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사 - 해방과 건국을 향한 투쟁 청소년과 시민을 위한 20세기 한국사 9
박찬승 지음 / 역사비평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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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한다."라는 말이 있다. 친일파의 후손이 정계, 재계, 학계에 있으면서 친일의 성채를 견고히 쌓고 있다. 낡은 옷을 입고, 누추한 집에서 사는 독립운동가의 모습을 보며 씁쓸한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생각하며, '한국독립운동사'를 펼쳐들었다.

 

1. 처음 알게된 5.30 만주 봉기

  1930년 두도구 방면에서 한인의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조선인 민회 사무실과 일본 영사관 분관이 습격당했으며, 용정에서는 전화선을 차단하고 발전소를 습격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간도출장소에 폭탄이 터졌다. 이 사건으로 간도영사관 경찰에 39명이 체포되었다. 5.30봉기 실패 이후 연길, 화룡, 왕청, 훈춘 등지에서 12월 까지 봉기가 계속되었다. 일본경찰이 2천여 명을 체포하여 4백명을 예심에 넘겼고, 272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중 12명이 옥사하고 22명이 사형을 언도 받았다. 참으로 격렬한 민중봉기였다. 그러나 이러한 민중봉기를 이책을 통해서 처음알았다. 사회주의 계열의 강렬한 항일운동이라서 교과서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5.30 만주 봉기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은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독립운동을 했다면 좌우익을 가릴 필요가 없다. 김원봉에 대한 서훈을 아직도 하지 못하는 현실을 보면서 아직도 한국사회의 갈길은 멀다는 생각에 쓸쓸함을 느낀다.

 

2.  누락된 한국독립군과 조선혁명군

  박찬승이라는 저명한 역사학자가 우리의 독립운동을 정리한다기에 기대가 높았다. 그러나, 박찬승은 나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했다. 가장 강렬한 항일 운동이 무장투쟁을 누락시켰다. 그중에서도 1930년대 남만주를 중심으로 활동한 양세봉 장군의 조선혁명군과 북만주를 호령했던 지청천 장군의 한국독립군을 누락시켰다. 대전자령 전투는 제2의 청산리대첩이라 불리는 유명한 전투이다. 이를 한국독립운동사에서 빠뜨려서는 안된다. 교과서에도 실려있는 이러한 자랑스러운 역사를 박찬승 교수는 누락시켰다.

  박찬승 교수가 일부러 누락시켰다기 보다는 그가, 조선혁명군과 한국독립군을 몰랐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너무도 항일 무장투쟁사에 대한 평가가 낮고 이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추후라도 이부분은 반드시 보충해주길 기대한다.

 

  한국의 독립운동을 정리하고 다시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한 책이다. 그러나, 새로운 것을 알게 되었지만, 박찬승교수 조차도 한국 독립군과 조선혁명군을 모른다는 사실에 씁쓸함을 감추지 한다. '암살'이라는 영화의 한배우는 "우리 잊으면 안돼"라고 외쳤다. 만주벌판에서 쓸쓸히 쓰러져간 독립운동가들은 외치고 있다. "우리를 잊지 말아달라"라고... 우리는 기억해야할 의무가 있다. 이것이 그분들에 대한 최소한의 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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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아시아태평양전쟁과 조선인 강제동원 - 우리가 지켜야 할 인류 보편의 가치! 동북아역사재단 교양총서 12
정혜경 지음 / 동북아역사재단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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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과 8.15가 되면, TV를 비롯한 각종 매체에서 우리의 항일 투쟁에 대한 각종 특집 방송을 방영한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한 실상을 제대로 소개해주는 방송은 드물다. 이러한 모습은 내가 일제 강점기 일제의 식민통치에 관한 서적을 찾으려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더욱 심했다. 일제의 폭압적 통치를 자세히 기록한 책들이 시장에서 잘 팔리지 않는다는 '시장의 논리'가 작용한 면도 있겠지만, 승리의 역사는 기억하려 해도 패배의 역사는 기억하기 싫어하는 속성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기억하지 않는다면,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을 수 없고, 그 역사는 또 다른 모습으로 반복된다. 이것이 내가 '일본의 아시아태평양 전쟁과 조선인 강제동원'이라는 책을 펼쳐 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1. 영화 '군함도'는 진실을 담고 있는가?

20178'군함도'가 개봉되었다. 영화는 기대와는 달리 만족스러운 흥행을 가져오지 못했다. 매스컴과 소설로 대중에게 많이 소개된 '군함도'가 흥행에 성공하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저자 정혜경은 '사실과 다르다.'라는 관객의 반응에서 원인을 찾고 있다. '일본당국에 의해 착취당하는 조선민중'의 슬픈 모습을 기대했던 관객들은 '일본 당국의 하수인인 조선인들이 동포들을 착취하는 모습'을 보면서 불편함을 느꼈을 것이라 추정한다.

군함도는 진실을 담고 있다. 소년 광부도 존재했으며, 조선인 하수인이 동포를 착취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관객들은 '일본민족 VS 한국 민족'이라는 구도가 아닌, '조선인 하수인 VS 조선인 노무자'의 구도가 불편했다. ? 관객들은 '조선인 하수인 VS 조선인 노무자'의 대립구조가 불편했을까? 대부분의 관객들은 학교에서 '일본민족 VS 한국 민족'의 대립구조로 일제강점기를 배웠다. 그러나 일본인이 조선을 원활히 식민통치하기 위해서는 협조자가 필요했다. 그 협조자를 우리는 '친일파'라고 부른다. 1910년대 일본 헌병 밑에는 2명의 조선인 헌병 보조원이 있었다. 소수의 헌병으로 다수의 조선인을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인 헌병 보조원'의 협조 덕분이다. 1920년대부터는 소위 '문화통치'가 실시되면서 친일파를 육성해서 우리 민족을 이간 분열시키는 민족분열 통치를 했다. 1930년대는 일제의 폭압적 민족말살통치로 인해서 일제에 굴복하는 친일파들이 늘어나게 된다. 이러한 모습은 유대인들에게서도 나타난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나와 있듯이, 나치가 유대인을 홀로코스트에 효율적으로 보낼 수 있었던 이유도, '유대인 위원회'의 협조 덕분이다. 한나 아렌트가 금기시 되었던 '유대인 위원회'의 나치 협조 행위를 책으로 발표하자,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금서로 정한 것도 불편한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학교에서 일제에 협조했던 조선인들에 대한 교육을 받지 않았고, 악마 같은 일본인과 선량한 조선인의 대립구도에 익숙했던 우리에게 영화 '군함도'는 너무도 불편한 진실을 말해주었다. 우리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영화 '군함도'는 말하고 있다. 이제 그 불편한 진실을 마주할 때가 되지 않았냐고.....

