다. 왜 마이클이 아닌 그녀가 죽었을까? 이것은 앞서 말한 폭력이 지배하는 세계의 인과응보의 원리 때문이다. 모든 선택에는 대가가 따르고, 살인의 대가는 또 다른 사람의 목숨이다. 마이클이 그동안 저질렀던 끔찍한 죄들은 그가 마피아를 그만두었더라도 남아 그에게 죄값을 물었다. 그리고 그 대가는 자신이 가장 지키고 싶어했던 가족의 목숨이었다. 이것이 잔혹한 마피아 세계의 보스이자 한 가족의 아버지라는 모순된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았던 이 남자의 불행의 결말이다. 마이클은 피범벅이 되어 쓰러진 메리를 품에 안으며 서글프게 울부짖는다. 어떻게든 지키려 했던 세계가 무너져내려 절규하는 마이클의 모습은 시체가 되어버린 딸 코델리어를 안은 리어왕의 마지막 대사를 떠올리게 한다. "개도, 말도, 쥐새끼도 목숨이 있는데, 그런데 너는 숨이 전혀 없다? 넌 더 이상 오지 않겠지, 결코, 결코, 결코, 결코, 결코."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비극적 주인공이란 "덕과 정의에 있어서 월등하지는 않으나 악과 죄업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떤 결점에 의해서 불행에 빠지게 된 인물"이라고 정의한다. 비극의 주인공은 덕망이 높은 인물이어서는 안 되고 반대로 <추격자>의 지영민(하정우)처럼 극악무도한 인물이어서도 안 된다. 이 양극단 사이에 위치한 인물이 비극의 주인공에 어울리는데, 이 정의에 따르면 마이클 콜레오네를 비극적 주인공으로 규정할 수 있다. 그는 월등한 덕성과 정의감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으며, 가족을 잃고 홀로 사망한다는 불행한 최후를 맞이한다. 그러나 이 경우 불행한 결말을 초래한 원인은 그의 범죄행각보다는 앞서 말한 목적과 수단 사이의 이율배반 때문이다. 즉, 마이클에게 있어 불행은 폭력을 휘둘렀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고 폭력이 지배하는 마피아 세계와 평화로운 가정의 세계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 성취하려 했다는 데에 있다. 물론 그는 패밀리의 사업을 합법적인 사업으로 바꾸어 폭력의 세계에서 벗어나고자 하나, 그 과정에서 불가항력적으로 폭력을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한다. 가족의 위험 앞에 그는 어쩔 수 없이 계속 폭력의 세계를 지배하는 대부가 된다. 하지만 앞서 서술했듯이, 두 세계 사이의 균형과 안정은 성취될 수 없다. 그렇기에 마이클은 가족을 위해 행동하지만, 그 대가로 가족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돈 콜레오네'를 내려놓으면서 그는 빈센트에게 이렇게 말한다. "한번 빠지면 돌이킬 수 없다. 평생 이 바닥을 벗어나고자 노력했어. 가족도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고." 이것이 마이클이 추구한 목표였다. 하지만 그 목표는 폭력의 세계에 들어간 이상 도저히 달성될 수 없었고, 결국 그를 파멸로 이끌었다. 이렇게 본다면 그는 자신이 만든 출구 없는 미궁에 스스로 갇히어, 안정을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나, 그렇게 발버둥칠수록 더욱 깊이 미궁 속으로 빨려들어가게 된 비극적 인물이다.

이러한 마이클 콜레오네의 파멸의 이야기를 표현한 <대부>는 현대의 비극이다. <대부> 이후 작품의 주제나 캐릭터, 연출을 오마주한 영화들이 많았지만(<신세계> 등), 느와르 장르의 쾌감을 치밀한 연출과 형식으로 선사하면서도 인물의 내면과 주제를 이토록 웅장하고 장엄하게 표현하여 하나의 비극으로 승화한 작품은 <대부>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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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가 위대한 이유에는 몇 가지가 있다. 그는 우선 애니메이션 창작자로서 위대하다. 완벽주의는 창작자 미야자키 하야오를 수식하는 대표적인 말이다. 그는 캐릭터 디자인, 스토리, 원화, 연출, 컷씬 하나하나에까지 직접 개입하여 자신의 마음에 들 때까지 제작하였다. 그의 작품을 디즈니와 비교했을 때 더 돋보이게 만드는 것은 하야오의 작품관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애니메이션을 그저 아동만을 위한 매체에서 남녀노소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직품으로 변모시켰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하야오가 작품에 자신만의 독특한 사상과 가치관을 주입하는 데 망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전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반전', '생태주의', '여성주의'이다. 그는 자신이 관철해온 가치관을 애니메이션 속에 명확하게 담아놓으면서도, 치밀한 연출과 매력적인 캐릭터들, 탁월한 연출과 심리 묘사 등으로 영화적 재미까지 놓치지 않는다. 그래서 하야오의 애니메이션들은 그 자체로 재미있지만, 특유의 깊이까지 더해질 수 있었다. 주제의식 면에서 절정에 이른 작품이 <모노노케 히메>라면, 오락성과 작품성 무엇 하나 빠지지 않고 가히 최고라 칭할 수 있는 작품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자신에게 보내지는 그 어떤 찬사도 받을 자격이 있는 20세기 최고의 애니메이터이다.




