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의미에서 박훈의 『메이지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는 일본근대사에 관심 있는 한국인에게는 그 자체로 흥미를 유발하는 제목이다. 먼저 이 책의 목차를 살펴보자.
1장 도쿠가와 체제의 구조와 특징
2장 일본은 어떻게 서양 문물을 신속히 수용할 수 있었나
3장 도쿠가와 막부는 왜 패했는가
4장 유학의 확산과 ‘사대부적 정치 문화’의 형성
5장 ‘사화’하는 사무라이와 메이지 유신
1장은 도쿠가와 막부의 정치체제가 어떻게 구성되었고 운영되었는지를 다룬다. 이 부분은 한국인 독자에게는 생소하여 읽기 어려울 수 있지만, 이후의 역사 전개와 저자의 논의를 따라가려면 반드시 숙지해야 하는 부분이기에 정독할 필요가 있다. 2장은 일본의 서양 문물 수용 과정을, 3장은 메이지유신 과정에서 막부의 존재를 다룬다. 4~5장은 저자의 고유한 견해로, 메이지유신과 근대화가 이루어진 데에는 서구 못지않게 유학의 영향도 크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이를 더 학술적으로 다룬 책은 동저자의 <메이지유신과 사대부적 정치문화>(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가 있다) 4장은 “사대부적 정치문화”와 일본의 유학화 경향을 설명하고, 5장에서는 이를 메이지유신과 연결지어 설명한다. 대충 목차를 훑어봐도, 도쿠가와 시대의 정치체제부터 메이지유신 과정을 잘 설명한 책이라는 것이 느껴진다.
역사 서적이 처음이라면, 어느 시대든 이렇게 기본적이지만 반드시 알아야 하는 내용, 특히 정치적 사건을 충실하게 다룬 책 한 두 권을 두 세 번 반복해서 읽고, 주제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이 책은 체계적인 서술은 아니라는 흠이 있지만, 일본근대사를 이해할 때 필수적인 개념이나 사항들을 충실히 다루고 있어 추천할 만하다.
박훈에 따르면, 메이지유신과 일본 근대화의 주요 성공 요인으로는 ‘서구의 충격’도 있지만, 이와 더불어 중요하게 보아야 하는 것이 일본 지배 계층의 유학화이다. “일본에서는 유학의 전성기에 서구화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 일본의 막부 정부는 무가 정권이기에 18세기 말 이전까지 일본에서 유학의 영향력은 미미한 정도였다. 과거제도 없었기에 학문으로 관직에 진출할 방법은 별로 많지 않았고, 생계를 위해서 학자들이 의사를 겸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경향이 뒤집힌 것은 1790년 도쿠가와 막부가 유학을 중시하는 정책을 잇달아 내놓으면서부터다. 막부 정권에서 지배층은 무인인 사무라이지만, 도쿠가와 체제가 안정되고 난 뒤에는 유례없는 장기 평화 체제를 경험하고 있었다. 그래서 무인으로서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기 어려워진 사무라이들은 “행정 능력과 정치 역량”을 키워야 했다. 그러한 필요 위에서, 전국적으로 많은 수의 교육 기관이 설립되었고, 주자학을 주로 배웠다. 그 결과, 사무라이의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학문적 소양을 갖춘 “독서하는 사무라이” 또는 “칼 찬 사대부”가 대량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사무라이들이 유학적 소양을 갖춘 엘리트, 즉 “사대부화”되면서 유학은 일본 사회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배 계층이 “점차 천하 대사, 국가 대사에 관심을 갖게 되고 ‘치자(治者) 의식’에 눈뜨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본의 정치 문화가 사대부적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신분 이동 현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정치의식” 면에서 지배 계층의 “정치화”, 더 나아가 사무라이보다 하위 신분인 백성 중에서도 정치의식이 고양된 자들이 나오게 된 것을 지칭한다.
학교가 우후죽순 생기면서 형성된 “학적 네트워크”를 통하여 사무라이들은 유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정치 경험을 쌓을 수 있었고, 이렇게 지속적으로 정치 경험을 쌓은 사무라이들이 서구의 충격에 대응했던 것이다. 일본의 근대화를 얘기할 때는, 이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유학의 정치적 영향은 메이지 유신 이후, 상서와 군주 친정(親政) 등을 통해 이어진다. 상서란 “유교 사회에서 흔히 사용되는 정치 참여의 수단”이다. 막부 말기에는, 막강한 정치적 효과를 지녔던 상서를 통해 사무라이들이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하고 여론을 형성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여기에는 심지어 상층 영민(領民)도 가세했다. 상서 문화는 메이지유신 이후까지도 이어졌다. 메이지 초기 여론은 “상서”와 “신문의 독자 투고란”을 통해서 표출되었다. 상서라는 전통적인 매체와 신문이라는 근대적 미디어의 만남인 것이다. 「민선의원 설립 건백서」는 이러한 배경을 두고 있다. 이를 보면, 70년대 자유민권운동도 유학적 정치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지배층이 유학적 소양을 지니게 되면서, 군주에게 기대하는 바도 달라졌다. 원래 막부 체제에서 번주나 쇼군은 정무가 아니라 “의례와 교제”를 주 업무로 삼았다. 그러나 막부 말기로 가면, 이들이 직접 정사를 돌봐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기 시작했고, 요시다 쇼인을 비롯한 여러 개혁가가 공감한 부분이기도 하다. 군주 친정이 특히나 더 중요한 이유는 근대 천황제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천황은 서양의 근대적 주권자로서의 형상을 띠게 되었지만, 여전히 “유교적 군주의 측면”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처럼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도쿠가와 막부 때의 “병영국가적 요소”와 함께 “사대부적 정치 문화”라는 유학적 요소를 모두 포함하고 있었고, 유학의 틀 속에서 서양의 충격과 맞닥뜨렸고 서양의 정치 문화를 수용하거나 변용하였다. 이러한 유학의 영향은 1890년, 헌법과 의회의 수립과 서양화의 물결 속에서 다시 희미해져 갔다. 유학의 전성기는 짧았지만, 유학이 근대 일본 사회에 남긴 흔적은 무시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