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살아남은 자의 증언 - 위장된 3차 대전과 잃어버린 청춘의 녹슨 파편
김정옥 지음 / 늘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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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옥, <나, 살아남은 자의 증언 – 위장된 3차 대전과 잃어버린 청춘의 녹슨 파편>, 늘봄, 2020

                            

 

1.

전쟁은 적과 동지의 구분이 보통의 때보다 극단적으로 심해지는 특수한 상황이다. 전쟁의 상황에서는 군인은 말할 것도 없고, 후방의 사람들마저 어느 한 쪽을 선택하게 된다. 선택해야만 한다. 1945년 8월 15일 직후 재편된 세계는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자유주의 측과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 측으로 양분된 극단적 대립의 시대였다. 이 시기를 냉전이라고 하는데, 냉전의 절정 중 하나는 1950년 발생한 한국전쟁이다. 이념적 갈등과 전쟁이 동시에 발생했으니, 이러한 상황에서는 중립이라는 단어는 ‘회색분자’라며 사상을 의심받는다. 저자 김정옥은, “1959년부터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극단 민중극장, 극단 자유의 동인으로서” 5편의 연극과 100여 편이 넘는 연극을 연출하였으며 국제극예술협회(ITI) 세계본부 회장을 세 차례 연임한 한국 연극예술계의 살아있는 증인이다. 이 책은 김정옥의 “私小說적 소설 또는 연극적 소설”이다. 소설의 주인공 “석두”는 저자의 호이지만, 저자는 “나”라는 인칭 대신 시종일관 “석두”라는 이름을 써 자신을 객관적으로 혹은 연극적으로 묘사한다. 본 서평에서는 저자의 의도대로 석두라는 이름을 쓰겠다.

2.

“소설 형식을 빌린 이 이야기는 이 책의 화자 석두가 소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입학면서부터 시작된다.” 석두는 광주 서중학교를 다녔고, 문학을 좋아하던 “내성적인 얌전한 학생”이었다. 해방 후, 좌파 독서회에 가담하기는 했으나 “순수한 독서회로 출발했던 모임이 남로당의 청년 조직으로 변모”하자 독서회도 다니던 학교도 무단결석하며 중앙대 국문과에 들어가기 위해 검정고시를 공부하였다. 그와중에도 “국도극장이나 단성사에 가서 악극이나 가극, 쇼 등을 구경”하기를 좋아했던 사람이었다. 1949년에는 정지용, 이태준 등의 구인회(九人會)를 본떠서 친구들과 구맥회(九麥會)라는 문학 모임을 만들어, “아홉 명이 돌려가며 자기 작품을 필사하는 필사본 동인지를 추진”했던, 그러면서도 대학 입시나 결혼으로 뿔뿔이 헤어지게 되는 것을 불안해했던 평범한 청춘이었다. 1949년이 꿈과 애정과 불안으로 보냈던 해라면, 1950년은 그러한 불안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실현된 해였다. 1950년 석두는 구맥회 동인 서홍, 신태호와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며 문학 고전을 읽는 문학 동인을 만들어 활동하였다. 하지만 그토록 원했던 대학 생활을 마음 편히 누릴 수도 없었다. 어느 곳에서나 전운이 나돌았다. 라디오 방송을 통해 직감적으로 전쟁이 임박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조소앙 선생도 “북한이 엄청난 군비를 소련으로부터 받고 있으며, 북한 전체가 병영화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전쟁 준비를 하고 있다는 점, 거기에 우리가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선거 연설을 하였다. 미국이 남한을 버리고 “공산주의가 이 땅에 들어서” “공산화되었을 때...할 수 있는 유일한 직종이 신문기자”일지도 모른다는 마음에 대학 수료증을 속여서라도 신문기자 학원에 등록하였다. “그날이 1950년 6월 20일이었다.” 그리고 “7월 1일부터 강의가 시작”될 예정이었다.

3.