하야오가 위대한 두 번째 이유는 일본제국이 저지른 과오들을 미화하지 않고 그대로 직시한다는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일본 사회의 성찰자이다. 과거를 잊으려 하고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 사회에 하야오는 작품 내외적으로 쓴소리를 보냈다. 하야오는 일본 정부가 식민지와 전쟁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사과조차 하지 않는 행태를 혹독하게 비판하고, 제국일본이 자행한 학살을 묵인하고 자신들을 피해자로만 인식하는 역사관을 소리 높여 비난한다. 반전이라는 주제도 자신이 오롯하게 살아낸 20세기 일본의 역사에 대한 성찰을 담아낸 것이다. 저무는 일본의 초라하고 사악한 역사•전쟁인식이 사회적으로 공유되는 이때에, 하야오의 같은 청아한 도덕의 목소리는 참으로 귀중하다.

그리고 <바람이 분다>를 통해서 우리는 하야오가 위대한 세 번째 이유를 알 수 있다. <바람이 분다>는 하야오를 오래토록 괴롭힌 문제에 대한 답변이자, 하야오의 삶과 현대 일본을 들여다볼 수 있는 허가증이다. 이 작품은 하야오의 은퇴작이다. 비록, 지금으로서는 그의 다른 만년작처럼 이 영화도 '하야오의 은퇴작이 될 뻔했던 작품'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지만 여러 면에서 하야오가 <바람이 분다>를 자신의 마지막 작품으로 진지하게 생각했음을 알 수 있는 몇 가지 근거가 있다. 우선 그는 육체적으로 너무 늙었다. 1941년생인 그는 이 영화를 작업하던 때에 이미 70세를 넘긴 고령이었다. 그는 이전처럼 제작의 전 과정에 개입하기에는 체력적으로 무리가 많았다. 또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녹아내리는 플롯에서 볼 수 있듯이, 창작 면에서도 하야오는 더 이상 이전과 같지 않았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최정점을 보여준 이후 그의 작품은 이제 치밀하지도 완성도가 높지도 않았다. 따라서 <벼랑 위의 포뇨>가 개봉되고 5년이 지난 뒤 제작한 <바람이 분다>를 자신의 진정한 은퇴작이라고 여겼음은 틀림없다.

이런 점 때문인지 <바람이 분다>는 자전적이며 고백적인 분위기를 띤다. 이 영화는 실존했던 비행기 설계사 호리코시 지로, 호리 타츠오의 소설 <바람이 분다>(본작의 원작이기도 하다), 그리고 미야자키 하야오 자신을 모티프로 삼아 새롭게 창작해낸 캐릭터 '호리코시 지로'라는 비행기 설계자가 '하늘을 자유롭게 날고 싶다'는 꿈을 이루어나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이다. '지로'는 부분적으로 미야자키 하야오이지만, 하야오는 이 인물에 자신을 완전히 투영하지 않는다. 세 모티프는 마치 기독교의 삼위일체처럼 상호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상호독립적이다. 그러므로 지로를 보면서 특정 장면의 지로가 미야자키 하야오인지, 실존 인물 호리코시 지로인지를 엄격히 분리할 필요는 없다. 그만큼 삼자는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지로와 비행기의 관계는 미야자키 하야오와 애니메이션의 관계를 은유한다고 볼 수 있다. 기술과 재정 모든 면에서 열악한 일본의 환경에서 독일과 미국 같은 기술선진국에 뒤지지 않는 자신의 비행기를 완성하려고 노력하는 지로처럼, 하야오가 지로와 같은 열정으로 애니메이션 제작에 임했다. 지로는 결국 비행기 제작에 성공하는데, 이러한 지로의 인생역경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애니메이터로서 자신의 삶을 흡족하게 회고하면서 내린 결론이지 않았을까?

그런데 이 영화는 그렇게 낭만적으로만은 해석될 수 없다. 무엇보다 역사적 사실이 그러한 해석을 용인하지 않는다. 호시코리 지로는 '제로센'이라는 전투기를 개발한 인물이다. 제로센은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일본의 자살특공대 '카미카제'가 사용하던 전투기로, 일본제국의 전쟁수행에 동원되어 동아시아 전역에 막대한 인명피해를 가져왔고, 이 비행기에 탑승한 일본의 수많은 젊은이들의 목숨도 앗아갔다.(이에 대해서는 오오누키 다카시의 <죽으라면 죽으리라>와 <사쿠라가 지다 젊음도 지다> 침조하라) 이런 끔찍한 역사를 가진 전투기와 그 전투기를 발명한 인물의 인생을 그저 꿈 많은 순수한 청년의 성공기로 해석하는 것은, 어둠의 심장과 같았던 20세기의 역사를 외면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둘째로 이 영화 자체가 낭만적 해석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 하야오는 때로는 노골적으로, 때로는 은연 중으로 제국 일본의 전쟁수행을 비판한다. 이 영화는 지로의 전투기 개발 성공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 뒤가 더 있다. 자신의 전투기가 시험 비행에 성공하는 그때, 지로는 놀란 표정으로 먼 산을 바라본다. 이 씬 뒤에 폭격으로 불타는 도쿄의 모습이 이어지고(아마 도쿄대공습을 묘사한 것이리라) 지로의 꿈 속으로 씬이 전환된다. 이 지로의 꿈 씬은 영화 전체의 메시지를 해석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지로는 꿈 속에서 자신의 우상인 카프로니 백작과 만나 대화를 나눈다. 지로는 자신이 개발한 비행기가 전쟁에 이용되고 살상무기가 된 것에 회의를 느낀다. 무언가 체념한 듯한 표정의 지로는 지긋이 하늘을 응시하고, 그런 지로의 앞을 제로센 12대가 지나간다. 이들은 카미카제 특공대이다. 지로는 백작에게 말한다. "저 비행기를 탄 이들은 돌아오지 않아요" 그러자 백작이 이렇게 말한다. "비행기는 저주받은 꿈이야" 지로는 순수하게 비행기만을 추구하던 꿈 많은 청년이었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은 이 지로의 꿈을 이용하고 짓밟아버렸다. 지로의 꿈과 노력이 저주받았다는 말은 순수한 열정과 별개로 어떻게든 전쟁에 이용될 수밖에 없었다는 그 비참한 운명에 있다. <바람이 분다>는 결코 전쟁을 미화하거나 그 시절의 향수에 빠져 과거를 낭만화하는 류의 작품이 아니다. 여기서도 반전이라는 주제가 전면적으로 등장하며, 하야오는 결코 이를 타협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이 작품은 논쟁적이다. 전쟁 미화는 아니더라도 제로센의 개발자 지로를 미화하고 그의 전쟁책임을 면해주는 것이 아닌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 영화의 본질과 맞닿아 있으므로, 이를 차근차근 살펴보겠다.

