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일리치의 죽음 창비세계문학 7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이강은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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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죽음이 여러 사람을 바쁘게 만들었다. 비어버린 퍼즐 블록의 한 자리를 얼른 새로운 블록으로 채워 완성해야만 하는 것처럼 여러 사람이 바쁘게 움직였다. 마치 활력을 불어넣을 만한 일이 생긴 것처럼 말이다. 이기적인 속성을 드러내는 사람들의 모습에 과연 나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자문할 수밖에 없을 만큼 현실의 잔인함을 톨스토이는 냉철한 시선으로 담았다.

이반 일리치는 판사로서,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것을 다 갖춘 듯 보였다. 성공과 출세가 부와 명예를 안겨주고 주변에는 상류층 사람들만 존재했기에 그토록 원하는 품위를 지킬 수 있었으며, 평범한 시민의 시선으로 그의 삶은 분명 꽤 괜찮았다. 어느 날, 몸에 이상을 느껴 아내에게 등 떠밀려 찾게 된 병원에서 만난 의사에게 법정에서 짓고 있던 자신의 익숙한 표정과 태도를 발견하게 된다. 뻔한 절차를 진행하며 뻔한 대답을 요구하는 근엄한 표정 말이다. 처음으로 타인의 모습에서 나 자신을 되돌아보는 경험에 이어, 누구나 가질 수 없는 안락한 삶을 살았던 그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의 문턱에 서게 된다.

나는 죽음을 맞이하는 일보다 죽어가는 이를 돌보는 이의 입장에 서서 들여다봤다. 죽음이라는 공포감이 만들어낸 암흑세계 안에서 꺼내줄 수 없는 무력함과 절망감에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서도 상처받지 않고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아기를 다루듯이 대해야 하는, 몸과 마음이 모두 예민해져 있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생각이 깊어지는 경험을 누구나 겪어봤거나 겪고 있거나 겪게 될 것이다. 희망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사람을 위로하려 다가간다는 것은 사실 참 힘들다. 일부러 내색하지 않고 밝은 모습을 보여주면 ‘나는 이렇게 아픈데 저 사람은 뭐가 이렇게 신이 났지?’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봐 주춤하고, 안쓰러운 마음에 조심스럽게 대하면 환자 취급하는 게 서글프고 짜증스럽게 느껴질까 봐 또 주춤하게 된다. 그러나 이반 일리치의 가족은 그를 세심하게 대해주지 못했다. 죽음의 문턱에 선 사람 앞에서 그깟 오페라 망원경을 챙겼는지, 그리고 누가 그걸 어디로 치웠는지 따위의 논쟁이나 벌이며 시간을 허비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반 일리치도 돈과 명예로 해결할 수 없는 병을 얻기 전까지는 자신의 가족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삶의 끝자락 혹은 파멸의 경계에 와서야 사소한 것의 소중함, 그리고 대수롭지 않은 것에 목숨이라도 건 사람처럼 시간을 허비했던 어리석음이 더욱 선명하게 떠오르고, 그만큼 자신의 존재는 소멸해 가는 과정에서 약간의 부족함을 느끼긴 했어도 제법 만족스럽게 살아갔던, 적당히 흘러가는 삶 속에서 느낀 행복한 순간들이 자꾸만 떠올라 그를 괴롭히며 생의 연장을 요구했다. 이런 이반 일리치의 심경을 들여다보는 동안 몸과 마음을 스스로 다스리지 못하는 존엄을 잃는 그 순간에 내가 과연 무엇을 해줄 수 있단 말인가 하는 깊은 고뇌 속에서 이 생각 저 생각, 별생각을 다 해봤지만, 도무지 어디서도 답을 얻을 수 없는 지경에 다다랐을 때가 떠올랐다. 애석하게도 이런 과정을 통해 과거에는 그리 중요하지 않게 느껴졌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 같다. 누군가의 죽음이 나를 그렇게 이끌었다. 이런 감정은 한 단어로 표현되지 않는 것 같다. 알고 싶지 않은데 알아버리게 된 그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톨스토이의 작품을 이번에 처음 접했다. 왜인지 그의 이름만으로도 내가 갖고 있던 이미지는 신화 속 인물 같은 느낌이 있었는데, 막상 읽어보니 공감할 수밖에 없는 개인의 삶과 내면 세계를 다루고 있었고, 현실의 삶 속에서 스스로 자신의 가치와 의미를 깨닫고 완성하기 위해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 만들어서 입문작으로 좋은 선택이 아니었나 싶다. 서사 구조가 간단하지만, 날카로울 만큼 사실적이기에 가슴 속에서 무언가 계속해서 묵직한 뜨거움이 올라오면서 내 목을 괴롭혔고, 책을 핑계 삼아 눈물을 확 쏟아내고 싶을 만큼 비애를 느껴야만 했다.

이 소설은 죽음을 의식으로부터 밀어버리려고 했지만 결국 몇 분, 몇 시간 만이라도 고통을 느끼지 못한 채 잠을 잘 수 있기를 바라는 단계까지 와버린 이반 일리치가 불안과 공포를 느끼는 상황 속에서도 집요하게 자신의 삶에 몰입하는 동안 얻게 된 깨달음을 알려준다. 자신이 떠난 뒤의 세계를 상상하며 존재의 공허가 만들어낸 두려움과 절망에 빠지다가도 오늘은 그럭저럭 덜 아픈 몸 덕분에 마음까지 밝아져 희망을 얻기도 하는 과정을 반복하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는 동안 되뇌고 또 되뇌었던 수많은 생각들 사이에서 그가 발견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말이다.

