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산과 의열단 - 김원봉의 항일 투쟁 암살 보고서
박태원 지음 / 깊은샘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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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과같아라! 물과 같아라! 산과 같아라! 별처럼, 물처럼, 산처럼 그들은 이 땅의 독립을 위해서 살았다. 이여성, 김약수, 약산 김원봉!! 이 세사람은 젊은 시절 자신의 젊음을 조국을 위해서 바치기로 약속하고 자신의 이름을 이렇게 지었다. 나는 그들의 삶을 알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을 제세히 소개해 놓은 책들을 구하기 힘들었다. 그중에서 그래도 약산 김원봉의 삶은 영화와 책으로 소개되어 조금은 알 수 있었다. 그를 알 수 있는 책을 찾던 중에 약산 김원봉의 삶과 의열단에 대해서 자세히 알 수 있는 '약산과 의열단'이라는 책을 펼쳐 들었다.

 

1. 김원봉의 육성을 듣는 듯한 책!

  이 책은 소설가 박태원이 의열단원들의 활약을 소개한 신문기사와 김원봉을 인터뷰한 자료를 근거로 쓴 책이다. 책 곳곳에서 김원봉이 먼저 죽어간 의열단원의 죽음을 기억하며 가슴 아파하는 신음소리가 들린다. 얼마나 많은 동지들을 먼저 보냈는가? 그들을 사지로 떠나보내면서 김원봉 그도 얼마나 슬펐을까? 조국 광복을 위해서 자신의 젊을 바치는 수 많은 별들!! 그 별들의 삶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가슴이 뛰고 팔뚝에 힘줄이 불끈 솟았다.

 

2. '밀정'과 '독립운동가' 사이

  영화 '밀정'을 본사람들은 송강호가 연기했던 '황옥'이 과연 독립운동가인지, 일제의 밀정인지 판단이 서지 않을 것이다. '황옥' 경부가 과연 밀정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쟁이 있다. 재미있는 것인 이책 속의 김원봉은 황옥은 밀정이 아니라고 믿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당시를 살았던 많은 의열단원들도 황옥을 밀정이라 보지 않는다. 그런데, 꾀 많은 역사학자들은 황옥을 밀정으로 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황옥이 독립운동가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현실을 반영한다.

  반면, 하와이에서 대조선국민군단을 조직했던 박용만을 이 책에서는 밀정으로 소개하고 있다. 일본군함 출운호를 폭파하려했다가 추방당한 그를 밀정으로 보기에 너무도 무리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역사학자들도 박용만을 밀정으로 보고 있지 않다. 그런데, 박용만이 국내에 귀국해서 조선총독 사이토를 만났다는 사실은 그를 밀정으로 의심하기에 충분한 면도 있다.

  밀정과 의사 사이에는 생각보다 작은 강이 있다. 때로는 밀정이 의사로 추앙받기도하고, 의사가 밀정으로 오인받기도 한다. 황옥과 박용만 이 두 인물은 밀정과 의사 사이에 있는 강이 얼마나 넘기 쉬운 강인지를 알려준다. 과연 그들은 의사일까? 밀정일까?

 

3. 나혜석과 의열단의 만남

  수원을 대표하는 인물로 나혜석을 꼽는 사람들이 있다. 수원에는 나혜석 거리가 있고 많은 연인들이 그 거리를 걷는다. 내가 수원에 살았던 시절, 수원지역의 역사를 탐구하며 수업자료를 모았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신여성 나혜석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최린과 바람피며 자유롭게 살아간 여성에게서 무엇을 배우겠냐는 논리였다. 그당시 3.1운동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있느냐? 나혜석이 그것 빼고 독립운동을 한적이 있는가? 그 남편이 일본의 대단한 친일파 아니냐?라는 반론에 나는 별반 반론을 제시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책에는 나혜석과 의열단의 흥미로운 일화가 소개되있다. 의열단원 박기홍이 나혜석에게 총한자루를 맡겼다. 박기홍이 계호기한 일이 사전에 드러나 그는 감옥에 갔다. 출옥후, 우연히 나혜석을 만났는데 그녀가 총을 도로 내주었단다. 단동현 부영사의 아내로서 남편에게 말하지 않고 총을 베갯속에 넣어 이를 배고 잤다고 한다. 그녀의 조국에 대한 사랑은 뜨거웠었다. 그런데, 조국을 배신한 그녀의 남편을 어떻게 이해햐야할까? 조국을 사랑하나, 사랑하는 남편은 조국을 배신했다. 그리고 그녀는 최린과 외도를 한다.