저자 정혜경은 우리가 '군함도'에 열중한 나머지 '조선 침략의 정신적 근거지 '쇼카손주쿠' 등재에 대해서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군함도'가 일제 강제동원의 피해 장소라면, '쇼카손주쿠'는 메이지 유신의 싹이 튼 곳이요. 일제 침략전쟁의 사상의 요람이었다. '쇼카손주쿠'를 세운 요시다 쇼인이 묻힌 신사는 지금의 '야스쿠니 신사'가 되었으며, '쇼카손주쿠'를 나온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을 병탄하는데 앞장섰던 인물이다. 눈에 보이는 강제 동원문제에는 적극적으로 대처했으나, 눈에 보이지 않는 일본 침략정신을 만들어낸 쇼카손주쿠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는 막아내지 못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힘을 낮게 평가하는 경우가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침략정신을 만들어낸 '쇼카손주쿠'가 비극의 씨앗이라면, 눈에 보이는 '군함도'의 강제동원 역사는 비극의 열매라고 할 수 있다. 비극의 씨앗과 비극의 열매 모두를 직시하지 않는다면 비극을 막아낼 수 없다. 불편한 진실, 우리가 마주하기 힘든 진실과 마주하며 '진실의 무게'를 느껴야 한다.

 

2. '진실의 무게'를 당신은 얼마나 알고 있는가?

일본 극우파는 "피해자들 대부분이 포승줄로 꽁꽁 묶여간 것이 아니라 자기 발로 걸어갔는데 무슨 강제냐"라고 주장한다. 소년 지원병에 떨어져 울었던 소년도 있었다. 징병 혹은 지원병으로 전쟁터로 떠나는 장병을 위한 환송연도 있었다. 그렇다면, "강제"는 존재하지 않았는가?

소위 '일베'와 일본 극우파들의 주장을 듣다보면, 가슴이 탁 막혀온다. 그러나 막상 논리적인 반론을 해주고 싶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할 때가 많다. '포승줄에 묶여' 끌려 가야 "강제"라는 단어를 쓸수 있다는 그들의 일차원적 주장에 저자 정혜경은 "강제성이란 '신체적인 구속이나 협박은 물론, 황민화 교육에 따른 정신적 구속, 회유, 설득, 본인의 임의 결정, 취업 사기, 법적 강제에 의한 동원"을 포함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한일 학계의 결론이며 2002년 일본 변호사협회의 주장이기도하다. 폭력에도 육체적 폭력과 정신적 폭력이 있다. 물리적 폭력뿐만 아니라 언어 폭력도 있는 만큼, "강제"'포승줄에 묶여' 끌려가야만 인정할 수 있다는 주장은 성립될 수 없다. 이 책에 소개된 다음 일화는 일제의 황국신민화 교육의 위력을 잘 말해준다.

 

"내가 아홉 살 때 할머니하고 어머니하고 내 밑의 동생 둘을 데리고 부산에서 시모노세키까지 가는 관부연락선을 탔습니다. 배 민 밑의 홀에, 배가 제일 흔들리는 곳에 .... 조선 여자들이 많더라구요. .... 내가 국민학교 1학년을 다녀서 일본말을 할 정도가 되니까 가족들을 인솔했습니다. 아버지 주소만 들고 찾아가는데 시모노세키 선착장에 내려서 길 가는 사람에게 주소 적힌 종이를 주면서 플랫폼을 물어보니까 길을 가르쳐주더라고요. 그런데 그 사람이 알려준 곳으로 가도 가도 허허벌판만 나오는 겁니다. 할머니는 지쳐 있고, 어린 동생은 어머니가 업고 동생 하나는 내가 손을 잡고 걷고, 그러다가 원래 왔던 곳으로 다시 와보니까 플랫폼이 바로 옆에 있는 겁니다. ... 그때 일본 사람에 대한 증오를 느꼈습니다. 아직 그 일은 지워지지 않습니다.

할머니가 가다가 먹으려고 떡하고 엿을 만들었어요. 조선 사람들 인정이란 게 옆에 사람들 두고 그냥 못 먹잖아요. 할머니가 옆 사람에게 떡을 나눠주라고 해서 일본 여자에게 갖다주니까 "더러운 조선인들!"이라면서 내 손을 탁 칩니다. 바닥에 음식이 널렸을 것 아닙니까. 나도 민망해서 주섬주섬 주웠어요.

참 그때 내 가슴에 아! 같은 민족인데, 같은 사람인데, 왜 저럴까 싶었습니다. 학교에서 내선일체를 배워 일본 사람과 우리는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일로 일본에 대한 감정이 악화됐습니다. 어린 내 인격, 우리 가족, 조선인의 인격을 모독한 것 아닙니까."-107

 

"학교에서 내선일체를 배워 일본 사람과 우리는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했다는 소년 구연철의 증언을 통해서, 일제 황국신민화 교육의 위력을 알 수 있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민족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상황에서 주입되는 교육은 스스로 조선인이라는 민족적 자각을 하기 전까지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 일제의 노예로 길러진 것이다. 그들이 지원서에 도장을 찍었다한들, "강제"가 없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은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스스로 생각할 수 없는 "식민지 노예교육""폭력"에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의 공식 통계로 강제동원 피해자는 7804,376명이다. 그러나 이 명단은 정확한 숫자가 아니다. 강제동원에 대한 연구 논문도 가뭄에 콩나듯하며, 강제동원 피해자 명단에 개인정보가 담겨있어 국가가 나서서 연구를 진행하지 않는다면, 연구에 진척이 있을 수 없다. 저자 정혜경운 이 책 곳곳에 "피해국가인 한국의 관심이 이 정도인데 누구에게 답을 구해야 할까"라는 푸념 섞인 말을 내뱉는다. 독일이 지금도 유대인에게 사죄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끈질긴 과거사에 대한 고발과 투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는 일본의 사죄를 받아내기 위해서 유대인 처럼 끊질긴 투쟁을 했는가? 과거 친일 정권이 의도적으로 강제동원문제를 기피했다. 이제는 아픈 기억과 대면하길 싫어하는 우리의 무의식이 강제동원 피해자 숫자도 정확히 내놓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다. "징용"은 일본이나 사할린, 남양 등지로 떠나야 "징용"으로 인정하고 있다. 저자 정혜경은 동원지역에 따라 '한반도 내''한반도 외'로 구분하는 것은 현재적 관점이며, 당시 조선은 나라를 잃은 일본의 식민지였기에 이러한 구분은 의미가 없다고 주장한다. '보국대' 혹은 '봉사대'로 동원되어 노동력을 착취한 것도 "징용"에 포함되어야한다. '얕은 지식처럼 위험한 것은 없다.'라는 말이 있다. 징용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고 선입견으로 '한반도 내' 징용 피해자들을 대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깨달았다. '진실의 무게'를 마주하는 일은 이렇게 힘들고도 조심스럽다.

