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법 노자, 생존과 승리의 제왕학 - 생존의 기술, 승리의 조건, 변화의 전술 제자백가 아카이브 3
임건순 지음 / 서해문집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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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자는 현실 도피자가 아니다!! 우리가 고등학교에서 배운 노자는 혼란한 춘추전국시대에 혼란한 세상을 떠나 산속으로 숨어들어간 운둔자라는 이미지의 노자이다. 너무도 당연한 이러한 이미지를 나이들어서도 가지고 살았다. 그러던중, 팟캐스트 '학자들이 수다'에서 김시천의 색다른 주장을 알게되었다. 노자 주석본 중에서 하상공장주에는 우리가 알고있는 노자와는 전혀다른 노자가 그려져있다. 천의 얼굴을 가진 노자!! 노자 주석서중에서 우리는 왕필본에만 치우쳐 노자를 이해했다. 그러나 하상공장주에 나와있는 노자는 제왕들에게 통치의 기술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리고 같은 팟캐스트에서 임건순의 주장을 들었다. '도덕경'은 병법서이다.!! 무슨말인가? '도덕경'이 병법서라니?? 순간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논어'를 다읽고 나면, '도덕경'에 도전하겠다 다짐했다. 그리고 병법서로 도덕경을 한번 읽어보겠다는 다짐을 했다. 올해 초부터 '도덕경'을 왕필주석본으로 읽고 있다. 그러면서 이 주석을 달리 풀이해보는 연습을 했다. 혼자만은 힘든작업이었다. 그래서 임건순의 '병법노자'를 읽기로 했다. 그 속으로 들어가 보자.

 

1. '도덕경'은 병법서이다.

  사상은 골방에서 세상과 단절되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사상가는 시대와 호흡하면서 시대의 고민을 고민하고 시대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한다. 그 과정에서 사상이 성립한다. 이 평범한 진리를 우리는 '도덕경'을 읽으며 너무도 쉽게 간과했다. 살육과 전쟁, 암투가 난무하던 춘추전국시대! 그그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묘책을 모색하던 과정에서 '도덕경'이 쓰여졌다고 임건순은 주장한다. 탁견이다. 살아남는것! 그것이 절대 과제였던 시대에 당연히 '도덕경'도 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민이 담겨있다. 전쟁이 난무했기에 '도덕경'에는 병법서에서 보았던 구절들이 너무도 많았다.

  '소국과민 (小國寡民)'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나는 전원적인 원시공동체를 생각했다. 그러나 임건순은 '내무반'을 생각했다. 작은 단위로 쪼개고 자신이 입는 옷을 편안하게 생각하게 하며, 맛없는 음식을 맛있게 먹게하고, 죽음을 중히여기도록하는 사회!! 그곳이 바로 군대의 모습이었다. 법가에서 추구했던 '재민지배'가 바로 '소국과민'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백성들을 전쟁터로 보내기에 가장 알맛도록 편재하고 그들을 효과적으로 동원할 수 있도록 우직하게 만들필요를 노자는 잘알고 있었다. 그리고 노자는 '도덕경'에 이를 담았다. 나는 여기에서 생각을 더해보았다. '국'이란 무엇인가? 바로 제후가 사는 곳을 '국'이라했다. 춘추전국시대 제후들이 독립하면서, 제후들이 사는 '국'이 국가가 되었다. 그러면서 '국'의 뜻이 확장되었다. 제후국을 작게하고 그 민을 적게하라는 말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황제라면, 제후들의 발호를 막기 위해서 그들의 힘을 약하게 해야한다. 그리고 그들을 효과적으로 동원해야한다. 순간 나는 무릎을 쳤다. 맞다. '도덕경'은 영락없는 제왕학의 교재이면서 병법서이다. 도덕경을 병법서로 볼 수 있는 근거는 이것 말고도 많았다.

  '성기지 (絶聖棄智)'를 어떻게 해석할까? 성스러운 것을 끊어버리고 지혜를 버려라!! 라고 해석할까? 그런데 임건순은 이를 우직한 병력 자원을 마련하기 위한 방책으로 풀이한다. 먹물든 사람들이 싸우기보다는 자신을 위해서 도망치고 살길을 바라지 않았던가? 맞았다. 화랑 관창을 보며 과거에는 국가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는 위대한 인물이라 평가했으나, 지금 나는 국가주의가 인간을 수단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개탄하고 있다. '인본주의', '개인의 인권', '개인의 가치'라는 고상한 덕목이 나의 머릿속을 채우면서 유한한 자신의 목숨을 영원한 민족과 국가를 위해서 바치라는 말에 코웃음을 치고 있다. '절성기지'는 '소국과민'으로 동원한 병력을 강하고 우직하게 만드는 방법을 논하고 있었다.

  '천지불인(天地不仁)'는 또 어떻게 해석할까? 천지가 불인하다니!! 나쁜 사람은 하늘이 벌을 줄것이라고 믿는 것이 우리들의 사고방식이 아닌가? 그런데 임건순은 이를 승리를 위해 냉정하라! 사람을 짚으로 만든 강아지처럼 취급하라라고 풀이한다. '천지'는 바로 제왕이다. 그리고 장군을 뜻한다. 백성과 병사를 다스릴때는 필요하다면 냉정해져야한다. 때로는 이기기위해서 자신의 병사들을 사지에 몰아 넣어야한다. 그렇기에 '천지는 불인'해야한다. 김유신이 개백의 5천결사대를 이기기 위해서 어린 관창을 사지에 몰아 넣었지 않은가? 장수는 불인해야한다. 불인해야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 노자는 용병술을 말하고 있었다.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라는 구절은 가장 유명한 구절이다. 도올은 이 구절은 만물은 항상 변화한다라는 뜻으로 풀이했다. 그런데, 임건순은 이를 승리의 길은 항상 정해져있지 않다고 풀이한다. 장수가 항상 견지해야할 변화하는 상황속에서 어떻게 전투를 승리로 이끌 것인가를 말한 말로 해석하고 있다. 그래서 때로는 돌아가는 길이 지름길인 경우도 있다. 실생활에서도 이말은 너무도 많이 경험해본다.

 '장생구시(長生久視)'라는 말은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다. 아니, 중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구절일 것이다. 흔히 '도광양회'라는 말을 많이들 들어보았을 것이다. 자신의 뜻을 숨기고 조용히 힘을 그리라는 이 말은, 이미 노자가 했었던 말의 다른 표현이었다. 길게 오래살려면 섯뿔리 나서기 보다는 힘을 길러야한다. 자신의 뜻을 숨기고 때를 기다리는 인내력은 중국인을 당해낼 수 없다. 수많은 전쟁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가야했던 혼란의 역사속에서 중국인들이 몸으로 채득한 교훈을 노자는 이미 그의 책에서 말하고 있었다.

  이책에서 말하고 있는 도덕경의 내용들의 일면만 보더라도 도덕경은 영락없는 병법서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도덕경을 병법서로 보지 않았을까? 라는 의문을 품어본다. 임건순이 놓친 이 부분을 한번 탐구해보자.

