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쿠치 겐조, 한국사를 유린하다 - 을미사변에 가담한 낭인에서 식민사학의 선봉장으로
하지연 지음 / 서해문집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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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쿠치 겐조'!! 들어본 기억이 없는 인물이다. 그런데, 그는 명성황후를 죽인 범인중에 한인물이며, 이후 왜곡된 근현대의 역사관을 만든 아마추어 식민사학자였다. 한국 고대사가 일제에 의해서 많이 왜곡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우리의 근대사가 왜곡된 것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과연! 기쿠치 겐조는 우리 역사를 어떻게 왜곡했을까?

 

1. 명성황후를 모독하다!!

  명성황후(明成皇后)는 그 호칭부터 논란이다!! 그녀를 어떻게 불러야할까? 한때 '민비'라고 불렀다가 친일파로 몰리는 상황이 맹렬했는데, 이제는 교과서에도 '민비'라고 당당히(?) 쓰고 있다. 이 책은 이점부터 지적하고 들어간다. 왕비가 살아있을 때는 '중전' 혹은 '곤전'으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예를 든다면 정희왕후 윤씨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민비'라는 용어처럼 성씨에 왕비를 뜻하는 '비'자를 붙여부르는 것은 일본식의 표현이다. '매천야록'에 '민왕후, '중전민씨'라는 용어를 사용하듯이, '민비'라는 용어는 자제해야한다. '명성황후'라는 용어를 사용하자는 주장도 있으나, 이는 추증한 것으로 그녀가 왕비로 살아있을 때 사용하는 역사용어로는 부적합하다는 의견도 있다. 그래서 '명성왕후'라고 적기도한다. 그러나 이때는 숙종의 어머니이자, 현종의 비인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와 혼란을 일으킬 수 있기에, '명성왕후(明成王后)'라고 한자를 병기하해야할 것이다. 이러한 이책의 내용은 '민비'라는 용어가 과연 적당한지에 대해서 끊임없는 논란이 벌어지는 현실에서 참으로 명쾌한 현답이다.(9P)

  명성황후에 대한 또다른 논란은 '에조 보고서'의 '국부검사'라는 부분을 두고 어떻게 해석하는가이다. 김진명이라는 소설가는 이 부분을 근거로 일제는 명성황후를 '시간' 즉, 시체를 강간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를 두둔하는 역사학자도 있다. 이를 두고 나도 큰 충격을 받았다. 과연 명성황후는 시간을 당했을까? 이에 반대하는 역사학자도 있다. 당시 5시 30분에서 6시 사이에 시해를 당했기 때문에 동이 트고 있었기에 시간이 매우 촉박했다. 또한 '국불 검사'는 그녀가 너무 젊어 보였기에 과연 명성황후인지를 확인해보기 위해서 아랫도리를 벗겼다고 설명한다. 아랫도리를 벗기면 그녀가 명성황후인지 알수 있었을까? 출산여부를 확인하려 벗겼다는 것이다. 출산의 흔적을 찾는다면 그녀가 명성황후라 장담할 수있다는 주장이다. 이책의 저자는 여기에 당시 회고록과 증언에 시간을 했다는 주장은 없으며, 이시즈카 에조는 을미사변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고 풍문을 듣고 이 보고서를 작성했다는 점을 추가했다. 그러면서 '심지어 한국 학자들조차 일본의 차담한 왕후 살해의 본질을 망각하고 그 죽음을 이야깃거리로 희화화하는 것 같아서 불쾌하고 안타깝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과연 '시간'은 없었던 일일까? 이시즈카 에조가 을미사변에 참가했다면 오히려 이 '시간'사건을 밝히는 것을 부끄러워하며 숨겼을 것이다. 일본인이 그가 이 사건에 참여하지 않았기에 그 진실을 보고서에 담을 수 있었던 것은아닐까?

  구시다 신사에는 명문이 적힌 칼이있다. 일순전광자노호(一瞬電光刺老狐) 즉, 일순간에 전광석화처럼 늙은 여우를 찔렀다는 명문이다. 어떤이는 일본 신사에 이칼을 바친 것은, 가쓰아키가 자신의 일을 후회하며 참회하는 마음으로 바쳤다고 주장한다. 이는 털끝만큼도 진실이 아니다. 일본 낭인들은 추호도 반성하지 않았다. 본국에 송환되면서도 후회하지 않았으며 자신들의 일을 '애국'이라고 강변했다. 더욱이 기쿠치 겐조는 자신들의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왜곡된 역사서를 써서 이를 유포하지 않았는가?

