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든 - 완결판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지음, 강승영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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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자연인일까? 어느날 28세의 청년은 도끼를 빌려 월든 호수가에 작은 집하나를 지었다. 그리고 그의 나이 30세가 되는 해까지 살았다. 약 2년 여를 살고 '월든'이라는 책을 저술했다. 이 한권으로 그는 유명 사상가의 반열에 올랐다. 텔레비젼을 켜면 재방송을하고 있는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을 떠올리며 그의 책장을 넘겼다. 자연인 소로우를 상상하며....


  보통 5년은 넘어야 자연인 초보를 벗어났다고 평가받는다. 20년 이상 깊은 산중에서 자연을 벗하며 살아가는 자연인이 많다. 그런데, 소로우는 고작 2년여 동안 월든 호수가에 살았다. 1845년부터 1847년이라는 짧은 시기에 월든 호수가에 통나무집을 짓고 살았으니, 자연인 치고는 초보에 해당한다. 

  그렇다고 그가 월든에 있는 2년 동안을 자연인들처럼 세상과 교류를 단절하며 살지는 않았다. 콩코드 문화회관에서 강연하고 '콩코드강과 메리맥강에서의 일주일'이라는 원고도 집필했다. 제6장 '방문객들' 편을 보면 소로우의 통나무 집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와 대화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속세를 떠난 존재가 아니며 월든에서 살아가는 2년 동안 그는 여전히 세속의 사람들과 인연을 맺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완벽한 자연인이 아니라 반만 자연인이었다. 세상과 교류하며 호수가에 살았는데 그를 대단한 인물로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보통의 자연인들이 자신의 생각을 담은 책을 남기지 않았으나, 소로우는 글을 남겼기 때문이다. 

  '월든'은 총 18장으로 되어 있다. 이중에서 소로우의 사상을 알 수있는 부분은 제1장과 18장이다. 나머지 장들은 월든 호수가에 살면서 그가 겪거나 관찰한 자연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부분은 대단히 지루하다. 그렇기에 차라리 '나는 자연인이다.'를 보는 것이 보다 재미있고 더 가치있을 수도 있다. 

  그의 책 이곳 저곳에는 그리스 로마 신화와 동양의 고전을 인용한 글들이 많다. '논어', '맹자', '바그바드기타' 등등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동양의 철학에 의지하여 서양의 언어로 표현했다. 책의 전체적인 내용으로 볼때 '노자'나 '장자'라는 고전을 인용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들지만, 왠일인지 소로우는 '노자'와 '장자'를 인용하지 않았다. '나는 자연인이다'에 나오는 자연인들은 자연을 살피고 누릴뿐, 자연과의 삶을 기록하지 않는다. 그는 세상과의 인연을끊을 생각도 없고 끊지도 않았다. 월든이라는 대자연에 의탁해 살면서 경험한 내용을 소재로 책을 내어 유명인이 되었을 뿐이다. 

  그는 검소한 삶, 소박한 삶을 주문한다. 


  "우리가 털갈이하는 시기는 날짐승의 그것처럼 인생에 있어 위기의 국면일때 여야만 한다."(46쪽)


  나도 이렇게 생각했던적이 있다. 그런데, 이렇게 살면 왕따 당하기 딱좋다. 학창시절, 허름한 옷을 입고, 기워입은 바지와 양말을 신고 초등학교에 갔다. 나의 모습을 보며 손가락질하며 비웃던 선배와 친구들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허름한 모습의 나는 여성들에게도 인끼가 없었다. 대학에서 아르바이트하며 내옷을 사입었다. 나름 괜찮은 옷이라 생각했으나, 친구들의 눈에는 역시 유행을 따라가지 못하는 옷차림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옷을 사기 위해서 옷을 차려입고 백화점에 가야한다. 허름한 옷을 입고하면 매장직원은 '당신이 비싼옷을 사겠어'라는 경멸의 눈초리로 우리를 대한다. 소로우의 옷에 대한 철학은 자연인이 되어야만 실천할 수 있는 주장이다. 

  소로우의 집에 대한 생각도 알아보자. 


