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과학기술 총력전 - 근대 150년 체제의 파탄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야마모토 요시타카 지음, 서의동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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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 기획살인˝이라는 대자보가 대학가에 나붙었다. 월성 원전 1호기 폐쇄를 문재인 정권이 기획했다는 내용을 담은 대자보를 원자력 전공학생들이 대학가에 붙인것이다. 이들에게 후쿠시마 핵발전소의 교훈은 찾아 보기 힘들다. 과학기술 만능의 사고관으로 무장한 일본이 치유할 수없는 상처를 지구에 남겼다.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아시아태평양 지역 사람들에게 고통을 준 것은 물론이고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로 태평양을 방사능 오염수로 채우려하고있다. 일본의 과학만능의 사고관을 들여다본다면 탈핵문제를 둘러싼 우리 사회의 갈등 치유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래서 야마모토 요시타카의 「일본 과학기술 총력전」을 펼쳤다.

1. 사무라이가 과학 기술을 받아들이다.
밈(Meme)이라는 말이있다. 문화적 유전자라 번역하는 밈은 한 사회에서 유전자 처럼 문화정보가 유전된다는 개념이다. 일본인의 밈에는 사무라이의 칼이 담겨져 있다. 같은 과학기술도 일본인들은 타인을 공격하는 무기로 받아들였다.
의사의 난학이 사무라이의 양학이되면서 일본인들은 서양의 모든것을 배우고 받아들였다. 심지어는 서양으로 유학가는 젊은이들에게 일본인을 개량하기 위해서 백인여성을 아내로 맞이해 오라고 훈시하기까지했다. 그러나 서양의 학문이라 할 지라도 일본이 군사강국이 되기위한 수단으로 받아들였다. 이것이 사무라이의 칼이라는 밈이 작동한 결과이다. 망치를 손에 쥔 목수에게 모든 것은 못으로 보이듯이, 칼을든 사무라이에게 모든것은 베어버릴 적이거나 적을 쓰러뜨릴 도구로 보였다. 서구의 과학기술은 적을 쓰러뜨릴 너무도 강력한 칼이었다. 일본은 과학기술이라는 보검을 얻기위해서 그 어떠한 댓가도 치룰 준비가 되어 있었다. 1543년 다네가시마의 도주가 조총제조법을 알아내기 위해서 자신의 딸을 포르투갈 남자에게 바쳤듯이 말이다.

2. 사무라이, 과학기술이라는 보검을 얻기위해 영혼을 팔다.
일본의 근대는 천운이 함께한 시기였다. 19세기 후반 서구 각국에서 과학연구가 사회적으로 제도화 되었고 직업과학자가 생겨났다. 서구 과학기술을 습득하기에 장벽이 너무 늦았다. 에너지혁명이 일어난지 반세기밖에 안되었으며 선진국은 기계기술을 일본에 팔기에 바빴다. 선진국이 실패를 쌓으며 발전시킨 과학기술을 일본은 실패없이 배워갔다.
아무리 천운을 타고 있는 일본이라도 엄청난 댓가를 지불해야했다. 일본을 군사강국으로 만들 과학기술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경제력이 뒷받침 되어야한다. 이를위해서 여공들은 주야 2교대라는 살인적인 노동에 혹사 당했다. 일본인이 존경하는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지는 이러한 여공의 모습을 보며 국제적 경쟁의 이점이라 평가했다. 비인도적인 살인적인 노동을 근대화를 통한 군사강국 일본을 만들기 위한 잇점으로 보고 있다.
일본의 노동자와 농민만이 일본 근대화의 희생양인것은 아니다. 일본의 자연도 고통을 받았다. 아시오 구리광산 광독 사건이 대표적 사건이다. 1885~1895년 일본 국내 구리의 4할 이상을 생산한 아시오광산은 어민과 농민에게 커다란 고통을 준다. 채광과 정련과정에서 나온 오염수가 와타라세강을 오염 시켰다. 오염수는 농지를 오염시켰다. 물고기는 떼죽음 당하고 곡식은 열매를 맺지 못했으며 가축과 사람은 병들어갔다. 사람이 죽어가는데도 일본정부는 국익을 내세워 기업의 손을 들어 주었다.
국익을 위해 개인을 희생 시킬 수있다는 논리는 패전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미나마타병과 이타이이타이병은 일본의 기업과 정부 학계가 하나로 뭉쳐 만들어낸 괴물이다. 기업은 이익을 위해서, 정부는 성장을 위해서, 학계는 기업이 제공하는 이익을 얻기위해서 환경 오염을 묵인했다.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는데도 돈과 권력 권위를 이용해서 기업의 범죄행위를 용인했다. 그러나 가장큰 문제는 생명의 어머니, 자연을 죽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본 사무라이들은 자연을 괴롭혀 경제 발전을 통한 군사 강국이 되려했다. 결국 그 속에서 자연이 죽어갔다.

3. 과학자가된 사무라이의 폭주
메이지유신 시기, 사무라이들은 천대 받았던 과학기술자가된다. 사무라이들은 군사기술을 습득하기 위해서 과학을 연구했다. 최신 무전기술을 전쟁에 도입해서 화약제국 러시아를 제압했다. 1차 세계대전은 과학이 전쟁승리에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일본정부는 전쟁 승리를 위해서 과학기술에 투자했다. 기업은 이익을 위해서 군수 무기를 만들었다. 과학자들은 연구비를 얻기위해서 마음껏 연구하기 위해서 국가의 요구에 충실히 부응했다. 이 시기, 아니 일본의 과학자는 ˝전문적 연구자가 수행해야할 사회적 역할은 의식하지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자 만큼 권력자가 다루기 쉬운 것은다.˝ 수많은 유대인들을 아우슈비츠로 보낸 아이히만 처럼 자신이하는 연구가 인류에게 얼마나 큰 불행을 가져올지 생각하지않았다.
일본이 패망했다. 일본의 총력전에 충실히 봉사한 과학기술자들은 반성했을까? 천만의 말씀, 그들은 자신들이 만들지 못한 핵을 미국이 만든 것에 경의를 표하고 미국보다 먼저 핵무기를 만들지 못한 것을 송구스러워했다. 일본인들은 패전의 원인을 과학기술에서 찾았다. 그래서 과거를 반성하지 않고 과학기술 발전을 통한 경제 성장에 매진한다. 특히 핵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핵기술을 얻기위해 부단히 노력한 일본은 핵발전소를 가동하며 핵무장의 기회를 엿본다.
2011년 3월 11일 지옥의 문이 열렸다. 기술강국 일본, 안전한 일본이라는 신화는 허상이었다. 통제불능의 핵발전소 사고로 일본국토의 70%가 방사성 세슘에 오염 되었다. 자연을 고문한 댓가를 일본을 포함한 지구인들이 나눠 부담해야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러나 일본 정치인들은 아직도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고있다. 더 이상 자연은 고통을 참을 수 없는데도 말이다.


기계장치가 발명되자, 인간은 노동에서 해방되지 못했다. 힘쎈 남자가 하던 일을 여성과 아이들이 할 수있게 되었기에 노동은 더욱 가혹해졌다. 전등이 발명되자, 야간노동이 가능해졌다. 주야간 2교대라는 고강도 노동에 인간은 내몰렸다. 저자 야마모토 요시타카는 기계 그자체 만으로는 결코 인간 노동이 경감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과학기술도 과학기술 그 자체만으로 인류에게 행복을 제공하지 못한다. 그 과학기술을 부릴 인간이 정신적으로 성숙할 때만이 과학기술은 우리에게 미소 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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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라 진다 - 전후 70년, 현대 일본을 말하다
우치다 타츠루.시라이 사토시 지음, 정선태 옮김 / 우주소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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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은 사쿠라, 사람은 사무라이"라는 말이 있다. 일본인들은 '사쿠라'를 좋아한다. '사쿠라'는 '사무라이'와 함께 일본을 상징하는 아이콘이다. 그런데, 일본을 상징하는 '사쿠라'가 진다니, 무슨 뜻일까?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은 '첨단 기술과 번영하는 일본'이라는 가면을 벗고 일본의 민낯을 보는 계기를 만들었다. 기술이 뛰어난 일본에서 원전사고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단언했지만, 일본의 첨단 기술은 허황된 신기루였다. 자연재해에 대비해서 정밀한 매뉴얼을 준비하고 안전한 일본을 만들었다는 고정관념도 허울 좋은 망상이었다는 사실을 목도했다. 그렇게 사쿠라는 지고 있다.