 

  너무도 재미있는 책이다. 이틀만에 책을 다 읽을 정도로 책은 재미있다. 약간은 고어투의 말이 있어 읽기에 불편한 점도 있지만, 약산 김원봉의 뜨거운 조국애를 느끼며, 열정적으로 시대를 살아간 가슴벽찬 의열단원의 삶을 알고자하는 분들은 반드시 일독을 해보길 바란다. 그들의 삶을 기억하는 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책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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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holic 2018-09-18 00: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소설가 구보씨가 이런 책도 쓰셨군요~~ 저도 읽어보고 싶습니다. 좋은 책 추천 고맙습니다...
 
안중근 재판정 참관기 - 100년 전, 안중근 의사와 일본인 재판관이 벌인 재판정 격돌, 현장 생중계! 재판정 참관기 시리즈
김흥식 엮음 / 서해문집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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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역사에는 두개의 10.26이 존재한다.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가 박정희에게 총을 쏜 10.26과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10.26이 바로 그것이다. 한사람은 유신의 지사를 존경했고, 한사람은 메이지 유신을 단행했다. 한사람은 동양평화를 위해서 그를 처단했고, 한사람은 10월 유신을 끝내기 위해서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70년의 시간차를 두고 벌어진 비슷하면서도 다른 사건의 현장을 거닐어 보자.

 

1. 당당히 자신을 의병이라 밝히다.

  삶의 마지막 순간! 누구라도 자신의 생명이 연장되길 바랄 것이다. 안중근의 변호인은 나의 생각과는 달리, 안중근이 무죄임을 주장했다. 즉, 1899년 맺은 청한통상조약에 의하여 한국인은 청나라에서 치외법권을 가지고 있고, 청나라 사람은 한국에서 치외법권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인이 해외에서 죄를 범하면 아무런 명문이 없기 때문에 '무죄'라고 주장했다. 일본인 변호사의 이러한 충실한 별론을 안중근은 단호히 거부한다. 그는 '사람을 죽이고도 아무런 네제를 받지 않는다니 말이 되는가?'라고 되묻는다. 그리고는 '나는 개인적으로 벌인 일이 아니라 의병으로서 행한 일이기에 전쟁포로로서 이 재판장에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국제공법, 만국공법'에 따라서 자신을 처리해달라고 강변한다. 남아로서 자신의행동이 떳떳했고, 그에 대한 정당한 절차에 의해서 정당한 판결이 내려지길 바랬다. 자신의 생명을 먼저 구하기 보다는 대의에 자신의 떳떳함을 주장했던 안중근의 풍모가 빛나는 명장면이었다.

 

2. 이토가 안중근을 '바보 같은 놈'이라고 한 것은 사실일까?

  '안중근이 온건파 이토를 죽였기에 조선 병합의 시간이 빨라졌다.'라고 주장하는 글이 인터넷에 유포되었던 적이 있다. 사실일까? 온건파였던 이토가 죽음으로써 강경한 군부세력의 발언권이 세어졌고 그결과 조선 병합이 빨라졌다라는 주장이다. 그래서 이토가 안중근에게 '바보 같은 놈'이라고 말했던 것은, '내가 죽으면 너희 조선은 빨리 병합된단말이다. 이 바보야'라는 뜻이다. 이러한 주장을 어느 대학교 교수와 인터넷 강사가 사실인 것처럼 주장하기도 했다.

