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신은 죽었다
프리드리히 니체 & 마르틴 하이데거 지음, 강윤철 옮김 / 스타북스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니체! 내가 니체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중학교 시절 서점에서 였다. 그때 돈으로 천원이면 작은 책한권을 살 수 있었다. 시중의 책을 글자 폰트를 작게하고 얇게 만들어 돈이 부족한 나에게는 참으로 좋은 책이었다. 그 책들 중에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이 나의 눈길을 끌었다. 그리고 그 책을 샀다. 그러나, 5장을 읽고는 다시 책장을 덮었다. 너무도 이해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어른이 되어서 팟캐스트를 통해서 니체에 대한 다양한 강의를 들었다. 그리고 니체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그리고 이책을 꺼내 들었다.

 

1. 불친절한 니체씨!!

  니체는 불친절하다. 자신의 사상을 독자가 알기 쉽게 풀어써주지 않는다. 그런데, 이책의 출판사는 니체 만큼이나 불친절하다. '니체의 신은 죽었다.'라는 책을 마틴 하이데거가 왜? 썼는지, 그리고 이러한 구성을 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독자에게 말해주는 것은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출판사는 이러한 설명도 없이 독자에게 이 책을 읽으라고 한다. 1,2,3부를 읽으며, 이해가 되지 않으면 두번씩 읽으며, 4부의 마틴 하이데거의 '신은 죽었다. '라는 논문을 읽으면 니체에게 성큼 다가서리라 믿었다. 그런데, 아뿔싸!! 니체의 사상을 잘 이해하라고 구성한 4부가 더 이해하기 힘들었다. 니체의 사상에 대한 해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이데거의 사상을 이해해야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했다. 이책의 가장 어려운 부분이 바로 4부였다. 불친절한 니체씨 만큼이나, 하이데거도 불친절했고, 이들을 뛰어넘는 출판사의 불친절함은 나를 감탄하게 했다.

 

2. 여혐 니체!!

  니체라는 이름은 강한 느낌을 준다. 중세의 기나긴 시간동안 인간을 억압해왔던 종교에 맞서서, 당당히 신은 죽었다. 라고 외쳤던 니체!! 당당한 이미지의 니체가 여성 혐오자였다는 사실을 이책을 통해서 알았다. 믿겨지지 않았다. 니체를 연구하는 여자 학자도 있는데, 그 여성학자는 니체의 이러한 여혐론에 대해서 어떠한 기분이 들었을까?

 

"여자는 남자와 동등한 권리를 갖지 못하며 여자가 남자보다 열등하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저없이 주장할 수 있게 된다."

"복수와 사랑에서 여성은 보다 야만적이다."

"여자를 만든 것이 신의 두번째 실수였다."

"여자는 깊이 있는 척하는 껍데기이다."

 

  왜? 이리도 니체는 여성 혐오자가 되었을까? 니체가 강하게 여성을 비하하고 열등한 존재로 규정할 수록, 니체가 측은해지는 것은 왜일까? 그 정답은 그의 인생을 통해서 찾아야하지 않을까? 니체는 아버지가 5살에 돌아가셨기에, 어머니를 비롯한 3명의 고모와 엘리자베트라는 여동생에 둘러싸여 살아야했다. 그는 여성의 옷을 입도록 강요받았다. 이러한 삶이 내면에 침잠하여 여성 혐오로 표출되지 않았을까? 니체가 '힘의 의지'를 추구 한 것도, 강한자가 되어 여성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니체의 '힘의 의지'는 단순히 '폭력'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적 불굴의 신념'을 뜻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여성성을 강요받던 니체는 이 강요로부터 탈피하기 위해서라도 '내적 불굴의 신념'이 필요했을 것이다.

 

"성적인 사랑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그러한 기대를 갖는 것에 대한 수치심이 처음부터 여자를 보는 눈을 망쳐 놓는다."

"늘 깜짝할 사이의 많은 어리석은 행동에 대하여 그대들은 연애라고 부른다."

"결혼하기 전 당신 자신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보라. 즉 나는 이 여자와 늙어서도 여전히 대화를 잘 나눌 수 있을까? 결혼생활은 긴 대화이다."

 

결혼을 하지 않은 니체가 결혼에 대해서, 연애에 대해서 이렇게 깊이 있는 말을 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뿐이 아니다. 여성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말들을 쏟아낸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심리학자 황상민이 한말이 있다. '그들이 하는 말을 거꾸로 생각하며 그들의 마음을 알 수 있다. ' 여성에 대한 혐오와 결혼에 대한 많은 심오한 격언들은 그만큼 니체가 연애와 결혼을 하고 싶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루 살로메와 연애하고 싶었고, 그녀와 결혼하고 싶었지만, 루 살로메는 니체를 거부했다. 루 살로메는 니체와 지적인 대화를 나누고는 싶었지만, 그와 잠자리를 같이하기는 싫었다. 여성으로부터 버림받고, 좌절받은 남자의 상처는 깊다.  2011년 오슬로 북서쪽 30Km에 위치한 노동당 청년캠프 행사장(우퇴위아 섬)에서 극우 청년에 의해서 테러가 일어났다. 그 청년의 말중에서 '나도 여자를 사귈것이다.'라는 말이 생각난다. 또한 극우 청년으로, 여성혐오증을 가지고 있으며, 모범적 단일민족 국가로 한국을 뽑았다는 사실이 인상적이었다. 사랑을 갈구하지만, 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사랑은 분노로 폭발한다. 니체와 노르웨이의 극우청년의 경우, 여성에게 사랑받고 싶고 사랑하고 싶었으나,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폭력적 말이나 행동으로 이것이 표출된 것은 아닐까?

  니체는 수많은 철학자들의 이름을 나열하면서, 철학자는 결혼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단지 소크라테스가 실수를 했을 뿐이라고 한다. 이는 결혼하지 못한 니체 자신에 대한 변명으로 들린다. '나도 연애하고 결혼하고 싶다!! 천재인 내가 무엇인 못나서 여성이 없겠는가?'라는 니체의 절규가 나의 귓가에 들린다. "모든 위대한 사랑은 동정의 단계를 초월해 있다." 진정한 사랑은 동정이 아니며, 상대를 동정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하나의 인간! 하나의 인격체로 사랑한다. 악마가 "신은 죽었다. 인간에 대한 동정 때문에 죽었다."라는 말을 했다는 말도 결국 동정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뜻이다. 니체는 여성에게 동정의 대상이고 싶지 않았다. 한남자로서, 사랑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루 쌀로메에게 니체는 동정의 대상! 그 이상은 아니었나 보다. 니체를 알면 알수록 그가 더욱 측은해지는 것은 왜일까?

 

3. 크리스찬 가정에서 자란 니체!!

 니체를 공부하면서 도올 김용옥 선생이 떠오른다. 크리스찬 가정에서 자라났지만, 현실 교회를 가장 날카롭게 비판한다. 그렇다고 그가 예수님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니체와 도올은 예수를 성인으로 인정한다. 가장 독실한 크리스찬이었기에 예수의 말과 달리살며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기득권을 지키려는 세력에 쓴 소리를 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신의 자식으로서 누구든다 동등하다. 그런데 예수를 영웅으로 만들어 놓다니!'라고 소리친다. 이 말은 '도마복음'에서 예수를 인간으로 표현한 것과 유사하다. 예수와 인간이 동등하다는 니체의 주장은 크리스찬들에게는 엄청난 발발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나는 신에게 영예를 돌려 신을 악의 아버지로 생각"한다는 니체의 말을 가히 충격적이다. 더 큰 폭탄발언을 소개할까? "형제들이여, 내가 지어낸 이 신은 다른 신들이 모두 그러하듯이 사람들이 만들어낸 사람들의 작품에 불과하며 망상에 불과하다.' 니체의 이 말은 자신을 전투적 무신론자로 규정한 니챠드 도킨슨을 떠올리게 한다. 크리스찬 가정의 엄격함이 니체를 이렇게 급진적인 철학자로 키웠던 것일까?

