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전쟁 - 말을 상대로 한 보이지 않는 전쟁, 말과 앎 사이의 무한한 가짜 회로를 파헤친다
이희재 지음 / 궁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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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고 난 이후, 나는 더이상 책의 읽기 전의 내가 아니다. 단순히 번역을 하면서 발생할 수 있는 오류를 지적하는 책으로 생각하고 책을 펼쳐든 순간! 이 책은 나의 상식을 가차없이 박살내버렸다. 때로는 혼란스러웠다. 세계의 역사에 대해서 남다른 상식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했던 나의 자존심은 땅바닥에 내평겨쳐졌다. 그리고 세계사를 다시 공부하고, 역사관을 재정립하라는 강력한 망치가 나의 머리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초강력 태풍이 대지를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새로운 생명들이 다시 꿈틀 거리듯이, '번역전쟁'이 할키고 지나간 자리에 새로운 가치관이 정립되기 시작했다. 한번 넓어진 시야와 가치관은 나의 삶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칠 것이다. 과연 '번역전쟁'은 나에게 어떠한 충격과 깨달음을 주었을까?

 

1. 언어가 사유를 지배한다.

  언어는 사유를 지배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프레임을 결정한다. '포플리즘'을 '인끼 영합주의'로 번역할 것인가? '서민주의'로 번역할 것인가? '포플리즘'에는 두 의미가 다있다. 그러나 한국의 언론에서는 '포플리즘'을 인끼 영합주의라는 뜻으로 많이 사용하고 있다. 사실 남아메리카의 페론정권을 비롯해서 진보적인 정권에서 실시하는 정책들을 '포플리즘'으로 매도하고 그들의 정책 때문에 남아메리카의 여러나라 경제가 혼란에 빠졌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차베스 정권을 비롯하여, 페론 정권에서 실시한 정책들은 '서민주의' 정책이었고 경제를 망친 것은 그들이 들어서기 전에 정권을 잡았던 독재자들과 그들이 정권에서 물러난 이후에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독자자들 이었다.

  이희재는 '민영화'라는 말과 '사유화'라는 말 중에서 어느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현명한가? 라는 물을 제기한다. 사실 남아메리카를 비롯해서 아프리카의 여러 진보적 정권에서 추진한 '서민주의 정책'들을 '인끼 영합주의'라고 매도하면서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독재자들이 추진했던 경제정책은 '사유화'였다. 그리고 그들은 '민영화'라고 외쳤다. 현명한 시민이라면, '민영화'라 쓰고, '사유화'라고 읽어야한다. '인기 영합주의'와 '서민주의'와의 대결, '민영화'와 '사유화'의 대결은 단순한 말싸움이 아니었다. 이 세계를 어떻게 규정하고, 어떠한 세상을 만들어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중대한 일이었다.

  공자의 정명사상이 떠오른다. 자로가 공자에게 위나라 군주가 정치를 맡긴다면 무엇을 먼저하실지를 물었다. 공자가 가장 먼저하려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공자는 놀랍게도 '반드시 이름을 바로잡겠다.(必也正名乎)'라고 했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공자는 "명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순리에 맞지 않고, 말이 순리에 맞지 않으면 일이 이뤄지지 않으며, 일을 이룰 수 없으며 예악이 흥하지 않고, 예악이 흥하지 않으면 형벌이 공정할 수 없으며, 형벌이 공정하지 않으면, 백성이 손발조차 둘 곳이 없게된다. 그래서 군자는 이름이 있으면 반드시 말이 있게 되고 말이 있으면 반드시 실천하게 된다.(君子於其所不 蓋闕如也 名不正 則言不順 言不順 則事不成 事不成 則禮樂不興 禮樂不興 則刑罰不中 刑罰不中 則民無所措手足 故君子名之 必可言也 言之 必可行也)"라고 했다. 어떠한 사람과 일에 정확한 말을 사용해야함을 이미 2천여년전에 공자가 말하고 있다. 지금의 세상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부당한 용어를 사용하여 세상을 어지럽히는 세력들과의 기나긴 싸움을 하는 시기이다.

  이희재는 강력히 이러한 현실을 비판한다. '극우'라는 개념은 자민족 자국민에 대한 사랑이 지나쳐 타국민, 타민족을 증오하는 일본의 재특회와 같은 세력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그러나 한국의 '극우'라고 불리는 사람은 친일 반민족 세력으로 자국민을 죽이고 타국에 아부하는 세력이라며, 그들을 '극우'라고 불러서는 안된다고 일갈한다. 또한, 한국의 언론들은 대자본의 자유와 안전을 지상과제로 생각하는 금융 족벌 세력들의 편에서서 원/달러 환율 약세라는 부정적 표현을 사용해서 철저히 대기업 위주의 생각을 하도록 한다고 지적한다. 공자가 자신이 권력을 잡으면 이름을 바로 잡는 일을 가장 먼저하겠다고 말했듯이, 이희재는 금융재벌들의 편에선 잘못된 말들을 바로 잡으려 처절하게 울부짖고 있었다.

 

2. 현대사를 바로 보는 키워드 '금벌'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을 '역사관'이라한다. 자신만의 관점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라는 말을 대학시절 많이들었다. 저자 이희재는 '금융재벌' 즉, '금벌'이라는 키워드로 현대세계를 바라보고 있다. 영국은 신사국이 아니라 금벌국이라고 주장하며, '1, 2차 세계 대전의 전범은 영국'이라고 주장한다. 처음 이주장을 읽었을 때, 기존 학계의 통설과 너무도 달랐기에 무척 당혹스러웠다. 미국이 군산 복합체 국가이며, 전쟁을 필요로한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그 군산 복합체, 아니 '금벌'의 뿌리가 근대 영국으로 까지 올라갈 수 있다는 사실에 당혹스러웠다.

  이희재는 한발자국 더 나가서, '금벌'은 미국도 장악했다고 주장한다. '금벌'들이 세계를 움직이고 있으며, 이들은 주기적으로 전쟁을 일으키고 있으며, 이에 저항하는 지도자들은 철저히 제거된다고 주장한다. 소련과의 군축협상을 추진하며 화해와 평화를 추구했던 스웨덴의 팔메 대통령이 1986년 8월 28일 영화를 보고 나오다가 암살당했으며, 소련과 평화 공존을 추구했던 존 F. 케네디 대통령도 델레스에서 암살되었다. 심지어는 그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도 암살되었다. 어디 그뿐이랴, 우리가 미국 민주주의가 우뚝서는 계기가 된 사건으로 알고 있는 워터게이트 사건도 '닉슨 독트린'과 '베트남 철수'를 추진하여 평화 정착을 위해서 노력하던 닉슨 대통령을 낙마시키기 위한 금권세력의 검은 그림자였다. 가공할 금권세력의 힘앞에 진정으로 평화를 추구하던 사람들이 하나둘 쓰러졌다. 금벌세력들은 언론도 장악했다. 서구의 진보지라 자청하는 신문조차도 금벌의 이익에 봉사한다. 서구 금벌들이 장악하던 자원들을 푸틴이 국유화하고, 서구의 금벌세력에 대항하려하자, 푸틴을 악마로 그리고 있다. 오히려 진실을 말하고 있는 'RT'라는 언론사를 푸틴의 지원을 받는다는 이유로 무시한다. 이희재가 들려주는 '금벌'이라는 키워드로 본 현대 세계는 충격적이다. 책을 읽는 내내 이희재의 주장을 어디까지 믿어야될 것인지를 고민했다. 내가 알고 있는 '군산복합체'라는 개념과 '세계의 큰손 유대인 자본'이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이희재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검토했다. 그 결과 '금벌' 이라는 키워드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를 확장할 수 있었다. 이희재는 말한다. "언론을 맹신하면 악의 세력에게 박수를 배내기 십상'이라고.... 한국의 조,중,동만을 보고서, 한국사회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 처럼, '금벌' 중심의 세계관으로 세계를 제대로 볼 수 없다.

  그럼, '금벌'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예는 없을까? 몇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개인의 씨앗 교환을 금지하는 나라'가 지구상에 존재할까? 공산주의 사회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 펜실베니아주에서는 '위험 작물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개인의 씨앗 교환을 금하고, 자립 공동체인 '에덴 동산'에 경찰 특공대를 난입시켰다. 소비를 미덕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 자본가의 이익을 최대한으로 보장하려는 '금벌'의 나라! 그곳에서는 소비를 하지 않고 자립하여 스스로 지속 가능한 삶을 살려는 개인들을 위험한 존재로 보고 있다.

  이희재가 주장하는 '금벌'들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두번째 예로 '인턴'과 '팁'이라는 용어를 들 수 있다. 사회 초년생들에게 사회 경험을 얻을 수 있는 '인턴'이라는 제도가 '무급 노동'을 강요당하고, 자본가들의 인건비 절약을 위한 제도로 이용되고 있다.  유럽의 '레스토랑'에서는 써빙을 보는 사람에게 업주가 월급을 주지 않는다. 그들은 손님의 팁으로 먹고 산다. '팁'이라는 제도는 사업주의 노동비를 절감하기 위한 제가 된지 오래다. '금벌'의 이익을 무한대로 증대하려는 무서운 신자유주의 사회 곳곳에서 정당한 노동의 댓가를 받기 보다는 '열정 패이'라는 명목으로 착취를 강요당하고 있다. '매너'가 남을 끌어 안으려는 예법이라면, '에티켓'은 신흥 부르주아지를 차별하려는 구 귀족들의 배제 예법에서 나온 것이다. '매너'가 사라지고, '에티켓'이 자리잡은 무서운 신자유주의 사회! 금벌 사회를 슬기롭게 살아가는 방법은 없을까?

 

3. 사막을 건너는 방법

  소련이 붕괴했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말'이라는 책을 통해서 자본주의의 영원한 승리를 주장했다. 모두가 공산주의가 사라지면 장미빛 천국이 우리를 향해 문을 열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경쟁자가 사라진 자본주의는 폭주하기 시작했다.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정부의 규제는 악으로 규정되었다. '민영화'가 '사유화'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많은 산업들을 '민영화'시키려했다. 이전에는 없었던 '비정규직', '88만원 세대'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되고, 공부방 아이들이 자신의 꿈을 '정규직'이라고 말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어리석은 친구보다 현명한 적이 낫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에게는 '현명한 적'이 없고, '어리석은 친구'만 있다. 아직도 신자유주의의 폭주가 얼마나 우리 사회를 황폐하게 하는지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친구들'!!  그렇다면 '어리석은 친구들'과 함께, 신자유주의라는 사막을 건너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 책에서 해답을 찾아보자.

