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 필요한 시간 - 강신주의 인문학 카운슬링
강신주 지음 / 사계절 / 201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강신주!! 많은 사람들을 철학으로 입문하게 만드는 마력을 가진 사람!! 오랜만에 그의 책을 펼쳐들었다. 책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어쪄나? 하는 두려움과 떨림을 안고 책장을 넘겼다. 강신주가 제시한 48개의 만만치 않은 주제들을 강신주만의 필법으로 재미있으면서도 쉽게 풀어냈다. 철학을 설명하면서 철학적 용어에 얽매이지 않고, 뇌과학을 비롯해서 인지 생물학 등 다양한 인접 학문의 언어를 활용해서 철학의 문에 쉽게 들어설 수 있도록 안내했다. 금새 두려움은 즐거움으로 떨림은 환희로 바뀌었다.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라는 책을 읽었을 때의 느낌이 밀려왔다. 각 장을 읽고, 잠시 나만의 생각을 정리하며 다음 장을 읽어 내려갔다. 강신주만의 매력에 빠져드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강신주만의 매력! 그곳에 빠져보자!

 

1. 사랑을 철학하다!

  누구에게는 사랑이 쉬운 일이겠지만, 나에게 '사랑'이란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용기도 부족했고, 사랑의 방법도 기술도 서툴렀다. 미국의 MIT 같은 명문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은 의외로 연애에 어려움을 느껴 이를 코칭해주는 학원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과거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사랑의 기술'을 가르쳐주는 학원이 현대사회에는 생겨났다. 연애 전문 칼럼리스트까지 생겨나며 그의 책을 사서 읽던 추억까지 생각난다. 사랑! 하고 싶은데, 그 방법을 몰랐고, 그랫기에 너무도 실수가 많았다.

 

  "나의 사랑이 타자의 사랑을 강제하지 못하는 비극이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누군가를 사랑할때, 상대방도 나를 강제할 수 없다. 이것은 그가 나와 마찬가지로 자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자유와 사랑의 이율배반-

 

  서로 상대방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기에, 나의 자유로운 선택을 상대방에게 강요할 수 없고, 상대방의 자유로운 선택을 나도 존중해야한다. 그럴수록 사랑이 이뤄질 가능성은 낮아진다. 불안도 따라서 높아진다. 서로를 존중하며 진정한 인격체로 대하며 상대방의 사랑을 갈구할 수밖에 없다. 그 과정은 너무도 고통스럽다. 때로는 사랑이 집착으로, 스토커로 변하기 까지한다. 너무도 어려운 사랑! 연애! 이기에 내가 결혼에 성공한 것은 어쩌면 경이로운 기적일수도 있다.

  인공지능의 시대! 쌕스 로봇이 출현했다. 로봇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시대, 어는 설문조사에서는 로봇과 사랑을 나눌 의사가 있느냐는 질문에 18세~34세의 사람들 27%가 "로봇과 사랑할 수 있다."라는 응답을 했다. 로봇은 나를 거부할 수 없기에, 거부당할 걱정을 하지 않으며 로봇과 사랑을 나눌 수 있다. '자유와 사랑의 이율배반'! 사랑하는 상대방에게 거부당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과 상대방과 나를 서로 이해하고 따스하게 보듬어 주어야하는 의무감이 '어려운 인간'을 사랑하기 보다, '편리한 로봇'과 사랑하려는 유혹을 느끼게하는 것은 아닐까?

  어떤 사람은 말할 것이다. '사랑은 숙명적인 것이고, 로봇과는 숙명적 만남을 할 수 없다.'  사랑은 우연적 만남에 의해서 이뤄지는가? 숙명적 만남에 의해서 이뤄지는 것일까?

 

  "2000여 년 서양 철학의 역사를 돌아보면, 대부분 주류 철학자들은 전자의 입장을 표방했다. 플라톤 이후 아리스토텔레스, 아퀴나스, 라이프니츠, 칸트, 헤겔 등은 의미란 미리 정해져 있고, 우리는 그것을 발견하기만 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현대 철학자들 대부분에게 있어 의미란 우발적인 마주침을 통해서 사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발성의 존재론을 위하여-

 

  운명적 사랑을 믿는 순수한 여성들이 많다. 언젠가 자신에게도 운명적 만남이 이뤄질 것이며, 운명의 상대가 자신에게 나타나 주기만을 기대하며 오늘을 행복하게 살아가려한다. 이러한 믿음을 받아들인다면, 숙명적 만남이 아직 이뤄지지 않아 아직도 혼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그 혹은 그녀의 인생에는 '운명적 만남'이 태생부터 운명지어지지 안았던 것일까? "사랑은 우연인가, 아니면 숙명인가?"라는 강신주의 질문에 "사랑은 만드는 것이다."라고 답하고 싶다. 사랑하고 싶다면, 사랑 받고 싶다면,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나서야한다. 사랑은 우연히 주어지지도 않으며, 숙명적으로 던져지지도 않는다. 사랑은 용기있는자가 만드는 것이다. 때로는 우연을 가장하기도 하고, 때로는 "숙명'이라는 단어를 빌려 사랑을 만든다. '운명적 만남'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결혼 정보회사의 힘을 빌릴 수도 있다. 인간은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아야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럼, 그 사랑은 어떠한 방법이뤄 만들어가야할까? 강신주는 '장자' 지락편의 '바닷새 이야기'를 소개한다. 바닷새를 사랑한 노나라 임금이 바다에게 아름다운 노래를 연주해주고, 맛있는 고기와 술을 주지만, 바닷새는 슬퍼하다가 결국 죽어버린다. 자신만의 사랑을 상대방에게 강요한다. 그리고 자신의 진심을 알아달라고 하소연한다. 그녀는 매몰차게 이를 뿌리친다. 그녀도 하나의 인격체로서 자신이 받고 싶은 사랑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그 권리를 무시하고 자신의 사랑을 강요할때, 그 사랑은 집착이되고, 그 사람은 스토커가 된다. 결국은 사랑하는 그녀를 떠나 보내야하는 상황이 펼쳐진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그녀가 나를 떠나서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녀를 놓아주어야할까? 그리고 그녀의 행복을 빌어야할까?

  20대의 풋풋한 젊음이 느껴지던 시절! 사랑하는 그녀가 나를 떠나 더 행복해질 수있다면, 그녀를 떠나보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믿었다. 너무도 가진것이 없고, 너무도 못난 나 자신을 너무도 아름답고 너무도 사랑스러운 그녀에게 선물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깨달았다. 진정으로 그녀를 사랑한다면, 그녀가 내 곁에 있을때, 행복하게 하자고... 이 세상에서 그녀를 가장 사랑하는 내가, 그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면, 그 누구도 그녀를 행복하게해줄 수 없다. 진정한 사랑을 따를 것인가? 나의 사랑을 그녀에게 강요할 것인가? 라는 이분법적 논리에서 벗어나, 그녀의 사랑과 나의 사랑을 하나로 녹여내야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서로 다름이 서로를 이해하며 서로를 받아들일때 진정한 사랑은 완성된다. 진정한 사랑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남녀가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너무도 늦게 알았다.

  진정한 사랑의 느낌은 무엇일까? "쇄락(灑落)"과 "광풍제월(光風霽月)"이라고 말하고 싶다. "쇄락'과 "광풍제월"이란 무슨 뜻일까?

 

  "(쇄락) 이는 한여름 무더위에 텁텁하기만 한 마당에 물을 뿌렸을 때면 누구나 느끼게 되는 상쾌함과 시원함을 의미한다." 

