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독교 형성사
옥성득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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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의 무교회주의자이자 조선을 성서 위에 세우겠다며 <성서조선>지를 창간하였던 김교신은 '조선산 기독교'라는 말을 남겼다. 이는 해외의 선교사들로부터 이식된 개신교가 아니라 조선인의 주체성이 담보되며 "김치와 된장 냄새가 나는" 기독교이다(그럼 루터의 신학에서는 독일산 맥주의 냄새가 나나?). 요는 서구의 종교인 개신교를 조선의 문화와 풍토 등에 맞춰 주체적으로 수용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1960년대에 더 강화되어 초기 개신교 선교를 "사상적 식민지적 예속"이라 부르며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표출하거나 해방신학, 바르트의 신정통주의에 영향을 받아 윤성범이나 민중신학의 안병무 등으로 이어진다. 최근에도, 이만열과 덴버신학대의 정성욱도 김교신의 "조선산 기독교"가 연상되는 주장을 한다(자세한 내용은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III권 참조). 한국 고유의 토착 신학과 토착 기독교를 주장한다는 것은, 뒤집어 생각해보면, 아직까지 한국의 개신교는 서구에서 들여온 외래 종교이며 더 나아가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이식된 종교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여담으로, '이식된 기독교 담론'이 과거에 한국의 민주주의는 해방 이후 미군정에 의해 이식되었다는 과거의 인식과도 묘하게 닮았다는 인상을 받는다). 서남동/안병무 등의 민중신학과 80년대 이후 고조된 반미주의는 '한국 고유의 기독교의 결여'를 더욱 강화하였고 초기 선교사들을 "보수적(49p)", "근본주의적(49p)", "배타주의적(46p)", "오리엔탈리즘적(51p)"이라고 규정하는 데에 일조했다.

2.

그러나 옥성득은 이만열, 민경배, 이덕주, 류대영, 박용규 등 기존의 한국 기독교사 연구가들이 초기 선교사들을 근본주의자, 보수주의자로 규정하며 초기 한국 기독교를 '선교사들의 의해 이식된 미국 기독교'로 보는 담론을 비판한다. 옥성득의 <한국 기독교 형성사>는 "미국-중국 기독교와 한국 종교 문화 속에 있던 친화적인 요소들 사이의 융합을 통한 토착적 한국 개신교의 창출사"에 관심을 두고, "성취론으로 기독교 토착화의 길을 연 온건 복음주의자"와 "1세대 한국 기독교인의 다층적인 신학과 신앙"의 역동적이며 창조적인 역사를 밝히고 이를 입체적으로 증명하려 노력한다. 특히 그 과정에서 그가 염두에 둔 것은 "미중한의 삼중 요소의 통합"으로, 조선 선교 이전에 쌓인 중국 선교 경험이 어떻게 조선 선교에 영향을 주었는지 보여준다.

3.

그에 따르면, 분명 초기 선교사들에게 오리엔탈리즘적 요소가 발견된다. 알렌은 선교 초창기 보고서에서 "한국인들에게는 종교가 없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기록하였고, 아펜젤러는 "유교를 종교가 아닌 윤리학 체계로 분류"하며 "불교 승려는 문명의 영역 바깥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다. 한국은 무종교의 나라(이는 기존 종교가 사회적으로 거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라는 "성급하고 피상적인 평가가 초기 선교사들의 활동 방향을 결정했다. 초기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무종교, 혹은 그릇된 종교들의 땅에 진정한 종교를 심는 사람들이라는 정체성을 확립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생활하는 기간과 한국에 대한 학문적 지식이 늘어나고, 한국인 성도들이 늘면서 선교사들의 평가도 바뀌기 시작했다. "그들은 한국인의 다층적 종교 정체성을 발견했다." Korean Repository의 창간, 동학농민운동, 하나님 용어 논쟁,한국인 지도자들의 성취론적 한국 종교 이해, 미국 ASV 역, 대부흥운동 등 일련의 6가지 사건들을 경험하며 선교사들은 초기에 가졌던 편견들 수정하고 한국인의 종교 전통과 기독교 신학을 조화시키기 시작했다. 이처럼 선교사들의 수정된 시각과 관점을 바탕으로 이 책의 각 장의 내용이 전개된다. 1장은 히브리어로 엘로힘, 헬라어로 데우스가 "하나님"(원래는 '나'는 아래아를 쓰지만, 불가피하게 하나님으로)으로 번역된 과정을 설명한다. 2장은 정감록 예언을 활용하여 한국인에게 십자가의 이미지를 이해시키고 메시아 신앙으로 발전시킨 과정을, 3장은 초기 선교사들이 조선 무당의 축귀 등 샤머니즘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다룬다. 1~3장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어떻게 한국적으로 받아들여졌는지를 다룬다. 4~7장은 유교의 제사, 서양과 조선 상황이 예배당 건축 발전에 미친 영향, 성취론적 입장의 한문 전도 소책자와 양반 지식인의 회심, 길선주 등 도교적 신앙을 가졌던 인물들이 새벽기도와 부흥회와 가지는 상관관계를 분석한다.