   '안중근 재판정 참관기'를 보면 그것이 과연 진실이지 확인해 볼 수 있다. 1910년 2월 10일 이루어진 네번째 공판에서 미조부치 검사는 "한 증인의 말에 따르면, 이토 공이 자신을 쏜 자가 한국인이라는 말을 듣고 "바보 같은 놈"이라고 말했다는데,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이토공은 자신을 쏜 자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죽었던 것입니다. "라고 명백히 밝히고 있다. 즉, 안중근 의사는 3발의 총을 명중시켰고, 십자형 홈을 새긴 총알은 인체의 딱딱한 부분에 닿으면 납과 니켈 표피의 분리를 촉진하는 효과가 있어 큰 총상을 입힌다. 그래서 이토는 폐를 관통한 두개의 총알은 흉강안에서 큰 출혈을 일으켜 십여분 만에 이토는 목숨을 잃은 것이다. "바보 같은 놈"이라는 말을 남기기 힘들 정도로 이토는 저세상으로 빨리 떠났다. 이토가 '바보 같은 놈'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토가 죽었기에 조선 병합의 시계가 빨라졌을까? 천만의 말씀!! 이덕일과 이태진 전교수는 이러한 주장을 단번에 반박한다. 이토가 죽기 이전에 일본 내각에서 조선 병합건이 통과되었다고 주장한다. 이토가 '바보 같은 놈'이라는 말을 하지도 않았으며, 그럴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더욱이 이토가 죽기전에 조선을 병합하기로 일본내각은 결정했다. 얕은 지식으로 민중을 파멸의 길로 안내하는 우를 범하는 일이 이제는 없어지기를 바란다.

 

  170여 페이지되는 얇은 책이다. 안중근 의사의 재판 현장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책이기에 청소년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다. 조선을 병탄하는데 앞장섰던 그들을 처단한 역사적 10.26의 현장을 많은 이들이 기억해 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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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7-12-12 13: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이 있었군요.
그러고 보니 강나루님 아이들 가르치시는 일 하는가 봅니다.^^

2017-12-13 05: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NamGiKim 2018-01-29 17: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중근 의사 존경합니다. 친일매국노들이 안중근과 유관순을 띄워 군사독재에 이용해 먹었다는 사실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강나루 2018-01-29 17:47   좋아요 1 | URL
이제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아야지요^^
 
기쿠치 겐조, 한국사를 유린하다 - 을미사변에 가담한 낭인에서 식민사학의 선봉장으로
하지연 지음 / 서해문집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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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쿠치 겐조'!! 들어본 기억이 없는 인물이다. 그런데, 그는 명성황후를 죽인 범인중에 한인물이며, 이후 왜곡된 근현대의 역사관을 만든 아마추어 식민사학자였다. 한국 고대사가 일제에 의해서 많이 왜곡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우리의 근대사가 왜곡된 것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과연! 기쿠치 겐조는 우리 역사를 어떻게 왜곡했을까?

 

1. 명성황후를 모독하다!!

  명성황후(明成皇后)는 그 호칭부터 논란이다!! 그녀를 어떻게 불러야할까? 한때 '민비'라고 불렀다가 친일파로 몰리는 상황이 맹렬했는데, 이제는 교과서에도 '민비'라고 당당히(?) 쓰고 있다. 이 책은 이점부터 지적하고 들어간다. 왕비가 살아있을 때는 '중전' 혹은 '곤전'으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예를 든다면 정희왕후 윤씨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민비'라는 용어처럼 성씨에 왕비를 뜻하는 '비'자를 붙여부르는 것은 일본식의 표현이다. '매천야록'에 '민왕후, '중전민씨'라는 용어를 사용하듯이, '민비'라는 용어는 자제해야한다. '명성황후'라는 용어를 사용하자는 주장도 있으나, 이는 추증한 것으로 그녀가 왕비로 살아있을 때 사용하는 역사용어로는 부적합하다는 의견도 있다. 그래서 '명성왕후'라고 적기도한다. 그러나 이때는 숙종의 어머니이자, 현종의 비인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와 혼란을 일으킬 수 있기에, '명성왕후(明成王后)'라고 한자를 병기하해야할 것이다. 이러한 이책의 내용은 '민비'라는 용어가 과연 적당한지에 대해서 끊임없는 논란이 벌어지는 현실에서 참으로 명쾌한 현답이다.(9P)

