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적 유전자 - 40주년 기념판
리처드 도킨스 지음, 홍영남.이상임 옮김 / 을유문화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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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적 유전자'를 읽은 계기는 유시민 작가 덕분이다. 유작가는 '문과 남자의 과학공부'를 집필하고 나서 각종 언론과 유튜브에 나와서 자신이 과학을 통해서 깨달은 바를 말하기 시작했다. 유튜브 '최재천의 아마존'에 나와서 유시민은 '과학적으로 삶은 의미 없다.'라고 단언했다. 경제학을 전공했으나 그도 인문학적 소양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 보았기에 유시민의 주장은 충격적이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책에도 우리의 존재가 아무 의미없다는 말이 나온다. 과연 그럴까? 유시민의 말처럼 이 세계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까? 인간이 숭고하게 여기는 모성애도,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죽음을 불사하는 정신도 모두가 유전자가 프로그램화한 유전자 운반 기계의 행동일뿐일까? 


1. 생물을 통해서 인간을 이해하다.

  인간을 동물과 다른 별개의 존재로 볼 수 없다. 동물도 인간 처럼 도구를 사용할 수 있으며, 불완전하지만 나름의 언어를 가지고 있다. 또한 그들도 슬픔과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존재이다. 그렇기에 역으로 동물을 통해서 인간을 설명할 수도 있다. 

  리처드 도킨스가 소개한 기생 일개미를 보며 인간세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기생 일개미 중에서 일부(Bothriomyrmex regicidus와 B. decapitans)는 기생 일개미 여왕이 다른 개미종의 집에 침입하여 영왕개미를 죽이고 개미 사회를 장악한다. 그리고 기생 개미 영왕은 자신의 알을 낳고, 노예 개미의 시중을 받으며 서서히 원래의 종을 대체한다. 더욱 충격적인 사계도 있다. 

  기생 개미 중에서 Monomorium santschii의 여왕개미는 노예 일개미에게 자기 자신의 여왕 개미를 살해하도록한다. 그리고는 노예 개미의 시중을 받으며 왕국을 빼앗아 자신의 왕국을 구축한다. 정말 충격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이러한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은가! 소위 축출 이혼이 그러한 사례이다. 범죄 관련 팟캐스트에서 알게된 사연이다. 술집 여자와 하룻밤을 잤고, 그결과 아이를 갖게 되어 결혼을 했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의 부모를 모욕하고 두자녀는 그 남자의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린다. 이성을 잃은 남자가 그녀에게 폭력을 휘줄렀고, 결국 그 남자는 법원에서 접근금지 처분을 받았다. 모든 재산을 그녀에게 빼앗기고 이혼까지 당했다. 그녀는 다른 남자와 새로운 삶을 살면서 자녀를 고아원에 보내고 남자에게는 양육비라는 명목으로 돈까지 계속 뜯어내려한다고한다. Bothriomyrmex regicidus와 B. decapitans는 우리 사회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Monomorium santschii도 존재한다. 일본의 신친일파 육성 프로그램에 따라서 일본 정부나 사사카와 재단의 돈을 받으며 신친일파로 육성되는 사람이 많다고 호사카 유지 교수는 말한다. 그리고 그들이 정권을 잡고 친일적인 정책과 행보를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더욱이 좌우의 이념 갈등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이 우파라는 신념(?) 혹은 망상 속에서 친일 정권의 매국행위를 동조하는 이웃을 보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Monomorium santschii는 우리 사회에도 존재한다. 단지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리처드 도킨스는 "유전자 역시 인형을 직접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 프로그램 처럼 간접적으로 자기 생존 기계의 행동을 제어한다."(113쪽)고 말한다. 리처드 도킨스가 제시한 프로그램 명령어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도 있다. 


  "자기 종의 구성원을 만나면 누구에게나 친절해라."(182쪽)

  "거주자면 공격하고, 침입자면 물러나라!"(153쪽)


  이주민에게 배타적인 모습을 띄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며 자연스러운 것이다. 적어도 리처드 도킨스의 말이 맞다면 말이다. 그리고 이는 생존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프로그램이기도 했다. 고구려가 수,당 전쟁을 끈질기게 수행한 것도 유전자에 의해서 프로그램 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앞도적으로 불리한 군사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우리의 국토를 지킬 수 있었던 힘의 원천도 '거주자면 공격하고, 침입자면 물러나라'라는 명령어 덕분이다. 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자기 종의 구성원을 만나면 누구에게나 친절해라'라는 명령어가 필요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했다. 전쟁은 줄어들었으며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이방인을 만나는 빈도가 늘어났다. 이방인에게 환대를 해야하는 시대가 되었다. 유전자의 프로그램을 인간이라는 생존기계가 거역해야할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으며, 거역하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바로 여기에서 인간의 희망과 존재 가치가 발견된다. 


