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탈 문화재의 세계사 1 - 돌아온 세계문화유산 약탈 문화재의 세계사 1
김경임 지음 / 홍익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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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워싱턴회의에서 나치 약탈 문화재를 확인하고 원소유자를 찾기 위해 문화재의 관련 기록과 정보가 공개되어야한다는 워싱턴 원칙이 성립되었다. 미국 박물관 협회가 제시한 '과거 내력 공개'라는 가이드라인에 주요 유럽 국가들은 처음에는 거부의사를 밝혔다. 저자는 그 이유가 '미국이 정한 기준을 유럽 문화계에 부과하는 데 대한 유럽 국가들의 저항감' 때문이라 지적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유럽의 박물관들이 제국주의 강도들의 장물아비가 되어 약소국의 문화재를 소유하면서 누린 영광을 빼앗기기 싫었던 마음이 더욱 컸을 것이다. 우와한 척하는 그들의 뒷모습은 탐욕스러운 장물아비의 파렴치함이 도사리고 있다. 이 책은 탐욕스러운 장물아비가 된 강대국의 박물관과 인류 문화재를 지키기 위한 각국 혹은 시민들의 치열한 투쟁을 담고 있다.

저자 김경임과는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이라는 책으로 만난적이 있다.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을 읽으며 그녀의 전문성과 문화재에 대한 사랑을 느꼈다. 그녀를 믿고 '약탈문화재의 세계사1'을 펼쳐 들었다. 역사나, 김경임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잃어버린 문화재를 되찾기 위해서 벌이는 각국의 치열한 투쟁이다. 인도는 '춤추는 시바상'으로 불리는 '나타라자 청동상'을 밀반출 당하자 이를 되찾기 위해서 미국의 박물관과 소송을 벌였다. 여기에 인도의 외교력을 더하여 자국의 문화재를 되찾기 위한 피나는 투쟁을 전개했다. 그 결과 1986년 나타라자상은 27년 만에 고향 타민라두에 귀환 했다. 터키는 리디어 보물을 반환받기 위해서 정부차원에서 치열한 노력을 했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과 재판을 불사하며 강경외교로 압박하여 거만한 강대국의 박물관을 굴복시켰다.

약소국이 강대국 박물관과 소송도 불사하며 벌이는 문화재 반환 노력은 한편의 드라마이다. 그러나 그 드라마를 마냥 편안하게 읽을 수만은 없었다. 자국의 문화재를 되찾기 위한 치열한 노력을 확인하는 순간, 혜문 스님의 '빼앗긴 문화재를 말하다.'라는 책이 떠올랐다. 혜문 스님이 우리의 문화재를 되찾기 위해서 뜨거운 열정으로 강대국의 닫힌문을 두드릴때, 정부와 학계는 빼앗긴 문화재가 돌아올 수 없는 근거를 변명처럼 말했다. 그때 나는 '~때문에 안된다.'라는 변명보다는 '~임에도 불구하고'라는 강한 의지가 담긴 말을 듣고 싶었다.

이 책에 소개된 국가들은 '~때문에' 문화재를 되찾을 수 없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탈리아의 경우 경찰 카라비에리의 문화재 특공대를 만들고 문화재 관련 범죄를 전문적으로 수사했다. 카라비에리의 문화재 특공대의 수사 결과는 정부차원의 문화재 환수 노력으로 이어졌다. 미국의 유명 박물관이 앞다투어 구입하던 이탈리아의 수많은 문화재들이 환수된 것도 이탈리아 경찰 카라비에리의 문화재 특공대와 정부차원의 노력 덕분이다. 어쩌면 미국의 유명 박물관은 이탈리아의 경찰 카라비에리 덕분에 장물아비에서 일류문화 수호자로 변신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저자 김경임은 '서산 부석사 관음상 문제'를 마지막 쳅터에 소개했다. 그녀가 ''약탈 문화재의 세계사'를 저술한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 문화재의 귀환을 이야기하면 효용가치가 사라진 민족주의 담론을 꺼내든다며 비아냥 거리는 사람이 있다. 심지어는 소위 문화재 전문가라는 유명인은 대중 강연에서 '빼앗긴 문화재를 세계 각국 박물관에서 되찾겠다고 자랑스럽게 나에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욕먹을 각오를 하고 말한다. 우리 문화재가 우리 나라에만 있다면 어떻게 우리 문화를 세계에 알리겠는가? 그런 폐쇄적 민족주의적 생각에서 벗어나야한다.'라고 주장하기도했다. 그의 영향력과 경력을 생각해볼 때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에게 이탈리아 루텔리 장관의 말을 해주고 싶다. "문화재 반환! 그것은 민족주의가 아니다. 인류 보편의 담론이다."