 

  2. 우리 역사속의 병법서 '도덕경'

  우리 역사속에서 도덕경이 언제 처음 소개되었을까?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도덕경이 보인다. 고구려 군사를 격파한 태자 근구수가 고구려 군사를 추격하려하자, 신하가 말고삐를 잡으며, '지족불욕(知足不辱) 지지불태(知止不殆)'라는 도덕경의 구절을 인용하며, '태자깨서 족함을 얻었으니, 지금 그친다면 위태롭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자, 영민한 태자 근구수가 이를 따랐다. 놀라운 것은 도덕경을 전쟁에서 인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백제에서도 도덕경을 병법서로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도덕경은 단순한 책이 아니었다. '장욕탈지 필고여지(將欲奪之 必固與之)'라는 말이 있다. 빼앗으려면 먼저 주어야한다. 고구려군사들이 거짓으로 패하고 도망가는 척하며 백제군을 유인할 수 있는 상황에서 추격을 멈춘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의 시에서도 '도덕경'의 냄새가 난다. 족함을 얻었으니 돌아가는 것이 어떠냐는 내용의 시에서 고구려에서도 도덕경을 병법서로 읽었으며, 을지문덕도 도덕경에 능통했을 것으로 상상하게 한다. 임건순도 을지문덕이 시를 지어 조롱한 것이 아니라, '노자'의 지족과 지지라는 병법의 원칙과 지침을 상기시켜 준 것이고, 이에 따라 우중문과 우문술이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탁월한 견해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도덕경은 어떠한 교훈을 주고 있을까?

 

3.  도덕경에 비친 오늘

  도덕경에는 장차 빼앗으려면 먼저 주라고 말한다. 이 구절을 읽을 때, 문재인정권의 탁월한 외교력이 떠올랐다. 외국기자가 북한과의 대화에서 트럼프가 기여를 했는가?라는 질문에 문재인은 아주 많은 기여를 했다고 화답했다. 트럼프에게 많은 것을 얻어내기 위해서 트럼프를 평화의 전도사로 추켜올렸다. 중간선거에서 이겨야만하는 트럼프를 띄워주어 문재인정권은 평화와 대화라는 값진 결실을 얻어내려한 것이다. 도덕경은 이렇게 우리의 외교전에서 많은 외교전략을 제시하고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지금의 미투운동에서도 도덕경은 큰거울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귀해지려면 천함으 근본으로 삼아야하고 높아지려면 반드시 낮음을 바탕으로 해야한다.라는 도덕경의 구절이 있다.  A정치인이 떠오른다. 차기 유력한 대선주자이며, 풍수지리를 하는 분이 A의 손을 잡는 자가 대통령이 될 것이며, 그다음 대권은 A가 거머쥘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런 그가 하루 아침에 파렴치한으로 떨어졌다. 높아지려는 사람이 그 권력을 이용해서 낮은 사람들을 상처주었을때,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주는 현실이다. 물론 아직 사법적인 결론이 아지 않아 뭐라 단정할 수는 없다. 누구의 말처럼 음모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진실이 어떠한 것이든지, 도덕경은 스스로 높아지려면 낮은 곳에 임하고 항상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음을 생각하고 경계하라는 주문을 우리에게 한다. A정치인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항상 조심했어야했다. 자신의 조그만 실수가 상대방에게 공격의 호기가 될수도 있기에 항상 자신을 낮추며 낮은 곳에 임해야했다. 낮은 곳에 임하는 척만으로는 부족했다.

  '도가도 비상도'라는 명언은 패턴이 아니라 전술로 싸워야한다고 말한다. 이는 일상생활에서도 진학지도에서도 드러나는 명언이다. 학생부종합전형의 경우, 처음에는 대학에서 동아리활동을 중시했다. 그런데, 많은 학교에서 동아리활동을 내실있게 적어주자, 이제는 교과세부능력 특기사항을 유심히바라본다. 처음에는 열심히하는 학생들을 많이 써주었다면, 이제는 거의 모든 학생을 잘 써주기에, 대학에서는 동일한 내용은 삭제하고 독특한 내용만을 보기 시작했다고 한다. 전술은 패턴이아니다. 같은 전술은 필패를 부른다. 항상 변화하는 상황속에서 '상도'를 추구하기 보다는 변화하는 전술로 응해야한다. 인생도 전쟁의 일부일수 있으니 말이다.

  학생들에게 6.25를 가르칠 때, 중국이 인해전술을 써서 우리가 1.4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정확히는 인해전술이 아니라 '기동과 포위의 전술'이라고 수정해서 설명했다. 그런데, '인해전술'과 '기동과 포위'전술은 같은 내용이었다. 다시말해서, '인해전술'은 단순한 저글링러쉬가 아니었다. 대병력을 이용해서 은밀히 적 후방에 침투시켜 주요거점과 길목을 장악하고 보급망을 차단하여 적을 고립시키는 고난위의 전술이었다.  '인해전술'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는다면 6.25라는 역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으며, 제대로 가르칠 수도 없다. '인해전술'이 바로 노자의 '이무치유以無治有’의 논리가 실현된 전술이었다.

  '문을 나서지 않고도 천하를 알고 창문으로 내다보지 않아도 천도를 안다.'라는 표현을 임건순은 장막안에서 전략을 짜는 모습이라고 풀이한다. 그리고 전략에서 이겨야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피력한다. 우리 역사속에서도 전투에서 이기고 전쟁에서 패하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신미양요때 포함외교라는 고전적 전술로 미국은 우리를 협상장으로 불러오려했으나, 만명이 죽는다해도 강화는 없다라는 흥선대원군의 전술에 미국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전투에서 미국이 이겼지만, 전쟁에서는 흥선대원군이 이긴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미국 정부는 전략의 패배라고 성토했고, 흥선대원군은 척화비를 세우며 승리를 자축했다. 우리 주변에서도 큰그림을 보지 않아서 인간관계에서 전투에서 승리하고 전쟁에서 패배하는 경우가 많다. 때로는 내가 패배하여 더많은 것을 얻기도 한다. 도덕경은 우리 인생이라는 전쟁터에서 승리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책은 단순히 '도덕경'을 병법으로만 소개하지 않고 법가와 유가를 새롭게 소개하고 있다. 법가와 병가, 노자가 눈이라면, 유가는 귀이며, 묵가는 입이라고 말한다. 중국인이 손자와 노자의 자식이라면, 우리는 공맹의 자식이라고 말한다. 명분과 대의를 중시하며 때로는 교조적이기에 윤봉길과 같은 많은 의사들이 탄생했다. 그리고 붕당정치를 하면서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것도 우리가 공맹의 자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중국인은 실리적이며 그러하기에 의사가 나올 수없다고 말한다. 병법을 주로 읽고, 병법서를 풀이한 책을 쓴 저자는 공맹의 자식인 한국인이 좋다는 아이러니한 말까지 한다. 임건순!! 그는 단순히 현학적인 말들로 고전을 표현하지 않는다. 쉬운말과 색다른 그만의 눈으로 '도덕경'이라는 고전을 새롭게 볼 수있도록 우리를 도와주고 있다. 그의 책을 더 읽어 보고 싶은 욕망이 샘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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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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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여년전 친구에게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책이 참 좋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서점에서 신영복 선생의 '강의'라는 책을 보았다. 독서토론회에서 이 책을 주제로 발제를 하면 좋겠다 싶어서 책을 샀다. 그러나 당시 동양고전에 대한 배경지식이 일천한 나로서는 동양고전들의 핵심을 강의한 이책이 읽기 힘들었다. 결국 '강의'는 책장속에서 10여년을 잠들었다. 그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고, 신영복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한걸음 다가갔다. 팟캐스트에서 낭독해주는 신영복 선생의 책들은 나를 감동시키기 충분했다. 결국 다시 한번 '강의'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강의'를 10여년 동안 나도 얼마나 성장했는지 알아볼 수 있는 거울로 삼아보겠다.

 

1. 감옥에서 시작된 깊은 사색의 결과

  신영복 선생의 글을 속독하기에는 부적합한 책이다. 깊이 있는 사색의 결과로 한글자 한글자 씌여진 책을, 한번에 휙 읽기에는 책에 담긴 생각의 깊이가 너무도 깊다. 낭독 팟캐스트를 통해서 신영복 선생의 글을 듣고, 같은 부분을 눈으로 읽으며 다시 한번 사색하며 읽었다. 그래서 보통의 책들보다 읽는 속도가 무척 느렸다. 사색하며 읽을 수록 책의 맛은 더욱 깊어졌다.