“그래, 모든 것이 잘못되었었다.” 그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하지만 괜찮아. 어쩌면 아직, 아직 ‘그걸’ 할 수 있어. 그런데 ‘그게’ 도대체 뭐지?” (p.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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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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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독자는 문학작품에서 자기가 일상에서 느껴온 것들을 찾고 싶어 한다. 작가가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자기가 느껴온 것 말이다. 문학의 신비로운 힘은 여기서 나온다. 모든 작품은 누군가가 읽기 전까지는 단지 하나의 작품일 뿐이지만, 천 명이 읽으면 천 개의 작품이 된다”

한창 더운 7월의 어느 여름, 위화의 <인생>을 참 재미있게 읽었는데 벌써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구마와 따끈한 붕어빵을 먹으면서 배 속이 뜨듯해지는 것이 딱 이대로 자면 참 좋겠다 싶은 계절이 와버렸다. 나는 곰이라서 동면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럴 수 없는 현실이니 입이라도 즐겁게 맛있는 간식을 옆에 두고 <허삼관 매혈기>를 펼쳤다. 작가의 서문이 참 좋다. 독자를 향해 감사의 말을 담은 개정판의 서문인데, 책과 나의 거리를 가깝게 좁혀주는 말 한마디가 동면에 들어가지 못한 곰 한 마리의 마음을 스르르 움직이게 했다. 뒤로 이어진 서문에 또 콧구멍에서 피식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게 만드는 작가의 말이 이어졌지만, 나도 나름대로 부끄러움이 있는 곰인지라 생략할 수밖에 없겠다.

어릴 적 외할아버지 댁에 놀러 갔을 때, 부엌에서 외할머니가 이것저것 만들고 계시길래 뭐든 다 궁금해서 물어보는 병에 걸려 사람들을 귀찮게 하던 내가 묻고 또 물었다. 찌개에 톡톡 넣는 하얀 가루의 정체가 궁금해서 물어보니 미원이라고 말씀해주셨다. 그때는 그게 그렇게 궁금했다. 설탕 같기도 하고 소금 같기도 한 가루의 맛이 어떨지.

“할머니, 미원은 무슨 맛이야? 짜? 달아?”
“무슨 맛이 있다기보다는 그냥 음식에 조금씩 넣는 애야, 얘는.”
“아니, 그래도 어떤 맛이 있을 거 아니야. 응?”
“흐음... 순수한 맛?”

꼬맹이가 순수한 맛이 어떤 맛인지 당최 알 도리는 없고, 나중에 TV에서 조미료는 몸에 안 좋다며 음식에 넣지 말아야 한다는 둥 안 좋은 쪽으로 이야기하는 걸 주워들은 내가 어린 마음에 ‘우리 할머니는 나한테 몸에 안 좋은 걸 넣어서 음식을 만들어 주셨던 거구나….’라며 배은망덕한 오해를 하기도 했다. 먹을 땐 좋다고 뱃속으로 집어넣었던 할머니의 음식이 그릇으로 몇 그릇인지 새지도 못하고 기억도 못하는 녀석이 말이다. 이제는 할머니가 말한 순수한 맛이 어떤 뜻인지 알아들어도 열두 번은 더 알아들을 나이가 되었지만, 여전히 생생한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아직도 웃음이 새어 나온다. 허삼관 이야기를 좀 들여다봐야지 했는데, 책장을 넘기자마자 허삼관의 할아버지 이야기가 나오는 바람에 갑자기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지고, 지나간 삶을 추억하며 소소한 즐거움을 잠시 누려봤다.


“저 장가나 가버릴래요.”

삼촌의 외밭에 가서 온종일 죽치고 있다가 수박 두 통을 해치우고는 해 질 무렵이 되어서야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허삼관이 피를 팔러 가는 근룡이와 방씨를 우연히 만나 따라갔다가 얼떨결에 피 팔아 벌어온 돈 삼십오 원을 어떻게 쓸까 생각하다가 장가나 가버리겠다고 한다. 힘을 들여 번 돈이 아니라 제 피를 팔아서 번 돈, 말 그대로 피 같은 돈이니 허투루 쓰고 싶지는 않았던 거다. 성안의 생사 공장에서 누에고치로 가득 찬 수레를 미는 작업을 하고 지내는 허삼관에게 예비 신부 후보가 둘씩이나 있다. 하얀 이를 드러내며 볼우물까지 있는 큰 눈을 가진 임분방이 1번! 뒤이어 간이식당에서 꽈배기를 튀기는 예쁘장하게 생긴 허옥란이 2번! 수박이나 먹을 줄 아는 사람인지 알았더니 패기가 넘쳐 황주 한 병과 담배 한 보루 들고 허옥란의 집에 찾아가 허씨 가문의 대를 잇게 해 준다며 데릴사위를 자청한다. 결국 허옥란이 허삼관에게 시집을 가는데 이 소식을 알려주는 장면을 읽고 한 몇 초가 지났나? ㅋㅋ 분만대에 누워 있는 허옥란이 진통을 겪고 있는 게 아닌가?! 난 속으로 ‘아, 벌써 임신해서 출산하는구나.’ 했는데 두 번째 출산이란다. ㅋㅋㅋ 이렇게 낳은 자식이 5년 동안 아들만 셋. 그들의 이름은 허일락, 허이락, 허삼락이다. 이름 짓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을 것 같은 이 아이들이 어느새 훌쩍 자랐고, 하루는 싸우고 들어온 삼락이를 위해 형으로서 나름의 역할을 해 보겠다며 이락이가 식식거린다.