'서산 부석사 관음상'은 어디로 가야할까? 혜문 스님은 일본에 돌려주자는 입장이시다. 도둑들이 일본 신사에서 훔처온 것을 우리가 돌려주지 않는다면 어찌 약탈당한 우리 문화재를 돌려달라고 외국인들에게 호소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이에 반해서 김경임은 서산 부석사 관음상은 왜구의 약탈에 의해서 대마도에 건너갔다고 주장하며 반환의 부당성을 설파한다. '약탈문화재의 세계사'에서 줄기차게 제시되는 문화재를 합법적으로 입수했다고 증명하는 책임은 문화재를 소유하고 있는 그들에게 있다는 원칙을 우리에게 소환한다. '불법 문화재의 원소유국 반환'이라는 대원칙을 염두에 둔다면 '서산 부석사 관음상'은 서산 부석사에 되돌아가야한다. 혜문 스님과 김경임이라는 두 거물의 서로 다른 의견이 사뭇 흥미롭다.

 

이 책을 읽으며 자신의 문화재를 되찾기 위해서 처절한 투쟁을 하는 세계 시민과 정부의 모습을 보면서 통쾌함과 깊은 감동을 느낀다. 그러나, 마냥 행복해할 수만은 없었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는 문화재가 많이 있다. 운디드니에서 학살당한 인디언의 '고스트 댄스 셔츠'가 시체에서 벗겨져 박물관을 전전하다가 시민들의 노력으로 인디언의 품으로 돌아왔듯이, 전세계를 헤매고 있는 우리의 문화재도 우리의 품으로 돌아오길 고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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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주의의 기원 2 한길그레이트북스 84
한나 아렌트 지음, 이진우, 박미애 옮김 / 한길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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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나 아렌트!! 그녀는 알것 같으면서도 알기 힘든 여성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을 읽었을 때만 하더라도 어려운 책이지만 읽을만한 책이었다. 그런데, '전체주의의 기원1'은 읽기 힘들었다. 읽기를 포기하려는 욕망도 있었지만, 그녀가 주는 매력이 너무나도 고혹적이었기에 포기할 수 없었다. '전체주의의 기원2'를 마져 읽었다. 자신을 정복해보라 유혹하지만 쉽게 정상을 허락하지 않는 히말라야와 같은 그녀를 보며 정복했지만 결코 정복하지 못한 비밀을 갖은 매력의 소유자라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전체주의의 기원'을 통해서 전체주의의 실체를 드러냈다. 역사서의 글쓰기 방식이 아닌, 철학서의 글쓰기 방식이라 읽기에 힘든점이 많지만, 역사서와는 다른 통찰을 우리에게 던져주었다. 그렇다면, 그녀가 파헤친 전체주의에 실상을 통해서 전체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필살기는 무엇일까?


1. 어리석은 군중이 메시아를 갈망한다.

  많은 사람들은 히틀러를 악마화한다. 히틀러가 미대에 합격했다면 제2차 세계 대전의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 상상한다. 독일 국민들은 히틀러의 선동에 농락당한 피해자이며 모든 죄는 히틀러가 짊어져야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히틀러가 없었으면 2차 세계 대전의 비극은 없었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독일 국민은 히틀러와 같은 존재를 원했다. 히틀러가 자라날 수 있는 토양이 준비되어 있었기에 히틀러가 마음껏 날개를 펼 수 있었다. 한나 아렌트는 말한다. 