  "깊은 밤 오랫동안 내리던 비가 멈추고 상쾌한 바람이 얼굴을 매만질 때, 맑게 빛나는 달을 본 적이 있는가? 이것이 바로 '광풍제월'이다."-쇄락의 경지-

 

  "'쇄락'은 딱딱하게 막혀 정체된 '고체'의 상태와 대립되는 마음 상태를 묘사하는 개념"이기도하다. 사랑하는 남녀가 사랑싸움을 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방식으로 그녀가, 그가 사랑하지 않는다며 자신의 사랑을 강요한다. 비극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한여름의 무더위 속에서 시원한 소나기의 상쾌함을 느끼려면, 상쾌한 바람이 얼굴을 매만지고 맑게 빛나는 달을 바라보려면, 고체상태가 되어버린 나의 마음을 말랑말랑한 부드러움으로 바꾸어야한다. 나를 그녀의 틀에 맞추거나 그녀를 나의 틀에 맞추도록 강요하기보다 그녀와 내가 만나 새로운 하나가 되어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를 딱딱한 고체에서 말랑말랑한 액체로 바꾸어야한다. 그리고 그녀와의 사랑이 영원할 것이라 생각하기 보다는 사랑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그녀가 내곁에 있을때, 최선을 다해야한다. 그때, 깊은 밤 오랫동안 내리지 않던 비가 마침내 내려 상쾌함을 선물할 것이다.

 

2. 삶을 철학하다.

  대학시절, 나를 유난히 쫒아다니며, 교회에 나올 것을 부탁하는 여자후배가 있었다. 토론과 논쟁을 좋아했던 나는 그 여자 후배와 여러차례 종교에 대해서 논쟁했다. 그 논쟁 중에서 인상에 남는 말이 있다.

  "하느님은 무엇이든지 용서해주시기에 지금 잘못해도 주일에 교회에 가서 회계하면 되요."

과연 그럴까? 이 말을 거꾸로 생각하면, 어짜피 용서해주실 것이기에 지금 잘못을 해도 된다. 평일에 죄를 짓고 주일에 용서를 빌면 된다. 라는 논리도 성립하지 않을까? 그리고 인간에게 지은 죄를 인간에게 용서받지 않고, 신에게만 용서를 받는다면, 그 용서는 유효할까? 여자 후배의 말은 나에게 많은 의문만을 안겨주었다.

 

  "서양의 스피노자, 그리고 우리의 동학이 중요한 이유는 두 사유 전통이 공통적으로 인간이 직면하는 난제를 초월자에게 호소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려는 인문정신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신이란 바로 나의 생명력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수많은 난제들, 고통들이 있다. 이 고통을 이겨내려 많은 사람들은 특정종교에 의지한다. 그중에는 사이비 종교의 광신도가 되기도한다. 스스로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절대적인 힘에 의지하여 손쉽게 문제를 해결하려는 나약한 생각은 광신도라는 위험한 길로 우리를 인도한다. 강신주는 "스스로의 힘으로 히결하는" 정신을 "인문정신"이라 말한다. 그래, 나의 삶에 주인으로 살자! 나의 한계를 직시하고, 나의 힘으로 나의 인생을 살아가려할때, 나는 인문주의자가 될 수 있다.

 

  "수인사 대천명(修人事 待天命)"(제갈공명)

  "진인사 대천명(盡人事而待天命.)"(남송의 유학자 호인) -마음을 다한 후에 천명을 생각하다.-

 

  신을 믿으며 노력하지 않는자보다는 자신의 일을 힘써한 후에, 하늘의 결과를 기다리자. 일을 꾀하는 것은 사람이지만, 일을 이루는 것은 하늘이다.(謀事在人 成事在天) 동양철학의 합리주의는 괴력난신에게 의존해서 헛된 욕망을 표출하지 않는다. 이것이 서양철학보다 동양철학에 끌리는 이유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가지 집고 넘어갈 것이 있다.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이루고자하는 목표가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것이었느냐?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해보는 일이다.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실로 자신이 소망하는 것인지 혹은 소망하지 않는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 주체는 다시 태어날 수 있어야만 한다.(라캉)"-나의 욕망은 나의 것인가-

 

  수많은 학생들이 부모의 욕망을 욕망한다. 인간은 약 20여년 동안 부모의 보살핌을 받아야한다. 인간이라는 나약한 존재는 자신의 욕망보다 부모라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도록 강요받고 있다. 부모의 욕망을 거부하는 학생들이 선택하는 극단적인 방법은 커다란 파란을 일으킨다. 판사가 되어 부모의 욕망을 대신 채워달라는 요구를 거절하다가, 집을 나오거나, 학교를 자퇴하기도한다. 어쩌면 너무도 자신의 욕구를 잘 알기에 벌어지는 비극이기도하다. 현명한 자녀는 자신이 스스로 독립할 수 있을 때까지만, 부모의 욕구를 충족시켜준다. 어리석은 자녀는 부모의 욕구만을 충족시키다가 부모의 노예로 살아가며 일생을 마친다. 진정 자신의 소망이 자신이 원하는 소망인지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다시 태어나는 고통을 겪어야한다. 주체로 산다는 것은 고통을 수반한다. 알에서 깨어나가 위해서 독수리는 몸부림쳐야한다. 그 몸부림은 현명한 몸부림이어야한다.

 

3. 관계를 철학하다.
  결혼식 청첩장이 오면, 나의 결혼식에 온사람의 청첩장인지를 먼저 확인한다. 결혼과 같은 커다란 행사를 거치고 나면, 인간관계가 한바탕 정리된다. 결혼식에 온 친구와 오지 않은 친구로 나누고, 오지 않은 친구는 축의금을 전한 친구와 그렇지 않은 친구로 나눈다. 그중에서 축의금 조차도 전하지 않은 친구는 나의 주소록에서 삭제한다. 특히, 바쁜 일정을 쪼개서 친구의 결혼식에 찾아가 행복을 빌어주었는데도, 오지않은 친구는 더 이상 친구가 아니라 생각했다. 일종의 강한 배신감이 불어닥쳤다. 

  "선물을 받고 나면 항상 그 선물의 액면가와 유사한 대응 선물을 고르는 것이 우리의 일상적인 관례이다. 이것은 우리가 주고 받는 대부분의 선물이 명목상으로만 선물일 뿐, 그 이면에는 뇌물의 논리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선물의 가능성-

  우리가 주고 받았던 대부분의 선물이 사실은 뇌물이었다. 축의금도 어느새 뇌물이 되어버렸다. 줄때부터 되돌려 받을 것을 생각하는 뇌물이었다. 받는 이에게는 갚아야할 빚이되었다. 선물은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에게 무거운 짐이 되어버렸다. 김영란법이 시행되고 부터는 축의금의 액수도 상한선이 생겼다. 정말 돌려받지 못하더라도 지난날 사회 초년병 이었던 나에게 따뜻한 길잡이 역할을 해주셨던 정년퇴임하신 선생님에게 약소한 축의금이라도 넉넉히 드리고 싶었다. 그때는 봉투에 축의금을 더 넣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그때 축의금은 선물이 되었다. 서로의 마음을 표현하는 선물을 뇌물에서 선물로 되돌려 놓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본래 의미가 퇴색해버린 것은, 비단 선물만이 아니다. 예절도 또하나의 뇌물이 되어버렸다. 