  신영복 선생이 감옥에 갖혀 20여년을 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사형을 언도 받고 나서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주역' 계사전의 이말이 그에게 많은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窮即變 變即通 通即久), 역이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라는 이 말은 곧 사형수 신영복의 궁한 것이 변하여 결국은 통하고 오래간다는 희망을 가게하지 않았을까? 대응! 변화! 응전! 의 과정을 통해서 가장 나락으로 떨어진 삶도 다시 변하여 새로운 희망의 싹으로 다시 태어날 것을 주역은 말하고 있다. 가장 좋은 지천태괘에서도 하락의 시작이 잉태되어 있고, 가장 비천한 천지비괘에서도 희망의 싹을 암시하고 있다. 고정불변한 것은 없다. 위기가 기회가 될 수도 있고, 행운이 불행이 될 수도 있다. 요행히 얻은 복권당첨이라는 행운이 재앙이 되어, 당첨금을 탕진하고 비참한 종말을 고하는 예를 풍문으로 자주 듣는다. 주역에서는 고정불변한 것은 없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행복보다는 행운을 추구하며 오늘을 허비하고 있다.

  항용유회(亢龍有悔)라는 말이 있다. 건위천괘의 상구 효사에 있는 구절이다. 하늘 끝까지 날아오른 용은 후회한다는 경계가 담긴 효사이다. 행운이 불행이 되기도하며, 불행한 곳에서 희망이 싹튼다는 주역의 교훈은 우리의 정치현실에도 적용된다. 이명박근혜 정권 9년 동안, 권력의 핵심에 있었던 사람들은 얼마나 기고만장했는가! 자신의 정권이 영원히 계속되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뉴스를 통해서 전해지는 것 처럼 엄청난 적폐를 저질렀다. 하늘 끝까지 권력을 손에 쥐고 날아오른 그들이 자신의 힘을 남용한 결과 커다란 후회를 하는 현실을 만들어냈다. 그들은 가장 좋은 지천태괴에서 이미 불행을 싹틔우고 있었다. 반면에 폐족이라 스스로를 불렀던 노무현의 사람들은 가장 비천한 천지비괘에서 희망을 싹틔우며 재기했다. 영원불멸한 것은 없다. 권력을 가진자들은 하늘 끝까지 날아 오른 용은 후회한다는 항용유회(亢龍有悔)라는 효사를 반드시 가슴에 새겨두어야할 것이다.  

  감옥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신영복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깨달음을 얻었을까? 20여년 동안의 길고 긴 감옥생활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그는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라는 냉혹한 현실에 직면해야하지 않았을까? 법가를 대표하는 고전이 '한비자'이다. 신영복은 한비자를 강독하며 우리의 현실을 꼬집는다. 우리의 범죄관은 범죄 행위와 불법 행위로 양분하여 범죄를 바라본다. 범죄행위에는 절도와 강도 등의 범죄가 속하고, 불법 행위에는 선거사범, 경제사범, 조세사범이 이에 속한다. 이중에서 범죄행위는 가혹하게도 인간 전체를 범죄행위로 매도하며 그와 접촉하는 것 자체를 죄악시한다. 반면에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무척 관대하다. 사람과 행위를 분리하고 행위의 불법성만을 인정한다. 수많은 불법행위자가 있고 그중에서는 전과 14범인 정치인도 있다. 불법행위자들 중에는 대통령까지 된 사람도 있고, 심지어는 국회의원이 된 사람도 있다. 우리 현실에 녹아있는 범죄관을 신영복의 날카로운 지적에 감탄을 한다. 감옥이라는 현실을 직시하고 이를 분석한 신영복이기에 볼 수있는 우리의 현실이다. 신영복은 귀족도 예외없이 엄형에 처했던 법가를 바로 볼 필요가 있다고 설파하고 있다. 강자에게 관대하고 약자에게 강한 우리의 법집행을 법가들이 바라본다면 뭐라고 말할까?

  신영복은 감옥에서 만나는 선배들로 부터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 지혜를 얻는다. 굴원의 시에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씩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 라는 말이 있다. 생각은 좌경으로 하고, 행동은 우경으로 한다는 말이다. 생각은 비타협적 원칙주의로 하고, 행동은 현실주의와 대중노선을 지키라는 말이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다. 나는 이를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따뜻하게 살아라'라고 풀이했다. 차가운 이성으로 사고하다보면 비관적 현실에 좌절할 수 있다. 암울한 이명박근혜 시기를 살면서 너무도 비관적이었다. 늘어나는 노인인구! 줄어드는 젊은 인구! 그 속에서 진보세력이 권력을 잡기는 요원해보였다. 그럴때마다 나 자신에게 말했다. 어둠속에서 빛을 보는 것이 희망이다. '비관적 현실을 긍정적으로 살자!' 좌와우 양극단을 경계하고 비관적인 현실을 긍정적으로 살아갈 때만이 희망이라는 불빛을 통해서 세상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촛불혁명이 바로 이를 증명해준다.

 

2. 고전 전문가보다 탁월한 고전 해설

  신영복은 그가 말하듯이, 고전 전공자가 아니다. 단지 어려서 할아버지에게 고전을 배웠고, 20여년의 길고긴 세월을 고전을 읽으며 살았다. 그리고 사색하며 자신만의 고전독법을 터득했다. 이러한 고전 독법을 읽으며 무릎을 탁치는 때가 많았다.

  신영복! 그가 가장 중시했던 고전의 글귀는 무엇일까? 나는 석과불식 (碩果不食)이 신영복이 가장 사랑하는 글귀일 것으로 생각한다. 큰 과실은 먹지않고 남겨둔다는 이 말을 읽으며, 농촌에서 감나무에 까치밥을 남겨 놓는 푸근한 인심이 생각나다. 큰 과실을 까치밥으로 남겨두어 자연과 그 과실을 나누고, 그 까치밥이 까치를 통해서 새로운 곳에 싹을 틔워 새로운 감나무를 자라게하는 재생산의 자연의 질서가 느껴지는 글귀이다. 한때 대기업이 골목상권까지 침범하며 자영업자의 생존을 위협했을 때가 있었다. 승자독식의 냉혹한 신자유주의 시대에 석과불식의 삶은 많은 시사점을 준다. 승자독식의 시대에서 석과불식의 사회로 전환되어야 우리 세상이 더 따뜻해질 수 있지 않을까?