  "저 도덕이야 말로 위협가운데서도 가장 위험한 것이라면?"이라 주장하며 '도덕'에 대한 의심을 한다. 서구 기독교 사회에서 기독교 윤리에 대한 의심은 보통 용기있는 자가 아니라면 할 수 없다. 한편으로는, 니체의 말이 타당해 보이기도 하다. 한사회에서의 도덕이 다른 사회에서는 부도덕한 것으로 규정된다.(공간의 차이) 또한 한시대의 도덕이 다른 시대의 부도덕일 수도 있다.(시간의 차이) 남편이 죽으면 부인이 따라죽는 사티라는 인도의 풍습 과거에는 도덕적인 행동일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시대 인도를 벗어나면 사티는 부도덕한 일이 된다. 그리고 오늘날 사티는 법으로 해서는 안되는 악습으로 규정되어 있다. 현실의 그 어떤 철창도 부수려했던 망치의 철학자 니체! 그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모든 억압을 부수려했다.

  니체를 대표하는 사상중에 하나가 '니힐리즘'이다. 허무주의!! 니체의 니힐리즘은 '최고 가치들이 가치 없어지는 것'을 뜻한다. 이를 하이데거는 '종래의 가치들에 대한 부정은 새로운 가치 선정에 대한 긍정'이라고 말했다. 서구 기독교 도덕에 대한 '니힐리즘'은 새로운 시대의 도덕을 세우기 위한 창조적 파괴일지도 모른다.

 

4. 고통속에 철학을 꽃피운 니체!!

  이책 곳곳에 '병자', '고통', '죽음'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이러한 단어들이 자주 그의 글에 등장한다는 것은 그를 가장 괴롭히는 것이 '질병', '고통',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니체가 매독을 앓기 시작했으며, 결국은 이 매독균이 뇌에 침투하여 그를 미치게 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어느 팟캐스트에서는 뇌종양이 그를 괴롭혔고 이것이 그를 죽음으로 인도했다는 주장을 했다. 매독과 뇌종양 중에서 한가지만이 니체를 괴롭혔다기 보다는 이 모두가 니체를 괴롭혔을 것이다.  

 

"괴로움이 철학을 낳는다면 만약에 생각 자체가 병으로 부터 압력을 받게 된다면 어떻게 될것인가?"

"우리 철학가들 역시 우리가 병이 났을 때는 우리의 몸과 영혼은 병에게 맡기고 우리 자신들로부터 눈을 감아버린다."

"인간의 죽음에 대한 생각을 전혀하지 않은 것을 보는 것은 나에게는 무거운 일이다."

 

니체는 괴로웠을 것이다. 매독은 잠시 발생했다가 치료를 중단하면 잠복기에 들어가고 이 매독이 재발할 경우 척수에도 침투할 수도 있고, 뇌에 침투할 수 있다. 뇌에 침투할 경우, 매독성 치매로 진행된다.그 고통 속에서 니체는 고통과 죽음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니체는 이 고통에 무릎꿇지 않았다. 니체는 '그들에게 있어 삶에 대한 생각이 몇백배나 더 생각할 만큼 가치있는 것이 되도록'하겠다며 당당히 고통과 죽음에 맞선다.

  혹시 니체의 좌우명이 무엇인지 아는가? "상처에 의해 정신이 성장하고 힘이 회복된다."는 그의 좌우명은 고통에 좌절하지 않겠다는 그의 불굴의 의지를 보여준다. 심지어 그는 '모든 경우가 하나의 행운이다. 무엇보다도 전쟁이 그렇다.'며 고통의 극단인 전쟁을 찬미하는 어리석은 모습까지 보인다. 그만큼 그는 절실했다. 고통에 무릎꿇지 않으려 몸부림쳤다. 그러면서 희망을 노래했다. '철학은 고작 신체의 해설과 신체에 대한 오해'라고 말하며, '지금까지 행해진 모든 철학의 목표는 진리가 아닌 다른것 '건강, 미래, 성장, 힘, 생명'이라고 말한다. 신체! 아니 건강한 신체를 그는 희구했다. 그러면서 그는 고통을 승화했다.

 

"내가 심하게 아팠던 시절에 얻은 이득을 난 아직도 다 소모하지 못했다."

"삶이란 또한 우리에게 상처를 입히는 모든 것이다."

"오직 거대한 고통만이 영혼의 최종적인 해방자인 것이다."

 

  니체는 고통속에서도 철학을 했다. 그리고 그 고통을 통해서 우리에게 많은 주옥같은 명언들을 쏟아낸다. "가장 강한자로서 가장 정신적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파멸을 보는 곳에서 행복을 발견한다."라는 그의 말은 병으로 무너져가고 있는 자신은 그 질병을 통해서 더 많은 깨달음을 얻을 것이며, 고통과는 상관 없이 행복하다는 신념을 말하고 있다.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가 떠오른다. 힘든 감옥속에서도 자신의 자유와 신념을 지키려는 지식인의 불굴의 신념이 떠오른다. 20여년을 감옥에서 보내며 인생과 고전의 지혜를 갈고 닦은 신영복이 생각난다. 니체에게 고통은 감옥이었다. 그러나 그 고통이라는 감옥에 굴하지 않고, 신영복이 고전의 지혜를 갈고 닦았듯이, 니체는 고통을 통해서 자신의 철학을 더욱 날카롭게 벼렸다.

  Amorfati(운명애)!!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 서서히 죽어가는 니체는 절규한다. "적어도 나는 언젠가 반드시 하나의 긍정자가 되고 싶다."이 말은 지금은 긍정자가 아니라는 말이 된다. 병마와 싸우며 긍정자가 되기 위해서 니체는 노력한다. "오늘 가장 좋게 웃는 자는 역시 최후에도 웃을 것이다." 지금 당장 웃는다면, 그는 죽을 때도 웃을 것이다. '영원회귀'라는 말을 이때 사용해야되지 않을까? '고통'이라는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며, 긍정자로 살기 위해서 노력한 니체!! 그는 초인을 찾는다. '초인이란 필요한 일을 견디어 나아갈 뿐아니라 그 고난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고통을 견디어 나갈 뿐만 아니라, 고통을 사랑하려하는 니체의 모습이 느껴진다. 세상에 고통까지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까? 더 나아가 상대방의 아픔까지 사랑하는 자가 있을까? 있다면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일 것이다. 사랑할때 우리는 고통을 인내하며 상대방의 고통까지 사랑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할때 초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자랑스럽게 사는 것이 그 이상 가능하지 않을 때, 사람은 자랑스럽게 죽어야 한다."

 

  니체는 자랑스럽게 살고 싶었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죽음을 선택하고 싶었다. 그러나 니체의 이 소망을 이뤄지지 않는다. 1889년 투린에서 마부의 채찍을 맞는 말을 감싸 앉으며 그는 쓰러진다. 인간에 대한 사랑을 뛰어 넘어 살아 있는 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려했던 초인은 그렇게 쓰러졌다. 그리고 10여년을 병실에서 살다가 1900년 바이마르에서 사망한다. 그때가 8월 25일이었다.

 

5. 니체가 들려주는 아포리즘!!

  니체의 글은 문학적이며 많은 명언들로 가득차 있다. 이 책에 소개된 많은 명언들이 나의 가슴을 울리게 한다. 그 명언중에 일부를 소개해본다.

 

"현명한 사람은 자기가 그 법칙을 획득해 낸 윤리 이외의 어떤 윤리도 알지 못한다."

  '그 법칙을 획득해낸 윤리'란 무엇일까? 외부에서 강요되거나 맹목적 복종을 요구하는 윤리를 구체적 '삶의 문답'으로 해부해내는 능력을 말한다. 노예의 윤리를 거부하고 당당히 자신의 윤리로 살면서 주인으로 살아가라는 의미일 것이다.

 

"인간만이 웃음을 고안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깊이 괴로워하고 있다."

  동물중에서 '우울증'을 알고, 스스로의 목숨을 끊고, 혹은 과로사를 하는 동물은 인간이 유일하지 않을까?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가장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는 니체의 탁월한 지적은 한국의 현실에서 너무도 유효하다.

 

"아무것도 버릴 수 없는 자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

  모든 것은 댓가를 필요로한다. 그런데 인간은 아무것도 버리고 싶어하지 않고 더 많은 것을 얻으려한다. 희생없이 댓가만을 바란다면 그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사랑하는 여성을 원한다면 시간과 돈과 사랑을 한여성에게 쏟아야하듯이....

 

"알맞은 정도라면 소유가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 도를 넘어서면 소유가 주인이 되고 소유하는 자가 노예가 된다."