  "전체주의 지배의 이상적인 신하는 골수 나치나 골수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사실과 허구(즉 경험의 현실)의 차이와 참과 거짓(즉 사유의 기준)의 차이를 더이상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276쪽


 1차 세계 대전의 패배원인을 유대인들에게 돌리며, 오늘날 모든 모순의 근원을 유대인들에게 돌렸다. 제3제국의 영광을 쟁취하겠다는 히틀러의 말을 들으면서 독일인들은 사실과 허구의 차이와 참과 거짓의 차이을 파악하지 못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히틀러가 말해주었으며, 그것을 믿었다. '나라를 팔아먹어도 XX당을 찍겠다'고 말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독일에는 많았다. 그들이 히틀러와 같은 존재의 출현을 갈망했다. 그들에게 히틀러는 메시아였다. 

  권력을 잡은 독재자들은 시민의 말을 듣는 자들을 요직에 앉히기 보다는 자신의 말을 잘 듣는 멍청이들을 등용한다. 


  "권좌에 앉은 전체주의는 반드시 모든 일류 재능을, 정권에 대한 그들의 호감과는 상관없이, 미치광이들과 바보천치들로 대체한다. 그들에게 지적 능력과 창조력이 부족하다는 것이 그들의 충성심을 가장 잘 보증하기 때문이다."-68~69쪽


  '악의 평범성'을 말한 그녀가 '미치광이들과 바보천치'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전체주의 정권의 하수인들을 비판하고 있다. 어쩌면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고, 스스로 사리분별을 못하는 아이히만과 같은 존재는 '바보천치'일 수도 있다. 과거 유능한 민주정권에서는 큰 대회도 성공적으로 개최할 정도로 유능한 정부관료가 정권이 바뀌고 나서는 실패할 수 없는 행사라고하는 잼버리를 엉망으로 개최한 것을 우리도 보았지 않았는가! 현명하지 못한 국민은 히틀러와 같은 독재자를 권좌에 앉히고, 독재자는 '미치광이들과 바보천치들'을 그 하수인으로 앉힌다. 그리고 전체주의 국가의 어리석은 국민은 서서히 고혈을 빨리며 야위어간다. 

  무지목매한 민중은 히틀러나 스탈린과 같은 독재자들이 던져주는 사탕에 현혹된다. 그들이 자신의 고혈을 빨아들이는데도 그들의 달콤한 사탕에 빠져 고통을 직시하지 못한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전체주의 비밀경찰의 활동 방식과 특수한 기능을 알고 있지만, 이 비밀 사회의 '비밀'이 얼마나 잘 또는 어느 정도는 우리 시대 대중의 은밀한 욕망에 부응하고 대중과 은밀한 공모 관계를 이룰지는 잘 알지 못한다."-218쪽

  "'객관적인 적' 개념-이 적의 정체는 일반적인 상황에 따라 수시로 변하기 때문에 한범주가 청산되자마자 다른 범주와의 전쟁이 선포된다."-199쪽

  권력을 가진 히틀러와 스탈린은 끊임없는 숙청을 했다. 히틀러의 경우 유대인을 박멸한 다음에는 폴란드인을 그다음 절멸의 대상으로 생각했다. 독일인 중에서도 심장질환이 있는 자나 그 가족 또한 절멸의 대상이었다. 스탈린은 숙청 인원을 할당해주었다. 끊임 없는 숙청은 새로운 승진의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비밀경찰 내부에서도 숙청이 이뤄졌고, 그들은 자신의 상관이 사라지만 자신이 그자리를 앉을 수 있다고 기뻐했다. 짧게 권좌에 앉아 있는다 할지라도 그 달콤함을 위해서 그들은 히틀러와 스탈린에게 충성을 했다. 끊임 없는 숙청은 대중에게는 실업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단비였다. 그리고 자신도 새로운 '객관적인 적' 개념에 포함되어 숙청된다.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가 끊임 없는 전쟁을 통해서 번영했듯이, 전체주의 국가도 끊임없는 '객관적인 적'을 만들어 가야번영한다. 그 것이 중단될때 번영도 중단된다.