  명성황후에 대한 또다른 논란은 '에조 보고서'의 '국부검사'라는 부분을 두고 어떻게 해석하는가이다. 김진명이라는 소설가는 이 부분을 근거로 일제는 명성황후를 '시간' 즉, 시체를 강간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를 두둔하는 역사학자도 있다. 이를 두고 나도 큰 충격을 받았다. 과연 명성황후는 시간을 당했을까? 이에 반대하는 역사학자도 있다. 당시 5시 30분에서 6시 사이에 시해를 당했기 때문에 동이 트고 있었기에 시간이 매우 촉박했다. 또한 '국불 검사'는 그녀가 너무 젊어 보였기에 과연 명성황후인지를 확인해보기 위해서 아랫도리를 벗겼다고 설명한다. 아랫도리를 벗기면 그녀가 명성황후인지 알수 있었을까? 출산여부를 확인하려 벗겼다는 것이다. 출산의 흔적을 찾는다면 그녀가 명성황후라 장담할 수있다는 주장이다. 이책의 저자는 여기에 당시 회고록과 증언에 시간을 했다는 주장은 없으며, 이시즈카 에조는 을미사변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고 풍문을 듣고 이 보고서를 작성했다는 점을 추가했다. 그러면서 '심지어 한국 학자들조차 일본의 차담한 왕후 살해의 본질을 망각하고 그 죽음을 이야깃거리로 희화화하는 것 같아서 불쾌하고 안타깝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과연 '시간'은 없었던 일일까? 이시즈카 에조가 을미사변에 참가했다면 오히려 이 '시간'사건을 밝히는 것을 부끄러워하며 숨겼을 것이다. 일본인이 그가 이 사건에 참여하지 않았기에 그 진실을 보고서에 담을 수 있었던 것은아닐까?

  구시다 신사에는 명문이 적힌 칼이있다. 일순전광자노호(一瞬電光刺老狐) 즉, 일순간에 전광석화처럼 늙은 여우를 찔렀다는 명문이다. 어떤이는 일본 신사에 이칼을 바친 것은, 가쓰아키가 자신의 일을 후회하며 참회하는 마음으로 바쳤다고 주장한다. 이는 털끝만큼도 진실이 아니다. 일본 낭인들은 추호도 반성하지 않았다. 본국에 송환되면서도 후회하지 않았으며 자신들의 일을 '애국'이라고 강변했다. 더욱이 기쿠치 겐조는 자신들의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왜곡된 역사서를 써서 이를 유포하지 않았는가?

  낭인들은 명성황후의 몸만 도륙한 것이 아니다. 그녀가 죽자 그녀의 영혼도 도륙했다. 특히 이책의 주인공인 기쿠치 겐조는 '조선 왕국', '대원군전' 등의 많은 역사책을 써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했다. 그가 을미사변의 참가자였기에, 아마추어 역사가의 소설은 역사로 쉽게 둔갑했다. 명성황후를 권력욕의 화신으로 묘사하고 미신과 무당의 정치를 한 희대의 악녀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유산은 지금도 계속 살아있다.

 

2. 흥선 대원군을 범인으로 매도하다.

  명성황후 시해에 대원군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는가를 역사선생님들과 토론했었던 적이 있다. 나보다 경력이 많은 선생님이 강력하게 일본낭인과 대원군이 같이 들어갔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흥선대원군도 공범이라 주장했다. 나는 그것이 일제 식민사관이라고 주장했다.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의 대립 속에서 벌어진 일로 일제는 흥선대원군을 도와주었을 뿐이라는 주장은 일본의 만행을 숨겨주는 주장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후 내가 노스차이나 헤롤드지의 내용을 근거로 나의 주장이 옳음을 주장했다. 그 선생님은 결국 나의 주장에 굴복했지만, 그 후에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을 식민사학에 젖어있다고 비난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여튼,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대립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이 사이에서 일본이 대원군을 도와주었다는 주장은 이 책에서 기쿠치 겐조가 '대원군전'에서 강력하게 주장한 내용이었음이 적혀있었다. 나의 주장에 근거가 보강된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흥선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대립은 지금의 사극에서도 단골로 사용하는 극적장치다. 일제의 식민사관을 극복하는 일은 너무도 멀다. 픽션 '대원군전'을 사극이라는 픽션이 재생산하고 있는 현실이 슬프기만하다.