  황금만능의 시대! 감질! 금수저가 활개치는 시대! 우리사회에 적절한 니체의 명언이다. 회사원들을 자신의 기쁨조로 여기며 갑질을 해대는 재벌 2세와 3세는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부로 인해서 물질의 노예가 되었다.

 

"진리는 힘이 필요로 한다."

  '정의는 힘이 필요하다.'라는 말로 치환가능하다. 정의도 진리도, 진실도 힘이 있어야 정의일 수 있고 진리일 수 있다. 세월호의 진실은 촛불혁명이라는 힘을 필요로했고, 그 진실에 다가설 수 있었다.

 

 

   니체는  "그 같은 자유정신은 존재하고 있지도, 전에 존재해 본 적도 없다."라고 말했다. '자유정신에 대한 부정이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몸이 약하고 지독한 고통속에서 살아야했던 니체에게 '자유정신'은 부정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이것이 건강한 육체에 대한 희구로 이어졌을 것이다. '니체의 신은 죽었다.'라는 책을 읽으며, 나는 강한 니체의 모습이 떠오르기 보다는 아프고 고뇌하는 인간 니체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그 고통속에서 완성된 철학을 나의 지식으로 단시일내에 정복하기란 너무도 힘들다. "산맥 중에서 가장 가깝게 가는 길은 산봉우리에서 산봉우리까지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긴 다리를 갖고 있어야만 한다."라는 니체의 말처럼, 그의 명언을 읽기 위해서는 긴다리가 필요했다. 나에게 긴다리가 없다면 긴 장대가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어린시절 기다란 장대를 개울에다 짚고 반대편으로 넘어가던 일이 생각난다. 스타북스 출판사에서 만약 니체를 이해할 수 있는 장대를 이책의 곳곳에 배치했다면 '니체의 신은 죽었다.'라는 책을 읽기에 좀더 수월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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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20-09-03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가 너무 길어 앞에 조금 봤는데 시간이 많으신가 보네요. 저 같으면 리뷰 안 쓰고 책 한권이라도 더 볼 듯^^;;

강나루 2020-09-03 21:25   좋아요 0 | URL
독서 초보는 책을 읽고 독서를 좀한 사람은 책을 읽고 서평을 쓰고 독서 고수는 자신의 책을 쓰지요

candidx 2022-10-16 16: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상세한 리뷰 너무 감사합니다. 책을 읽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강나루 2022-10-16 17:58   좋아요 0 | URL
도움이 되었다니 제가 감사합니다^^
 
세상 벽암록
윤용진 지음 / 애니빅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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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문관'을 강신주 방식으로 풀어낸,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라는 책을 읽고 나서부터 선문답에 대한 책들을 더 읽어 보고 싶었다. 사실 강신주가 '벽암록'을 비롯한 선문답 관련 서적들에 관한 책을 쓰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중에 나와 있는 선문답책들이 쉽게 풀어 놓았다고 말들하지만,  강신주 처럼 쉬우면서도 깊이있는 설명을 해내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깊으면서도 쉽게 글을 쓴다는 것은 왠만한 고수가 아니면 해낼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아무리 기대려도 강신주는 새로운 선문답 관련 책들을 내놓지 않고 있다.그를 기다리느니, 다른 책들을 읽으며 갈증을 해소해 보기로 결심했다. 푸른 바위위에 무엇을 기록했는지, 책제목이 '벽암록'이다. 5권으로 풀어 놓은 벽암록이 있지만,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아마추어가 쉽게 풀이한 '세상 벽암록'을 선택해다. 과연 이책은 선문답에 대한 나의 갈증을 풀어줄 수 있었을까?


1.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조린다.
  강신주의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를 읽고 이 책을 읽으니, 몇개의 화두는 풀 수가 있었고, 몇개는 저자 윤용진의 풀이를 읽고서 이해를 했다. 그런데, 나의 풀이와 저자 윤용진의 풀이가 다른 부분이 있다. 
  제2칙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에 대한 풀이를 어떻게 해야할까?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다만 간택만을 꺼리면 된다. 도의 경지를 말하려는 것도 간택이다. 그러니 도는 명백함도 없다. 라는 조주화상의 말에 수행승이, '명백함이 없다면 무엇을 지켜야 합니까?'라고 묻는다. 그러자 조주화상은 '나는 모른다.'라고 답한다. 이에 대해서 저자 윤용진은 '명확하지도 않으면서 어찌 크다고 할 수 있는가?', '도 또한 그러하지 않는가?'라고 풀이한다. 이러한 풀이가 나로서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수행승의 입장에서는 윤용진의 풀이가 오히려 궁금증을 더해주지 않을까?

  도는 간택을 꺼린다. 도의 경지를 말하려는 것도 간택이다. 간택하지 않으니 도는 명백함도 있을 수 없다. 노자가 말했지 않은가? 도를 도라하면 도라할 수 없다고.... 인간의 개념으로 도를 명백히 규정한다면 도는 하나의 도그마로 떨어진다. 인간의 도그마에 의해서 규정된 도를 과연 도라할 수 있겠는가? 한예를 들어보자. 조선 후기 송시열을 중심으로한 노론세력에 의해서 절대화되고 교조적으로 변한 조선의 성리학을 유학의 정통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들은 주자와 송시열의 사상만을 정통으로 생각하며 독자적인 해석을 시도한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몰아 죽이기까지 했지 않는가? 그들을 학자라 말할 수 있을까? 자신의 생각에 반론을 제기하고 동의하지 않았다고 칼을 들이 대는 행동은 파시스트들이나 하는 야만적인 행동이다. 절대화된 도는 도가 아닌 것이다.

  제3칙 일면 월면 (日面佛 月面佛)에 대한 풀이도 동의할 수 없다. 몸이 아파 누워있는 마조화상에게 원주스님이 '법체가 어떠하십니까?'라고 묻자, 마조화상이 '일면 월면 (日面佛 月面佛) 이네.'라고 답한다. 일면불의 수명은 단 하루요. 월면불의 수명은 8천 1백세이다. 윤용진은 이를 '수명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고 풀이한다. 그럴까? 마조화상의 말씀을 너무 낮은 수준에서 풀이한듯한 인상을 받는다.

  이승에서의 삶은 하루 같이 짧지만(일면불(日面佛)), 저승에서의 삶 혹은 윤회의 삶은 억겁의 시간이다.(월면 (月面佛))라고 해석해야하지 않을까? 마조화상은 지금 이순간의 삶보다는 우주적 시각에서 자신의 삶을 조망하고 있으며, 이러한 시각에서 원주스님의 말에 답하고 있다. 불교의 스케일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한다.

  제20칙 거기엔 뜻이 없다.의 풀이는 너무 의아스럽다. 용아납자가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취미화상이 선판을 가져오라 한다. 용아납자에게 선판을 받아 들고는 즉시 내려쳤다. 이를 윤용진은 "분명 거기엔 아무런 뜻도 없다."라고 풀이했다."라고 풀이한다. 선판과 포단을 내리친 것이 어찌, '거기엔 아무런 뜻도 없다.'라고 풀이되는가? 선판과 포단은 참선을 할 때 필요한 것들이다. 나에게 묻지 말고, 네 스스로 좌선하여 깨달으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것이 '용아납자'를 깨우치는 스승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제29칙 온 세상이 파멸할 때라는 주제는 불교를 순응적인 종교로 오해하기 쉽도록 풀이를 해놓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수행자가 '온 세앙이 파멸할 때' 그것을 따라가겠다고 말하자, 대수화상이 '따라가라!'라고 말한다. 이를 윤용진은 '그날을 맞이하는 수밖에 없다.'라고 풀이했다. 얼마나 순응적인 풀이인가! 나는 풀이를 달리한다. 불교의 생각의 넓이와 폭은 헤아릴 수가 없다. 미륵보살도 56억 8천만년 후에 이 세상에 오신다 하지 않았는가? 그러하기에 온 세상이 파멸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지금의 우주가 사라지고, 새로운 우주가 생성되는 새로운 종말이자, 새로운 시작의 시점이다. 그러하기에 대우주적 순환 속에서 온 세상의 파멸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수행자가 '그것을 따라가겠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대수화상은 '따라가라!'라고 말했던 것이다.