  많은 정치인들이 '국민은 절대 옳다.'라는 말을 내뱉는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국민은 옳을 수도 있고 어리석을 수도 있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직시하하기 보다는 달콤한 괴변에 현혹되어 히틀러와 스탈린과 같은 정치인을 메시아로 갈망한다. 그리고 그 자신도 그들의 희생자가 된다. 


2. 현명한 시민이 되려면 어찌해야할까?

  히틀러가 독일 국민을 속였다기 보다는 어리석은 독일 국민이 히틀러를 갈망했다. 히틀러가 없었어도 어리석은 독일 국민은 또다른 독재자를 총통의 자리에 앉혔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현명한 시민이 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첫째, 연대하라! 전체주의는 시민들의 단결을 가장 두려워한다. 시민들이 스스로를 조직화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그들을 원자화한다.


  "전체주의 운동이 대중사회의 비체계성보다 원자화되고 개인화된 대중의 특별한 조건에 더 의존한다는 사실을 가장 명확하게 볼 수 있다. 스탈린은 레닌의 혁명적 독재 체제를 완전한 전체주의 통치로 변화시키기 위해 우선 원자화된 사회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내야만 했다. 독일에서는 우연한 역사적 상황으로 원자화된 사회가 나치에게 주어져 있었다."-35쪽


  가정폭력에 시달리면서도 그 굴레이서 벗어나지 못하는 여성이 있다. 가스라이팅을 당하면서 연인에게 착취당하는 사람이 있다. 친구에게, 부모에게, 직장 동료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주변에 그를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가해자는 가스라이팅의 대상이 연대할 수 있고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을 옆에 둘 수 없도록 고립시킨다. 그들을 원자화 시킨다. 

  전체주의에 빠져든 국가의 국민들도 마찬가지였다. 독재자가 의도했든, 당시 시대적 상황이 그러했는지에 상관없이 국민들은 원자화되었다. 그리고 쉽게 어리석은 국민이 되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전체주의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서는 연대해야한다는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건전한 공동체를 재건하고 소통과 참여를 통해서 깨어있는 시민이 되어야한다. 이는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도, 국가와 사회라는 공동체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고통스러운 어둠의 터널을 헤처나갈 수 있는 용기와 힘은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갈 동지가 있기 때문이다. 

  둘째, 메시아를 갈망하지 마라! 우리가 메시아가 해주길 바라는 일을 해나가자! 많은 사람들이 메시아를 갈망한다.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운 현실을 메시아가 나타나 단번에 해결해 주길 바란다. 그러한 메시아에 대한 갈망은 독재자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사상을 서술하는 확실한 예언 형식이 그 내용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되었다. 영원한 오류 불가능성이 대중 지도자의 주요 자격이 되었다. 그는 결코 오류를 허용하지 않는다. 게다가 오류 불가능성의 가설은 우월한 지성에 토대를 두고 있다기보다는 역사 및 자연 내에 존재하는 본질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힘에 대한 정확한 해석에 토대를 두고 있다."-82~83쪽


  중세시대 '교황무오류설'이 있었다. 교황은 절대 오류를 범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이 '교황무오류설'은 중세를 암흑기로 인식하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 중세 교회의 수많은 부정과 부패를 개혁할 수 있는 기회를 원천적으로 차단했다. 인간인 교황이 신의 반열에 오르는 순간 교황의 타락과 교회의 몰락은 시작되었다. 

  전체주의 국가 지도자도 '영원한 오류 불가능성'을 대중에게 주입했다. 아니, 괴로운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대중들이 영원히 오류를 범하지 않는 메시아를 갈망했다. 그리고 히틀러와 스탈린은 그들의 마음을 얻는데 성공했다. 누군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길 바라고, 스스로 문제를 직시하길 거부하는 순간 우리는 독재자를 영접하게 된다. 그것은 스스로 주인이 되길 포기하는 사람은 노예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괴로운 현실을 직시하고 고통의 강을 건널 준비가 되어있어야한다. 