  낭인들은 명성황후의 몸만 도륙한 것이 아니다. 그녀가 죽자 그녀의 영혼도 도륙했다. 특히 이책의 주인공인 기쿠치 겐조는 '조선 왕국', '대원군전' 등의 많은 역사책을 써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했다. 그가 을미사변의 참가자였기에, 아마추어 역사가의 소설은 역사로 쉽게 둔갑했다. 명성황후를 권력욕의 화신으로 묘사하고 미신과 무당의 정치를 한 희대의 악녀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유산은 지금도 계속 살아있다.

 

2. 흥선 대원군을 범인으로 매도하다.

  명성황후 시해에 대원군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는가를 역사선생님들과 토론했었던 적이 있다. 나보다 경력이 많은 선생님이 강력하게 일본낭인과 대원군이 같이 들어갔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흥선대원군도 공범이라 주장했다. 나는 그것이 일제 식민사관이라고 주장했다.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의 대립 속에서 벌어진 일로 일제는 흥선대원군을 도와주었을 뿐이라는 주장은 일본의 만행을 숨겨주는 주장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후 내가 노스차이나 헤롤드지의 내용을 근거로 나의 주장이 옳음을 주장했다. 그 선생님은 결국 나의 주장에 굴복했지만, 그 후에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을 식민사학에 젖어있다고 비난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여튼,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대립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이 사이에서 일본이 대원군을 도와주었다는 주장은 이 책에서 기쿠치 겐조가 '대원군전'에서 강력하게 주장한 내용이었음이 적혀있었다. 나의 주장에 근거가 보강된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흥선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대립은 지금의 사극에서도 단골로 사용하는 극적장치다. 일제의 식민사관을 극복하는 일은 너무도 멀다. 픽션 '대원군전'을 사극이라는 픽션이 재생산하고 있는 현실이 슬프기만하다.

  기쿠치 겐조의 '대원군전'은 기초적 사실도 틀리고 역사왜곡의 강도도 심하다. 이 책에 소개되어있는 일부내용을 적어보자.

 

  왕비는 일본에 수신사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대원군은 일본과의 수교에 격분해 양주에서 덕산으로 갔고, 다시 석파 산장으로 돌아와 번민의 나날을 보냈다. 그는 울분 끝에 폭약이 장치된 선물함을 민승호 집으로 보내 민승호 부자를 살해했다.

 

민승호 일가의 폭사사건은 1874년 11월 28일에 일어났는데, 기쿠치는 이 사건이 강화도 조약(1876년)에 격분해서 대원군이 일으켰다고 서술하고 있다. 기초적인 사실관계도 엉망이다. 이러한 책이 식민사관을 확대재생산하는 근원이었다.

  대원군은 경복궁으로 끌려가면서 명성황후 시해 계획을 몰랐을까? 그것은 모른다. 그가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나 일제가 대원군을 그 현장에 끌고 왔으며, 그를 명성황후 시해 주범으로 몰아버리려 계획했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것이 진실이다.

 

3. '나무 인형이 된 무능한 고종'을 만들다.

  기쿠치 겐조는 고종을 어려서는 흥선 대원군의 호통소리에 기를 못펴다가, 성인이 되어서는 아내의 등쌀에 기를 펴지 못했다고 묘사하고 있다. 우리가 보통 임오군란시기 명성황후가 청나라 군대를 요청했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청병요청을 명성황후가 할 수는 없었다. 명성황후 '피란일지'를 보면 그녀는 몸이 아파서 자신의 몸을 돌보기도 힘들었다. 그렇다고 고종이 요청한 것도 아니다. 청의 필요에 의해서 파병된 것이다. 고종과 명성황후가 내부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서 왜세를 끌여들였다는 주장은 기쿠치 겐조가 '대원군 전'에서 주장한 내용이다. 식민사학의 뿌리가 이렇게 깊었다.

  무능한 왕궁의 나무인형 '고종'!! 이라는 기쿠치 겐조의 묘사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그려져있다. 기쿠치 겐조의 위력이 오늘날에도 맹위를 떨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고종', '명성황후', '흥선 대원군'의 진모습을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든다. 이태진 교수의 '고종시대의 재평가'를 100% 받아들이는 것이 식민사학을 극복하는 길일까? 대한제국의 멸망에 그들은 일말의 책임이 없었을까? 일제 식민사학을 극복하자는 대원칙에는 동조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에게 면죄부를 줄수는 없다는 생각이 밀려온다. 기쿠치 겐조가 픽션에 넌픽션을 가미해 역사를 서술했기에 픽션과 넌픽션을 구분하기가 힘들다. 그리고 이것은 사극을 통해서 확대 재생산되었기에 나의 머리를 더욱 혼란스럽게 한다. 그 진실을 찾는 일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같다.