  제63칙 남전의 일도양단에 대한 풀이도 저자와 나의 생각이 다르다. 선승들이 고양이를 가지고 서로 다투자. 남전화상이 고양이를 잡아들고서, '말할 수 있다면 이 고양이를 절단하지 않겠다.'라고 말한다. 선승들이 말이 없자, 남전화상은 칼로 고양이를 두 동강 내어버렸다. 이를 윤용진은 '한번 분열된 국민의 마음을 되돌리기 어렵듯이 한번 죽은 고양이도 다시 살아올 수 없다.'라고 풀이한다. 남전화상이 분열된 선승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고양이의 생명을 거두었다는 풀이로는 남전화상의 의도를 다 설명할 수 없어 보인다. 고양이에 대한 집착이 선승들의 분열을 가져왔으며, 더 나아가서 선승들의 수행을 방해할 것이다. 그 집착을 없애려 고양이를 죽였다고 풀이해야 보다 근본적인 풀이가 되지 않을까?

 

2. 불친절한 용진씨

  이 책은 대중을 위해서 씌여졌다. 그런데, 불교에 대해서 많이 알지 못하는 대중들을 위해서 보다 친절한 풀이를 해주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리 친절하지 않았다.

  제43칙 산놀이를 설명하면서 '오노봉'이 무엇을 뜻하는지 설명해주지 않았다. 또한 제69칙 남전의 일원상 또한 불친절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남전화상이 혜충국사를 만나러 가는 도중에 깨달은 바가 있어, 혜충국사를 만나러 가지 않겠다고 말한 것이라 풀이한다. 그렇다면, 남전화상이 과연 무엇을 깨달았는지를 설명해주어야한다. 그러나, 저자 윤용진은 이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고 넘어간다. 제62칙 우주 가운데 보물은 원문과 저자의 설명을 아무리 읽어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책에는 우리가 한국사 교과서에서 보았던 "혜초"라는 인물의 이름도 등장한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혜초가 맞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설명해 놓지 않아서 알 수가 없다. 화두의 내용을 살펴보면, 혜초스님이 '무엇이 부처입니까?'라는 질문을 하자, 문익화상이 '네가 혜초니라.'라고 말했다. 저자는 '모든 문제의 중심에는 항상 자신이 있다.'라는 뜻으로 풀이했다. 그러나 문익화상이 일깨우고자 했던 참된 의미는 '네가 부처다.'라는 의미를 전달하려한 것이 아닐까?

  저자 윤용진이 스스로 밝혔듯이, 불교 철학자도 아니요, 스님도 아니기에 깊이 있는 설명을 바랬던 것이 무리일 수도 있다. 다음에 '벽암록'의 본칙과 송, 수시, 착어, 평창까지 자세히 설명해 놓은 책을 읽을 때, 이 책과 비교하면서 나름의 이해를 해보기로 마음 먹었다. 이 책은 벽암록의 끝이아니라, 시작점이 셈이다.

 

  불교에 많은 관심이 있는 윤용진이 심혈을 기울여 풀이를 달아 놓았다. 여행을 하면서 틈틈히 볼 수 있는 책이다. 하나의 화두를 읽고 그 뜻풀이를 하고, 이를 윤용진의 풀이와 비교하는 재미가 나름 쏠쏠하다. 선문답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간단히 읽을 수 있는 책으로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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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남자 - 한대 지식의 집대성 오늘 고전을 읽는다 4
이석명 지음 / 사계절 / 2004년 5월
평점 :
절판


  '회남자'! 그 이름도 낯선 책이다. 팟캐스트 '전영관의 30분 책읽기'에서 이윤호선생이 '회남자'에 대해서 소개를 해주어서 처음 알게된 책이다. 한무제의 중앙집권화에 반대하는 사상을 담았기에 결국 무제에 의해서 죽을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 인상적이었다. 책의 두께도 상당히 얇아서 읽기에 부담이 없었다. 책장을 넘겨보자.

 

1. 회남자에 대한 입문서

  '회남자'라는 책이 얇은 책이라는 생각에 책을 읽기 시작했으나, 이 책은 나의 생각과는 달리, 회남자에 대한 입문서였다. 장사 마왕퇴의 발견에서 부터 시작하여 회남왕 유안의 비극적인 가족사를 서술하며 '회남자' 탄생의 배경을 서술한다. 그리고는 '기론'과 '무위'등의 개념을 통해서 '회남자'가 어떠한 의미를 가진 사상서인지를 서술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회남자에 대한 안내서를 만났다는 즐거움도 있었으나, 상당히 가벼운 책이라는 한계점에 아쉬움이 남는다. 음식맛은 보지 못하고, 열심히 레시피만 읽은듯한 느낌이 든다.

 

2. 회남자는 무제에 대항한 책이었을까?

  이윤호선생은 '회남자'를 팟캐스트에서 무제의 중앙집권화에 반대하는 책으로 소개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과연 회남자는 무제에 반기를 든 책일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이 책은 황제와 노자의 사상이 결합된 황로학의 대표적 이론서이다. 무위무불위(無爲無不爲)라는 최고의 통치술을 이루기 위해서, 인재등용, 법치, 시스템마련, 세의 확보 등의 다양한 통치술을 소개하고 있다. '무위'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경지가 아니라, 순리에 따라서 시스템적으로 통치가 이뤄지도록 하여, 통치자가 바삐 움직일 필요가 없는 상태를 '무위'라고 보아야하지 않을까? 무제의 중앙집권화에 반기를 든 책이 아니라, 무제의 중앙집권화를 효율적으로 이뤄낼 수 있는지 그 방도를 알려준 책이라할 수 있다. 황실의 피가 흐르는 유안이, '회남자'가 완성되자 한질을 무제에게 바쳤고, 무제는 이책을 소중히 보관하였다는 사실을 보더라도, '회남자'는 무제의 통치술에 반기를 든 책이 아니라, 무제의 통치술이 보다 효율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그 방법을 알려준 책이었다.

 

3. 성인과 미친자를 구별하라!

  아인슈타인의 비서가 아인슈타인의 강의를 많이 듣다보니, 아인슈타인을 대신해서 특강을 했다고 한다. 강의가 끝나고 학생이 질문을 했다. 비서는 "이질문은 너무도 쉬운 질문입니다. 제 비서도 이에 대답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라며 비서에게 학생의 질문에 대답하도록 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서 막힌 무위(색이무위)와 열린무위(통이무위)의 차이를 알 수 있다. 아인슈타인은 진정으로 과학에 대해서 깨달은 자이고, 아인슈타인의 비서는 깨닫지는 못했으나, 아인슈타인의 겉모습을 흉내낼 수 있는 자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두사람에게 차이는 없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분명한 본질적 차이가 있다. 이것이 막힌 무위와 열린 무위의 차이일 것이다. 세상의 진리를 이야기하면서 집착하지 말라고 강조하면, 자신은 집착을 하지 않는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는 깨달아서 집착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바보이기에 집착할 수 없는 자일 경우가 많다. '회남자'에서는 성인과 미친자의 차이와 공통점을 소개하고 있다. 둘다 근심이 없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지만, 성인은 덕으로 내면의 조화를 유지하는 반면에, 미친자는 화복을 분간 못하여 근심이 없는 자이다. 겉모습만을 보고, 겉모습만을 따라하면서 진정으로 깨달았다고 생각하는자! 그를 경계해야한다. 진정으로 통달하려한다면, 내면에서 부터 깨달음이 우러나와야 할 것이다.

 

4. 즐거움도 경계해야할까?

  회남자에서는 , 인간의 본성은 '고요함'이라고 단정한다. 귀와눈이 소리와 색깔의 즐거움에 지나치게 빠져든다면 오장이 요동하여 안정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고요함'을 잃지 말라고 당부한다. 즐거움 또한 경계하라는 이 말에 대해서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즐거움'을 구분하지 않고, 다양한 즐거움들을 통털어 '즐거움'이라고 단정하여 말하는 것 자체가 무리한 표현이었다. 우리에게 해를 줄 수있는 즐거움은 감각적 쾌락, 즉 sex와 같은 쾌락일 것이다. 너무 지나치게 탐닉하면 정신과 건강을 해칠 수 있는 즐거움이다. 그러나, 지적즐거움이나 이타적 즐거움(봉사활동)과 같은 즐거움은 많이 할 수록 행복하게 우리를 이끌지 않는가! 이들을 구별해서 논지를 전개했다면, 보다 정교하고 치밀한 '회남자'가 되었을 것이다.