앞서 말했듯, 미야자키 하야오는 <바람이 분다>를 통해서 자신의 오랜 고민에 답하고자 했다. 지브리의 프로듀서 스즈키 토시오는 하야오에게, 반전주의자면서 전쟁무기를 좋아하는 모순을 설명할 때가 되었다고 말했고, 하야오도 그 필요성에 동의하였다. 전쟁은 싫어하지만 전쟁에 사용된 무기는 좋아하는 아이러니는 하야오를 오래동안 괴롭힌 고민이었다. 그는 대학 강의에서 전쟁의 참혹함을 깨닫고 자신이 모아둔 무기서적들을 다 버릴 정도로 전쟁을 반대했지만, 얼마 뒤 무기 관련 서적이 보이면 다시 모으기 시작하는 밀리터리 매니아였다. 이 두 모순된 자아 사이에서의 갈등은 반전을 말하면서도 정작 전쟁을 실존적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문제의식이 전제되어 있다. 하야오에게 있어 이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드는 요소는 일본인이라는 특수성이었다. 전범국가 일본에서 태어나 전쟁무기를 탐닉하는 것은 단순한 기호의 문제로 정당화될 수 있을까? 그것도 전쟁을 비판하는 인물이.

미아자키 하야오가 자신의 일본인성까지 문제 삼았으니, 하야오 개인의 고민은 일본인 전체로 확대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원인이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는 초국가주의적 심성 때문이든(마루야마 마사오), GHQ와 샌프란시스코 조약 체제로 이어지는 역사적 기억 때문이든, 제국 일본의 기술 관료들이 전후 일본의 정계를 장악한 탓이었든(제니스 미무라), 그 무엇 때문이든 일본 전쟁인식과 역사의식은 엉클어져 있다. 일본의 책임 문제는 여전히 미해결로 남아있음에도 이 문제는 빠르게 망각의 영역으로 들어가고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밀리터리 '덕후'들을 강도높게 비난한다. 밀덕들은 전쟁사와 무기에 관심이 많으면서도, 전쟁이나 자신들의 역사에서 무언가를 배운거나 성찰하고 반성하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하야오가 봤을 때 이는 형용모순이며, 잘못된 현상이다. 물론 전쟁무기를 좋아한다고 모든 이가 호전주의자인 것은 아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처럼 그들도 전쟁에 반대할 것이다. 그러나 전범국가로서의 역사를 간직하는 공동체에 실존을 두는 이들이 자신들의 삶을 전쟁과 분리시켜서 살아갈 수 있을까? 그것이 가능하다 해도, 이런 삶은 올바른 삶일까? 자신의 삶이 전쟁과 어떤 식으로도 연결되어 있다는 자각적 성찰 없이는, 반전의 외침은 원론적 차원에서 그치고 윤리적 성찰로 이어지지 못한다.


방해없이 휴식을 취하는 반전운동의 역사는 이미 일본의 역사에서 증명된 적 있다. '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이하 베헤렌)의 역사가 그러하다. 1960년대 베헤렌은 프랑스 68의 동시대적 반응으로 일어난 일본의 전국적인 반전 시민운동으로, 이 운동의 가장 큰 특징은 누구의 주도도 없이 평범한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만으로 운동이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학생, 회사원, 가정주부가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베트남에서 벌어진 전쟁을 반대했다. 베헤렌의 활동은 일본 시민사회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순간이며,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소중한 유산이다. 하지만 베헤렌의 한계는 명백했다. 한국 다음으로 베트남전쟁으로 가장 많은 전쟁특수를 누린 국가가 일본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하였기 때문이고, 이 양심적 시민들이 10년 전 한국전쟁 때는 침묵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어떤 평자는 베트남전쟁을 가리켜 일본의 지갑과 양심을 채워준 사건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바로 옆 나라 한국의 전쟁은 모른 척하고 거리상으로 훨씬 먼 베트남의 전쟁에 반응한 이 양가적인 윤리적 괴리는 베헤렌의 가장 큰 한계이자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무시하는 반전주의자의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베트남전쟁이 일본인의 양심과 지갑을 만족시켜주었듯, 제국일본의 전쟁은 일본인의 기호와 양심을 만족시켜줄 것인가? 양심적 반전주의자 미야자키 하야오는 만년에 들어서 비로소 이 문제를 깊게 건드렸다.

