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전 세트를 구매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무슨 책인지도 모른 채 수능 끝나고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읽어봤는데, 너무 어려워서 포기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다시 읽어보니, 정말 너무 좋은 책이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서양예술사 기본 서적이니, 가급적이면 전부 읽고 정리해보려 한다.


현재 1권 제3장 '고대 그리스와 로마'를 읽고 있다. 

이 장에 그리스 비극을 설명한 부분이 있는데, 

개략적인 설명이더라도 그리스 비극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설명인 것 같다. '비극'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비극이야말로 아테네 민주제의 특색을 가장 선명하게 나타내는 예술이다. 아테네 민주제의 사회구조가 내포하는 갖가지 모순을 이만큼 직접적이고 명확하게 표현한 예술장르는 없을 것이다. 비극은 그 외적 형식 즉 일반대중을 위해 공연되었다는 점에서는 민주적이지만, 그 내용 즉 소재가 된 영웅전설과 영웅적 비극적 생활감정이라는 점에서는 귀족적이었다."


즉, 민주제 시대 고대 그리스는 사실 정치/문화적으로 귀족적 관습과 파토스에 더 익숙했다. 

그러면 비극이 상연되던 극장의 사회적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하우저에 따르면, 극장은 선전기관이었다.


"축제 극장은 도시국가가 가진 가장 효과적인 선전시설이었다. 따라서 도시국가가 그 운영을 시인들 마음대로 하도록 맡겨놓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비극시인들은 실상 국가의 녹을 먹고 국가가 필요로 하는 작품을 제공하는 사람들이었다....비극은 경향문학이었고, 또 그외의 것으로 평가받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당대의 현실정치를 다루었고 항상 귀족국가 대 시민국가의 관계라는 당시의 가장 절박한 문제와 직간접으로 관련된 문제만을 주제로 삼았다."


현대와 고대 그리스의 정치관에서 가장 차이가 나는 부분은, 고대 그리스인은 정치와 실생활의 구분이 없었다는 것이다(정치와 정치학이 독립적으로 이해되기 시작한 것은 마키아벨리 이후이다). 그러므로 "실생활이나 정치와 아무 관계가 없는 연극이라는 관념은 당시의 예술관으로 보면 전혀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스 비극은 가장 좁은 의미의 '정치극'이었다."


다시 말해 그리스 비극은 정치적 질문들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전제로 하고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봐보자.



안티고네: :

오오, 내 친아우인 사랑하는 이스메네야,

오이디푸스에게서 비롯된 수많은 재앙 가운데

제우스께서 우리 생전에 이루시지 않은 것을

너는 한 가지라도 알고 있니? 고통과 재앙,

치욕과 불명예 가운데 내가 너와 나의 불행에서

보지 못한 것은 한 가지도 없으니 말이다.

하거늘 방금 또 장군님께서 도시의 모든

백성들에게 무슨 포고를 내리셨다는 거니?

알고 있니? 아니면 너는 적들이 받아야 할 재앙이

우리 친구들을 위협하고 있는 것도 모르고 있니? (<안티고네>, 1~10행)


안티고네는 처음부터 '적'과 '우리'를 구분하면서 대사를 시작한다. 

적은 무엇이고, 우리는 무엇인가? 

적과 우리를 나누는 기준은 무엇이며,

적과 친구의 구도는 어떤 원리에 의해서 어떻게 연결되는가?

31~32행 안티고네의 대사에서 이를 파악할 수 있다.


안티고네:

크레온 님이 우리 두 오라버니 중 한 분은 후히 장사지내되

한 분은 장사지내지 못하게 하셨단다. (31~32행)


안티고네:

그분이 이리로 오신다는데, 이 일을 그분은

가볍게 여기시지 않고, 조금이라도 그 명령을

어기는 자는 시민들이 돌로 쳐서 죽이게 하셨대.

네 처지가 이러하니, 이제 곧 보여주게 되겠지.

네가 네 가문에 걸맞은지, 걸맞지 않은지를. (34~38행)


갈등의 원인은 안티고네의 두 오라버니, 폴뤼네이케스와 에테오클레스의 시신 매장이다. 에테오클레스는 법과 규범에 따라 장사되지만, 장군(archon) 크레온의 명령에 따라 폴뤼네이케스는 장사도 지내지 못하고 애도조차 지내지 못한다. 폴뤼네이케스 장사 금지령에 대한 안티고네의 반박 근거는 혈연, 즉 가족윤리에 있다. 법과 같은 규범은 안티고네의 입각점이 아니다.


안티고네와 대립각은 세우는 크레온은 국가주의자, 규범주의자이다. 그의 첫대사를 봐보자.