  "공자의 눈에는 동방예의지국에는 맹목적인 예절과 제도만이 있을 뿐,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려는 섬세한 감수성과 애정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타인에 대한 배려-

  타인에 대한 섬세한 배려! 그것이 예의 출발이다. 강자가 약자 위에 굴림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약자를 배려하기 위한 강자의 섬세함이 진정한 예이다. 전방부대에서 근무하다가 말라리아에 걸렸던 적이 있다. 말라리아는 잠복기가 약 1년쯤된다. 그것도 모르고 열이나고 오한이 생기니, 감기약만 먹었다. 평상시에는 아무렇지도 않던 몸이, 갑자기 오한에 고열이 생겼고, 병원에서 닝겔도 여러번 맞았다. 그런데, 버스에서 오한에 고열이 났다. 나의 앞에 나이 지긋한 할머니가 자리를 양보해달라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할머니에게 나의 상태를 설명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 할머니에게는 아픈 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이라면 어찌하겠는가? 나의 상태를 설명할 것인가? 아픈 몸을 이끌고 자리를 양복할 것인가? 

  뇌물이 되어버린 선물을 구제하고, 맹복적인 껍데기만 남아있는 예절을 되살릴 방법은 없을까? 나에게 솔직하자! 당당하게 나의 삶에 주인이 되자! 축의금도 선물도 내가 상대방에게 축복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그 만큼만 표현하자. 그리고 되돌려 받을 생각을 하지 말자! 나는 그를 축복하면서 즐거움을 느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니까....

  상대방이 존경할만하며, 나를 진심으로 대하는 사람이라면, 그에게 감사의 예의를 표하자! 그러나 그가 권위로 굴림하려하며, 나를 아랫것들로 본다면, 그에게는 최소한의 예만 표하자! 돼지에게 예의를 표해보았자, 돼지는 그것이 얼마나 값진 선물인지를 모른다. 내가 아프더라도 상대방이 좋은 대접을 인격을 갖춘자라면 최선의 예의를 표하자, 그러나 노력으로 얻지 않은 '나이'를 무기로 나에게 예절을 강요한다면, 깔끔히 무시하자! 그것이 그를 배려하는 예절이니까...

 

4.  세계를 철학하다.

  교육부 정책기획관이었던 어느 관료가 "민중은 개, 돼지 인다."라는 말을 했다. 그 사람은 구의역에서 컵라면도 못먹고 죽은 아이를 어떻게 자신의 아이처럼 생각할 수 있냐며 기자에게 반문하기도 했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 타인을 개, 돼지로 보는 사람! 그런사람이 이 나라 교육정책을 세우는 교육부에 있었다.

 

  "내부로부터 요동치는 마음은 극복의 대상이었지만, 외부로 인해 요동치는 마음은 긍정의 대상이었다."-누구도 사랑하지 않아서 누구도 사랑할 수 있다는 역설-

 

  우리는 외부의 파동에 동요하지 않는 자를 이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불교철학에서는 이러한 우리의 관념을 뒤집어 엎는다. 나의 내면을 고요히 잠재우고, 외부의 세계에 열려있어야한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면서 어찌 참다운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는가? 타인의 아픔을 내 아픔처럼 공감하지 못한다면, 그사람은 '불인'한 사람이다. 어질지 못한 사람이다. 구의역 아이를 보면서 나의 자식처럼 아파하지 못한다면, 그는 '불인'한 사람이다. 한의학에서는 손과 발의 감각이 없는 상태가 되면, '불인'하다고 표현한다. 온 세계는 하나의 우주이다. 나의 몸이 하나의 작은 우주이듯이, 세계도 하나의 커다란 우주이다.

 

  "성인에게 있어 자신과 모든 타자는 하나의 몸으로 묶일 수 있다. 고통을 느끼는 범위만큼이 나의 것이니까 말이다. 이것이 바로 정호가 '만물일체'라고 묘사했던 경지이다. 이것은 '모든 만물을 하나의 몸으로 본다.'는 뜻이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다리는 죽은 다리일 수밖에 없다. 나아가 타인이 고통스러울 때도 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타인은 죽은 사람일 수밖에 없다."-살아있는 모든것에 대한 감수성-

 

  '논어'에 맹무백이 공자에게 "자로는 인한 사람입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인한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자로가 어떠한 사람인지 다시 물었더니, 공자는 "천승을 낼 수 있는 제후의 나라를 유로 하여금 그 군대를 다스리게 할 수 있으나 그가 인한지는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어서 염유와 공서적에 대해서도 물었지만, 공자는 그가 인한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제자들의 탁월한 능력은 알아보았지만, 그가 타인의 아픔을 나의 아픔처럼 여기는지, 더 나아가 세상 만물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느끼는지를 스승인 자신도 모르겠다고 솔직히 고백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불인한가? 인한가? 우리는 너무도 불인한 사회를 살아왔다. 눈물이 안나와서 오랫 동안 눈을 깜박이지 않으면서 억지로 눈물을 흘리는 못난 리더를 모시고 살았다. 인한 사람을 알아보기가 그리도 힘들었던 것이다. 인한 사람을 리더로 뽑고 나서야, '인한 삶'을 선택하나냐, '불인한 삶'을 선택하느냐가, 세상을 행복하게 만들기도 하고, 불행하게 만들기도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5. 나를 철학하다.

  우리는 누구나 가면을 뒤집어 쓰고 살아간다. 학생들 앞에서는 당당한 교사의 '페르소나'를, 딸들에게는 자상한 아버지의 '페르소나'를, 아내에게는 사랑하는 남편의 '페르소나'를 쓰고 산다.

 

  "페르소나에 집착하다가 맨얼굴을 망각하거나, 혹은 맨얼굴에 신경 쓰다가 페르소나를 경시하는 것, 이 두 가지 극단에서 벗어나야 한다."-페르소나와 맨얼굴-

 

  그런데, 한국인은 유독 페르소나에 집착한다. 때로는 맨얼굴을 드러내는 사람들을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바라보기도한다. 자신의 페르소나를 벗을 용기가 없어 언제나 페르소나에 갖혀산다. 이제는 자신의 페르소나를 자신의 맨얼굴이라 생각하기도한다. 이럴때, 강신주를 만나며, 김어준을 만나며 자신이 벗어 던지지지 못한 페르소나를 과감히 벗어던진 그들에게 열광한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동경하고, 때로는 그들을 흉내내기도 했다. 대중 강연에서 강신주는 가면을 벗어던지라 말했다. 페르소나에 집착하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처방이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말하듯,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상황에 맞는 페르소나를 쓰고, 때로는 모든 페르소나를 벗어던지고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 타인의 가면을 쓰고, 살아가다 때로는 모든 가면을 벗어던지며,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시간이 아닐까? 그렇다면,  페르소나를 벗어던진 모습은 무엇일까? 이지의 말에서 그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무릇 동심이란 진실한 마음이다. 만약 동심이 불가능하다고 한다면, 이것은 진실한 마음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중략) 어린아이는 사람의 처음 모습이고, 동심은 사람의 처음 마음이다."(이지) -개처럼 살아가지 않는 방법-

 

  사회의 갖은 압력과 폭력에 상처받지 않고, 세상의 때에 물들지 않은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페르소나를 벗어던진 모습이었다. 현대 사회의 각종 정신병리를 치유하기 위해서라도 페르소나를 벗어던지고 자신과 직면해야한다. 자신과 직면하는 이 길은 너무도 고통스럽다. 나는 나의 이상보다 못난 나이기 때문이다. 그 상처받은 내면의 어린아이를 보듬어 줄때, 나의 어린아이는 치유될 것이다. 그리고 페르소나에 갖혀살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6. 운명을 철학하다.