  "영속패전론"을 읽고 일본의 민낮을 본 이후, 시라이 사토시의 다른 책을 읽고 싶어졌다. 같은 동아시아 문화권에 살지만, 너무도 다른 일본인들의 정신구조를 이해하기 위해서 "사쿠라 진다."를 꺼내 들었다. 거리의 철학자 우치다 다쓰루와 "영속패전론"이라는 명저를 쓴, 시라이 사토시의 대담을 통해서 현대 일본의 민낯을 보자. 


1. 스스로를 파괴하는 일본인

 아베가 그토록 고대하던 '2020 도쿄 올림픽'이 연기되었다. 그러나, 도쿄 올림픽이 올해 열릴 가능성은 아베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분들에게 무릎 꿇고 사과할 가능성보다 낮다. 아베는 '2020 도쿄 올림픽'을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극복한 일본'이라 포장하여 세계에 선전하려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종결된 사건이 아니라, 현재 진행중인 재앙이다. 도쿄까지 고농도 방사능 오염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특정비밀보호법으로 언론을 통제하면서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종결되었다며 일본 국민을 속이고 있다. 빨리 도쿄 올림픽을 손절매하고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진실을 알려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피해를 줄이려 노력해야함에도 일본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덮으려고만 한다. 일본속담에 "냄새나는 것에 뚜껑을 덮다.(臭いものに蓋をする くさいものにふたをする)"라는 말이 있다. 일본은 덮을 수 없는 것을 덮으려한다. 시간이 지나면 후쿠시마 원전의 재앙은 더욱 커지고 섬나라 일본은 더 이상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 될 것이다. 왜? 일본은 스스로를 파괴하는 일을 하는 것일까?

  우치다 다쓰루는 재미 있는 일화를 소개한다. 2대 혹은 3대째 이어져 내려오는 여관의 주인이, 지역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기 위해서 내려온 젊은이를 미워하고, 지역 경제를 소생하는 일을 방해한다. 결국 여관은 도산하고, 여관 주인은 타여관의 지배인이 되거나 연금 생활을 한다. 그런데, 도산한 여관의 주인은 더욱 행복한 모습이라고 한다. 왜일까? 여관일을 하고 싶지 않지만, 가업이기에 자기 손으로 여관을 문닫게 할 수 없었다. 여관주인은 차라리 지역 경제가 나빠져 도산을 한다면, 여관일을 그만해도 되기에 오히려 여관이 도산하기를 고대했다고 한다. 

  우리는 10대째 가업을 잇는 일본인을 바라보며, '전통과 가업을 중요시하는 일본의 장인정신'이라 칭찬한다. 하지만, 그러한 칭찬을 하기 이전에 가업을 넘겨 받는 사람이 진정으로 원해서 가업을 잇는지 물어보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가업을 잇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자신이 원하는 것과 과업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보통의 한국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일을 선택한다. 그러나 일본인은 가업을 선택한다.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타인의 바람에 부응해서 삶을 사는 노예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일본에서 찾을 수 있다. 교토의 "시미센"을 보면서 '전통을 사랑하고 지키는 일본인'의 아름다운 모습이라 생각하기 이전에, 자신의 바램과 의지를 꺽고 전통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야하는 일본인의 노예적 삶을 생각해야했다. 

  '전통의 노예'가 되어 파산하기를 고대하는 일본인의 모습을 일본 엘리트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아베정권의 실정을 지적하며 아베를 권좌에서 끌어내야하는 일본 엘리트들은 자신의 책무를 방기하고 오히려 아베의 눈치만 보고 있다. 시라이 사토시와 우치다 다쓰루가 지적했듯이, 일본 엘리트들에게는 '파괴 본능'이 있는 것 같다. 마치 미국과의 전쟁은 자멸의 길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상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면서도 1945년 8월 15일 폐허가 된 제국의 수도를 바라보면서 전쟁이 끝났다며 환한 표정을 지었다는 다수의 일본 국민들을 보는 듯하다.

  건강상의 문제로 아베는 권좌에서 물러났지만, 아베의 뒤를 이은 스가는 아베의 우경화 정책을 계승하고 있다. 아니, 더욱 강화시키고 있다. 후쿠시마 오염수를 방류하겠다며 태평양을 방사능으로 오염시키려하고 있고, '한일 위안부 합의'와 '한일 협정'을 근거로 한국과 역사 갈등을 증복 시키고 있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는 섬나라 일본은 물론이고, 지구의 바다를 오염시키는 일이다. 이는 물고기 소비량 세계 1위인 일본인의 건강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가 지구의 바다를 오염시키는 일이라면,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강제 징용 문제 부정은 한국은 물론이고 아시아 국가들의 정신을 오염시키는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본의 우경화 정책은 일본군부가 침략전쟁을 확대시키다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맞고 패망했듯이, 일본을 파멸로 몰고갈 것이다. 방사능으로 오염된 바다는 정화할 수 없으며, 역사문제로 신뢰를 잃어버린 국가는 세계의 정의로인 시민들에게 지탄의 대상이 될 것이다. 


2. "대미 종속을 통한 대미 자립"을 추구하는 일본

  2019년 아베는 트럼프에게 275만톤, 약 600억엔(약 6650억원)의 옥수수를 강매당했다. 아베는 “아베 정부가 미국에 아양 떨려고 세금을 마구 쓰고 이를 또 은폐했다”는 비난을 일본 국민들에게 들었다. 한국에게는 너무도 뻔뻔한 일본이, 미국에게는 너무도 작아진다. 이해할 수 없는 일본의 저자세 대미외교를 일본의 우익정치인들은 "대미 종속을 통한 대미 자립"정책이라 말한다. 

  "대미 종속"과 "대미 자립"은 서로 상반된 말이다. 마치 술을 마시고 운전대를 잡았으나, 음주운전은 아니라는 말과 비슷하다. 일본의 "초사대주의" 외교를 우치다 다쓰루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잘보여 출세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예로들어 설명한다. 천한 신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벼락 출세할 수 있었던 이유는 추운 겨울에 주인의 신발을 가슴에 품으며 오다 노부나가에게 충성을 했기 때문이다. 가게 점원이 열심히 일을 해서 가계 주인에게 잘보이면, 주인이 점원에게 분점을 차려줄 것이라는 헛된 기대를 일본은 하고 있다. "대미 종속을 통한 대미 자립"정책으로 오키나와를 돌려 받았고, 미국의 핵우산 아래 경제 성장을 이뤘다. 이러한 행운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는 헛된 기대를 일본 우익은 하고 있다. 

  "대미 종속을 통한 대미 자립"을 이루기 위해서 일본은 미국에게 굴욕적인 비밀 조약을 체결했다. 아베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는 CIA 요원으로 일했다. 그뿐 아니다. 점령국 소속 장교(장군)가 자신의 부인이 마음에 든다고 하면, 자신의 아내를 내주기까지 했다. 자신의 침실을 미국 장교(장군)에게 내어주고, 아내를 첩으로 바치면서도 "대미 종속을 통한 대미 자립"을 꿈꾼 것이 일본 우익들이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굴종적인 모습을 일본 국민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미국과 대등하게 겨루는 일본국 대표", "미국은 일본에 변함 없는 애정을 갖고 있다."라는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서 굴종적인 대미외교를 계속한다. 