  우선, '생각하자! 깨어있자!'라는 말을 하고 싶다. 아프리카 북부 말리에는 투아레그 민족해방운동 조직이 있다. 알제리 정보부는 급조된 극렬 이슬람 무장 조직을 침투시켜 투아레그 민족해방운동 조직을 과격화 시켰다. 이들은 결국 민중들로부터 외면을 받는다. 결국 하층부의 말단 행동대원들은 자신의 행동을 순교라 생각하며 목숨을 바치지만, 진실은 상층부의 극렬 테러리스트와 그들의 사주한 자들에 이용당한 희생양일 뿐이다. 이 책에는 아프리카의 수많은 조직에 '금벌'이 침투시킨 공작원들이 활약하며, 그 조직들을 와해시키고, 혹은 혼란을 가중시켜 서구의 '금벌'이 아프리카의 자원을 안전하게 수탈할 수 있도록 만든 사례들이 소개되어 있다.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세상을 보고 판단하며, 자신의 삶에 주인이 되려하지 않는다면, 누군가에 의해서 '순교'를 강요당할 수 있다. 스스로 세상을 보기 위해서는 '금벌'의 실체를 바로 보아야한다. 깨어있자! '금벌'의 실체를 바로보고, 현명하게 삶을 살아가자!

  둘째, "문명국은 시련에 처한 제 나라를 안 떠나려는 젊은이가 많은 나라"이다. 임용고사를 준비하면서 '만약 임용고사에 떨어지면, 한국을 떠나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만큼 절박했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패자부활전이 없는 사회이다. 임용고사에 떨어져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조달하며 힘겹게 살아가면서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도 낮아지고 있었다. 힘들때는 이민 정보를 찾았다. 결론은 '죽어도 대한민국에서 죽고 살아도 대한민국에서 살아야한다.'였다. 백인 우월주의 사회에서 영어도 제대로 못하는 내가 생존이 가능할지가 의문이었고, 내가 공부했던 '한국사'를 그곳에서는 더 이상 활용할 수도 없었다. 남들이 일궈 놓은 옥토를 탐내기 보다는, 나의 황무지를 옥토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타국으로 떠나는 독립운동가가 아닌바에는 대한민국을 떠나서 살 수 없었다. 이명박근혜 정권시절에 'Hell 조선'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이민가고 싶다.'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내주변에도 많았다. 그때 '당신들 처럼 이땅을 떠나려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어둠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두려워서 도망친곳에 천국이란 없다.'라는 말이 있다. 이땅을 천국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다른 곳에 가서도 또다른 천국을 찾으려할 것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자신의 땅을 떠나지 않으려는 비율이 타국보다 높다는 점을 떠올리며, 나의 이웃에게 말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을 천국으로 만들자!'라고....

  셋째, "공동체를 살리는 것은 풍요를 늘리려는 소비자가 아니라 자립을 지키려는 자유"이다. "경축!! 아파트 안전진단 통과"라는 플랫카드가 서울의 아파트 단지에 내걸렸다. 많은 사람들은 아파트가 안전하다는 뜻이구나! 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진실은 아파트가 안전하지 않기에 재건축허가가 났다는 뜻이었다. 집의 안전조차도 자본의 논리에 따라서 '불안전이' 축하의 대상이 되는 아이러니컬한 현실이다. 약탈적 다국적 기업과 화석연료의 한계, 신자유주의의 폭주 속에서 더 많은 부와 풍요를 얻기 위해서 소비를 장려하고 있고, 황금만능주의를 부채질하고 있다. 집값이 올라 돈을 버는 지인들을 보며서 배아파워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서, 돈의 노예로 살아가지 않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깨닫는다. 그러나 사피엔스라는 종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공동체를 살리는 것은 풍요를 늘리려는 소비자가 아니라 자립을 지키려는 자유'라는 사실을 깨달아야한다. 이명박 정권시기에 야만적 황금만능주의는 용산 재개발을 막는 서민들에게 전투경찰을 투입시켰다. 전투경찰과 시민들이 죽어나갔지만, 전투경찰을 무모하게 죽음의 구렁텅이로 내몬자들을 처벌하지 않았다. '자립을 지키려는 자유'가 허용되지 않는 비정한 사회를 살아온 우리는 다시한번 '자립을 지키려는 자유'를 수호하려는 몸부림을 쳐야한다.

  넷째, "오늘이 내일을 바꾸고 내일이 어제를 바꿉니다."(이희재) 조지 오웰은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 반면에 유발 하라리는 '우리가 과거를 호출하는 이유는 오늘을 정당화하기 위해서이다.'라고 말했다. 이희재와 조지 오웰 그리고 유발 하라리의 비슷하면서도 다른 이들말의 공통점을 아는가? 바로 "오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가 오늘을 어떻게 살아가는가가 우리의 내일을 바꾸고 결국에는 우리의 과거를 바꾸게 된다. 그리고 오늘을 개혁하는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과거 사실을 호출한다. 우리가 오늘! 지금 당장을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따라서 우리의 미래는 바뀌게 된다. 우리의 미래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오늘에 있다.

  무시무시한 '금벌'이 지배하는 신자유주의의 폭주시대를 살아가지만, 현실을 회피하기 보다는 현실을 바꾸려 노력하며 오늘을 살아가자! 풍요를 늘리려는 소비자로 살기보다는 자립을 지키려는 자유인으로 살아가자! 금벌세력의 외곡된 정보에 속아 그들의 희생양이 되기 보다는 스스로 생각하고 깨달아 주인으로 살아가자! 이것이 '어리석은 친구들과' 신자유주의의 사막을 건너는 방법일 것이다.

 

4. 동의할 수 없는 이희재의 주장

  저자 이희재는 나의 상식들을 많이 깨뜨렸다. 그리고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나를 인도했다. 그럼에도 그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첫째, 일본 정치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용인하라는 주장이다. 이희재는 '한국은 일본 정부 각료들이 야스쿠니 참배가 불편하더라도 내색하지 않는 것이 유리'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서 더나가서 '한국인 피해자이기에 오히려 대답하게 일본을 대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고, '야스쿠니 신사에 안치된 전범은 천황의 총알받이가 된 가엾은 사람들이라는 여유를 억지로라도 가질 필요가 있지 않'냐는 주장을 한다. 탁월한 식견을 가진 이희재가 한일관계 만큼은 그러한 식견을 펼치지 못하고 있다. 강자의 여유는 인자함으로 보이지만, 약자의 여유는 만용일 뿐이다. 일본은 세계 경제 2,3위를 다투는 강국이다. 언제라도 재무장을 한다면 강력한 군사대국으로 침략전쟁을 펼칠 수 있는 나라이다. 이러한 나라의 정치인이 전범이 합사되어 있는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것을 너그럽게 이해한다면, 이는 일본의 침략야욕이 자랄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주자는 억지에 불과하다. 현재는 '우리가 과거를 호출하는 이유는 오늘을 정당화하기 위해서이다.'라는 유발 하라리의 말처럼,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하면서 재무장화 팽창주의를 노골화하는 일본을 합리화하고 있다. 우리가 약자이기에 강자인 일본의 팽창주의를 좌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제2의 선조가 되어서는 안된다.

  둘째, 이희재는 아우슈비츠에 가스실은 없었으며, 유대인 600만명이 희생되었다는 숫자는 과장된 것이라 주장한다. 팔레스타인지역에서 무고한 파레스타인인들을 학살하는 것을 합리화하기 위한 방패로 '가스실'과 '유대인 600만명 희생'이라는 신화를 지키려한다는 의문을 제기한다. 내가 기존에 읽었던 수많은 책들과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얻은 상식과 대치되는 주장이기에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물론, '600만명'이라는 숫자는 통계사의 실수로 오차가 날 수는 있다. 그러나 '가스실'이 없었다는 주장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더 많은 자료를 읽고 판단해야겠다.

  셋째, '김일성을 소련땅으로 불러들인 것이 일본의 반발을 고려해서'일 것이라는 주장도 동의할 수 없다. 당시 김일성은 '동북항일연군'의 일원으로 만주에서 활동했다. 중국공산당과 소련 공산당이 장기적 항전의 역량을 보전하기 위해서 중국공산당이 소련땅으로 이주할 것을 결정했다. 또한 일본은 노몬한 전투 패배 이후, 공격진로를 남방으로 결정한 이후이다.

  넷째, 선량한 독재자는 선한가?라는 의문을 제기해본다. 저자 이희재는 카다피를 비롯한 많은 독재자들을 소개하며, 이들을 권좌에서 몰아낸 금벌세력을 비판하고 있다. 특히 카다피의 경우, 최고 소득세율을 90%로 올리며 금벌로부터 독립을 추구했던 인물로 소개하고 있다. 민주주의대 독재의 구도로 볼 것인가? 금벌대 반군벌의 대결로 볼 것인가에 따라서 카다피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수 있다. 그렇다면, 금벌로부터 독립하려는 선량한 독재자는 설혹 그가 장기간 집권을 했다고 하더라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든다. 이 질문에 이희재는 무어라 답변할까?

  신이 아닌, 인간이기에 완벽함을 바래서도 안된다. 또한 생각의 자유가 있기에 저자의 관점을 일방적으로 독자에게 강요해서도 안된다. 저자 이희재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면도 있지만, 많은 부분을 공감하고 있음을 밝혀둔다.

 

5. 동북아 현실을 직시하다.