  기쿠치 겐조의 '대원군전'은 기초적 사실도 틀리고 역사왜곡의 강도도 심하다. 이 책에 소개되어있는 일부내용을 적어보자.

 

  왕비는 일본에 수신사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대원군은 일본과의 수교에 격분해 양주에서 덕산으로 갔고, 다시 석파 산장으로 돌아와 번민의 나날을 보냈다. 그는 울분 끝에 폭약이 장치된 선물함을 민승호 집으로 보내 민승호 부자를 살해했다.

 

민승호 일가의 폭사사건은 1874년 11월 28일에 일어났는데, 기쿠치는 이 사건이 강화도 조약(1876년)에 격분해서 대원군이 일으켰다고 서술하고 있다. 기초적인 사실관계도 엉망이다. 이러한 책이 식민사관을 확대재생산하는 근원이었다.

  대원군은 경복궁으로 끌려가면서 명성황후 시해 계획을 몰랐을까? 그것은 모른다. 그가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나 일제가 대원군을 그 현장에 끌고 왔으며, 그를 명성황후 시해 주범으로 몰아버리려 계획했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것이 진실이다.

 

3. '나무 인형이 된 무능한 고종'을 만들다.

  기쿠치 겐조는 고종을 어려서는 흥선 대원군의 호통소리에 기를 못펴다가, 성인이 되어서는 아내의 등쌀에 기를 펴지 못했다고 묘사하고 있다. 우리가 보통 임오군란시기 명성황후가 청나라 군대를 요청했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청병요청을 명성황후가 할 수는 없었다. 명성황후 '피란일지'를 보면 그녀는 몸이 아파서 자신의 몸을 돌보기도 힘들었다. 그렇다고 고종이 요청한 것도 아니다. 청의 필요에 의해서 파병된 것이다. 고종과 명성황후가 내부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서 왜세를 끌여들였다는 주장은 기쿠치 겐조가 '대원군 전'에서 주장한 내용이다. 식민사학의 뿌리가 이렇게 깊었다.

  무능한 왕궁의 나무인형 '고종'!! 이라는 기쿠치 겐조의 묘사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그려져있다. 기쿠치 겐조의 위력이 오늘날에도 맹위를 떨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고종', '명성황후', '흥선 대원군'의 진모습을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든다. 이태진 교수의 '고종시대의 재평가'를 100% 받아들이는 것이 식민사학을 극복하는 길일까? 대한제국의 멸망에 그들은 일말의 책임이 없었을까? 일제 식민사학을 극복하자는 대원칙에는 동조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에게 면죄부를 줄수는 없다는 생각이 밀려온다. 기쿠치 겐조가 픽션에 넌픽션을 가미해 역사를 서술했기에 픽션과 넌픽션을 구분하기가 힘들다. 그리고 이것은 사극을 통해서 확대 재생산되었기에 나의 머리를 더욱 혼란스럽게 한다. 그 진실을 찾는 일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같다.

 

4. 잡상

  503호 국정논단 사건으로 한때 '진령군과 명성황후'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들 회자되었다. 그 진령군을 괴대 확대해서 명성황후를 무당을 믿는 혼군으로 묘사한 것이 기쿠치 겐조였다. 하지만,  '매천야록'에도 진령군과 명성황후에 대한 소개가 있는데 이는 기쿠치 겐조의 글과 일면 비슷하다. 그렇다면 기쿠치 겐조는 당시의 풍문에다가 자신의 상상력을 더해서 '진령군과 명성황후' 이야기를 만들어 내지 않았을까? 무당을 궁궐에 끌여들이고 무당이 힘을 발휘한 것을 긍정적으로 볼 수는 없다. 기쿠치 겐조의 주장을 무조건 무시할수도 없다. 저자 하지연은 '진령군과 명성황후'에 대해서도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분명히 밝혀 주었어야했다. 단지 과당되게 서술했다는 식으로 얼버무리면 나와같이 혼란한 사람이 더 늘어날 것이다.

   기쿠치 겐조는 '악정의 책임이 경상도에 있으며, 전라도는 폭도의 고장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를 읽으면서 지금의 지역감정의 원형을 보는듯하다. 현대에 독재정권들이 표를 많이 받기 위해서 조장한 지역감정의 뿌리가 일제 식민사학에 있었다는 생각이든다. 일제 강점기 훈도였던자가 정치인이되어 이를 확대 한 측면은 없었을까?

