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사대부의 시대 - 주자학과 양명학 새롭게 읽기
고지마 쓰요시 지음, 신현승 옮김 / 동아시아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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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학과 양명학'이라는 원제의 이 책은 '주자학과양명학 새롭게 읽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한국어 번역본이 명시하고 있는 '새롭게 읽기'란 무엇인가? 그것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즉, 20세기 주자학 연구는 주자학 내부에서만 철학적 성분을 체취한 시도에 불과했다. 주자학과 양명학을 전체적으로 보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고자 저자는 "주자학과 양명학을 역사적으로 어떻게 파악해야 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를 진행하였고, 이 책은 그러한 입장을 가진 저자의 주자학 양명학 이해가 담긴 책이다. 저자의 새로운 읽기는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사상.문화사적" 읽기이다. 주자학과 양명학을 그 역사적 배경으로써 해명해보고자 하는 시도라 할 수 있겠다. 어떤 철학을 "사상.문화사적" 입장에서 읽는다는 것은 "텍스트에 침잠하는 일뿐만이 아니라, 문맥에 입각하여 고찰"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통하여 우리는 역사적, 사회적으로도 다른 시대의 사상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우선 저자가 의미하는 "사상.문화사적" 읽기가 무엇인지 더 구체적으로 봐보자. "여는 글 - 주자학과 양명학의 새로운 지평을 위하여"에서 저자는 논의를 위해 대상을 분명하게 규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그는 "송학을 좀더 광범위한 의미에서 사용하여 '도학' 이외에 구양수, 왕안석, 소식 등의 사상도 포함한 새로운 학술사조 전반을 가리키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자가 말하는 송학이란 주자학이 아니다. 주자학은 송학의 한 유파였으나 일련의 교의 논쟁을 거치면서 "이윽고 동아시아의 사상계를 석권하기에" 이르렀다. 그 논쟁이란 4단계를 지나는데, "불교와 도교에 대한 유교의 투쟁" "유교사상 내부에서 벌어지는, 낡은 유파에 대한 새로운 유파의 투쟁" "송학 내부에서 벌어지는 도학의 다른여러 유파에 대한 투쟁" "도학 내부에서 벌어지는 주자학과 기타 유파와의 투쟁" 등이다. 마지막 단계를 거쳐 주희의 철학이 주류의 지위를 탈취했다. 이후의 논쟁은 정주성리학과 육왕심학이라는 구도에서 벌어진다. 그런데 기존의 설명은 "철학 또는 윤리학으로서의 해설에 치중해 있으며, 본래 유교가 가지고 있는 정치학으로서의 측면을 배제하고" 있다. 이 인용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저자는 새롭게 '정치학으로서의 측면'을 끌어들여 정주성리학과 육왕심학의 대립구도를 해명한다. 그렇다면 '새롭게 읽기', 즉 '사상.문화사적 입장에서의 새롭게 읽기'가 지시하는 것은 '정치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과연 양자가 동일시될 수 있는지는 의심스러우나 일단은 저자의 설명을 받아들이고 논의를 이어나가겠다.