  미군 점령기 일본의 우익들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미치지 않고서는 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일본 우익들은 이 시기를 참고 견딘다. 칼이 지배하는 천년이 넘는 막부시대를 살아온 그들이기에 분노와 울분을 참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필수적 행동임을 잘 알고 있다. 자신의 상관에게 잘보이려 마음에도 없는 말을 잘하는 사람은 비루해진다. 비루한 사람은 강자에게는 한없이 비굴해지고, 약자에게는 한없이 폭압적으로 굴림한다. 미국에게는 굴종적 저자세 외교를 하지만, 한국과 아시아의 약소국에게는 태평양전쟁시기 일본의 만행을 부정하며 폭압적 외교를 전개는 일본의 모습에서 '비루함'을 엿본다. "대미 종속을 통한 대미 자립"이라는 외교전략을 계속 유지하는 이상 일본의 '비루한' 외교는 계속될 것이다. 


3. 무엇이 프랑스를 전승국으로, 일본을 전범국으로 만들었는가?

  프랑스는 전승국일까? 전범국일까? 드골의 '자유 프랑스'를 처칠과 루스벨트는 처음부터 프랑스의 대표로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비시 괴뢰정권을 프랑스 대표로 인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리를 드골의 '자유 프랑스'와 레지스탕스가 해방시키고, 샹젤리제 거리를 행진하자, 미국과 영국은 드골을 인정했다. 패텡의 비시정권을 프랑스의 대표로 본다면, 프랑스는 점범국가이다. 반면, 얼마 안되는 드골의 '자유 프랑스'를 프랑스의 대표로 인정한다면, 프랑스는 전승국이된다. "좋은 프랑스인이 모두 일치하여 대독 협력자와 싸워 독일군을 내쫓았다."라는 이야기는 만들어진 신화이다. 사실 레지스탕스가 본격적으로 활동한 것은 독일군의 패전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이며, 독일에 협력했던 상당수의 사람들이 스스로 레지스탕스임을 주장하기도 했다. 

  우치다 다쓰루는 프랑스 이야기를 하면서, 패전을 부인하는 상태를 일컫는 "영속패전"은 프랑스에서도 계속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비시 정권 참여자가 제4공화국에 참여한 프랑스나, A급 전범임에도 전후 일본 수상이 되거나 정치무대 뒤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일본이나 "영속 패전"상태인 점은 비슷하다. 그렇다면, 일본과 프랑스의 차이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무엇이 프랑스를 '전승국'으로 만들고, 일본을 '전범국'으로 만들었을까? 

  우치다 다쓰루와 시라이 사토시는 프랑스와 일본이 "영속 패전" 상태라는 점은 같지만, 그속에서 프랑스와 일본의 다른점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프랑스가 나치에 협력한 자들을 숙청하고 미국의 독주에 대해서 당당히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국가로 인식되는 반면, 일본은 점범들이 다시 정권을 잡고 과거의 잘못에 반성을 하지 않는 비도덕적인 국가로 인식되고 있다. 같은 "영속패전"상태이지만, 프랑스와 일본은 너무도 다른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프랑스와 일본은 무엇이 다를까?

  그차이는 너무도 작은 차이에 있다. 비시정권이 활개칠때, 드골은 "자유 프랑스"를 만들어 독일에 대항했다. 비록 미약하지만 레지스탕스들이 독일에 대항해 투쟁했다. 반면, 일본에는 "자유 프랑스"도 없었고, "레지스탕스"도 없었다. 천황을 부정해야하는 공산주의자들 마져도 눈물을 흘리며 천황제를 버릴 수 없다며 전향서를 썼다. 그리고 일본인들을 그 전향서를 감동 깊게 읽는다. 

  김구 선생 암살범 안두희를 처단한 박기서 의사는 "바다가 썩지 않는 이유는 3%의 소금 때문이다."라는 말을 했다. 바닷물에 녹아 있는 소금의 양은 바닷물에 비하면 너무도 작다. 그러나 3%의 소금이 있기에 바닷물은 썩지 않는다. 프랑스에는 3%의 소금과 같은 존재가 있었지만, 일본에는 소금과 같은 존재가 3%조차 되지 않았다. 로마의 시인 유베날리우스는 제정 초기 로마 주민들을 "정치적 소신도 없이 물질적 이득과 쾌락만 쫓는다."라고 비판했다. 3%의 소금과 같은 깨어 있는 시민이 없는 로마는 결국 공화정이 무너지고, 제정이 등장했다. 이렇듯, 작은 차이가 폭주하는 일본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영속패전"의 상태로 만들었다. "대중을 다루는데는 빵과 서커스면 충분하다."라는 히틀러의 말이 일본에는 아직도 유효한 명제로 남아 있다. 3%의 소금과 같은 깨어 있는 시민이 없다면, 히틀러의 말은 앞으로도 유효할 것이다.



  영화 "고질라"를 기억하는가! "고질라"는 원래 일본에서 창작된 작품이다. 우치다 다쓰루는 고질라를 "근대 일본 시스템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폭력적 억압, 죽은 자들의 원한, 잃어버린 전통, 더럽혀진 산하와 같이 일본인이 내버린 것들의 복수담"으로 해석한다. 일본이 내다 버린 것에는 아시아 태평양의 수많은 희생자들도 있다. 그렇다면, "고질라"의 출현을 막기 위해서, 수많은 희생자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서 일본이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올바로 역사교과서를 서술을하고 이를 일본 학생에게 가르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한다. "냄새 나는 것에 뚜껑을 덮는다."고 냄새가 사라지지 않는다, 뚜껑의 틈을 비집고 냄새는 다시 새어 나온다.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다고 일본이 저지른 전쟁범죄가 사라지지 않는다. 전세계의 소녀상을 없앤다고 일본의 전쟁 범죄가 사라지지 않는다. 일본이 아시아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증대 시키길 원한다면, 과거의 잘못을 직시하고 반성하고 반성을 행동으로 증명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게서 이러한 모습을 기대하는 것은 너무도 요원한 일이다. 과거를 반성하지 않고, 피해국이 약소국이라며 무시하는 일본의 태도가 변하지 않는다면, 2011년 3월 11일 후쿠시마에서 "고질라"가 출현했듯이, 다시 한번 "고질라"가 출현하여 일본 열도를 삼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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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속패전론 - 전후 일본의 핵심
시라이 사토시 지음, 정선태 옮김 / 이숲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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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 일본은 이해하기 힘든 나라이다. 주변 나라를 침략하고 엄청난 악행을 저질렀다면, 주변국에 사죄하지는 못하더라도, 미안한 감정은 가져야하지 안을까? 강한 놈에게 덤볐다가 패배했다면, 속으로는 강한 놈에 대한 복수를 보통은 꿈꾸지 않을까? 2차세계 대전 전범국이라는 독일과 일본은 너무도 대비적인 전후 처리를 하고 있다. 그리고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사건은 후쿠시마 핵사고 때의 일본인들의 침착함이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라는 초유의 사태 속에서도 후쿠시마 식품을 먹어서 응원하자라고 외치는 그들을 모습을 이해할 수 없다. 가까운 나라이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일본의 역사인식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줄 책이 필요했다. 그러던차에 팟캐스트 '일당백'에서 이 책을 소개해주었다. 내가 읽고 싶었던 바로 그 책이었다. 책의 두께가 적어도 600페이지 정도는 될 줄 알았던 나는 너무도 얇은 두께에 놀랐다. 그러나, 이책은 얇지만 무거운 내용이 쉽게 적혀있었다. 책 속으로 들어가 보자.

 

 

1. 미국의 속국 일본

 

'일본은 미국의 속국이다.' 라는 말은 번역 전쟁이라는 책에서 처음 보았다. 당시에는 믿어지지 않았다. 번역 전쟁이라는 책에서 주장하고 있는 내용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과 다른 것이 많았기에 더 많은 자료를 탐독한 후에 결론을 내리기로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일본 관련 자료를 볼수록, 일본이 미국의 속국이라는 번역 전쟁의 주장은 진실로 다가왔다.