 

  이 책은 논문을 대중서로 풀어 놓은 책이다. 책을 읽으면서도 잘 읽히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이 때 다산선생의 글쓰기 방법이 생각났다 다양한 예화를 들어 실감나게 서술하는 방법! 그러나 하지연은 이 방법을 유려하게 사용하지 못했다. 딱딱한 글쓰기에 익숙해서 대중적인 글쓰기를 잘해내지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을미사변과 왜곡된 근대사를 바로 보려는 사람에게는 좋은 지침서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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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불온열전 - 미친 생각이 뱃속에서 나온다
정병욱 지음 / 역사비평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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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온열전' 제목이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그 제목을 보고 독립운동을 소재로 삼은 책으로 알았다. 그러나 이 책은 식민지를 살았던 용기있는 소시민들의 고뇌를 담고 있는 책이었다. 경성유학생 강상규, 자소작농 김영배, 신설리패, 학생 김창환 이들에 대한 짧고도 심도있는 해부가 서술되어있다. 일제강점기를 배우면서 과연 일제 강점기를 살았던 조선인들은 이 시기에 어떠한 생각을 했으며, 일제의 식민지배는 구체적으로 어떠했는지 알고 싶었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의문에 약간의 실마리를 제공해주었다.

 

1. 강상규의 모습에서 나의 모습을 발견하다.

  강상규는 독립운동을 열망한 모범생이다. 그리고 시골에서 경성으로 유학온 엘리트다. 남들이 보면 너무도 모범적인 학생이 '불온'을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외부에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책들을 읽으며 '독립'의 꿈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구체적인 독립운동의 계획까지 세웠다. 주어진 현실에 순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생각은 나와 비슷했다. 가난한 시골농가에서 자란 나도, 정의가 살아 숨쉬는 세상을 꿈꾸었다. 물론 강상규 처럼 구체적인 준비를 하진 못했다. 나의 머럿속에 몽상으로 끝났다. 이것이 그와 나와의 차이점일 것이다. 식민지 농촌의 고달푼 삶을 보아오면서 식민지의 모순을 목도하고 이를 변혁하려는 강상규! 그러나 그의 이러한 노력도 일제에 의해서 발각되면서 끝이난다. 그리고 그의 꿈은 광복으로 실현되었으나, 그는 해방공간의 혼동 속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49년 이후 그와 관련된 흔적은 사라진다. 보도연맹에 연루되어 학살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2. 마을로간 일제강점기

  자소작농 김영배는 사진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멋쟁이이다. 그리고 재담꾼이다. 그러한 그가 투서에 의해서 시국사범으로 몰렸다. 불온한 사람으로 찍힌 김영배! 그가 갑자기 항일 투사로 변하게 된 것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불평조차도 용서되지 않던 시기이기에 한장의 투서가 졸지에 그를 항일 투사로 만들었다. 그러나 마을의 권력관계 속에서 그는 저항했고 이를 불쾌하게 생각했던 마을의 기존 권력자가 투서를 던진 것으로 추측된다. 단순한 이념으로 한시대를 설명하려는 너무도 쉬운 방법을 벗어던지고, 당시 사람들의 삶속으로 들어가 과연 그러했는가를 따져보는 연구가 돋보였다. 그리고 광복이 되었다. 김영배는 어떠했을까? 그도 좌익활동을 하다가 흔적없이 사라졌다.

 

3. 만보산 사건을 새롭게 해석하다.

  만보산 사건과 그로 인해서 발생한 한중간의 갈등을 기존에는 일제의 조직적인 민족 이간책으로 보았다. 한홍구는 이를 인정하면서도 왜곡된 민족주의가 사건을 키웠다고 보았다. 그런데 정병욱은 왕십리와 신설리를 중심으로 중국인 쿨리와 조선인 소작농간의 갈등을 중심으로 새롭게 이 사건을 보았다. 중국인 쿨리와 조선인 소작농은 일제 강점기라는 식민지 모순 속에서 생존을 위협받고 있었다. 상위 1%의 갑들이 99%의 을을 통제하는 방법은 을끼리 단결하지 못하고 대립하도록 하는 것이다. 중국인 쿨리와 조선인 소작농들의 대립은 일제의 식민지배의 소산이었고 결국 만보산 사건이 불에 기름을 부은 효과를 만들었다. 이 불행한 사건은 일제 식민지배의 모순을 여실히 보여준다.