  셋째, 인간의 가치를 발견하라. 전체주의는 개인의 가치, 더 나아가서 인간의 가치를 무용지물로 만든다. 스스로의 가치를 부정하는 순간 전체주의는 우리를 덮친다. 


  "전체주의는 인간에 대한 전체적 지배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완전히 무용지물이 되는 시스템을 갖고자 노력한다. 전체주의의 권력을 얻고 지킬 수 있는 곳은 조건반사의 세계, 자발성의 흔적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꼭두각시의 세계뿐이다. 인간의 힘은 크기 때문에 인간이 완전히 지배될 수 있는 것은 그가 인간이라는 동물종의 한 표본이 될 경우뿐이다."-248쪽


  전체주의는 우리를 '완전히 무용지물이' 되도록 시스템을 만들려한다. 스스로 생각하기 보다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조건반사적 행동을 하길 바란다.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는 주인이기 보다는 지배자가 시키는 일을 무조건 실행하는 꼭두각시를 원한다. 그 순간 인간은 고귀한 생명체에서 '동물종의 한 표본'으로 전락한다. 

  우리가 '동물종의 한 표본' 이기를 거부하고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발견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때, 전체주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자신의 가치를 창조하는 시민만이 전체주의의 거짓 선전에 흔들리지 않는다. 

  넷째,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지 마라. 이데올로기는 세상을 해석하는 하나의 틀이다. 그런데, 어리석은 군중은 그 틀로 세상을 제단하려 한다. 


  "이데올로기는 과학적 성격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데올로기는 과학적 접근과 철학과 관련된 결과들을 결합시켜 과학 철학인 것처럼 행세한다. (중략) 이데올로기는 사이비 과학인 동시에 사이비 철학일 것이며 과학의 한계를 위반하는 동시에 철학의 한계도 위반한다."-268쪽


  공산주의 사상을 '과학 철학'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았다. 지난 20세기 동안 '사이비 과학인 동시에 사이비 철학'인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어 수많은 사람을 희생시켰다. 세상을 해석하는 하나의 도구를 경전처럼 떠받들며 인간이 스스로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었다. 

  일찍이 마르크스는 자신을 훌륭한 마르크스주의자라며 칭찬하는 친구에게 자신은 자신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했다. 마르크스는 '~주의', '~ism'의 위험성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염려했던 '마르크스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가 출현했다. 그리고 이들 이데올로기는 한시대를 지배하는 비극을 낳았다. 

  아무리 좋은 사상도 교조화된다면 비극은 시작된다. 현명한 시민이 되려한다면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된다. 스스로 주인이 되어야만 비극은 우리의 문을 두드리지 못할 것이다. 


  지구촌에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다. 지구촌 곳곳에서 독재자가 활개치며 극우파가 득세를 하고 있다. 트럼프가 미국의 유력 대권주자로 등극했다. 팔래스타인에서는 오늘도 수많은 생명이 죽어가고 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포탄 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한나 아렌트가 살아던 시대의 음습함을 떠오르게 한다. 한나 아렌트가 했었던 고민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정복하기 힘든 그녀의 책을 가슴에 품고 그녀와 대화하려 노력한다. 그리고 고혹적인 그녀의 미소에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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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주의의 기원 2 한길그레이트북스 84
한나 아렌트 지음, 이진우, 박미애 옮김 / 한길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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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는 과학적 성격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데올로기는 과학적 접근과 철학과 관련된 결과들을 결합시켜 과학 철학인 것처럼 행세한다. ‘이데올로기‘란 말은 동물이 동물학의 주제인 것처럼 이념도과학의 주제가 될 수 있다는 함의를 또 이데올로기 (Ideologie, ideolo-gy)의 접미어 로기 (logy)는 동물학인 zoology에서처럼 로고이(logoi),
즉 그것에 관한 과학적 진술만을 의미한다는 함의를 담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데올로기는 사이비 과학인 동시에 사이비 철학일 것이며 과학의 한계를 위반하는 동시에 철학의 한계도 위반한다. - P268