교토세이카 대학 총합인문학과 교수인 시라이 사토시는 다양한 자료들을 분석하며 일본이 미국의 속국임을 증명하고 있다. 일본이 미국의 속국임을 여실히 드러낸 사건은 놀랍게도 '북방 4개섬(구나시리 섬, 에토로후 섬, 시코탄 섬, 하보마이 제도)'에서 발생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2장 제2조에 "일본국은 지시마 열도와 일본국이 190595일 포츠머스 조약의 결과로 주권을 획득한 가라후토 일부 및 이곳에 근접한 여러 섬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 및 청구권을 방기한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그리고, 1956년 일소 공동선언에서 소련은 '하보마이 제도 및 시코탄 섬을 일본에 양도'하기로 합의했다. 북방 4개섬 문제를 해결하고, 소련과 일본의 관계가 가까워질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미국이 가만있지 않았다. 미 국무장관 덜레스는 시게미쓰 마모루 외무장관에게 "이 조건으로 일소 평화조약 체결을 밀어붙인다면 미국은 오키나와를 영구히 반환하지 않겠다."라고 협박했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적인 소련과 일본이 영토문제를 해결하고 가까워진다면, 일본에서 미국의 입지는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소련과 일본은 대립해야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첨예한 '영토 분쟁'이 분쟁꺼리로서 남아있어야했다. 일본을 주권국가로 생각한다면, 덜레스의 협박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미국의 협박에 굴복한다. 사춘기 자녀는 부모로부터 독립을 준비하기 위해서 부모와 대립한다.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자녀는 홀로설 수 없다. 일본 극우파에게 미국은 천황제라는 '국체'를 유지시켜준 은인이다. 미국 굴종외교를 하면서도 미국의 그늘에서 벗어나려하지 않는 일본을 보면 측은함이 밀려온다. 그들은 영원히 홀로설 수 없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놀라운 사실은 일본이 미국의 속국이라는 사실을 일본인들도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라이 사토시의 말을 들어보자.

 

"일본이 미국의 속국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지만 정치인들은 미국과 일본의 정치적 관계가 대등하다(적어도 대등에 접근하고 있다.)고 입에 발린 말만 늘어놓는다. 이런 말은 국민에게 일본의 정신적 스트레스를 불러일으킨다. 한편에서 '우리나라는 훌륭한 주권국가'라는 말을 들으면, 이것이 새빨간 거짓임을 은연중에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영토 문제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듯이, 아시아 다른 나라와의 관계라면 '우리나라에 대한 주권 침해'라는 관념으로 과도하게 흥분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정신구조에 있다."-147

 

입밖으로 '일본이 미국의 속국이다.'라는 말을 하지는 않지만, 누구나 일본이 미국의 속국임을 인정하고 있다는 시라이 사토시의 말은 가히 충격적이다. 일본은 미국 덕택에 천황제라는 국체를 보존했다. 그리고, 미군의 오키나와 주둔에 동의하는 댓가로 경제 개발에 온 힘을 기울일 수 있었다. 배고픈 소크라테스보다는 배부른 돼기가 되는 길을 선택한 일본은 주인이 주는 찌꺼기에 행복해하며 주인의 곁을 떠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2. 노예를 길러 내는 일본

주한미군 사령관이던 위컴이 한국민은 레밍(들쥐) 같아서, 누가 지도자가 되어도 따를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한국에도 '레밍'이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인의 절대 다수는 레밍이기를 거부한다. 촛불을 들고 거리로 뛰어 나온 수많은 시민들이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시켰다. 헌법상으로만 존재했던,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말을 현실에서 증명했다. 진정한 '레밍'은 일본에 있었다.

시라이 사토시는 일본이 미국과 싸우면 반드시 패배한다는 사실을 당시 일본인들은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누구도 앞장서서 미국과의 전쟁을 반대하지 않았다. 소위 '대세 순응형 일본인'의 모습이 잘 드러나는 사례이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버섯구름이 피어오르자, 요나이 미쓰마사 해군대신은 '하늘이 도왔다.'고 말했다는 사실이다. 아니, 원폭을 2개나 맞았는데, '하늘이 도왔다'니 무슨 해괴한 말인가? 원폭이 본토 결전을 회피할 수 있으며, 국내에서 일어날 수도 있는 '혁명'을 날려버렸기 때문이다. 1억 총 옥쇄를 부르짖으며, 천황제라는 '국체'를 지키기 위해서 어떠한 희생도 치루겠다는 지배층들에게 그 누구도 '아니오'를 외치지 못했다. 그래서 "일본형 사회. 마치 레밍 떼처럼 파국을 향해 전력으로 질주할 결의라도 굳힌 것일까?"라는 사토 에이사쿠의 푸념이 더욱 가슴에 와 닿는다.

일본 사회는 아무도 책임지려하지 않는다. 그래서 회의를 많이한다. 좋은 의견을 수렴하기 위한 것이 회의의 목적일텐데, 일본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회의를 많이한다. 그리고 그렇게 회의를 많이 함에도 불구하고,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 레밍처럼 앞사람을 따라갈뿐이다. 앞서가던 레밍이 절벽에서 뛰어내리면 레밍들은 계속해서 절벽으로 뛰어내린다. 용기 있게 "NO"를 외치지 못하는 일본인의 노예 근성은 레밍과 절묘하게 일치한다.

일본에 왜? 레밍과 같은 노예들이 많을까? 그 이유를 나는 일본식 교육에서 찾고 싶다. 유치원에서부터 가장 강조해서 배우는 것은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는 것이다. 가족이 죽은 상황에서도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슬픔을 극도로 자제하도록 강요받는다. 같은 회사에서도 동료에게 가족의 부고를 드러내 놓고 말하지 않으며, 묻지도 않는다. 같은 무리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면 그는 왕따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일본 기업에서 신입사원을 채용할 때, 가장 중요시보는 것도 전체 조직에서 잘 융화될 수 있는 존재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섬나라라는 특성과 천년이 넘도록 사무라이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살아온 일본인들은 살아 남기 위해서 타인의 눈치를 보도록 만들어졌다. 이러한 대세 순응형의 일본인들은 브레이크 없는 폭주 기관차의 모습을 띄기도 했다. 조선병합 => 만주사변 => 중일전쟁 =>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제국주의의 길을 그들은 막지 못했다. 그리고 리틀보이와 팻맨이라는 핵폭탄이 일본에 떨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렇다면, 지금은 일본의 레밍 근성은 사라졌을까? 일본에는 '마스고미'라는 신조어가 있다. 번역하자면, 기레기라고 말할 수 있다. 매스미디어와 쓰레기의 합성어 '마스고미'라는 말은 일본의 언론이 얼마나 죽어 있는지를 잘 드러낸다. 아베정권의 뜻에 거스르지 않는 어용언론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언론에게서 무슨 희망을 찾을 수 있겠는가! 일본의 정치인과 학자들도 '마스고미'의 모습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일본인들이 레밍의 모습을 벗어던지기 위해서는, 노예 근성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지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나태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아니오"를 외칠 수 있어야한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에서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한 성실한 아이히만이 수만명의 유대인을 홀로코스트로 보냈다는 지적을 우리는 겸허히 되새겨야할 것이다. 앞사람만 보고 앞으로 나아가다가 절벽으로 떨어지는 레밍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3. 진실과 마주할 용기 없는 자들

'영속패전'이라는 말은 이 책의 핵심을 관통하는 말이다. 1945815일을 일본은 '패전일'로 기억하지 않는다. 그 날은 '종전일'일 뿐이라 믿는다. 일본의 극우파들은 잘못된 전쟁을 일으켜 자국민과 수많은 아시아 태평양 사람들을 죽음에 내몰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려하지 않는다. 잘못된 결정을 내렸다면, 그 책임을 지고 일본 사무라이의 '영광'스런 죽음의 형태인 '셋푸쿠(할복)'를 해야한다. 그러나 그들은 패전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1945815일은 '패전일'일 수가 없다. 단지 '종전일'일 뿐이다.

베를린을 여행하던 시라이 사토시는 무슬림 택시기사의 말을 듣고 충격을 받는다.

 

"절대로 용서 못해. 모든 문제는 미국이라고. 우리 무슬림이 살인자라고? 그놈들이야말로 살인자지."

