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우리돌의 바다 - 국외독립운동 이야기 : 인도, 멕시코, 쿠바, 미국 편 뭉우리돌 1
김동우 지음 / 수오서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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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사는 타인을 울려 슬픔을 퍼트렸고생은 자신을 울려기쁨을 나누게 했다. 삶과 죽음은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한 몸을 쓰면서 다른 얼굴을 하고 항해를 계속했다. - P52

영국군은 예상치 못한 공격에 당황하며 악전고투하게 된다. 상황은 계속 악화됐다. 3월 13일 전원 철수 명령이 하달된다. 일단 임팔로 퇴각해 전열을 정비하란 명령이었다. 그런데 어디로 후퇴를 해야 할지 판단을 할 수 없게 된다. 퇴로가 차단된 것으로 본 것이다.
자칫 부대를 잘못 움직였다간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는 위험한 순간이었다. 영국군 17사단은 전진도 후진도 못하는 독 안에 든 생쥐 꼴이 돼버린다.
이때 인면전구공작대 문용국 부대장이 혜성처럼 등장한다. 그는노획한 일본군 작전 문서 등을 세밀히 판독하고, 포로 심문 등을 통해 일본군 병력 배치 상황을 정확하게 간파한다. 문 부대장의 분석대로라면 일본군 포위 병력은 예상보다 적어야 맞았다. 정보 분석결과가 사단장에게 즉각 보고된다. 곧바로 철수방향이 하달된다.
17사단은 조심스럽게 포위망을 뚫고 티딤에서 임팔까지 180킬로미터를 퇴각해 4월 2일 전원 무사 귀환한다. 이 직후 영국군 사단장이 직접 문 부대장을 찾아 노고를 치하한다.
활약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대적 선무 방송을 펼치는 과정에서일본군 장교 등 30여 명이 귀순했단 내용도 있다.  - P34

내가 그 사람을 쓴 것은 다름 아니라 금일에 한국이 일본과의 늑약으로 일본은 나의 강토를 다 빼앗았으며, 나의 종족을 다 학살하였는바, 내 이를 통분히 여기는 때문에 스티븐즈를 쓴 것이다. 스 - P362

티븐즈라는 사람은 한국에서 고문관으로 있으면서 이등박문과 같이 우리나라를 일본에 보호받게 했고, 그의 불법행위한 것을 숨기려고 미국으로 건너온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한국정부가 일본정부로부터 지배를 받고 보호를 받는 것이 유익한 일이라고 했다. 한국사람이 일본사람에게 국토를 다 빼앗기고, 남김없이 학살되는 것이 잘 되는 일이냐? 스티븐즈는 한국을 배신, 일본을 도와 한국에서 못된 짓을 자행했으니, 우리나라는 망하고, 나의 종족은 다 학살되니, 내 이자를 거져 두랴. 그런고로 내 이 자를 죽이고자 하니.
다른 말할 것 없노라.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San Franciso Chronicle), 1908년 3월 25일 자 보도 - P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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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자령 전투, 어느 독립군의 일기
정상규 지음 / 아틀리에BOOKS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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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발단은 사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독립군 홍범도 부대와 최진동 부대의 예하 1개소대가 각각 북간도 화룡현(和龍縣) 삼둔자(三屯子)를 출발, 월신강을 넘어 간도를 거쳐 두만강을건너와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에 주둔하고 있던1개 소대 규모의 일본군 헌병 국경 초소 지대를 기습 공격해 몰살시켰다. - P101

일본군은 다량의 장비를 자동차와 우마차에 화물을 싣고 대전자령을 향해 출발했다. 행렬의 선두는 화물자동차부대, 가운데는 우마차대, 후미에는 자동차 여러 대가 뒤를 따르며 출발했다.
간도파견군은 이케다 대좌가 인솔하는 회령주둔 보병, 함흥주둔 보병부대 등으로 이루어졌다. - P171

일본군에게 거둔 승리로 군복 3000벌, 군수품200여 마차, 대포 3문, 박격포 10문, 소총 1500정,
담요 300장 등 막대한 전리품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가물었던 땅에 단비가 내린 기분이 들었다. 얼마나 기분 좋게 전리품을 자랑하며 들고 다니던지,
병사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흘러나올 정도였다.
대전자령전투는 한중연합군의 합작으로 이뤄낸쾌거였다. 청산리, 봉오동에 버금가는 빛나는 대첩이었다. - 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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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자령 전투, 어느 독립군의 일기
정상규 지음 / 아틀리에BOOKS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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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0번대 역사 서가에서 '대전자령 전투, 어느 독립군의 일기'를 집어들었다. 독립군의 생생한 이야기를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책이라 생각하고 책장을 넘겼다. 대전자령전투는 독립전쟁 3대 전투중에 하나이며, 제2의 청산리 대첩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전자령전투의 생생한 현장을 눈앞에 펼쳐보게 된다는 설레임이 나를 흥분시켰다. 