  "일본은 독립국이 아니다." 저자 이희재의 말이다. 물론, 이희재는 한국도 독립국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일본과 한국을 미국이 부리는 장기알과 같은 존재로 보고 있다. 특히 '미국이 노리는 것은 일본이 한국, 중국, 러시아 같은 주변 나라들과 반목하면서 두려움을 갖게 만드는 것'이라 주장한다. 그래서 샌프란 시스코 조약에 독도를 비롯한 영토 문제를 모호하게 처리하여 분쟁의 씨앗을 남겼으며, 1955년 일본이 소련과 평화조약을 체결하려하자, 미국이 압력을 행사하여 협상을 결렬 시켰다. 미국은 동아시아 평화 공동체가 출범하는 것도 싫어한다. 그래서 하토야마 전 총리가 낙마할 수 밖에 없었다고 주장한다. 중국이 주변 이민족을 상대할 때, 오랑캐로서 오랑캐를 견제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를 사용했다. 미국은 중국이 사용하는 전술을 동아시아에 사용하고 있다. 달리보자면, 로마가 속주를 통치할 때 사용했던, '분할하여 통치하라(Divide and rule)'라는 방식을 사용한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외교 전략을 펼쳐야할까? 소설가 복거일은 '핀란드화하는 한국'이라며 걱정어린 눈빛으로 한국의 외교정책을 바라보고 있다. 이희재는 핀란드화란 '러시아, 중국 같은 인접국에게 적대적 외교 국방 정책을 추구하도록 미국이 설득하거나 위협했을 때 순순히 따르지 않는 핀란드, 한국 같은 소국이 미국한테 찍혀서 듣게 되는 소리'라고 정의한다. 복거일은 한국의 핀란드화를 자주성이 훼손되는 걱정스러운 모습으로 보았으나, 이희재는 약소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추구하는 자주적 외교로 평가하고 있다. 보수의 입장에서 한국의 외교를 바라볼 것인가? 진보의 시각에서 바라볼 것인가?에 따라서 '핀란드화'를 나쁘게도 볼 수 있고 긍정적으로도 볼 수 있다.그렇다면, 핀란드의 역사가 어떠했기에 '핀란드화'라는 말이 생겼을까? 핀란드는 러시아 혁명후 벌어진 적군과 백군의 내전에 개입했다. 2차 세계대전 직전에 영국이 자신을 지켜줄 것을 믿고 소련군과 대결했다가 모스크바조약을 맺고 영토의 10%를 소련에 내어주었다. 이러한 경험은 이후 핀란드의 외교정책에 많은 교훈을 준다. 사람이 범을 두려워하나, 범의 입장에서는 사람이 두려운 법이다. 핀란드 입장에서는 소련이 두렵지만, 소련의 입장에서는 군사적 요충지를 가지고 있는 핀란드가 두려운 법이다. 그래서 핀란드는 소련을 되도록 자극하려하지 않았고, 그래서 나토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미국과 영국 일변도의 종속적 외교가 아닌, 핀란드를 중심에 놓고 실리적 외교를 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핀란드화'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한국의 핀란드화'는 걱정해야할 것이 아니라, 긍정적으로 보아야할 것이다. 우리는 문재인 정부의 3차 남북정상회담을 보면서, 남북이 대화하고 하나될 때, 미국을 비롯한 주변국에게 외교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목도했다. 강대국의 '이이제이'에 대항 할 수 있는 우리의 외교전술은 '한국의 핀란드화' 즉, 남북의 자주적 실리외교일 것이다.

  한편에서 중립국화를 주장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서 이희재는 '제 나라를 제 손으로 지킬 힘이 있는 나라만이 진정한 중립, 지속 가능한 중립을 실천에 옮길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조선 고종시기에 '조선 중립화론'이 유길준과 부들러에 의해서 제기됐다. 그러나 자주 국방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중립화 논의'나, 중립외교를 통한 조선을 지키려는 노력은 허망하게 끝났다.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다면, 그 어떤 외교 전략도 성공하기 힘들다.

 

  이 책에는 로힝야족에 대한 설명도 나온다. 지금은 미얀마 인들에게 쫓겨나 보트피플이 되어버린 로힝야족! 이들에 대한 박해를 저지르는데 이를 막도록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아웅산 수지 여사를 세계 언론들이 비판한다. 그러나 영국의 지배속에서 5등 국민으로 살아야했던 미얀마인은 로힝야족에게 집단 학살까지 당했다. 과거부터 뿌리 깊은 로힝야족과 미얀마 인들의 반목이 오늘의 로힝야족 사태를 만들었다. 미얀마 나쁜 나라, 로힝야족 불쌍한 종족 이라는 등식이 일방적으로 성립할 수 없음을 이책에서는 설명하고 있다. 선과 악, 흑과 백의 이분법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보다는 다양한 시각에서 세계를 조망할 수 있는 식견을 이 책은 제공하고 있다. '금벌'이라는 새로운 시각으로 현대세계를 바라보고, 복잡하면서도 다양한 관점으로 세상을 조망하도록 하는 것이 이 책의 장점이다. 좋은 책은 새로운 독서 계획을 세우도록 하는 책이라고 한다. '금벌'이라는 관점에서 세상을 명확히 바라보기 위해서 '화폐전쟁'이라는 책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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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탁월한 명강의가 가슴에 와 닿지 않을때가 있다. 대학에서 젊은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면 참! 열정도 많고 많은 내용을 우리에게 알려주신다는 느낌은 들지만, 깊이있는 깨달음을 얻지는 못해 아쉬울 때가 있다. 반면, 노련한 노교수님의 강의는 많은 내용을 말하지 않는데도 많은 것을 가슴으로 느끼고 머리에 새기도록 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들은 그러한 교수님의 강의를 '명강의'라고 말하며 후배들에게 추천했다. 사회에 나와서 배움의 열의가 시들지 않았다. 팟캐스트와 유튜브를 비롯한 각종 연수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다양한 강의를 찾아 듣는다. 그렇게 알게된 교수님과 저자들 중에서 고 신영복 선생은 단연 많은 것을 깨우치게한 명강의를 나에게 선사해주었다. 너무도 강렬했던 '강의'에 이어서, 신영복 선생의 '마지막 강의'가 되어버린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담론'을 펼쳐들었다. 신영복이라는 문을 통해서 진리의 화원에 들어가 보자.

 

1. 신영복을 읽는 키워드 '관계'

  '나의 고전 독법 강의'를 읽으면 신영복 선생 고전독법의 키워드는 '관계'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관계'를 중시여기는 그의 인생철학은 '담론'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감옥에 들어온 사람이 출소하면서 '이 사람은 다시는 들어오지 않을 것야!'라고 신영복에 예측하면 번번이 그 예측이 빗나갔다. 반면 노인들은 그 사람이 다시 들어올지, 사회에 나가서 잘 살게 될지를 잘 맞추었단다. 신영복은 뒤늦게 그 이유를 알게 된다. 신영복이 그 사람됨만을 보았던 반면, 노인들은 사람과 처지를 함께 보았다. 나무는 홀로 설수 없다. 흑과 물과 돌과 나무와 어우러져야 하나의 나무가 우뚝 설 수 있다. 신영복이 '관계'의 중요성을 깨달은 순간이다. 아무리 세상과 단절하고 홀로 독야청청하리라 마음먹어도, 보통 사람들은 '관계'의 영향을 받는다. 그만큼 관계가 중요하다.

  그러나, 그렇게 중요한 '관계'를 우리는 잊고 산다. 신영복이 재소자에게 이응노 화백에 대한 일화를 들었다. 이응노 화백은 감옥에서 사람을 부를 때, 수인 번호로 부르지 않고 이름으로 불렀다한다. 한 젊은 재소자에게 이름을 묻고는 "뉘집 큰아들이 감옥와 있구먼"이라고 중얼거렸다. 이 말을 들은 재소자는 그날밤 잠을 이루지 못한다. 자신이 홀로 서있는줄 알았으나, 자신은 이 세상에 홀로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부모와 누이가 보고 싶어졌고 그들을 생각하며 밤을 지세웠다한다. '관계'를 깨닫자 젊은이는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관계'로 이어져있다. 자신의 존재를 '관계'를 인식하면서 깨닫게 된다. 그리고 치유가 시작된다.

  '관계'가 치유의 작용만을 하는 것은 아니다. '관계' 때문에 상처받고 슬퍼하기도한다. 그러나 외딴 섬에 홀로 살아가지 않는 이상, 우리는 관계를 벗어날 수 없다. 지눌 스님의 '정혜결사'문에 "땅에 넘어진자, 땅을 딛고 일어서라."라는 말이 있다. ''관계'에 상처받은자, '관계'를 딛고 사랑하라라'고 말하고 싶다.  

 

2. 세상을 살아가는 키워드 '사랑'

  셍떽쥐베리는 '사랑은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과연 그럴까? 강신주는 '사랑은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눈부처를 바라보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눈부처'란, 연인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뜻한다. 사랑은 서로의 눈부처를 바라보는 것일까?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일까? 신영복 선생은 사랑은 '삼께 맞는 비'라고 표현한다. 세월호 사건의 슬픔에 빠져있는 사람에게 어설푼 위로보다는 같이 눈물흘려주는 것이 그들의 치유에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사랑은 함께하는 것이었다. 고통도 슬픔도 함께할 수 있다면 우리는 서로를 사랑할 수 있다. 함께할 때만이 서로의 눈부처를 보면서 사랑을 속삭일 수도 있고, 같은 곳을 바라볼 수도 있다.

  때로는 사랑이 고통을 주기도 한다. 신영복은 '사랑'을 이용한 고문방법을 경험한다. 전기고문을 받다가 신영복은 탈진을한다. 그러자 취조관이 의무실에 전화를 걸어 딸아이의 감기약을 부탁한다. 이에 충격을 받은 신영복은 '나는 절대 결혼하지 않아야지. 저 지독한 가족 이기주의를 난들 어떻게 할거야!'라는 생각을 했다. 무자비한 취조관이 사실은 딸을 사랑하는 평범한 아버지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가족에 대한 사랑은 지독하리만치 크지만, 인류에 대한 사랑은 눈꼽만치도 없는 잔혹한 인간의 모습을 바라보며 신영복은 얼마나 환멸을 느꼈을까?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딸아이의 감기약을 부탁하는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이 고문의 일환으로 연출된 모습이었다는 사실이다. 상대방을 심리적으로 굴복시키기 위한 고도의 고문방법이었다. 잘못된 사랑이 고통을 주기도 하지만,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인간에 대한 환멸을 주기도한다. 그렇다면, 올바른 사랑의 모습은 무엇일까?