  운명을 바꾸고 싶으면, 습관을 바꾸어라! 라는 말이있다. 조그만 습관이 우리의 인생을 바꾼다.

 

  "만들어진 습관은 우리가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있다. 변화가 지나가버린 것이라면, 습관은 그것을 낳은 변화를 넘어서 존속하는 것이다."-습관의 집요함.-

 

  자기계발서에서 소개하는 성공한 사람들의 성공비결 중에 하나는 "성스런 종교적 의식과 같은 습관을 갖아라!!"라는 것이다. 매일 운동을 하고 싶은 사람은 매일 아침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가는 것을 성스러운 종교적 의식 처럼행한다. 일단 밖으로 나가면 나는 자연스럽게 운동을 하고 있게된다. 매일 무엇인가를 꾸준히 한다면, 자연스럽게 1만시간의 법칙이 작동하게 된다. 방학에는 하루에 한문장씩, 평일에는 일주일에 한문장씩 '논어'를 읽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논어'를 완독했다. 쉽게 읽기 힘든 책을 '습관'을 이용해서 읽었다. 진정 무서운 힘은 꾸준함에 있었다. 그렇다면, 그 꾸준함은 어떻게 얻어낼 수 있을까? 니체의 말을 들어보자!

 

  "지금 인생을 다시 한번 완전히 똑같이 살아도 좋다는 마음으로 살아라!"-후회하지 않는 삶은 가능한가-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을 접했을때, 인생은! 역사는 진보해야한다는 믿음이 산산히 부서졌다. 니체는 망치의 철학자였다. 오늘 내가 이러한 삶을 살아간다면, 일만년 후에도 나는 이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 나의 운명을 바꾸고 싶다면, 오늘을 바꾸어야한다. 니체는 '영원회귀'를 통해서 오늘 우리가 변화하도록 종용하고 있었다. 이것은 '프레임'이라는 책에서 소개한 성공한 삶을 살아가는 방법과 비슷하다.  내가 이미 망쳐버린 인생을 다시 살고 있다고 가정하고, 어떻게 하면 인생을 다시 망쳐버리지 않을 것인지를 생각하며 살라! 이러한 생각은 나태한 나를 채찍질한다. 오늘을 진실되게 살지 않은 사람이 어찌 내일을 진실되게 살겠는가? 내일은 오늘이 되기에 오늘을 진실되게 산다면 나의 인생은 진실한 삶으로 만들어져간다. 정상에선 석학들은 서로 통한다고 한다. 니체의 말이 '프레임'을 쓴 최인철 교수의 말과 일맥 상통하고 있다.

 

 

  "논리적 사유란 독특한 주장을 할 수 있고 동시에 그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이유를 대는 사유"-논리적 사유의 비밀-라고 한다. 유발하라리의 '사피엔스,  재레드 다이야몬드의 '총, 균, 쇄'와 '문명의 붕괴'와 같은 대작들이 타인이 넘볼 수 없는 독특한 주장과 그 주장을 뒷받침 할 수 있는 탁월한 논리전개가 돋보이는 책이다. 하나의 굵직한 주제를 긴 호흡으로 서술한 것이 이들 책이라면, 강신주의 '철학이 필요한 시간'은 철학자들의 짧은 말을 실마리로, 인생을 생각하게하는 짧은 호흡의 글이다. 48명의 철학자들의 독특한 주장을 실마리로, 그것을 정당화하는 이유를 알기 쉽게 가르쳐주고 있다. 이것이 이 책의 매력이다. 짧은 48편의 글들의 모음이지만, 그 짧은 하나하나의 글에는 인생의 심오한 의미가 담겨있다. 인생을 생각하며, 세계를 끌어 안고 싶은 독자에게 이 책을 권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담론 -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탁월한 명강의가 가슴에 와 닿지 않을때가 있다. 대학에서 젊은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면 참! 열정도 많고 많은 내용을 우리에게 알려주신다는 느낌은 들지만, 깊이있는 깨달음을 얻지는 못해 아쉬울 때가 있다. 반면, 노련한 노교수님의 강의는 많은 내용을 말하지 않는데도 많은 것을 가슴으로 느끼고 머리에 새기도록 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들은 그러한 교수님의 강의를 '명강의'라고 말하며 후배들에게 추천했다. 사회에 나와서 배움의 열의가 시들지 않았다. 팟캐스트와 유튜브를 비롯한 각종 연수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다양한 강의를 찾아 듣는다. 그렇게 알게된 교수님과 저자들 중에서 고 신영복 선생은 단연 많은 것을 깨우치게한 명강의를 나에게 선사해주었다. 너무도 강렬했던 '강의'에 이어서, 신영복 선생의 '마지막 강의'가 되어버린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담론'을 펼쳐들었다. 신영복이라는 문을 통해서 진리의 화원에 들어가 보자.

 

1. 신영복을 읽는 키워드 '관계'

  '나의 고전 독법 강의'를 읽으면 신영복 선생 고전독법의 키워드는 '관계'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관계'를 중시여기는 그의 인생철학은 '담론'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감옥에 들어온 사람이 출소하면서 '이 사람은 다시는 들어오지 않을 것야!'라고 신영복에 예측하면 번번이 그 예측이 빗나갔다. 반면 노인들은 그 사람이 다시 들어올지, 사회에 나가서 잘 살게 될지를 잘 맞추었단다. 신영복은 뒤늦게 그 이유를 알게 된다. 신영복이 그 사람됨만을 보았던 반면, 노인들은 사람과 처지를 함께 보았다. 나무는 홀로 설수 없다. 흑과 물과 돌과 나무와 어우러져야 하나의 나무가 우뚝 설 수 있다. 신영복이 '관계'의 중요성을 깨달은 순간이다. 아무리 세상과 단절하고 홀로 독야청청하리라 마음먹어도, 보통 사람들은 '관계'의 영향을 받는다. 그만큼 관계가 중요하다.

  그러나, 그렇게 중요한 '관계'를 우리는 잊고 산다. 신영복이 재소자에게 이응노 화백에 대한 일화를 들었다. 이응노 화백은 감옥에서 사람을 부를 때, 수인 번호로 부르지 않고 이름으로 불렀다한다. 한 젊은 재소자에게 이름을 묻고는 "뉘집 큰아들이 감옥와 있구먼"이라고 중얼거렸다. 이 말을 들은 재소자는 그날밤 잠을 이루지 못한다. 자신이 홀로 서있는줄 알았으나, 자신은 이 세상에 홀로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부모와 누이가 보고 싶어졌고 그들을 생각하며 밤을 지세웠다한다. '관계'를 깨닫자 젊은이는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관계'로 이어져있다. 자신의 존재를 '관계'를 인식하면서 깨닫게 된다. 그리고 치유가 시작된다.

  '관계'가 치유의 작용만을 하는 것은 아니다. '관계' 때문에 상처받고 슬퍼하기도한다. 그러나 외딴 섬에 홀로 살아가지 않는 이상, 우리는 관계를 벗어날 수 없다. 지눌 스님의 '정혜결사'문에 "땅에 넘어진자, 땅을 딛고 일어서라."라는 말이 있다. ''관계'에 상처받은자, '관계'를 딛고 사랑하라라'고 말하고 싶다.  