“이런 씨팔, 감히 내 동생을 얕보는 놈이 있다니. 가서 그 자식 손 좀 봐줘야겠는걸.” (p. 78)

뭐, 물론 내 맘처럼 세상이 잘 돌아가 준다면 좋으련만….
팔뚝에 주삿바늘을 꽂고 피를 뽑아 돈을 받아 결국에는 허옥란과 결혼까지 하게 된 허삼관이 십 년 만에 다시 병원을 찾아 피를 팔아야 할 지경에 처한다. 말해봐야 입만 아프고 속만 터진다. 쪼잔하고 옹졸하기로는 어디 가서 안 빠질 허삼관은 허삼관대로, 부인은 부인대로, 애들은 애들대로 조용할 날이 없지만 시간은 흐르고 계절은 바뀐다. ‘아니, 이런 삶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었을까?’라고 놀랄 만한 상황도 자다가 목이 말라 찬물을 들이키고 다시 드러눕는 것만큼이나 대단하지 않은 일처럼 받아들이고 산다. 허삼관이 때론 앞에서 화통 삶아먹는 소리를 하며 화를 더 긁고 말로 다 까먹기도 하지만, 자기 배만 채우려는 사람이 아니라 인간의 도리를 아는 사람이기에 사람 마음을 참 와따가따 하게 만든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대규모 기근이 발생하여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목숨을 잃는 참혹한 상황에서 허삼관네 가족의 상황도 다르지 않으니, 목숨을 부지하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기며 멀건 옥수수죽으로 끼니를 해결해야 했다. 배고프다며 고래고래 소리치는 자식들에게 움직이면 배가 고프니 조용히 누워 있으라고 다그치다가, 피골이 상접한 자식들의 모습이 짠했는지 허삼관은 상상의 요리를 만들기 시작한다. 아버지가 말로 만들어내는 요리를 아이들은 침을 꿀꺽꿀꺽 삼키며 듣고 있다. 쓸데없이 요리 과정은 어찌나 생생한지 모른다. 허파에 바람이 든 사람이 아니고서야 웃으면 안 될 아주 심각한 상황에서 이 꽉 깨물고 웃음을 참아야 하도록 만드는 것은 정말 위화가 손가락 안에 드는 것 같다.

가혹한 운명과 공평하지 않은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해 위화는 버티는 것 말고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던 시대의 아픔을 비극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고통 안에서도 좌절 대신 나름의 즐거움을 찾길 바라는 듯이 글을 써내려갔다. 그의 또 다른 소설 <인생>과 시대적 배경이 비슷해서인지, 남루한 모습으로 자신과 닮은 소 한 마리 끌고 밭에 나가 쉬고 일하고 쉬고 일하는 것을 반복하던 노인 ‘푸구이’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사는 어느 가족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구구절절 긴 말이 필요 없을 것 같다. 다 읽고 나면 투박스럽고 억척스러운 모습에 손사래를 치게 만들고, 뜻이 맞지 않는 일만 점점 늘어나는 내 집 식구들을 들여다보는 눈길에 애정이 한 스푼 더 들어가게 되고, 괜히 뭐라도 하나 챙겨주고 싶게 만들어주는 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자네들, 먼저 이 소금을 좀 먹어봐. 소금을 먹어서 입 안에 짠맛이 돌면 그때부터는 어떤 물이든 다 마실 수 있거든.” (p. 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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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들 은행나무 세계문학 에세 23
치고지에 오비오마 지음, 강동혁 옮김 / 은행나무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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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고지에 오비오마의 첫 장편소설 <어부들>은 이번에 내가 처음 읽어보게 된 나이지리아 이보족 출신 작가의 작품이다. 이 소설의 주요 인물이 이보족 가정의 형제들이기 때문에 간략하게 역사를 덧붙이자면, 식민 지배라는 역사를 빼놓을 수 없는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 역시 대영 제국이 식민화하면서 자국의 이익을 제외한 그 어떤 것도 고려하지 않고 국경선을 마음대로 그어버려 같은 부족이 여러 나라로 갈리고 다른 부족이 한 나라에 섞여버렸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1967년에 나이지리아의 종족 중 ‘이보족’들이 비아프라 공화국을 건국하고 분리 독립을 선언했는데, 영국 식민 통치에 협조하고 영국으로부터 지원받았던 이보족의 역사로 인해 독립 후 나이지리아에서는 차별과 배제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역사적 아픔의 무게가 실린 시계추는 멈추지 않고 세월은 흘러갔다. 그렇게 흘러간 세월만큼 잊을 수 없을것만 같았던 것들도 점차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히고 있을테지만 그럼에도 지울 수 없는 기억과 상처를 안은 채 사람들은 오늘의 평화를 바라며 그렇게 하루를 살아가고 있으리라.