  "나는 철로변에 놓여있는 큰 상자를 바라보곤했다. 저런 상자를 사서 비가 올때나 밤에는 그 속에 들어가 뚜껑을 내리면 영혼 깊숙이 자유를 누릴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했다."(52쪽)


  소로우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당신의 상상을 실천에 옮겼는가? 어린시절, 나의 집은 초라했다. 겨울에는 벽사이로 찬바람이 들어와서 수건으로 구멍을 막아 놓아야했다. 벽지도 찢겨져 흙벽이 노출되었다. 아버지는 집을 다시짓지 않았다. 그당시는 이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았다. 가난 때문이다.

 소로우의 상상을 읽으며 가진자의 행복한 상상이라는 생각이든다. 소로우 당신은 그렇게 살았습니까? 월든 호수에서 2년밖에 살지 않은 초보 자연인이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자, 소로우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지금의 내 생활에 별 불편이 없다고 대답했다."(202쪽)


 이러한 그의 대답에 다시 질문하고 싶다. 아무런 불편이 없다면 당신은 왜? 월든에서 2년 밖에 살지 못했습니까? 나의 질문에 그는 아무런 대답도해주지 않았다. 그는 진정으로 월든에서의 2년을 행복하게 기억했을까? 혹시, 월든에서의 삶을 소재로 책을 출판해서 명성을 얻으려한 것은 아닌가?

소로우는 서구의 기계 문명에도 반감을 드러낸다. 


  "우리의 발명품은 흔히 진지한 일로부터 우리의 관심을 빼앗아가는 예쁘장한 장난감일 경우가 많다."(85쪽)


  우리의 발명품이 우리를 옥좨고 있다. 스마트폰이 인간의 사유를 말살하고 있다. 그런데도 미국인 소로우의 말이 달갑게 들리지는 않는다. 서구의 과학 기술문명에 아시아 아프리카인은 굴복했다. 지구상의 3분의 2의 국가가 식민지가 되었다. 먼저 서구의 과학 기술을 받아들인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은 우리로서는 과학기술을 배우는 것은 또 다른 독립투쟁이었다. 이러한 우리에게 서양인 소로우의 말은 배부른 투정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소로우의 글이 나에게 적대감만을 불러일으킨 것은 아니다. 


  "집을 마련하고 나서 농부는 그 집 때문에 더 부자가 된 것이 아니라 실은 더 가난하게 되었는지 모르며, 그가 집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집이 그를 소유하게 되었는지 모른다."(58쪽)


  영끌족, 하우스 푸어가 많은 우리 현실을 생각한다면 소로우의 지적은 날카롭다. 집이 거주의목적이 아니라 투기의 대상으로 여겨지지고 있다. 탐욕은 끝이 없어서, 자기 집값이 오르길 바라면서도 종부세가 나오면 길길이 날뛴다. 속물적 속성이 역역한 우리의 자화상이다. 


  동양사상에 심취하여 자연과 더불어 살고자했던 소로우의 삶이 나에게는 부잣집 도련님의 외출로밖에는 다가오지 못했다. 서구의 과학문명으로 동양을 식민지로 삼은, 가진자들의 여유 혹은 가진자들의 사치일 뿐이다. '월든'을 내려 놓으며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 없다. '나는 자연인이다.'를 즐겨보면서 나도 자연이이 되는 것을 상상했다. 그러나, 내가 상상했던 자연인은 가진자의 투정도 아니요. 부자집 도련님의 외출도 아니었다. 


ps. 어느 정치인에게 소로우의 글귀를 헌정한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아무런 존경심을 갖지 않는 사람이 애국심에 불타서 소를 위해 대를 희생시키는 일이 있다. (중략) 이런 사람들에게 애국심은 그들의 머리를 파먹고 있는 구더기라고 할 수 있으리라"(4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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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3-12-15 09: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봤습니다!