 

4. 잡상

  503호 국정논단 사건으로 한때 '진령군과 명성황후'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들 회자되었다. 그 진령군을 괴대 확대해서 명성황후를 무당을 믿는 혼군으로 묘사한 것이 기쿠치 겐조였다. 하지만,  '매천야록'에도 진령군과 명성황후에 대한 소개가 있는데 이는 기쿠치 겐조의 글과 일면 비슷하다. 그렇다면 기쿠치 겐조는 당시의 풍문에다가 자신의 상상력을 더해서 '진령군과 명성황후' 이야기를 만들어 내지 않았을까? 무당을 궁궐에 끌여들이고 무당이 힘을 발휘한 것을 긍정적으로 볼 수는 없다. 기쿠치 겐조의 주장을 무조건 무시할수도 없다. 저자 하지연은 '진령군과 명성황후'에 대해서도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분명히 밝혀 주었어야했다. 단지 과당되게 서술했다는 식으로 얼버무리면 나와같이 혼란한 사람이 더 늘어날 것이다.

   기쿠치 겐조는 '악정의 책임이 경상도에 있으며, 전라도는 폭도의 고장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를 읽으면서 지금의 지역감정의 원형을 보는듯하다. 현대에 독재정권들이 표를 많이 받기 위해서 조장한 지역감정의 뿌리가 일제 식민사학에 있었다는 생각이든다. 일제 강점기 훈도였던자가 정치인이되어 이를 확대 한 측면은 없었을까?

 

  이 책은 논문을 대중서로 풀어 놓은 책이다. 책을 읽으면서도 잘 읽히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이 때 다산선생의 글쓰기 방법이 생각났다 다양한 예화를 들어 실감나게 서술하는 방법! 그러나 하지연은 이 방법을 유려하게 사용하지 못했다. 딱딱한 글쓰기에 익숙해서 대중적인 글쓰기를 잘해내지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을미사변과 왜곡된 근대사를 바로 보려는 사람에게는 좋은 지침서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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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불온열전 - 미친 생각이 뱃속에서 나온다
정병욱 지음 / 역사비평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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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온열전' 제목이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그 제목을 보고 독립운동을 소재로 삼은 책으로 알았다. 그러나 이 책은 식민지를 살았던 용기있는 소시민들의 고뇌를 담고 있는 책이었다. 경성유학생 강상규, 자소작농 김영배, 신설리패, 학생 김창환 이들에 대한 짧고도 심도있는 해부가 서술되어있다. 일제강점기를 배우면서 과연 일제 강점기를 살았던 조선인들은 이 시기에 어떠한 생각을 했으며, 일제의 식민지배는 구체적으로 어떠했는지 알고 싶었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의문에 약간의 실마리를 제공해주었다.

 

1. 강상규의 모습에서 나의 모습을 발견하다.

  강상규는 독립운동을 열망한 모범생이다. 그리고 시골에서 경성으로 유학온 엘리트다. 남들이 보면 너무도 모범적인 학생이 '불온'을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외부에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책들을 읽으며 '독립'의 꿈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구체적인 독립운동의 계획까지 세웠다. 주어진 현실에 순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생각은 나와 비슷했다. 가난한 시골농가에서 자란 나도, 정의가 살아 숨쉬는 세상을 꿈꾸었다. 물론 강상규 처럼 구체적인 준비를 하진 못했다. 나의 머럿속에 몽상으로 끝났다. 이것이 그와 나와의 차이점일 것이다. 식민지 농촌의 고달푼 삶을 보아오면서 식민지의 모순을 목도하고 이를 변혁하려는 강상규! 그러나 그의 이러한 노력도 일제에 의해서 발각되면서 끝이난다. 그리고 그의 꿈은 광복으로 실현되었으나, 그는 해방공간의 혼동 속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49년 이후 그와 관련된 흔적은 사라진다. 보도연맹에 연루되어 학살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2. 마을로간 일제강점기