1996년 1월, 나이지리아 아쿠레 마을에 사는 중산층 이보족 가족의 하루도 분명 그러했다. 아버지가 자식 욕심이 많아 열다섯 살인 장남 이켄나와 보자, 오벰베, 벤저민(화자), 데이비드, 그리고 여동생 은켐까지 총 5남 1녀를 두었다. 너무 어려 어머니의 손길에서 떨어질 수 없는 데이비드와 은켐을 제외한 나머지 아들 넷이 이 소설의 핵심 인물로 등장하는데, 한참 밖에서 놀기를 좋아할 나이다 보니 우르르 몰려다니며 축구공을 뻥뻥 차서 남의 집 창문을 깨부수기도 하고, 한바탕 꿈에 부풀어 희망 찬 미래를 상상하면서도 지나간 일은 굳이 담아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개구쟁이들답게 방문 밖에서 들리는 부모님의 높아진 목소리에 귀가 쫑긋해져 동태를 살피며 자기들끼리 추리를 펼치는 등 천진난만한 일상을 보낸다.

역사적 원한과 갈등이 있는 이보족과 요루바족이 같은 지역에 거주하고 있지만, 이 가족이 사는 마을에서는 요루바족인 선생님이 이보족 학생의 이름을 정확하게 발음하기 어려워하는 등 일상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 정도만 종종 나온다. 어찌 보면 주어진 환경과 생계가 어려운 아이들과 달리 부모님의 울타리 안에서 바깥세상을 제대로 경험할 일이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뛰쳐나와 집에 들어가기 전 막다른 골목을 향해 계속해서 걷는 이 아이들의 발걸음을 따라가면 북부인들이 거주하는 곳에 다다르게 되고, 대부분 기독교인인 남부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느끼게 된다. 무슬림이 거주하는 곳임을 알 수밖에 없도록 깔개에 무릎을 깔고 앉아 허리를 숙여 기도를 하는 모습, 그리고 장터 전체가 구더기 떼처럼 모여든 사람들로 부글거리는 모습까지…. 이처럼 지역마다 인종, 언어, 문화, 종교, 경제적 차이 등을 실감하게 하는 문장을 통해 간접적이나마 나이지리아의 문화를 체험할 수 있었다. 조만간 오랜 시간 내 책장에서 잠들어 계시는 같은 이보족 출신의 작가 치누아 아체베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도 살살 깨워 드려야겠다.

얌전히 집에서 독서를 하는 모습을 보이면 부모님이 무척이나 좋아하시겠지만 슬슬 또 발동이 걸리기 시작한 형제들이 친구 몇 명과 함께 ‘오미알라’ 강에 낚시하는 것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한다. 참고로 이 강이 어떤 곳이냐 하면, 이제는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경멸을 당하게 된 통행 금지령이 내려진 곳이다. 원래는 숭배의 대상이었지만 유럽에서 식민주의자들이 찾아와 성경을 소개했을 때부터 점차 아쿠레 마을 주민들에게 버려지게 되었다는 이곳에서 아이들은 보상도 없이 고생만 하고, 이곳저곳 다치면서도 부모님 몰래 하는 짓이 대체로 스릴 있고 재미있듯이 그저 물고기 잡는 것만으로도 엄청나게 즐거워했다.

평범했던 일상이 지나가고 한순간에 상황이 바뀌어 나이지리아 중앙은행에 다녔던 아버지가 북쪽 마을로 전근을 가게 되어 장터에서 신선식품 가게를 운영하는 어머니가 졸지에 혼자 아이들을 돌보게 된다. 더욱이 아버지가 계신 ‘욜라’라는 곳에 1996년 3월 유혈 분파주의 폭동이 터져 집에 자주 올 수 없게 되는데, 여기서 잠깐 부모님 소개를 간단히 해보자면, 이보족의 전통과 변화 앞에 균형 있게 가정을 유지하기보다는 서구 문화에 치우치는 아버지는 ‘서구적 교육’에 열성이면서도 이보족의 전통인 가부장 제도를 따르는 사람이다. 잘못할 경우 채찍질을 하는 아버지와 달리 미신적 행동을 하면서도 남편의 말에 의존하는 어머니의 힘 잃은 모습이 펼쳐진다. 사랑하는 어린 자식들을 불완전한 사회 속에서 지키려는 부모의 표현이 현대인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 분명 안정감을 느끼기 어렵게 보이고 우려의 시선으로 들여다보게 될 때가 있긴 하지만, 이들의 문화와 분위기를 인식하고 바라봐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

번개가 번쩍이며 우르르쾅 천둥소리 뒤에 금방이라도 무섭게 비가 쏟아질 것 같은 불안감에 집 밖을 소심하게 내다보듯 서서히 질서가 무너지고 균열을 보이는 상황은 아직 사회의 복합성과는 거리가 먼 아이들의 경직된 감정을 느끼게 했고, 각 등장인물의 상황 안에 예전 식민주의가 아프리카 대륙을 잠식했을 때 겪었을 아픈 역사와 문화 충돌, 그리고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불안을 떠올리게 할 만한 문장까지 적절히 녹여 더욱 안타까운 시선으로 들여다보도록 만들었다.