  신영복의 깊고 깊은 사색의 결과로 잉태된 주옥같은 해설에는 무엇이 있을까? 지지자불여호지자 호지자불여락지자 (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에 대한 해설을 꼽겠다. 아는자는 좋아하는자만 못하고, 좋아하는자는 즐기는자만 못하다라는 '논어'의 글귀를, 어느 동양철학자는 좋아한다는 '호'와 즐긴다는 '락'은 별차이가 없다고 설명했다. 그때는 좀처럼 동의하고 싶지 않았지만, 명확히 '호'와 '락'의 차이를 설명할 수 없었다. 반면 신영복은 '지'는 대상에 대한 인식이며, '호'는 대상과 주체간의 관계에 관한 이해이고, '락'은 주체와 대상이 원융된 상태라고 설명했다. 같은 춤을 추더라도 단순히 춤을 추는자와 춤과 자신이 혼연일체가 되어 무아의 경지에 오른 사람은 분명히 차원이다르다. 신영복의 독법을 통해서 '논어'를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군자화이부동 소인동이불화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즉, 군자는 화목하되 부화뇌동하지 아니하며 소인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화복하지 못한다.라는 이 글귀를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해했다. 그런데 신영복은 이를 화목과 부화뇌동의 관점에서 벗어나 사회를 바라보는데 적용한다. 즉,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하며 공존하지 못한다.라고 해석했다. 더 나아가 '화동'의 논리로 다양성을 인정하며 지배하려하지 않았던(간접지배하려했던) 중국이 중화패권주의에 휩싸여 지배하려하며 공존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신영복의 해설은 나로하여금, 하나의 미물을 통해서 우주를 조망하는 경지라는 생각을 하게했다. 사회과학을 전공한 신영복이 깊은 사색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나름의 탁월한 경지에 올랐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신영복만의 고전 독법은 무엇일까? ‘득어망전(得魚忘筌)’, 즉, 물고기를 얻으면 통발을 잊어버린다는 말이있다. 신영복은 이 말을 비틀어, 망어득망(忘魚得網)'하라고 당부하고 있다. 고기(현상)는 잊어도 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물(거대한 관계망)을 잊어서는 안된다. 물고기(현상)을 잊어버린다하여도 거대한 그물 즉 거대한 관계망으로 새로운 물고기를 얻을 수 있으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물고기가 아니라 '그물'인 것이다. 고전에 매몰되기 보다는 고전을 현대에 맞도록, 나에게 맞도로 새롭게 독법하는 자신만의 눈을 가질 것을 신영복은 강조하고 있다. 그 새로운 눈(그물)을 갖는 것이 고전 독법의 핵심일 것이다.

  고전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 신영복은 정나라의 차치리라는 사람 이야기를 한다. 차치리는 신발을 사기 위해서 자신의 발을 본뜬 탁을 만들었으나, 신발가게에 와서는 탁을 놓고 온 것을 알고는 다시 집으로가서 탁을 가져온다. 그러나 장은 이미 파하고 신발을 살 수 없었다. 이 때, 사람들이 "어째서 발로 신어보지 않소?"라고 말하자 차치리의 답변이 걸작이다. "탁은 믿을 수 있지만 내 발은 믿을 수 없지요." 신영복은 우리는 차치리와 같은 행동을 하고 있지 않냐고 반문한다. 리포트를 쓰기위애해서 책(탁)을 찾는 우리의 모습에서 차치리를 발견한다. 우리의 현실(발)을 보다는 책(탁)을 믿는 우리를 우리는 경계해야한다. 현실과 함께하라 갖가지 통계지표를 통해서 경제가 좋아졌다고 하지만, 우리 생활에서 이를 느끼지 못한다면 과연 경제가 좋아진 것일까? 고전의 좋은 이야기도 우리 현실과 괴리된다면 그것은 고전으로서 가치가 있을까? 고전독법이 공리공담으로 흐르는 것은 신영복은 경계하고 있다.

  신영복은 관계론적 사고로 동양고전을 읽는다. '주역'을 읽을  때도 효와 괘를 관계론 적으로 읽는다. 관계를 중시하는 학파라하면, 유학을 첫번째로 꼽을 수 있다. 이  책에서도 '논어'에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서술하고 있다. 논어의 위상을 인정하고, 논어를  오늘의 현실에 적용해서 지혜를 얻고자하는 저자의 의도가 읽힌다. 

 

3. 신영복 그가 말하는 고전읽기의 필요성

  그렇다면 고전은 왜? 읽어야할까? 신영복은 대학에서 왜? 자신의 전공도 아닌 고전을 강의했던 것일까? 그 답을 얻기 위해서 고전이 만들어진 배경을 살펴보자. 농경민족은 유한 공간에서 반복적 경험을 쌓아 문화를 만든다. 그래서 '서경'이 탄생했다. 이러한 축적의 문화속에서 '마오어록'도 탄생할 수 있었다. 우리에게는 이상하게 생각되지만, 중국적 전통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유한한 공간에서 무한한 시간적 경험을 하고 이를 통해서 고전이 탄생한다. 반복적 경험 속에서 삶의 지혜를 담는 고전이 탄생하기에 고전은 충분히 읽을만한 가치가 있고 읽을만한 이유가 있다.

  고전을 읽을때 유의할 점이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고전이 고전이 아닌 경우가 있다. 무슨 말인가? '시경'에는 저항시와 노동요가 많다. 그러나 우리의 머리속에는 음풍영월이 시의 본령인 것으로 잘못 이해되고 있다. 시경에도 음풍영월하는 내용이 많으리라는 착각은 지배층의 편향적 여과장치 때문에 생긴 정신세계의 왜곡이다. 꼰대들이 고전을 읽고 자신에게 유리한 것들만 뽑아서 현실을 왜곡하고, 젊은이들을 억누른다. 이는 '논어'를 읽었을 때에도 느낀일이다. 논어 헌문편에(14-46) 原壤夷俟 子曰 幼而不孫弟 長而無述焉 老而不死 是爲賊 以杖叩其脛이라는 말이 있다. 원양이 걸터앉아 있자 공자가 어려서는 공손하지 않았고, 커서는 기억될 만한 을을 하지도 않았으며, 늙어서는 죽지도 않으니, 자네야말로 도둑일세.라며 지팡이로 정강이를 치셨다.라는 내용의 글을 그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고전을 읽어야하는 이유는 꼰대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국부론'에 독점자본가에 대한 경계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독점자본가는 '보이지 않는 손'만을 강조하며 자신에게 더 많은 자유를 달라고 한다. 현명해져라, 실시구시하라, 그러지 않는다면 착취의 지식에 세뇌당할 수 있다!!

  묵자에 '君子不鏡於水, 而鏡於人(군자경어수, 이경어인)'이라는 있다. 군자는 물을 거울로 삼지 않고 사람을 거울로 삼는다는 말이있다. 굴뚝 청소한 쌍둥이가 물에 자신을 비추기 보다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다. 이는 단지 숫검뎅이가 묻었는가를 살피기위함이 아니라,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안색을 살피고 길흉을 살피기 위함이 아닐까? 묵자의 감동적인 말을 가슴에 새기며, 내 주변의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아야겠다. 내 이웃의 얼굴을 살필 눈을 틔우기 위해서 고전을 읽어야하는지도 모른다.

 

4. 고전에서 발견하는 놀라움.

  마가복음6장에는 "선지자는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한다."라는 말이 있다. 이와 비슷한 말이 '묵자'에 있다. 초나라가 송나라를 공격하려는 것을 묵자가 저지했다. 묵자가 돌아가던 중에 비를 만나서 송나라 사람집에 들어가 비를 피하려했으나, 송나라 사람은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드러내지 않고 공을 세운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요란하게 공명을 휘날리며 다투는 자를 더 알아주고 있다. 이러한 일은 왕의 병을 미리알고 고칠 것을 간언했으나, 왕이 병이 없는 자신을 속인다고 편작을 멀리했다가, 왕이 죽은 이야기부터, 자신의 공을 빼앗길 뻔한 롬멜이 선전전에 중요성을 깨닫고 수많은 기록을 남긴 이야기, 황우석이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가 추락한 이야기 등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는 이야기이다.

  네 이웃을 사랑하기를 내몸 같이 하라 라는 말은 누구의 말인가? 놀랍게도 묵자의 말이다. 애인약애기신(愛人若愛其身)은 '묵자' 겸애편에 나와 있는 말이다. 물론 마가보금 12장에 나와있는 말이기도 하다. 묵자의 내용 중에서 성경에 있는 내용과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내용이 많다. 그래서 중국에서 동방박사들이 묵가학파일 것이라 주장하는지도 모른다.