  자소작농 김영배는 사진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멋쟁이이다. 그리고 재담꾼이다. 그러한 그가 투서에 의해서 시국사범으로 몰렸다. 불온한 사람으로 찍힌 김영배! 그가 갑자기 항일 투사로 변하게 된 것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불평조차도 용서되지 않던 시기이기에 한장의 투서가 졸지에 그를 항일 투사로 만들었다. 그러나 마을의 권력관계 속에서 그는 저항했고 이를 불쾌하게 생각했던 마을의 기존 권력자가 투서를 던진 것으로 추측된다. 단순한 이념으로 한시대를 설명하려는 너무도 쉬운 방법을 벗어던지고, 당시 사람들의 삶속으로 들어가 과연 그러했는가를 따져보는 연구가 돋보였다. 그리고 광복이 되었다. 김영배는 어떠했을까? 그도 좌익활동을 하다가 흔적없이 사라졌다.

 

3. 만보산 사건을 새롭게 해석하다.

  만보산 사건과 그로 인해서 발생한 한중간의 갈등을 기존에는 일제의 조직적인 민족 이간책으로 보았다. 한홍구는 이를 인정하면서도 왜곡된 민족주의가 사건을 키웠다고 보았다. 그런데 정병욱은 왕십리와 신설리를 중심으로 중국인 쿨리와 조선인 소작농간의 갈등을 중심으로 새롭게 이 사건을 보았다. 중국인 쿨리와 조선인 소작농은 일제 강점기라는 식민지 모순 속에서 생존을 위협받고 있었다. 상위 1%의 갑들이 99%의 을을 통제하는 방법은 을끼리 단결하지 못하고 대립하도록 하는 것이다. 중국인 쿨리와 조선인 소작농들의 대립은 일제의 식민지배의 소산이었고 결국 만보산 사건이 불에 기름을 부은 효과를 만들었다. 이 불행한 사건은 일제 식민지배의 모순을 여실히 보여준다.

 

4. 김창환, 낙서로 치안유지법에 걸려들다.

  꿈많은 어린시절! 낙서를 하고 허풍도 떨 수 있는 시기에 그들은 일본인 교장에 대한 저항을 담아 낙서를 했다. 그리고 이로 인해서 그의 선생님 홍순창과 그의 친구들을 고생을 해야했다. 낙서 조차도 허용이 되지 않는 엄혹한 시기가 바로 이시기였다. 인간으로 살기를 거부하고 노예로, 짐승으로 살도록 강요받던 시기였다. 비이성적인 파시즘의 시대를 보노라면, 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씀쓸한 신물이 올라오기도 한다. 그리고 광복이 되었다. 김창환도 반공자치대원으로 활동하다가 빨치산대에 의해서 학살되었다.

 

  광복이라는 현실은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일제 강점기라는 엄혹한 시기를 살아온 사람들은 희망찬 미래를 꿈꾸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은 광복이후 얼마 살지 못하고 이념의 구렁텅이에서 죽음을 당해야했다. 어떤이는 좌익활동을 하다가, 어떤이는 반공활동을 하다가 죽었다. 부르스 커밍스가 6.25를 일제강점기에 끓어오른 압력 솥이 폭발한 사건으로 보았듯이, 일제강점기에 쌓인 모순은 결국 6.25로 폭발하여 암흑기를 살았던 사람들의 목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나는 상념에 잠긴다. 이러한 우리 현대사의 굴곡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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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 평전
김희곤 지음 / 푸른역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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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육사!! 남성적인 항일시를 쓴 사나이!

윤동주와 함께  우리에게 아름다운 항일시를 남겨준 시인이다. 고등학교시절 그의 시를 감상하며 감명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이육사의 삶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가 노래한 시 몇편과 조선혁명정치간부학교를 다녔다는 단편적인 일화뿐이었다. 윤동주 평전을 읽고 이육사 평전을 읽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의 삶에 대해서 정확한 사실들을 알고 싶어 역사학자 김희곤이 쓴 '이육사 평전'을 빼들었다. 그러나 이 책은 나의 기대를 만족시켜 주지 못했다.

 

 이육사에 대한 다양한 일화와 생생한 증언들로 채워져있기를 기대했지만, 이 책은 이육사의 삶에 대한 수 많은 의문점들을 과제로 알려주었을 뿐이다. 한편으로는 민족시인의 삶이 이렇게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도 비극적이기도 했다. 친일파가 권력을 잡고 친일 시인이 광보후에도 활개치며 거리를 활보하는 세상에서 저항시인의 삶이 제대로 규명되기를 바란 것은 사치였을까? 이육사의 삶이 수수께끼로 남아있다는 것은 우리역사의 비극을 단적으로 알려주는 척도였다.

