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으로서의 학문 나남신서 1140
막스 베버 지음, 전성우 옮김 / 나남출판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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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에서는 세 명의 이름만 기억하면 된다. 카를 마르크스, 막스 베버, 에밀 뒤르켐. 그중에서도 막스 베버가 고안한 개념이나 이론들은 현대 사회학 연구에서도 인용되고 사용된다. 이처럼 베버는 현대 사회학 연구에 필수적인 핵심 술어와 개념의 상당수를 만든 학자이다. 학문적으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사람이 학자의 자질근대 학문의 본질에 대해 무엇이라고 얘기했을지, 대가의 통찰을 얻고자 읽었다.

 

<직업으로서의 학문>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든 1917년 말에 진보적 학생단체인 자유학생연합으로부터 직업으로서의 정신노동에 대한 연속강연에 초청받아 행한 강연을 책으로 수정 보완하여 출판한 것이다. 강연의 주제는 탈주술화, 합리화된 세계, 즉 모든 것을 원칙적으로 계산을 통해 지배할 수 있다고 믿는 세계에서 학문이 가진 위상과 기능은 무엇인가이다.

 

강연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학자의 자질을 다룬 학자가 되는 길의 외적-내적 조건’. ‘모든 것을 원칙적으로 계산을 통해 지배할 수 있다는 믿는근대 세계의 학문과 학문의 진보란 무엇인지를 다룬 합리화 과정과 학문의 발전’. 마지막으로 사실확인과 분석을 목적으로 하는 근대 학문에서 가치의 문제를 다룬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이다. 이상은 학문에서 가장 기본적인 문제들을 다루었다고 할 수 있겠다.

 

먼저 베버는 학자의 외적 자질로서, 능력과 요행을 거론한다. 왜냐하면 독일의 경우 학자의 경력은 전적으로 금권주의적 전제에 기초하고있기 때문이었으며, “재산이 없는 젊은 학자에게는 대학교수의 경력을 밟는 데 필요한 여러 조건들을 충족시키려는 시도 그 자체가 대단한 모험이었다. 대학이 자본주의화 및 관료화되면서 돈이 없으면 학문을 직업으로 삼기도 대단히 어렵게 되었다. 거기다 학자나 교수가 되기 위해서는 그 선발방식에서 요행이 엄청날 정도로 크게 지배하고 있다. 이 때문에 베버는 “‘요행이 그 정도로 큰 역할을 하고 있는 직업경력이 이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라고 묻는다.

 

다음으로 그가 말하는 학자의 내적인 자질은 열정과 소명 의식이다. 학문에 소명을 느끼는 사람은 어느 고대 필사본의 한 구절을 옳게 판독해 내는 것에 자기 영혼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생각에 침잠할수 있을 만큼 학문과 지적 탐구에 열정적이어야 한다. 열정과 더불어서 영감천부적 재능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영감은 어떻게 생기느냐? 영감은 착상은 자기 좋을 때 나타나지 우리가 원하는 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학문에서 결정적인 요소인 영감도 요행이다.

 

뿐만 아니라, 학자는 대학의 전통을 따라 연구와 교육이라는 두 요구 모두에 응해야하는데, 전자는 학자로서의 자질이고 후자는 교수로서의 자질이다. 하지만 한 개인이 이 두 가지 능력을 동시에 갖추고 있는가는 전적으로 우연에 달려있다. 베버가 한 얘기를 종합하면, “학자의 길은 거친 요행의 세계이다. 소명, 자질, 연구 과정 모두 운에 지배받는다면,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으며, 여기에 무슨 분석이 가능할까. 대학자의 말 치고는 실망스럽다. 이 말을 막스 베버 자신에게 적용한다면, 베버라는 학자는 그 자신의 열정적인 노력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무수히 많은 행운이 있었기에 그 탁월한 학문적 업적을 쌓을 수 있었다. 어쩌면 이것이 학문이 직업인 된 시대의 어쩔 수 없는 부분인 것 같다.