일제는 조선인이 '노동자' 아니라, '노무자', '근로자'이기를 바랬다. 노동자와 노무자 혹은 근로자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노동자는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노동력을 제공하는 댓가로 임금을 받는'. 따라서 고용주와 계약을 맺고,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파업을 일으킬 수 있다. 반면, '노무자' 혹은 '근로자''수동적 개념의 용어'이다. '일방적으로 순종하는 분위기를 요구' 받았다. 그들에게 노동자와 같은 '파업'의 권리는 없었다. 일제가 조선인을 '노동자'가 아닌, '노무자' 혹은 '근로자'가 되도록 강요했다. 우리는 일제의 강요에 충실히 순응하며 '노무자'로 살았을까? 그렇지 않았다.

 

"최근 일반 징용 실시의 취지를 발표하자, 일부 지식계층과 유산계급 중에는 서둘러 중국 방면으로 탈출하고 혹은 주거를 전전하여 당국의 주거 조사를 어렵게 하거나 혹은 급히 징용 제외 부문으로 취직을 기도하고, 일반 계층도 의사를 농락하여 병으로 입원하거나 일부러 화류병에 걸려 질환을 이유로 면하려고 기도하며, 그중에는 자기의 손발에 상처를 내고 불구자가 되어 기피하는 자, 심지어는 읍면 직원 내지 경찰관의 전자(專恣)에 기인한 덕으로 곡단하여 이를 원망하여 폭행, 협박하는 등 실로 일일이 헤아릴 수 없고, 최근 보고사범만으로도 20여건에 헤아리는 상황이다. 특히 지난번 충청남도에서 발생한 송출 독려차 부임한 경찰관을 살해한 사범은 그간의 동향을 말해준다. 특히 최근 주목되는 집단 기피 내지 폭행 행위로서 경상북도 경산경찰서에서 검거한 불온 기도 사건과 같은 것은, 징용 기피를 위해 청장년 27명이 결심대(대왕산죽창의거)라는 단체를 결성하여 식도, 죽창, 낫 등의 무기를 휴대하고 산 정상에서 농성하여 끝까지 목적 관철을 기도하는 것에서 첨예화한 노동계층 동향의 일단을 알 수 있다."-148

 

일제의 징용에 대항하여 '결심대'를 조직고, 경찰관을 살해하는 적극적인 저항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일본지역에서 발생한 태업과 파업의 기록도 '노무자''근로자'로 살지 않겠다는 우리의 결연한 의지를 보여준다. 더 나아가 우리는 자유인이 되고 싶었다. 일제 강점의 어둠을 헤치고 밝은 새벽을 맞이하고 싶었다. 그토록 '근로자'라는 딱지를 벗어버리고 싶었지만, 우리는 그 굴레를 벗어던지지 못했다. 개발 독재 시대, 독재정권은 이 땅의 노동자들이 '근로자'이길 바랬다. 자신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주장하기보다는 사업주가 시키는데로 열심히 일만하는 '근로자'이길 바랬다. 독재정권이 물러나고 민주화 정권이 들어섰지만, 사회의 통념을 변하지 않았다. '노동자의 날'이 아직도 '근로자의 날'로 불리고 있으며, 노동자들의 파업 때문에 나라가 망할 것 처럼 보도하는 언론을 보며, 한국사회가 나아가야할 길이 멀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근로자'라는 말이 일제가 조선인의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한 염원이 담긴 말이라는 '진실의 무게'를 마주한다면, 이제는 '노동자'라는 말을 이 땅의 노동자에게 돌려주어야할 것이다.

 

3. 일본인은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있는가?

"전쟁기간 동안 제국 일본 영역의 민중들은 '자신의 말'을 빼앗겼다." 저자 정혜경의 말이다. 일본은 폭압적인 전체주의 사회이다. 일본제국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쳐, 만주사변, 중일전쟁,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전개할수록, 전선은 넓어졌고, 총력전 상황에서 일본인의 고통도 가중되었다. 아시아 태평양전쟁 중에 일본인 310만명이 죽었다. 충격적인 사실은 일본군 전사자 중 약 60%'넓은 의미의 아사자'였다는 사실이다. 필리핀 전투에서는 약 80%'넓은 의미의 아사자'였다.

 

"아사! 굶어 죽었다는 말이다. 보급 부대 없는 현지 보급원칙이 일본군의 굶주림을 악화시켰다. 중국 전선에서 일본군은 황군(천황의 군대)이 아닌 황군(메뚜기 군대)이었다. 용맹한 군인의 모습은 찾기 어려웠다. 식량과 땔감을 찾아 민가를 뒤지고, 밥을 짓다가 적의 공격을 받아 목숨을 잃는 것이 일본군의 현실이었다."-40

 

보통 일본군은 치밀한 계획과 목숨바쳐 돌격하는 용맹함으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마침내는 아시아 태평양전쟁도 일으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역사 속의 일본군 모습은 너무도 달랐다. 일본군 지도부는 '천황 폐하'라는 이름으로 목적을 위해서 일본인 병사의 목숨을 기꺼이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전쟁을 하려면, 적에게 폭탄을 던지는 일보다, 아군에게 식량을 운반하기 위해서 보급로를 개척하는 일에 공을 들여야 한다. 아무리 용감한 군대도 먹지 못하면 싸울 수 없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시기, 우리 수군의 활약으로 수륙 병진작전이 실패하고 결국 일본군은 명군이 참전하자 부산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 일대에 웅거할 수밖에 없었다. 보급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전쟁이 바로 임진왜란이다. 그러나, 일본은 임진왜란의 교훈을 기억하지 않았다. 아시아태평양전쟁을 벌이먼서도 '현지 보급'이라는 기상천외한 원칙을 세웠다. 그들에게 병사들의 생명은 일회용 휴지 정도의 가치밖에 없었던 것일까?

전범으로 교수형을 당하는 일본인들이 했던 말도, "완전 재수없는 거죠"라는 말이다. 상관이 시켜서 일본군 지도부의 결정에 의해서 일본군 병사들은 미군 포로를 죽였다. 명령에 복종했던 그들은 전범재판에서 사형을 구형받았다. 그러나, 그 병사에게 미군 포로를 죽이라며 '천황의 뜻'이라고 말한 상관은 죽지 않았다. 상관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일본인의 문화 속에서 개인의 목소리는 없었다.