 

  중국에는 수많은 고전이 있다. 그 많은 고전들 중에서 새로운 고전 하나를 만났다. 한대의 철학을 집대성한 위대한 작품에 대한 작은 입문서를 읽고, 회남자라는 책이 어떠한 책인지 어렴풋하게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회남자라는 책의 입문서로 훌륭한 책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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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법 노자, 생존과 승리의 제왕학 - 생존의 기술, 승리의 조건, 변화의 전술 제자백가 아카이브 3
임건순 지음 / 서해문집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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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자는 현실 도피자가 아니다!! 우리가 고등학교에서 배운 노자는 혼란한 춘추전국시대에 혼란한 세상을 떠나 산속으로 숨어들어간 운둔자라는 이미지의 노자이다. 너무도 당연한 이러한 이미지를 나이들어서도 가지고 살았다. 그러던중, 팟캐스트 '학자들이 수다'에서 김시천의 색다른 주장을 알게되었다. 노자 주석본 중에서 하상공장주에는 우리가 알고있는 노자와는 전혀다른 노자가 그려져있다. 천의 얼굴을 가진 노자!! 노자 주석서중에서 우리는 왕필본에만 치우쳐 노자를 이해했다. 그러나 하상공장주에 나와있는 노자는 제왕들에게 통치의 기술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리고 같은 팟캐스트에서 임건순의 주장을 들었다. '도덕경'은 병법서이다.!! 무슨말인가? '도덕경'이 병법서라니?? 순간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논어'를 다읽고 나면, '도덕경'에 도전하겠다 다짐했다. 그리고 병법서로 도덕경을 한번 읽어보겠다는 다짐을 했다. 올해 초부터 '도덕경'을 왕필주석본으로 읽고 있다. 그러면서 이 주석을 달리 풀이해보는 연습을 했다. 혼자만은 힘든작업이었다. 그래서 임건순의 '병법노자'를 읽기로 했다. 그 속으로 들어가 보자.

 

1. '도덕경'은 병법서이다.

  사상은 골방에서 세상과 단절되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사상가는 시대와 호흡하면서 시대의 고민을 고민하고 시대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한다. 그 과정에서 사상이 성립한다. 이 평범한 진리를 우리는 '도덕경'을 읽으며 너무도 쉽게 간과했다. 살육과 전쟁, 암투가 난무하던 춘추전국시대! 그그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묘책을 모색하던 과정에서 '도덕경'이 쓰여졌다고 임건순은 주장한다. 탁견이다. 살아남는것! 그것이 절대 과제였던 시대에 당연히 '도덕경'도 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민이 담겨있다. 전쟁이 난무했기에 '도덕경'에는 병법서에서 보았던 구절들이 너무도 많았다.

  '소국과민 (小國寡民)'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나는 전원적인 원시공동체를 생각했다. 그러나 임건순은 '내무반'을 생각했다. 작은 단위로 쪼개고 자신이 입는 옷을 편안하게 생각하게 하며, 맛없는 음식을 맛있게 먹게하고, 죽음을 중히여기도록하는 사회!! 그곳이 바로 군대의 모습이었다. 법가에서 추구했던 '재민지배'가 바로 '소국과민'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백성들을 전쟁터로 보내기에 가장 알맛도록 편재하고 그들을 효과적으로 동원할 수 있도록 우직하게 만들필요를 노자는 잘알고 있었다. 그리고 노자는 '도덕경'에 이를 담았다. 나는 여기에서 생각을 더해보았다. '국'이란 무엇인가? 바로 제후가 사는 곳을 '국'이라했다. 춘추전국시대 제후들이 독립하면서, 제후들이 사는 '국'이 국가가 되었다. 그러면서 '국'의 뜻이 확장되었다. 제후국을 작게하고 그 민을 적게하라는 말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황제라면, 제후들의 발호를 막기 위해서 그들의 힘을 약하게 해야한다. 그리고 그들을 효과적으로 동원해야한다. 순간 나는 무릎을 쳤다. 맞다. '도덕경'은 영락없는 제왕학의 교재이면서 병법서이다. 도덕경을 병법서로 볼 수 있는 근거는 이것 말고도 많았다.

  '성기지 (絶聖棄智)'를 어떻게 해석할까? 성스러운 것을 끊어버리고 지혜를 버려라!! 라고 해석할까? 그런데 임건순은 이를 우직한 병력 자원을 마련하기 위한 방책으로 풀이한다. 먹물든 사람들이 싸우기보다는 자신을 위해서 도망치고 살길을 바라지 않았던가? 맞았다. 화랑 관창을 보며 과거에는 국가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는 위대한 인물이라 평가했으나, 지금 나는 국가주의가 인간을 수단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개탄하고 있다. '인본주의', '개인의 인권', '개인의 가치'라는 고상한 덕목이 나의 머릿속을 채우면서 유한한 자신의 목숨을 영원한 민족과 국가를 위해서 바치라는 말에 코웃음을 치고 있다. '절성기지'는 '소국과민'으로 동원한 병력을 강하고 우직하게 만드는 방법을 논하고 있었다.

  '천지불인(天地不仁)'는 또 어떻게 해석할까? 천지가 불인하다니!! 나쁜 사람은 하늘이 벌을 줄것이라고 믿는 것이 우리들의 사고방식이 아닌가? 그런데 임건순은 이를 승리를 위해 냉정하라! 사람을 짚으로 만든 강아지처럼 취급하라라고 풀이한다. '천지'는 바로 제왕이다. 그리고 장군을 뜻한다. 백성과 병사를 다스릴때는 필요하다면 냉정해져야한다. 때로는 이기기위해서 자신의 병사들을 사지에 몰아 넣어야한다. 그렇기에 '천지는 불인'해야한다. 김유신이 개백의 5천결사대를 이기기 위해서 어린 관창을 사지에 몰아 넣었지 않은가? 장수는 불인해야한다. 불인해야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 노자는 용병술을 말하고 있었다.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라는 구절은 가장 유명한 구절이다. 도올은 이 구절은 만물은 항상 변화한다라는 뜻으로 풀이했다. 그런데, 임건순은 이를 승리의 길은 항상 정해져있지 않다고 풀이한다. 장수가 항상 견지해야할 변화하는 상황속에서 어떻게 전투를 승리로 이끌 것인가를 말한 말로 해석하고 있다. 그래서 때로는 돌아가는 길이 지름길인 경우도 있다. 실생활에서도 이말은 너무도 많이 경험해본다.

 '장생구시(長生久視)'라는 말은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다. 아니, 중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구절일 것이다. 흔히 '도광양회'라는 말을 많이들 들어보았을 것이다. 자신의 뜻을 숨기고 조용히 힘을 그리라는 이 말은, 이미 노자가 했었던 말의 다른 표현이었다. 길게 오래살려면 섯뿔리 나서기 보다는 힘을 길러야한다. 자신의 뜻을 숨기고 때를 기다리는 인내력은 중국인을 당해낼 수 없다. 수많은 전쟁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가야했던 혼란의 역사속에서 중국인들이 몸으로 채득한 교훈을 노자는 이미 그의 책에서 말하고 있었다.

  이책에서 말하고 있는 도덕경의 내용들의 일면만 보더라도 도덕경은 영락없는 병법서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도덕경을 병법서로 보지 않았을까? 라는 의문을 품어본다. 임건순이 놓친 이 부분을 한번 탐구해보자.

 

  2. 우리 역사속의 병법서 '도덕경'

  우리 역사속에서 도덕경이 언제 처음 소개되었을까?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도덕경이 보인다. 고구려 군사를 격파한 태자 근구수가 고구려 군사를 추격하려하자, 신하가 말고삐를 잡으며, '지족불욕(知足不辱) 지지불태(知止不殆)'라는 도덕경의 구절을 인용하며, '태자깨서 족함을 얻었으니, 지금 그친다면 위태롭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자, 영민한 태자 근구수가 이를 따랐다. 놀라운 것은 도덕경을 전쟁에서 인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백제에서도 도덕경을 병법서로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도덕경은 단순한 책이 아니었다. '장욕탈지 필고여지(將欲奪之 必固與之)'라는 말이 있다. 빼앗으려면 먼저 주어야한다. 고구려군사들이 거짓으로 패하고 도망가는 척하며 백제군을 유인할 수 있는 상황에서 추격을 멈춘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의 시에서도 '도덕경'의 냄새가 난다. 족함을 얻었으니 돌아가는 것이 어떠냐는 내용의 시에서 고구려에서도 도덕경을 병법서로 읽었으며, 을지문덕도 도덕경에 능통했을 것으로 상상하게 한다. 임건순도 을지문덕이 시를 지어 조롱한 것이 아니라, '노자'의 지족과 지지라는 병법의 원칙과 지침을 상기시켜 준 것이고, 이에 따라 우중문과 우문술이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탁월한 견해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도덕경은 어떠한 교훈을 주고 있을까?

