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비 종교집단이 벌인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아이들 애비 멀린, 이든 플레쳐, 아이작
이들은 그 일이 있고 나서 수십년동안 만나지 않고 지내왔다.

애비 멀린은 뉴욕 경찰 인질 협상가로 활약을 하고 있는데 어느날 이든 플레쳐의 아들이 납치가 되고 이든 플레쳐는 애비에게 도움을 요청하려 수 십년만에 연락을 해서 만나게 된다.

소셜 미디어의 문제. 비틀림. 왜곡. 온라인으로 보면 사람들은 늘 완벽해 보인다. 그들의 가족은 가장 행복한 가족이고, 그들의 여행은 최고의 여행이었다 . 모든 사진이 멋지고 부럽고, 욕망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건 알고보면 현실과 거리가 멀었다.

사이비 종교집단, 소셜미디어 문제로 인해서 일어나는 현실의 문제.
어렸을때의 깊은 상처와 트라우마로 인해 왜곡된 기억들.

그런데 애비멀린이 아이작이라고 연락해왔던 사람은 도대체 누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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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피곤해서인지 범죄스릴러 작품을 종종 읽는다.

아이들을 악마로 키우는건 당연 부모이다.
MZ세대의 부모부터가 내 아이만큼은 부족하지 않게 키워야 한다고 하면서 MZ세대가 결핍을 모르고 성장한 경우가 많다. 그 MZ세대의 아이들은 앞으로 더 할 것이라고 본다.

내 아이는 아니라고 생각하겠지만, 밖에 나가서 일일이 따라다녀서 보는것도 아니고. 아이들을 잘 모르는게 부모 아닌가. 아이가 어떤 환경에서 어떤 부모를 만나 성장하는가에 따라 그 아이의 삶은 달라진다.

단순히 책이 아니라 요즘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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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만광년이란 엄청난 거리를 오직 한아뿐을 위해서 망설임 없이 온 그.

˝네가 내 여행이잖아.˝ 여행은 끝나지 않고 계속 된다.
사랑도 계속 된다.

과연 축복인가 저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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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는 각자 살아온 집이 있다. 집이란 그냥 집이 아닌 가족 개개인의 삶이 녹아 내려 있다. 좋은 기억일수도 있고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일 수도 있다.

작가는 혼자가 아닌 룸메이트와 살던 집에서 ‘자기만의 방‘을 갖는게 소원이었다가 나중에 ‘집다운 집‘으로 부를만한 장소를 갖게 되면서 변화되는 모습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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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 작가의 첫 장편소설.

12살 진희는 ‘바라보는 나‘와 ‘보여지는 나‘ 로 나누어서 살아가고 있다. 12살의 시각으로 보기엔 너무나 무리한 설정 같아 보이지만 진희를 통해서 바라보는 사람사는 모습들은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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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가슴속에서난 유년은 결코 끝나지 않는 법이지만 어쨌든 내 삶은 유년에 이미 결정되었다.
내가 내 삶과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나 자신을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로 분리시키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나는 언제나 나를 본다. ‘보여지는 나‘에게 내 삶을 이끌어가게 하면서 ‘바로보는 나‘가 그것을 보도록 만든다.

누가 나를 쳐다보면 나는 먼저 나를 두 개의 나로 분리시킨다. 하나의 나는 내 안에 그대로 있고 진짜 나에게서 갈라진 다른 나로 하여금 내 몸밖으로 나가 내 역할을 하게 한다. 다른 나는 남들 앞에 노출되어 마치 나인 듯 행동하지만 진짜 나는 몸속에 남아서 몸밖으로 나간 나를 바라본다. 하나의 나로 하여금 그들이 보고자 하는 나로 행동하게 하고 나머지 하나의 나는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때 나는 남에게 ‘보여지는 나‘ 와 나 자신이 ‘바라보는 나‘로 분리 된다. 물론 그중에서 진짜 나는 보여지는 나가 아니라 바라보는 나이다. 남의 시선으로부터 강요를 당하고 수모를 받는 것은 보여지는 나이므로 바라보는 진짜 나는 상처를 덜 받는다. 이렇게 나를 두 개로 분리시킴으로써 진짜 나는 사람들의 눈에 노출되지 않고 나 자신으로 그대로 지켜지는 것이다.

고달픈 삶을 벗어난들 더 나은 삶이 있다는 확신은 누구에게도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떠난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서라기보다 지금의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무 확신도 없지만 더 이상 지금 삶에 머물러 있지 않아도 된다는 점 때문에 떠나는 이의 발걸음은 가볍다.

나는 자아 속에서 천천히 나를 분리시키고 있다. 나는 두 개로 나누어진다. 슬픔을 느끼는 나와 그것을 바라보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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