전범 히로이토는 소련과의 강화를 이뤄내기 위해서 60만의 관동군을 소련에게 넘겨주려했다. "천황은 전쟁 당시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신민의 고통과 피해를 외면했다." 일본인 병사들은 "천황폐하"를 위해서 죽어갔지만, 그들이 사랑하는 "천황폐하"는 그들을 한낫 휴지조각 정도의 가치도 부여하지 않았다. 그리고 천황 히로이토는 전쟁이 끝나자 전쟁책임을 외면하고 평화주의자로 변신했다. 일본인들의 천황에 대한 짝사랑이 일본인을 비극속에 머물게했다.

광기의 시기! 일본인의 모습을 보면, 마치 노예들의 집합소라는 느낌이 든다. 상관이 시키기에, "천황폐하의 뜻"이라는 말에 인간이 저질러서는 안되는 전쟁에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에서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을 우리에게 던졌다. 누구든지 생각하지 않는다면, 누구나 아이히만 처럼 악마가 될 수 있다. 수백만의 유대인을 아우슈비츠에 보냈던 아이히만은 총통 히틀러 명령을 충실히 따랐다. 이것이 옳은 일인지를 생각하지 않고, 명령에 복종했다. 일본에는 수많은 아이히만이 있다. 무사가 천년을 지배했던 사회! 천황을 위해 개인의 목숨을 던지는 사회! 이제는 아베가 전권을 휘둘러도 침묵하는 사회가 되었다. 일본인은 아직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아니, 아직 '자신의 목소리'를 낼 자격을 얻지 못했다. 자유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한다. 일본의 민주주의는 일본이 패전 후, 미국에 의해서 주어진 민주주의였다. 그들은 '주어진 민주주의'의 가치를 아직 모른다. 그리고 '주어진 민주주의'를 누릴 자격을 얻지 못했다. 스스로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기 위해서, 잘못된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서 거리로 뛰쳐나올 용기가 없다면, 그들은 영원히 천황의 노예, 아베의 노리개가 되어야할 것이다.

 

저자 정혜경은 일제의 조선인 강제동원에 무관심한 한국사회에 억울하게 죽어간 그들에게 귀기울이라고 절규하고 있다. 개인 연구자로서는 이룰 수 없는 연구를 위해서 정부가 제발 관심을 갖아 달라고 몸부림치고 있다. '조선인 강제동원'과 일제강점기 일제 식민통치의 실상을 알려주는 서적이 너무도 없다며 한탄한 나에게 정혜경은 역사의 진실을 알려주었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새롭게 밝혀내야할 진실이 많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이며, 기억하는 자의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아픈 역사를 기록하고 기억하지 않는다면, 되풀이되어서는 안되는 역사가 되풀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불행을 막기 위해서 정혜경은 정부의 지원뿐만 아니라, 대중에게 역사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 다양한 역사 콘텐츠를 만들것을 당부한다. '진실의 무게'를 알기 위해서 기억하고 기록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할 길을 이제는 찾아나서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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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유신 초기의 조선침략론 동북아역사재단 교양총서 13
현명철 지음 / 동북아역사재단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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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아베의 도발이 시작되었다. 전범기업 미쓰비시(三菱)가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징용에 대한 배상금지불을 거부하면서 표면화되기 시작한 한일갈등은 아베의 경제전쟁 선포로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아베는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일본 정통 극우파들의 세례를 받은 아베는 다시 한번 '정한론'을 펼치고 있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기 위해서이다. '메이지 유신 초기의 조선 침략론'이라는 책을 꺼내들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1. 일본인의 이중적 한국관

한일간에 경제전쟁이 한창이다. 일본은 반도체 핵심소재에 대해서 한국수출을 금지하고, 한국에 대한 혐한 방송을 매일 송출하고 있다. 이에 우리 정부는 원칙에 따라 대응하고, 국민은 일본 관광을 자제하고, 일본 물품에 대한 불매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러한 때에 아카바 가즈요시 일본 국토교통상은 "우리 정치인들도 한일 우호를 위해 대화해야 합니다. 한국은 일본에 문화를 전해준 은인의 나라입니다." 라는 말을 한일문화축제에서 했다. 한국에 대한 경멸적 말을 하고, 심지어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일본 경제는 되살아난다는 망언을 하는 극우파들을 보아왔던 나로서는 당황스러운 발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인을 이해하려면, '혼네''다테마이'라는 일본의 이중성을 이해해야한다. 그들이 하는 다테마이를 듣고 그들의 혼네라 생각한다면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기 딱 좋다. 일본인의 한국에 대한 생각도 이러한 연장선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는 조선에 관한 두 가지 견해가 존재했다. 하나는 외교 표면에 나타난 적례를 기반으로 한 교린관계이며, 또 다른 하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꿈을 이으려는 대외평창론이었다."-16

 

일찍이 요시다 쇼인도 일본의 '고사기''일본서기'를 읽으며 신공황후 시기의 '위대한' 일본을 재현하기를 소망하지 않았던가! 지진과 화산폭발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섬나라 사람으로서, 대륙으로 나가고 싶은 것은 본능에 가깝다. 그렇다고 이러한 본능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1천년 이상 칼이 지배해온 사회에서 자신의 감정을 날것으로 드러낸다면,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야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들은 이를 숨겼다. '통신사'!! 믿음으로 소통하는 사절이라는 아름다운 뜻을 담고 있다. 그러나 통신사를 맞이면서도 사쓰마번을 비롯한 서남부 다이묘들은 '조선 정벌'이라는 혼네를 감추고 있었다. 이러한 조선관은 쓰시마번도 마찬가지였다. 에도막부가 무너지고 메이지 신정부가 들어서자, 쓰시마번은 조선과의 교린관계를 '구폐'로 멸시한다.

 

"원래 세견을 약속한 것은 차래지식(嗟來之食, 업신여기며 주는 음식)을 받는 것으로 일시적 구급지책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때부터 다년간 영지 회복을 꾀하였지만 불행하게도 성공하지 못하여 조선에 기대지 않고서는 국력을 지탱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잘못된 관례가 생기어 외국에 번신의 예를 취하여 수백년간 굴욕을 받았으니, 분개절치합니다. -1868, 쓰시마 번주 소 요시아키라의 봉답서

 

조선의 교린정책에 따라서 엄청난 경제적 이익을 얻었던 쓰시마번이 "수백년간 굴욕을 받았"다고 말하는 모습에서, 최근 쓰시마섬에서 한국인 관광객을 받지 않는 가게와 숙박업체가 있다는 소식이 떠올랐다. 한국인 관광객의 도움으로 쓰시마섬의 경제가 지탱되는데도 그들은 한국인을 싫어한다. 한국인 관광객이 뚝 끊기자, 지역경제가 위기에 빠졌다며 중앙정부에 대책을 호소하고 있다. ‘혼네다테마이를 이해하지 않는다면, 올바른 한일관계를 정립할 수도 없으며, 일본인을 이해할 수도 없다. 역사는 이를 말해준다.