  '순'임금의 아버지 고수가 살인을 했다. 순임금은 어찌해야하는가? 당신이 순임금이라면 어찌할 것인가? 이질문에 어찌 대답하는가에 따라서 당신의 성향이 법가, 법가에 가까운지, 유가에 가까운지 알 수있다. 맹자는 법에 따라 체포하고 사형에 처해야한다고 말한다. 단, 순임금은 자리를 버리고 부친을 몰래 업고 도망가서 부친을 봉양하며 행복하게 살라고 당부한다.

  그럼, 묵가에서는 법가처럼 원칙을 중시한다. 진혜왕이 묵자의 다음 거자 복돈의 아들이 살인을 하자, 사면을 해준다. 그러나 복돈은 사면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그리고는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사형에 처한다. 만약 당신이라면 묵가나 법가의 입장을 택했겠는가? 유가의 입장을 택했겠는가?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이라는 말을 아는가? 물론 알 것이다. 그럼 그다음 구절, 명가명 상명(名可名 非常名)은 아는가? 그래 알것이다. 도를 도라할 수있으면 항상 그러한 도가아니요, 가히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라니, 무슨 말인가? 신영복은 개미를 들어 설명한다. 개미에게 물어보면 '개미'는 자기 이름이 아니다. 개념이란 그릇은 작은 것이다. 그릇으로 바닷물을 뜨면 그것은 이미 바다가 안니다. 이 얼마나 탁월한 해설인가? 우리가 개미를 개미라 부르지만, 어느 누구도 개미가 자신을 개미라고 생각할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는가? 다양한 관점에서 사람을 관계론적으로 파악하는 것!! 그것이 고전독법에 엄청난 파괴력을 갖을 줄은 몰랐다.

 

 경제학 전공자인 신영복은 소비를 미덕으로 생각하는 자본주의에 대해서 의문을 갖는다. '묵자'를 읽으며 거리를 가득채운 음식점이 불황을 겪지 않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외식을 해야하는가를 걱정한다. 신자유주의 자본질서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모습에서 신영복은 경제학자라기 보다는 인문학자로 보아야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사실이란 조각그림이라고 말한다. 사실의 조합에 의해서 비로소 진실이 창조되는 것이다. 부분의 합은 전체가 아니다. 1+1은 시너지를 발휘하여 2 이상의 힘을 발휘한다. 진실을 보려면 한조각의 사실 그이상을 보아야한다. 한조각 사실로 진실과 진리를 바라보려면 자신만의 고전 독법을 가져야한다. 신영복의 '나의 동양 고전 독법 강의'는 자신만의 고전독법을 만드는데 도움을 주는 명저이다. 그의 마지막 강의 '담론'도 읽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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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한글역주 3
김용옥(도올) 지음 / 통나무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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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올 논어 한글역주를 읽기 시작한 것이 약 3년전일이다. 일년에 1권씩 읽어서 3년만 동안 읽기로 마음먹었다. 처음에는 일주일에 한문장씩 읽었다. 그러던 것이 3권을 읽으면서 부터는 1일 1문장을 읽는 것으로 목표가 바뀌었다. 모르는 한자를 찾고, 논어문장을 쓰고 읽고, 해석하면서 부단히 공부했다. 때로는 무릎을 탁치면서 감탄을 하고, 때로는 춘추 전국시대라는 시대적 한계를 넘지 못해서, 지금은 의미 없는 문장들도 있었다. 도올 논어 한글역주3권 속으로 들어가 보자.

 

1. 도가없는 세상을 살아가기.

   한친구가 있었다. 이명박근혜시절 공무원을하면서 그 정권에서 시키는 일들을 하는 친구였다. 이명박근혜 시기라는 시대적 암운 속에서 그는 이명박근혜 정권에서 시키는 정책들을 추진해야만 했다. 이제는 친구가 아닌, 그를 태백편을 읽으며, 떠올렸다. 태백편에 천하에도가 있으면 드러내도 좋으나 천하에 도가 없으면 숨어 버려라,나라에 도가 있을 때 가난하고 비천하게 사는 것은 치욕이다. 나라에 도가 없을 때 부유하고 높은 지위에 있는 것은 치욕이다 라고 했다.(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 邦有道 貧且賤焉 恥也 邦無道 富且貴焉 恥也) 무도한 세상에 저항할 수 없다면, 최소한 그들의 앞잡이는 되지 말아야했다. 그들이 시키는 일들을 거절하지 못한다면, 또 한명의 아이히만이 될 뿐이다. 총통이 시켰기에 열심히 유대인들을 아우슈비츠에 보낸, 그와 영혼없이 일을하는 자들과 무엇이 다를까? 그래, 그는 자신은 거대한 기계의 조금만 나사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가 사표를 던졌다고 해서 정권에 아무런 파장도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용기있는 행동을 했다면 자신에게는 떳떳했을 것이다.

  요즘, 연일 국정농단 세력들이 구속되고 있다. 그들은 아마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부도덕한 지시를 수행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이 자신에게 경제적인 이득은 물론, 출세에도 커다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적폐 10여년 동안 많은 아이히만들이 한국사회를 움직였다. 한국의 아이히만에게 공자는 '비루한 녀석들 어찌 더불어 임금을 섬길 수 있겠는가? 자리를 얻기 전에는 자리를 얻는 것만을 걱정하고, 자리를 얻고 나면 자리를 잃을 것만 걱정한다. 만약 잃을 것만을 걱정하면 못하는 짓이 없게 된다.'(子曰, “鄙夫可與事君也與哉? 其未得之也, 患得之. 旣得之, 患失之. 苟患失之, 無所不至矣.) 공자님의 말처럼 그들은 자리를 얻기 위해서 고심했고, 자리를 얻고 나서는 그 자리를 잃지나 않을까? 걱정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서 부당한 지시도 거절하지 않고 했다. 그들에게는 정의도, 국민도, 양심도 없었다. 용기없는자,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는자, 잘못된 지시를 거절할 수 없는자는 우리 국민은 물론이고, 그 자신도 불행해진다는 사실을 공자는 말하고 있다.

  공자는 우리들에게 충고를 잊지 않고 한다. 어릴 적에는 혈기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으니 경계함이 색에 있고, 커서는 혈기가 한창 강건하니 경계함이 싸움에 있고, 늙어서는 혈기가 이미 쇠미하니 경계함이 이익에 있다.(孔子曰 君子有三戒 少之時 血氣未定 戒之在色 及其壯也 血氣方剛 戒之在鬪 及其老也 血氣旣衰라 戒之在得) 도올 선생은 도식적인 이 말을 공자가 했을리가 없다고 단언한다. 도식적인 설명임에는 분명하지만, 오늘날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야동에 빠져 있는 청소년들, 혈기가 왕성해서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해서 주먹을 쓰는 젊은이들, 노욕이 지나쳐서 P집회에 나와서 눈물흘리는 노인들의 모습!! 이런 모습이 우리의 전체모습은 아니지만, 우리의 일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분명하다. 그중에서도 한세월을 살아온 연륜 있는 노인들이 P집회에 나와서 차마듣기 힘든 말들을 쏟아내는 모습은 우리를 너무도 서글프게 만든다. 흥선 대원군이 민씨일파에 의해서 권력에서 쫒겨나고 나서 부단히 재기하려 몸부림치다가 추잡한 모습을 보였듯이, 이시대의 노인들은 곱게 늙어갈 기회를 스스로 내팽겨치고 있다. 떠날때를 알고 떠나시는 님의 모습이 아름다운 이유를 이시대의 노인들은 언제쯤 알게 될까?