 

2. 세상을 살아가는 키워드 '사랑'

  셍떽쥐베리는 '사랑은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과연 그럴까? 강신주는 '사랑은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눈부처를 바라보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눈부처'란, 연인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뜻한다. 사랑은 서로의 눈부처를 바라보는 것일까?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일까? 신영복 선생은 사랑은 '삼께 맞는 비'라고 표현한다. 세월호 사건의 슬픔에 빠져있는 사람에게 어설푼 위로보다는 같이 눈물흘려주는 것이 그들의 치유에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사랑은 함께하는 것이었다. 고통도 슬픔도 함께할 수 있다면 우리는 서로를 사랑할 수 있다. 함께할 때만이 서로의 눈부처를 보면서 사랑을 속삭일 수도 있고, 같은 곳을 바라볼 수도 있다.

  때로는 사랑이 고통을 주기도 한다. 신영복은 '사랑'을 이용한 고문방법을 경험한다. 전기고문을 받다가 신영복은 탈진을한다. 그러자 취조관이 의무실에 전화를 걸어 딸아이의 감기약을 부탁한다. 이에 충격을 받은 신영복은 '나는 절대 결혼하지 않아야지. 저 지독한 가족 이기주의를 난들 어떻게 할거야!'라는 생각을 했다. 무자비한 취조관이 사실은 딸을 사랑하는 평범한 아버지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가족에 대한 사랑은 지독하리만치 크지만, 인류에 대한 사랑은 눈꼽만치도 없는 잔혹한 인간의 모습을 바라보며 신영복은 얼마나 환멸을 느꼈을까?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딸아이의 감기약을 부탁하는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이 고문의 일환으로 연출된 모습이었다는 사실이다. 상대방을 심리적으로 굴복시키기 위한 고도의 고문방법이었다. 잘못된 사랑이 고통을 주기도 하지만,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인간에 대한 환멸을 주기도한다. 그렇다면, 올바른 사랑의 모습은 무엇일까?

  신영복 선생이 '강의'와 '담론'이라는 책에서 강조하는 말이 있다. '석과불식(碩果不食)!! ' 씨과일은 먹지 않는다는 뜻이다. 씨과일로 큰 열매를 먹지않고 남겨 놓는 모습! 까치밥이라면서 가장 큰 감을 남겨 놓는 시골 농가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까치밥으로 가장 큰 과일을 남겨 놓으면 새가 날아들어 그 과일을 먹는다. 그리고는 어느 곳에 그 과일 씨앗을 배설물과 함께 떨어 뜨린다. 그래서 새로운 과일나무가 어느 곳에선가 자라기 시작한다. 나만을 사랑하는 좁은 울타리에서 벗어나서, 자연과 우리 모두를 사랑할 때만이 참다운 사랑은 이뤄질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먼 여행은 무엇일까? 신영복은 '우리가 일생 동안 하는 여행 중에서 가장 먼 여행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한다. 머리로 알지만 가슴으로 느끼고 이를 발로 실천할 수 있다면 최고의 공부가 아닐까? 이것이 가장 진실된 배움이지만 이것이 가장 힘든 배움이기도 하다. 좁은 가족의 사랑을 인류의 사랑으로 실천하는길! 가장 힘들지만,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여행이다.

 

3. 오늘을 생각하고 깨우친다.

   신병교육대에서 훌련을 받다가, 한 훈련병이 제대로 훈련에 따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교는 그 훈련병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야, 너 서울대 나왔냐?"라고 물었다. 그러자, "네, 그렇습니다."라는 훈련병의 답변이 나왔다. 순간, 주변에서는 "야~~ 제가 서울대 나왔어?"라며 감탄을 연발했다. 교관은 주변을 의식했는지, "놀랄것 없어, 예는 공부 못해서 서울대 간거야! 안그래?"라고 말했다. 훈련병은 "네, 그렇습니다."라며 군기든 대답을 했다.

  서울대 나왔다는 말에 '내가 서울대 다니는 사람을 보다니...'라는 생각을 하며 감탄을 하는 주변의 수많은 훈련병이나, 서울대 다니는 훈련병을 공부못해서 서울대 갔다고 말하는 조교 모두가 서울대에 대한 컴플랙스를 가지고 있었다. 만약 신영복 선생이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변방이 창조의 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결적적인 전제가 있습니다. 중심부에 대한 콤플랙스가 없어야 합니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서울대 컴플랙스' 집단 감염된 우리 사회의 모습을 여러번 보았다. "서울대 애들이 나보다 똑똑하니까, 내가 굳이 그들을 이기려 노력할 필요가 있어?"라고 말하는 패배주의자들도 여러명 보았다. '서울대 컴플랙스'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상, 절대 '서울대'라는 장벽을 뛰어넘을 수 없다. '변방의 창조성'을 가지려면 그 컴플랙스에서 벗어나야한다고 신영복 선생은 '담론' 곳곳에서 외치고 있다. 그럼, 나는 또다른 컴플랙스를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컴플랙스를 직시하려 노력해보았다. 그 컴플랙스를 직시하며 그 컴플랙스가 사실은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변방의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곡돌사신(曲突徙薪)이라는 말이 있다. 굴뚝을 돌려 놓고 장작을 옮겨 놓아 불이 나는 것을 예방하는 조치를 취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묵자'에 나와 있듯이, 불을 끄려 동분서주한 사람은 환영을 받지만, 곡돌 사신을 해서 불을 사전에 예방한 사람은 환영받지 못한다. 병을 고친 사람은 명의라 칭송받지만, 병을 미연예 예방한 사람은 칭송을 받지 못한다. 인간은 소 도둑을 잡은 사람에게는 칭송하지만, 소도둑이 들지 않도록 외양간을 튼튼히 지은 사람에게는 칭찬을 하지 않는다. 이러한 우뫼한 일을 지금 우리는 하고 있지 않는지 반문해본다.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에 가서 3차 정상회담을 하고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해한 많은 성과를 가지고 돌아왔다. 이를 두고서 비판하는 일부 수구 정당과 그를 추종하는 불쌍한 인간들을 보면서 서글픈 생각이든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전쟁이 벌어지는 길을 원하는 것인가? 아니면 미연에 전쟁을 예방하여 평화의 길을 여는 길을 원하는 것인가? '곡돌사신'의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그만큼 지금 이순간이 한반도 평화를 위한 너무도 소중한 기회이다.

 

4. 배움에 더해서...

  좋은 책은 책을 뛰어 넘어 더 많은 것을 생각하고 깨닫게하는 책이다. '담론'에는 책을 뛰어 넘어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부분이 많다. 그중 몇가지를 살펴보자.

  거꾸로 읽으면 의미가 살아나는 말들이 많다. '객관'이라는 말을 거꾸로 읽으면 '관객'이 된다는 신영복선생의 말은 '객관적이어라.'라고 말하는 언론에게 일침을 가하는 듯했다.  일부 언론에서는 기계적 중립에 치우쳐서 박근혜 정권에서 행해지던, '한국사 국정화'도 관객의 시선에서 구경하듯 보도했다.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관객'이 되지 말아야한다. 그들과 '관계' 맺었음을 깨달아야한다. 이러한 단어가 '자살'이다. 자살을 거꿀로 읽으면 '살자'가 된다. 자살하려는 사람은 부단히 외치고 있다. '살고 싶다.'고 .... 단지 우리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다케시마'라는 말도 거꾸로 읽으면, '마시케다'가 된다. 일본은 침략주의적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독도를 '마시케다'며 넘보고 있다. 벼가 있는 언어 유희는 우리에게 많은 깨달음을 준다.