2. 이 세계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까?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읽고는 회의주의에 빠진 사람이 많다고 한다. 유전자의 조작에 의해서 유전자가 시켜 결혼하고 짝짓기를하며 기뻐하고 슬퍼한다는 회의주의에 빠진 사람이 많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서 '과학적으로 세계는 아무 의미가 없다.'라고 단언하는 사람도 있다. 유전자 운반 기계에 불과한 인간이 그들에게는 아무런 의미 없는 존재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불교에서 달을 가리키면 달을 보지 못하고 손가락 끝을 달이라 생각한다는 말이 있다. 리처드 도킨스는 "개체의 몸이란 일시적인 유전자의 조합을 위한 임시 운반체에 불과하다."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이것은 도킨스도 말했듯이 은유적 표현이다. '내 마음은 호수요. 당신은 노저어오오.'라고 말하는 연인에게 '당신의 마음이 호수라며 왜? 노 저어 갈 수 없지? 호수는 어디있소?'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은 그 사람과 대화할 수 있겠는가?

  '이기적 유전자'를 잘못 읽은 사람들이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해 놓았다는 유전자 결정론에 빠져든다. 더 나아가 '인생은 의미 없다.'라고 결론 짓는다. 과학의 한계를 생각하지 못하며, 과학이 아직까지 밝혀내지 못한 진실이 밝혀낸 것보다 많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우주에 있는 84.5%를 차지하는 암흑물질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단지 알고 있는 것은 절반도 안되는 15.5%만을 알면서 우주 전체를 이해했다고 말한다면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더욱이 과학에 문외한이 과학책 몇권을 읽고서는 '과학적으로 세계는 아무 의미가 없다.'라고 단언한다면 당신은 그 말에 동의할 수 있겠는가? 벼는 익을 수록 고개를 숙인다. 우리가 과학에 대해서 알면 알 수록 고개를 숙여야한다. 인간이 알고 있는 것은 백사장의 수많은 모래알 중에서 모래 몇알밖에 되지 않는다는 진실을 인정해야한다.

  리처드 도킨스는 "나는 어머니를 하나의 기계로 취급한다."(218쪽)고 말했다. 인간을 "생존기계"로 표현하는 도킨스의 극단적 비유가 많은 사람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리처드 도킨스를 유전자 결론론자로 이해하는데 일말의 빌미를 도킨스가 제공한셈이다. 

  그러나, 리처드 도킨스는 분명히 말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창조자에게 대항할 힘이 있다. 이 지구에서는 우리 인간만이 유일하게 이기적인 자기 복재자의 폭정에 반역할 수 있다."(335쪽) 또한, "뇌는 유전자의 독재에 반항하는 힘까지 갖추고 있다."(123쪽) 리처드 도킨스는 유전자 결정론자가 아니다. 유전자는 프로그램화를 시켰을 뿐이다. 유전자가 우리의 뇌를 직접 지배할 수는 없다. 바로 그 틈, 그 공간을 통해서 우리는 삶의 의미를 창조하고 이 세계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유전자의 운반체인 인간이 문화와 문명! 혹은 밈을 통해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있다.


 

  다시 최재천 교수의 유튜브 아마존으로 가자. 최재천 교수는 그의 유튜브에서 유시민의 '과학적으로 삶은 의미 없다.'는 표현을 언잖아 했다. 심장의 일부분을 떼어서 모아 놓으면 심장 박동을 만들어 낸다고한다. 이를 전문용어로 페이스메이킹이라한다. 부분은 전체의 합 그 이상이다. 챗GPT가 일정한 용양이상을 학습하고 파라미터의 수를 증대시키자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능력을 보이기 시작한 것 처럼, 세포와 유전자로 이뤄진 우리의 몸도 그것이 모여서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 '운반 기계'를 만든다. 그리고 그 운반 기계가 모여 문명을 만든다. 그들은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철학이라는 형이상학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과학자 최재천 교수는 '철학'에서 과학이 하지 못하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자칭 인문학을 공부했다는 자는 과학을 영접하면서 허무주의에 빠져들었다면, 과학을 공부한 석학은 인문학을 통해서 의미를 찾고 창조하려한다. 나는 의미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여하고 창조하는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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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일본 - 일본에 대한 편견이 아닌 편견 같은 진실
김교수 지음 / 그린하우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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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인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얽혀버린 한일관계를 풀 수 없다! 그래서 일본인과 일본문화에 관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처음 읽은 책은 호사카 유지 교수의 '조선 선비와 일본 사무라이'이다. 호사카 유지 교수의 책은 학자가 쓴 책답게 조선과 일본의 문화를 비교하며 조선과 일본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쓰여져있다. 그후, 심리학을 전공한 유영수의 '일본인 심리상자'를 읽었다. 일본에 살기도했던 작가는 심리학적 관점에서 일본인의 정신세계를 분석했다. 그때 내가 받은 인상은 일본은 거대한 정신병원이라는 것이다. 사무라이의 칼이 지배하는 극도의 공포사회를 천년이상 지내오다보니 그들의 정신세계는 역사적 집단 트라우마에 빠져있었다. 그리고 염종순의 '일본관찰 30년'을 읽었다. 일본에서 30여년을 살면서 깨달은 일본인의 심리를 재미있게 풀어냈다. 그리고 이제, 롯본기 김교수의 '굿바이 일본'을 읽었다. 이에 대한 종합 보고서를 작성해보자.


1. 같기도하고 아니 같기도하고...

  사람은 보이는데로 보지 않고 보고 싶은 것을 본다. 같은 장면을 보더라도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선입견에 따라서 다른 해석을 한다. 같은 일본에 관한 책이지만 다른 견해들이 있다. 