  신영복 선생이 '강의'와 '담론'이라는 책에서 강조하는 말이 있다. '석과불식(碩果不食)!! ' 씨과일은 먹지 않는다는 뜻이다. 씨과일로 큰 열매를 먹지않고 남겨 놓는 모습! 까치밥이라면서 가장 큰 감을 남겨 놓는 시골 농가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까치밥으로 가장 큰 과일을 남겨 놓으면 새가 날아들어 그 과일을 먹는다. 그리고는 어느 곳에 그 과일 씨앗을 배설물과 함께 떨어 뜨린다. 그래서 새로운 과일나무가 어느 곳에선가 자라기 시작한다. 나만을 사랑하는 좁은 울타리에서 벗어나서, 자연과 우리 모두를 사랑할 때만이 참다운 사랑은 이뤄질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먼 여행은 무엇일까? 신영복은 '우리가 일생 동안 하는 여행 중에서 가장 먼 여행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한다. 머리로 알지만 가슴으로 느끼고 이를 발로 실천할 수 있다면 최고의 공부가 아닐까? 이것이 가장 진실된 배움이지만 이것이 가장 힘든 배움이기도 하다. 좁은 가족의 사랑을 인류의 사랑으로 실천하는길! 가장 힘들지만,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여행이다.

 

3. 오늘을 생각하고 깨우친다.

   신병교육대에서 훌련을 받다가, 한 훈련병이 제대로 훈련에 따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교는 그 훈련병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야, 너 서울대 나왔냐?"라고 물었다. 그러자, "네, 그렇습니다."라는 훈련병의 답변이 나왔다. 순간, 주변에서는 "야~~ 제가 서울대 나왔어?"라며 감탄을 연발했다. 교관은 주변을 의식했는지, "놀랄것 없어, 예는 공부 못해서 서울대 간거야! 안그래?"라고 말했다. 훈련병은 "네, 그렇습니다."라며 군기든 대답을 했다.

  서울대 나왔다는 말에 '내가 서울대 다니는 사람을 보다니...'라는 생각을 하며 감탄을 하는 주변의 수많은 훈련병이나, 서울대 다니는 훈련병을 공부못해서 서울대 갔다고 말하는 조교 모두가 서울대에 대한 컴플랙스를 가지고 있었다. 만약 신영복 선생이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변방이 창조의 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결적적인 전제가 있습니다. 중심부에 대한 콤플랙스가 없어야 합니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서울대 컴플랙스' 집단 감염된 우리 사회의 모습을 여러번 보았다. "서울대 애들이 나보다 똑똑하니까, 내가 굳이 그들을 이기려 노력할 필요가 있어?"라고 말하는 패배주의자들도 여러명 보았다. '서울대 컴플랙스'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상, 절대 '서울대'라는 장벽을 뛰어넘을 수 없다. '변방의 창조성'을 가지려면 그 컴플랙스에서 벗어나야한다고 신영복 선생은 '담론' 곳곳에서 외치고 있다. 그럼, 나는 또다른 컴플랙스를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컴플랙스를 직시하려 노력해보았다. 그 컴플랙스를 직시하며 그 컴플랙스가 사실은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변방의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곡돌사신(曲突徙薪)이라는 말이 있다. 굴뚝을 돌려 놓고 장작을 옮겨 놓아 불이 나는 것을 예방하는 조치를 취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묵자'에 나와 있듯이, 불을 끄려 동분서주한 사람은 환영을 받지만, 곡돌 사신을 해서 불을 사전에 예방한 사람은 환영받지 못한다. 병을 고친 사람은 명의라 칭송받지만, 병을 미연예 예방한 사람은 칭송을 받지 못한다. 인간은 소 도둑을 잡은 사람에게는 칭송하지만, 소도둑이 들지 않도록 외양간을 튼튼히 지은 사람에게는 칭찬을 하지 않는다. 이러한 우뫼한 일을 지금 우리는 하고 있지 않는지 반문해본다.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에 가서 3차 정상회담을 하고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해한 많은 성과를 가지고 돌아왔다. 이를 두고서 비판하는 일부 수구 정당과 그를 추종하는 불쌍한 인간들을 보면서 서글픈 생각이든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전쟁이 벌어지는 길을 원하는 것인가? 아니면 미연에 전쟁을 예방하여 평화의 길을 여는 길을 원하는 것인가? '곡돌사신'의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그만큼 지금 이순간이 한반도 평화를 위한 너무도 소중한 기회이다.

 

4. 배움에 더해서...

  좋은 책은 책을 뛰어 넘어 더 많은 것을 생각하고 깨닫게하는 책이다. '담론'에는 책을 뛰어 넘어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부분이 많다. 그중 몇가지를 살펴보자.

  거꾸로 읽으면 의미가 살아나는 말들이 많다. '객관'이라는 말을 거꾸로 읽으면 '관객'이 된다는 신영복선생의 말은 '객관적이어라.'라고 말하는 언론에게 일침을 가하는 듯했다.  일부 언론에서는 기계적 중립에 치우쳐서 박근혜 정권에서 행해지던, '한국사 국정화'도 관객의 시선에서 구경하듯 보도했다.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관객'이 되지 말아야한다. 그들과 '관계' 맺었음을 깨달아야한다. 이러한 단어가 '자살'이다. 자살을 거꿀로 읽으면 '살자'가 된다. 자살하려는 사람은 부단히 외치고 있다. '살고 싶다.'고 .... 단지 우리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다케시마'라는 말도 거꾸로 읽으면, '마시케다'가 된다. 일본은 침략주의적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독도를 '마시케다'며 넘보고 있다. 벼가 있는 언어 유희는 우리에게 많은 깨달음을 준다.

  '톨레랑스'를 아는가? 프랑스를 대표하는 말이며, 우리사회에 '톨레랑스'가 필요함을 많은 사람들이 외쳤다. 그런데, 신영복 선생은 톨레랑스는 '서로 차이를 존중하고 공존합시다.'라는 뜻으로 근대사회의 최고 수준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면서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갈 것을 당부한다. '차이와 다양성은 그것을 존중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새로운 시작이어야합니다.' 단순한 공존에서 새로운 시작으로 나가자! 새로운 사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한발자국 더 나가자! 신영복은 외치고 있다. 목수는 집을 그릴때 지붕부터 그리지 않는다. 주춧돌부터 그린다. 톨레랑스라면 서로 인정하면서 공존을 택할 것이다. 그러나 신영복은 자신의 부족한점을 깨닫고 목수의 그림을 배우려한다. 자신을 변화시킨다. 톨레랑스를 뛰어 넘으려한다. '톨레랑스'를 말할때, '톨레랑스'그 너머를 보자! 신영복은 그것을 나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신영복은 공자와 귀곡자의 말을 대비해서 설명한다. 두가지를 대비해서 설명하는 신영복 특유의 설명법은 우리에게 탁월한 이해와 영감을 준다. 공자는 말잘하는 사람을 싫어했다. '교언영색(巧言令色)'하는 사람을 어질지 못하다고 했으니, 말잘하는 공자가 얼마나 말잘하는 사람을 싫어했는지 짐작할 수있다. 반면 귀곡자는 '언어는 좋은 그릇에 담아서 상대방에게 기분 나쁘지 않게 전달하는 것'이라 말한다. 누구의 말이 옳을까? 갑자기 '문질빈빈연후군자(文質彬彬然後君子)'라는 '논어'구절이 생각났다. 겉모습과 속이 빛나야 군자라는 공자의 말을 말에 적용시켜보자. 말의 내용 뿐만 아니라, 그 말의 포장도 잘되어야 참다운 말이 아닐까? 말의 내용과 수사가 잘 갖추어져있다면 그 사람을 어진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을 보면 대화할 때, 대화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대화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해주고 그사람의 입장에서 대화해주는 방법을 강조한다. 수많은 논리적 근거보다 상대의 마음을 이해해주는 한마디가 상대의 마음을 움직인다. '문질빈빈'이라는 말은 언어에도 적용할 수 있다.

  당신은 사실을 뛰어넘어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가? 신영복 선생은 '사실이란 작은 레고 조각에 불과하고 그 조각들을 모으면 비로소 진실이 된다.'고 말한다. 단편적인 레고조각 한두개를 가지고 전체의 진실을 알기는 매우 힘들다. 그런데 우리는 많은 레고조각을 모으는 수고로움을 회피하며 한두개의 레고 조각으로 진실을 본듯이 말한다. 많은 레고 조각을 모았다고 하여 모두가 진실을 보는 것은 아니다. 공룡뼈 화석을 발굴한 고고학자가 몇십년이 지난 후에야 자신이 공룡뼈를 잘못 맞추어 전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로운 발굴을 통해서 알았다는 일화는 질실을 알아간다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를 말해준다. 사실을 통해서 진실을 꿰뚤어 볼 수 있는 통찰력을 갖자!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시는 언어를 뛰어 넘고 사실을 뛰어 넘는 진실의 창조'활동이라 신영복은 말한다.  우리 사실을 뛰어 넘어 진실을 창조하자! 그리고 그 길을 모색해보자!!

 

5. 신영복 선생님 이의 있습니다.!!

  탁월한 식견을 가진 신영복 선생님이지만, 그의 견해 모두를 동의할 수는 없다. 신영복 선생님 질문있습니다.!!

  신영복 선생은 대학생을 '계급을 스스로 선택하는 계급'이라 말한다. '대학 4년은 계급을 고민하는 시기'라는 말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 과연 계급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대학생이 몇 퍼센트나 될까? 극히 일부 명문대, 몇몇 학과에서는 가능할 수 있으나, 자본의 냉혹함 속에 내몰려 혹독한 취업준비를 해야하는 고민을 하는 이 시대의 대학생들이 '계급을 선택'할 수 있을까? 과거 개발독재 시절에는 대학만 나오면 취직이 보장되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광풍 속에서 생각할 시간을 박탈당하고 취업준비에 내몰린 대학생들에게 '계급 선택'의 자유는 없다.