 

어쨌든 학자란 순수하게 자신의 주제에 헌신하는전문가 직군이다. 그가 할 일은 전문적 성취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며, 이에 의해 학문은 진보한다. 학문은 언제나 진보해야 한다. , 학문상의 성취는 후대의 성취에 의해 낡아버리게 되고,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 이러한 학문의 발전은, 초자연적이고 신적인 것에서 인간 이성을 더 신뢰하는 주지주의화와 합리화로 나아간다. 이리하여 근대의 학문은 신비스럽고 예측할 수 없는 힘의 존재를 부정하고 모든 사물은-원칙적으로는- 계산을 통해 지배될 수 있다고 믿고 있으며, 원론적으로는 이제 세계의 의미’” 같은 문제는 학문의 관심사가 아니다. 예컨대, 자연과학 등의 학문은 톨스토이의 지적처럼 윤리적-당위적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베버는 학문이 구원재와 계시를 희사(喜捨)하는 심령가나 예언자의 은총의 선물이 되는 것을 경계하며, 현실 정치에 대한 학자의 가치중립적 태도와 실천적 삶의 지향에 직접적으로 말해줄 수는 없는 학문의 한계를 강조한다. 그가 누누이 강조하는 학문이란 “‘자기성찰과 사실관계의 인식에 기여하기 위해 전문적으로 행해지는 직업’”이지 어떠한 가치가 더 추구할 만하며 옳은지는 말해줄 수 없다. 이는 신학이나 심령가나 예언자들이 하는 학문에서추구하는 학문이다. 그러니 학문으로 어떤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려는 시도 역시 부질없는 것이다. 학문이 이러하기에 학자 역시 그의 연구, 그리고 학생들 앞에서 탈가치화된 존재로 있어야 한다.

 

그러면 탈주술화된 세계에서 궁극적 가치는 어디로 갔는가? 그것은 학문의 장에서는 자리를 내주고, “삶의 은둔의 세계로 퇴장했거나, 아니면 개인들 상호간의 직접적 형제애 관계 속으로 퇴장했다. 이것이 이 시대의 운명이다.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읽고 가졌던 베버에 대한 존경심은 여기서 한풀 꺾였다. 원론적인 얘기지만, ‘가치판단을 배제한 학문이란 정말 가능할까. 베버도 인정했듯이, 학자는 학문연구에서 나오는 결과는 알 가치가 있다는 의미에서 중요하다라는, 학문의 수단으로는 증명될 수 없는 명제를 전제로 하기 있기 때문이다. , 학문이란 본질적으로 하나의 가치판단을 선행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그보다도 중요한 문제는, 학자이기 이전에 현실에서 특수한 입장과 주관을 가진 한 명의 개인으로서 정말 중립적가치판단이 가능하며, 그런 학자가 현실에 있어도 그는 올바른 사람이냐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명백하게 결정을 요구하는 때에 중립이라는 변명을 내걸며 뒤로 숨는 비겁한 인간이 아니던가. 그리고 하나 더, 베버 자신은 자신이 말한 학자론을 과연 충실히 지키며 살았던가.

 

가치중립적 태도를 비판한다고 하여, 대학 강단에서 교수가 자신의 정치색을 밝히며 이를 학생들에게 강요하는 것을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를 비판하는 베버와 같은 의견이다. 내가 반대하는 것은, 현실의 문제에 대한 가치판단의 중지를 요구하는 그의 학자론과 학문론이다. 오히려 우리의 매일매일의 삶에서 무엇이 올바른지에 대한 가치판단은 반드시 필요하다. 현실의 문제를 뒤로하지 않고, 개개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대로 행동하는 것. 그것이 더 요구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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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omy 2021-06-09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많은 부분 공감합니다. 베버는 객관적인 학문 연구를 위해 가치 판단으로 부터의 엄격한 분리를 학자의 사명으로 요구하지만, 삶에서 한순간도 가치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이기에 불가능한 요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히려 말씀하신데로 중립적이라는 방패는 불필요한 오해와 왜곡을 더 불러오기도 하죠. 차라리 나의 입장과 가치를 드러내면서 학문 연구를 하면 역설적이지만 더 객관적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참 어려운 문제긴 하네요 ^^;

김민우 2021-06-09 21:22   좋아요 2 | URL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 글을 쓰면서 하워드 진의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는 책이 계속 머리를 맴돌더군요 혹은 마루야마 마사오나. 과연 학문에서의 객관성이란 무엇이고, 그것은 어떻게 성취될 수 있을지,, 더 탐구해볼 주제인 것 같네요

초란공 2021-06-09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의 관점에서 과거 상황을 비판하기는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하긴 합니다만, 당시 독일 학계도 경직되어 있는 모습이 낯설지 지금 우리 상황과 비교해도 낯설지가 않네요. 베버가 낸 의견이 어떤 맥락에서는 학자로서 ‘겸양‘의 표현이었을까요. ^^;;

김민우 2021-06-09 21:06   좋아요 1 | URL
댓글 감사합니다. 겸양의 표현일 수도 있고, 어떤 면에서는 자신도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아서일 수도 있기 때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