  '일본인 심리 상자'라는 책에서 일본인은 지하철에서 유모차를 끌고오는 엄마들을 민폐라고 생각한다. 아이에 대한 따뜻한 배려보다는 자신의 사적공간을 침해했음에 더 신경을 쓰는 것이 일본인이다.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고, 오직 자신의 일에만 관심이 있는 일본인의 모습을 롯본기 김교수도 언급한다. 

  롯본기 김교수는 일본에서 무거운 물건을 가지고가는 노인분들의 물건을 들어 드린단다. 그러나, 일본인들에게서 이러한 선행은 보기 힘들다. 심리학적 접근보다는 일본인들의 국민성에 촛점을 맞추어 자신의 경험을 해석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타인의 은혜는 같은 크기로 갚아야한다는 부담감을 가진 일본인들에게 우리의 노인공경 문화를 기대하는 것은 돌맹이 갖다 놓고 닭알 되기를 바라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일본이 약자에 대해서 배려를 하는 따뜻한 나라라고 서술한 책도 있다.  '일본관찰 30년'이라는 책의 저자 염종순은 일본의 장애인에 대한 배려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중증 지체장애자인 염종순의 아들은 휠체어를 타고 다녔다. 장애자에 대한 사회적 배려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은 한국을 떠나 일본에 갔다. 그곳에서 외국인인 자신의 아들에게도 전동 휠체어를 무료로 나눠주는 일본의 따뜻한 행정 시스템을 만났다. 이에 감동한 염종순은 일본의 중고 휠체어를 한국의 장애자에게 기증하는 활동을 기획하고 실행에 옮겼다. 일본의 따뜻함이 묻어나는 체험담이다. 

  반면, 롯본기 김교수는 일본은 한국보다 장애자의 수가 두배나 많음에도 불구하고 거리에서 장애인을 만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는 타인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을 싫어하고, 타인에 대한 배려를 하지 싫어하는 일본인의 종특(종족 특성)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과연 일본인은 약자에 대한 배려를 하지 못하는 종특을 가진 사람들일까? 아니면 롯본기 김교수가 편견을 가지고 일본인을 보았기에 벌어진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일까? 타인에게 신세를 지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기에 타인에게 선행을 베푸는 일도 하지 않는다는 해석을 따른다면, 일본인은 시스템으로 약자를 배려할지는 모르지만, 개개인이 서로에게 배려는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태려하기 싫어하는 일본인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시스템으로 배려하는 일본인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참으로, 타인을 배려하는 일본인 같기도하고 아니 같기도하다.


2. 일본은 침몰하고 있는가?

  롯본기 김교수는 갖가지 수치를 증거로 일본 사회가 침몰하고 있다고 말한다. 초고령 사회, 높은 자살률, 심각한 저출산 문제, 심각한 국가 부채, 수습되지 않고 있는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등등.... 롯본기 김교수의 일본에 망조가 들었으며, 아베 노믹스는 타는 불에 기름을 붓듯이 사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어다고 지적한다. 특히, 반도체 핵심 소재 3가지를 수출금지를 한 것은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기술독립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이며, 일본 중소기업으로서는 수출길이 막혀 심각한 위기에 빠질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웃을 수 없었다. 초고령화와 높은 자살률, 심각한 저출산 문제는 우리 대한민국에도 해당되지 않는가! 더욱이 저출산 문제는 일본보다 우리가 더 심각하다. 그러니, 초고령화의 속도도 우리가 빠를 수밖에 없다. 이러다가 우리 대한민국인이 멸종할 수도 있겠다는 위기 의식이 든다.

 아울러, 롯본기 김교수는 일본인은 건강수명과 수명과의 차이가 10년이라며 이로인해서 요양원에서 보내는 일본인이 많으며 이로인한 사회적 비용이 만만치 않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운동하지 않고 약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노인분들이 우리나라에도 많다. 급속한 초고령화 속에서 우리도 심각한 사회적 비용을 지출해야한다. 

  일본이 침몰할 것이라면, 대한민국도 침몰할 것이라는 불안감이 밀려온다. 일본호와 대한민국호가 서로를 바라보며 '네가 먼저 침몰할 거야!'라며 안도의 숨을 내쉬는 것 같아 무척 침울하다. 더욱 침울한 것은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위기 경보를 울려야하는 언론에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재 일본의 방송과 언론 현실은 보도하지 못하고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분위기이다."-310쪽


  롯본기 김교수는 방사능의 영향으로 심각한 질병이 급증하고 있다는 기사를 내보냈다가 한달 후에 폐간된 '타카라지마'라는 잡지를 예로들며 일본의 언론을 매섭게 질타한다. 일뽕 방송을 만들고, 한국인에 대한 모멸적 방송을 송출하는 일본방송을 질타한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도 이와 비슷하지 않은가? 수구 신문과 기레기들이 한국의 심각한 경제 현실을 보도하지 않는다. 권력을 견제하는 감시병이 되기 보다는 권력의 나팔수가 되려한다. 일본의 핵폐수가 위험성을 제대로 알리지 않는다. 과연 일본과 무엇이 다른가? 침몰하는 일본보다 더 늦게 침몰할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인가? 긴 한숨이 나온다. 


  책을 덮었다.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문장이 있다. 