이런 면에서 봤을 때, <바람이 분다>는 반전이 주제가 아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보다 더 심오한, 전쟁 일반의 성찰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호리코시 지로라는 논쟁적 인물을 주인공으로 택해 자신의 삶을 포갠 이유도 이로써 알 수 있다. 그는 지로라는 인물을 통해서 자신을 비판적으로 반성하고, 나아가 일본 사회가 잃어버린 전쟁 인식을 꼬집으려던 것이다. 지로는 제로센이라는 전쟁무기를 개발했지만, 그 자신이 전쟁에 찬성하지는 않았다. 그도 전쟁에 반대한다. 아마도 지로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비난에 억울하게 항변할 것이다. 그는 그저 꿈 많은 소년이었고, 소년시절의 자아를 간직해 최선을 다해 비행기 설계자가 되고 열심히 노력했을 뿐이다. 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렇게 되묻는다. 그저 최선을 다했다고 용서받을 수 있을까? 어찌됐든 그는 전쟁에 이용될 여지가 큰 무기를 개발하는 기술지였고, 스스로도 이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로의 대사에서 이러한 자신의 위치에 대한 도덕적 성찰은 부재하다. 그는 전쟁에 반대하지만, 실제 전쟁에 가까워지는 위태로운 국제정세에는 이상하리만치 무감각하다. 지로는 시종 무미건조한 톤을 유지하는데, 그가 유일하게 감정적으로 격해질 때는 비행기와 관련된 일을 할 때와 약혼자 나오코가 폐결핵으로 건강이 위험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뿐이다. 그 외에 일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무관심하다. 비행기 개발에만 열심이다. 그렇다. 그는 열심히 살았다. 그러나 자신의 위치가 무엇인지, 자신의 행위가 무슨 결과를 초래할지에 대한 성찰 없이 열심히만 살았다. 지로는 병기를 만들었지만, 그것으로 자신이 전쟁무기로 이용된 데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지로는, 핵무기를 개발하였으나 그것의 위험성을 깨닫고는 최초의 반핵운동을 주도했던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되지 않았다. 최선-그것이 그의 죄이다. 그리고 일본의 수많은 '지로들'의 죄악이다.

이와 관련하여 유심히 봐야할 캐릭터가 바로 사토미 나오코이다. 관동대지진 때 운명적으로 처음 만난 지로와 나오코는 몇 년 뒤 우연한 기회로 재회하게 되고 결혼을 약속하는 사이로 발전하게 된다. 하지만 나오코는 폐결핵을 앓고 있어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지로가 신전투기 개발에 몰두하는 동안, 나오코는 병원에서 치료에 전념하여 건강한 모습으로 결혼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나오코가 너무 그립다는 지로의 편지를 받고 나오코는 병원을 나와 지로의 곁을 머물고, 둘은 그것에서 부부의 연을 맺는다. 건강 대신 사랑하는 사람의 곁에 남기로 한 대가로 나오코는 병세가 악화되고 사망한다. 나오코의 사망은 직접 묘사되지는 않지만, 지로의 꿈에 나타난 나오코의 대사를 통해서 유추할 수 있다. 그런데 지로의 꿈 씬에서 나오코가 등장하는 장면의 구성이 매우 의미심장하다. 지로의 눈 앞을 제로센기가 지나가고, 지로는 '저 비행기를 탄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컷 바로 뒤에 나오코의 환영이 등장하고 '당신은 살아'라는 말을 유언처럼 남기며 사라진다. 제로센-지로의 대사-나오코로 이어지는 이미지의 연쇄는 A-B-A의 샌드위치 대칭 구조를 이루어, 마치 제로센과 나오코가 동일한 상징이라는 연상효과를 불러일으킨다.

만약 나오코=제로센이라는 도식을 받아들인다면, 양자의 유사성을 곧장 찾을 수 있다. 우선 지로의 꿈 속에서 양자는 모두 자신의 죽음을 암시하며 퇴장한다. 특히 제로센이 구름 너머로 비행하는 컷과 나오코가 마치 구름이 된 것처럼 사라지는 컷이 대칭을 이룬다. 또, 지로와의 관계에서도 유사함을 지적할 수 있다. 둘은 지로에게 있어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들이었다. 비행기는 지로의 삶에 열심히 살 동기를 부여해준 활력이었던 한편, 나오코는 소중한 연인이자 가족이었다. 지로가 추구하던 목적은 비행기와 나오코 안에 이미 있었다. 하지만 지로는 이 둘 모두를 잃어버린다. 비행기는 전쟁으로 파괴되고 나오코는 결핵으로 사망했다. 그런데 미야자키 하야오는 치밀하며 미묘한 연출로 그 원인이 지로에게 있음을 알린다. 제로센의 시험 비행 씬은 나오코가 남편이 살던 집을 떠나 병원으로 돌아가는 장면과 교차편집하여 대조된다. 제로센의 시험 비행은 성공하여 모두가 기쁨에 가득 차 있으나, 나오코는 그 순간에 집을 떠나며 죽음을 은유한다. 역설적이게도 지로의 꿈이 실현된 순간에 그의 사랑이 좌절된 것이다. 이러한 장면 구성은 제로센이 나오코를 죽인 것이라는 암시로도 보인다. 즉, 이 씬을 확대해석하면, 지로가 개발한 전투기가 나오코를 죽인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의 꿈을 향한 열정과 노력이 그녀를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 다시 나오코와 지로의 관계를 되밟아보자. 나오코는 원래 병원에 계속 입원해야 했지만, 지로의 편지 때문에 무리해서 지로를 만나러 왔고, 이것이 화근이 되어 병세가 악화되었다. 이렇게 될 것을 알았음에도 나오코를 계속 곁에 붙잡아둔 것은, 한 등장인물의 말대로 지로의 욕심이다. 여기서도 지로는 억울해할 수 있다. 자신은 그녀를 최선을 다해 사랑했을 뿐이라고. 하지만 여기서도 지로의 열심이 문제였다. 열심은 모든 것을 정당화해주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지로의 맹목적인 노력과 목적 추구 행위는 주변에도 막대한 피해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꿈과 사랑마저 파괴해버렸다.