  땅에 넘어진자! 땅을 딛고 일어서야한다는 지눌국사의 말처럼, 혼탁해진 한국사회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혼탁한 한국사회를 딛고 일어서야한다. 논어에서는 자로의 입을 빌어 '내 몸 하나를 정결히 지키고자 하다가 사회의 대륜을 어지럽힐 수도 있는 것이니, 군자가 벼슬을 꾀함은 오직 그 의를 행하려함이로소이다.(欲絜其身, 而亂大倫. 君子之仕也, 行其義也.)라고 했다. 정치를 떠나 은둔하며 고고히 살아간다면 자신의 몸은 깨끗이 보존할 수 있다. 그러나 정의롭지 못한 현실은 변하지 않게 된다. 정치를 하려면 자신의 손에 더러운 구정물을 묻히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않된다는 말이 있다. 용기있게 세상의 구정물을 묻히며, 적폐를 청산하려 혈투를 벌이는 정치인들을 응원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2. 공자는 어찌 생각했을까?

  공자님, 한쪽 뺨을 맞으셨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라는 질문을 한다면 당신은 공자가 어찌 대답했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예수님 처럼 다른쪽 뺨을 내밀었을까? 아니면, 덕으로 갚으라했을까? 공자는 곧음으로 갚으라했다. 원한을 덕으로서 갚는다면 덕을 무엇으로 갚겠는가? 원한은 곧음으로 갚고, 덕은 덕으로 갚는 것이 정당하다고 공자는 생각했다.(或曰, “以德報怨, 何如?” 子曰, “何以報德? 以直報怨, 以德報德)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과는 달리, 공자님은 그들이 잘못한 것은 곧음으로 갚아 정의를 바로세우라는 날카로운 말씀을 하신 것이다. 고 김대중 대통령이 헌정질서를 어지럽힌 자들을 사면했다. 그리고 그 적폐세력은 사관학교 사열을 받았으며, 회고록에서 자신이 희생자라고 말하고 있다. 원수를 덕으로 갚은 결과이다. 개과천선할 의지도 능력도 없는 자들을 사랑으로 감싸안으면 그들은 자신에게 다시 힘이 생긴다면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한다. 현재! 적폐세력을 제대로 척결하지 않는다면 그 세력은 다시 일어설 것이다. 그리고 다시 우리의 미래를 짓밟을 것이다.

  공자님, 소인이 모시던 주군이 죽었습니다. 따라 죽어야할까요? 아니면 소인의 주군을 죽인 그분에게 의탁해서 능력을 펼칠까요? 이 질문에 공자는 어찌 대답할까? 대의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려라! 너는 죽지만 나의 의기는 많은 이의 가슴에 길이 빛날 것이다. 라는 말을 공자가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공자는 주군과 같이 죽지 않고 주군을 죽인 환공밑에서 재상을 한 관중을 높이 평가한다. 관중이 없었으면, 그는 오랑캐의 풍속을 따르며 살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보통사람들이 조그마한 신의를 위해 자신의 결백을 입증코자 작은 도랑가에서 스스로 목매달아 죽어도 아무도 거들떠 보지도 아니한다며 관중을 높이 평가한다.(子貢曰, 管仲非仁者與? 桓公殺公子糾, 不能死, 又相之.” 子曰, “管仲相桓公, 霸諸侯, 一匡天下, 民到于今受其賜. 微管仲, 吾其被髮左衽矣. 豈若匹夫匹婦之爲諒也, 自經於溝瀆而莫之知也?) 무조건 절개만을 강조하는 조선의 교조적인 유학자들의 생각과는 다른 공자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또한 연합군에 항복하기 보다는 옥같이 부서지겠다며 반자이를 외치며 돌격을 하는 일본군과도 비교된다. 공자는 결코 목숨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다. 진정! 용기있는 사람은 목숨을 중히여긴다. 한신처럼 대의를 위해서 지금의 치욕을 참을 수 있는자! 그가 바로 참다운 군자인 것이다.

  공자님. 선불교의 참선법을 아시나요? 고요히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수행법입니다. 공자님, 참선을 통해서 진정한 깨달음의 경지에 올라가 보시지요? 라는 질문에 공자는 어떻게 대답할까? 공자는 참선보다는 공부를 더 좋아했다. 하루종일 밥도 먹지않고 잠도자지 않고 생각만 해보았더니 별로 유익하지 못했다. 역시 배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子曰 吾嘗終日不食 終夜不寢 以思 無益  不如學也)고했다. 만약 공자가 불교를 접했다면 선종보다는 교종에 호감을 갖았을 것이다.

 

3. 도올! 송유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다.

"四體不勤 五穀不分 孰爲夫子" 이글을 어떻게 해석해야할까? '사지를 움직여 부지런히 일하지도 않고, 오곡도 분별치 못하면서 (당신은) 누구를 가리켜 스승이라하는냐'라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반면 도올은 '팔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이지도 않고 오곡도 제대로 분간 못하는 그 자를, 누가 선생이라고 일컫는가?'라고 번역한다. 무슨 차이일까? 노인이 비난하는 자를 자로로 볼 것인가? 공자로 볼것인가? 라는 차이가 있다. 전통적인 송나라 유학자들은 공자를 높이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자로를 비판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도올은 이러한 전통적 해석에 얽매이지 않는다. 이것이 도올 해석의 강점이다. 공자마져도 동시대의 사람으로 여기며 그를 냉정하게 대하는 그의 해석이 빛나는 부분이다.

  도올은 자공이 스승 공자를 지나치게 숭배하는 것도 경계한다. 공자가 나라를 다스린다면 살아계실 때 그 나라의 백성들이 영예롭게 생각하고, 돌아가시면 그 나라의 백성들이 애통해 할 것이니, 누가 어떻게 부자의 경지에 미칠 수 있단 말이냐(其生也榮, 其死也哀, 如之何其可及也)라는 자공의 말에 '우리는 공자를 과도하게 정치화시키는 해석을 가할 필요는 없다.'고 일침을 가한다. 공자를 사랑하지만, 공자 옆에서 한걸음 물러나서 그를 냉정히 볼 수 있는 눈을 도올은 가지고 있다. 이러한 냉정함을 가질 때만이 우리는 공자를 뛰어 넘을 수 있다. '아직도 나의 제자로 남아있는 자보다 더 나뿐 제자는 없다.'라고 말한 니체의 호통소리를 조선의 유학자들과 지금 공자를 사랑하는 자들은 되새겨야할 것이다. 

 

4. 도올! 해석에 이의있습니다.!!

  도올의 해석이 매양 공감이 가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도올의 해석에 공감하지 못하는 부분도 많다. 몇가지 예를 들어보자.

  공자가 '가장 뛰어난 현자는 자기가 살고 있는 세상을 피해버리고, 그다음으로 현명한 사람은 나라를 피하고, 그 다음으로 현명한 사람은 색을 피하고, 그 다음으로 현명한 사람은 말을 피한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도올은 "별로 중요한 말이 아니다."라며 공자의 이 말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애써 외면하고 있다. 도올은 공자는 은일지사가 아니라 현실 개혁적인 사람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그러니 가장 뛰어난 현자는 자기가 살고 있는 세상을 피한다는 말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도올이 지적했듯이 공자는 째즈 아티스트이다. 공자는 어떠한 절대적인 원칙에 얽매이지 않는다. 째즈 아티스트 처럼!! 아마도, 이 말을 하던 공자의 상황은, 가장 더러운 세상을 만났을 때 군자의 처세방법을 말했을 것이다.  

  "上好禮 則民易使也 "라는 문장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도올은 '윗 사람이 예를 좋아하면, 예에 의하여 교화된 백성은 부리기가 쉽다.'라고 해석했다. 유가의 리더십의 원칙은 솔선수범이라고 지적하고, 현대민주정에도 항상 들어맞는 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라는 것은 수직적 질서이다. 신분과 존귀, 서열을 강조하는 것이 바로 '예'이다. '예'는 불평등을 전제로한 통치 이데올로기일 뿐인데, 윗사람이 예를 강조한다는 것은 자신이 군림하기 위한 질서를 더욱 공고히 한다는 말이된다. 이것이 어찌 현대민주정치에도 항상 들어맞을 수 있단 말인가?