  '다수가 힘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정의'라는 신영복 선생의 말에도 동의할 수 없다. 이 말은 신영복 선생이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전체주의 사상이라는 오해를 받을 위험성이 많다. 다수의 횡포! 중우정치의 함정에 빠질 수 있는 '다수가 힘', '다수 그 자체가 정의'라는 말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진리가 될 수 없다. 다수가 이명박과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뽑았다. 과거 상당수의 국민이 존경하는 대통령으로 박정희를 뽑았다. 그렇다면 이에 당신은 박정희와 같은 정치인이 다시 나타나길 바라는가? 참다운 민주주의는 소수의 의견도 존중할 때만이 생명력을 얻을 수 있다. 그러하기에 민주주의는 인내심이 많이 필요한 제도이다. 신영복이 '모두가 위반할 수 밖에 없는 규칙은 고쳐야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만, '다수가 힘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정의이기 때문이다.' 라는 그의 주장에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

  '통일신라는 개방화되고 속국화됩니다.'라는 표현도 동의할 수 없다. 신영복 선생이 통일 신라 시기를 주권이 침해된 시기로 보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통일신라가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주권이 침해된 속국은 아니었다. 한예로 김춘추의 묘호를 '태종'이라고 짓자 중국이 당태종 이세민과 묘호가 겹친다하여 고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서 신라는 당당히 김춘추가 삼국통일을 이루는데 초석을 닦은 엄청난 업적을 이뤘다고 주장하며 당나라의 요구를 물리쳤다. 신영복은 '자주'와 '개방'이라는 2분법을 축으로 해서 우리역사를 단순하게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이분법적 이해는 역사 이해를 쉽게할 수는 있으나, 역사 인식의 외곡을 가져올 수 있다.

 

 

  20여년이라는 기나기 세월을 감옥에서 지내며 20여년이라는 기나기 세월을 감옥에서 지내며 언제 밝은 세상에 나올지도 모르는 시간을 버텨낼 수 있었을까? 더욱이 그는 감옥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을 떠나서 저 세상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 '담론'에는 신영복 선생이 2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가 적혀있다.

  신영복은 '우리가 작은 추억에 인색하지 말아야 하는 까닭은 추억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뜻밖의 밤길에서 만나는 다정한 길동무가 되어 주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청구회 추억'이 그를 버티게 하는 힘이 되었으며, 감옥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며 그들의 추억을 머릿속에 담으려했다. 그리고 감옥에 비치는 한줄기 햇볕을 보았다. 신영복은 햇볕을 보면서 죽지 않는 이유를 찾았고, 깨달음과 공부를 통해서 살아가는 이유를 발견했다. 자신의 추억뿐 아니라, 타인의 추억 속에서 깨달음과 공부를 했다. 빅터프랭크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에서 '의미치료'라는 치료방법이 있다. 그에게서 '추억'은 '깨달음과 공부'를 가능하게하는 힘을 주었고, '깨달음과 공부'는 신영복에게 살아야하는 '의미'를 선사했다. 그리고 그의 깨달은 그의 책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명필은 장수해야 한다.'라고 신영복은 말한다. 추사는 71세를 살았으며, 이광사는 73세를 살았다. 그들이 그렇게 오랜 세월을 살지 않았다면, 그들의 서체는 완숙해질 수 없었을 것이다. 단순히 오래 살아서도 안된다. 부단히 인생을 생각하며 자신의 삶에 의미를 찾아는 노력을 해야한다. 신영복이 감옥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 노력했고, 세상을 달관할 수 있는 나이에 이르러 우리에게 '강의'와 '담론'을 들러주었기에 그는 우리 가슴에 영원히 살아있을 수 있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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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8-10-06 20: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강나루님.~
편안한 주말밤 되세요^^

강나루 2018-10-06 20:26   좋아요 1 | URL
네 감사합니다^^

카알벨루치 2018-10-06 20: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다 읽꼬나면 이렇게 쓸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근데 완독부터 해야할텐데요 ㅎㅎ

강나루 2018-10-06 20:36   좋아요 1 | URL
천천히 읽으시면 되요
좋은 책이라 생각하며 느끼며 읽어야하기에 천천히 꾸준히 읽으세요^^
 
약산과 의열단 - 김원봉의 항일 투쟁 암살 보고서
박태원 지음 / 깊은샘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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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과같아라! 물과 같아라! 산과 같아라! 별처럼, 물처럼, 산처럼 그들은 이 땅의 독립을 위해서 살았다. 이여성, 김약수, 약산 김원봉!! 이 세사람은 젊은 시절 자신의 젊음을 조국을 위해서 바치기로 약속하고 자신의 이름을 이렇게 지었다. 나는 그들의 삶을 알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을 제세히 소개해 놓은 책들을 구하기 힘들었다. 그중에서 그래도 약산 김원봉의 삶은 영화와 책으로 소개되어 조금은 알 수 있었다. 그를 알 수 있는 책을 찾던 중에 약산 김원봉의 삶과 의열단에 대해서 자세히 알 수 있는 '약산과 의열단'이라는 책을 펼쳐 들었다.

 

1. 김원봉의 육성을 듣는 듯한 책!

  이 책은 소설가 박태원이 의열단원들의 활약을 소개한 신문기사와 김원봉을 인터뷰한 자료를 근거로 쓴 책이다. 책 곳곳에서 김원봉이 먼저 죽어간 의열단원의 죽음을 기억하며 가슴 아파하는 신음소리가 들린다. 얼마나 많은 동지들을 먼저 보냈는가? 그들을 사지로 떠나보내면서 김원봉 그도 얼마나 슬펐을까? 조국 광복을 위해서 자신의 젊을 바치는 수 많은 별들!! 그 별들의 삶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가슴이 뛰고 팔뚝에 힘줄이 불끈 솟았다.

 

2. '밀정'과 '독립운동가' 사이

  영화 '밀정'을 본사람들은 송강호가 연기했던 '황옥'이 과연 독립운동가인지, 일제의 밀정인지 판단이 서지 않을 것이다. '황옥' 경부가 과연 밀정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쟁이 있다. 재미있는 것인 이책 속의 김원봉은 황옥은 밀정이 아니라고 믿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당시를 살았던 많은 의열단원들도 황옥을 밀정이라 보지 않는다. 그런데, 꾀 많은 역사학자들은 황옥을 밀정으로 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황옥이 독립운동가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현실을 반영한다.

  반면, 하와이에서 대조선국민군단을 조직했던 박용만을 이 책에서는 밀정으로 소개하고 있다. 일본군함 출운호를 폭파하려했다가 추방당한 그를 밀정으로 보기에 너무도 무리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역사학자들도 박용만을 밀정으로 보고 있지 않다. 그런데, 박용만이 국내에 귀국해서 조선총독 사이토를 만났다는 사실은 그를 밀정으로 의심하기에 충분한 면도 있다.

  밀정과 의사 사이에는 생각보다 작은 강이 있다. 때로는 밀정이 의사로 추앙받기도하고, 의사가 밀정으로 오인받기도 한다. 황옥과 박용만 이 두 인물은 밀정과 의사 사이에 있는 강이 얼마나 넘기 쉬운 강인지를 알려준다. 과연 그들은 의사일까? 밀정일까?

 

3. 나혜석과 의열단의 만남

  수원을 대표하는 인물로 나혜석을 꼽는 사람들이 있다. 수원에는 나혜석 거리가 있고 많은 연인들이 그 거리를 걷는다. 내가 수원에 살았던 시절, 수원지역의 역사를 탐구하며 수업자료를 모았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신여성 나혜석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최린과 바람피며 자유롭게 살아간 여성에게서 무엇을 배우겠냐는 논리였다. 그당시 3.1운동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있느냐? 나혜석이 그것 빼고 독립운동을 한적이 있는가? 그 남편이 일본의 대단한 친일파 아니냐?라는 반론에 나는 별반 반론을 제시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책에는 나혜석과 의열단의 흥미로운 일화가 소개되있다. 의열단원 박기홍이 나혜석에게 총한자루를 맡겼다. 박기홍이 계호기한 일이 사전에 드러나 그는 감옥에 갔다. 출옥후, 우연히 나혜석을 만났는데 그녀가 총을 도로 내주었단다. 단동현 부영사의 아내로서 남편에게 말하지 않고 총을 베갯속에 넣어 이를 배고 잤다고 한다. 그녀의 조국에 대한 사랑은 뜨거웠었다. 그런데, 조국을 배신한 그녀의 남편을 어떻게 이해햐야할까? 조국을 사랑하나, 사랑하는 남편은 조국을 배신했다. 그리고 그녀는 최린과 외도를 한다.

 

  너무도 재미있는 책이다. 이틀만에 책을 다 읽을 정도로 책은 재미있다. 약간은 고어투의 말이 있어 읽기에 불편한 점도 있지만, 약산 김원봉의 뜨거운 조국애를 느끼며, 열정적으로 시대를 살아간 가슴벽찬 의열단원의 삶을 알고자하는 분들은 반드시 일독을 해보길 바란다. 그들의 삶을 기억하는 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책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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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holic 2018-09-18 00: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소설가 구보씨가 이런 책도 쓰셨군요~~ 저도 읽어보고 싶습니다. 좋은 책 추천 고맙습니다...
 
국가란 무엇인가 - 2017 개정신판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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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11월 대전 갤러리아 백화점 앞에 온 가족이 나와 촛불을 들었다. '이게 국가인가?'라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더 이상 국가가 망가지도록 방조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며 '박근혜 하야'를 외첬다. 과거 역사를 배우고 가르치고 있는 나로서는 적폐세력이 촛불 참여자들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그러나 아내는 용감했다. '당신이 안가면 나혼자라도 나가겠다.'라는 강경한 말을 했다. 계엄을 검토했다는 문건이 발견되고 나서야 나의 우려가 기우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또다시 5.18 광주에서 벌어졌던 비극이 연출될 수도 있었다. 엄연히 과거 독재국가의 향수에 빠져 있는 적폐세력이 엄존한 상황에서 우리 시민들을 광장으로 촛불을 들고 나오도록 인도한 힘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토록 광장에서 '적폐 청산', '박근혜 하야', '재벌 개혁'을 외치면서 우리들이 만들고 싶었던 국가는 무엇일까? 이 물음에 답하고 싶어서 유시민 작가의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펴들었다.