<바람이 분다>는 호리코시 지로라는 기술자의 삶을 전유하여 그릇된 전쟁인식을 가진 인물과 사회가 불러올 파국을 경고하는 한편, 그 시대를 살아간, 그 땅에서 사는 누구도 전쟁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지적한다. 이 경고는 일본 사회 전체에게도 해당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 자신에게도 해당된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자신의 실존을 전쟁과 연결짓지 못하고, 전쟁과 밀접한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지 못했던 자신에 대한 참회의 고백(confessio peccatorum)이다. 여기에 하야오가 위대한 마지막이자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 고령에 나이에 들어서도 그는 자기 자신을 성찰하기를 그치지 않고, 아주 날카롭게 비판한다. 그는 밀리터리 매니아인 과거의 자아와 타협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하야오는 자신의 개인적 고백을 자신의 작품에 담아 이 영화를 보는 모든 이들의 양심을 불편하게 만든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반성하고, 관조하며, 도덕적 권위를 세우는 참된 지식인의 전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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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11-19 21: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은 정말 좋아하지 않을수가 없지요. 대부분의 작품을 다 봤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바람이 분다>는 못봤네요. 민우님 리뷰를 보니 반드시 봐야될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 작품에 대한 비판이나 호불호가 상당히 갈리던데 저도 민우님이 말한 그런 면을 작품속에서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제가 좋아하는 미야자키 하야오를 잃고 싶지 않거든요. ㅎㅎ

Redman 2022-11-20 14:44   좋아요 0 | URL
미야자키 하야오는 정말 안 좋아할 수 없는 감독이죠! 이 글도 제 개인적 감상에 지나지 않지만, 저는 그 모든 논란과 비판에도 불구하고 <바람이 분다>도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현장은 번역한 경전의 질이나 양에서 걸출한 업적을 남기었다. 그의 번역은, 구마라집 이전의 고역과 구마라집의 구역과 대비되는데, 이 차이는 번역어에서 나타난다. 현장은 빨리어 혹은 중앙아시아어로 작성된 불전을 통일성 있게 번역하고자 음역어 이론을 구상했다. 구체적으로 말해, 그는 같은 단어가 다르게 번역되는 폐해를 방지하기 위해 범어 원전에 기반하면서도 의역을 해야하는 용어와 음역해야 하는 용어를 다섯 가지로 분류하였다. 이 다섯 가지 분류에 포함될 경우, 의역하지 말고 음역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기준에 의해 오종불번이 행해졌을까?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부처님의 비밀한 뜻을 담고 있는 경우. 이런 경우는 의역할 경우 신비한 의미가 사라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의역하지 않고 음역만 한다. 예를 들어, '아제 아제 바라아제(Gate Gate Paragate)'와 같은 주문은 범어 그대로 낭송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번역하지 않는다.


(2) 한 단어가 여러 의미를 가지는 경우. 딘어가 가지는 다양한 의미 중 하나만 선택하여 번역하면, 다른 의미가 드러나지 못하므로 음역한다.


(3) 인도나 서역에는 존재하지만, 중국에는 존재하지 않는 사물.


(4) 옛부터 관습으로 사용되어 온 관용어.


(5) 善을 낳기 때문에 번역하지 않는 경우. 다른 말로 의역으로는 원어가 갖는 깊은 의미를 드러낼 수 없는 경우를 말한다. 예를 들어, 산스크리트어 Prajna(프라쥬나)는 중국어 지혜(智慧)로 옮길 수 있지만, 지혜는 인간의 힘으로 도달 가능한 영역인 반면에 프라쥬나는 초지혜적인 영역이 있다. 그래서 프라쥬나를 번역하지 않고 반야(般若)로 음역한 것이다. ​