  강한 남성적인 시를 남긴 이육사는 과묵한 선비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권총 명사수이기도 했다. 조선혁명정치간부학교를 졸업하고 처남 안병천이 일제에 자수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항일전선에서 잠쉬 물러날 수밖에 없었으나, 다시 베이징으로가 항일전선에 가담했다. 모친과 맏형 소상에 참여하러 귀국했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베이징주재 일본총영사관 경찰에 구금되어 폐병과 고문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가 베이징에서 한 구체적인 항일투쟁의 전말을 알 수 없어 무척이나 아쉽다. 그의 삶은 바로 규명하는 것은 삐뚫어진 우리역사를 바로잡는 길이고도하다는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다.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이육사에 대해서 이정도의 기록과 평전이라도 남아 있어 무척다행이라는 생각이든다. 앞으로 이육사의 남은 시와 밝혀지지 않은 항일 전력들이 쏟아져나오길 기대해본다. 육사가 노래했듯이, 천고의 뒤에 백마타고오는 초인! 이육사의 생생한 삶의 기록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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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딸, 총을 들다 - 대갓집 마님에서 신여성까지, 일제와 맞서 싸운 24인의 여성 독립운동가 이야기
정운현 지음 / 인문서원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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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얼마나 알고 있었는가? 라는 질문에 다섯 손가락을 꼽고 나면 더이상의 여성 독립운동가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러던 차에 '조선의 딸, 총을 들다'라는 책을 보게 되었다.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독립운동가의 삶을 확인하고 싶었다.

 

1. 다양한 분야의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만나다.

  이 책에 소개된 여성 운동가들의 활동모습은 너무도 다양했다.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활동은 나의 상상 이상이었다. 유관순처럼 옥중에서도 만세를 부른 동풍신, 안중근 처럼 왜놈을 총으로 쏘려했던 남자현, 고문으로 두 눈 먼 '대갓집 안주인'김락, 심지어는 33살 임산부의 몸으로 일제의 품에 폭탄을 안긴 안경신까지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활약한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활약은 너무도 눈부셨다. 여자이기에 남자 보다 빛나는 활약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깨고 그녀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활동을 보여주었다.

 

2. 가지수는 많지만, 맛만본 음식.

  이 책의 장점은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다양한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발굴하여 대중에게 알렸다는 점이다. 이것이 이책의 장점이다. 그러나, 이 책에도 아쉬운 점이 있다. 24명의 여성 독립운동가를 선별하고 이들을 280여 페이지에 담다보니, 한인물의 삶을 구체적으로 알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대갓집 안주인 김락을 읽었을 때의 느낌은 좀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이상 김락의 사람냄새가 느껴지지 않았다.김락의 인간적인 풍모, 일화, 글 등을 통해서 그녀에 대해서 더 알고 싶었지만, 가지수는 많지만, 배부르게 먹을 수는 없는 마트의 간식코너를 돌아본 느낌이었다. 이정도의 인물을 한권의 책으로 묶으려면 적어도 400페이지는 되어야 한 인물에 대해서 사람냄새 나는 책이되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든다.

 

  친일의 역사를 기록하던 정운현 작가가 드디어 독립운동가의 역사를 정리하였다. 그 결실이 이 책이다. 이 책에서 내가 느낀 아쉬움은 다른 평전들을 통해서 해소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땅의 여성 운동가들의 삶은 가벼운 마음으로 살펴보기를 원하는 독자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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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과 젊은 그들의 모험 - 조선 엘리트 파워
안승일 지음 / 연암서가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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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 김홍집!

이들의 이름을 들으면, 복잡한 생각이 교차한다. 영웅으로 보기에는 모자라고, 소인배로 보기에는 그들이 우리역사에 남긴 족적이 너무도 컸다. 그들을 어떻게 평가해야할까? 이들에 대한 기존에 가지고 있던 나의 평가는 부정적인 것이 약간 기울여져 있었다. 특히 외세를 끌여들여 개혁을 하려했다는 점에서 그들의 의도가 아무리 고귀했더라도 절대! 그들을 영웅으로 평가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해서 내가 얼마나 알고 있는가를 다시한번 생각해보며, 이들에 대해서 더 알고 싶은 욕구가 치솟았다. 그래서 이 책을 빼들었다.