 

 

2. 정한론의 뿌리

정한론의 뿌리를 캐어본다면, 멀리 '일본서기'에 나와 있는 '임나일본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무의식속에 잠재되어 있었던 정한론을 다시 수면위로 끌어 올린 것은 에도 막부 말기부터라고 할 수 있다.

 

원래 겁이 많고 게으르며 유약한 한인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몇 년 지나지 않아 그들의 관할에 들어갈 것입니다. 일본이 양이를 단행하면 그들(서양)의 불만이 조선을 향하게 되어, 조선을 (침략하여) 교두보 삼아 일본 각 지역을 약탈할 것이므로 이는 쓰시마만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에 큰일입니다. (중략) 서양 오랑캐가 조선에 침입하기 전에 책략을 세워 신군(도쿠가와 이에야스) 이래 200여 년의 화교(신의로써 조선을 원조한다는 뜻)로 복종시키고, 만일 복종하지 않을 때는 병위를 보내야 합니다. -"오시마가 문서"'어원서사'-59

 

일본은 내부의 위기를 외부로 돌리기 위해서 전쟁을 선택했다. 임진왜란도 내부 다이묘들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이킨 전쟁이다. 쓰시마번도 서양세력의 침략이라는 충격속에서 쓰시마번이 살아 남기 위해서 조선 침략이라는 카드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익선''주권선'이라는 개념의 원형이 쓰시마번주의 글에서 묻어나고 있다. 주권선인 일본 본토를 지키기 위해서 조선이라는 이익선을 차지해야한다는 논리는 이미 에도막부 시기부터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 뿌리는 일본의 본능 속에 대륙으로 진출해야한다는 신념으로 잠재해있었을 뿐이다.

일본이 '정한론'을 주장한 직접적인 이유를 우리 교과서에서는 어떻게 서술하고 있을까?

 

"메이지 유신 후 일본은 조선에 새로운 국교 수립을 요청하는 국서를 보냈지만, 조선은 국교 수립을 거부하였다. 이를 빌미로 일본 정부 내에서 조선을 정벌하자는 정한론이 제기되었다."-미래엔,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172

 

우리 교과서에 보이는 이 서술이 사실은 일본측의 주장이었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서 알고 깜짝 놀랐다. 조선이 왕정복고를 알리는 쓰시마 번의 대수대차사를 거절하였기 때문에 일본에서 '정한론'이 발생했다는 주장은 거짓이라고 현명철은 주장한다.

 

"18692월 대수대차사 서계가 조선 조정에 보고 되어 논의되고 있을 때였으며, 받아들이지 말라는 지침이 동래부로 내려오기 전이었다. 동래부가 대수대차사 서계 등본을 보고한 것은 1869년 정월 29일이며, 조정(예조)이 받아들이지 말라는 명령을 동래부에 전달한 것은 18692월 말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 일본에서 등장한 조선 침략론은 조선이 대수대차사 서계를 거절한 것과는 상관없음을 알 수 있다."-84

 

실사구시라는 말이 떠오른다. 과연 그러한지 탐구한 다음에 사실을 믿어야함에도 불구하고, 일본인 학자들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함으로써, 흥선대원군의 어리석은 외교정책으로 '정한론'을 유발시켰다는 생각을 했다. 정한론은 일본의 서계를 받지 않은 우연한 사건에 의해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혼네속에 침잠해있다가 제국주의 시대라는 시대적 조건 속에서 다시 고개를 들었을 뿐이다.

 

3. 강화도조약에 대한 평가

강화도 조약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대부분 일본이 일으킨 운요호 사건에 의해서 맺어진 불평등조약이라고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현명철은 새로운 견해를 제시한다.

 

"조일수호조규는 수많은 갈등과 대화가 결실을 맺은 것임은 강조할 필요가 있다. 오랫동안 쓰시마 번을 매개로 이루어진 양국의 대화가 일본의 정권 교체와 집권 과정을 통해 드디어 정부 간의 대화로 변모한 것이다. 단순히 운요호 사건을 일으킨 일본의 무력에 굴복하여 맺은 조약은 아니었다."-158

 

과히 충격적인 주장이다.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단행한 일본은 폐번치현을 결정한다. 이로인해서 기유약조는 붕괴된다. 조선이 입항절차를 엄중히 관리하던 왜관은 언제 분쟁이 발발할지도 모르는 한일간의 최전선이 된다. 이 시기부터 조선과 일본과는 새로운 외교관계가 정립되어야했다. 이 시기 일본과 조선 사이에 기나긴 줄다리기가 펼쳐진다. 그런데, 우리 교과서는 이에 대한 서술을 무시하고 조용한 아침의 나라 조선에 일본배 운요호가 포격을 하면서 조약체결을 강요했고, 이에 굴복하여 강화도조약이라는 불평등조약을 맺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에 대한 현명철의 날카로운 지적은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이 맺어지는데 운요호사건이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며, 이후, 강화도조약이 일본의 경제침탈의 시작이 되었다는 점을 간과했다는 생각이 든다.

 

짧지만 쉽지 않은 책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어야하는 이유를 현명철은 그의 책 마지막에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주체적인 역사 서술만이 실패로 나타난 사건에서 역사적 교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159

 

일본의 시각에서 한국사를 들여다본다면, 우리의 역사는 나약하고 어리석은 패배의 역사로 비춰질 수밖에 없다. 나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없다면, 그는 타인의 노예가 될 수 밖에 없다. 일본과의 경제전쟁이 한창 진행되는 속에서 우리가 일본여행을 자제하고, 일본제품 소비를 하지 않아야하는 이유는 다시는 그들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일제에 의해서 끊임 없이 주장되어온 '정한론'의 역사를 직시한다면, "No Japan 운동"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눈으로 우리역사를 바로보고, 우리의 행복한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서 나는 오늘도 책을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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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 한국사 : 근대편 쟁점 한국사
이기훈 외 지음 / 창비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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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쟁점 한국사' 얼마나 흥미로운 제목인가! 한국사의 여러 쟁점들을 전문가들이 흥미롭게 서술한 책이다. 박근혜 정권의 '역사쿠데타'에 대항해서 역사학자들이 창비학당에서 강좌를 열고 이를 책으로 엮었다. 그래서 관련 주제에 대해서 상당히 깊이있는 서술이 이뤄졌다. 물론, 배항섭의 '동학농민전쟁을 다시 생각한다.'라는 주제의 경우, 서구학자들의 이름이 난무하고, 그들의 이론이 소개되고 있어 난해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러나, 후반부의 주제들은 상당히 흥미로 곱씹어봐야할 서술들이 많았다. 이미 알고 있는 역사적 주제들을 다시 읽는 것은 역사해석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접하기 위해서이다. 이 책은 나에게 어떠한 관점을 접하게 해주었을까?