  '톨레랑스'를 아는가? 프랑스를 대표하는 말이며, 우리사회에 '톨레랑스'가 필요함을 많은 사람들이 외쳤다. 그런데, 신영복 선생은 톨레랑스는 '서로 차이를 존중하고 공존합시다.'라는 뜻으로 근대사회의 최고 수준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면서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갈 것을 당부한다. '차이와 다양성은 그것을 존중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새로운 시작이어야합니다.' 단순한 공존에서 새로운 시작으로 나가자! 새로운 사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한발자국 더 나가자! 신영복은 외치고 있다. 목수는 집을 그릴때 지붕부터 그리지 않는다. 주춧돌부터 그린다. 톨레랑스라면 서로 인정하면서 공존을 택할 것이다. 그러나 신영복은 자신의 부족한점을 깨닫고 목수의 그림을 배우려한다. 자신을 변화시킨다. 톨레랑스를 뛰어 넘으려한다. '톨레랑스'를 말할때, '톨레랑스'그 너머를 보자! 신영복은 그것을 나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신영복은 공자와 귀곡자의 말을 대비해서 설명한다. 두가지를 대비해서 설명하는 신영복 특유의 설명법은 우리에게 탁월한 이해와 영감을 준다. 공자는 말잘하는 사람을 싫어했다. '교언영색(巧言令色)'하는 사람을 어질지 못하다고 했으니, 말잘하는 공자가 얼마나 말잘하는 사람을 싫어했는지 짐작할 수있다. 반면 귀곡자는 '언어는 좋은 그릇에 담아서 상대방에게 기분 나쁘지 않게 전달하는 것'이라 말한다. 누구의 말이 옳을까? 갑자기 '문질빈빈연후군자(文質彬彬然後君子)'라는 '논어'구절이 생각났다. 겉모습과 속이 빛나야 군자라는 공자의 말을 말에 적용시켜보자. 말의 내용 뿐만 아니라, 그 말의 포장도 잘되어야 참다운 말이 아닐까? 말의 내용과 수사가 잘 갖추어져있다면 그 사람을 어진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을 보면 대화할 때, 대화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대화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해주고 그사람의 입장에서 대화해주는 방법을 강조한다. 수많은 논리적 근거보다 상대의 마음을 이해해주는 한마디가 상대의 마음을 움직인다. '문질빈빈'이라는 말은 언어에도 적용할 수 있다.

  당신은 사실을 뛰어넘어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가? 신영복 선생은 '사실이란 작은 레고 조각에 불과하고 그 조각들을 모으면 비로소 진실이 된다.'고 말한다. 단편적인 레고조각 한두개를 가지고 전체의 진실을 알기는 매우 힘들다. 그런데 우리는 많은 레고조각을 모으는 수고로움을 회피하며 한두개의 레고 조각으로 진실을 본듯이 말한다. 많은 레고 조각을 모았다고 하여 모두가 진실을 보는 것은 아니다. 공룡뼈 화석을 발굴한 고고학자가 몇십년이 지난 후에야 자신이 공룡뼈를 잘못 맞추어 전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로운 발굴을 통해서 알았다는 일화는 질실을 알아간다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를 말해준다. 사실을 통해서 진실을 꿰뚤어 볼 수 있는 통찰력을 갖자!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시는 언어를 뛰어 넘고 사실을 뛰어 넘는 진실의 창조'활동이라 신영복은 말한다.  우리 사실을 뛰어 넘어 진실을 창조하자! 그리고 그 길을 모색해보자!!

 

5. 신영복 선생님 이의 있습니다.!!

  탁월한 식견을 가진 신영복 선생님이지만, 그의 견해 모두를 동의할 수는 없다. 신영복 선생님 질문있습니다.!!

  신영복 선생은 대학생을 '계급을 스스로 선택하는 계급'이라 말한다. '대학 4년은 계급을 고민하는 시기'라는 말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 과연 계급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대학생이 몇 퍼센트나 될까? 극히 일부 명문대, 몇몇 학과에서는 가능할 수 있으나, 자본의 냉혹함 속에 내몰려 혹독한 취업준비를 해야하는 고민을 하는 이 시대의 대학생들이 '계급을 선택'할 수 있을까? 과거 개발독재 시절에는 대학만 나오면 취직이 보장되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광풍 속에서 생각할 시간을 박탈당하고 취업준비에 내몰린 대학생들에게 '계급 선택'의 자유는 없다.

  '다수가 힘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정의'라는 신영복 선생의 말에도 동의할 수 없다. 이 말은 신영복 선생이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전체주의 사상이라는 오해를 받을 위험성이 많다. 다수의 횡포! 중우정치의 함정에 빠질 수 있는 '다수가 힘', '다수 그 자체가 정의'라는 말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진리가 될 수 없다. 다수가 이명박과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뽑았다. 과거 상당수의 국민이 존경하는 대통령으로 박정희를 뽑았다. 그렇다면 이에 당신은 박정희와 같은 정치인이 다시 나타나길 바라는가? 참다운 민주주의는 소수의 의견도 존중할 때만이 생명력을 얻을 수 있다. 그러하기에 민주주의는 인내심이 많이 필요한 제도이다. 신영복이 '모두가 위반할 수 밖에 없는 규칙은 고쳐야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만, '다수가 힘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정의이기 때문이다.' 라는 그의 주장에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

  '통일신라는 개방화되고 속국화됩니다.'라는 표현도 동의할 수 없다. 신영복 선생이 통일 신라 시기를 주권이 침해된 시기로 보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통일신라가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주권이 침해된 속국은 아니었다. 한예로 김춘추의 묘호를 '태종'이라고 짓자 중국이 당태종 이세민과 묘호가 겹친다하여 고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서 신라는 당당히 김춘추가 삼국통일을 이루는데 초석을 닦은 엄청난 업적을 이뤘다고 주장하며 당나라의 요구를 물리쳤다. 신영복은 '자주'와 '개방'이라는 2분법을 축으로 해서 우리역사를 단순하게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이분법적 이해는 역사 이해를 쉽게할 수는 있으나, 역사 인식의 외곡을 가져올 수 있다.

 

 

  20여년이라는 기나기 세월을 감옥에서 지내며 20여년이라는 기나기 세월을 감옥에서 지내며 언제 밝은 세상에 나올지도 모르는 시간을 버텨낼 수 있었을까? 더욱이 그는 감옥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을 떠나서 저 세상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 '담론'에는 신영복 선생이 2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가 적혀있다.

  신영복은 '우리가 작은 추억에 인색하지 말아야 하는 까닭은 추억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뜻밖의 밤길에서 만나는 다정한 길동무가 되어 주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청구회 추억'이 그를 버티게 하는 힘이 되었으며, 감옥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며 그들의 추억을 머릿속에 담으려했다. 그리고 감옥에 비치는 한줄기 햇볕을 보았다. 신영복은 햇볕을 보면서 죽지 않는 이유를 찾았고, 깨달음과 공부를 통해서 살아가는 이유를 발견했다. 자신의 추억뿐 아니라, 타인의 추억 속에서 깨달음과 공부를 했다. 빅터프랭크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에서 '의미치료'라는 치료방법이 있다. 그에게서 '추억'은 '깨달음과 공부'를 가능하게하는 힘을 주었고, '깨달음과 공부'는 신영복에게 살아야하는 '의미'를 선사했다. 그리고 그의 깨달은 그의 책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명필은 장수해야 한다.'라고 신영복은 말한다. 추사는 71세를 살았으며, 이광사는 73세를 살았다. 그들이 그렇게 오랜 세월을 살지 않았다면, 그들의 서체는 완숙해질 수 없었을 것이다. 단순히 오래 살아서도 안된다. 부단히 인생을 생각하며 자신의 삶에 의미를 찾아는 노력을 해야한다. 신영복이 감옥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 노력했고, 세상을 달관할 수 있는 나이에 이르러 우리에게 '강의'와 '담론'을 들러주었기에 그는 우리 가슴에 영원히 살아있을 수 있는 것이리라.....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북프리쿠키 2018-10-06 20: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강나루님.~
편안한 주말밤 되세요^^