  "인간성을 존중하는 태도로 일본인을 대하면 반대로 무시당하고 엄격한 규율과 경직된 조직문화를 만들어줘야 순종하는 일본인이 된다."-47쪽


  자율보다 통제에 중점을 두어 교육한 결과 일본은 갑질을 하는 사람에게 순종한다. 인간적으로 대해주면 자신이 갑인줄알고 갑질을 한다. 칼의 문화와 붓의 문화의 차이점이라고 생각하며 롯본기 김교수의 말을 받아들이려하면서도 '과연 그런가?'라는 반문이 밀려온다. 우리 사회에도 만만치 않은 갑질이 있지 않은가? 서이초 선생님을 비롯한 수많은 선생님은 왜? 자살했는가? 자신의 많이 배우고 변호사라며 갑질해서는 안되는 선생님에게 갑질을 하지 않았는가? 무엇이 일본보다 낫다는 말인가? 나쁜 정치인과 블랙기업이 일본에 많다고 지적하는데, 우리나라에는 나쁜 정치인과 블랙기업이 없는가? 

  롯본기 김교수의 지적이 일면 타당하다고 고개를 끄덕이지만, 일본보다는 덜하지만 우리도 만만치 않은 결점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친구는 바꿀 수 있어도 이웃나라는 못바꾸는 법이다. 못된 일본을 교화시켜 좋은 이웃으로 만드는 법은 없을까? 롯본기 김교수는 일본이 미국에 절대 복종하는 모습을 예로들며 일본의 갑이 되라 말할 것이다. 과연 그길밖에 없을까? 긴 한숨이 몰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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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관찰 30년 - 한국이 일본을 이기는 18가지 이유
염종순 지음 / 토네이도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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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경일 교수가 학생들에게 한모둠은 강아지와 고양이의 차이점을 쓰라고 했고, 다른 한모둠에게는 테블릿과 고양이의 차이점을 쓰라고 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너무도 다른 테블릿과 고양이의 차이점은 한가지도 쓰지 못했는데, 비슷해 보이는 강아지와 고양이의 차이점은 너무도 잘 써내려갔다. 김경일 교수는 말했다. 다른점은 비슷한 사이에서 발견될 수 있다!! 한국과 일본은 비슷한 점이 많기에 다른점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다른점이 편견을 만들어내고 아픈 역사를 만들어냈다. 

  저자 염종순은 일본의 후진적인 정보화 현실과 우리의 앞선 정보화 시스템을 거론하며 일본에 대한 환상을 깨뜨린다. 유튜브 '선대인 TV'에서 '디지털 조선통신사' 코너에서 일본의 현주소를 낱낱히 소개해주었다. 난 그것을 너무도 재미있게 보면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산업화 시대에는 장인정신이 살아있는 일본이 앞서지만, 디지털 정보화 시대에는 한국이 앞설 수밖에없다는 지적에 희망을 갖았다. 그 내용을 제1장에 정리해 놓았다. 

  제2장과 제3장에서는 한국인이 일본인을 이해하기 위해서 알아두어야할 것들에 대해서 서술했다. 그중에서 가장 충격적인 것은 같은 한자 문화권이기에 발생하는 오해였다. 한국에서 친일파 재산 환수법이 국회를 통과하자, 일본인이 염종순의 걱정을 했다. 염종순이 친일파이기에 그의 재산이 몰수될 것으로 오해한 것이다.

  '친일파'는 한자를 풀이하면, 일본과 친한 사람무리이다. 염종순이 일본과 친하기에 그의 재산이 몰수될 수도 있다고 일본인은 판단한 것이다. '친일파'라는 단어 대신 '민족 반역자'라는 용어를 나부터 사용해야겠다. 같은 한자이지만 너무도 다른 의미로 한국인과 일본인이 사용하는 단어는 많다. 정말 말 같은 한자문화권이기에 같은 한자를 다른 의미로 사용하는 차이점이 발생한 것이다. 

  저자 염종순은 민간 외교관으로 한국과 일본 사이의 다리가 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그는 믿음으로 통교하는 사신이라는 뜻의 민간 통신사이다. 그러하지만, 그는 우리에게 따끔한 일침도 서슴치 않는다. 


  "우리는 자국민들에게는 사과와 반성을 할 줄 모르는 '일본정부'와 자국정부에게 전쟁에 대한 책임과 사과를 요구할 줄 모르는 '일본국민들'과 과거사를 논하고 있다는 현실을 직시해야한다."-154쪽


  가해자이면서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몇몇 정치인이 사과를 하고서는 그 이후 다른 정치인이 이를 부정하는 발언을 서슴치 않는 '일본 정부'는 자국민에게도 잘못을 시인하지 않고 사과하지 않는다. 언제나 국민은 자신의 수준에 맞는 정치인을 갖기 마련이다. 일본 국민이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사과하지 않는 정치인을 갖은 이유는 그들이 정치인들에게 반성을 요구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반면 교사로 삼아야한다. 우리도 우리 수준에 맞는 정치인을 두고 있는지... 그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생각할수록 긴 한숨이 나온다. 