 

1. 동학농민운동은 근대민족운동이었을까? 봉건적 근왕운동이었을까?

  뉴라이트 근현대사 교과서에서 동학농민운동을 근왕운동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평가해서 사회적 문제가 되었던적이 있었다. 동학농민운동은 반봉건 반외세의 민족운동이라고 가르치고 배웠던 우리에게는 충격적인 주장이었다. 특히, 이러한 주장을 한 사람이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국적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충격은 더욱 컸다.

  이 책의 제1장 '동학농민전쟁을 다시 생각한다.'에서 저자 배항섭은 근대민족운동이었다는 평가와 봉건적 근왕운동이었다는 평가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관점을 제시햇다.

 

  "민중의식은 지배이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민중들도 지배이념을 전유하고 그에 입각해 '반란'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이 동학농민전쟁이다."-44쪽

 

  사람의 생각이 한순간에 100% 변하기는 힘들다. 피지배층도 지배층이 주입한 이데올로기를 토대로 자신의 입장을 말한다. 그리고 그러한 이데올로기가 혁명적으로 사용되어 사회적 변혁을 일으키기도한다. 고괭이가 평화시에는 농부의 농기구가 되지만, 사회적 분노가 쌓이면 봉기의 도구가 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동학농민운동이 근대민족운동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했던 농민들이 사용했던 표현들을 애써 무시했다. 그에 반해서 동학농민운동이 전근대적 근왕운동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농민들의 언어표현만을 보고 애써 혁명성을 무시했다. 두가지 시각에서 벗어나 배항섭은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새로운 관점을 찾아낼 수 있는 것!! 그것이 역사를 잘읽는 사람의 안목일 것이다.

 

2. 고종의 외교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고종을 '무능한 군주'라고 평가하는 사람과 조선 중립화를 추구했던 명군으로 평가하는 사람이 있다. 일본의 메이지 천황과 동갑내기이면서 먼저 왕위에 올랐으나, 한쪽은 망국의 군주가 되었고, 한쪽은 중흥의 군주가 되었다. 결과를 중시하는 한국사회에서 고종은 '무능한 군주'로 평가 받을 수밖에 없다. 제2장 대한제국 외교의 가능성과 한계에서 저자 은정태는 고종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을미사변 이후에도 고종은 친미, 친러, 친일 외교를 전개한다. 심지어는 중립화 외교를 시도한다. 그러나 고종의 줄기찬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한제국은 패망하게 된다. 은정태는 고종의 필사의 외교적 노력을 소개하며 무척 안타까워한다. 현란한 고종의 외교도 국력이 뒷받침 되지 않는 상황에서 결실을 맺을 수 없었다. 서희의 외교담판을 보면서 담판만 잘 벌이면 국력이 약해도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천하의 서희라도 '안융진 전투'에서 승리하지 못했다면, 담판의 결과가 어떻게 전개될지 장담하지 못했을 것이다. 냉혹한 국제사회에서 스스로 힘을 기르지 못한 나라의 비극은 너무도 비극적이다.

 

3. 사회주의자들은 "종파분자"였는가?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라는 말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도 수많은 당과 이념, 독립운동 노선을 두고 다투었다. 한국 정치를 보더라도 진보적인 정당은 수많은 세포분열을 했다. 그에 비해서 보수는 이익에 뭉친다. 그리고 그 이익을 더 갖기 위해서 노력하다가 부패로 망하고 만다. 이러한 비극은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세력에서도 나타난다. 사회주의 세력의 분파적인 모습을 저자 최규진은 어떻게 평가할까?

 

  "북한에서는 국내 사회주의자들을 '종파분자'라고 재단한다. (중략) 그러나 '전략과 전술'에서 서로 차이가 있어서 따로 했던 것이지 무턱대고 편 가르기를 하는 '종파'는 아니었다. 또 그 '분파'는 일제에 맞서 서로 공동투쟁을 모색한 일도 많다. 북한의 역사인식은 국내 사회주의운동을 깎아내려 '김일성 항일무장투쟁'을 돋보이게 하려는 뜻이 담겨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오직 하나의 역사, 다른 해석을 가로 막고, 여러 목소리를 잠재우는 역사", 그것이 바로 독재사회의 징표임을 북한이 명확하게 보여준다."-199~200쪽

 

  국내의 사회주의운동에 대한 최규진의 평가를 따른다하더라도, 자유시 참변을 일으키는 원인 중에 하나였던, 이르츠쿠파 고려공산당과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대립은 어떻게 평가해야할까? 과거를 무조건 미화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미래를 설계하는데 도움이 될까? 하나로 단결하지 못하고 분열을 했던 지난날의 비극을 직시하는 용기가 우리에게는 필요하지 않을까?

 

4. 청산하지 못한 역사! 비극을 잉태하다.

  잘못된 역사를 청산하지 않는다면 그 역사는 반복된다. 우리 근현대 역사속에는 수많은 비극이 있다. 너무도 많은 비극들 속에서 가장 큰 비극은 '일본군'위안부''문제일 것이다. 일제에 의해서 조선인 여성을 비롯해서 중국, 필리핀 등지의 여성들이 성노예로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했다. 그리고 그 역사는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다. 한번은 박정희가 1965년 '굴욕적인 한일국교정상화'로 인해서, 또한번의 그의 딸이 일본 아베와 맺은 2015년 '일본군 위안부 한일 합의'로 인해서 제대로된 정리가 이뤄지지 않고 비극의 역사가 다시 잉태될 수 있는 실마리를 남겨놓고 있다. 그러나, 박정희와 박근혜 부녀가 저지른 굴욕보다 더 심각한 굴욕은 반민족행위자 처벌 특별법을 만들고서도 친일파 처단에 실패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비극은 '일본군 '위안부''문제가 다시 반복되는 불행을 만들었다. 그 비극은 '한국군 '위안부''와 '미군 '위안부(기지촌 여성)''으로 반복되었다.

  육군본부에서 편찬한 '후방전사'에는 충격적인 '한국군 '위안부''문제가 언급되어 있다.

