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시집을 한 편 한 편 읽는다.

요리레시피를 보고 한 편의 요리를 만들 듯

<<싱고, 라고 불렀다>>라는 시집을 읽으면 전혀 생판 모르던 한 사람의 굽은 어깨가, 무거운 한숨이, 오지 않을 애인을 기다리며 동전도 집어 넣지 않고 공중전화기를 들어 자그마한 목소리로 얘기하는 화자들이 지나간다.

 

 

예전에도 시를 보았겠지만 시가 아프게 다가오는 것은  아픔에 좀더 민감해져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태어난 데 무슨 거창한 이유가 있겠느냐마는

거창한 이유도 없이 꼬박꼬박 밥 먹고 오지 않는 잠을 애써 청하는데 지쳐버렸던 즈음에서야, 시가 읽힌다.

남의 아픔은 이해하거나 동감하기가 어려워서 아니 쳐다보는 게 무섭고 무거워서 시 같이 개인적인 서술을 애써 피해 왔다.

그런데 이제 그런 시들이 정답게 말을 건넨다.

위로가 되는 시는 스케치북에 한 편 한 편 옮겨쓰기도 한다.

 

며칠 째 해무에 뒤덮인 뿌연 눈 먼 도시같은 하루를 보내고 답답해서 걸으니 바람이 손님맞이하듯 온 몸으로 감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덥지만 또 걸으면 시원한 바람이 느껴지는 초여름 날씨에 어제 있었던 역사모임에 대하여 간략한 후기를 올립니다.

3장에 걸쳐서 첫째, 6.8 혁명은 혁명인가 아니면 봉기인가 만약 실패한 봉기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면 혁명이란 무엇인가.

 

혁명이란 혁명을 이루려는 주체세력과 그들의 목적이 있어야 하는데 정치권력을 바꾸는 데까지 다다르지 못했으므로, 또 이후 다원적인 세력들이 모여서 힘을 결집시키지 못하고 분열했다는 내용과 하지만 대학의 평준화와 일상생활에서 창조적인 변혁과 기존의 질서와 가치체계에 분열을 가져와서 서구에서는 6.8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점에서 혁명이라 부를 수 있다는 의견 등 얘기를 나눴습니다.

 

두 번째는 89년 동구권의 붕괴를 다루면서 무혈혁명, 벨벳혁명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폴란드는 10년간의 노조를 주체로 파업으로 이끌며 원탁회의를 통해 정권교체를 이루었고, 헝가리, 동독의 베를린 붕괴, 불가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등은 각각 10개월. 10, 10일 등 그들의 체제를 혁명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고도 혁명적인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들이 공산화를 이룰 때 한국의 경우와 달리(1945~1948) 나치에 대항했던 독립세력과 저항세력들이 모여서 정권을 잡았는데 왜 정당성있는 지배체제가 억압적인 권력으로 변모되어 피지배계층으로부터 외면을 받았는지는 아쉽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동구 유럽의 혁명적 상황은 그 후 그들이 원했던 사회모습이나 체제로 실험, 발전되지 못하고 자본주의의 영향력에 흡수되어 자본주의로 나아가게 되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던져줍니다.

 

세 번째는 21세기 새로운 전쟁, 테러리즘과의 끊없는 소모전쟁을 폭력의 바이러스의 침입으로 이해하고 얘기했습니다.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해체로 보스니아-코소보 전쟁, 아프리카 르완다 내전, 수단 내전에서 보듯 인종청소와 대량살상은 힘의 공백상태에서 무장의 사유화가 가져온 타 집단에 대한 증오와 파괴 본능이 전쟁을 새로운 측면에서 정의하게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미국중심의 세계화와 테러와의 전쟁이 오히려 세계의 무질서와 테러행위를 증폭시켰으며 테러리스트가 흔히 IS의 훈련된 전사들이 아니라 2016년 프랑스와 독일의 경우 난민의 배경을 가졌지만 폭력이나 소외로 좌절당한 남성이라는 데 주목해야 한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이러한 세계사적 변화 내에서 한국의 68, 베트남전쟁의 목적, 그리고 그 후의 상황 등을 짚어보며 한국의 내재적 발전과정과 혁명적 협상혁명 대한 얘기(촛불혁명), 현재 긴장이 고조되는 남북한 문제 등을 아울러 얘기했습니다.