 

3.  도덕경에 비친 오늘

  도덕경에는 장차 빼앗으려면 먼저 주라고 말한다. 이 구절을 읽을 때, 문재인정권의 탁월한 외교력이 떠올랐다. 외국기자가 북한과의 대화에서 트럼프가 기여를 했는가?라는 질문에 문재인은 아주 많은 기여를 했다고 화답했다. 트럼프에게 많은 것을 얻어내기 위해서 트럼프를 평화의 전도사로 추켜올렸다. 중간선거에서 이겨야만하는 트럼프를 띄워주어 문재인정권은 평화와 대화라는 값진 결실을 얻어내려한 것이다. 도덕경은 이렇게 우리의 외교전에서 많은 외교전략을 제시하고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지금의 미투운동에서도 도덕경은 큰거울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귀해지려면 천함으 근본으로 삼아야하고 높아지려면 반드시 낮음을 바탕으로 해야한다.라는 도덕경의 구절이 있다.  A정치인이 떠오른다. 차기 유력한 대선주자이며, 풍수지리를 하는 분이 A의 손을 잡는 자가 대통령이 될 것이며, 그다음 대권은 A가 거머쥘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런 그가 하루 아침에 파렴치한으로 떨어졌다. 높아지려는 사람이 그 권력을 이용해서 낮은 사람들을 상처주었을때,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주는 현실이다. 물론 아직 사법적인 결론이 아지 않아 뭐라 단정할 수는 없다. 누구의 말처럼 음모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진실이 어떠한 것이든지, 도덕경은 스스로 높아지려면 낮은 곳에 임하고 항상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음을 생각하고 경계하라는 주문을 우리에게 한다. A정치인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항상 조심했어야했다. 자신의 조그만 실수가 상대방에게 공격의 호기가 될수도 있기에 항상 자신을 낮추며 낮은 곳에 임해야했다. 낮은 곳에 임하는 척만으로는 부족했다.

  '도가도 비상도'라는 명언은 패턴이 아니라 전술로 싸워야한다고 말한다. 이는 일상생활에서도 진학지도에서도 드러나는 명언이다. 학생부종합전형의 경우, 처음에는 대학에서 동아리활동을 중시했다. 그런데, 많은 학교에서 동아리활동을 내실있게 적어주자, 이제는 교과세부능력 특기사항을 유심히바라본다. 처음에는 열심히하는 학생들을 많이 써주었다면, 이제는 거의 모든 학생을 잘 써주기에, 대학에서는 동일한 내용은 삭제하고 독특한 내용만을 보기 시작했다고 한다. 전술은 패턴이아니다. 같은 전술은 필패를 부른다. 항상 변화하는 상황속에서 '상도'를 추구하기 보다는 변화하는 전술로 응해야한다. 인생도 전쟁의 일부일수 있으니 말이다.

  학생들에게 6.25를 가르칠 때, 중국이 인해전술을 써서 우리가 1.4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정확히는 인해전술이 아니라 '기동과 포위의 전술'이라고 수정해서 설명했다. 그런데, '인해전술'과 '기동과 포위'전술은 같은 내용이었다. 다시말해서, '인해전술'은 단순한 저글링러쉬가 아니었다. 대병력을 이용해서 은밀히 적 후방에 침투시켜 주요거점과 길목을 장악하고 보급망을 차단하여 적을 고립시키는 고난위의 전술이었다.  '인해전술'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는다면 6.25라는 역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으며, 제대로 가르칠 수도 없다. '인해전술'이 바로 노자의 '이무치유以無治有’의 논리가 실현된 전술이었다.

  '문을 나서지 않고도 천하를 알고 창문으로 내다보지 않아도 천도를 안다.'라는 표현을 임건순은 장막안에서 전략을 짜는 모습이라고 풀이한다. 그리고 전략에서 이겨야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피력한다. 우리 역사속에서도 전투에서 이기고 전쟁에서 패하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신미양요때 포함외교라는 고전적 전술로 미국은 우리를 협상장으로 불러오려했으나, 만명이 죽는다해도 강화는 없다라는 흥선대원군의 전술에 미국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전투에서 미국이 이겼지만, 전쟁에서는 흥선대원군이 이긴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미국 정부는 전략의 패배라고 성토했고, 흥선대원군은 척화비를 세우며 승리를 자축했다. 우리 주변에서도 큰그림을 보지 않아서 인간관계에서 전투에서 승리하고 전쟁에서 패배하는 경우가 많다. 때로는 내가 패배하여 더많은 것을 얻기도 한다. 도덕경은 우리 인생이라는 전쟁터에서 승리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책은 단순히 '도덕경'을 병법으로만 소개하지 않고 법가와 유가를 새롭게 소개하고 있다. 법가와 병가, 노자가 눈이라면, 유가는 귀이며, 묵가는 입이라고 말한다. 중국인이 손자와 노자의 자식이라면, 우리는 공맹의 자식이라고 말한다. 명분과 대의를 중시하며 때로는 교조적이기에 윤봉길과 같은 많은 의사들이 탄생했다. 그리고 붕당정치를 하면서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것도 우리가 공맹의 자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중국인은 실리적이며 그러하기에 의사가 나올 수없다고 말한다. 병법을 주로 읽고, 병법서를 풀이한 책을 쓴 저자는 공맹의 자식인 한국인이 좋다는 아이러니한 말까지 한다. 임건순!! 그는 단순히 현학적인 말들로 고전을 표현하지 않는다. 쉬운말과 색다른 그만의 눈으로 '도덕경'이라는 고전을 새롭게 볼 수있도록 우리를 도와주고 있다. 그의 책을 더 읽어 보고 싶은 욕망이 샘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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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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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여년전 친구에게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책이 참 좋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서점에서 신영복 선생의 '강의'라는 책을 보았다. 독서토론회에서 이 책을 주제로 발제를 하면 좋겠다 싶어서 책을 샀다. 그러나 당시 동양고전에 대한 배경지식이 일천한 나로서는 동양고전들의 핵심을 강의한 이책이 읽기 힘들었다. 결국 '강의'는 책장속에서 10여년을 잠들었다. 그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고, 신영복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한걸음 다가갔다. 팟캐스트에서 낭독해주는 신영복 선생의 책들은 나를 감동시키기 충분했다. 결국 다시 한번 '강의'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강의'를 10여년 동안 나도 얼마나 성장했는지 알아볼 수 있는 거울로 삼아보겠다.

 

1. 감옥에서 시작된 깊은 사색의 결과

  신영복 선생의 글을 속독하기에는 부적합한 책이다. 깊이 있는 사색의 결과로 한글자 한글자 씌여진 책을, 한번에 휙 읽기에는 책에 담긴 생각의 깊이가 너무도 깊다. 낭독 팟캐스트를 통해서 신영복 선생의 글을 듣고, 같은 부분을 눈으로 읽으며 다시 한번 사색하며 읽었다. 그래서 보통의 책들보다 읽는 속도가 무척 느렸다. 사색하며 읽을 수록 책의 맛은 더욱 깊어졌다.

  신영복 선생이 감옥에 갖혀 20여년을 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사형을 언도 받고 나서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주역' 계사전의 이말이 그에게 많은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窮即變 變即通 通即久), 역이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라는 이 말은 곧 사형수 신영복의 궁한 것이 변하여 결국은 통하고 오래간다는 희망을 가게하지 않았을까? 대응! 변화! 응전! 의 과정을 통해서 가장 나락으로 떨어진 삶도 다시 변하여 새로운 희망의 싹으로 다시 태어날 것을 주역은 말하고 있다. 가장 좋은 지천태괘에서도 하락의 시작이 잉태되어 있고, 가장 비천한 천지비괘에서도 희망의 싹을 암시하고 있다. 고정불변한 것은 없다. 위기가 기회가 될 수도 있고, 행운이 불행이 될 수도 있다. 요행히 얻은 복권당첨이라는 행운이 재앙이 되어, 당첨금을 탕진하고 비참한 종말을 고하는 예를 풍문으로 자주 듣는다. 주역에서는 고정불변한 것은 없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행복보다는 행운을 추구하며 오늘을 허비하고 있다.