 

  "후방에서 이성에 대한 동경에서 야기되는 생리작용에 대한 성격의 이상등을 예방하기 위해서 특수위안대를 설치한다."-260쪽

 

  일본육사와 만주군관학교 출신의 친일군인들이 주류를 형성한 한국군의 머릿속에서 '일본군 '위안부''는 군인에게 필요한 존재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소위 '공산주의자'로 지목된 집안의 여성을 군인들의 성 노리개로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들의 생각은 일본제국의 황군이었던 그들에게는 자연스러웠을지도 모른다. 한홍구 교수의 '유신'이라는 책에는 '한국군 '위안부''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서술이 있다. 차마 이를 믿어야할지, 어찌 대처해야할지 분간하기 힘든 고통이 다가온다. 일부의 사람들은 "이 문제가 공론화될 경우 일본 우익에 이용되고 일본의 역사적 책임을 약화시킬 것이라고 우려"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저자 소현숙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이들이(일본군 출신 한국군) 일본으로부터 배운 위안소 정책을 한국전쟁기에 한국군에서 실현했던 것이다. 따라서 한국군 '위안부'의 존재는 감추어야할 일이 아니라, 일본군 '위안부'라는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증거로서 더 많이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261쪽

 

  일제 식민지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댓가는 또다른 모습의 비극을 낳았다. 다시는 한국군 '위안부' 피해자가 만들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현실을 직시해야한다. 한홍구 교수는 '유신'이라는 책에서 박정희가 베트남 파병을 하면서 한국군 '위안부'도 같이 보내려했으나, 다행히도 실현되지는 않았다고 밝혔다. 황군에게 '위안부'는 꼭 필요한 존재로 인식되었나 보다. 그들에게 여성은 성의 배수구였지, 존중의 대상이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소현숙은 '미군 '위안부'(기지촌 여성)'을 일본군 '위안부'의 연장선에서 서술하고 있다. 과연 기지촌 여성을 일본군 '위안부'의 연장선에서 파악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소현숙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취업사기 혹은 인신매매라는 불법성과 관의 개입, 무엇보다 군대의 유지를 위해 도구화한 여성의 성이라는 측면에서 적지 않은 공통분모도 발견할 수 있다."-263쪽

 

  박정희 정권은 성매매가 불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군의 남한 주둔을 유지하고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목적으로 '일종의 포주 노릇'을 했다. 심지어는 국가가 기지촌 여성들에게 '교양'교육까지 했다는 사실은 황군 출신의 정치가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추악한 모습을 실행에 옮긴 것이라는 생각까지 갖게한다.

  비극의 역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않는다면, 비극은 다른 모습으로 되풀이 된다. 다시는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직시해야한다. 가장 큰 고통을 당했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나비기금'을 만들어 한군군에 의해 강간 피해를 당한 베트남 여성을 지원하는 것도 비극의 역사를 직시하려는 고귀한 노력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알리고 일본의 사과를 촉구하는 노력이 나치 유대인 수용소 내부에서 벌어졌던 유대인 여성들의 강제 성노동에 관한 연구를 촉발시키는 한가지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과거를 직시하고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 길고긴 여정을 왜해야하는지를 잘말해주고 있다.

 

 

  하나의 언어를 배우면 새로운 또하나의 세계를 만나게 된다. 새로운 관점이 담긴 역사책을 읽는다면, 새로운 역사의 세계와 만나게 된다. '쟁점 한국사'근대편''은 나에게 새로운 한국 근대사와 만나게 해주었다. 동의하지 못하는 관점도 있지만, 신선한 충격을 준 견해도 많았다. 특히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비극은 되풀이된다는 교훈을 가슴속에 새기게 해주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접하고 새로운 세계와 만나기를 기대해본다.

 

ps. 위안소의 형태 : 군 직영(일본군이 직접 만들어 운영), 군 전용(군이 설치했지만, 민간업자들이 위탁), 군지정 위안소(주둔지 주변 유곽을 일시적으로 점거해 군인만 이용)

1919년 10월 임시정부가 대내외에 알린 민족대표 30인 선언서

  대한민국 원년 3월 1일에 이미 우리 민족의 자유민임을 선언하고 이에 따라 금년 4월 10일에 임시의정원과 임시국무원이 성립되니, 이에 우리 민족은 우리 민족의 일치된 의사와 희망에서 나온 대한민국의 국민이 된지라. 일본이 아직 무력으로 우리 3천리의 국토를 점령했거니와 이는 벨기에의 국토가 일직이 독일의 무력하에 점령되었음과 같은 지라 (중략) 우리 민족은 대한민국의 국민이요, 우리 민족을 통치하는 자는 대한민국의 임시정부니, 우리 민족은 영원히 다시 일본의 지배를 받지 아니할지라(중략) 일본정부에 대하여 조선총독부와 그에 소속된 모든 관청과 육해군을 철거하고 대한민국의 완전한 독립을 확인하기를 요구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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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독립전쟁사의 재조명
이덕일 지음 / 만권당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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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독립운동은 교육에 집중된 것으로 타국과 비교하기가 힘든 특별한 사례이다.' '세계 독립의 역사'를 쓴 알파고 시나씨의 말이다. 우리의 독립 운동사가 무장투쟁이 아닌, 교육운동에 지나치게 치중했다는 주장 자체가 동의하기 힘들었다. 청산리 대첩부터 1930년대 한국 독립군의 대전자령전투와 조선의용대의 태항산 전투를 알파고 시나씨는 알지 못하나 보다. 우리의 항일 무장투쟁사는 지나치게 일반에게 알려져 있지 않으며, 학생들도 공부하기 힘들어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덕일이 '한국 독립전쟁사의 재조명'이라는 책을 썼다는 사실 자체가 무척이나 반가웠다. 그리고 책장을 넘겼다. 이덕일은 나의 기대에 부흥해주는 책을 내주었을까?

 

1. 강자의 정의만이 정의인 세상

  "유전무죄 무전유죄" 1988년 10월 16일 지강헌이 일가족을 인질로 잡고 언론에 한말이다. 감옥을 탈옥한 지강헌의 한국 사법체계, 더 나아가 한국사회의 부조리함을 알리며, 자신의 한맺힌 가슴을 열어 보이고 싶었나보다. 지강헌의 절규는 그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모습은 동아시아 근현대사에서도 목도된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는 전범에 대한 강력한 처벌이 이뤄졌다. 유럽을 전쟁의 도가니로 몰아 넣은 나치 전범에 대한 강력한 응징이었다. 그러나 극동군사재판에서는 제대로된 처벌이 이뤄지지 않았다. 오히려 동양의 히틀러인 히로이토를 살려주고 일본의 통치 협조를 받아내는 거래를 맥아더는 해낸다. 백인만을 위한 정의가 실현되는 장면이다. 미국의 이익앞에 약자의 정의는 관심을 끌지 못했다. 아니, 철저히 무시되었다. 그에반해 일제에 의해서 백인 포로를 감시했던 한국인 B, C급 전범들은 가혹한 처벌이 이어졌다. 극동군사재판에서 중요시여겨진 것은 백인에게 가해진 고통이었다. 약자인 아시아인의 고통에 그들은 관심이 없었다. 힘없는 정의는 정의일 수 없다는 냉엄한 국제사회의 현실을 알려주는 장면이다.