강나루 2023-12-17 11:4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디케의 눈물 - 대한검국에 맞선 조국의 호소
조국 지음 / 다산북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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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사출신 대통령이 등장했다. 매스로우가 '망치를 든 사람은 모든 것이 못으로보인다.'라고 말했듯이, 그에게는 모든 것이 수사의 대상으로 보이나 보다. '법치'의 깃발 아래, 가짜뉴스를 없애기 위해서 언론사 앞수수색이 이뤄졌다. 그렇게 언론의 자유를 말하던 언론인들도 대통령의 '법치'에 동조하듯이 숨죽이며 엎드려있다. 야당 대표에 대한 압수수색이 이뤄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야당 대표를 '잡범'이라고 말하는 XXX도 등장했다. 정권이 바뀌고 법치는 강화되었는데 우리는 법치가 제대로 이뤄지고 있다고 느끼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러한 걸까? 왜 법치가 강조되는 사회에서 법치가 이뤄지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 것일까?


  조국 교수는 '디케의 눈물'에서 오0준 대법관의 판결을 소개한다. 그는 2011년 12월 서울행정법원 행정1부 재판정 재직 시절 800원 을 횡령한 버스 기사를 해임한 고속버스 회사의 처분은 정당하다는 판결했다. 버스기사는 2010년 승객에게 받은 요금 6400원 중 6000원만 회사에 내고 나머지 400원을 사용해 자판기 커피를 두 차례 사셨다.(6400-6000=400원인데, 조국 교수는 800원을 횡령했다고 서술했다.) 아니, 800원 횡령했다고 17년간 버스 기사로 일한 기사분을 해고하다니!! 

  오0준 대법관의 판결을 읽으며 춘추 전국 시대 법가가 생각났다. 춘추전국시대! 법가들은 혈연 중심의 보수적 세력을 없애고 부국강병을 위해서 엄격한 법을 제정하고 이를 집행했다. 조그만 잘못도 국법에 따라서 처벌되었다. 그 처벌은 우리의 눈에는 참으로 가혹한 것이었다. 법에는 예외가 없었다. 귀족이라도 법에 따라 처벌받고 상을 받았다. 신분이 낮더라도 전장에 나가 공을 세우면 상을 받았다. 법가에 따라 개혁을 하고 부국강병을 이룬 진나라가 중원을 통일 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오0준 대법관의 판결에서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는 단호함을 기대한 것은 나의 욕심이었을까? 조국 교수는 "오 후보자가 85만 원 상당의 접대를 받은 검사의 면직에 대해 "가혹하다"고 한 판결"했다고 소개했다. 이것 억강부약 (抑强扶弱)이라는 통치의 기본에 거스르는 판결이 아닐까? 어찌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가혹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법가가 추구했던 법치에 어긋나는 판결이다. 

  그렇다면, 조국 교수가 생각하는 '법치'는 어떠해야할까? 조국 교수는 뉴욕 시장을 세번이나 연임한 피오렐로 라과디아 뉴욕시 치안판사의 예를 소개한다. 배가 고파 빵을 훔친 어는 노파에게 10달러 벌금형을 선고한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한다. 


  "배고픈 사람이 거리를 헤매고 있는데 나는 그동안 너무 좋으 음식을 배불리 먹었습니다. 이 도시 시민 모두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 자신에게 1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하며, 방청객 모두에게 각각 50센트 벌금형을 선고합니다."(133쪽)


  라과디아 판사는 벌금으로 걷은 돈으로 노인의 벌금을 냈다. 그리고 남은 돈을 노인에게 건네주었다. 이러한 판결은 법가의 판결에서도, 대한민국의 오0준 대법관에게서도 기대할 수 없는 판결이다. 나는 라과디아 판사의 판결을 읽으면서 인간의 얼굴을 한 "법치'를 보았다. 그동안 법은 우리에게 인간의 얼굴이기 보다는 사형집행관의 얼굴이었다. 우리가 바라던 "법치"는 강자의 정의가 아니라, 인간의 얼굴을 한 사랑이었다. 이를 김상준 변호사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법치는 인본을 근간으로할 때 가치가 있다. 이점에서 법치는 법가의 통치와 궤를 달리한다."(148쪽)


  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 법치란 법가의 법치를 뜻했다. 지배의 망치로 사용될 뿐, 시민의 권리를 보호하는 지팡이는 아닌 존재였다. 조국이 인용한 마르크스주의 명제 즉, (법은) '지배계급의 도구'일 뿐일까? 현실은 여기서 더 나아가 약자에는 가혹한 논리를, 강자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운 논리를 들이대었다. 법가 사상가 한비자도 울고갈 정도의 잣대이다. 