6월 25일 새벽, 전쟁이 발발하였다. 이 때문에 약 1년간 석두는 안전을 위해 이곳저곳으로 도망치며 피신하다 길게 있지 못하고 다시 다른 곳으로 떠나는 생활을 반복하게 된다. 처음에는 친구 서홍과 함께 노령산맥에 몸을 숨기다가 인민군이 전남까지 진격하자, 광주로 돌아와 “서중 좌익계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발족”된 광주시 민청(民靑)의 위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의 생활은 매일같이 무의미한 자아비판과 당에 대한 충성심을 강요당해 자유란 누릴 수 없는 생활이었다. 이때 서홍과도 떨어지게 된다. 한편, 유엔군의 유인 작전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인민군의 기세는 기울어졌고 전면 퇴각을 결정했다. 이에 서홍 및 좌익계 학생은 영암 월출산으로 입산했고, 석두는 안전을 위해 다른 곳으로 몸을 숨겼다. 그곳에서는 나름 평화롭게 잘 지냈으나, 빨치산에 대한 두려움과 어머니의 권유로 서울에 있는 친형의 집으로 이동한다. 서울에서는 양 목사라는 인물과 만나 “미군과 유엔군 장교들 그리고 종군기자들 전용 식당이” 있는 내자 아파트에서 웨이터로 일하며 생활하며 지냈다. 그때는 1950년 말이었다. 유엔군이 “임진강을 방어선으로 고정”시켰으나 중공군이 참전할지도 모르는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결국, 임진강 전선이 무너지고 전면 후퇴를 예상한 미군의 제의를 받아들여 석두는 서울을 탈출하였고 부모님이 계시는 광주로 다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이후로부터는 쭉 광주에서 지낸다. 이 책은 분노의 책이다. 인간성을 말살시킨 허무한 이념적 대립에 대한 분노, 전쟁을 막을 수 있었음에도 막지 않은 정부에 대한 분노, 전쟁을 이용하여 자기 잇속만을 챙기려 하고 그 때문에 전쟁의 피해를 더 키운 이들에 대한 분노의 책이다.

4.

석두는 전쟁에 직접 참전하지는 않고 후방에서 살던 한 사람의 삶을 보여준다. 아마 김정옥의 삶은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겪었던 경험과 유사할 것이다. 시류가 아무리 극단적으로 흘러가더라도, 실제로는 그 양극단 사이 어딘가에 있는 경우가 더 많다. 석두가 그랬다. 그의 청춘 시절에는 신탁/반탁, 우파/좌파 등 하나를 선택하라고 “시국이 강요”하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는 무엇이 “옳은지 알 수 없었다.” 분열이나 강요받는 선택에 염증이 났었을 것이다. 천생 문학 소년이었던 그는 냉소성과 시니컬한 태도를 보여주며 끝까지 한쪽만을 골라야 하는 선택지를 거부하였다. 어쩌면 그래서 그가 살아남았던 것일 수 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라는 생각이 강하게 지배했다. 그러나 그의 친구들은 석두와 다른 길을 택했다. 서홍은 산으로 들어갔고, 태호는 인민군 의용군이 되었다. 전쟁 전에 월북을 단행한 친구들도 있었다. 석두는 그들을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었다. 서홍과 태호는 석두와 같이 구맥회의 동인이었다. 그들은 “이름처럼 소박하게 살며 문학을 하자던” 취지에서 함께 모인 문학 서클이었다. 하지만 “전쟁의 회오리바람이 스쳐 간 뒤 세 사람은 떠나가고 여섯 명만 남았다.” 또 한 친구는 전쟁 중에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 폐병으로 사망하였다. 구맥회는 “전쟁의 매서운 회오리바람에 산산조각난 것이다.” 특히 서홍은 석두와 중간까지 함께 했었던 인물이다. 원래라면 신문 학원에서 기자가 되기 위해 공부하고 있었어야 할 둘은 전쟁의 참화 속에서 다른 길을 가게 되었고, 서홍이 입산하기 전에 남긴 마지막 편지가 마지막 인사가 되어버렸다. 서홍은 전사하고 석두만 살아남았다. 이 책은 슬픔의 책이다. 함께 하지 못하고 자기만 살아남은 데에 대한 미안함, 슬픔, 한탄. 석두를 포함한 구맥회의 다른 살아남은 친구들은 이러한 심정을 “구맥의 파편”이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그들은 전쟁의 파편으로 살아남은 것 같이 느껴진 것이다.”

5.

그는 전쟁 후에도 여전히 회색분자였다. 파리 유학 중 윤이상 작곡가를 만났는데도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지 않았다. 김정옥과 광주서중 동문이자 월북했던 남파 간첩 김용구도 체포된 후 김정옥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김정옥은 혹은 석두는 어느 쪽에도 동의하지 않지만 자기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저자 본인도 인정하듯이, 그는 언제나 “본색을 드러내지 않는 회색분자”였다. 그래서 그는 “살아남은 자”가 될 수 있었다. 국가폭력과 좌우 이념 대립이 만연한 그때, 흑과 백 두 가지 선택지만 주어졌던 그때, 전쟁 중 “첫째는 국방군 따라가고/둘째는 산사람 따라가” 끝내 두 아들을 다 잃은 노파로 하여금 한밤중에 나타난 정체 모를 군인에게 “나는 아저씨 편이랑께”라고 절박한 외침을 하게 만든 그때, 그때 그렇게 김정옥은 석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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