“가고 말고는 너희 마음이지만, 그런 식으로 다시 목소리를 높이지는 말거라. 알겠느냐?” (p. 34)

우리 모두 꺼리는 점이 있었다. 보자는 오미알라강이 작고 그 안에는 ‘쓸모없는’ 물고기밖에 없다는 점을 싫어했다. 오벰베에게는 물 밑, 강 속에는 빛이 없는 만큼 밤에 물고기들이 뭘 하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이 문제였다. 그는 밤이면 강은 이불처럼 덮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물고기들이 대체 어떻게 ―전기도, 등불도 없는데―돌아다니는지 자주 궁금해했다. 그리고 나는 방어와 올챙이의 나약함이 매우 싫었다. 강물에 담아두는데도 얼마나 쉽게 죽는지! 이런 약점에 나는 가끔 울고 싶었다. (p. 81)

어느 날 아이들은 강에서 모두가 미친 사람이라고 부르는 ‘아불루’를 만나게 되는데, 이들의 만남은 살만 루슈디의 <한밤의 아이들>이 떠올려지기도 했다. 주인공 살림의 외할아버지가 카슈미르 골짜기의 지박령 같은 존재인 늙은 뱃사공 ‘타이’를 만났을 때처럼, 현실인지 아닌지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마치 꿈속에서 벌어진 일 같기도 한 상황이라든지, 기괴함이 느껴지는 아불루에 대한 묘사 등이 그러했다. 극히 일부분에 대한 비교일 뿐이지만, 살만 루슈디의 작품에서는 ‘아니, 어딜 맨입으로 단박에 알려고 들어?!’라는 듯 너스레 속에 잔혹한 인도의 역사적 진실을 녹여 기발함에 놀라면서도 익살스러움 뒤에 숨겨진 애환을 헤아리는 과정을 거치면서 정신적 교감을 오고 가게 했다면, 치고지에 오비오마의 <어부들>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형들을 통해 대부분의 사물을 이해하며 자라온 동생이 어디서도 본 적이 없고 들어본 적 없는 처음 겪는 기묘한 상황을 아직은 동심을 가진 아이의 시선으로 표현해 준 느낌이었다.

그 남자는 우리 눈앞에 벌거벗은 채 누워 있었다. 걸친 것이라고는 어깨에서 허리까지 느슨하게 걸려 있는 넝마 한 조각이 전부였다. 사타구니는 빽빽한 털로 덮여 있었고, 그 한가운데 혈관이 두드러진 성기가 허리띠처럼 흐늘거리며 늘어져 있었다. 그의 두 다리는 팽팽한 정맥들로 터질 듯 했다. 그는 귀청을 찢을 듯한 시끄러운 고함을 내지르며 망고를 아주 높이 내던졌다. 기세만 봐서는 망고가 30킬로미터쯤 떨어진 마을 중심부에라도 떨어질 것 만 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발밑이 쑥 꺼지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p. 135)

기괴함으로 오싹하게 만드는 아불루가 이켄나를 부르기 시작한다. 평범한 인간으로 느껴지지 않아서일까? 그의 부름에 두려움에 찬 친구들은 하나둘 떠나고 형제들만 남았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켄나를 부르는 아불루가 “너는 붉은 강에서 헤엄칠 것이나 다시는 그 강물에서 떠오르지 못할 것이다.”라며 영 사람을 찜찜하게 만드는 재수 없는 말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침이나 ‘퉤’ 뱉어버리고 탁 털어내면 좋을 이 말 한마디를 예언처럼 받아들인 이켄나는 완전히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가웠던 모습을 잃어가고 형제 간의 사이도 점점 틀어지게 된다. 그런 이켄나를 놓쳐버린 연의 끈을 바라보듯 했을 동생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우애 좋던 시절이 눈앞에서 필름처럼 지나가는 것을 허망하게 느끼며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길 얼마나 간절히 바라고 있을까 싶어 내 콧등도 조금 시큰해져왔다.

식민 지배를 받은 나라인 아프리카 출신의 작가라는 이미지가 심어준 선입견이 있었던 것 같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물고기를 잡는 어부들 간의 갈등이나 정체성 혼란, 사회적 및 문화적 영향 등을 중심으로 줄거리가 이어질 것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읽어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저자는 1986년생이라 나이지리아 독립(1960년) 이후의 내전, 쿠데타 등을 직접적으로 겪은 세대가 아니기 때문에 여러 사회 문제에서 조금은 빗겨나갈 수 있지 않았겠는가. 물론, 대규모 반정부 폭동이 일어났던 1993년에 형들의 손에 이끌려 다녔던 겁먹은 동생의 불안과 공포를 다루고는 있다. 어쩌면 저자가 직접 눈으로 봤을지 모를 그때의 공포스러운 광경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심정을 그대로 담고 싶어서 이 소설의 화자를 형제 중에서 당시 자신의 나이와 비슷한 벤자민으로 정한 걸까라는 생각도 해봤다.