  플라톤은 "법이 정부의 주인이고 정부가 법의 노예라면 그 상황은 전도유망하고, 인간은 신이 국가에 퍼붓는 축복을 만끽할 것이다."(100쪽)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법이 정부의 주인이고 정부가 법의 노예'가 될 수 있게할 수 있을까? 조국은 지방 검찰청 검사장 직선제를 주장한다. "주권자 국민은 자신이 선출한 권력에 의해서만 지배받는다."(96족), 아니 그래야만 한다. 

  그런데, 현실은 비관적으로 보인다. 나라가 망할 것 같다는 걱정을 주변사람들도 공유하고 있다. 이대로 가면 나라가 망할 것 같다는 걱정을 하는 현실이 너무나도 서글프다. 이런 우리에게 조국은 무어라 말할까? 아마도 조국은 안토니오 그람시의 말을 인용해서 "이성으로 비관하되 의지로 낙관하라"(210쪽)라고 말할 것이다. 세상은 차가운 이성의 눈으로 바라보고 삶은 따듯한 감성으로 살아가야하지 않은까? 어둠 속에서 빛을 보는 것이 희망이 듯이, 어두운 현실 속에서 한줄기 희망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이 어둠 속에서 살아가야하는 우리가 살아갈 방도이다. 


  글을 마치며 조국 교수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말을 소개하며 자신의 다짐을 말한다. 


  "날지 못하면 뛰어라, 뛰지 못하면 걸어라. 걷지 못하면 기어라. 무엇을 하든 계속 전진해야한다." 등에 화살이 박히고 발에 사슬이 채워진 몸이라 날지도 뛰지도 못하지만, 기어서라도 앞으로 가려고 한다.(325쪽)


  그가 기어서라도 앞으로 가길 바란다. 그가 가고자하는 길이 인간의 얼굴을 한 따뜻한 법치의 길이라면, 우리 모두 그 길을 같이 가야한다. 법치가 더 이상 강자의 통치의 수단으로 이용당하지 않고, 시민을 보호하는 지팡이가 되는 그날까지....


ps. 조국 교수는 윤석렬 당선에 미약하나마 기여한 것으로 보이는 진중권의 말을 이책에 인용했다. 

  "윤석렬 정부는 과거 이명박, 박근혜 정부보다 더 심하다. 속았다는 느낌이 든다."(65쪽)

  이글을 읽으면서, 한때나마 지식인이라고 믿었던 진중권에게 실망했다. 진중권이 윤석렬 정부에게 속았다는 말은 진심일까? 진중권의 사람보는 눈이 나보다도 형편없는 것일까? 아니면 속은 척하면서 자기 변명을 하는 것일까? 그의 속마음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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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의 맛 - 셰익스피어처럼 쓰고 오스카 와일드처럼 말하는 39개의 수사학
마크 포사이스 지음, 오수원 옮김 / 비아북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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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잘 쓰고 싶다. 말을 잘하고 싶다. 그래서 '문장의 맛'을 꺼내들었다. 39개의 수사법을 다양한 영문학 서적과 노래가사를 예로들며 소개한 것은 무척이나 흥미로운 서술이다. 

  이책의 가장 큰 장점은 우리가 명언이라고 생각하는 문장들이 사실은 수사법의 도움을 받은 것들이많다는 사실이다. 삼항구, 반복법, 겸용법 등등 수많은 수사법들을 보면서 이를 잘 활용하면 우리도 보다 잘 말하고, 잘 쓸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열네번째 규칙'이라는 수사법이 있다. 왜? 열네번째일까? 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그런데, 14와는 관련이 없다. '일단 아무숫자나 선택할 것'이것이 핵심이다. 많은, 여럿 등의 막연한 표현보다 구체적인 숫자가 설득력이 높다. 박완서 작가가 '이름없는 꽃이 피었다.'라는 문장을 보고 검토하고 있던 소설을 집어 던졌다고 한다. 어찌 이름없는 꽃이 있을 수 있는가? 그렇다! 사람들은 구체적인 것을 좋아한다. 그 숫자가 틀린 숫자라할지라도 구체적인 숫자를 들이대는 것은 현명한 방법이다. 