강나루 2018-10-06 20:26   좋아요 1 | URL
네 감사합니다^^

카알벨루치 2018-10-06 20: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다 읽꼬나면 이렇게 쓸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근데 완독부터 해야할텐데요 ㅎㅎ

강나루 2018-10-06 20:36   좋아요 1 | URL
천천히 읽으시면 되요
좋은 책이라 생각하며 느끼며 읽어야하기에 천천히 꾸준히 읽으세요^^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 - EBS <인문학 특강> 최진석 교수의 노자 강의
최진석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3월
평점 :
일시품절


 '천의 얼굴을 가진 노자!!'라는 말을 많이 한다. 그만큼 <도덕경> 속의 노자의 말은 다양한 각도로 재해석되어 왔다. <도덕경>을 병법서로 보는 관점과 제왕의 통치술을 제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인 책으로 보는 시점에서 소개된 서적을 보아왔던 나에게 최진석 교수의 관점은 참으로 신선했다. 하나의 관점에 사로잡혀 있으면 그 틀에서 벗어난 사실들은 무시해버린다. 왕필본 <도덕경>과 하상 공본<도덕경>을 읽고 있는 나는 두 주석서를 참고하면서도 이해되지 않는 <도덕경> 속의 노자의 말을 이해하려 부단히도 노력했다. 알을 깨고 나오지 않으면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없다. 최진석 교수의 책은 내가 <도덕경>을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렇다면 내가 본 새로운 <도덕경>의 세상은 무엇일까?


 

1. 최진석만의 탁월한 해석

 

 논어 자로 편에 ‘군자화이부동 소인동이불화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할까? 보통은 '군자는 조화를 추구하나 소인과 같아지지는 않고, 소인은 같아지기를 바라지만, 조화를 이루지는 못한다.'라고 풀이한다. 그러나 최진석은 해석이 달랐다. 당시의 신분제 사회라는 점에 유념해서, 군자는 지배계급으로서, 군자와 소인 계급이 다르며, 따라서 차이를 인정하고 각각의 사명을 수행하여 전체의 조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소인은 피지배계급으로서 계급적 구분을 부정하고 군자와 차이 없이 같아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라고 말한다. 기존의 현대적 관점으로 해석하는 보통의 학자들과는 달리 혁명적으로 해석한 최진석의 해석은 나의 머리를 망치로 두들겨 패는듯했다. 공자는 기존 질서 유지를 두둔하는 보수적인 학자로 볼 수도 있는 해석이다. 이러한 혁명적인 해석으로 <도덕경>을 <논어>와 대비시키며 최진석은 자신만의 <도덕경> 읽기를 한다.

 무명천지지시(無名天地之始) 유명만물지모(有名萬物之母)를 최진석은 어떻게 해석할까? '이름 없음은 천지의 시작이요, 이름 있음은 만물의 어머니이다.'라는 보통의 해석을 최진석은 자신만의 '무'와 '유'의 개념정의로 혁신적 해석을 해낸다. '무'는 없음을 뜻하지 않는다. 몸 안의 공간처럼 비어있으되 기능하는 영역을 '무'라  하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유'라 정의한다. 있음과 없음이라는 극단적인 표현보다는 '비어있음'으로 '무'를 해석하는 것이다. 비어있는 곳이 우리가 기능하는데 많은 기여를 한다. 도시의 비어있는 공원이 도시의 삭막함에서 벗어나 우리에게 삶의 여유를 주듯이……. '있음'과 '없음'의 극단적인 개념으로 도덕경을 바라보았을 때는 이해가 되지 않던 도덕경이, 최진석의 새로운 관점을 통해서 바라보니, 너무도 쉽게 이해되었다.

 

2. <도덕경>의 핵심 '유무상생'

 <도덕경>의 핵심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많은 사람들은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 명가명 비상명(名可名 非常名)'을 핵심이라고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최진석은 <도덕경>의 핵심은 대립 면의 공존이라 말한다. 이를 도덕경의 표현으로 말한다면 '유무상생(有無相生)'이라 할 수 있다. 유와 무는 서로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새끼줄이 서로 꼬여서 하나의 새끼줄이 되듯이, 유는 무와 관계를 맺고 무는 유와 관계를 맺는다. '노자의 철학 체계 안에서 유와 무는 존재적으로 선후나 차등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층 차에서 공존한다.'는 최진석의 해석은 그가 바라보는 <도덕경>의 핵심이다.

 이러한 관계론적 측면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새로운 관점이 눈에 들어온다. '밝을 명(明 )'에 대한 최진석의 해석을 살펴보자. 그는 '해를 해로만 또는 달을 달로만 아는 것은 '지(智 )'이며, '해와 달을 한 세트로 아는 것'은 '명(明)'이라 말한다. 노자 철학을 관계론적 측면에서 바라보는 최진석의 해석을 확장하면 그동안 이해되지 않았던 많은 동양철학의 의문들이 풀린다. '생사일여(生死一如)' 즉,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이 말은 삶과 죽음을 같이 바라보아야, 둘 사이를 관계론적으로 바라보아야 제대로 '삶과 죽음'을 바라볼 수 있다는 철학적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니 '사랑과 이별'도 하나일 수밖에 없다. 그뿐인가? '사랑과 이별'이 하나라면, '사랑과 미움'도 하나이다. 사랑하기에 미움도 싹튼다. 연애할 때는 그렇게 사랑하는 연인이 결혼해서 싸우는 것도 사랑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서로에게 무관 심해질 뿐이기 때문이다. 인생은 수많은 관계의 연속이다. 서로 대립하는 두 개념의 연속에서 벗어나서 때로는 대립하는 세차원의 관계 속에서 인생이 펼쳐지기도 한다.


3.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

 '馳騁?獵令人心發狂(치빙전렵영인심발광)'이라는 말은 '말달리며 사냥하는 사람의 마음을 발광하게 한다.'라고 해석된다. 나는 이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노자는 사냥이 사람을 미치게 한다고 말했을까? 사냥은 고대의 군사훈련 성격도 갖고 있기에 군주는 사냥을 많이 다녔다. 그런데 왜? 사람을 미치게 할까? 최진석은 '바람직한 것을 모두 똑같이 수행하는 사회보다 바람직한 것을 없애고 각자 바라는 바를 다양하게 수행하는 사람들이 모인 사회가 더 강하다.'라고 해석한다. 사냥감을 쫓는 사람들처럼 모두가 같은 목표를 향해서 맹목적으로 달리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미쳐 나갔는가? 충남의 00 고등학교에서 모의고사 1% 안에 드는 학생이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사회가 정해놓은 목표가 근접한 학생이 모의고사 성적이 떨어져 고민하다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모두가 같은 목표, 사회가 정해놓은 목표를 향해 달리면서 많은 학생이 미쳐나가고 있다. 자신이 정한 목표가 아닌, 누군가에 의해서 정해놓은 목표의 위험성을 일찍이 노자는 지적하고 있었다. 1등이 아니면 모두가 패배자라고 치부하는 사회에서 살아남는 것 자체가 용기 있는 우리 사회를 보면서 노자의 구절을 다시 한번 들여다본다.