현장의 오종불번은 수당대 불경 번역의 원칙이 되었다. 이는 원어와 아주 가깝게 표기를 해서 원어의 뜻을 표현하려고 했던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 다섯 가지 원칙 중에서 나에게 가장 심각하게 다가왔던 것은 두 번째와 다섯 번째이다. 이 두 기준은 시대를 막론하고 번역을 할 때 가장 큰 어려움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society-社会가 다의어 번역의 문제점을 집약해서 보여준다. society는 동료나 친구끼리의 사교모임의 의미와 더불어 "같은 종류의 사람들끼리의 결합...조화를 이룬 공존을 목적으로 하거나 상호 이익, 방어 등을 위해 개인의 집합체가 이용하는 생활 조직이나 생활방식"(<프리덤, 어떻게 자유로 번역되었는가>)을 의미하기도 한다.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의 모임이자 생활방식이라는 의미의 society에 대응하는 관념이 일본에는 없었기에 이 단어를 어떻게 번역할지를 두고 여러 대안들이 제시되었자. 후쿠자와 유키치는 '인간교제'라는 새로운 조어를 시도하였다. 그는 일상적으로 쓰는 단어에 새 맥락을 부여하여 society가 가진 수평적 관계의 요소를 드러내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정착된 용어는 사회( 社会)였는데, 이는 모임을 뜻하는 두 단어를 결합하여 만든 단어였다. 그러나 아무 맥락 없이 두 단어를 합친 결과, 단어의 원의와 크게 틀리지는 않지만 너무도 추상적이어서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가 만들어져버렸다.(이와 유사한 다른 예가 헤겔의 Aufhebung지양 개념이다) society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다의어를 의역하여 원의를 제대로 표현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래서 현장은 이런 문제를 염두에 두고 다의어의 음역을 주장했다.


5번 사례 중 프라쥬나를 더 얘기해보자. 프라쥬나라는 관념은 지혜와 다르다. 만약 지혜로 프라쥬나를 번역한다면, 원어가 가지는 의미가 축소될 수 있다. 현장은 이런 번역이 "원어가 갖는 육중하고 깊은 뜻을 살리기 어렵고 뜻이 가벼워질" 우려가 있다고 보았고, 아예 이런 단어는 번역하지 않고 음역만 한 것이다.​ 프라쥬나를 중국의 언어로 옮길 때 가장 큰 문제는 프라쥬나라는 관념은 중국사상 세계에 없었다는 점이다. 비단 프라쥬나뿐만 아니라 불교적 세계관, 인간 이해는 모두 기존의 중국 사상 세계에서는 낯선 것이었고, 그렇기에 섣불리 중국 사상의 관념으로 불교의 개념을 담으려 할 경우 필연적인 오역이 발생하고 만다. 현장이 오종불번을 제시했을 때는, 원어의 의미와 불교 사상의 의미를 중국인이 최대한 왜곡 없이 이해하도록 할 방법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번역이란 언어뿐만 아니라 사유체계를 옮기는 작업이다. 이렇게 본다면, 중국의 불경 번역의 역사는 단순히 산스크리트어를 중국어로 옮기는 과정이 아니라 중국에 없는 불교의 관념을 중국인에게 이해시키기 위한 노력의 과정이었다.​​​


아래는 오종불번을 구글링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후나야마 도루 <번역으로서의 동아시아> 인용문.



구마라집은 번역이면서도 한편으로 중국어로서 알기 쉬운 문장을 지향했기 때문에 때로는 글자 하나하나의 뜻을 충실히 새기는 축어역에서 벗어나 일부를 생략하거나 말을 덧붙여 알기 쉽게 하는 조작도 했다. … 스탠포드대학 폴 해리슨 교수는 구마라집 번역이 갖는 특징의 하나를 “마치 현대 연구자가 번역할 때 괄호를 사용하여 그 가운데 말을 덧붙여 자신의 해석을 드러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작업을 했는데, 다만 구마라집은 그것을 본문 가운데 괄호를 사용하지 않고 했다”고 표현한다. … 바로 이 점이 구마라집 번역의 <법화경>, <유마경>, <금강반야경>이 중국 불교사를 통해 후대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계속 읽혀온 이유다. … 번역이란 타인이 씹다가 내뱉은 음식물 같은 것으로 보는 구마라집의 생각을 파고들면, 결국 타인의 한역을 읽기보다 범어를 배워 원전을 읽으라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 145


… 중국 불교사에 … 아이러니한 결과가 발생했다. 완성판이라고 할 수 있는 현장 번역은 학술적인 가치는 인정받았다고 할지언정 그 후에도 사람들이 즐겨 읽은 것은 다름 아닌 구마라집 번역이었던 것이다. … 현장 번역은 중국인의 금강경 이해와 관련하여 결국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 비판과는 별도로, 현장에게는 ‘오종불번’으로 불리는 번역이론이 있었다… 의역하지 않고 음역에 그치는 편이 좋은 다섯 가지 장르를 열거한 것이다. … 첫째, (음역 그대로 놓아두는 쪽이) 선업을 낳게 하므로 옮기지 않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불타’(buddha)는 깨달음이라는 의미인데 … 범어 그대로 남겨둔다. 사람들의 선업을 낳게 하는 데 의도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비밀로 하기 때문에 옮기지 않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다라니 등과 같은 주문의 가르침은 범어 그대로 암송하여 부처의 가호를 빌면 즉각 효과가 나타나지만, 중국어로 번역하면 조금도 영험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 복수의 의미를 내포하므로 옮기지 않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박가범’(薄伽梵, bhagavān)은 한 단어에 … 여섯 가지 의미가 들어 있다. … 하나의 의미로 옮기면 나머지 다섯 가지 의미가 모두 사라지고 말기 때문에 … 넷째, 예로부터 써내려온 관습에 따르므로 옮기지 않는 경우가 있다. … 다섯째, 중국에 없는 사물이므로 옮기지 않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염부수(閻浮樹)는 그림자가 달에까지 드리워져 달의 모양을 만들고 … 항아리만 한 크기의 열매가 열리는데, 이 나무는 중국에 없으므로 번역할 수 없다. – 153~155​