  책을 100% 활용하고 싶다면, '문장의 맛'을 활용해서 영문학을 이해할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이사일의'이다. 두단어에 'and'를 집어 넣어 여러뜻으로 해석이 가능하도록 하는 수사법이다. '이사일의' 수사법에 관한 설명을 읽고 나서야 내가 보아왔던 문장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한국어에는 부적당한 수사법이기에 영어 문장을 해서하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책은 말을 잘하고, 글을 잘 쓸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영문학을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도 알려주었다. 

 영문학에 사용하는 수사법을 소개하다보니, 우리말에는 적용하기 어려운 수사법이 많다. '유운', '작시법에 관한 여담', '이사일의', '오어법' 등등 이러한 수사법을 억지로 한국어에 사용한다면 우리말을 어지럽히는 일일 것이다. 언어는 그 사회의 생각을 담는 그릇이기에 우리 그릇에 담기에 부적당한 수사법이 있을 수밖에 없다. 

  책장을 덮었다. 좋은 글이 되기 위해서는 좋은 내용이 있어야한다. 그리고 거기에 좋은 그릇이 갖추어진지고 예쁜 장식이 추가된다면 금상첨화이다. 이 책은 글을 잘쓰기 원하는 사람이 글에 예쁜 장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이다. 한번 읽어보길 추천한다. 당신의 말과 글에도 예쁜 장식이 필요할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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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3-12-05 2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올해의 서재의 달인 축하드립니다.
따뜻한 연말 좋은 시간 보내세요.^^

강나루 2023-12-06 13:55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인생 박물관
김동식 지음 / 요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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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기대했던 책이 아닙니다. 책을 바꾸는 것은 어떨까요?" 날벼락 같은 메시지가 왔다. 독서 모임에서 책을 추천한 분이 김동식 소설 인생 박물관첫편을 읽고 실망스럽다며 보낸 메시지이다. 벌써 책을 구입했는데, 책을 바꿀 수는 없었다. 답글을 보내지 않고 책을 읽어내려갔다. 읽고 나서 선생님의 메시지에 답하리라....

김동식 작가는 전문 창작 교육을 받지 않고 글을 쓰기 시작한 사람이다. 인터넷 사진 속의 얼굴도 노동자의 모습이 물씬 풍겼다. 글을 읽으면서 날것의 느낌을 많이 느꼈다. 김동식 작가는 무서운 이야기만 썼으나, 이번 단편소설집은 따뜻한 이야기들을 골라 묶었다. 김동식 작품의 따스함에 녹아 있는 날것의 모습을 살펴보자.

 

'인생 박물관'에 실려있는 소설의 특징은 소재면에서 SF나 판타지에 가까운 소설들이 많다는 점이다. '찰나를 사는 남자', '커튼 너머의 세상', '가족과 꿈의 경계에서' 등등 상당수의 작품이 일상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곳에서 소재를 찾기보다는 평행 우주론, 저승사자, 천사, 다중인격 등등의 판타지나 전설의 고향에서 볼 법한 소재들이었다. 날것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물론, 그 날것의 냄새가 싫지는 않았다. 지친 일상을 잠시나마 탈출하고 싶은 욕망을 해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 속 여기저기에서 헐리우드의 SF 영화의 냄새도 풍겼다. 헐리우드는 우리 영화처럼 현실을 그리지 못한다. 해피엔딩으로 끝나야 흥행이 된다는 상업적 공식과 초거대 자본의 힘으로 블록버스터 영화를 찍을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히어로물을 많이 찍어낸다. 그렇게 생산된 헐리우드 영화는 거대 자본이 지배하는 미국 사회의 어두운면을 직면하지 못한다. 설령 어두운 면이 있다할지라도 히어로가 나타나 해결해 줄 것이라는 망상을 심어준다. 자본주의의 극단을 달리는 헐리우드 영화의 씁쓸한 냄새가 김동식의 소설에서도 풍겼다.

