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이 또한 정치적 행위이기에 반정치로서의 정치이며 정치로서의 반정치다.

근대적 개인은 익명으로 존재함으로써 자신의 인격과 존엄을 보호한다. 허락받지 않고서는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존중하는 것이 바로 그의 존엄을 존중하는 것이다

개인 정보가 공개됨으로써 그에게 신성불가침의 영역이 남아 있지 않게 되는 순간 파괴되는 것은 인격이다.

정보가 아니라 그 사람의 사회적 생명인 자유와 인격 전체가 먹이가 되어 말살당한다. 이런 점에서 신상털이는 사람을 사냥해서 먹어 치우는 디지털 시대의 카니발리즘, 인육 사냥인 것이다. 우리는 이미 정보가 ‘육肉’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피해로 인해 야기된 고통은 피해자를 말할 수 없는 실존의 차원으로 밀어 넣지만, 피해 자체는 실존적인 것이 아니라 권력 관계에 의해 만들어지는 사회적인 것이다.

고통을 설명할 언어가 없는 동안에는 삶 전체가 하나의 덩어리, 즉 고통으로 여겨진다. 고통이 온 삶 전체를 잡아먹는다. 내 삶의 어떤 부분이 고통과 관련된 문제이고 어디서부터는 고통으로부터 떨어질 수 있는 것인지를 분할할 수 없다.

그 선언의 언어가 없기에, 파괴된 일상은 마치 붕괴되지 않은 것처럼 지속된다. 피해자는 자신의 일상이 파괴된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말조차 할 수 없는 상태로 그 일상을 지속해야 한다.

그렇기에 피해에 대한 언어가 생기면 다시 자신의 일상을 복구하게 된다. 또한 이 말이 트이면서 비로소 다른 이들과 교류하고 소통하는 영역이 복구되기에 폐허 가운데서도 사람들과 함께 일상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이것이 관종들에게는 ‘위선’으로 보이고 공격의 대상이 된다.

결국 피해자들은 두 가지 가면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을 강요받는다. 하나는 피해자답게 모든 것이 무너져 있는 존재를 연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치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고 고통도 없었던 것처럼 연기하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이 양자택일의 강요를 따르면, 피해자가 언어를 만들어 자신의 삶을 폐허 위에 복구하는 일은 완전히 불가능해진다. 삶이 복구되는 순간 그는 가짜로 매도당한다.

세계의 붕괴와 그 세계를 다시 지을 수 있는 언어의 박탈로 인한 고통이라는 점에서 각자의 고통은 개별적이고 고립되어 있으며 그렇기에 절대적이다. 고통은 그 수준이나 정도를 가늠하여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고통이 가진 절대성을 의미 있게 여기고 다루는 것이 아니라 ‘뉴스 가치’에 도달할 정도의 수준과 내용, 강도인 고통을 건져 올릴 뿐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고통의 절대성이 아니라 선정성이다. 따라서 이 플랫폼에 올라탈 때 피해자는 자기 고통의 절대성을 선정적으로 드러내야 한다. 물론 이때 돈을 버는 것은 고통의 절대성을 선정적으로 드러내어 주목을 이끌어내는 플랫폼 자체다.

그런데 고통에 대한 언어는 고통을 말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처절한 자각으로부터 나온다. 말할 수 없기에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는 지난한 과정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분별하고 분할하게 된다.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함으로써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도 말할 수 있게 된다. 언어에는 신비로운 힘이 있어서,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표기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그 앞에서 침묵하게 하고 그가 당한 고통의 절대성에 예의를 갖추고 존중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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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주목은 최소한 ‘둘’을 넘어서는 다자적 관계이며 더욱 공개적이거나 공적인 공간에서 작동하는, 사사로운 것의 문턱은 넘어선 관심을 말한다. 셋 이상으로 구성된 친밀성의 세계나 사회적 공간에서의 관심이 주목이며, 관종들이 바라는 것은 이런 ‘주목’으로서의 관심이다.

사실 ‘망신 주기fingerpointing’는 오래된 정치적 방식이다. 특히 권력자의 위선과 이중성double standard을 폭로하고 지목하는 것은 피지배층이 많이 사용해서 그 효과를 누려왔다.