음역은 의역을 함에 따라 발생하는 의미의 왜곡을 피하는 데는 유용하지만, 외국어이기 때문에 원어 지식이 없는 독자에게는 의미를 전혀 알 수 없는 데다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것이 커다란 결점이다. 새로운 음역이 사회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실제 용례가 축적됨으로써 많은 용례나 문맥적인 뉘앙스로부터 의미가 귀납법적으로 이해될 수 있게 되기를 기다려야 한다. – 286

*예나 지금이나 학술적 번역보다 글의 맛이 살아있는 번역이 더 인기있나 보다

참조.

문을식, <현장의 오종불번의 음역 이론의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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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자오광의 <중국사상사> 1권의 마지막 편은 불교의 전래와 그 사상사적 전개를 서술하며 끝이 난다. 제4편은 "서언: 이역의 풍"과 일곱 개의 절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중 불교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부분은 4절 "불교의 동방 전래와 그 사상사적 의의 (1)"부터이다. 이번주에는 4~6절을 읽었다. 나는 이 부분을 굉장히 흥미롭게 읽었다. 사실 나는 이 절에서 다루는 문제에 기본적으로 관심이 많다.


바깥쪽의 낯선 개념과 사상 체계가 안쪽으로 유입되었을 때, 그 안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안쪽은 바깥쪽의 사상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안쪽과 바깥쪽이란 표현은 강명관의 책 <안쪽과 바깥쪽>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것은 외래 사상을 수용할 때 기본적으로 드는 궁금증들이다. 이 문제를 조금 더 확장해보자. 외래 사상의 수용자는 기존의 전통적인 가치를 습득한 사람이다. 그 수용자는 이 전통적 가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체제교학으로서 인정하고 있는가, 아니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비판적으로 조망하고 있는가. 아니면 전부 다 뒤집어 엎어 버리려 하는가. 이건 외래 사상의 수용에서 첫 번째로 살펴볼 물음이다. 다음으로, 외래 사상을 수용할 때 수용자는 그 사상의 핵심 개념을 무엇이라고 이해하며, 이때 전통적 가치가 어떤 역할을 하는가. 수용자는 자신의 관심과 목적에 따라서 외래 사상을 수용한다. 따라서 우리는 사상이 어떻게 수용되는지 그 맥락을 살펴봐야 한다.


불교는 인도에서 시작되고 발전한 종교이기에 사회를 규정하는 가치나 우주에 대한 이해에서 고대 중국과 확연히 달랐다. 하지만 7세기 이후 들어서 불교는 사회 구성원 대다수에 의해 수용되어 지배적인 사상의 위치에 올라서기에 이르렀다. 과연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인도의 불교가 어떻게 중국에 받아들여졌는지를 거자오광의 <중국사상사>에서 갈음할 수 있다. 중국의 불교 수용사는 근대 동아시아 세계의 서양 사상 수용을 고찰할 때 유용한 사례가 될 것이다.


낯선 이역 인도에서 발흥한 종교를 처음 접했던 사람들의 반응은 낯섦이었다. "불교가 중국에 처음 들어왔을 때 중국 신도들에게 비췄던 불교의 우주 사회 인생에 대한 사상 중에는 기존 중국 사상에서 들어본 적이 없거나 확립된 적이 없는 내용들이 사뭇 들어있었다. 다시 말해 우주의 허황함, 생존의 고통, 삼세의 윤회, 그리고 진실을 추구하고 고통으로부터 해탈해 윤회의 수레바퀴로부터 벗어나려는 언뜻 보기에 일상적이 아닌 듯한 방법과 수단 등이 그것이다." 불교의 인생관, 가치관, 윤리도덕 규범은 전통 중국에서 사람들의 의식과 생활을 규정한 가치나 규범과는 매우 달랐다. 지식인들과 상층 계층은 4세기 이전까지 불교에 대해 냉담했다. 하지만 하층민 사이에서 급속도로 전파되었던 불교 교리는 상층 문인들의 사상 세계에도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이 낯선 사상 체계를 받아들이고 이해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전통적 사상과 유사한 부분을 먼저 찾고자 하였다. "불교적 참회 방법은 중국에서는 오히려 도교의 '과실을 뉘우치다'와 '과실을 인정하다'와 같은 개념과 섞이게 되어 자신의 도덕이나 윤리에 대한 반성 행위로 변하게 되었다." "도가의 형이상학적 내용은 불교의 사상과 가장 근접하여, 초기 불교를 이해하는 언어 환경이 되었다." 중국의 수용자들은 불교의 언어 속에서 도가의 편린을 발견하여 이해하려 하였고, 이러한 방법론은 "중국 전통의 언어로 불교의 교리를 번역하고 해석하는" '격의'를 생기게 하였다. 예를 들어, "道"로서 "보리"의 개념을 나타내고, 無로써 空의 개념을 대신했으며, 열반의 개념을 '무대(無待)'로 담았다. 이는 모두 노장의 언어와 불교 언어를 배합한 결과물들이다.