4.

그중에서도 가장 흥미를 끌었던 주제는 유교 제사문제였다. 중국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 선교사들도 초기에는 제사 문제에 대해 엄격한 자세를 취했다. 그 이유는 1) 죽은 영혼에 대한 제사는 우상숭배라는 점, 2) 근대 문명 개화 시세에 맞지 않다는 점, 3) 천주교 연옥교리 및 미사와의 유사성, 4) 유교 제사가 조선의 후진성의 원흉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두번째와 네번째 이유는 다분히 선교사들의 오리엔탈리즘적 편견을 지적할 수 있는 부분이고, 특히 4번째 이유는 일제의 정체성론과도 유사하다. 이는 "제사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제사 금지 정책이 시행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1890년대, 진보적 선교사들은 성취론의 관점으로 이러한 제사-우상숭배론을 비판하였고, 종국에는 "조상 숭배에는 적절한 공경의 뜻만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예배의 뜻도 있으므로, 제사 대신 중국인의 관점의 근접하는 추도회로 드리되 제사의 장점을" 살리는 쪽으로 선교 방향이 잡혔다. 이와 거의 동시기에 일부 한국 선교사도 제사 금지 신중론의 태도를 보이며,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지도를 받은 한국교인들이 제사 의례의 기독교화를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조선인의 다층적 종교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시왕이 죽은이의 혼(魂)의 운명을 결정하며 자손의 제사와 무관하다고 믿는 한국인들의 제사는 우상숭배와 거리가 있고 정성들인 제사와 하나님의 복을 연결지어 제사가 선교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 한국교회는 제사 금지 정책을 수용하면서도 이와는 다른 논리를 펼쳤다. 즉, "기독교가 유교의 약점을 보완"한다며, 한문소책자에 근거하여 "이 큰 道는 한 나라에 한정되지 않고 동서고금에 통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더 나아가 조선 유교의 天도 "전통적 하나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인격신 요소"가 유지되고 있다며 결과적으로 "만물의 근본인 하나님 예배의 회복은 유교의 완성"이라고까지 주장하기에 이른다. 노병선의 기독론적 조건부 보편 구원론, 길선주의 포괄주의는 위와 같은 성취론적 유교-제사 이해의 대표적 주장들이다. 결국, 선교사들은 제사가 지니는 긍정적 가치를 "기독교적으로 영구화시킬" 방안을 궁리했고, 그 결과로 '세례받은 제사'가 탄생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과 유교의 효 사상을 접목하여 효도 신학이 적극 소개되었고, "인류의 천부인 성부 하나님은 평등한 믿음 공동체, 효자의 모범이신 성자 예수님은 속죄와 화해의 사랑 공동체, 효도의 영인 성령은 거룩한 제의 공동체와 성례 공동체"라는 삼위일체적 차원에서 이해되었다. 효도신학의 배경에서, 오늘날의 기독교식 상례와 거의 유사한 절차의 상례와, 간단한 예배와 교제와 함께 조상에게 묵도하는 기독교적 추도회가 마련되었다.

5.

헬무트 리처드 니버는 기독교와 세속문화와의 관계를 논하면서 가장 이상적인 관계는 죄로 물든 세상의 잘못된 문화를 복음에 맞추어 그리스도교적으로 변혁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한국의 제사 사례는 세상변혁적 신앙의 한 예시라고 생각한다. 선교사들은 초기에는 편견 가득한 눈으로 제사를 정죄하고 금지하여 제사와 대립하였다. 그러나 중국 선교회의 경험과 한국의 현실과 한국인의 영성을 이해하면서 그들은 입장을 온건하게 바꾸었다. 그 덕분에 제사는 효도신학이라는 이름으로 기독교의 세례를 받았고, "제사의 문화적, 윤리적 전통은 유지하되 우상숭배 요소는 배제하고 대신 기독교적 요소로 대체"된 한국교회만의 기독교적 제사(추도회)가 등장할 수 있었다. 특히 한국에 맞게 제사의 대안을 고민한 목회적 모습에서는 배타주의나 문화적 제국주의의 면모 보다는 일면 포용적 면모가 돋보인다. 또한, 그 과정에서 길선주 등 한국 개신교회 초기 성도들도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은 여러가지를 시사한다. 이와 같은 저자의 논리는 1~7장까지 일관적이다. 기존의 연구자들이 인식하는 것과 같은 '문화배타주의적/근본주의적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이식되고 한국인은 배제된 한국 기독교'는 없다. 오히려 앞에서 본 제사의 사례, 뿐만 아니라 "하나님 용어"의 사용, 새벽기도회, 정감록 예언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한국인에게 이해시킨 사례처럼 초기 한국 기독교가 만들어져 가던 역사는 선교사들이 조선의 다층적 종교 위에서 개신교를 결합시킨 혼합주의의 역사였다. 선교사들은 일방적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전도하지 않았으며, 한국인도 수동적으로 이를 받아들이지만은 않았다. 김교신이 그토록 이야기했던 "조선산 기독교"는 이미 한국교회의 형성기부터 내재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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