제2장 '주자와 왕양명의 생애'는 주자학과 양명학의 학설상의 차이를 두 철학체계의 "최초의 시점"에 서 있는 주희와 왕수인의 성격 및 생애의 차이를 통해 설명한다. 고지마 쓰요시는 두 학설의 대동소이함을 주장한다. 다시 말해, "양명학은 주자학과 서로 맞지 않을 것처럼 간주되기도 하지만, 역사적 사실로서 양명학은 철저하게 주자학의 연장된 형태이다. 주자학이 없으면 나올 수 없는 발상이며, 애당초의 문제의식부터가 당시 유행하던 주자학 주류파의 폐해를 시정하기 위해서 주자학이 구축한 구조 속에서 이의 제기를 행하였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주자학과 양명학의 차이는 "두 사람을 둘러싼 환경의 차이"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일괄하자면, 주희는 사회적으로 엘리트 코스의 바깥에 있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입신출세가 어려운 자신의 처지에도 불구하고 사대부로서의 사명을 다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고, 그 결과가 주자학의 철학 체계를 이루었다. 그 결론이 "수기치인"의 관념이었다. 반대로 왕수인은 엘리트 코스의 중심에 있었다. 그는 금수저 집안 출신에 죽을 때까지 입신양명의 길을 걸었고, 흔히 말하는 꽃길만 걸으며 살아왔다. 그는 젊은 시절 주자학적 수양 방법에 실망감을 느기고 "자신의 몸에 익숙해져 있는 주류의 사상문화를 오히려 의도적으로 파괴하고자 했다." 따라서 이런 결론이 뒤따른다. "다소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최초의 시점에서 주자학은 벼락출세를 이룬 허영의 산물, 양명학은 방탕한 자식의 도락이었던 셈이다." 과연 이렇게 하나의 사유 체계를 전적으로 환경으로환원시키는 환원주의적 태도가 타당한지는 둘째치더라도, 이것이 그가 말하는 '정치학으로서의 측면'을 고려한 새로운 독법인지도 알 수 없다. 그저 두 사람의 정치인생이 다르다는 것만 확인할 수 있을 뿐.


이하 제6장 '성즉리와 심즉리'부터 7장 '격물과 친민' 8장 '천리와 인욕'은 주자학과 양명학이 발생한 사회적 정세를 고려하여 서로 완벽하게 대립되는 것이라고 여겨지던 두 철학 체계가 이론상으로 대동소이함을 주장한다. 다만 "주자학이 도덕적 수양과 정치적 실천을 단계적으로 구별한 데 비해, 양명학은 현장주의의 입장에 서서, 양자의 벽을 허물어 걷어 치우고 있다. 그들이 살고 있던 사회의 정세가 그들로 하여금 서재에서 문헌적 지식만을 심심풀이로 즐기는 일을 결코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2장에서 설명한 주희와 왕수인을 둘러싼 환경의 차이가 얼마만큼 이들 철학적 체계와 연결되는지는 알 수 없으며, 얼마만큼 정치학의 측면이 들어가 있는지도 이해하기 어렵다. 그마저도 9장 '예교와 풍속'부터는 '새롭게 읽기'와 전혀 관련이 없는 주제와 논의가 이어지고, 14장 '동아시아의 근세'와 15장 '주자학.양명학의 미래' 장에 오면, 본서 본래의 목적은 잊혀진 듯하다.


저자의 '정치학'적 읽기는 성공했나? 그는 주자학과 양명학의 체계를 역사적으로 이해할 만큼 충분한 역사적 증거를 제시했으며, 이로써 양자의 철학적 차이를 해소했는가. 두 번째 질문부터 보자면, 저자가 제시하는 역사적 증거가 그리 풍부하지도 않거니와 그가 이 요소와 주자학.양명학간의 상응관계를 설득력 있게 설명하지도 못했다. 그가 한 작업은 그저 사회정세를 고려한 것뿐이다. 따라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다이며, 저절로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도 아니다이다. 이 책은 지성사도 아니고, 사상사도 아니며, 철학사는 더더욱 아닌 애매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말해, 이 책은 동아시아 철학에 대한 기초적 지식도 없는 일반인을 위한 입문서로서의 역할은 할 수 있어도, 그 이상의 지식을 얻기를 기대하기 어려운 책이다. 마지막으로 역자 신현승이 별도로 추가한 제5장 '한국에서의 수용'은 "조선의 주자학적인 학문 풍토가 폐쇄적이고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했다는" 주장을 하지만, 이는 고지마 쓰요시도 역설하는 바 양명학도 주자학의 분파이며 한 학파 내에서의 다양성을 간과하고 무엇보다 정제두 학파 등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우스운 주장이다.


주자학을 역사학적으로 체계 있게 이해하려면, 이 책보다도 피터 K. 볼의 <역사 속의 성리학>(예문서원)이나 <중국 지식인들과 정체성>(북스토리) 등을 참조할 필요가 있겠으며, 김영민의 <중국정치사상사>(사회평론아카데미), 한국 유학에 관해서는 <한국 유학의 철학적 탐구>(소명)를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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