  항용유회(亢龍有悔)라는 말이 있다. 건위천괘의 상구 효사에 있는 구절이다. 하늘 끝까지 날아오른 용은 후회한다는 경계가 담긴 효사이다. 행운이 불행이 되기도하며, 불행한 곳에서 희망이 싹튼다는 주역의 교훈은 우리의 정치현실에도 적용된다. 이명박근혜 정권 9년 동안, 권력의 핵심에 있었던 사람들은 얼마나 기고만장했는가! 자신의 정권이 영원히 계속되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뉴스를 통해서 전해지는 것 처럼 엄청난 적폐를 저질렀다. 하늘 끝까지 권력을 손에 쥐고 날아오른 그들이 자신의 힘을 남용한 결과 커다란 후회를 하는 현실을 만들어냈다. 그들은 가장 좋은 지천태괴에서 이미 불행을 싹틔우고 있었다. 반면에 폐족이라 스스로를 불렀던 노무현의 사람들은 가장 비천한 천지비괘에서 희망을 싹틔우며 재기했다. 영원불멸한 것은 없다. 권력을 가진자들은 하늘 끝까지 날아 오른 용은 후회한다는 항용유회(亢龍有悔)라는 효사를 반드시 가슴에 새겨두어야할 것이다.  

  감옥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신영복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깨달음을 얻었을까? 20여년 동안의 길고 긴 감옥생활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그는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라는 냉혹한 현실에 직면해야하지 않았을까? 법가를 대표하는 고전이 '한비자'이다. 신영복은 한비자를 강독하며 우리의 현실을 꼬집는다. 우리의 범죄관은 범죄 행위와 불법 행위로 양분하여 범죄를 바라본다. 범죄행위에는 절도와 강도 등의 범죄가 속하고, 불법 행위에는 선거사범, 경제사범, 조세사범이 이에 속한다. 이중에서 범죄행위는 가혹하게도 인간 전체를 범죄행위로 매도하며 그와 접촉하는 것 자체를 죄악시한다. 반면에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무척 관대하다. 사람과 행위를 분리하고 행위의 불법성만을 인정한다. 수많은 불법행위자가 있고 그중에서는 전과 14범인 정치인도 있다. 불법행위자들 중에는 대통령까지 된 사람도 있고, 심지어는 국회의원이 된 사람도 있다. 우리 현실에 녹아있는 범죄관을 신영복의 날카로운 지적에 감탄을 한다. 감옥이라는 현실을 직시하고 이를 분석한 신영복이기에 볼 수있는 우리의 현실이다. 신영복은 귀족도 예외없이 엄형에 처했던 법가를 바로 볼 필요가 있다고 설파하고 있다. 강자에게 관대하고 약자에게 강한 우리의 법집행을 법가들이 바라본다면 뭐라고 말할까?

  신영복은 감옥에서 만나는 선배들로 부터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 지혜를 얻는다. 굴원의 시에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씩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 라는 말이 있다. 생각은 좌경으로 하고, 행동은 우경으로 한다는 말이다. 생각은 비타협적 원칙주의로 하고, 행동은 현실주의와 대중노선을 지키라는 말이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다. 나는 이를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따뜻하게 살아라'라고 풀이했다. 차가운 이성으로 사고하다보면 비관적 현실에 좌절할 수 있다. 암울한 이명박근혜 시기를 살면서 너무도 비관적이었다. 늘어나는 노인인구! 줄어드는 젊은 인구! 그 속에서 진보세력이 권력을 잡기는 요원해보였다. 그럴때마다 나 자신에게 말했다. 어둠속에서 빛을 보는 것이 희망이다. '비관적 현실을 긍정적으로 살자!' 좌와우 양극단을 경계하고 비관적인 현실을 긍정적으로 살아갈 때만이 희망이라는 불빛을 통해서 세상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촛불혁명이 바로 이를 증명해준다.

 

2. 고전 전문가보다 탁월한 고전 해설

  신영복은 그가 말하듯이, 고전 전공자가 아니다. 단지 어려서 할아버지에게 고전을 배웠고, 20여년의 길고긴 세월을 고전을 읽으며 살았다. 그리고 사색하며 자신만의 고전독법을 터득했다. 이러한 고전 독법을 읽으며 무릎을 탁치는 때가 많았다.

  신영복! 그가 가장 중시했던 고전의 글귀는 무엇일까? 나는 석과불식 (碩果不食)이 신영복이 가장 사랑하는 글귀일 것으로 생각한다. 큰 과실은 먹지않고 남겨둔다는 이 말을 읽으며, 농촌에서 감나무에 까치밥을 남겨 놓는 푸근한 인심이 생각나다. 큰 과실을 까치밥으로 남겨두어 자연과 그 과실을 나누고, 그 까치밥이 까치를 통해서 새로운 곳에 싹을 틔워 새로운 감나무를 자라게하는 재생산의 자연의 질서가 느껴지는 글귀이다. 한때 대기업이 골목상권까지 침범하며 자영업자의 생존을 위협했을 때가 있었다. 승자독식의 냉혹한 신자유주의 시대에 석과불식의 삶은 많은 시사점을 준다. 승자독식의 시대에서 석과불식의 사회로 전환되어야 우리 세상이 더 따뜻해질 수 있지 않을까?

  신영복의 깊고 깊은 사색의 결과로 잉태된 주옥같은 해설에는 무엇이 있을까? 지지자불여호지자 호지자불여락지자 (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에 대한 해설을 꼽겠다. 아는자는 좋아하는자만 못하고, 좋아하는자는 즐기는자만 못하다라는 '논어'의 글귀를, 어느 동양철학자는 좋아한다는 '호'와 즐긴다는 '락'은 별차이가 없다고 설명했다. 그때는 좀처럼 동의하고 싶지 않았지만, 명확히 '호'와 '락'의 차이를 설명할 수 없었다. 반면 신영복은 '지'는 대상에 대한 인식이며, '호'는 대상과 주체간의 관계에 관한 이해이고, '락'은 주체와 대상이 원융된 상태라고 설명했다. 같은 춤을 추더라도 단순히 춤을 추는자와 춤과 자신이 혼연일체가 되어 무아의 경지에 오른 사람은 분명히 차원이다르다. 신영복의 독법을 통해서 '논어'를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군자화이부동 소인동이불화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즉, 군자는 화목하되 부화뇌동하지 아니하며 소인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화복하지 못한다.라는 이 글귀를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해했다. 그런데 신영복은 이를 화목과 부화뇌동의 관점에서 벗어나 사회를 바라보는데 적용한다. 즉,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하며 공존하지 못한다.라고 해석했다. 더 나아가 '화동'의 논리로 다양성을 인정하며 지배하려하지 않았던(간접지배하려했던) 중국이 중화패권주의에 휩싸여 지배하려하며 공존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신영복의 해설은 나로하여금, 하나의 미물을 통해서 우주를 조망하는 경지라는 생각을 하게했다. 사회과학을 전공한 신영복이 깊은 사색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나름의 탁월한 경지에 올랐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신영복만의 고전 독법은 무엇일까? ‘득어망전(得魚忘筌)’, 즉, 물고기를 얻으면 통발을 잊어버린다는 말이있다. 신영복은 이 말을 비틀어, 망어득망(忘魚得網)'하라고 당부하고 있다. 고기(현상)는 잊어도 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물(거대한 관계망)을 잊어서는 안된다. 물고기(현상)을 잊어버린다하여도 거대한 그물 즉 거대한 관계망으로 새로운 물고기를 얻을 수 있으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물고기가 아니라 '그물'인 것이다. 고전에 매몰되기 보다는 고전을 현대에 맞도록, 나에게 맞도로 새롭게 독법하는 자신만의 눈을 가질 것을 신영복은 강조하고 있다. 그 새로운 눈(그물)을 갖는 것이 고전 독법의 핵심일 것이다.