  역사를 가르치는 내가 일본사에 대해서 나름 잘알고 있다고 생각한 부분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고 1868년 도쿄로 천도했다. 많은 외국인들이 이렇게 알고 있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천도를 단행했다고 말하는 것을 주저한다. 공식적으로 교토에서 도쿄로 천도한다고 정치인들이 선포하지 않았다. "한번 천황을 도쿄로 출장" 보냈고, 천황은 도쿄에 눌러 앉아 버렸다. 천도 반대론자는 천도를 했다고 말하지 않았으니 반대할 명분이 없었다. 천도론자는 실질적 천도를 이루었으니 불필요한 논쟁을 피할 수 있었다. 이것이 일본인들의 일처리 방식이다. 문제를 정면으로 직면하기 보다는 슬그머니 처리를하는 일본인들의 심리를 이해해야만 일본을 이해할 수 있다. 

  염종순은 마지막 장에서 한국과 일본의 공존을 말한다. 그에게는 중증 신체장애를 가진 아들이 있다. 한국에서는 장애인이 휠체어를 자비로 구입해야한다. 허기사, 나랏돈이 복지비로 쓰이는 것을 자기돈 나가는 것보다 더 아까워하는 사람들이 내주변에 많으니....... 한국은 그의 아들이 살기에는 힘든 나라였다. 그런데, 일본에 이주하자, 외국인인 그의 아들에게도 전동 휠체어를 일본이 무상 지급했다. 염종순은 비틀어진 한일간의 역사문제로 고민하면서도 자신의 아들에게 전동 휠체어를 선물해준 일본이라는 나라의 따뜻함에 감사하고 있다.  "한나라의 문명 수준은 노인과 약자를 어떻게 대하느냐로 측정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양면적인 일본은 자신보다 약자라고 생각하는 한국의 징용 피해자,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사과요구는 묵살하면서도 중증 장애자인 염종순의 아들에게는 따뜻한 손길을 내밀었다. 친절하지만 잔인하고 대단한 보수적이면서도 유연한 모순된 일본의 모습을 보면서 일본을 이해하는 것이 더욱 혼란스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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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대학 중국 특강 - 하버드 석학들의 36가지 질문, 중국의 현재와 미래를 묻다
하버드대학 중국연구소 지음, 이은주 옮김 / 미래의창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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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 정치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종종 국제정치를 평론한다. 그러나 그들은 미국에서 정치학을 배웠을 뿐이라 미국 중심의 국제정치라는 시각에서 국제정치를 바라본다. 아무리 유명한 대학을 나왔을 지라도 그의 시각이 특정국가의 시선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는 외눈박이 평론가에 지나지 않는다. '하버드대학 중국 특강'이라는 책을 집어들면서 미국중심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랬다. 그렇다면 이 책은 나의 기대를 충족 시켰을까?


1. 외눈박이 평론가

  미국인의 시선에서 중국을 바라보니, 그들의 생각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첫째, 역사를 목적론적 시각에서 바라보며 아시아 여러나라들이 도달해야할 최종 목표를 서구의 사회라는 그들의 선입견이 짖게 묻어난다. 아서 클라인만이 쓴 '고령화와 정신건강 문제를 해결할 수있을까'라는 주제의 글에서 그는 중국이 "정치적 자유화가 실현될 가능성은 매우 높다."라고 단언했다. 그러나, 지금 그들에게 지금도 그러한 생각에 변화가 없느냐고 묻는다면 그들의 대답은 어떠할까? 

  중국인들은 서구의 민주주의를 비웃는다. 선거를 통해서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뽑고, 실력 이하의 후보를 대통령으로 뽑아 놓고는 탄핵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드는 민주주보다 중국의 공산당 일당 독재를 더 좋은 제도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중국 공산당은 철저한 교육을 통해서 당원들의 실력을 키우고 있다. 중국 공산당 내부에서 치열한 경쟁을 통해서 능력있는 사람을 지도자로 배출한다고 자부하고 있다. 

  중국이 서구의 민주주의를 받아들일 것이라는 낭만적 생각을 지금도 고수하는 학자들은 드물다. 최첨단 안면인식 기술을 이용해서 축구경기장 안에 있는 지명수배범을 단시간 내에 찾아내는 것이 중국이다. 최첨단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여 중국 공산당 일당 독재를 더욱 견고하게 하고 있는 것이 지금 중국의 현실이다. 글쎄, 중국 경제가 붕괴하여 민중 혁명으로 새로운 민주주의 정권이 들어서지 않는 이상, 경제 발전이 민주화로 이어진다는 서구의 발전 단계론적 시각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둘째, 중국의 독자성을 보지 못하고 소련의 하수인으로 생각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엘리자베스 페리는 '중국 공산 정권은 정당성이 있는가'라는 글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이념과 정치제도의 뿌리가 전부 소련에 있는데 정작 소련은 혁명 전 중국의 모습과 닮은 점이 거의 없다."고 지적했다. 

  엘리자베스 페리는 중국 공산당이 대장정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소련과 연락이 두절되었고, 서구식 도시 폭동 전술을 버리고, 광대한 농촌으로 도시를 포위하는 전술로 노선을 바꾼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마오쩌둥은 무조건 마르크스-레닌 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중국의 현실에 맞도록 이를 변형시켰다. 그랬기 때문에 광대한 중국 대륙을 차지할 수 있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이념과 정치제도의 뿌리가 전부 소련에 있"다는 주장은 중국의 독자성을 무시하고, 소련에 종속된 국가로 보는 전형적인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이다. 