 전체주의 지배의 이상적인 신하는골수 나치나 골수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사실과 허구(즉 경험의 현실)의 차이와 참과 거짓(즉 사유의 기준)의 차이를 더이상 보지 못하는사람들이다. - P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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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 도시를 보는 열다섯 가지 인문적 시선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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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각자가 자신에 맞는 안경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보는 세상을 타인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본 세상이 오직 하나뿐인 진리라는 오만을 내려 놓고 타인의 안경을 써보기로했다. 타인의 안경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경험은 내가 미처 몰랐던 새로운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이번에는 건축가 유현준의 안경을 쓰기로했다. 건축가가 바라본 세상은 어떠한 세상일까? 


  1. 건축가에 대한 편견 깨기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책을 읽으며 가장 놀랐던 사실은 무분별한 개발을 그는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연을 파괴하며 진행되는 무분별한 개발을 경제발전이라는 용어로 포장하며 돈을 벌 수 있는데 그는 그러하지 않았다. 특히, 한강 개발에 대한 그의 생각을 읽으면서 무척 놀랐다. 


  "한강 개발에 대한 많은 접근 방식에서 우려되는 것은 비어 있는 한강을 지나치게 밀도 높은 공간으로 만들려고하는 것이다." -201쪽

  "한강공원처럼 24시간 사용 가능한 수변에 위치한 도심 공원은 전세계에 하나밖에 없을 것이다." -202쪽


  그릇이 비어있기에 쓸모가 있듯이, 한강을 비우기에 쓸모가 커진다는 사실을 유현준은 알고 있다. 건물을 밀도 높게 지어서 돈벌이를 많이하기 보다는 인간이 행복감을 느끼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으로 한강을 바라보고 있다. 더 나아가서 자동차와 아파트의 등장으로 우리는 마당과 골목을 잃어야했던 현실을 안타깝게 여긴다. 개발 지상주의가 지배했던 시기에 우리는 마당과 골목을 내어주며 행복해했다. 그러나 하나를 얻으려할 때 어쩌면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내어 주어야했던 건지도 모른다. 이웃과 대화가 단절된 아파트에 살면서, 돈을 내지 않고 서는 머무를 공간이 너무도 부족한 도시에 살아야하는 댓가를 지불해야했다. 건축가 유현준은 이러한 우리의 현실을 지적하며 시민이 행복한 도시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유현준은 발코니 확장에 대해서도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사실, 아파트 베란다를 줄여서 용적율을 높이고 실내 공간을 확장하는 것에 대해서 아파트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찬성하면 찬성했지,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유현준은 그러하지 않았다. 빨래가 널려 있는 모습을 정겹게 바라보며 발코니가 사라진 도시에 아쉬움을 표한다. 


  "우리의 도시가 살 만한 거리로 채우지기 위해서는 건축물에 사람 냄새가 나게 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유리창 대신에 발코니가 있는 건축물을 만들어야 한다." -59쪽


 어느 아파트에서는 아파트 값을 높이기 위해서 에어콘 실외기를 아파트 밖에 달리 않기로 결의하기도했다. 빨래가 널려 있는 모습을 지저분하게 바라보며, 아파트 값을 높이기 위해서 생활의 불편함도 감수하는 이 시대에 유현준 교수는 현타를 날리고 있다.

  이제는 건조기를 사용하는 집이 많아지면서 유현준 교수가 정겹게 보고 싶어던 빨래가 널려 있는 풍경을 보기는 힘들어지고 있다. 더 많은 건물을 지어 돈을 벌려는 탐욕의 시장 논리를 유현준 교수의 말한마디로 없애버릴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서, 우리가 더 좋은 도시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을 버리있음을 일깨우는 깨달음의 죽비를 내리치는 용기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 사람이 바로 건축가 유현준이다.