여전히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어려운 나이지리아의 현재까지 이어지는 내전, 부정부패,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가 가속화시키는 남북전쟁 등으로 무고한 시민이 희생당하고 빈부 격차가 나날이 벌어지는, 그야말로 반 토막으로 썰린 세상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과 지나간 역사를 알아챌 수 있도록 곳곳에 담았다. 비중이 크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위기를 맞닥뜨리게 된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감정 변화를 담은 서사에 나이지리아 속담, 전통 등을 접목하여 그들의 문화를 더 자세히 알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었다. 특히, 동물에 관해서 많이 접하게 되었는데 평소에 좋지 않은 징조로 느껴졌던 ‘거미’가 이보족에게는 슬픔의 동물이라는 것이 색다르게 다가왔다. 슬퍼하는 사람들의 집에 둥지를 틀고, 점점 더 많은 그물을 소리 없이, 마음 아프게 짠다고 믿었다는…. 이 말에 왠지 앞으로 집에서 거미를 발견하게 되면, 예전과 달리 ‘이 녀석이 내 슬픔을 알고 찾아왔나?’라는 생각에 조금은 덜 무섭고 덜 징그럽게 들여다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 때 보면 나란 사람은 말 한마디에 참 현혹되기 쉬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심리 변화가 오히려 인간이든 사물이든 동물이든 그 무엇이 되었든 바라보기 나름이고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생각, 존재의 다면성을 떠올리게 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낯선 곳에 덩그러니 놓여진 것만 같은 십대의 연약한 소년이었기 때문에 마지막 장을 넘기는 순간까지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만큼 예기치 못한 사건들이 많이 등장한다는 의미다. 그런 내가 가장 흥미롭게 들여다본 것은 연약함과 강함이 공존하는 인간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과 미래에 그려지는 불행 중 어느 것이 더 구체적인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만드는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점이었다. 물론 이러한 생각에만 멈추도록 저자는 한정된 곳에 독자를 가두지 않는다. 그래서 꽤 생각할 게 많은 소설이었다. 이것은 치고지에 오비오마가 독자와 마주하게 한 단순한 아이의 시선이 던지는 불완전하고 연약한 메시지가 오히려 깊은 사유를 끌어내는 힘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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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중 그 누구도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 아우슈비츠와 그 이후
샤를로트 델보 지음, 류재화 옮김 / 가망서사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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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는 더 이상 살아 있지 않다”

프랑스 극작가 ‘샤를로트 델보’는 나치 독일이 점령한 프랑스 비시 정권 하에서 반독 저항 운동을 하다가 1942년에 남편과 함께 체포되어 1943년에 아우슈비츠로 이송되고, 1944년 초 라벤스브뤼크 수용소로 이감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1945년 4월에 석방된다. 유명한 연극배우이자 감독인 ‘루이 주베’의 비서였고, 극단의 순회공연으로 남미에 체류하고 있었으나 비시 정권이 레지스탕스를 탄압하는 과정에서 문화예술계 친구들이 고초를 겪자, 주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파리로 돌아올 만큼 연대와 희생, 그리고 사랑의 가치를 알았던 그녀다. 이 책은 델보의 27개월간의 수용소 생활과 살아 돌아온 경험, 그리고 살아남은 동료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해야 했던, 아니, 해야만 했던 델보의 표현 방법은 때로는 시처럼 다가오기도 했다. 총 3부로 되어 있는데, 마지막 3부는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또 다른 여성들의 말을 담고 있다.


책 가장자리를 독서대 고정핀으로 고정하니 종이가 매끈해서인지 고정핀이 톡톡 튕겨 나갔다. 확 펼치면 속지가 뜯어질 것만 같아 약간의 불만을 느끼며 읽기 시작했다. 그래도 입안에서 살살 굴려 가며 녹여 먹는 사탕은 맛있었다. 이 달콤함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입안에 침과 이따금 목을 축일 만큼의 커피도 충분했다.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했던 날도 있었고, 이대로 사라져 버렸으면 하는 마음이었던 적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내내 굶지는 않았다. 극심한 갈증에 더 이상 입안에서 침이 돌지 않아 미각을 잃었던 적조차 없다. 맛집에 늘어선 줄에서 대기를 하고 있어도 어르신과 아이들을 대동한 가족에게 자리 양보하는 것쯤이야 전혀 문제도 아니고, 추운 날씨에 든든하게 챙겨입었기 때문에 햇빛이 들어오는 공간을 차지하기 위해 누군가를 떠밀어서라도 차지하고픈 욕심 또한 없다. 볼일을 다 보고 나면 집으로 가면 된다. 집은 그런 곳이다. 집이라는 게 무엇인지 잊을 수가 없는 당연한 보금자리.

그런 내가 애당초 이 책을 읽고 이해하고, 공감하는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도 알 수가 없다. 살아 돌아온 여성들이 나와 같은 사람들을 향해 말한다. 자신들의 경험은 쓸모없는 지식일 뿐이라고. 그렇지만 그들은 말해야만 했다. 자신들의 귀환과 돌아오지 못한 여성들의 죽음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 그러니 말해야 했다. 그리고 우리는 간절한 마음으로 읽어야 한다.