  이러한 시각은 북한을 소련의 괴뢰정권으로 보는 시각과 닮아 있다. 서구의 시각에서 혹은, 적에 대한 적대감으로 가득차 있는 우리의 입장에서 상대방을 바라보기에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한다. 그 어느 나라이든 외부의 새로운 제도를 받아들일 때에 자신에 맞도록 제도를 변형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제도를 제대로 정착시킬 수 없다. 그러하기에 중국의 모든 이념과 정치 제도의 뿌리가 소련일 수는 없다. 또한 소련의 상황이 혁명 전 중국의 모습과 닮을 필요도 없다. 미국의 학자는 중국을 바라볼 때 있는 그대로의 중국을 바라보려 노력해야한다. 

  셋째, 동아시아인의 절박함을 이해하지 못한다. 에즈라 보겔은 '중일 관계는 개선될 수 있을 것인가'라는 글에서 일본이나 중국이 "영토 그자체로는 별 가치도 없는 섬이" 양국간의 가장 큰 갈등 요소라고 지적했다. '댜오위섬/센카쿠열도'의 가치와 그 섬에 얽힌 역사적 의미를 미국인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댜오위섬/센카쿠열도' 근해에 묻혀 있는 자원과 청일 전쟁 이후 굴욕적으로 '댜오위섬/센카쿠열도'를 청나라가 일본에 넘겨 주어야했는지를 기억한다면 절대 '별 가치도 없는 섬'일수가없다. 

  타인의 뼈를 애는 고통보다 나의 손톱 밑의 가시가 더 아픈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세계 최강 천조국에서 중국과 일본이 '댜오위섬/센카쿠열도'이라는 작은 섬을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는 것 우수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작지만 큰 섬이 '댜오위섬/센카쿠열도'이다. 이 섬에 대한 영유권을 일본이 포기하지 않는 이상, 일본은 중국인들에게 가했던 '난징 대학살'로 대표되는 만행을 반성하지도 않으며 이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했다고 볼 수 없다. 

  넷째, 중국인의 내면일 이해못한다. 엘리자베스 페리는 '중국 공산 정권은 정당성이 있는가'라는 글에서 시진핑 정부가 추진하는 반부패 운동의 핵심 설계자이자 집행자인 왕치산이 "중국 공산당의 합법성(정당성)은 역사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는 인심(민심)의 향배에 따라 결정된 것이자 인민의 선택이기도하다."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미국인인 그의 입장에서는 베버가 말한 전통, 카리스마, 합리성을 들먹이며 정권의 정당성을 논해야하는데 왕치산을 베버의 이론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서구의 이론에 입각한 설명이 아니면 논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서구중심주의에 물들어 있는 서구인의 귀에 왕치산의 논리가 논리적인 설명으로 들릴리가 없다. 

  서구인들이 기독교의 세계관으로 세상을 바라보기에 죽어서 신의 심판을 두려원한다면,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인들은 역사를 두려워한다. 청사에 이름을 남기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 선비들에게 역사에 오명을 남기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역사에 어떻게 기록되는가를 중시여기기에 아이러니하게도 역사를 새로 쓰는 일들이 흔하다. 우리 나라도 보수 정권이 역사 교과서를 자기 입맛데로 다시 쓰려했기에 논란이 일었던 적이 있지 않은까!

  중국을 연구하는 전문가라는 사람이 중국인의 세계관을 이해하지 못해서 '역사적 정당성'이라는 개념으로 공산당 정권의 권위를 설명하려는 "발상 자체가 매우 흥미"롭고 "본질적으로 매우 모호한 개념"이라고 표현한 것은 실망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미국 학자라는 한계는 이책 곳곳에 묻어있다. 하버대학 페어뱅크 중국연구소의 탁월한 학자들도 서구 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현실이 못내 씁쓸하다. 


2. 중국 예외주의

  "중국인의 피속에는 남을 침략하는 유전자가 없다."는 시진핑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중국의 역사를 살피지 않고, 한국의 역사만 살펴보아도 이 말의 허구를 잘 증명할 수 있다. 수나라와 당나라가 무수히 고구려를 침략한 기록을 시진핑과 중국인은 모르고 있는 것인가? 

  만약 '중국인의 피소게는 남을 침략하는 유전자가 없다.'는 말이 맞다면, 중국이 타이완을 무력 침공할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또한 중국이 티벳을 점령하고 티벳 문화를 파괴하는 일도 발생하지 않았어야했다.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는 레파토리는 힘이 약한 우리 민족만 사용하는 수사라고 생각했다. 힘이 없어서 타국을 침략하기 보다는 타국의 침략을 방어하기에 급급했던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미화하기 위해서 만든 구호가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중원을 호령하며 세상의 중심이라 자칭한 중국인들이 스스로를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고 자부한다는 사실은 놀랍기만하다. 