 

1. 국가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유시민은 국가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라는 질문을 풀어가는 것으로 엉클어진 실타래를 풀어가기 시작했다. 폭력이 난무하는 자연상태에서 개인들이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서 군주와 사회계약을 맺었다는 홉스의 주장을 첫머리에서 소개하고 있다. 사회계약론 중에서 홉스의 사회계약론과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확실히 다르다. 홉스가 자연상태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상태로 보았다면, 루소는 평등하고 자유로운 상태로 보았다. 자연상태를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서 그들이 만들려고 하는 국가의 형태와 국가를 유지하는 방법은 달라진다. 유시민은 폭력을 독점한 국가라는 점에서 홉스의 주장을 지지한다. 국가는 폭력을 독점하고 국가라는 '리바이던'은 폭력을 합리화하고 합법화한다. 국가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견제의 대상이다. 폭력을 독점한 국가는 언제나 괴물로 변할 수 있다. 과거 이승만 독재정권, 박정희 독재정권, 전두환 폭력정권을 통해서 국가 폭력으로 수 많은 시민들이 생명과 자유를 잃는 처절한 모습을 우리는 보아왔다. 시민의 감시와 견제가 없다면, 국가라는 괴물은 언제나 본래의 폭력적 모습을 다시 드러낼 수 있다.

  그랬다. 나보다 세대가 앞선 분들과 대화를 하면, 그분들의 입에서는 "국가가 하는 건데, 설마 국민에게 나쁜 것을 하겠어?"라고 반문한다. 국가를 견제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유시민의 표현을 빌린다면, 그들은 '국가주의형 이념보수'이다. 국가를 비판하는 것 자체를 못견뎌하는 '열열한 애국자'이다. 국가는 믿음의 대상이라는 신화는 JTBC의 박근혜-최순실 특종보도를 통해서 산산조각났다. 스스로 생각할 수 없는 존재를 대통령감으로 생각하며 투표했던 많은 사람들!! 자식이 없기에 절대 부정부패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그녀에게 투표했던 많은 사람들이 공황상태에 빠져들었다. 미르재단, K-스포츠 재단을 만들면서 많은 돈을 끌어 모으려했던 모습들을 보면서 국가라는 '리바이던'은 견재의 대상이며 감시를 해야만 국민이 생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추운 겨울을 따사로운 촛불로 밝히며 난생 처음으로 대전 탄방동 일대를 행진했다. 같이 나왔던 막내가 걷기 힘들다고 해서 아내가 업고 행진했다. 몸이 약한 아내에게 막내를 넘겨 받아 막내를 업고 외쳤다. "박근혜는 하야하라!",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구호를 외치며 나의 머릿속에는 '어떻게 하면 국가가 '리바이던'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맴돌았다.

 

2. 국가의 속성!! 애국심의 두얼굴

  "집단에는 양심이 없다."라고 니버가 말했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밀그램의 실험에서 알 수 있듯이, '악은 평범'하다. 누구라도 생각하지 않는다면, 부당한 지시에 '아니오'를 하지 않는다면, 악마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수 많은 사람들이 '국가'라는 이름의 불법적 명령에 '아니오'라고 말하지 않았다.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4대강 사업, 연예계 블랙리스트를 수행했다. 남일동 빌딩에 전투경찰이 투입될 때도 전투경찰들은 '아니오, 해서는 안됩니다. 시민과 경찰의 생명이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유시민이 말하듯이 국가는 폭력을 독점하며 폭력을 합리화한다. 그리고 인간은 부당한 지시에 저항하기보다는 순응이라는 편리한 방법을 사용한다.

  과거 정권의 가장 심각한 폐악은 인간을 그자체로 보지 않고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본다는 점이다. 칸트의 두번째 정언명령은 "나 자신이든 다른 어떤 사람이든, 인간을 절대로 단순한 수단으로 다루지 말고, 언제나 한결같이 목적으로 다루도록 행동하라."라고 말했다. 그러나 슬프게도 인간을 그 자체의 고귀한 인간으로 보지 않고 어떠한 목적을 위해서 존재하는 수단으로 보는 사고방식은 우리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다. 남일동 빌딩에 올라가 절규하는 시민들을 '도시 게릴라'로 묘사하는 세력들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슬퍼했다. 인간을 수단화하고,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부당한 지시를 내리는데도 이를 양심에 따라 '아니오'라고 거부하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사회에 존재한다. '아니오', '안됩니다.'라는 말을 할 수 있을때, 국가가 저지를 수 있는 '리바이던' 적인 모습들이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시민들은 촛불을 들고 국가에게 '안된다.'라고 말하려 광장으로 나온 것이다. 초등학교 5학년 학생부터 나이든 할아버지까지! 촛불을 든 시민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그들이 바랬던 국가는 헌법에 나와있는 국민이 주인이된 국가였다. 국민을 수단이 아닌 고귀한 존재로 여기는 그러한 국가였다.

 

3. 국가를 바꾸는 방법은 무엇인가?

  국가를 바꾸는 방법!!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혁명을 떠올릴 것이다. 혁명을 하려면 많은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수적이다. 아니면 소로가 말했던 '시민 불복종'이라는 방법이 있다. 이두 방법 중에서 어느 것이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일까?

  우선 소로의 '시민 불복종'이라는 방법을 생각해보자. '시민 불복종'이라는 방법은 소극적 저항이다. '적극적 저항'에 비해서 소극적 저항은 사회를 바꿀 수 없다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다. 그러하기에 많은 사람들이 직접적인 혁명을 현실적인 방법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간디, 마틴 루터 킹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이들이 전개했던 '시민 불복종'운동은 인도를 영국에서 독립하게 만들었으며, 미국 사회에서 흑인의 인권을 강화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여기에는 전제가 뒤따른다. 모두가 함께 해야한다!! 사회의 다수를 평화적인 '시민 불복종' 운동으로 움직일 수 있다면 가장 위력이 약한 방법이라 생각되는 이 방법이 가장 위대한 결과를 가져온다. 200년의 식민지배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인도가 서로 웃으며 헤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마하트마 간디의 '시민 불복종'운동이라는 평화적 방법덕분이다. 물론, 3.1 운동에서 볼 수 있듯이 평화적 방법이 통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상대가 최소한의 양심이 있는 존재라는 전재가 없는 상태에서 '천황제'라는 '전체주의'에 물든 일제에게는 조선의 평화적 방법은 쉽게 진압할 수 있는 소요일 뿐이었다.

  포퍼는 '불복종 운동'에서 더 나가서, '점진적 공학'이라는 방법을 제시했다. 어떤 경우에도 최대의 궁극적 선을 추구하고 그 선을 위해 투쟁하기 보다는 최대의 악과 긴급한 악에 대항해서 투쟁한다는 포퍼의 주장은 우리 사회에 적합한 이론일까?  혁명은 모순이 극에 달하고 시민의 각성과 압제자가 썩어 빠진 상태에서 성공할 수 있다. 그러하기에 우리 현실에서는 '비타협적 급진주의'보다는 포퍼가 말한 점진적 공학이 더 유용하다. 민주적 방법으로 합리적인 타협안에 도달할 수 있는 포퍼의 '점진적 공학'이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포퍼는 '사회혁명'에 반대했다. 왜일까? 혁명이 폭력을 수반하며 독재로 흐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질문을 던진다. 모든 혁명이 '폭력'을 수반하는가? 그렇지 않다. 2006년 11월부터 2017년 초까지 '촛불혁명'을 일으키면서 우리는 폭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일부에서는 '비폭력을 강요하는 것에 문제있다.'라고 말하는 자도 있으나, 그의 주장을 귀담아 듣는 사람은 없었다. 촛불혁명의 현장은 폭력보다는 온정과 따스함이 자리잡았다. 촛불집회에 돈이 필요하다고 하여, 나와 아내는 만원을 모금함에 넣었다. 딸들도 모금함에 돈을 넣겠다고 하여 급히 지갑에서 돈을 떠내어 딸아이 손에 쥐어주었다. 모금함이 자신에게 기회를 주지 않고 다음 줄로 넘어가려하자, 막내는 달려가서 자신이 쥐고 있던 돈을 모금함에 넣었다. 그리고는 환하게 웃었다. 스스로 대한민국의 주인이며, 대한민국을 위해서 자신도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는 행복함을 딸아이는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가져온 손난로를 우리 아이에게 쥐어주며 '예쁘다'고 말하는 이웃도 있었다. '촛불은 바람불면 꺼진다.'는 보수 정치인의 말에, '박근혜가 하야하지 않으면 병석에 누워있는 어머니께서 다음주에는 나오신답니다.'라고 자유발언을 하는 시민도 있었다. 먹을 것을 나눠주는 따스한 이웃도 있었다. 촛불혁명의 장소는 포퍼나 하이에크가 우려했던 '폭력'이 난무하는 장소가 아닌, '사랑'과 '나눔'이 있는 민주주의 학습의 장소였다. 촛불집회 이후, 우리 딸아이가 좋아하는 것은 태극기였다.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태극기를 보면서 스스로 대한민국을 바른길로 인도했다는 자부심을 느낀단다. 

  추운 겨울에 따스한 촛불을 밝히며 새해를 맞이했다. 나에게는 또 하나의 의문이 들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만든 가장 완벽한 정치제도인 '민주주의'가 왜? 이리도 취약할까? 두번씩이나 함량 미달의 정치인을 대통령을 뽑았고, 그 정치인을 끌어내리려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여 목청껏 '박근혜는 하야하라.', '재벌 개혁하라.'를 외쳤다. 민주주의라는 제도는 왜이리 불완전할까?

 

4. 민주주의는 최악을 막는 제도이다.

  '핼 조선'이라는 단어가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 시기에 유행하기 시작했다. 많은 젊은 이들이 이땅을 떠나 새로운 '유토피아'를 꿈꾸며 이민을 꿈꿨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우리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이민'을 선택하는 방법과 대한민국을 바꾸는 방법이 있다. '두려워서 도망친 곳에 천국이란 없다.'라는 말이 있다. 돈이 아주 많아 투자 이민을 가지 않는 이상, 낯선 외국에서 새로운 삶의 뿌리를 내리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다. 새롭게 선택한 '국가'가 나의 마음에 쏙든다는 보장도 없다. 그리고 새롭게 선택한 국가가 마음에 안들게 된다면, 그때 나는 또다른 나라를 찾아헤멜 것인가?

  죽어서 천국을 찾기 보다는 살아서 이땅을 천국으로 만들자! 파랑새를 찾아 헤매지 말고 이 땅을, 대한민국을 파랑새가 살 수 있는 곳으로 만들자!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존재하기 위해서 수많은 독립투사들의 피와 민주투사들의 희생이 있었다. 거져 주어지는 것은 없다. 민주국가 대한민국에 무임승차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촛불을 들고 광장에 나온 것이다.