  이 책을 읽으며 놀라운 사실 2가지를 알았다. 첫번째는 서문을 읽으며 발견한 사실이다. 지하철 광고로  익숙하게 듣던 '자생한방병원'이 우리 독립군의 군의 신홍균 한의사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현표 선생(훗날 신광열로 개명)이 바로 자생의료재단의 신준식 명예이사장(경희대 한의대 졸업)과 신민식 원장(경희대 한의대 졸업)의 아버님이셨다는 것이다."(12쪽)

  "더욱 놀라운 것은 대한민국 비수술 척추치료의 대표격으로 잘 알려진 자생한방병원 신준식 박사, 신민식 박사 숙조부의 일대기라는 점이다."(16쪽)


  이책에는 신홍균 군의와 독립 운동가 신현표 두분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대전자령 전투에 군의로 참전하신분이 신홍균 군의이고, 신홍균 군의의 조카가 독립운동가 신현표이시다. 특히 신홍균 군의는 한의사로 독립군을 치료하고 이끄는 역할을 하셨고, 독립운동가 신현표는 광주학생 항일운동에 참여했으며, 양의의 한의학을 모두 공부한 명의였다. 

  '수술없이 척추치료를 하는 자생한방병원'이라는 광고 소리가 더 이상 시끄럽게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자생한방병원'이 흥하기를 기원한다. 내가 다니는 한방병원을 '자생한방병원'으로 옳겨야 겠다. 


2. 봉오동 전투의 주인공은 홍범도 장군이 아니었단 말인가?

  이책을 읽으며 충격을 받은 두번째 이야기는 봉오동 전투의 주인공은 홍범도 장군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홍범도 장군은 봉오동 전투 현장에서 작전 계획을 무시하고 자신이 거느린 2개 중대에게 퇴각명령을 지시했으며, 이로인해서 신민단이 위기에 빠졌다는 사실이다. 

  

  "총사령관 최진동은 현장지휘관 중 한 명인 연대장 홍범도가 전투 중에 모두가 함께 준비한 작전대로 응전하지 않고 퇴각 명령을 내려 신민단 대원 수십명을 사망에 이르게 한 것에 대해 크게 분노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를 문책하겠다고 이를 갈던 최진동 장군은 홍범도가 한 행동은 항명죄에 해당하며, 이는 전시에 즉결처분에 해당하는 중죄라고 말했다." (110쪽)


  이 부분을 읽으며 순간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봉오동 전투의 총사령관은 최진동 장군이며, 홍범도 장군은 연대장이다. 그렇다면 주인공은 최진동 장군이 아닌가! 다음 백과사전을 찾아보니, 이것은 겉으로 드러난 편재일뿐 실질적으로는 홍범도가 주인공이라 서술했다. 


" 언제나 겸손하고 공명보다는 실제를 중시하는 홍범도는 대한북로독군부의 행정과 군무를 총괄하는 독군부장(총사령관)의 지위는 최진동에게 돌리고, 자신은 군사지휘권(북로사령부장)만을 맡았다. 이 연합의 결과로 홍범도는 약 1천 명의 독립군을 지휘하게 되었다."(홍범도 - Daum 백과)


  어느 서술이 맞는 이야기일까? 누구의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아야할까? 한사람의 영웅을 만들기 위해서 또다른 영웅을 기억에서 지워버리는 것은 아닐까? 혼란이 밀려왔다. 

  그런데, 단순히 주인공을 바꾸는 수준에서 그친 것이 아니다. 홍범도를 '항명죄'로 다스려야한다는 말까지 나온다. 홍범도가 퇴각명령을 했고, 우박이 내려 독립군이 일본군의 공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서술은 맞는 말인것같다. 그런데, 이것이 전체 전투를 무시한 홍범도의 독단적인 행동으로 인해서 벌어진 독립군의 위기 속에서 펼쳐진 이야기란 말인가? 혼란이 밀려왔다. 정상규 작가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이야기일까? 머릿속이 더욱 혼란스럽다. 