  우리 민족은 타 민족과 다르다는 관념은 자신들을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고 믿게했다. 재미 있는 것은 이러한 '중국 예외주의'는 중국인들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미국 예외주의' 신봉자도 있으니 말이다. '중국 예외주의'를 신봉하는 자와 '미국 예외주의'를 신봉하는사람일수록 외교적 강경 노선을 선호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또한 종교적 신념을 바탕으로 미국 예외주의를 신봉하는 자는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군국주의적 성향이 더 높다고 한다. 자신은, 자기 나라는 타인(타국)과 다르다는 관념이 타인에게 보다 폭력적일 수 있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 혹은 우리 나라가 예외적인 존재라는 독선적 관념을 갖기 보다는 보편적 인간으로 우리 모두를 바라볼 수 있어야 너그러움이 생길 수 있다. 너그러움이 생겨야 폭력을 줄일 수 있다. 그러한 너그러움은 '전랑'외교를 포용외교로 바꿀 수있다. 지금 중국을 세계 여러 나라는 두려워하지만 존경하지 않는다. 진정한 패권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주변 여러 나라에게 두려움만 주어서는 안된다. 유학에 작은 나라가 큰나라를 섬기는 '사대'만 있는 것이 아니라, 큰나라가 작은 나라를 섬기고 보살피는 '사소'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해야한다. 

  어쩌면 중국 정부가 티벳을 비롯해서, 신장.위그루 자치지역에서 소수민족의 문화를 말살하려고 하는 모습도 '중국 예외주의'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일본 처럼 단일 민족을 만들고 싶어하는 중국이 '한족 예외주의'에서 벗어나 소수민족의 '위대한 문화 유산'을 잘 보존하고 그들과 조화를 이루는 길을 걷기 소망해본다. 


  이 책에는 사드가 "한국의 안보 상황에 별 보템이 되지 않는다."라고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보수파는 북한의 핵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 사드를 설치해야한다고 괴변을 늘어 놓았다. 그런데, 정작 미국의 석학들은 '북한의 미사일 발사대와 남한 내 공격 표적의 거리가 너무 짧아 사드는 북한에서 발사한 미사일을 요격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국익보다는 미국의 국익에 매몰되어 국민을 속이고 국가의 안보를 위태롭게하는 협잡꾼들이 난무하고 있다. 이러한 협잡꾼들은 박근혜 정권 시기보다 더 활개를 치고 있다. 남중국해 문제로 국제 상설 중재 재판소에서 승리한 필리핀이 자국의 국익을 위해서 친미일변도의 외교술을 펼치기 보다는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현란한 외교술을 펼치는 것을 우리 정부도 배워야할 것이다. 중국관한 미국 석학의 글을 엮은 책을 읽으면서도 암울한 우리의 외교 상황을 떠올리며 걱정하는 것은 나도 한국인임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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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붉은 별 - 개정판
에드가 스노우 지음, 홍수원 외 옮김 / 두레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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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붉은 별'의 원제는 "Red Star of China"가 아니다. "Red Star Over China"이다. 즉, 'of China'이 아닌, 'Over China'이다. 직역하면 '중국 위에 떠있는 붉은 별'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에드거 스노는 중국 공산당의 중심지 바오안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홍비' 대장 마오쩌둥을 만났다. 에드거 스노가 직접 만난 마우쩌둥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리고 그가 이끄는 홍군은 '홍비'가 아니었다. 중국 인민의 지지를 받는 항일의식이 투철한 군대였다. 그가 책 제목에 'of'를 사용하지 않고 'over'을 사용한 이유를 그가 만난 중국 공산당원들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다. 에드거 스노가 만난 수많은 중국 공산당원과 그들을 이끄는 마오쩌둥을 바라보면서 나는 질문을 던진다. 마오의 실험은 성공했는가?