물론, 김동식의 '인생 박물관'만으로 그의 소설을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이 책에는 현실의 괴로움도 반드시 해피엔딩으로 끝나야한다는 집착이 묻어났다. 작품에 등장하는 저승사자, 악마, 천사, 초현실적 설정이 불행한 현실을 해피엔딩으로 이끌었다. 그 속에서 씁쓸함도 밀려왔다. 그러한 '인생 박물관' 식의 고통해결이 현실에서는 일어나기 힘들다는 사실 때문이리라...... 메시아는 기다릴때만 힘을 발휘하기 때문일 것이다.

김동식 소설의 또 다른 특징은 나레이터가 주인공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사내', '남자', '중년의 남성', '죄인 아무개 지구인' 등등의 호칭으로 인물들을 부른다. 또한 배경 묘사가 거의 없다. 철저히 인물의 대화로 소설을 이끌어간다. 그래서 상황 파악이 힘겹다. 작품 중에서 '작은 눈사람'이라는 소설을 읽으며 실망감이 컸던 것도 이 때문이다. 소설 속 인물들이 원전의 어느 곳에서 어떤 문제로 투입되어 목숨을 걸고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설명을 했어야했다. 그러나 작가는 그러지 않았다. 소설에는 긴박감이 전혀 묻어나지 않았다. 너무도 거친 소설이다.

박완서 작가에게 어느 소설가가 평을 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런데 박완서 작가는 소설을 읽다가 원고를 집어던졌다고 한다. '이름 없는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었다.'라는 부분에서 박완서 작가는 분노했다. 어디 이름 없는 꽃이 있을 수 있느냐는 말이다. 식물도감을 찾아보고 꽃의 이름을 찾아내어 소설에 적었어야했다는 날카로운 지적을 박완서 작가는 했다. 김동식 작가에게도 같은 말을 해주고 싶다. '작은 눈사람'이라는 소설을 쓰려면 핵발전소에 대해서, 핵사고에 대해서 공부를 했어야했다. 철저한 자료조사 없이 글재주로 소설을 쓰면 그 허술함이 금방 드러난다. 이름 없는 꽃이 없듯이, 이름 없는 사람은 없다. 적어도 작가라면 소설의 주인공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따스함을 보여야했다. 김동식은 날것의 냄새를 거칠음이 아니라, 신선함으로 느끼도록 세심한 노력을 해야한다.

 

책장을 덮었다. 날것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소설을 읽고 허술한 묘사에 실망도했지만,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신자유주의로 무장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보다는 따뜻한 연대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김동식의 '인생 박물관'이 그 허기를 달래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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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만들어진 위험 - 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당신에게
리처드 도킨스 지음, 김명주 옮김 / 김영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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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적 유전자'를 통해서 유전자의 신비를 우리에게 설명해준 리처드 도킨스가 종교에 도전장을 냈다. '만들어진 신'이라는 책과 '신, 만들어진 위험'이라는 책 중에서 어느 책을 읽을지 고민했다.  '신, 만들어진 위험'이 표지도 매력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쪽수가 '만들어진 신'의 절반인 350여쪽이었다. 매력적인 쪽수이다. 그런데, 책의 내용은 더 매력적이다. 

  

  우선, 리처드 도킨스는 과학자이다. 이과 남자가 문과 방면에도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그가 '이기적 유전자'와 같은 명작을 쓴 원동력이었으리라... 구약에 대한 리처드 도킨스의 지식은 상당하다. 여러 신학자와 역사학자들의 연구를 섭렵하고 성경을 비판적으로 읽고 있다. 

  물론, 역사를 전공한 나는 구약의 '모세 5경'을 모세가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역사학자들이 사료비판을 통해서 밝혀냈음을 알고 있으며, 구약의 여러 신화가 메소포타미아의 수많은 신화와 이야기 속에서 장점만 뽑아내어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랬기에 리처드 도킨스가 성경이 고유한 유대인들의 이야기가 아닌,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신화를 그들 나름의 이야기로 재창조했다는 지적이 새로울 것이 없었다. 