  이 책은 장상규 작가가 새롭게 발굴해낸 두명의 독립 영웅에 대한 이야기이다. 일기형식의 서술로 실감나게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지만, 홍범도 장군과 관련된 논란에 대해서는 작가의 심도있는 설명과 관련자료를 제시했다면 좋았을 것 같다. 소중한 두명의 독립영웅을 만난 것에 기쁨을 느끼며 펜을 내려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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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3-09-27 09: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런 서술은 개인 역사서에 차고도 넘치죠. 서간이나 일기 등이 그렇습니다. 본 책에 실린 일화들은 새로운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기에 좀 더 치밀한 연구가 필요할 듯합니다. 어쨌든 이런 책도 나왔으니 당시 상황을 좀 더 들여다볼 수 있는 사료나 자료를 찾아 교차 검증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겠네요..

감은빛 2023-09-27 10: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야무님과 같은 의견입니다.
과거 역사에 대해 공부하면 할수록 제일 답답한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죠.
남겨진 사료들 중 어떤 것이 더 역사적 사실에 가까운 것일까?
과연 역사적 사실이 있기는 한 것인가?
특히 저 일제시대에는 워낙 사료가 부족하여 더 그렇게 느낄 수 밖에 없는 것 같아요.
 
독립운동 열전 2 - 잊힌 인물을 찾아서 독립운동 열전 2
임경석 지음 / 푸른역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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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둠속에서 빛을 향해 전진하는 것이 독립운동이다. 가느다란 빛줄기를 향해서 오늘의 고통을 인내하며 가시밭길을 맨발로 전진한다. 그러한 존재가 독립운동가이다. 임경석 교수의  '독립운동열전2'를 읽으며 저 멀리 시베리아 벌판에서 만주와 한반도, 그리고 일본 열도를 휘저으면서 조국 독립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청춘을 던졌던 선열들의 뜨거운 열정과 마주했다. 그 과정은 가슴 벅찬 감동이었지만, 가슴시린 아픔이기도했다.

  나의 가슴을 시리게 만든 첫번째 이유는 그들이 일제에게 당한 고문의 고통 때문이다.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의 의해서 잔혹한 고문을 당했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있다. 그러나, 일제가 행한 잔혹한 고문은 독립운동가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훈방조치하는 소년도 고문의 대상이었다. 민형사상의 통상적인 범죄 피의자에게도 고문은 일상적으로 행해졌다. 일제 강점기의 한반도는 거대한 감옥이었다. 

  고문은 남성보다 여성에게 더욱 잔혹했다. 김마리아 여사는 애국부인회라는 비밀결사를 만들었다가 일제에 의해 검거되었다. 고문은 야만적이었고, 살인적이었다. 


  "일본 심문관들은 원하는 정보를 얻기 위해 그녀를 발가벗긴 채 손과 발을 결박했다. 곁에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화로가 놓여 있었고, 인두와 쇠꼬챙이가 그 속에서 벌겋게 타올랐다. 짐승 같은 자들은 끝내 그 도구를 사용하고 말핬다. 화롯불에 달궈진 쇠꼬챙이로 여성 생식기에 화침질을 놓았다."-261쪽


  일본 경찰에게 끌려간 여성 독립운동가들 중에 상당수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광복후, 한국 경찰에 의해서 자행된 성고문의 뿌리는 일제 강점기 일제 경찰에게서 연원을 찾을 수 있었다. 노덕술과 같은 친일 경찰이 광복 후, 한국의 경찰이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군에게 배운 야만적 고문기술을 민주화 운동가에게 사용했다. 독립 운동가의 고통은 친일 경찰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졌다. 

  나의 가슴이 시린 두번째 이유는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의 스파이 혐의로 숙청되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포위망을 뚫고 소련으로 갔다. 그리고 그들중에서 상당수는 돌아오지 못했다. 홍도, 김중한, 김단야 등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스탈린의 광기에 희생되었다. 그들에게 덧씌워진 죄명은 반혁명분자, 일제의 스파이였다. 다른 동지들은 일제에게 체포되었는데 어찌하여 너는 체포되지 않았느냐? 조선과 만주를 어떻게 자주 들락거릴 수 있느냐? 등등의 질문을 던지며 그들을 죄인으로 만들었다. 기민하게 움직여 일제의 포위망을 뚫고 독립운동을 전개한 것이 그들에게는 일제의 스파이라는 증거였다. 

