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낙원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5
존 밀턴 지음, 조신권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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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밀턴, 조신권 옮김, 복낙원, 문학동네, 2010 (11), 2020 (21)

 

존 밀턴의 복낙원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실낙원의 속편격으로 지어진 서사시이다. 실낙원은 주로 창세기 1~3, 천지창조와 인류의 타락 기사에 근거하여 한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해 상실된 행복의 동산을 노래했으나(복낙원1~2)”, 복낙원은 복음서(특히 마태복음 41~11절을 볼 것)에 기술된 광야에서의 사탄의 유혹 이야기에 기반하여 잃어버렸던 낙원이 어떻게 회복되었는지를 노래한다.

 

실낙원에서 밀턴은 인내와 순종의 덕목을 갖춘 진정한 그리스도교적 영웅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했다. 복낙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탄의 대결을 통해서 밀턴이 제시했던 영웅상이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표현된다. 따라서 실낙원을 읽었다면, 복낙원까지 순차적으로 읽어야 한다.

 

복낙원에서의 예수와 사탄의 대결은 무엇이 진정한 메시아이며, 메시아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이다.

 

대결이라는 단어를 썼지만, 사실 이 작품의 장면은 대부분 예수와 사탄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이 대화도 단순한 논쟁이 아니라 예수를 점점 자신의 내면으로 이끄는 역할을 한다. 이는 앞서 본 것처럼, 이 작품이 예수의 메시아로서의 자기 정체성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탄의 유혹과 예수의 거부는 외부적 사건이 아니라 예수 자신의 자아 발견과 자신에게 부여된 사명 인식이라는 내면적 구조를 갖는다. 사탄과의 대화가 이어질수록, 둘은 더 내면적이고 추상적인 부분까지 들어가게 되고,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자각하게 된다.

 

이와 관련해서 핵심적인 부분이 바로 예수가 광야에 간 이유이다. 그는 애초에 왜 광야에 갔을까? 밀턴은, 예수는 메시아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하다가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게 되었다고 해석한다.

 

어떻게 하면 인류의 구주로서의 그 위대한 과업을

가장 잘 착수할 수 있으며, 이제 성숙한

그의 거룩한 직책을 어떤 방법으로

우선 나타낼 수 있을 것인가를 마음속으로 깊이

심사숙고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성령과 그의 깊은

생각에 이끌려 홀로 걸어 나갔다, 보다 고독과

더불어 깊이 사귀고자.” (1, 183~191)

 

어떻게 하면 인류의 구주로서의 그 위대한 과업을 가장 잘 착수할 수 있을 것인가.’

성숙한 자신의 거룩한 직책을 어떤 방법으로 우선 나타낼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이 작품에서 밀턴이 그리는 예수의 고민이며, 사탄과의 논쟁의 주제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복음서에서는 그 의미가 살짝 모호한 돌이 떡이 되게 하라는 유혹을, 밀턴은 자선에 대한 유혹으로 해석한다. 여기서는 돌이 아니라 빵이 되게 해달라고 나온다. , 메시아로서 예수가 할 일은 다른 무엇도 아닌, 약자들에게 자선을 베풀라는 것이다. 가난한 농부로 변장한 사탄은 이렇게 말한다.

 

(...) “그러나 그대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단단한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보시오.

그러면 가련한 우리가 좀처럼 맛볼 수 없는

음식으로 그대 자신과 우리를 구할 수 있을 것이오.” (1, 342~345)

 

하지만 예수는 즉각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그의 말 끝나자, 하나님의 아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빵 속에 그런

힘이 있다고 생각하오? (그대를 보기와는 다른

사람으로 인정하기에 말이지만) 사람은 빵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리라고 쓰여 있지 않소.” (...) (1, 346~351)

 

이 대화만 봐도 눈치챌 수 있듯이, 사탄은 다른 메시아상을 제시함으로써 예수를 유혹한다.

 

사탄은 처음에는 자선가로서의 메시아상을 제시했다. 이 외에도 정치적 메시아, 즉 어떤 왕국의 왕이나 탁월한 정치적 지도자, 사회운동가·혁명가로서의 메시아 상들을 언급한다. 하지만 예수는 그 어떤 것도 수용하지 않는다. 그의 태도는 단호하다.

 

허영된 사람들이 당찮게 바라듯이, 나도

영화를 구하랴? 내 찾는 영광은 나의 것 아니라,

날 보내시고 지켜보시는 그분의 것이로다.” (3, 105~107)

 

가장 잘 참는 자가 가장 큰 일 할 수 있고,

먼저 잘 복종하는 자가 또한 큰일 하나니

영원무궁한 찬양 받기 전의 마땅한 시련이로다.

그런데 나 언제 그 영원한 왕국을 시작하든

그대 무슨 상관이며, 그대는

어찌하여 이다지도 보채고 궁금해하는가?

그대 모르는가, 나의 출세 곧 그대의 몰락이요,

나의 승진은 그대의 파멸인 것을?” (3, 195~202)

 

이러한 대화를 통해 밀턴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했다. 그리고 이는 앞서 말한 순종과 인내의 영웅상이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왜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아니라 황야의 유혹을 작품의 무대로 선택한 것일까? 일반적인 기독교 신자에게는 전자가 예수님의 영웅성의 절정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인식할 것이다. 하지만 밀턴은 예수님의 메시아상과 영웅성을 보여주는 주제로 황야의 유혹을 선택했다.

 

이는 밀턴이 이 작품에서 사탄을 예수의 타자가 아니라 예수의 내면적 소리로서 제시했기 때문이다. 4편에서 기묘한 대사 한 부분을 봐보자.

 

비켜나거라. 이제 보니 그대는 분명히

저 사악한 존재, 영원히 저주받을 사탄이로다.” (193~194)

 

4편에 가서야 그는 자신을 유혹하는 대상이 사탄임을 눈치챈다. 그전까지 예수는 자신의 대화 상대자가 누구라고 여겼던 것일까? 밀턴은 여기서 예수를 악으로 유혹하던 목소리는 바로 예수 내면의 소리였다고 말하는 것 같다. , 예수는 그동안 자기 자신과 대화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밀턴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했으나, “예수의 인간성, 즉 악을 선택할지도 모르는 자유의지의 문제에다 더 역점을 두었다.” 따라서 사탄에 대한 예수의 승리는 자유의지를 통한 내면의 악 정복이라는 해석도 가능해진다. 핵심은 자유의지다. 따라서 복낙원의 예수는, ‘자유의 투사로서 자유의 가치를 중시하였던 밀턴의 가치관에 따라 재해석된 존재라고 해야 할 것이다. 밀턴은 지나치게 자유의지를 강조한다. 이것은 이 작품의 가장 큰 단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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