  원대한 이상을 실현하는데 소도에 이착함이 장애가 될까 두렵다. 그러므로 군자는 소도에는 집착하지 않는다(子夏曰 雖小道 必有可觀者焉致遠恐泥. 是以君子不爲也).라는 자하의 말에 동의하는가? 날카로운 비판을 하던 도올이 이 문장에 대한 비판을 하지 않아 나를 당황스럽게 했다. 여기서 소도는 '농사, 원예, 의술, 점복'과 같은 지엽적 기술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지엽적 기술도 대학을 하는데 도움이 된다. 조그만 미물에게서 대우주의 진리를 보는 것은 보는자의 눈에 달려있다. 그만한 그릇이 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큰 진리를 보아도 깨닫지 못할 것이다.

 

  논어!! 이 책의 내용 중에서 '아버지의 신하와 정치방식을 바꾸지 않는' 것을 강조하는 내용을 비롯해서 21세기에 공감이 되지 않는 내용도 많이있다. 그 뿐아니라, 도올의 해석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인터넷'논어정석풀이'를 참조하기도했다. 상론에서는 '주희 집주'를 상세히 풀이해주어서 이해를 쉽게 해주었으나, 하론에서는 이를 생략하여, 한자실력이 일천한 나로서는 무척이나 읽기 불편했다. 그럼에도 3년의 시간 동안 논어를 놓지 않으며 깨달음을 얻고자 했다. 이러한 부단한 과정이 무척이나 힘들었다.  '도올 논어 한글역주'를 탈고하면서 도올은 "공부하고 싶다. 정말 공부하고 싶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꿈이여"라고 절규하고 있다. 학문적 성취를 많이한 도올이 다시 공부하고 싶다고 부르짖는 모습을 떠올리며 진정한 학자의 못습은 과연 어떠해야하는지를 다시한번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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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30 05: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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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30 05: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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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30 06: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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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30 06: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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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30 06: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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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iKim 2018-01-31 17: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긴 서평 매우 잘 읽었습니다. 사실 제가 지식과 공부가 짧고 아직 20대라 논어나 제자백가 사상을 낡은 것으로만 생각하던 인식이 알게모르게 존재했었는데 이 서평을 읽고나니 관점이 달라지네요. 무엇보다 현재의 상황에 맞춰 설명한 점은 매우 놀랍습니다. 저희 아버지가 왜 논어나 제자백가 사상을 자주 얘기하는지 나름 이해가 됩니다. 무튼 좋은 서평 감사합니다.

강나루 2018-01-31 17:22   좋아요 1 | URL
고전은 오늘을 비출 수 있는 거울이어야 가치있다고 생각합니다 님의 따뜻한말 감사합니다
 
우파니샤드, 귓속말로 전하는 지혜 청소년 철학창고 2
이재숙 풀어씀 / 풀빛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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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라는 나라를 떠올리면 종교의 나라라는 생각이 오버랩된다.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 나무 그늘이나 동굴에서 명상에 잠기며 심오한 우주의 원리를 탐구하는 성자들의 나라! 이러한 이미지와는 달리 불교를 제외하고, 인도 철학에 대해서 무지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불교 이전의 인도인들의 사유 관렴을 알고 싶어 '우파니샤드'라는 책을 빼들었다. 인도철학! 그중에서도 우파니샤드에 대한 나의 지식이 일천하기에 너무 어려운 책을 읽기에는 마음이 무거웠다. 청소년들을 위해서 '우파니샤드'를 풀어써 놓은 이재숙씨의 책을 보면서 도전할 용기가 샘솟았다. 그래, 우파니샤드를 통해서 인도철학의 신비를 탐험해보자.

 

1. 동양의 소피스트철학 우파니샤드

  소피스트들이 철학의 대상을 자연에서 인간에게로 전환시켰듯이, 우파니샤드는 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 인간 존재에 관심을 갖는다. 우파니샤드에 나오는 인드라를 비롯한 신들은 철학을 위한 엑스트라일 뿐, 그들이 주인공이 아니다. 인간 존재를 중심으로, 세상을 탐구하기 위한 질문과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우파니샤드는, 동양의 논어, 서양 플란톤의 대화편 처럼 대화로 이뤄져 있다. 세계의 철학사의 흐름과도 우파니샤드는 일치하고 있다.

  문답법을 통해서 상대방을 깨우치는 교수법을 흔히,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이라고한다. 산파술은 학습자가 이미 지식을 알고 있고, 그 지식이 발현되도록 교수자는 이를 돕는다는 학습원리이다. 고대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러한 교수법을 사용해서 교육이 이뤄졌다. 그리고 그 효과는 학습자에 따라서 달리 효과를 거두기도한다. 우파니샤드에 조물주가, '다'를 말하자, 쁘라쟈빠띠는 '자제하라(암미야뜨)로 알아들었으며, 인간은 "베풀라(닷따)"로 알아들었으며, 아수라는 "동정심을 가져라(다야드왐)로 알아들었다. 자신에게 필요한 해답을 그들 각각은 이미 가지고 있었다. 질문에 해답이 있었다. 답은 자신의 가슴에 이미 존재했던 것이다.

 

2. 해탈하고 싶은가? 나는 원하지 않는다.

  도올 김용옥 선생이 달라이라마를 만났을 때 일화이다. 김용옥 선생이 물었다. "해탈하고 싶은가?" 보통의 사람들은 "그렇다"라는 말을 예상할 것이다. 그런데, 달라이라마는 "해탈을 원치 않는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윤회를 벗어나기 위해서 자신의 참모습을 깨달아야한다. 그러면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하게 된다. 더 이상 고통받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속담에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났다.'라는 말이 있다. 현실이 고통스럽다하더라도 윤회의 수레바퀴 속에서 사는 것이 났지, 해탈하여 더 이상 이승에 있지 못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우파니샤드에는 천상은 하늘이 아니라, 더 이상 태어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이 되어 늙거나 병들거나 죽지 않는 가장 자유롭고 행복한 상태라고 말하고 있다. 그 천상의 즐거움 보다. 생노병사의 고통속에서 서로 울고 웃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오늘이 우리에게는 소중하다. 나는 해탈을 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승을 어떻게 살아야할까? 우파니샤드에는 "이 세상에서 그대가 행한 바대로 육신이 죽은 뒤에 이루어지리라. 그러므로 자신이 이룰 일을 스스로 만들지어다."라고 말하고 있다.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할지 신에게 묻지 말고, 스스로 알려고 노력하고 행하라는 말이다. 임재스님의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내가 머무르는 곳에서 주인이 된다면, 그곳이 바로 진리의 세계가 된다는 이말을 나는 가슴에 새기고 있다. 신에게 자신의 운명을 내 맡기기 보다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진취적이고 열정적인 모습을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3. 육신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할까?

  우파니샤드에는 "육신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자신의 참모습을 보라"라고 말한다. 육신에 대한 집착이 참다운 자신의 모습을 보는데 걸림돌이 된다는 말이다. 또한 '자기 자신을 몸뚱이와 연계해서 생각하는 것이 자기 자신의 참 모습을 알아보지 못하는 결과를 불러온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완전한 자유 속의 자신을 깨달으라는 말이다. 과연 육신은 깨달음에 걸림돌일까? 흔히들 빠져드는 오류가, 육체보다 정신이 더 소중하다는 잘못된 믿음이다. 육신은 껍데기에 불과하기 때문이 이 육신을 원하는 사람에게 보시를 할 수도 있다는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사이비 종교도 있다. 육신은 정신의 집이다. 집이 없으면, 정신은 머물곳도 쉴곳도 없다. 정신과 육체는 어느 것이 더 소중하고 어느 것이 덜 소중한 관계가 아니다. 서로에게 위안이되며, 서로에게 쉼터가 되어주는 상생의 관계이다. 자신의 육체를 괴롭힌다고 해서, 깨달음의 세계에 다가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부처님이 고행을 하는 것을 통해서 깨달을 수 없음을 이미 설파하셨다. 공자님도 문질빈빈(文質彬彬) 이라 했다. 외양의 아름다움과 내면의 미가 서로 잘 어울려야한다는 말이다. 정신과 육체도 서로 잘 어울려야 참다운 진리의 세계로 들어설 수 있다. 육체가 괴로운데, 올바른 정신이 깃들 수 있겠는가? 아파니샤드의 이원론적 생각에는 동의할 수 없다.