"우리는 절대 용서 못 해. 너희도 그렇지? 그놈들이 원자폭탄을 떨어트렸으니까. 다음에 미국이라 붙을 때 꼭 같이하자고!"-199

 

미국에게 원자폭탄을 2개나 받은 일본은 당연히 미국에 대한 앙금을 갖고 있을 것이라는 무슬림의 말에 시라이 사토시는 아무말도 하지 못한다. "적국이었던 나라에 빌 붙어 적국의 군대가 주둔하기를 촉구하면서 까지 자기 보신을 도모한자들"이 바로 일본의 극우파였다. 한반도와 대만이 냉전의 최전선에서 일본을 막아주고 있었기에 미국의 군사력에 기대어 경제개발에 매진할 수 있었던 일본은 아시아 각국이 공산주의의 침략에 무너질 수 없는 군부독재국가의 탄생을 용인한다는 로스토우전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권력을 잡은 일본 극우파는 일본의 원죄와 마주하기 보다는 기억을 부정한다. 배고픈 소크라테스이기 보다는 배부른 돼지로서 살라고 일본인을 '교화'시켰다. 그리고 대세 순응형인 일본인들은 이에 충실히 따랐다. 그리고 그때의 향수에 젖어있는 일본 국우파 단체 재특회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일본 경제가 다시 살아난다는 망발을 서슴치 않고 짖꺼린다.

누구나 자신의 아픈 과거와 마주할 때는 고통을 겪는다. 그러나, 아픈 과거를 마주할 때, 진실을 직면해야만 우리는 더욱 성장할 수 있다. 일본 극우파는 자신들의 원죄와 마주하기를 거부했다. 미국에 패전을 하고서도 이를 인정하지 않고 '종전'일 뿐이라고 믿는다. 성장통이 무서워 정신적 성장을 포기한 일본인들을 보며, 긴 한숨을 내쉬어 본다.

 

 

시라이 사토시가 100% 객관적인 것은 아니다. 샌프란 시스코 조약에 한국이 초청받지 못한 이유가 일본의 반대였다는 사실을 직면하지 않고, "한국은 전쟁 당시 일본의 일부"였기 때문이라 주장했다. '제국의 위안부'를 쓴 박유하의 글을 인용해서 자신의 주장을 보강하기도 했으며, 미국 행정부가 미국의 공식 입장이 아니라고 확인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러스크 서한을 근거로 독도를 일본 영토로 주장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라이 사토시의 '영속패전론'을 우리가 읽어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책의 엮자 정선태는 '옮긴이 글'에서 "일본 현대사의 구조를 관통하는 핵심이 '영속패전론'이라면 한국 현대사의 그것은 '영속식민지론'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라는 지적 때문이다. 한국에서 일어나는 시위에 성조기와 이스라엘기를 들고 나오는 그들을 보면 '영속 식민지론'에서 벗어나길 거부하는 레밍의 모습이 떠오른다. 한국과 일본의 경제 전쟁이 벌어지는 속에서도 일본 의류를 입어서 응원하자고 말하는 일부 일베들과 일본편에 서서 저자세 외교를 정부에 건의하는 일부 정치인들에게서 '영속 식민지'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리의 일부분을 본다. "우리의 지적인, 그리고 윤리적인 나태를 연로로 삼고"있는 "영속 식민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는 끊임 없이 지적 탐구를 하고, 불의에 대해서는 용기 있게 "아니오"를 외칠 수 있어야한다. 그래야만 전 주한미군 사령관 위컴에게 "우리는 레밍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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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신화와 천황제 이데올로기 - 신화와 역사 사이에서
김후련 지음 / 책세상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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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하면서, 근대 일본 만들기는 시작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은 사실 근대의 창작물인 경우가 많다. 일본을 대표하는 일본 신화와 천황제 이데올로기도 근대의 창작물이었다. 일본 고대와 중세의 작품을 가져다가 근대 민족국가 이데올로기에 알맞도록 다시 창작해낸 '천황제 이데올로기'는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을 합리화했다. 수 많은 일본인들과 동아시아의 수많은 젊은 영혼들이 죽음을 맞이해야하는 비극을 겪었다. '일본 신화와 천황제 이데올로기'라는 책은 일본의 신화가 어떻게 천황제 이데올로기로 새롭게 태어났는가를 깊이 있는 연구로 밝혀냈다. 저자 김후련의 안내를 받아 일본 천황제의 허상을 뜯어보자.

 

1. '무형의 형태', 신도

  일본의 토착 종교는 '신도'이다. 신의 길이라고 풀이할 수 있는 신도는 우리 나라의 무속신앙과는 달리 엄청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무속신앙은 외부에서 들어온 불교와 크리스트교, 유교에 짖눌려 종교이기 보다는 '미신'으로 취급받고 있다. 이에 반해서 '신도'는 아직까지 살아남아 일본인들의 삶에 깊숙히 뿌리 내리고 있다. 합격을 기원하며 신사로 향하기도 하며, 결혼식을 신사에서 하는 일본인도 많다. '살아서는 신도, 죽어서는 불교'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신사의 생명력은 강하다. 그 생명력의 근원은 무엇일까?

 '신유습합'과 '신불 습합'에 있었다. 불교이든 유교이든 신도는 이들 사상을 흡수하여 새롭게 태어났다. 불교가 탁월한 철학적 체계를 가지고 각지역의 토착신앙을 흡수하면서 발전했다면, 이러한 이론적 체계가 없었던 신도는 불교 신앙을 받아들여 '신사'를 만들어냈으며, 외세가 침략할 때는 그들만의 '화이'사상을 만들어냈다. 이것을 '무형의 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무형의 형'의 무서운 힘은 조선을 강제 병합하면서 다시 발휘된다. 조선 총독 고이소 구니아키(1942~1944)는 스사노오노 미코토가 신라에 강림했다는 고대 천황신화를 만든다.

 

  "여기 반도 2,500만의 원민족은 틀림없이 스사노오노미코토의 후손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그렇다고 하면 아마테라스오미카미의 후손인 내지(일본) 민족과 바로 뿌리가 같고 하나라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 아닌가 생각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오늘날 알 수 있는 역사상으로나 그 후로나 피의 혼합이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 그런데 명치 43년(1910)의 성대에 아마테르사오미카미의 후손이신 메이지 천황에 의하여 스사노오의 후손인 조선이 병합된 것은 신대 말기의 신사가 더욱 철저히 완성적으로 다시 되풀이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든다."-42쪽

 

  일본신화에 우리의 단군 신화를 흡수하려하는 조선 총독의 모습에서 그들의 집요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일본의 태양신인 아마테라스의 후손이 세운 일본에 의한 아마테라스의 남동생이 세운 조선 병합을 합리화하려는 그들의 모습은, '무형의 형'으로 새로운 외부의 사상을 흡수하는 신도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아마테라스는 신도의 가장 근본적인 신이다. 일본의 신도는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적혀있는 일본 신화를 호출하여 일본의 조선 점령을 합리화하려했다. 신화는 신대의 필요에 따라서 다시 호출될 수 있다. 그리고 그 힘을 오용한다면 그 폐해는 가공할만한 위력을 발휘한다. 오늘 필요에 따라서 과거를 호출하고, 새롭게 신화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자신들이 만들어낸 신화를 믿으며 침략전쟁을 합리화한다.