  고전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 신영복은 정나라의 차치리라는 사람 이야기를 한다. 차치리는 신발을 사기 위해서 자신의 발을 본뜬 탁을 만들었으나, 신발가게에 와서는 탁을 놓고 온 것을 알고는 다시 집으로가서 탁을 가져온다. 그러나 장은 이미 파하고 신발을 살 수 없었다. 이 때, 사람들이 "어째서 발로 신어보지 않소?"라고 말하자 차치리의 답변이 걸작이다. "탁은 믿을 수 있지만 내 발은 믿을 수 없지요." 신영복은 우리는 차치리와 같은 행동을 하고 있지 않냐고 반문한다. 리포트를 쓰기위애해서 책(탁)을 찾는 우리의 모습에서 차치리를 발견한다. 우리의 현실(발)을 보다는 책(탁)을 믿는 우리를 우리는 경계해야한다. 현실과 함께하라 갖가지 통계지표를 통해서 경제가 좋아졌다고 하지만, 우리 생활에서 이를 느끼지 못한다면 과연 경제가 좋아진 것일까? 고전의 좋은 이야기도 우리 현실과 괴리된다면 그것은 고전으로서 가치가 있을까? 고전독법이 공리공담으로 흐르는 것은 신영복은 경계하고 있다.

  신영복은 관계론적 사고로 동양고전을 읽는다. '주역'을 읽을  때도 효와 괘를 관계론 적으로 읽는다. 관계를 중시하는 학파라하면, 유학을 첫번째로 꼽을 수 있다. 이  책에서도 '논어'에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서술하고 있다. 논어의 위상을 인정하고, 논어를  오늘의 현실에 적용해서 지혜를 얻고자하는 저자의 의도가 읽힌다. 

 

3. 신영복 그가 말하는 고전읽기의 필요성

  그렇다면 고전은 왜? 읽어야할까? 신영복은 대학에서 왜? 자신의 전공도 아닌 고전을 강의했던 것일까? 그 답을 얻기 위해서 고전이 만들어진 배경을 살펴보자. 농경민족은 유한 공간에서 반복적 경험을 쌓아 문화를 만든다. 그래서 '서경'이 탄생했다. 이러한 축적의 문화속에서 '마오어록'도 탄생할 수 있었다. 우리에게는 이상하게 생각되지만, 중국적 전통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유한한 공간에서 무한한 시간적 경험을 하고 이를 통해서 고전이 탄생한다. 반복적 경험 속에서 삶의 지혜를 담는 고전이 탄생하기에 고전은 충분히 읽을만한 가치가 있고 읽을만한 이유가 있다.

  고전을 읽을때 유의할 점이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고전이 고전이 아닌 경우가 있다. 무슨 말인가? '시경'에는 저항시와 노동요가 많다. 그러나 우리의 머리속에는 음풍영월이 시의 본령인 것으로 잘못 이해되고 있다. 시경에도 음풍영월하는 내용이 많으리라는 착각은 지배층의 편향적 여과장치 때문에 생긴 정신세계의 왜곡이다. 꼰대들이 고전을 읽고 자신에게 유리한 것들만 뽑아서 현실을 왜곡하고, 젊은이들을 억누른다. 이는 '논어'를 읽었을 때에도 느낀일이다. 논어 헌문편에(14-46) 原壤夷俟 子曰 幼而不孫弟 長而無述焉 老而不死 是爲賊 以杖叩其脛이라는 말이 있다. 원양이 걸터앉아 있자 공자가 어려서는 공손하지 않았고, 커서는 기억될 만한 을을 하지도 않았으며, 늙어서는 죽지도 않으니, 자네야말로 도둑일세.라며 지팡이로 정강이를 치셨다.라는 내용의 글을 그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고전을 읽어야하는 이유는 꼰대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국부론'에 독점자본가에 대한 경계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독점자본가는 '보이지 않는 손'만을 강조하며 자신에게 더 많은 자유를 달라고 한다. 현명해져라, 실시구시하라, 그러지 않는다면 착취의 지식에 세뇌당할 수 있다!!

  묵자에 '君子不鏡於水, 而鏡於人(군자경어수, 이경어인)'이라는 있다. 군자는 물을 거울로 삼지 않고 사람을 거울로 삼는다는 말이있다. 굴뚝 청소한 쌍둥이가 물에 자신을 비추기 보다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다. 이는 단지 숫검뎅이가 묻었는가를 살피기위함이 아니라,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안색을 살피고 길흉을 살피기 위함이 아닐까? 묵자의 감동적인 말을 가슴에 새기며, 내 주변의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아야겠다. 내 이웃의 얼굴을 살필 눈을 틔우기 위해서 고전을 읽어야하는지도 모른다.

 

4. 고전에서 발견하는 놀라움.

  마가복음6장에는 "선지자는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한다."라는 말이 있다. 이와 비슷한 말이 '묵자'에 있다. 초나라가 송나라를 공격하려는 것을 묵자가 저지했다. 묵자가 돌아가던 중에 비를 만나서 송나라 사람집에 들어가 비를 피하려했으나, 송나라 사람은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드러내지 않고 공을 세운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요란하게 공명을 휘날리며 다투는 자를 더 알아주고 있다. 이러한 일은 왕의 병을 미리알고 고칠 것을 간언했으나, 왕이 병이 없는 자신을 속인다고 편작을 멀리했다가, 왕이 죽은 이야기부터, 자신의 공을 빼앗길 뻔한 롬멜이 선전전에 중요성을 깨닫고 수많은 기록을 남긴 이야기, 황우석이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가 추락한 이야기 등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는 이야기이다.

  네 이웃을 사랑하기를 내몸 같이 하라 라는 말은 누구의 말인가? 놀랍게도 묵자의 말이다. 애인약애기신(愛人若愛其身)은 '묵자' 겸애편에 나와 있는 말이다. 물론 마가보금 12장에 나와있는 말이기도 하다. 묵자의 내용 중에서 성경에 있는 내용과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내용이 많다. 그래서 중국에서 동방박사들이 묵가학파일 것이라 주장하는지도 모른다.

  '순'임금의 아버지 고수가 살인을 했다. 순임금은 어찌해야하는가? 당신이 순임금이라면 어찌할 것인가? 이질문에 어찌 대답하는가에 따라서 당신의 성향이 법가, 법가에 가까운지, 유가에 가까운지 알 수있다. 맹자는 법에 따라 체포하고 사형에 처해야한다고 말한다. 단, 순임금은 자리를 버리고 부친을 몰래 업고 도망가서 부친을 봉양하며 행복하게 살라고 당부한다.

  그럼, 묵가에서는 법가처럼 원칙을 중시한다. 진혜왕이 묵자의 다음 거자 복돈의 아들이 살인을 하자, 사면을 해준다. 그러나 복돈은 사면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그리고는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사형에 처한다. 만약 당신이라면 묵가나 법가의 입장을 택했겠는가? 유가의 입장을 택했겠는가?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이라는 말을 아는가? 물론 알 것이다. 그럼 그다음 구절, 명가명 상명(名可名 非常名)은 아는가? 그래 알것이다. 도를 도라할 수있으면 항상 그러한 도가아니요, 가히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라니, 무슨 말인가? 신영복은 개미를 들어 설명한다. 개미에게 물어보면 '개미'는 자기 이름이 아니다. 개념이란 그릇은 작은 것이다. 그릇으로 바닷물을 뜨면 그것은 이미 바다가 안니다. 이 얼마나 탁월한 해설인가? 우리가 개미를 개미라 부르지만, 어느 누구도 개미가 자신을 개미라고 생각할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는가? 다양한 관점에서 사람을 관계론적으로 파악하는 것!! 그것이 고전독법에 엄청난 파괴력을 갖을 줄은 몰랐다.

 

 경제학 전공자인 신영복은 소비를 미덕으로 생각하는 자본주의에 대해서 의문을 갖는다. '묵자'를 읽으며 거리를 가득채운 음식점이 불황을 겪지 않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외식을 해야하는가를 걱정한다. 신자유주의 자본질서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모습에서 신영복은 경제학자라기 보다는 인문학자로 보아야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사실이란 조각그림이라고 말한다. 사실의 조합에 의해서 비로소 진실이 창조되는 것이다. 부분의 합은 전체가 아니다. 1+1은 시너지를 발휘하여 2 이상의 힘을 발휘한다. 진실을 보려면 한조각의 사실 그이상을 보아야한다. 한조각 사실로 진실과 진리를 바라보려면 자신만의 고전 독법을 가져야한다. 신영복의 '나의 동양 고전 독법 강의'는 자신만의 고전독법을 만드는데 도움을 주는 명저이다. 그의 마지막 강의 '담론'도 읽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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