 

3. 이 세상은 환영이니, 멋데로 살아도 될까?

  우파니샤드의 이원론적 생각을 접했을 때, 혹시 우파니샤드가 허무주의에 흐른 철학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우파니샤드에는 '인간이여, 이 세상에서 자신의 의무를 다하며 백년 살아갈 소망을 가질지어다.'라고 말하고 있다. 즉, 이 세상은 환영(마야)이니 버려라가 아니라, 오히려 열심히 살아라. 단! 집착하지 말라!라고 말하고 있다. 우파니샤든는 허무주의를 경계하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만 숭배하는 자는 깊은 어둠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에만 빠져 있는 자는 그 보다 깊은 어둠속으로 들어가게 되리라'

 우파니샤드는 어느 한쪽의 극단에 서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균형을 지키라라고 외치고 있다. 우파니샤드는 극단에 서지 않고 중용을 강조하고 있다. 사이비 종교에 빠져드는 사람들은 우파니샤드의 이 말을 가슴속에 새겨야할 것이다.

 

4. 인도의 종교관은 일신관일까? 다신관일까? 범재신관일까?

  인도의 종교하면, 브라만교가 인도의 토착종교와 결합해서 새롭게 탄생한, 힌두교를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힌두교는 다신교로 많은 사람이 알고 있다. 유일한 실재인 근원 존재(브라흐만)만이 진정한 신이라고 하면, 일신관이고, 아바타로 나타나는 다른 모습의 존재 모두를 신이라 부르기 때문에 다신관이라 할 수도 있으며, 근원 존재가 만물 하나하나에 존재하므로 신이 어디에나 있다고 하기 때문에 범재신관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인도에서는 우주의 순항법칙이기도한 자연의 여러가지 힘에 구체적인 이름을 붙여 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래서 신은 하나일 수도 있으며, 셋일수도 있으며, 300일수도 있고, 3000일수도 있는 것이다. 신은 숫자에 얽매이지 않기에 이름 붙이는 대로 불릴 수 있다. 신은 사람이 이름 붙여 부를때는 사람에게 대상이 되지만, 본래 대상이 될 수 없다. 우리의 얇팍한 지식으로 인도인의 정신세계를 이해할 수없다. 마음을 비우고 그들의 생각을 이해해야한다. 인도인의 이러한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도를 도라하면 도가 아니다.'라는 노자의 말이 생각난다. 개념화하고 규정하고 분류하고 분석하는데 익숙해져있는 현대인들의 사고관이 인도철학을 이해하는데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는 생각이 든다.

 

 '귀속말로 전하는 지혜'라는 부재가 붙은 '우파니샤드'라는 책은 우파니샤드를 쉽게 풀어 놓았지만, 쉽게 읽을 수 없는 책이다. 이 책에서 나에게 수많은 질문을 쏟아 내고 있다. 이들 질문에 답하기가 만만치 않다. 우파니샤드를 통해서 인도 철학의 신비를 조금은 보았다는 점에서 마음의 위안을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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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모든 것 - 한 권으로 읽는 불교 입문서
곽철환 지음 / 행성B(행성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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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 그 위대한 숲속에서 길을 헤매며 여러 날들을 보냈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너무도 커다란 숲으로 나에게 다가 왔다. 너무나도 다가가기에 커다란 숲이었기에 다가가지 못하던 나에게 강신주의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놓을 뗄 수 있는가'라는 강신주의 책은 숲에 가갈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선종이라는 나무를 지나 그 주변에 무수히 많은 불교의 숲에서 자라는 나무들을 보고 싶기도 했으나, 그 숲전체를 조망하고 싶어졌다. 이 때 나의 눈에 띈 책이 '불교의 모든 것'이라는 책이었다. 작은 그릇에 다양한 과일을 담으려다가 제대로 과일맛을 보지 못할 수 있다. 이 책은 불교라는 과일의 맛을 제대로 느끼게 해주고 있을까?

 

1. 교종과 선종은 하나로 통하는 진리이다.

  교과서에서 교종과 선종을 대립되는 불교로 배워왔다. 그리고 이를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서 고려의 승려들은 무던히도 노력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서로 대립하는 교종과 선종이라는 불교가 사실은 깨달음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가는 길이 오솔길인가? 대로인가?의 차이일 뿐, 결국은 하나의 깨달음을 추구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현애철수 불섭계제라는 말이있다. 우리가 절벽을 오르고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사다리와 징검다리가 필요하다. 사다리와 징검다리는 절벽을 오르고 강을 건너는 도구일뿐이다. 그런데, 이 도구에 얽매여 절벽을 오르고 강을 건너는 목적을 잃어버리고 헤매는 자가 많다. 그리고 사다리와 징검다리가 본질인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다. 강을 건넜으면 징검다리를 잊고, 절벽을 올랐으며, 사다리를 버려야한다. 깨달음의 세계에 가려면 교종과 선종이라는 구분도 버려야한다.

 

2. 우리의 생활속에 녹아있는 불교!!

  불교는 우리의 문화이다. 우리가 쓰는 용어중에서 불교용어인 것이 많다. 이판사판! 야단법석! 복장터진다! 아수라장! 이러한 용어가 불교용어인 것은 예전에 알고 있었다. 그러나 친근한 불교용어이지만 그 뜻을 몰랐던 것도 많았다.

 '수리 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라는 마술 주문으로 많이 쓰이는 이용어는 무슨 뜻일까? 산스크리트어로 '좋은 일이 있겠구나, 좋은 일이 있겠구나! 아주 좋은 일이 있겠구나, 지극히 좋은 일이 있겠구나! 아! 기쁘다.'라는 뜻이다.

 '옴 마니 반메 훔'은 무슨 뜻일까? 드라마 '태조왕건'의 궁예가 외웠던 주문의 뜻은 놀랍게도, 산스크리트어로 관세음보살의 자비를 뜻하는 주문이며, '오! 연꽃 속의 보석이여!'라는 뜻이다. \

 '다라니'는 무슨 뜻일까? 한국사 시간에 배운 '다라니경'이라는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물이 무슨 뜻인지 우리는 잘 모르고 있다. 가르침이나 지혜를 나타내는 신비로운 주문으로  비교적 근 주문이다.

  놀랍지 않은가? 불교 용어의 뜻을 알면, 우리의 언어생활이 더 풍성해진다.

 

  불교의 과일맛을 제대로 보았는가? 너무도 다양한 과일이기에 미처 음미하지 못하고 삼킨 경우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 뜻에 심취하여 다른 과일맛을 잊어버린 경우도 있다. 불교라는 숲을 멀리서 조망하면서 내가 가야할 길을 찾았다. 그렇다면 다음에는 불교라는 숲에서 어느 열매의 맛을 맛볼까? 쉬우면서도 깊이있는 불교서적이 계속 출간되기를 바란다. 부디 강신주가 '벽암록'을 해설한 책을 내주기를 바라며 불교의 숲을 거닐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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