아침을 알리는 채찍 소리와 함께 저항 의지조차 잃은 여성들이 추위 속에 내던져졌고, 바닥을 평평하게 하려고 진흙을 떠 밖으로 던져야 했다. 다 같이 작업을 하던 중 카포 여자가 들이닥쳐 고함을 치고 동료들을 데려가 혼자 일하게 된 ‘나’는 홀로 남겨졌다는 절망에 두려움만 느꼈다. 혼자 있으니, 귀환을 믿을 수가 없다. 도랑에 홀로 남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불안에 떨고 있는데, 다른 작업장으로 옮겨진다. 팔 힘이 다 빠져 고통스럽고 아파서 작업을 이어 나갈 수가 없다.

“오늘은 할 수가 없어.”

‘륄리’라는 여성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조심히 다가와 손목을 붙잡으며 말했다.

“너 안 보이게 내 뒤로 와. 이젠 울어도 돼.”

이 말이 필요했던 거다. 겁먹지 말라며 마른 나무줄기 같은 손으로 자신과 다를 바 없는 연약한 손목을 잡아주며 저마다 서로를 진정시키고 안심시키려 하는 모습을 보인다. 조금 더 기운이 남아 있는 사람이 더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말이다. 필요에 의한, 목적이 있는 친절과 배려가 아니라 같이 살아남기 위해서. 화장터 굴뚝에서 밤낮으로 사람들이 타죽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연기를 바라보면서 말이다. 수용소 생활을 담은 1, 2부를 읽는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서로를 이끌어주는 동지애였다. 아무도 불안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음에도 서로 불안과 고통을 덜어주려 했다. 안심시키려 애쓰고 있었다.

수용소와 관련한 책 중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었을 때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목표’를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해준 것이 가장 크게 와닿았었는데, 이 여성들에게서도 마찬가지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아침부터 처음으로 수프나 잡일, 빵에 대한 걱정을 잊게 한 순간이 이들에게 존재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들만의 연극 <상상병 환자>를 성공적으로 올리는 것. 이 목표가 그들을 잠깐 또 버티게 해준 것이다. 자신의 뜻에 따라 무언가를 한다는 그 사실이 의지가 남아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자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었던 순간이 돼 주었던 걸까? 정말 상상할 수 없는 굉장한 힘이 아닐 수 없다. 아우슈비츠에서 말이다.

허영기 없는 배우들의 기적. 문득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되찾고, 상상을 되살리는 관객의 기적. 놀라웠다. 왜냐하면 그 두 시간 동안은,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인육의 연기가 그치지 않는 와중에도 우린 우리가 연기하는 세계를 더 믿었기 때문이다. 그 믿음은 당시 우리가 유일하게 믿었던 자유, 이를 위해 앞으로 500일을 더 투쟁해야 했던 바로 그 자유를 향한 믿음보다 강했다. (p. 254)

구원을 믿을 수도, 바랄 수도 없는 상황 속에서 서로 기대고 부축하면서 힘을 비축해 끝까지 살아남으려 했다. 어떻게 친절과 연민을 간직할 수 있었단 말인가. 나는 알 수가 없다. 수용소에서 돌아온 그녀가 호텔방에서 침대에 일어나 방문을 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식당으로 내려가 접시를 든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모두가 서로 아는 사람인 듯 수다 떨며 웃음으로 가득 찬 그 공간 안에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괴로운 일이며, 내 앞에 놓인 빵을 먹고 맛을 음미하기보다 얼른 다시 호텔방으로 올라가 혼자 울어버리고 싶다는 것을. 그러나 도저히 자신이 묵고 있는 호텔방이 몇 호실인지 기억이 나지 않아 혼자서는 찾아서 올라갈 용기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알지 못한다. 나의 성조차 기억이 나지 않아 아버지의 이름을 묻는 말에 머뭇거리는 것을 말이다. 모두가 지나간 일은 잊고 살아가 주길 바라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 눈빛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게 무엇인지를. 그토록 원하던 귀환이 이토록 괴로울 수가 없는 그 무너지는 마음을 나는 알지 못한다.

행복이라는 것, 그건 우리가 던질 수 있는 질문일까? (p. 364)


델보를 비롯해 수많은 사람이 의지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고통과 돌아오지 못한 이들을 위로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 아니다. 고민이라는 표현은 너무 가볍다. 그저 애도의 시간에 붙들려 똑같이 죽어 있는 사람으로 머물러 있듯이, 살다 보면 무어라고 할 수 없는 그 마음을 어쩌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이 책에 추천의 글을 적어주신 목정원 작가님은 “타인의 몸에서 발생하는 허기를 권태를 절망을 간절히 바라봄으로써 함께 겪어 내 몸처럼 이해하는 일. 간절히 읽는다면 우리도 알게 될 테니”라며 서로를 격려하는 말을 담아주셨다. 때론 응시하며 연민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상대에게는 거북스럽고 오히려 상처를 입히는 행위가 되어버릴까 봐 어떤 식으로 위로의 마음을 전해야 하느냐는 생각에 머물러만 있을 때가 있다. 그럴 때 읽었던 슈테판 츠바이크의 <초조한 마음>에서 와닿았던 말을 적어본다.

그토록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자신의 걱정을 이해하는, 아니, 적어도 이해해 주려 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갖는지 당신이 이해해 줬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야기해 주는 겁니다. (<초조한 마음>, p. 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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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11-09 13: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리모 레비, 장 아메리와 같은 증언 문학이군요. 프리모 레비는 인간임을 잊지 않기 위해 매일 이를 닦고, 단테의 신곡을 외우고, 프랑스인 동료에게 프랑스어를 배웠다고 하더군요. 증언하기 위해 삶을 이어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면 숙연해집니다.