 기자 정신이 투철한 에드거 스노는 목숨을 걸고 '홍비' 지역으로 출발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오쩌둥과 수 많은 공산당원을 만난다. 에드거 소노는 그들에게서 진정성을 발견한다. 지주와 자본가들로부터 노동자 농민을 해방시키고, 일본 제국주의를 물리치겠다는 그들의 열의는 책 곳곳에 묻어난다. 붉은 비적이라는 뜻의 '홍비'라는 단어는 '홍군'에 대한 멸칭이지만, 어쩌면 그들의 성격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단어일 수도 있다. 왜일까?
 마오쩌둥은 어려서부터 중국의 고전 소설들을 탐독했다. 그중에는 '수호전'도 있었다. 양산박을 중심으로 108 두령이 펼치는 이야기는 참으로 재미있다. 나도 그 재미에 푹빠졌던 시절이 있다. 억울함을 가슴에 품고 세상을 바로 잡기 위해서 송강을 중심으로 뭉친 그들의 의리와 전략은 마오쩌둥을 중심으로 세상을 바로 잡겠다는 중국 공산당과 닮아있다. 세상은 그들을 산적들이라고 부르지만 그들은 스스로 '하늘을 대신하여 의를 행한다'고 자부했다. 민중이 그들을 지지한 것도 소설과 당시 중국의 상황이 비슷하다. 
 그래서일까? 홍군이 구사하는 전략과 전술이 '수호지'와 비슷하다. 마오쩌둥이 창안했다는 16자 유격전술도 어쩌면 '수호지'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는지도 모른다. '수호지' 속의 108 두령은 탐욕스러운 관리와 부호를 혼내주고 그들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준다. 홍군은 지주의 곳간을 털어 가난한 농민에게 나눠주고, 지주의 토지를 소작농들에게 나눠준다. 심지어는 '백비'라 불리는 국민당 군을 잡아서 죽이지 않고 그들을 재교육 시켜서 공산주의자로 만든다. 이 부분은 요괴들을 뉘우치게 만들어 바른 길로 인도하는 '서유기'와 비슷하다. 이러한 홍군의 전략을 에드거 스노는 '로빈후드 전략'이라고 부른다. '로빈후드 전략'은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다. 대장정을 하면서 수많은 홍군이 죽어갔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홍군에 입대했다. 그리고 그들은 대장정을 완수했고, 국민당군을 괴롭혔다. 
  고단한 홍군의 생활 속에서 그들은 이에 불평을하지 않는다. 에드거 스노가 만난 홍군병사는 자신이 홍군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갖는다. 특히, 자신이 홍군에 들어오고 나서 글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병사의 삶과 활동 전체가 그들의 끊임없는 발전에 기여하도록 해야한다."(371쪽)는 홍군의 원칙은 중국농민에게 엄청난 매력이었다. 일자무식인 중국농민에게 홍군에 입대하는 것은 학교에 입학하는 것 이상의 효과를 가지도록 했다. 군사훈련뿐만 아니라, 한자공부 2시간, 노래와 그룹모임 등등의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개인의 발전을 이루도록 노력한 홍군의 모습은 참으로 놀라웠다.  
  홍군은 '수호지' 속의 108 두령과 다른 슬로건을 내건다. 바로 항일 투쟁이다. 에드거 스노는 이를 "이들의 투쟁은 제국주의라는 외부의 종양과 계급적 억압이라는 내부의 암을 동시에 도려내는 역할을 할 수 있었다."(547쪽)라고 칭찬한다. 마오쩌둥의 홍군은 정확히 현실을 인식하고 민중이 원하는 항일 전쟁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그리고 에드거 스노가 홍군지역을 벗어난 직후에 시안사건이 발발한다. 드디어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진다. 
  에드거 스노의 시선을 따라가다보면 질문이 밀려온다. 중학교 1학년 겨울 방학에 읽었던 유시민의 '거꾸로 읽는 세계사'에서 그려진 대장정의 모습은 참으로 경이로웠다. 설산을 임신한 마오쩌둥의 아내도 같이 걸어서 넘었고, 마오쩌둥이 일반병사보다 더 갖고 있었던 것은 모기장 하나 뿐이었다는 서술은 지금도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런데, 유시민이 쓴 '거꾸로 읽는 세계사' 보다 더 감동적인 '중국의 붉은 별'을 읽으며 그때의 경이로움을 느낄 수 없다. 왜일까?
  책에 회족 청년에 관한 서술이 있다. 마홍쿠이와 일제타도를 위해서 홍군에 입대한 회족 청년은 목숨을 걸고 싸웠다. 에드거 스노는 그들의 뜨거운 열정을 책에 잘 담아 놓았다. 그런데, 지금의 현실은 어떠한가? 홍군이 되어 공산 중국이 건설되는데 일조한 회족 청년과 그 후손들은 지금 어떠한 삶을 살고 있을까? 뉴스 보도에 따르면, 신장 위그루 자치지역에서는 심각한 인권탄압이 이뤄지고 있다. 그들은 종교의 자유를 박탈 당하고 있다. 교화소에 끌려간 회족은 심각한 인권유린을 당한다. 과연 이것이 회족 청년이 바라던 이상적인 중국의 모습이었을까?
  마오쩌둥은 '수호지'를 읽으며 항일투쟁과 국공내전의 전략과 전술을 습득했다. 그리고 중국대륙의 주인이 되었다. 그러나, '수호지'에서 투쟁의 교훈을 얻을 수는 있으나, 바른 통치의 교훈은 얻을 수 없었던가 보다. 마오쩌둥은 독재자가 되었다. 대약진 운동으로 2천만에서 3천만명의 중국인이 아사했다. 문화대혁명으로 중국의 전통을 말살하고 수많은 영웅을 홍위병의 노리개감으로 만들었다.  
  "중국의 사회혁명 운동은 (중략) 앞으로 계속 성장할 뿐만아니라 변전을 거듭하는 가운데 결국엔 최후의 승리를 거두게 될 것이다."(550쪽)라고 에드거 스노는 마오쩌둥의 승리를 예견해다. 묻고 싶다. 그 승리는 중국 인민의 승리일까? 중화민국의 승리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마우쩌둥 개인의 승리였을까?
 마르크스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는 말을 했다. 그런데, 공산주의는 종교를 밀어내고 새로운 종교의 자리를 차지했다. 공산주의는 새로운 종교가 아니었을까? 이 책에서 볼 수 있듯이, 국공내전 상황에서 중국의 농민들은 소비예트에 자발적으로 참여했으며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모습도 보였다. 장제스를 중심으로하는 국민당의 탄압을 받았을 때 가장 순수한 모습을 공산주의는 보였다. 이는 박해받는 그 시기가 가장 순수하며 이상적인 모습을 보이는 종교와 닮아있다. 그리고 공산당이 권력을 장악하자 부패하고 독재의 모습을 드러낸다. 이는 권력을 얻는 순간 타락하는 종교의 모습과 너무도 흡사하다. 그래서 묻는다. 중국 공산당은 언제쯤 종교의 모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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