 

김옥균! 그의 묘지명에는 이렇게 씌여있다.

"오호라 비상한 재주를 타고나

비상한 시대를 만났으며

비상한 공적을 이루지 못하고

비상한 죽음을 맞이하였으니..."

 

유길준이 지은 이 비문은 김옥균의 삶을 너무도 잘 표현하고 있다. 김옥균! 그는 시대가 낳은 천재였다. 그리고 노론 명문가의 아들이다. 그가 원했다면 시대의 안락에 취하여 수구파와 손잡고 세월을 달관하며 편안히 살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조국의 미래를 위해서 젊은 친구들과 혁명을 준비했다. 화려하게 불꽃을 태웠고, 그 불꽃이 3일을 가지 못하자, 일본으로 망명하여 다시한번 찬란한 불꽃을 피워보려 몸부림쳤다. 그러다 한중일 삼국의 모살로 상하이에서 비운에 가게된다.

그가 고종에게 올린 상소문을 읽어보면, 빨리 근대화를 이루지 않는다면 국가의 패망이 있음을 깨우치려는 강렬한 열망이 느껴진다. 그러나 시대를 내다보고, 혁명에 버금가는 대 개혁을 해야하는 시기에 이를 놓치고, 기존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우유부단한 고종은 그의 상소문에 미동도하지 않는다. 고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만약이라는 단서를 붙어 그가 조선 전기, 혹은 중기의 왕이라면 그정도 통치했다면 중간정도는 갔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시대에 속박된 존재이다. 시대와 인물을 떨어져 놓고 평가할 수 없다. 고종은 우리 조선의 운명이 누란의 형세인 시기에 조선의 왕이었다. 일본의 메이지와 동갑네기이고, 메이지보다 먼저 왕이되었으나, 메이지의 나라 일본에게 고종은 자신의 나라 대한제국을 빼앗겼다. 고종을 긍정적으로 볼 수 없는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고종을 긍정적으로 볼 수 없다면, 김옥균은 어떻게 봐야할까? 그의 치밀하지 못한 거사계획과 갑신정변 실패로 인한 열강의 조선 침략가속화를 어떻게 평가해야할까? 갑신정변의 긍정 부정적평가이전에 김옥균을 바라보고 싶다. 그는 노론 명문가의 아들이다. 보장된 미래를 버리고 자신의 재능과 지위를 걸고 조국을 위해서 도박을 했다. 헬조선이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들리는 요즘! 지금의 젊은이들은 과연 김옥균과 같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자신의 열정을 화려하게 불사를 수 있는가? 혹시, 건물주가 되기를 꿈꾸지는 않는가? 아니면 안정된 공무원이 되려고 자신의 재능, 흥미, 적성을 무시고 공부만하지 않는가? 윗사람의 말을 잘듣기만하고, 자신의 주장은 하지 못하는 소위 '착한 학생'이지는 않는가? 철없는 어른이 잘못하면 호되게 그들을 꾸짓을 용기가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 나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나의 열정과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 기득권과 맞서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다! 라고 자신있게 소리칠 수있는 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라는 시가 떠오른다.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김옥균은 3일 뿐이지만 자신의 열정을 빨갛게 태워 조국을 데우려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이러한 모습은 김홍집이 비장한 어조로 일본으로 가는 것을 뿌리치며 한 마지막말이 나의 귀에 쟁쟁하게 들린다. "나는 조선의 총리대신이오. 내가 조선인을 위해 죽는 것은 천명일 것이오. 다른 나라 사람의 손에 구출되는 것은 오히려 떳떳치 못한 일이오" 심장을 고동치게하는 이 말을 남기고 고종을 만나러 러시아 공사관으로 향했다가 경무청 안환에게 체포되어 참형을 당하고 성난 민중들에 의해서 그의 시체는 갈기갈기 찢긴다.

  일제의 강요이지만 이를 통해서라도 근대화를 이루어 자주독립군가를 지킬 수 있다면 치욕을 씻을 수 있다고 생각한 유길준과 그는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개혁을 추진해서 하루빨리 근대국가를 건설해야하는 시기에 나이 많은 수구파와 우유부단한 고종을 달래며 개혁을 추진하려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진 개화파!! 헬조선을 외치며 한국을 떠나겠다고 푸념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당신은 이들 개화파 처럼 대한민국을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개혁하려하지 않고 왜? 떠나려하는가? 당신은 연탄재만도 못한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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