관종들은 조금이라도 부도덕한 일이 벌어지면 총출동하여 그 대상을 발가벗기고 조리돌린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와 그 일의 전후 사정 등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 자체이며, 그 일로 어떤 사람의 위선이 벗겨지고 추악한 실체가 드러났다는 사실 자체다. 그래서 관종들에게 중요한 것은 사건의 흐름이라는 ‘맥락’이 아니라 단편 단편에서 사람들의 위선과 추악함이 드러나는 감추어진 ‘팩트’다. 팩트는 ‘사실’보다는 ‘단편’이라는 뜻에 훨씬 가깝다.
관종들의 말과 행태가 대부분 위악적인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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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이 타자의 현존과 관련된 것이라면 재미는 타자를 소비한다.

소수자들이 느끼는 고통은 그 이외의 다른 존재로 존재감을 가질 수 없다는 데서 비롯된다. 존재감이 대체 불가능성이라는 고유함에서 온다고 한다면, 소수자들은 각각의 자기 이름을 가진 개별적 존재, 즉 개인으로 존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는 언제나 범주화된 집단의 이름인 ‘소수자’로만 불리고 사회적 가치를 가지게 된다. 심지어 그의 고통을 이야기할 때조차 그가 말해야 하는 고통은 소수자로서의 고통이지 그 외의 다른 고통은 무시되고 삭제된다. 소수자를 비하하고 조롱하여 얻는 웃음은 이들의 개별성, 즉 인격과 존엄을 파괴한 고통의 등가물이다.

그리고 놀림감이 된 사람에게는 즉각 ‘존경’을 표해야 한다. 전체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조롱거리로 내어준 것에 대해서 말이다.
암묵적인 동의하에 자신을 비하와 조롱의 대상으로 내어줄 때조차 당하는 사람이 느끼는 것은 존재감의 하락이다.

조롱과 폭로를 통해 관심을 끌려고 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 ‘비참의 전시’를 통해 재미를 유발하려고 한다. 타인의 인격과 존엄을 파괴하고 그 비참을 전시하는 것을 통해 관심을 끌려고 하는 사람, 이들을 우리 사회는 ‘관종關種’(‘관심 종자’의 준말, 지나치게 주목받고 싶어하는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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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그는 나에게 현존으로, 나는 그에게 유익으로 다가간다. 이것이 상호적일 때 비로소 우정이 되고 이 관계가 지속될 수 있다. 비대칭성이 상호 지속될 때, 우정은 사랑과 마찬가지로 존재감을 고양시키며 큰 기쁨이 된다.

다른 누구도, 무엇도 아닌 나로서의 나, 우리는 이것을 ‘인격’이라 부른다. 사람은 누구나 나 자체로 존중받고 싶어하고, 특히 그 누구도 아닌 사랑하는 이가 그렇게 대해주길 바란다. 사랑은 내가 다른 어떤 속성이 아니라 바로 인격으로서 존중받는 것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사회에서 무시당하고 모욕당하고 손상된 존재감을 고양해준다.

그 결과 존중받을수록 인격이 무시되고 모욕당하는 역설이 현대의 사랑에서는 구조화되고 말았다. "저는 여성을 혐오하지 않습니다. 여성을 제가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이 말은 존중이 모욕으로 도착倒錯되는 것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나의 고유한 인격은 그 수많은 역할과 나 사이의 간격, 차이로 존재한다.

그와 나의 관계에서 유익이 아닌 현존이 핵심이라는 서로 간의 확신이 없다면 이 관계는 쉽게 흔들린다.

사회적 영역처럼 친밀성 영역에서도 존재감은 ‘현존’이 아니라 필사적인 ‘관심 끌기’로만 가능한 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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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로 다른 사람의 관심을 끌 수 없다면 무엇으로 관심을 끌 수 있을까? 사회적 영역에서 더 이상 존재감을 얻기가 힘들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존재감을 얻을 수 있을까? 여기에서 잘 살펴봐야 하는 것이 다음 장에서 이야기할 친밀성의 영역이다. 이 영역에서 서로에게 가져야 하는 ‘관심’을 상품화한 것이 바로 주목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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