하지만 전통적 언어 환경으로 불교의 관념을 담아내려는 시도는 한계가 있었다. 즉, 도가나 도교의 개념으로는 불교의 공, 열반 등의 개념을 완벽하게 표현하지 못했던 것이다. 양자는 공통점만큼이나 고유의 특수성도 있는데, 배합이나 격의로는 이런 고유한 특징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뿐만 아니라 불성에 관한 명제는 기존 중국 언어 환경으로는 제대로 전달할 수 없었다. "고대 중국에서는 형이상학적 본원에 대한 명석한 단계적 사고가 결핍되었으며, 또한 언어의 정밀함과 정확성도 부족하였다." 불교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어 가면서 중국의 수용자들은 점차 이런 한계를 인식하게 되었다. 도안과 구마라집 등은 정확하고 유장한 언어로 불경을 새로 번역하였다. 또한 지둔, 축도생, 혜원 등 불교에 대해 더 심오한 이해에 이르게 된 사상가들에 의해 중국 전통 사상과 불교가 융합하게 된다.


이것이 중국 사상계에 어떤 변화를 낳았는가? 먼저 한어 어휘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기존의 無로 이해하였던 空이 내공, 외공, 공공, 대공 등 18개의 공으로 분류되어 표현될 정도로 중국의 언어는 점차 세밀해지고 정교해졌다. 그리고 교리 논쟁은 명석한 단계적 사고를 발전시켰다. 불교는 층층의 단계적인 추리로 상호 고리를 연결하는 방식으로 사고를 구체화하고 정밀한 논리를 개발한다. 이러한 방식이 중국의 언어로 흡수되면서 부족한 언어의 정밀함과 형이상학적 사유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수 세기에 걸친 지난한 불교와 중국 토착 사상 간의 융합은 다음의 문장으로 집약할 수 있겠다. "사상과 문화의 융합은 결코 간단하거나 평화로운 것만은 아니다. 외국으로부터 지식과 사상 그리고 신앙이 중국에 들어오면 초기 단계나 가장 표면적 단계에서는 직접적으로 저항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외래 지식, 사상, 신앙의 자극으로 인한 부단한 화합 과정 중에 중국 본토의 본래 사상은 점차 자체의 가치와 의의를 확인하면서 꾸준히 자극을 받는다. 아울러 외래 지식, 사상, 신앙과의 충돌 과정 중에서 점차 자신의 내적 함의와 한계를 드러낸다." 이것은 중국뿐만이 아니라 외래 사상을 받아들이는 어떤 상황에서도 동일하게 전개되는 과정이다. 여기서 '중국 본토의 본래 사상' 자리에 다른 말을 넣어도 위 문장은 성립된다.


그런데 중국 토착 사상 못지 않게 불교가 직면한 도전도 만만치 않았다. 그 도전이란 중국의 유구한 문화 전통의 압박이었다. 이 압박은 담론 권력으로서, 세속 권력의 강제적 역량, 문명지역 주민의 습관적 이해와 해석 방식, 문명의 역사적 전통의 권위 등으로 나타났다. 외래 사상이었던 불교는 중국에 받아들여졌으나, 혈연/ 가정윤리/사회책임을 중시하는 중국의 전통 가치와 인생관을 바꾸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고, 불교는 오히려 이런 전통 윤리를 보호하는 진영으로 녹아들었다. 불교의 우주에 관한 지식과 도리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불교는 유구한 문화 전통을 가진 중국과 중국의 언어 환경에서 자신을 변호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혹은 어쩔 수 없이 본래 형태를 바꾸어야만 했다. 불교는 아직 사회의 생활양식을 규정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7세기에 이르면, 중국에서 불교가 사실 이미 중국 사상계에 상당히 섞여들었고, 불교의 사상도 상당히 한화되었던 것이다." 불교는 번역과 수용의 역사를 거치면서 중국의 사상으로 토착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시간을 뒤로 돌려 19세기 동아시아 세계를 봐보자.


근대 동아시아는 서구의 충격에 직면하여 서구의 지식과 사상이 급속도로 흡수하게 되었다. 이 충격에 대한 반응으로 막말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 등의 지식인들은 society, freedom, individual 등의 낯선 서양 사회과학 용어를 새롭게 '사회', '자유' '개인' 등의 단어로 번역하였다. 이들은 기존에 있던 단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였으며, 아예 없던 새로운 단어를 만들기도 하였다. 근대 일본이 만든 번역어는 근대 조선에 수용되었다. 그런데 근대 일본과 조선의 지식인들은 서양의 사상과 개념을 받아들일 때, 기존의 전통 가치를 기준으로 하여 수용하였다. 특히 조선의 경우에는, 성리학이라는 체제교학의 프리즘을 통해서 서양의 지식을 이해하였다. 처음에는 단지 소수의 지식인들에 의해 수용되었던 서양의 사상은 19세기 말 제국 열강들과의 폭력적인 만남과 그로 인한 동아시아 전통 체제의 위기를 통해 더욱 진지하게 논의되었고, 이는 전통적 가치에 대한 비판적 조망, 나아가 아예 이 가치를 하려는 시도에까지 이르렀다. 불교라는 사상이자 종교는 중국에 현지화되어 지배적 사상에 자리에 올랐다면, 한국에서 서양의 종교와 사상은 어느 위치에 있을까? 그것의 현지화, 즉 지배적인 사상이 되어 삶의 양식을 규정하는 사상이 되었는가의 문제는 이미 완료되었는가, 혹은 진행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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