 

다음 역사모임은 7/721.2.3장에 대해 다룰 예정이고 전갑득선생님께서 발제를 해주시기로 했습니다.

책을 읽는다는 행위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라고 질문한다면 헛되고 황당하게 다가오지만 최소한 상상력에 권력을 주는 행위로 자신의 일상행위에 변화와 연대를 가져다줄 수 있음을 의식하려 합니다.

불만과 좌절이 아니라 계획과 인내로 한 걸음 더 성숙할 수 있기를 힘을 내어봅니다. 여러 선생님의 건강을 기원하며 다음 모임 때 뵙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15. 4.1 쓴 글이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었을 때 느꼈던 감동에 비하여 무의미의 축제는 솔직히 뭐가 좋은지 잘 모르겠더라구요.

하지만 그래서 더 알고 싶어서 계속 머릿속에 남아서 책은 이미 다 덮었지만 마음속으로는 계속 이 책을 읽고 있는 기분이랄까 아직 다 못 읽은 찝찝한 기분 탓에 무언가를 적어야겠고, 그런 다음에야 잠시나마 이 책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소설이 저널리즘과 다른 이유가 소설을 읽고 나면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충동이랄까 동기부여를 주기 때문이라 합니다. 그래서 좋은 소설과 나쁜 소설은 독자에게 감동을 통하여 뭔가를 던져주는지로 갈라지.

쿤데라의 무의미의 축제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는 무엇일까요?

 

등장인물 중 알랭을 따라가 보면 엄마와 자신을 연결해주는 배꼽이 나옵니다. 이 배꼽이 있고 없고가 인간과 천사의 구별표시이며, 신에 의해 창조된 최초의 여자 하와와 그 뒤의 여자를 구별시킵니다. 작가는 이러한 구분, 경계에 대해 깊이 생각한 듯합니다. 신의 의도로 만들어진 하와에게는 배꼽은 없지만, 존재 자체심히 보기 좋았더라는 말처럼 유의미했습니다. 애초에 누구의 어머니도 아니었고 자연과 신의 질서 속에서 하나의 모습으로 있었다면 그 후의 여자들은 물론 다릅니다.

 

작중에서 알랭의 어머니는 임신을 원치 않은 상황에서 알랭을 가지게 되고 태내의 알랭을 품은 상태로 물속에 들어가 자살을 하려 합니다. 하지만 구해 주려고 물속으로 뛰어든 젊은 남자를 죽이고 대신 그녀와 태 속의 아이는 물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이 부분은 오디세우스의 이야기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세상에 나온 아들 대신에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사람을 죽이고 대신 물 밖으로 나온 인간의 원형을 상상하게 됩니다. 그래서 배꼽으로부터 떨어지기도 전에 살해한 알랭은 원초적인 죄의식을 안고 있습니다.

누군가와 부딪쳤을 때 미안합니다라며 먼저 사과할 수밖에 없는 사과쟁이인 것이죠.

 

이 세상에서 더는 의미나 신의 질서를 구할 수 없게 되었고 여자들이 배꼽을 드러내놓고 이를 예쁘게 전시하는 시대, 더 이상 생명존중이나 신의 질서를 기대할 수 없다는 현실 인식을 드러냅니다. 단지 흔적처럼 남은 알랭의 배꼽, 젊은 여자의 배꼽을 통해 사과쟁이들의 세상을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혼잣말로 읊조릴 뿐입니다.

 

또 다른 작중인물로 스탈린과 오줌을 참지 못하는 칼리닌의 관계 역시 머릿속에서 계속 남아있습니다. 작가는 이런 환유로 어떤 의미를 만들고 싶은 걸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게요. 이 소설이 저를 고양시켰냐구요?