  만약, 우리가 일본의 '신화 만들기'에 대항할 문화적 백신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이 성공했다면 어떠했을까? '2009 로스트 메모리즈'라는 영화가 있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처단이 실패로 끝나서,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이 성공한 미래사회를 그린 영화이다. 그러나, 우리는 '2009 로스트 메모리즈'라는 가공의 영화를 호출할 필요가 없다. 민족 말살 정책이 성공한 실제 나라가 있으니까 말이다. 바로 '류큐'국이다. 일본과는 다른 독자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던 '류큐'왕국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 복속된다. 황국신민화 정책이 조선 보다 일찍 시작되었다. 하나의 현으로 일본 영토에 편입된 류큐는 '일본인'으로서 침략전쟁에 참여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차별이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류큐 민간인들은 군부에 의해서 '옥쇄'를 강요받았다. 수많은 일본인들이 천황을 위해서 옥쇄를 했지만, 류큐인이 지키려했던 쇼와 천황은 류큐를 미군기지로 사용하도록 미국에 넘긴다. 이때가 1947년이다. 일본으로부터 버림받은 류큐는 미군 기지로 인해서 발생하는 모순에 고통스러워하며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1972년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지만, 일본사회에서 류큐는 '오키나와'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차별을 받는다. 단일민족이라는 허상을 믿으며, '오키나와인'과 '아이누인'을 차별하는 야마토인에게 류큐인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일본으로부터 차별과 멸시를 받으면서도 일본에 귀속되려는 '류큐인'을 보면서, 일제의 황국 신민화 정책의 위력이 얼마나 큰가를 새삼스레 절감한다. 문화적 백신이 없는 '류큐'인들은 계모에게 학대받으면서도 계모를 친모로 믿고 사랑을 받으려는 어린아이 같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나 뿐일까?

 

2. 일본의 신화 만들기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을 이길 수 있었던 여러 이유중에서, 거짓말을 하고, 그 거짓말을 믿는 능력을 꼽았다.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신과 신화를 만들어 내고, 이를 진실로 믿는다. 이러한 믿음은 엄청난 수의 사피엔스를 하나로 뭉치게 만든다.

  일본은 유발 하라리가 말한 '사피엔스'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민족이다. 일본의 신화 만들기는 고대에서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니 말이다. '일본서기'에는 재미있는 내용이 있다. 천손이 규슈의 휴가에 강림했는데, 천손이 강림한 구지후루타케는 가야국의 수로왕이 강림한 구지봉에 해당한다. 김후련을 비롯한 많은 신화학자들이 지적했듯이, '구지후루'는 '구지'의 발음과 유사하며, '다케'는 구지봉의 '봉'에 해당하기에 일본신화의 천손강림과 가야의 김수로왕 강림신화는 같은 계열의 신화라 할 수 있다. 한반도인이 일본에 건너가 국가를 세웠다는 주장을 할수도 있는 기록이다. 그러나 일본은 이 기록을 외면한다. 일본 신화학자는 그들의 입맞에 맞는 기록만을 선택해서 호출한다. 신공황후의 신라 정벌 이야기에만 관심을 갖는다. 그들 천황가의 뿌리가 한반도 일 수도 있다는 기록은 애써 왜면한다.

  '일본서기'와 '고사기'가 저술되던 시기 그들의 일본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일본은 신화를 다시 정리한다.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동생인 스사노 미코토는 이즈모 전승에 따른다면, 일게 지방신이었다. 절대 황조신 아마테라스의 남동생이 아니었다. 제우스가 바람둥이인 이유가 해당 지역의 토착신과 그 후손들이 제우스와 연결시키려다 보니, 제우스를 바람둥이로 만들 수 밖에 없었다는 연구결과를 떠올린다면, 일본서기를 집필할 당시, 천황가의 일본지배를 합리화하려는 목적에서 신화가 다시 정리되었음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더욱 재미 있는 것은 일본서기 편찬시기 천황가의 일본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정리된 일본 신화가 근대시기에 다시 재해석된다는 것이다. 이른바 '외팔주 사관'이다.

 

  "국토 창조 신화가 중세를 거쳐 근대에 이르면 일본은 세계를 축소해 놓은 것이라는 '외팔주사관'으로 재생산된다. (중략)외팔주사관은 기무라 다카타로가 주장한 것으로 (중략) 고대 세계사의 인명과 지명에 일본의 그것을 조합시켜 유라시아 대륙과 아프리카에 군림하는 거대 국가 일본을 창조해낸 것이다.기무라의 주장에 따르면 태고의 일본은 결코 극동의 작은 섬이 아니었으며, 현재의 일본은 옛날에 세계 전체에 걸쳐 있었던 일본의 지리를 세밀하게 축소해 일본 열도에 투영시킨 것이다."-33쪽

 

  군국주의 시대, 일본의 침략주의를 합리화하려는 목적에서 탄생한 주장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일본은 자신의 필요에 따라서 신화를 다시 정리하고 새롭게 해석해오고 있다. 문제는 이를 진실로 믿는다는 것이다. 일본 천황가가 중요시 여기는 '삼종신기'라는 것이 있다. 천황가가 하늘의 후손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옥과 청동검, 거울을 뜻한다. 그러나, 남북조시기 삼종신기 일부는 사라졌다. 엄밀히 말하면 삼종신기는 중세에 다시 말들어진 것이다. 더욱이 '삼종시기'라는 말은 에도시대까지만 해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삼종신기'는 중세의 신국 사상과 근세의 국학과 미토학, 근대 천황제 국가의 이데올로기로서 끊임 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만들어진 전통'이라는 말이 있다. 전통은 필요에 의해서 근대에 만들어진 산물이다. 만들어진 전통에 의해서, 만들어진 신화에 의해서 인간이 노예가 되어 죽어가는 비극을 우리는 직시해야한다.

 

3. 만들어진 '신화'가 인간을 잡아 먹고...

  SF영화에는 인간이 만든 바이러스 혹은 생명체, AI가 인간을 지배하거나 인간의 생존을 위협한다는 설정이 흔히 있다. 인간이 만든 창조물이 도리어 인간을 해친다는 설정은 SF영화에서만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인간이 만든 '신화'가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 넣는 일이 인류 역사에서는 실제로 발생했으니까 말이다.

  태평양 전쟁 말기, 군국주의 광기에 휩싸인 '카미카제 특공대'를 떠올리며,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이 대단하다고 감탄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카미카제 특공대'가 태어나기 위해서 일본은 중세 시기부터 준비를 했다. 하야시 라잔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타고나지도 않은 부귀와 수명을 바라는 것은 이에 어긋난다. .... 이루어지지도 않은 소원을 꾀하고 이루어지지 않은 희망을 이루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의 소행이다. 그런 자는 돼먹지 못한 일을 생각해내고 도리에 어긋난 일을 행하여 죄를 지음으로써 결국에는 몸을 망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라서는 안 될 도리가 되는 까닭이다."-(삼덕초)1643년 이후-하야시라잔

 

  '바라서는 안될 도리'라는 말은, 각자 자신의 신분에 맞게 행동해야한다는 것이다. 한번도 왕조교체가 일어나지 않은 나라 '일본'은 각자 자신의 신분에서,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려했다. 우리처럼 신분의 굴레를 벗어나서 상승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만세일계'라는 신화는 일본의 안정성을 보여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의 정체된 사회 모습을 보여준다. 하야시 라잔이 말했듯이, 자신의 신분에 벗어나서 '바라서는 안될 도리'를 바라지 않았다.

  근대에는 니토베 이나조에 의해서 '일본의 영혼, 무사도'라는 책이 씌여진다. 서구인들에게 일본을 소개하기 위해서 영어로 씌여진 이 책을 통해서, 일본인들은 새로운 신화를 만든다. 주군의 명령에 목숨을 내놓는 사무라이의 모습을 '무사도'라 포장하고, 생명력이 가득한 '핀사쿠라'의 모습이 아닌, 천황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며 죽음으로 뛰어드는 '지는 사쿠라'로 행동하길 강요받는다. 그리고 수 많은 일본인들을 '지는 사쿠라'가 되도록 강요한다.

  이러한 광기에 미토학의 국체론이 한몫한다. 후지타 도코(1806~1855)는 "세번 죽음을 각오하면 죽지 않는다."라고 시작하는 '회천시사'를 남긴다. 이 시는 막부말기 지사들이 즐겨 낭송했으며, 태평양 전쟁 시기 '회천(가이텐)'이라 불렸던 가미카제 특공대원들에게 전승된다.