  민주주의는 너무도 취약했다. 시민들의 선택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두번씩이나 잘못된 선택을 했고, 그 대통령들은 지금 감옥에 있다. 유시민은 '최악의 인물이 권력을 잡아도 마음대로 악을 저지르지 못하게'하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말한다. 이를 달리 말하면,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플라톤의 현자가 대통령이 된다할지라도 자신이 선이라고 생각하는 일을 마음껏하지는 못한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지난 이명박 박근혜 정권이 다른 독재국가에 비해서 마음껏 국가를 유린하지 못한 것도, 노무현 정권과 지금의 문재인 정권이 그들이 생각하는 올바른 길을 마음껏가지 못하고 있는 것도 민주주의의 장점이자 한계이다. 민주주의는 급격한 진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느리지만 꾸준히 진보가 이뤄진다. 느리지만 꾸준한 진보가 있기 위해서는 깨어있는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가 절실하다. 그것을 우리는 촛불혁명을 통해서 몸으로 깨달았다. 한동안 우리집의 유행가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였다. 집안에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딸들이 부르기 시작했다. 나도 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학교에서는 레미제라블의 '민중의 노래'를 부르는 학생이 늘어났다. 야간 자율학습에 빠지고, 학원에 갔다가 귀가 길에 촛불집회에 참여한 학생들이 나에게 인사를 하기도 했다. 그 학생들이 행진을 하기 전에 반드시 불렀던 레미제라블의 '민중의 노래'를 잊지 않은 것이다. 집에 와서 다시한번 레미제라블의 '민중의 노래'를 들으며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민주주의는 시민의 사랑과 관심을 먹고 자란다. 민주주의에게 사랑과 관심을 주지 않는다면, 꽃이 물을 먹지 못해 시들듯이, 민주주의도 죽어버린다.

 

5. 한국의 진보정치는 가능한가?

  촛불집회 현장에서 시민들의 자유발언 중에서 한 여성이, 조국교수의 '법학강의'를 인터넷을 통해 듣고 왔다고 말했다. 시민들은 엉망이 되어버린 대한민국호를 살리기 위해서 '법학강의'를 찾아들을 정도로 절실했다. 이러한 절실함이 결실을 맺어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다. 그렇다면 대한민국호는 어떠한 정치인들에게 키를 넘겨야할까? 유시민은 대한민국의 진보정치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지면을 할애하며 진보정치인이 지켜야할 도덕과 진보정치의 방향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베른슈타인은 "노동운동이 필요로하는 사람은 자기 모판이 아닌 다른 곳에서 자란 식물도 감싸안을 수 있을 만큼 생각이 넓어야"한다고 말했다. 생각이 교조적으로 흐를수록 정통성 논쟁! 이념논쟁에 빠진다. 중국 공산당의 정풍운동, 1930년대 만주의 민생단 사건, 일본의 적군파에서 '다른 모판에서 자란 식물을 감싸 안을 수' 없는 자들이 벌이는 비극을 볼 수 있다. 그곳은 죽음의 공간이다. 유시민은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의 비극을 예로든다. 교조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결국은 현실을 개혁하지 못하고 히틀러에게 권력을 넘겨주고 모두 죽어갔다.

  '변질'의 위험을 안고 신념윤리와 책임 윤리사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하는 것, 그것이 정치를 통해서 선을 추구하는 자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유시민은 절규한다. 정치인은 일반이들과 다른 윤리적 규범이 적용되어야한다. 자신의 신념과 대척점에 있지 않다면 최악이 들어서는 것을 막기 위해서 진보정당들은 연합해야한다. 유시민은 이를 진보정치인들에게 절실히 말하고 있다. 정치는 현실이기 때문에..... 이승만이 권력을 잡고 수 많은 민주투사들이 희생되어야했다. 김구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통일국가 수립이라는 대의를 위해서라도 현실을 받아들이고 남한에서 김구가 권력을 잡았어야했다고 주장한다. 그랬다면, 최소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발전했으며, 어쩌면 더 큰 민족의 비극을 막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신념윤리와 결과에까지 책임을 져야한다는 책임윤리 사이의 딜레마에서 진보정치인들은 현명한 판단을 해야한다. 현실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유시민은'진보는 본능을 거슬러 간다.'라고 말한다. '작은 오류만으로도 쉽게 무너진다. 한번 무너지면 복구하기 어렵다. 진보는 바람을 거슬러 나는 새, 물살을 거슬러 헤엄치는 물고기와 같다.'라고 말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기존에 익숙한 생각, 체제를 선호한다. 그러하기에 보수적일 수밖에 없고, 나이들면 보수 정당에 투표하기도 한다. 유시민의 이말 중에서 '한번 무너지면 복구하기 어렵다.'라는 말이 나의 가슴을 파고든다. 언제나 웃는 모습으로 살아있을 것 같던, 노회찬이 너무도 쉽게 세상을 등진 사건이 떠올랐다. 대기업 삼성을 노회찬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약간의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잘못을 '신념윤리'에 위배된다고 괴로워하며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민주주의가 관심과 사랑이 없으면 쉽게 취약해지듯, 진보 정치도 현실이라는 벽앞에 너무도 취약했다. 안되는 것을 알면서도 하려하는 공자처럼, 현실이 쉽게 바뀌지 않는 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진보정치인들은 현실을 바꾸려 오늘도 바람을 거슬러 날아간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진보를 위해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시민의 한사람으로 사랑과 관심을 주자.

 

 

  촛불혁명이 일어나고 이제 2년여가 지나간다. 촛불혁명 이후, 우리 현실도 많이 달라졌다. 보수정권이 들어섰을 때는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관리자들의 행정에 말없이 묵묵히 따르던 사람들이, 이제는 '안된다.'며 당당히 자신의 말을 하기 시작했다. 모두들 촛불혁명 이후 삶이 변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 주변에서 시작된 촛불혁명의 여파는 사회에까지 이어졌다. 미국에서 시작된 '미투운동'이 한국에서만 조용하다고 의아해하던 시사평론가는, 촛불혁명이후 거세게 일어나는 한국의 '미투운동'에 놀란다. 촛불혁명을 거치면서 자신들의 힘과 능력, 이땅의 민주주의에 대해서 각성한 시민들이 깨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꼰대들의 부당한 갑질에 대해서도 당당히 자신의 주장을 하는 깨어있는 시민들을 보며, 촛불혁명의 위력을 다시한번 실감한다. '국가란 무엇인가'라고 나에게 묻는다면, '리바이던'이라는 괴물을 깨어있는 시민들이 길들이는 곳이라고 말하고 싶다. 시민의 관심과 사랑이 없다면, '리바이던'은 시민을 헤칠지도 모른다. 자! 깨어있자! 부당한 지시에 '아니오'라고 당당히 자신의 의견을 말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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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의 대화 - 새로 읽는 남북관계사 새로 읽는 관계사 시리즈
김연철 지음 / 창비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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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둠의 이명박근혜시기를 지나서 평화의 새벽이 다가왔다. 벅찬 가슴으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판문점 산책로 대화를 지켜보고, 불가능할 것 같았던 김정은과 트럼프의 싱가폴 회담을 바라보았다. 과거에서 머나먼 안드로메다의 이야기로만 들렸던 일들이 지난 일년 사이에 숨가쁘게 진행되었다. 이때 지난 70년이라는 시간 동안 남북이 대립을 넘어서 평화를 만들기 위해서 걸어왔던 머나먼 여정이 궁금해졌다. 김연철 교수는 남북관계의 실무 경험이 있는 몇 안되는 전문가이다. 그의 눈을 빌려 위대한 평화를 찾아나선 남북한의 머나먼 여정을 살펴보자.

 

1. 무능한 대북관계의 시작 박정희 정권

  김연철은 현대외교에서 대통령의 외교 철학과 정책에 대한 일관성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현대 외교는 정상회담을 중심으로 전개되기에 대통령의 신념과 철학이 큰 비중을 차지할 수 밖에 없다. 대학에서 '민중'이 역사의 중심이며, '지배자' 중심의 역사에서 탈피해서 민초의 시각에서 역사를 바라보아야한다고 배웠다. 그러나, 역사는 '민중'과 '지배자' 일방의 힘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탁월한 지도자라 할지라도 현명한 민중의 지지가 없다면 탁월한 업적을 만들기 힘들며, 현명한 민중이라 할지라도 민중의 힘을 조직화할 수 있는 리더가 없다면 결실을 맺지 못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남북관계에서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탁월한 리더가 중요하다. 남한을 18년 동안 통치한 박정희는 남북관계를 통일로 이끌 인물이었을까?

  박정희의 그릇은 '민족의 통일을 위한 초석'을 담기에는 너무도 작았다. 1969년 닉슨 독트린 이후 시작된 데탕트를 박정희는 위기로 인식했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신발을 신지 않는 모습을 보고, 어느 사업가는 그들에게 신발을 팔 수 있다며 희망을 보았지만, 어느 사업가는 그들은 신발을 신지 않는다며 비관했다. 같은 사실이라하더라도 그사람의 그릇에 따라서 현실을 달리 보인다. 데탕트라는 시대의 조류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여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는 기회를 삼기 보다는, 기존의 반공 논리로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혈안이 된 박정희 정권은 위기의식을 가졌다. 불행히도 박정희의 이러한 세계관은 그를 추종하는 수구세력에게 그대로 복제되었다.

  놀라운 사실은 박정희 정권의 탁월한 업적 중에 하나인 '7.4 남북 공동 성명' 발표에 박정희가 회의적이었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1972년 5월 31일 박성철이 남북 정상회담을 제안하자, 박정희는 이를 거부했다. 북을 믿지 못하는 그는 남북관계를 획기적으로 진전시킬 수 있는 기회를 허공에 날려버렸다. 이어서, 남북관계 진전을 위해서 부단히도 노력했던 이후락을 교체하고 더 이상의 남북관계 진전을 가로막았다. 민족의 통일과 번영보다는 정권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박정희의 모습을 보며 그의 지도자로서의 그릇을 가늠할 수 있다. 우리는 박정희 정도의 그릇을 가졌다. 국민이 새로운 지도자로 대통령을 교체하지 않는 이상 남북관계는 더 이상 진전될 수 없었다. 슬프지만, 모든 국민은 그 국민의 수준에 맞는 그릇을 갖기 마련이다.