인생이란 출생도 죽음도 무의미한 순간입니다. 그 속에 스탈린과 칼리닌처럼 독재자와 그의 충실한 관료도 우스꽝스럽습니다.

언어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인 경계를 허물 수 없음을 깨달은 두 연극배우는 그들만의 언어 허구의 파키스탄어로 연극을 합니다. 차라리 사람들의 언어를 못 알아듣는 체해야지 다른 사람들이 안심하고 경계를 풀고 그들을 인간적으로 품을 수 있을 테니깐요. 이처럼 쿤데라의 소설은 등장인물의 상황묘사, 인물 설,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큰 주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단지 직접적인 언어가 아닌 간결한 문체에 담긴 소설적 양식을 통해서요.

 

어떤 소설적 양식이냐구요? 첫째는 환유, 은유를 통해 사실을 농담처럼 드러내고 두 번째는 깊은 사색의 통찰을 아포리아로 얘기한다면 그러한 아포리아를 소설적 구조 속에 벽돌처럼 잘 끼워 넣어서 집을 지었다고 얘기할 수 있겠네요.

 

시간이 지나서 이 책을 다시 읽게 된다면 또 다른 인물을 통해서 다른 색깔로 칠해진 다른 벽돌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하며 이제는 이 책을 덮으려 합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이토 다카시의 혼자 있는 시간의 힘

이 책은 기존에 가지고 있는 생각을 정리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고독이란 말은 너무 무겁고 혼자 있는 시간을 가져라는 말은 보다 부드럽게 들린다.

아마도 어른이 된다는 것은 혼자 있는 시간이 점점 많아지고 또 스스로 혼자만이 집중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속에서 뭔가에 노력하고 열정을 쏟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미리 전제하고 있다.

사춘기 때 혼자 있는 것과 노년이 돼서 혼자 있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또한 혼자 있는 것을 버거워하면서 계속 TV나 라디오, 음악을 틀어놓고 지내는 일상을 별 반성 없이 보내는 사람과 침묵과 고요함, 집중, 이완에 마음을 모으는 사람은 다를 것이다.

 

이 책을 자기계발서로 분류할 수 있겠지만 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문점이 있었기에 이 책을 읽으면서 나름 위로도 받을 수 있었다.

모든 사람들은 다 다르다. 그리고 그 다름에서 자기만의 어둠이나 무의식, 노력, 열정, 분노 등 많은 감정들이 어쩔 때는 서로 조화롭지 못하게 충돌하고 분출하기 마련이다.

이 때 이러한 감정과 본능을 다스리기 위해서 제일 필요한 게 뭘까?

혼자 있는 시간을 확보하고 그것을 응시하며 조용히 가라앉히는 정체, 정지, 휴식이 아닐까.

 

지금 궁금한 점은 지적 탐구에서 지적 희열로 넘어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5. 11. 23일 쓴 글이다.

역시나 레이먼드 챈들러의 글은 기억나지 않지만 주저 없이 이 책을 사야겠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기나긴 이별(The long goodbye를 읽고

이 소설은 미국과 영국이 사랑하는 필립 말로라는 탐정이 등장하는 챈들러의 후기 대작이다. 그렇게 소개하는 글을 읽고 이 책을 집었다.

영화, 드라마는 스릴러를 무척 좋아하면서도 책은 구태여 추리소설을 집어 들지 않은 나에게 이 소설을 무라카미 하루키가 8번 이상 읽었다는 말에 더욱 그 매력이 궁금했다.

다음은 내가 꼽은 이 소설은 매력사항이다.

 

처음에는 소설의 문체에 반했다.

그 다음 손님은 그다진 늙진 않았지만 그다지 젊지도 않았고 그다지 깨끗하지도 않았지만 너무 더럽지도 않은, 확실히 가난하고 초라하며 시비조의 얼굴을 한 어리석은 여자였다

 

우리는 개도 못 먹을 정도는 겨우 면한 수준의 햄버거를 만드는 드라이브 식당으로 갔다.”