곰돌이 2025-11-09 11:48   좋아요 0 | URL
수용소 안에서도 사람의 ‘선’을 느끼게 했던 인물의 일화를 이야기하면서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말했던 프리모 레비의 말이 떠올려집니다. 서로가 버틸 힘을 주고받는 그 자체가 경이롭게 느껴져서인지 이따금 수용소와 관련된 책은 의도적으로 읽게 되는 것 같아요.

yamoo 2025-11-10 13: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리모 레비, 장 아메리...모두 서경식의 <디아스포라 기행>에서 본 작가들입니다..ㅎㅎ
프리모 레비는 작가 서경식이 가장 애정하는 작가인듯하네욤...^^;;

곰돌이 2025-11-10 13:46   좋아요 0 | URL
그 애정 안에 동질감이 있으셨을 것 같아요. yamoo님께서 <디아스포라 기행> 리뷰를 올려주신 게 기억납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중에서...

하루보다 더 긴 것은 무엇일까? 하루가 흐르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 P80

낮이다.
습지는 안개를 뚫고 나온 태야의 노란 빛줄기로, 차가우면서도 희부연 빛으로 해쓱하다.
안개가 걷힌 습지는 태양 아래 다시 액체로 흐른다.
완전히 낮이다.
키 큰 황금빛 갈대들이 반짝이는 습지 위의 낮이다.
공포에 질린 눈을 한 벌레들이 지친 습지 위의 낮이다.
삽이 점점 더 무거워진다.
옮기는 여자들은 점점 더 끌개를 낮게 끈다.
인간 형상의 벌레들이 죽어가는 습지 위의 낮이다.
흙덩이는 들어 올리기 불가능해진다.
이것은 낮의 끝까지의 낮이다.
허기, 열병, 갈증.
이것은 저녁까지의 낮이다.
허리는 고통 덩어리다.
이것은 밤까지의 낮이다.
얼어붙은 손들, 얼어붙은 발들.
이것은 태양이 저 멀리 성에로 만든 수의(壽衣) 속 나무 형상을 어슴푸레 빛나게 하는 습지 위의 낮이다.
이것은 영원을 향한 낮이다. - P80

"봤어? 봤어?튤립이야."
모든 시선이 그 꽃에 쏠린다. 여기는 얼음과 눈의 사막인데,
어떻게 튤립이. 창백한 두 이파리 사이에 분홍빛이 어떻게.
우리는 그 꽃을 바라본다. 얼굴을 후려치던 싸락눈을
우린 잊는다.

하루종일 우리는 그 튤립을 생각한다.

아침에, 호수 길로 나가는 교차로에서
우리는 잠시나마 희망의 순간을 만났다.

그것이 어장을 관리하는 SS의 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우리의 추억을, 그리고 아직도 다 말라 없어지지 않은 우리 안의 이런 감정을 증오했다. - P98

심장은 추위로 졸아들고, 오그라든다. 오그라들어
아프다. 갑자기, 뭔가가, 내 심장에서 부서진다. 심장이
흉곽에서, 그러니까 심장을 제자리에 위치시키는 주변의
모든 기관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것 같다. 나는 내 안에서
떨어지는, 갑자기 떨어지는 돌 하나를 느낀다. 그것이
나의 심장이다. 경이로운 행복이 몰려든다.
차라리 이 취약하고 까다로운 심장이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다.
어쩐지 가벼워지며 몸이 이완된다. 행복의 가뿐함이 이런 것이겠지. 모든 게 내 안에서 녹는다. 행복의 액체성이 밀려온다. 나는
다 내려놓는다. 죽음에 나를 내맡기니 너무나 달콤하다.
사랑보다 더 달콤하다. 다 끝났다는 것을, 고통받는 것도,
투쟁하는 것도, 더는 뛸 수 없는 이 심장에 불가능을
요구하는 것도 다 끝났다는 것을 알고 나니. - P104

우린 서로 떨어지고 싶지 않다. 우린 서로를 보호한다. 동기 옆에 머물고 싶어 한다 자기보다 더 약한 동기 앞에, 그래야 그녀를 향한 매를 대신 맞을 수 있으니까. 약한 동기 뒤에, 그래야 넘어지려는 그녀를 붙잡을 수 있으니까. - P143

난 철저히 소유한다.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은 죽음과 대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쓸모없는 지식이다.
존재한다고 믿지만, 살아 있는 게 아닌 어떤 세계에서
그 모든 지식은 알게 된다 해도 쓸모없다. - P328

어떻게 해야 도망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나를 해체할 수 있을까? 도대체 어떻게 해야 과거에 붙들리지않고, 벽에, 사물에, 추억에 부딪히지 않을 수 있을까?
동시에 모든 게 비현실적이었어. 점도가 없는 것처럼.
점도는 없는데 베일 것 같았어. 모든 것에 멍이 들었고,
온몸이 다 퍼런 멍 자국으로 뒤덮인 기분이었어. 실제로는
피부의 어디도 아프진 않은데도.
그 이후... 나는 어떻게 해냈던가? 이따금 나는 그걸 묻곤 해.
잘 모르겠어. - P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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