크레온:

한데 그분의 아들들이 서로 치고받는 가운데

서로 형제의 피로 물든 채 죽고 죽이는

이중의 운명에 의해 한날한시에 죽은 까닭에,

이제는 내가 고인들의 가장 가까운 인척으로서

왕좌와 모든 권한을 갖게 되었소이다.

한데 통치와 입법으로 검증받기 전에

한 인간의 성격과 심성과 판단력을

완전히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오. (170~177행)


크레온:

(...) 그리고 누구든 조국보다 친구를

소중히 여기는 자 역시 나는 경멸하오.


크레온은 통치와 입법으로서 모든 것을 판단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내면과 심성도 통치와 입법으로 검증할 수 있고, 규범으로서 다스릴 수 없는 것을 적극적으로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생각을 더 확장하면 크레온은 국가에 충성을 바쳐야 한다는 국가주의적 사고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여기 두 가지 가치관이 대립하고 있다.

하나는 크레온으로 대표되는, 외부 세계의 궁극적 실체로서 국가와 규범을 중시하는 입장이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국가와 인간이 만든 규범 이전에 혈연으로서 맺어진 원초적 관계와 감정(친밀감 등)을 중시하는 안티고네의 입장이 있다.

국가주의/규범주의 윤리와 가족주의 윤리가 팽팽히 맞서고 있는 것이다.

두 입장의 대립은 결국 올바름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크레온:

(안티고네에게) 너는 긴말 말고 짤막하게 말해보아라.

너는 그러지 말라는 포고령이 내려졌음을 알고 있었느냐?

안티고네: 알고 있었어요. 공지사항인데 어찌 모를리 있겠어요?

크레온: 그런데도 너는 감히 포고령을 어겼단 말이더냐?

안티고네: 내게 그런 포고령을 내린 것은 제우스가 아니었으며,

 하계의 신들과 함께 사는 정의의 여신께서도

 사람들 사이에 그런 법을 세우시지 않았으니까요.

 나 또한 한낱 인간에 불과한 그대의 포고령이

 신들의 변함없는 불문율들을 무시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하다고는 생각지 않았어요.

 그 불문율들은 어제오늘에 생긴 게 아니라

 영원히 살아 있고, 어디서 왔는지 아무도 모르니까요. (446~456행)


올바름에 대한 두 가지 입장은 결코 화해될 수 없음을 크레온과 안티고네의 이 대화만 봐도 알 수 있다. 필멸의 인간이 만든 명문화된 규범(크레온). 불멸의 신이 만든 불문율(안티고네).

아마 이 연극을 실제로 봤을 당시의 관객들은 두 입장 중 무엇이 옳은지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을 것이다. 혹은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자체가 당대에 정치적으로 민감했던 이슈를 다루고 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수도 있겠다.


개인은 국가의 법과 정치 지도자의 명령을 어디까지 복종할 것인가? 국가의 권한은 어디까지 정당하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가? 크레온은 오만방자하게(hybris) 장군으로서 자신에게 허락된 권한의 범위를 넘으려 했다가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다. 자신의 아들 하이몬과 아내 에우리디케가 자살한 것이다.


결국 무엇이 올바른가? 그리고 국가 논리의 균열 지점은 어디인가? <안티고네>가 던지는 질문은 이런 것들이라 할 수 있다.


이 주제로 참고가 될 수 있는 책들을 몇 권 정리해본다..

마사 누스바움,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

헨리 소로우, <시민의 불복종>

카를 슈미트, <정치적인 것의 개념>

카를 슈미트, <파르티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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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09-03 09:0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옆에 꽂아 놓고 틈틈히 참고하는 책이예요
구판과 개정판이 섞여서 5권^^
시대마다 요구되어지는 올바름이 다르죠.
페이퍼 넘 잘 쓰세요

김민우 2021-09-03 11:59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구판과 신판이 다 있으시군요 ㅋㅋ

막시무스 2021-09-03 11:1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김민우님의 이 책에 관한 리뷰가 계속 이어지길 응원합니다!ㅎ 구판으로 2권까지 봤다가 신판이 나와서 1권을 다시 구입했는데 언제나 그렇듯이 대기중이네요!ㅠ.ㅠ

인간의 법 VS 신의 법 사이에서 갈등에 관한 안티고네를 보면서 당시 지배층과 피지배층은 어떤 느낌이 었을지 궁금해 집니다. 즐거운 불금되십시요!

김민우 2021-09-03 12:02   좋아요 3 | URL
앗 더 열심히 읽겠습니다 ㅋㅋ 아마 지배층은 크레온 응원하고 피지배층은 안티고네 쪽에 더 공감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봅니다 ㅋㅋ

초란공 2021-09-03 11:1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리뷰 기다리겠습니다~ ^^

김민우 2021-09-03 12:02   좋아요 3 | URL
시간이 허락하는 한 열심히 읽고 써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