 

그는 애견대회에 나온 개처럼 걸어보라고 한다. 그는 지쳤고 냉소적이지만 유능하다.”

    

 

 

와 같이 자연물이나 사물에 감정적 형용사를 부여하고 어느 것 하나 대충 넘어가는 묘사가 없다. 화가로 치면 색깔과 모양, 냄새까지도 붙잡고 예민한 촉감으로 사로잡아 화폭에 담는 작가인 셈이다. 아니 이러한 설명은 그의 문체에, 그의 작품에 너무 진부하다.

틀린 해설이다.

단지 레이먼드 챈들러는 그만의 문체로 그만이 할 수 있을 것 같은 묘사를 한다. 오직 자신만이 쓸 수 있는 문체, 그 자신을 보여주는 묘사방식이다. 누구랑도 닮지 않았다.

 

두 번째는 사건과 사건의 연결, 인물과 인물이 연결되는 상황에서 우연이나 대충 이어붙인 흔적이 없다. 체스 챔피언과 가상의 경기를 복기하는 게임을 즐기는 필립 말로의 특징처럼 저자 또한 사건과 인물의 연결에 있어 필요 없는 장면은 넣지 않는다. 오로지 한편의 게임을 이기기 위해서, 혹은 결말로 이끌기 위한 단서들로 이어질 뿐이다.

 

세 번째는 말로는 범죄와 욕망으로 들끓는 베버리힐즈나 미국 상류사회에서 유일하게 투명하고 정의로운 인물로 그려진다. 투명하다는 표현은 저자의 모든 행동과 말은 위트나 유머 속에 감추어져 있기는 하지만 저자만의 가치관, 판단에 일관성을 부여한다.

그가 이러한 행동을 할 것이라는 관객의 예측대로 따라가므로 투명하다고 표현할 수 있겠다.

그리고 정의롭다는 점은 현실 세계의 권력관계나 힘의 관계에 그의 저울추가 움직이지 않는다. 사람에게 마땅히 가치를 부여해야 할 점은 인간본연의 인간성이다. 다른 그 무엇도 될 수 없다. 그는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는 불완전한 인간에게 진한 우정을 준다.

쉽게 마음을 주지는 않지만 한번 우정을 맺은 상대에게는 이렇게 까지,..,’ 할 정도로 끝까지 보살펴 주는 것이다.

 

 

 

네 번째는 그가 세상을 보는 관점, 가치관이다.

 

법은 정의가 아니오. 아주 불완전한 메커니즘이지. 정확히 맞는 단추를 누르거나 운이 좋다면 대답으로 정의가 나타날 수도 있소. 하지만 모든 법이 의도하고 있는 것이라고는 목적에 이르는 절차일 뿐이지. ...”

 

감옥에서는 인간의 개성이 없어진다. 처리해버려야 할 사소한 문제로 전락하여 보고서의 몇 가지 항목을 기입하는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

    

 

 

하드보일드(hardboiled)라는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소설에서는 비정한, 감상적이 아닌, 현실적인, 완고한 이란 뜻이다.

하드보일드 문체의 대가란 말은 이러한 문체를 씀으로써 현실을 더욱 잘 드러내는 작가에게 붙이는 찬사일 것이다.

 

어쨌든 620페이지가 넘는 많으면 많다고도 할 수 있는 장편소설을 전혀 지루함 없이 엄청난 속도로 읽어 내려갔다. 나중엔 소설이 빨아들이는 스피드에 내가 질질 끌려갈 정도로. 정신을 차릴 수 없이 책장을 그다음, 다음, , 또 책장을 넘기니 마지막에 다다랐다.

 

내가 좀 더 젊었다면 이 소설을 더욱 좋아했을 거다. 하지만 나이가 좀 들게 되면 이렇게 흡입력이 강한 소설은 왠지 덜 좋아하게 된다. 재미보다는 오히려 불편한 독서에서 더욱 자극을 느끼게 되는 상태로 바뀌어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읽었던 추리소설, 문학작품 중 비교할 수 없이 훌륭했다는 말은 꼭 붙여야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