2. 건축가의 세상보기

  공간과 건축을 바라보는 건축가 유현준의 시선은 참신하다. 도시를 바라보며 내가 미처 보지 못한 비밀을 깔끔하게 설명해준다. 몇가지 예를들어보자. 사무실 책상 위에 책이 수북히 쌓아 높고 업무를 보고 있는 사람을 보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하는가? 나는 그사람을 너무도 게으른 사람이라 판단할 것이다. 그러나, 유현준의 생각은 달랐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프라이버시가 필요하다. 필자가 있는 사무실에는 책상 앞에 책을 쌓아 두는 직원이 있었다. 이는 그 직원이 단순히 게을러서 그런 것이 아니다. 개방된 책상이 불안해서 자신의 영역을 만들기 위해서 책과 서류로 벽을 치는 것이다. 보통 사무실에는 큰 모니터가 벽의 역할을 해준다." -220쪽


  어떤가 건축가의 눈으로 직원을 바라보니, 직원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렇다. 공간에 대한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사람을 평가하다보니 편협하고 왜곡되게 평가하는 오류를 범했다. 자신만의 공간을 갖고 싶어하는 사람의 본능적 욕구를 이해할 때문이 우리는 세상을 보다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다. 

  중국 북경에서 사람들이 잠옷을 입고 거리를 다니는 모습을 본다면 당신은 어떻게 그들을 평가하겠는가? 혹시 시민의식이 부족해서 벌어지는 꼴볼견으로 보지는 않았는가? 그런데, 유현준의 생각은 달랐다. 


  "사실 이런 문화는 거리를 거실처럼 느끼고 사람들 사이의 공동체 의식이 높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191쪽


  잠옷을 입고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이 거리를 거실처럼 느끼고 있다는 설명은 나의 무릎을 치게했다. 거리를 나의 사적 공간의 확장으로 바라보니 부끄러울 것이 없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부끄러움 없이 잠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 사이의 공동체 의식이 높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설명에는 동의할 수 없다. 공동체 의식이 높다면 동료 시민이 위험에 빠지면 적극적으로 도와주어야한다. 뉴스나 유튜브에 소개된 영상에는 납치되는 아이, 사고를 당한 주민을 바라보면서도 신고를 하지도 않고, 도와주지도 않는 중국인의 모습이 꾀이었다. 물론, 수 많은 사례 중에서 극히 일의 이야기일수도 있다. 그럼에도 중국인들 사이의 공동체 의식이 높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지금 소개한 두가지 사례는 이 책에 소개된 내용 중에서 극히 일부분이다. 탁월하면서도 색다른 유현준만의 시선이 이책 곳곳에서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공간의 미래'라는 책에 이어서, 건축가 유현준이 쓴 두번째 책을 읽었다. 유현준은 개발 논리에 앞도되어 무분별한 건설로 돈을 벌기를 자라는 악덕 건축가가 아니다. 애정어린 시선으로 도시와 공간을 바라보며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정겨운 도시를 만들고 싶어하는 건축 인문학자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남다른 통찰과 해안을 제시해준다. 건축 인문학자 유현준이 나에게 가장 큰 울림을 준 글귀를 소개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건축은 중력을 어떻게 아름답게 극복하느냐를 통해서 다른 예술이 주지 못하는 감동을 전달해준다. 에펠탑과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같은 건축물을 보면서 우리가 감동을 느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제약은 언제나 더 큰 감동을 위한 준비 작업이다." -3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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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말하기 - 노무현 대통령에게 배우는 설득과 소통의 법칙
윤태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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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화하기를 두려워하는 대통령이 있다. 후보시절에는 상대후보와 토론하는 것을 기피히더니 이제는 기자와 각본을 짜지 않고 생방송으로 질의 응답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대통령이 있다. 방명록을 작성할 때도 쪽지를 보고 베껴쓰는 대통령이 있다. 그 대통령이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겠다. (주어를 말하지 않았으니, 특정 대통령으로 오해하지 말길 바란다. 일반적으로 그런 대통령이 있다는 말이다. ㅋㅋ) 그래서 대통령 노무현이 그립다. 어떤이는 말잘하고 토론잘해서 세상을 시끄럽게한다며 그를 싫어했다. 그래서 말을 잘하는 노무현의 정반대편에 있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았는지도 모른다. 그런 그가 말했다. 