  군국주의 광기는 어느날 갑자기 만들어지지 않았다. 군국주의 광기를 만들려는 자들에 의해서 과거의 불행한 유산들이 소환된다. 여기에 시류에 영합하며, 순응하는 일본의 국민성이 더해진다. 여기에 신공화후 신화와 태양신 아마테라스의 신화가 다시 등장하여 침략전쟁에 힘을 불어 넣는다. 국가 통치권의 주체는 국가자체이고 천황은 국가의 최고기관으로서 통치권을 행사할 권능을 갖는 것에 불과하다는 미노베 다쓰기치의 천황기관설 마져도 불경죄로 여겨졌고, 급기야는 우익인사의 통탄을 맞기도 했다. 이것이 일본의 광기에 부레이크를 사라지게 했다. 단테의 '신국론'-지옥편에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는 도덕적 위기의 시기에 중립을 지킨 자들에게 예약되어 있다."  (The hottest places in hell are reserved for those who, in times of great moral crisis, maintain their neutrality).”라는 말을 우리는 되새겨야한다. 수많은 젊은이 들이 사람을 죽이기 위한 전쟁에 내몰렸다. 잘못된 방향으로 돌진하는 일제를 바로잡지 못한 댓가는 일본의 시민과 동아시아의 무고한 시민들의 희생으로 막을 내렸다.

 

4. 광기를 죽이는 방법

  아베내각이 한국에 대한 경제적 침략에 날을 세우고 있다. 아베는 그의 외할아버지인 A급 전범 기시 노부스케가 되고 싶은 지도 모른다. 일본의 광기를 죽이는 방법이 없을까?

  일본의 침략적 망언들을 들을 때 마다, 우리는 정부가 강하게 일본에 대응해주기를 바란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했을 때,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우리 땅 독도에 가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저자 김후련은 이것이 어리석은 행동이었다고 말한다. 왜? 일까? 이명박 전 대통령은 '천황이 한국에 오려면 과거사에 사죄하라'라는 내용의 말을 한적이 있다. 김후련의 지적에 따르면 이는 쇼와 천황과 헤이세이 천황을 구분하지 못하고, 일본의 극우들이 준동할 수 있는 빌미를 주었다고 한다. 즉, 헤이세이 천황은 '천황가의 혈통에 백제 왕가의 피가 흐르고 있어 한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낀다.'고 밝힌 사람이다. 헤이세이 천황을 한국에 초대하고 그로 하여금 서대문 형무소에 참배하게 하는 노련한 외교력을 발휘했다면 한일관계는 지금과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우경화에 반대하는 그를 비난함으로써, 우리의 우군으로 삼을 수 있는 사람을 적군으로 돌리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일본인 모두를 적으로 삼지 않고, 일본의 양심있는 시민과 연대하여 일본사회의 광기를 누그러 뜨릴 수 있는 기회를 놓친 셈이다.

 "NO Japan"운동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중에 하나는, 아베를 중심으로한 일본 극우파를 우리의 적으로 삼고, 일본 시민을 적으로 삼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일본인 모두를 적으로 만드는 과거의 행동방식으로는 일본의 광기를 없앨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성숙된 대처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김후련은 고이즈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시기, 한국과 중국이 반발하자, 야스쿠니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던 일본인들이 야스쿠니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한다. 일본의 망언과 망령된 행동에 우리가 과도하게 대응한다면 결과적으로 일본 극우세력에게 힘이 된다는 주장이다.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이 있다. 우리의 극한 분노가 일본극우를 살찌운다는 역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한국의 언론은 외교의 장과 학문의 장에서 논리적이고 냉철하게 다룰수 있도록 비켜나 있어야 한다." - 51쪽

 

 일본 정치가들의 말령된 행동을 한국인들에게 알리는 것은 언론의 당연한 책무이다. 적절한 시기에 망언을 하고, 이를 통해서 주변국의 반반을 유도하여 일본내의 극우파의 입지를 강화시키는 효과를 얻는 그들을 상대하려면 우리는 그들보다 더욱 성숙해야한다.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논리적이면서도 냉철하게 일본에 대응해야한다. 극도의 자제력이 필요한 장기전에 대비할 준비가 우리는 되어 있는가? 스스로 자문해 본다.

 

 

  헤이안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일본 천황은 일본을 직접다스렸다. 그러나, 막부시대가 개막되면서 천황은 막부의 등살에 기를 펴지 못했다. 특히 에도 막부시기가 되면, 천황은 황궁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다이묘가 직접 천황을 만날 수 없었으며, 정치에는 일체 관여할 수 없었다. 천황의 세력은 날로 약화되어 즉위식 조차 제대로 치룰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마치 가정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이 아내의 친구를 비롯한 주변인과의 관계를 끊어 놓가 고립시키듯이, 막부의 쇼군은 천황을 세상과 단절시켜 놓았다.

  고립된 천황을 다시 세상밖으로 끌어낸 것이 사쓰마번과 죠슈번의 사무라이들이었다. 그들은 천황이라는 신화를 다시 소환하여 동아시아를 전쟁의 광기로 몰아 넣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갓다. 천황제를 지키기 위해서 오키나와에서는 옥같이 부서지라는 '옥쇄'작전이 전개되었다. 오키나와의 히메유리 위령탑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있다.

 

  "우리 본토 일본인이 오키나와에 가면 꼭 히메유리 탑을 찾아 머리를 조아리는 까닭은 오키나와가 본토를 위해 산화해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전쟁 피해의 궁국적인 모습을 거기서 발견하기 때문이다. (중략) 전쟁을 겪은 세대에게 그것은 자신의 '무죄증명'이며 용서의 장소이고 감미롭고 감상적인 장소, 이제는 평화의 눈물을 흘리 수 있는 장소이다."-418쪽

 

  전형적인 유체이탈 화법이다. 천황제의 광기 속에서 자신들이 저지른 침략전쟁으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반성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피해자로 볼 뿐, 가해자로 직시하지 않는다. 그래서 김후련은 강연이 끝날 때마다.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일본은 단 한번이라도 좋으니 진심으로 과거사를 직시하며 자기 자신에 대해 성찰하고, 한국은 단 한번이라도 좋으니 의연하게 과거사를 털어내고 한일의 미래를 향해 일보 앞으로 전진하기 바란다."-552쪽

 

 

 김후련의 말에 이제 우리가 답할 차례이다. 김후련의 말이 오늘날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후련하게 해결할 수 있는 해법을 제시해주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해결의 첫걸음을 내딛을 수 있게 해주기 때문기에 우리는 그녀의 말에 귀기울여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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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누아 2020-06-07 17: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후련의 말을 다시 읽어봅니다. 아쉽게도 의연함과 냉정함을 요구하는 이들이 불매운동을 자제력 없는 감정 대응으로 치부하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강나루 2020-06-07 17:45   좋아요 1 | URL
냉정과 열정 사이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네요
암튼 노재펜은 냉정하고도 의연한 대처였어요
 
일본사의 변혁기를 본다 - 사회인식과 사상
김용덕 / 지식산업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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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이 역사를 추동하는 것일까? 역사가 사상을 낳은 것일까?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라는 고루한 질문 같지만, 역사와 사상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사상이 역사가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제공하기도하고, 때로는 시대적 필요속에서 새로운 사상이 등장하기도한다. 이를 일본사에서 찾아보고 싶었다. 그래서 '일본사의 변혁기를 본다.'를 꺼내들었다.

 

1. 역사가 사상을 낳다.

급격한 역사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현실을 정당화 시킬 수 있는 사상을 필요로한다. 일본사에서도 이러한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첫째, 조큐의 난 이후의 사상의 변화이다. 무사정권이 일본 덴노 정권을 무력으로 제압한 조큐의 난 이후, 기존의 하늘의 자손이 군주가 된다는 신손위군설을 대체할 사상이 필요했다. 무사정권은 유교의 덕치 사상으로 자신을 합리화한다. 즉, 천황가를 떠받치던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와 하치만신의 백왕수호에 대한 의구심은 군왕이 덕이 없으며 하늘이 그를 폐할 수 있다는 덕치 사상과 쓰루카오카 하치만이 무가정권의 수호신으로 부상한다. 사상이 현실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호출된 사건이다.