 

2. 역사의 교훈 - 대화를 하지 않으면 남한은 왕따를 당한다!!

  '대북 정책을 둘러싼 한민관계에서 한국이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남북관계가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김연철의 글을 의미심장하다. 우리가 북한과 대화를 하면 남한이 동북아의 외교무대에서 운전석에 앉을 수 있지만, 북과의 대화가 단절되면 '코리아 패싱'이 시작된다. 이러한 현실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이다.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이 일어난 직후, 존슨 미국 대통령의 대응은 참으로 현명했다. 사태를 해결할 방법을 몰라서 허둥대지도 않았으며, 침착하게 국가 안전 보장회의 참여자들에게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고 자유 토론을 하도록 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가 발생했을 때 보았던 케네디의 모습과 흡사하다. 아울러, 우리가 그리워하는 고 노무현 대통령의 리더십과도 유사하다. '한비자'를 보면, 군주는 자신을 비워야하며, 자신의 마음을 신하에게 보여서는 안된다고 한다. 신하들이 마음껏 자신의 의견을 말하도록 하여 그들의 마음을 알아보고 최종결정을 내려야한다. 이것이 신하들의 머리를 빌릴 수 있는 방법이다. 위기 상황일수록 토론과 대화 및 의견 청취의 위력은 극대화된다.

  북한과 미국의 불꽃튀는 외교전과 협상술이 난무하는 상황 속에서 남한은 왕따를 당했다. 푸에블로호 협상 자체를 북한은 선전에 이용했으며, 남측이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을 미국에 제안해서 남한과 미국 관계의 균열을 유도했다. 강대국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북한만의 생존술이 발휘되었다. 미국은 돈으로 박정희를 달래며 제발 가만히 있어달라는 제스춰를 보였다. 1.21사태가 일어난 해이며, 북한과 휴전선을 맞대고 있는 당사국임에도 불구하고 남한은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강경한 보복을 목청껏 말할 수록 한국은 왕따의 수렁속에 빠져들었다.

  우리가 남북관계를 돌파하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면 미국도 우리를 존중하고 정보를 공유한다. 김대중정권과 노무현 정권시기에 우리가 약소국으로서 동북아 외교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던 것도 남북의 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노무현은 '중진국 리더'의 모범을 보였다는 외신의 찬사를 얻기까지 했다. 그러나 우리가 북한과 대립만을 하려한다면 미국은 우리를 외면한다. 이는 박정히 정권 시기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불행히도 박정희의 아바타를 자처하는 정권에서 '코리아 패싱'이라는 용어가 탄생하며 박정희의 선례를 답습한다.

 

3. 남름 능력을 발휘한 전두환과 노태우 정권

  전두환은 박정희 키즈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남북관계를 살펴보면 박정희보다 진일보안 모습이 보인다. 그는 86아시안 게임과 88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기 위해서 북한과 대화를 했다. 단초는 1984년 북한의 수해물자 제공 수락에서 부터 시작된다. Give and take! 라는 말이 있다. 북한이 의례적으로 하는 수해물자 제공을 덥석 받은 전두환 정권은 수해구호물자를 가져온 북측 인사들에게 대형가방 1600개에 카세트 라디오, 전자 팔목시계, 양복지, 내의, 양말을 담아 보냈다. 공짜란 없다. 이시기 받기만 했다면 1985년 이산가족 상복의 결실까지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남북한이 '교류와 협력'에 상당한 의견 일치를 보기까지 했다. 남북 철도 연결, 공동어로 구역 설정, 경협위원회 설치 의견 접근 등등.... 반공을 강조하는 보수정권에서 어떻게 이러한 합의가 이뤄질 수 있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물론, 전두환 정권 시기에 결실을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가 노태우 정권의 합의에 밑바탕이 되었다는 점에서 나름 의미가 있다. 어느 식물도 뿌리 없이는 홀로 설 수 없기 때문에.....

  전두환 정권을 이은 노태우 정권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 물론 과거 나도 노태우 정권을 부정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공산권이 무너지는 세계정세를 잘 파악하고 북방외교를 한 것이 노태우 정권이다. 공산권과의 수교가 더 늦어졌다면 엄청난 시장인 중국을 놓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노태우는 외교에서 만큼은 과거 냉전 시기의 논리에 얽매이지 않았다. 북방정책의 최종목표에는 '우리의 생활.문화권을 연변 연해주 등에 까지 확대시켜 나간다.'는 원대한 구상이 있었다. 얼마나 노태우의 장쾌한 구상인가! 냉전의 대결에서 벗어나, 새롭게 열린 중국과 러시아와의 교류와 협력을 넓혀 우리의 경제 및 생활 공간을 넓히겠다는 구상을 타 보수 정권에서는 하지 못했다. 그것을 노태우는 하고 있었다. 그의 원대한 구상은 1991년 남북 기본합의서를 도출해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는 남북의 평화정착을 바라지 않는 세력이 있다. 노태우 정권 시기에 '훈령조작사건'도 그러한 세력에 의해서 저질러졌다. 북한의 요구를 받아들여 이산가족 상봉을 이루라는 노태우 대통령의 훈령을 누락시켜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민족의 숙원을 좌절시킨 사건을 읽으면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대통령의 말도 듣지 않고 민족의 이익을 외면하는 파렴치한 수구세력의 존재를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한다.

 

4. 무능력한 보수정권과 한반도 운명(김영삼, 이명박, 박근혜 정권)

  리더의 철학과 소신이 남북관계에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김영삼 정권을 보면 알 수 있다. 여론에 휘둘려 일관성 없는 대북정책을 추진했으며, 남북관계는 더 없이 나빠졌다. 1993년 3월 19일 '서울 불바다론'을 말하는 북한 대표의 영상이 전국을 강타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북한을 비난했다. 그러나 김연철이 이 책에서 남측의 유도된 대결이었음을 밝힌다. 남측(송영대)대표가 "귀측 핵문제가 조속히 해결되지 않을 경우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 예측할 수 없다."라고 말하자. 북측(박영수)은 "우리는 전쟁을 바라지 않지만 결코 그쪽이 전쟁을 강요하는 데 대해서는 피할 생각이 없다. 여기서 서울이 멀지 않다. 전쟁이 일어나면 불바다가 되고 만다."라고 맞받아친다. 북한을 몰아 붙이자, 북한이 격렬하게 대응한 이 비밀 대화를 앞뒤를 잘라서 언론에 공개했다. 남북의 대결을 조장하는 한심한 행동을 김영삼 정권은 주저하지 않고 저질렀다. 그리고 1995년 '뉴욕타임스'와의 회견에서 김영삼은 '더 이상 남북 대화는 없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말만은 일관성 있게 지킨다. 외교에서 철학이 없는 리더의 위험성을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 김영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불행은 김영삼 정권에서 그치지 않는다.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을 거치며 남북관계는 급속도로 발전했다. 특히 노무현 정권 시기 10.4 선언에서는 평화협정에 대한 이야기까지 나왔다. 그러나 이명박근혜 정권은 진보정권의 빛나는 업적을 폄훼하며 이를 무시했다. 2007 남북 정상회담에서 '서히 평화 협력 특별지대 구상, 백령도 인근 해역 해양 생태공원조성, 해주특구 개발'이라는 엄청난 합의를 했다. 대립의 어둠에서 벗어나, 상생과 평화의 시대로 나아갈 수 있는 이 합의를 이명박은 휴지조각으로 만들었다. 북한 붕괴론의 근거한 이명박의 초강경조치는 5.24조치로 이어진다. 그러나 5.24조치의 피해는 남측이 북측에 비해 더 컸다. 남측이 45억 달러의 피해를 본데 비해서 북측은 8억 달러의 손해를 보았으며, 남한의 빈자리는 중국이 들어와 이익을 가져갔다. 얼마나 멍청한 조치인가? 이러한 멍청한 정책이 이명박정권에서 그쳤다면 우리 민족에게는 행운이었을 것이다.

  박근혜 정권은 '통일 대박론'을 외치며 이명박 정권의 정책을 계승했다. 박근혜 정권은 '결과로서의 통일'을 외치며 '과정으로서의 통일'을 외면했다. 전형적인 북한 붕괴론에 근거한 통일론이다. 2004년 6월 15일을 기해서 남북은 대결을 접고 평화 통일을 기원하며 더 이상의 비난 방송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박근혜정권이 이를 재개했다. 물론 재 설치된 스피커에 방산비리가 저질러져서 북한에 남한의 방송이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는 웃지못할 일도 발생했다. 멍청한 박근혜 정권은 남한이 개성공단을 폐쇄하고 대북방송을 재개하면 북한이 엄청난 타격을 받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남한이 빠진 경협의 자리는 중국이 치고들어왔다. 민족의 불행만 높이는 멍청한 정책으로 인해서 남한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에 빠져들었다. 촛불혁명에 의해서 새로운 남북관계가 열릴 수 있는 장이 마련된 지금!! 과거의 시대로 되돌아갈 우려는 없는가? 불행히도 박정희와 김영삼, 이명박, 박근혜를 추종하는 세력이 한국사회에는 존재한다.

 

 레이건 대통령은 "배고픈 아이는 정치를 모른다."라고 말했다. 김연철은 '어떤 문명국가에서도 인도적 지원을 퍼주기라고 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인도적 지원마져도 퍼주기라고 말하며 북한과의 교류를 불편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의 삐딱한 생각을 조장하며 정치적 이익을 누리는 정치인들이 있다. '70년의 대화'라는 책을 통해서 어떠한 철학과 신념을 가진 정권 혹은 리더가 집권하는가에 따라서 남북관계는 요동칠 수 있다는 사실을 뼈져리게 느꼈다. 남북관계의 평화와 번영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깨어있는 시민들이 냉전 수구 논리로 무장한 세력들이 집권하지 못하도록 오늘을 밝혀야한다. 깨어있으라! 깨어있으라! 지난 9년 동안 시민들이 깨어있지 못했기에 남북관계에 불행이 깊어졌다. 다시는 절망의 늪을 헤매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 모두 깨어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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