 

4. 김창환, 낙서로 치안유지법에 걸려들다.

  꿈많은 어린시절! 낙서를 하고 허풍도 떨 수 있는 시기에 그들은 일본인 교장에 대한 저항을 담아 낙서를 했다. 그리고 이로 인해서 그의 선생님 홍순창과 그의 친구들을 고생을 해야했다. 낙서 조차도 허용이 되지 않는 엄혹한 시기가 바로 이시기였다. 인간으로 살기를 거부하고 노예로, 짐승으로 살도록 강요받던 시기였다. 비이성적인 파시즘의 시대를 보노라면, 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씀쓸한 신물이 올라오기도 한다. 그리고 광복이 되었다. 김창환도 반공자치대원으로 활동하다가 빨치산대에 의해서 학살되었다.

 

  광복이라는 현실은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일제 강점기라는 엄혹한 시기를 살아온 사람들은 희망찬 미래를 꿈꾸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은 광복이후 얼마 살지 못하고 이념의 구렁텅이에서 죽음을 당해야했다. 어떤이는 좌익활동을 하다가, 어떤이는 반공활동을 하다가 죽었다. 부르스 커밍스가 6.25를 일제강점기에 끓어오른 압력 솥이 폭발한 사건으로 보았듯이, 일제강점기에 쌓인 모순은 결국 6.25로 폭발하여 암흑기를 살았던 사람들의 목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나는 상념에 잠긴다. 이러한 우리 현대사의 굴곡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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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 평전
김희곤 지음 / 푸른역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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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육사!! 남성적인 항일시를 쓴 사나이!

윤동주와 함께  우리에게 아름다운 항일시를 남겨준 시인이다. 고등학교시절 그의 시를 감상하며 감명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이육사의 삶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가 노래한 시 몇편과 조선혁명정치간부학교를 다녔다는 단편적인 일화뿐이었다. 윤동주 평전을 읽고 이육사 평전을 읽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의 삶에 대해서 정확한 사실들을 알고 싶어 역사학자 김희곤이 쓴 '이육사 평전'을 빼들었다. 그러나 이 책은 나의 기대를 만족시켜 주지 못했다.

 

 이육사에 대한 다양한 일화와 생생한 증언들로 채워져있기를 기대했지만, 이 책은 이육사의 삶에 대한 수 많은 의문점들을 과제로 알려주었을 뿐이다. 한편으로는 민족시인의 삶이 이렇게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도 비극적이기도 했다. 친일파가 권력을 잡고 친일 시인이 광보후에도 활개치며 거리를 활보하는 세상에서 저항시인의 삶이 제대로 규명되기를 바란 것은 사치였을까? 이육사의 삶이 수수께끼로 남아있다는 것은 우리역사의 비극을 단적으로 알려주는 척도였다.

  강한 남성적인 시를 남긴 이육사는 과묵한 선비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권총 명사수이기도 했다. 조선혁명정치간부학교를 졸업하고 처남 안병천이 일제에 자수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항일전선에서 잠쉬 물러날 수밖에 없었으나, 다시 베이징으로가 항일전선에 가담했다. 모친과 맏형 소상에 참여하러 귀국했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베이징주재 일본총영사관 경찰에 구금되어 폐병과 고문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가 베이징에서 한 구체적인 항일투쟁의 전말을 알 수 없어 무척이나 아쉽다. 그의 삶은 바로 규명하는 것은 삐뚫어진 우리역사를 바로잡는 길이고도하다는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다.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이육사에 대해서 이정도의 기록과 평전이라도 남아 있어 무척다행이라는 생각이든다. 앞으로 이육사의 남은 시와 밝혀지지 않은 항일 전력들이 쏟아져나오길 기대해본다. 육사가 노래했듯이, 천고의 뒤에 백마타고오는 초인! 이육사의 생생한 삶의 기록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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