두번째는 무로마치 시대에서 전국시대에 '도리'와 '천도'를 강조한 사례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극상의 시대! 무사들은 하극상을 예방하거나, 자신의 하극상을 정당화하기 위한 사상을 필요로했다. 무사들은 '도리'와 '천도'라는 유교적 정치 사상을 호출한다. 특히 오다노부나가는 '천하'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어국의식'과 다른 자신만의 의식을 드러냈다. 오다노부나가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새로운 단어를 호출했다.

셋째, 막부말기 부터 메이지 유신시기에 있었던 '정한론'이다. 쓰시마주 개항을 둘러싸고 막부의 원조를 받아내기 위해서 조선 정벌론이 대두되었고, 이후, 메이지 정부에서 나약한 조선을 정벌하자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외부의 커다란 충격이 가해지자, 이를 조선 정벌을 통해서 내부의 문제를 숨기고 단결을 강화시키고자하는 그들의 의도가 섬득하다. 그렇다면, 지금은 다를까? 후쿠시마 핵사고 이후, 일본은 급속히 쇄락하고 있다. 이러한 내부의 문제를 숨기기 위해서 일본의 아베정권은 경제전쟁을 벌이고 있다. 역사는 반복되기도 한다.

  인간은 합리적 존재이기 보다는 합리화하는 존재라한다. 이상 살펴본 세번의 사례는 일본인들이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새로운 사상을 만들거나 기존의 사상을 호출한 사례이다. 이렇게 만들어지거나 호출된 사상이 이후의 역사에 불행한 영향을 미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2. 사상이 역사를 이끌다.

위대한 사상이 새시대를 열기도한다. 독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가 말한 '축의 시대(BC 800~AD200, Achsenzeit)에 새로운 사상과 철학이 중국, 인도, 그리스, 페르시아에 등장했다. 그리고 이 시기 발생한 사상은 이후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일본에도 이러한 사례가 있다.

  첫째, 메이로쿠샤를 중심으로한 일본 지식인들의 치열한 논쟁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를 비롯한 일본의 쟁쟁한 지식인들이 '서양인의 국내 여행'문제를 비롯해서 '대의기관 수용'문제와 같은 심도 깊은 문제에 대한 논쟁을 했다. 일본이 근대화를 성공시킬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는 지식인들이 치열한 논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길을 가야할 변혁의 시기에 일본이 나아가야할 새로운 길을 제시했던 이들이 있었기에 일본의 근대화는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두번째 사례는 "수양"이라는 책의 저자 니토베 이나조이다. 니토베 이나조는 "무사도"라는 책을 저술해서 서양에 일본도 서양의 "기사도"에 필적할 만한 나름의 일본정신이 있다는 주장을 한 사람이다. 메이지 유신의 급성장 시기를 지나서, 청일 전쟁과 러일전쟁 이후, 서양학문을 배운다는 것이 미래를 보장하지 못하게 된다. 이때, 청년들에게 다양한 글을 통해서 새로운 위안을 준이가 바로 이토베 이나조 이다. 마치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저술한 김난도 교수와 같은 일을 니토베 이나조가 한다. 니토베 이나조가 말한 수양의 한계를 살펴보자.

 

  "계속 노력하였음에도 끝까지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는 어찌할 것인가? 여기서 수단과 목적의 전이가 생긴다. 수양의 목적은 '공명과 부귀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의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역경에 빠지더라도 일상생활에 완벽을 추구하며 그 속에 행복을 느끼며 감사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라는 것이 바로 니토베 수양론의 핵심이었다. 급속한 계층상승이 더 이상 불가능한 사회에서, 청년들이 사회적 불만세력을 형성하지 않도록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 의미를 찾으며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도록 도움을 주는 논리, 사회의 문제를 '남들에게 인정받지 못하여도 분노하지 않는 마음'이라는 내면의 문제로 바꾸는 논리, 그것이 체제의 안전장치로서 니토베 수양론의 역할이었다."-276쪽

 

 니토베 이나조의 '남들에게 인정받지 못하여도 분노하지 않는 마음'은 공자가 말한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라는 말과 정확히 일치한다. 열심히 현실 권력에 등용되길 바랬던 공자가 말년에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을 향해서 스스로 던진 위안의 말이다. 사람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화내지 않는다면 역시 군자가 아니겠는가?라는 말은 더이상 계층 상승을 할 수 없는 일본의 상황에서 현실에 만족하라는 니토베 이나조의 말과 상통한다. 공자의 말은 이후, 수많은 군자들을 만들었다. 그러나 니토베 이나조의 말은 현실에 만족하며 잘못된 현실정치에 분노하지 않고 사회혁명을 일으키지 못하는 식물청년들을 양산해냈다. 그렇게 일본의 정치발전 가능성은 니토베 이나조 시기부터 사라지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사상은 현실을 정당화 시키기 위해서 호출되지만, 호출된 사상은 새로운 시대를 만든다. 메이지 유신 시기 근대화된 일본을 만든 지식인들은, 이후 자민당 일당지배 시스템을 만들드는데 일조했다.  한시기의 성공이 이후 시기의 성공을 담보하지 못했다.

 

3. 일본을 발견하다.

일본을 모르는 사람은 일본을 쉽게 무시한다. 일본사를 살펴보면, 일본의 모습에 놀라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며 일본을 모르는 우리가 놀라는 일본의 모습을 살펴보자.

  첫째, 일본 고대 역로의 모습이 놀랍다. 일본 고대 역로는 최소 9m, 최대 20m라는 넓은 폭을 가지 도록였다. 산을 깎고 계곡을 메우면서 직선으로 개설된 도로였다. 일본 고대를 낮추어 보았던 나에게, 율령지배가 세밀히 갖춰진 일본의 모습은 충격적이다. 우리 고대에는 이러한 역로를 가지고 있었는가? 세밀한 발굴을 통해서 삼국시대 역로의 모습이 드러나길 기대한다.

  둘째, 일본의 존왕양이론, 주전론의 진실이다. 우리의 위정척사파 처럼 일본의 존왕양이론자들도 일본과의 통상을 적극적으로 반대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그러했다. 그러나, 일본의 주전론, 양이론을 주장하는 이들조차도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전략적 주장일뿐 시대 변화를 파악하지 못한 못난 주장을 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시대변화를 읽고 있었다. 대표적인 양이론자인 도쿠가와 나리아키역시 전쟁을 주장하거나 화친을 선택지에서 배제시키지 않았다. 그는 무모한 주전론자라기 보다는 전략적인 외교가이자 술책자였다.

  서양세력을 막을 구체적 방법 없이 무모한 개항반대, 개화반대를 주장했던 우리의 위정척사파와 다른 일본인들의 대처는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그것은 '손자병법'을 신봉하는 무사와 주자학에 경도된 유학자의 차이가 아닐까? 현실을 냉철히 파악한 위해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모색한 일본의 사무라이와 실리보다는 명분을 중시여기는 조선의 유학자의 차이가 서양 제국주의자의 충격에 너무도 다른 대처를 했다.

  셋째, 다이쇼 데모크라시시기 '모성보호논쟁'이다. 좋은 집안의 라이초와 기쿠에를 비롯해서, 빈농출신으로  해외 배춘부로 팔려갔다가 탈출하여 남편에게서 글을 배운 야마다 와카가 "주부지우"라는 잡지에 자신의 주장을 치열하게 전개했다. 마치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의 한국의 모습을 보는듯했다. 물론, 우리의 6월 민주항쟁이 민주주의의 진보로 이어졌다면, 일본의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1930년대 군부 집권으로 싹이 잘려나간다. 그러하더라도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 벌어진 '모성보호논쟁'의 치열함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그것은 이 역사가 일본 여성운동의 자신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상은 시대와 소통하며 발전한다. 시대를 떠난 사상이 없듯이, 사상 없는 시대도 존재할 수 없다. 역사의 고비고비마다 치열히 사상과 역사가 호흡했다. 역사가 사상을 호출하기도하지만, 사상이 새로운 시대를 호출하기도한다. 그렇다면, 우리시대에 우리는 어떠한 사상을 호출하여 새로운 시대를 만들것인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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