  진정 그의 탁월성이 돋보이는 것은 성경을 새로운 관점에서 읽은 것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죄물로 신께 바치려는 장면을 이삭의 관점에서 다시 서술했다. 이삭을 얼마나 두려웠을까?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아버지와 신에 대한 불신에 가득차서평생을 고통받았을 것이다. 이삭의 관점에서 성경을 다시 읽으니, 성경의 잔인성에 몸서리가 쳐진다. 

  도킨스는 출애굽 이후, 유대인이 저지른 제노사이드를 비판한다. '젖과 꿀이 흐르는땅'에 사는 모든 사람을 죽이라는 신의 명령을 리처드 도킨스는 히틀러의 레벤스라움과 비교한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은 이미 3천여년 전에도 벌어졌던 것이다. 도킨스의 표현대로라면 이스라엘은 히틀러보다 나을 것이 없는 행위를 3천년에도 그리고 지금도 벌이고 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박해하는 것은 그들의 경전인 구약의 가르침을 따른 결과인가?

  성경을 읽다보면, 여성비하적 표현과 노예제도를 옹호하는 표현들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성경이 완전한 경전이라면 이러한 표현이 있으면 안된다. 그렇다. 리처드 도킨스가 말했듯이, 이들 책들은 시대적 한계 속에서 탄생했다. 그러니 그러한 표현이 있을 수밖에 없다. 오히려 성경을 무결점의 성스러운 서적으로 여기는 우리의 관점을 바꾸어야한다. 

  1부에서 성경의 헛점을 지적한 도킨스는 2부에서 진화론의 관점에서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 신이 없이도 진화론으로 우리 자연계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존재하지도 않는 신을 부모에 의해서 주입된 거짓 지식에 의해서 일평생을 특정한 종교인으로 살아야하는가? 


  "내가 만일 바이킹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면 오딘과 토르를 굳게 믿었을 것"

  "어째서 여러분이 태어난 나라에서 우연히 물려받은 신앙이 옳아야하는가?" (20쪽)


  그렇다. 만15세가 되기 전에 부모와 사회, 국가에 의해서 강제로 주입당한 신앙에 의해서 일평생을 신앙인으로 살아야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15세가 되어 스스로 세상을 판단할 수 있는 이성을 갖았을 때, 스스로 무신론자와 종교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도록하고, 종교를 선택한 자는 다시 세상의 여러 종교 중에서 한 종교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물론, 도킨스의 이러한 주장을 내가 적극 지지하는 이유는 나 자신이 초등학교 시절에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고 초등학교 동급생과 초등학교 2학교 담임 교사에게 미움과 따돌림, 구타를 당했기 때문이다. 특히 초등학교 2학년 담임 선생은 수업시간에 노골적으로 기독교를 믿으라고 설교했다. 

  도킨스는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기독교인들에게 날카로운 일침을 가한다. 


  "그런 사람들은 지옥 같은 장소가 없는 것을 천만 다행으로 알아야한다. 아이들에게 지옥에 간다고 협박하는 사람보다 더 지옥에 가도 싼사람은 없기 때문이다."(135쪽)


  협박으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자를 정당화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 주변의 기독교인들은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협박으로 우리를 종교의 노예로 만들려한다. 도킨스는 기독교인들의 공격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히 맞서고 있다. 그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리처드 도킨스는 이성적으로 신의 존재를 부정하면 많은 사람들이 비종교인이 될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그래서 열정적인 저술을 통해서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과학적 설명에 귀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나약한 존재이기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지만 신의 존재를 믿고 싶어한다. 인간은 그럴정도로 나약한 존재이다. 

  책을 덮으며, 신이 존재하지 않는 종교를 생각해보았다. 바로 불교이다. 부처는 '깨달은자'라는 뜻이다. 싯다르타는 먼저 깨달은 존재일 뿐이다. 우리도 수행을 하면 부처가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깨달음의 철학이고 가장 우주적인 종교이다. 도킨스에게 불교에 대한 견해를 묻는다면 그는 어떻게 답할까? 철학자 강신주가 벙커1에서 말했듯이, '기독교를 믿고 계신 분이 있다면, 불교로 바꾸세요.'라고 말할까? 아니면, 불교 조차도 필요없다며 오직 과학만이 진리라고 말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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