  이덕일은 이 무거운 주제를 서론 '식민사관 재등장의 역사적 배경'에서 담담하게 서술했다. 이 책은 제1부 아나키즘 독립전쟁사와 제2부 한국 독립전쟁사의 몇 장면 보다 서론이 강력한 인상을 주는 책이다.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보며, 친일 청산이 이뤄지지 않은 여러 이유중에 하나를 이덕일은 서론에서 말해주고 있었다.

 

2. 조선인 아나키스트의 불꽃같은 삶

  아나키즘하면 '의열단'이 생각난다. 그런데, 이덕일은 이회영과 이상룡 선생을 떠올린다. 그는 석주 이상룡 선생의 사상을 조명하면서 아나키즘에 관심을 갖는다. 석주 이상룡 선생이 만든 자치조직 경학사와 부민단은 상호부조의 아나키즘의 이상사회와 유사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조직이다. 이 당시 많은 사람들이 아나키즘을 받아들였다. 이덕일은 서구 사상의 맹목적 수용이라는 관점에서 이상룡 선생의 사상을 바라보지 않느다. 아나키즘의 이상으로 생각하는 사회는 동양의 고전에서 강조하는 대동사상과 유사점이 많다. 동양 고전 사상에 바탕을 둔 이상룡 선생의 생각이 서양의 아나키즘과 일치했기에 아나키즘을 받아들였다고 이덕일은 보고 있다. 즉, 서양의 사상을 우리 동양 사상을 기반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장점은 흡수하되 단점은 단점대로 인식하고 비판했던 이상룡 선생의 사상은 '대학'에 " 好而知其惡하며, (고로 이지기악하며), 惡而知其美者가 (악이지기미자가) 天下에 鮮矣니라"라는 말이 있다. '좋아하지만 그 나쁜 점을 알고, 싫어하지만 그 아름다운 점을 아는자가 천하에 드물다.'라는 뜻이다. 석주 이상룡 선생은 서양의 사상을 받아들이면서도 서양사상에 매몰되어 서양사상의 노예가 되지 않았다. 자신의 탄탄한 사상적 기반 위에서 서양사상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였다.

  서양사상을 자신의 주체적 관점에서 소화해서 받아들인 사람은 이상룡 선생뿐만 아니라 이회영 선생이라는 분도 있다. 특히 '양명학의 대동사회가 아나키스트들이 추구하는 이상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그도 일방적 서구문물의 수용을 추구하기 보다는 우리 내부의 사상적 기반위에서 서구의 사상을 수용했다. 사상의 변화는 어느날 갑자기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상당한 내적 성찰과 교류를 통해서 이뤄진다는 점에서 양명학과 아나키즘의 관계에 주목한 이덕일의 주장은 탁월했다.

 

3. 독립운동사의 몇장면

  이덕일은 '한국 독립전쟁사의 몇 장면'이라는 주제로 5가지 주제를 소개하고 있다. '독립 전쟁사'라는 말보다는 '독립운동사'라고 하는 것이 더 합당했다. 우리 독립운동사의 몇장면을 보며 들었던 단상을 적어본다.

  첫째, 높아져가는 고종에 대한 실망감!! 을 들수 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고종이 새벽까지 잔치를 벌이며 놀다가 새벽 4시~7시경에 침소에 들어갔다는 기록을 보고 반신반의했다. 설마, 아무리 망국의 왕이라 할지라도 이정도이기까지 했겠는가? 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덕일은 정환덕의 '남가몽'을 인용해서, "고종이 침소에서 낮 12시 전후에 나오니 백관의 조회는 하지 않아도 저절로 끝나버린다."라는 문장을 소개하며 고종의 자질부족을 지적했다. '매천야록'뿐만 아니라 정환덕의 '남가몽'에서도 고종의 모습이 확인된 것이다. 고종에 대한 실망감은 분노로 이어졌다. 유교에서 강조하는 수신도 제대로 못하는 존재가, 어찌 나라를 제대로 다스릴 수 있겠는가!

  둘째, 아관파천의 목적을 어떻게 파학해야할까? 이덕일은 황현의 '매천야록'을 인용하며 "헌정에 속박되는 것을 싫어했기 대문"에 입헌 정치 체제 수립을 막기 위해 아관파천을 단행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일제가 조선을 이때 보호국으로 만들려했으며, 고종은 을미사변 이후, 자신도 일제에 의해서 암살당할 수 있다는 극도의 불안감 속에서 선교사가 가져온 통조림으로 연명한 사실을 고려한다면, 아관파천은 일제에게서 벗어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고 보아야하지 않을까? 고종을 일방적으로 자질이 부족한 왕으로 평가하려는 이덕일의 주장에는 동조하기가 힘들다. 고종도 일제에 저항하며 왕조를 유지하려 노력한 인물이다.

  셋째,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덕일의 주장에 따르면, 전력상 일본은 청나라를 따라갈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일제가 청나라를 이길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덕일은 일본의 치밀한 전략과 반드시 이기겠다는 결의를 일본승리의 원천으로 꼽는다. 패배주의에 휩싸인 늙은 제국은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존재에게도 어이없는 도주를 일삼는다. 반면, 일제는 정신병적 광기에 휩싸여 돌격앞으로를 감행한다. 전체주의의 광풍에 휩싸인 일제의 모습은 두렵기까지하다.

 

 

  이책은 이덕일이 여러 논문을 묶어 책으로 편찬한 것으로 보인다. 서론, 본론, 결론의 서술구조가 논문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들게한다. 그럼에도 이 책은 이덕일 특유의 필력이 살아있다. 술술 읽히는 쉬운 문장들과 다음 페이지를 궁금하게 만드는 그의 필력이 살아 있다. 그럼에도 제목이 '한국 독립전쟁사의 재조명'임에도 불구하고 항일 무장투쟁사에 대한 서술이 없고, 아나키스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사의 몇몇 장면을 소개한 점은 아쉬움을 남긴다. 이덕일이 우리의 항일 무장투쟁사를 정리한 책을 펴내주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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