  "저더러 말을 줄이라고 합니다. 방송 뉴스를 봤더니 대통령이 말이 많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독재자는 힘으로 통치하고 민주주의 지도자는 말로써 정치를 합니다. 제왕은 말이 필요 없습니다. 권력과 위엄이 필요하죠."-2006.12. 정책기획위원회 신규회원 위촉장 수여식, 110~111쪽


  그렇다. 토론하기를 기피하고, 대화하기를 싫어하는 자는 민주주의 국가 지도자가 될 자격이 없다. 그러한 사람은 독재자가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국가 지도자라면 대화와 토론에 능수 능란하고 이를 즐겨야한다. 미국의 대통령들 중에서도 버락 오바마를 비롯해서 수많은 대통령이 대화와 토론을 즐기지 않았는가? 서구의 민주주의 모범국가 지도자들은 국민과 대화하고 토론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오직 독재자들만이 대화와 토론을 싫어한다. 대통령 노무현은 우리 사회가 아직 민주화되지 않았던 시기에 민주주의 대통령이 되고 싶어했다. 그러나, 아직도 독재권력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민주주의는 '말잘하는 사람들이 이끌어가는 체제'라며 노무현을 비하했다. 

  노무현은 연설담당 비서관이 적어주는데로 연설하는 못난 대통령이 아니었다. 연설문을 사전에 기자에게 나눠주면 기자들은 "이거 어차피 현장가면 다르게 말하실거 아니에요?"라며 불평을 했다. 기자양반에게는 불편하겠지만, 자신의 말을 현장에 맞게 능수능란하게 구사할줄 아는 대통령을 두었다는 점에서 국민에게는 행운이었다. 

  노무현은 에드리브, 현장 수정, 앞 사람이 이미 야이기한 원고 내용 삭제 등등 연설을 자유자재로 수정했다. 길을 만들어 놓고 가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길을 만들어가는 리더였다. 그가 말을 잘하고 연설을 잘 할 수 있었던 것은 독서와 사색을 통해서 말을 갈고 닦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서 그는 끊임 없이 나랏일에 대해서 고민하고 참모들과 열심히 일했다. 여기에서 그의 콘텐츠는 마련되었다. 그랫기에 알찬 연설이 될 수 있었다. 

  프롬프트가 켜지지 않으면 멀뚱거리며 한마디도 못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대통령이 되고 부터는 항상 맑은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언제 위급 상황에 벌어질지 모르기에 국민의 안전을 위해서 최선의 판단력을 발휘할 수 있는 몸상태를 유지해야했다. 폭탄주를 즐기며 새집머리를 하며 출근하는 보통의 상관들과는 다른 지도자였다. 서울대 법대를 나오지는 않았지만, 상고출신의 변호사였지만, 간판에 의존하지 않는 실력파 대통령이 노무현이었다.


  그는 떠나고 우리는 지역감정과 탐욕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때로는 수준미달의 대통령을 뽑기도한다. 그러면서 아직도 소위 '일베'는 노무현을 조롱한다. 


  "역사에는 흑백이 없다. 그러나 쓰는 사람은 흑백으로 쓰려고 한다."-71쪽


  노무현이 참모들과 KTX로 상경하던 중에 한 말이다. 그렇다. 노무현은 흑백으로 편가르기를 할 수 있는 리더가 아니었다. 그가 대통령으로 재임한 것은 국민에게 행운이었다. 아니, 바보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뽑은 국민의 현명한 선택이 우리를 행복하게했다. 이제 노무현을 흑백으로, 지역 감정으로, 좌우 우로 갈라서 보지 말자. 그는 국민을 갈라치기 하기 보다는 하나로 화합하려했다. 그래서 노무현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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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화령 2024-02-13 2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현 시국에 참 많은 생각이 드는 책입니다. 강원국의 《대통령의 글쓰기》와 함께 뜻깊게 읽은 책입니다.

여전히 권위주의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아 깜짝 깜짝 놀라는 수상한 시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