  어찌 스탈리만 그랬는가! 님웨일즈의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도 중국 공산당에 의해서 일제의 밀정이라는 누명을 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독재의 걸림돌을 없애기 위해서, 권력 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독립운동의 영웅을 반혁명분자로 몰아갔다. 일제에 맞서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면 이렇게 씁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의 가슴이 시린 세번째 이유는 일제의 추적을 피해서 치열하게 투쟁하며 광복을 맞이한 독립운동가들이 해방공간 속에서 벌어진 이념투쟁에서 쓰러져갔기 때문이다. 박종근, 박영발, 방준표 등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광복을 맞이했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좌우 이념투쟁의 전쟁터였다. 독립만 된다면 행복한 세상이 펼쳐질줄 알았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새로운 투쟁의 장소가 펼쳐졌다. 일제 강점기에도 살아남았던 그들이 광복후에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죽어갔다. 이러려고 광복을 했단 말인가? 이념의 노예가 되어 동족을 죽고 죽이는 비극이 너무도 진절머리난다. 


  책장을 덮었다. '독립운동 열전2'는 나의 가슴을 너무도 시리게했다. 헐리우드 영화의 성공 공식이 있다. 반드시 해피엔딩을 해야한다. 우리의 독립운동은 해피엔딩이 아니었다. 그들이 그토록 바라던 독립된 조국은 이념투쟁의 전쟁터가 되었다. 조국은 두동강이났고, 친일파가 권력을 잡았다. 어제의 독립운동가는 친일파에게 제거당하거나, 이념투쟁의 희생자가 되었다. 이제 슬픈 영화는 그만보고 싶다. 친일파는 토착왜구가 되었고, 독립운동가는 깨시민(깨어있는 시민)이 되었다. 깨어있는 시민이 토착왜구를 물리치고 해피엔딩을 만들어내길 기대한다. 나도 그 일에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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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23-05-11 12: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제의 만행과 죄는 결코 씻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임계점도 넘어섰습니다.
빌리브란트은 유대인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왜 무릎을 꿇었는지 언론이 묻자 그는 답했습니다, ˝인간의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때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이다.˝

일제가 우리에게 저지른 만행은 인간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이 잔인하고 비열하며 참혹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인간은 100년전의 일이라며 그냥 넘어가자네요. 대한민국 국민이 맞는지 의심스러운 발언입니다.

김마리아 여사의 저고리를 그 후손이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산타냐는 말했습니다. ‘과거를 잊은 사람은 그 과거를 되풀이 함으로서 형벌을 받게될 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잘 알아야하는 이유입니다.
단지 일제가 미워서만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산타냐가 말한 형벌을 받지 않기위해서 우리는 역사를 잊으면 안됩니다.

강나루님의 글을 읽고 용기를 냈습니다.
속에서 열 올라옵니다 ㅠ
그리고 잘 읽었습니다 강나루님.





강나루 2023-05-11 20:54   좋아요 0 | URL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저도 뉴스를 보면 탄식이 절로 올라옵니다.
한류를 일으킨 국민이 저런 머저리를 대표로 뽑았으니 말입니다.

기억의집 2023-05-11 23: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동형의 이이제이 독립운동가들 편 들으면서 가슴이 시린 적이 한 두번이 아닙니다. 생각해 보니 저는 항일 투쟁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역사를 초중고 시절 깊이 배운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요즘은 독립운동가들의 역사를 찾아 듣고 있어요. 너무나 짜증나는 현실입니다…

강나루 2023-05-12 03:52   좋아요 0 | URL
독립운동 연구를 탄압하던 때도 있었고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을 가르치지 않던 때도 있었어요.
이제 독립운동사를 연구하고 가르칠 수 있으니 좋아졌다 말할 수 있을까요?
 
독립운동 열전 2 - 잊힌 인물을 찾아서 독립운동 열전 2
임경석 지음 / 푸른역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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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도쿄 조선인 유학생들의 선언문 사본을 입수하여 그것을 일일이손으로 필사해서 많은 복본을 만든 후 그것들을 고등보통학교 학생들에게 나누어주고, 경성에 있는 모든 고등보통학교의 대표들로 구성된지하 학생위원회의 조직자로 활동했다. 이 위원회는 3월 봉기를 준비하는 센터와 연락을 취하면서 시위에 학생 대중을 동원하고 경성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위원회 멤버들은 자기들끼리역할을 분담하여 선언서를 외국 영사관과 선교단에 전달했고, 나도 그것을 영국 영사 및 프랑스 선교사에게 직접 전해주었다. ‘
-김단야 - P62

3월 1일 후에 나는 학교 동무들과 함께 <반도의 목탁>이라는 이름의 지하인쇄물을 만들었다. 3월 중순에 고향 쪽으로 내려가 시위를 두 곳에서 성공적으로 조직했으나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그로부터 석 달 후, 징역 3개월 대신에 태형 90대를 선고받았는데, 그 이유가 - P65

판사의 말로는 내가 미성년자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3일에 걸쳐 매 90대를 맞고 난 후 석방되었다.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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