 '故貴以身爲天下 若可寄天下 愛以身爲天下 若可託天下(고귀이신위천하 약가기천하 애이신위천하 약가탁천하)'라는 말은 '그래서 자신을 천하만큼 귀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천하를 맡길 수 있고 자기를 천하만큼 사랑하는 사람에게 천하를 줄 수 있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언뜻 생각하면, 이기적인 사람에게 천하를 맡길 수 있을까?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최진석은 '죽음을 가벼이 여기게 만드는 국가라면 이미 근본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다.'라고 진단한다. '자신을 소중히 여길 수 있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는 최진석의 주장은 노자가 말하는 건강한 사회를 이해하게 해준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자신의 몸을 희생하는 극단적인 모습을 '가미카제 특공대'에서 우리는 찾아볼 수 있다. 일본 제국주의라는 광풍 속에서 수많은 젊은이를 '일본제국'을 위해서 '천황'을 위해서 바치라고 강요했다. 승산 없는 전쟁에, 가치 없는 전쟁에 수많은 젊은이가 죽었다. 그 죽음의 행렬에 조선의 젊은이들도 있었다. 자신도 사랑하지 않는자가 어찌 남을 사랑할 수 있을까? 개인을 소모품으로 여기는 국가가 국민을 안전하게 보살필 수 없다. 노자는 이미 전체주의의 위험성을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과연 우리는 자신의 몸을 천하만큼 사랑하는 자에게 이 나라의 운영을 맡기고 있는가? 저 국회에 있는 국회의원 중에서 과연 얼마만큼이 그러할까?

 

 최진석을 통한 <도덕경> 읽기는 나에게 새로운 관점을 안겨주었다. 팟캐스트 '학자들의 수다'를 통해서, 하상공주에 근거한 노자 이해를 주로 해왔다면, 최진석을 통해서 대립 면의 관계성을 강조한 '(有無相生)'이라는 문구를 통한 노자 이해는 <도덕경> 이해를 한 차원 높여주었다. 그리고 '보통명사'로 살기보다는 '고유명사'로 살라는 말을 되뇌며, 학생들에게 남이 정해 놓은 목표를 살기보다는 자신이 정한 자신의 삶을 살도록 안내하는 교육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개별 자의 독립성보다는 관계성에 주목하고, 나의 삶을 살자! 오늘도 나는 <도덕경> 읽기를 계속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니체의 신은 죽었다
프리드리히 니체 & 마르틴 하이데거 지음, 강윤철 옮김 / 스타북스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니체! 내가 니체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중학교 시절 서점에서 였다. 그때 돈으로 천원이면 작은 책한권을 살 수 있었다. 시중의 책을 글자 폰트를 작게하고 얇게 만들어 돈이 부족한 나에게는 참으로 좋은 책이었다. 그 책들 중에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이 나의 눈길을 끌었다. 그리고 그 책을 샀다. 그러나, 5장을 읽고는 다시 책장을 덮었다. 너무도 이해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어른이 되어서 팟캐스트를 통해서 니체에 대한 다양한 강의를 들었다. 그리고 니체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그리고 이책을 꺼내 들었다.

 

1. 불친절한 니체씨!!

  니체는 불친절하다. 자신의 사상을 독자가 알기 쉽게 풀어써주지 않는다. 그런데, 이책의 출판사는 니체 만큼이나 불친절하다. '니체의 신은 죽었다.'라는 책을 마틴 하이데거가 왜? 썼는지, 그리고 이러한 구성을 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독자에게 말해주는 것은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출판사는 이러한 설명도 없이 독자에게 이 책을 읽으라고 한다. 1,2,3부를 읽으며, 이해가 되지 않으면 두번씩 읽으며, 4부의 마틴 하이데거의 '신은 죽었다. '라는 논문을 읽으면 니체에게 성큼 다가서리라 믿었다. 그런데, 아뿔싸!! 니체의 사상을 잘 이해하라고 구성한 4부가 더 이해하기 힘들었다. 니체의 사상에 대한 해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이데거의 사상을 이해해야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했다. 이책의 가장 어려운 부분이 바로 4부였다. 불친절한 니체씨 만큼이나, 하이데거도 불친절했고, 이들을 뛰어넘는 출판사의 불친절함은 나를 감탄하게 했다.

 

2. 여혐 니체!!

  니체라는 이름은 강한 느낌을 준다. 중세의 기나긴 시간동안 인간을 억압해왔던 종교에 맞서서, 당당히 신은 죽었다. 라고 외쳤던 니체!! 당당한 이미지의 니체가 여성 혐오자였다는 사실을 이책을 통해서 알았다. 믿겨지지 않았다. 니체를 연구하는 여자 학자도 있는데, 그 여성학자는 니체의 이러한 여혐론에 대해서 어떠한 기분이 들었을까?

 

"여자는 남자와 동등한 권리를 갖지 못하며 여자가 남자보다 열등하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저없이 주장할 수 있게 된다."

"복수와 사랑에서 여성은 보다 야만적이다."

"여자를 만든 것이 신의 두번째 실수였다."

"여자는 깊이 있는 척하는 껍데기이다."

 

  왜? 이리도 니체는 여성 혐오자가 되었을까? 니체가 강하게 여성을 비하하고 열등한 존재로 규정할 수록, 니체가 측은해지는 것은 왜일까? 그 정답은 그의 인생을 통해서 찾아야하지 않을까? 니체는 아버지가 5살에 돌아가셨기에, 어머니를 비롯한 3명의 고모와 엘리자베트라는 여동생에 둘러싸여 살아야했다. 그는 여성의 옷을 입도록 강요받았다. 이러한 삶이 내면에 침잠하여 여성 혐오로 표출되지 않았을까? 니체가 '힘의 의지'를 추구 한 것도, 강한자가 되어 여성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니체의 '힘의 의지'는 단순히 '폭력'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적 불굴의 신념'을 뜻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여성성을 강요받던 니체는 이 강요로부터 탈피하기 위해서라도 '내적 불굴의 신념'이 필요했을 것이다.

 

"성적인 사랑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그러한 기대를 갖는 것에 대한 수치심이 처음부터 여자를 보는 눈을 망쳐 놓는다."

"늘 깜짝할 사이의 많은 어리석은 행동에 대하여 그대들은 연애라고 부른다."

"결혼하기 전 당신 자신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보라. 즉 나는 이 여자와 늙어서도 여전히 대화를 잘 나눌 수 있을까? 결혼생활은 긴 대화이다."

 

결혼을 하지 않은 니체가 결혼에 대해서, 연애에 대해서 이렇게 깊이 있는 말을 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뿐이 아니다. 여성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말들을 쏟아낸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심리학자 황상민이 한말이 있다. '그들이 하는 말을 거꾸로 생각하며 그들의 마음을 알 수 있다. ' 여성에 대한 혐오와 결혼에 대한 많은 심오한 격언들은 그만큼 니체가 연애와 결혼을 하고 싶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루 살로메와 연애하고 싶었고, 그녀와 결혼하고 싶었지만, 루 살로메는 니체를 거부했다. 루 살로메는 니체와 지적인 대화를 나누고는 싶었지만, 그와 잠자리를 같이하기는 싫었다. 여성으로부터 버림받고, 좌절받은 남자의 상처는 깊다.  2011년 오슬로 북서쪽 30Km에 위치한 노동당 청년캠프 행사장(우퇴위아 섬)에서 극우 청년에 의해서 테러가 일어났다. 그 청년의 말중에서 '나도 여자를 사귈것이다.'라는 말이 생각난다. 또한 극우 청년으로, 여성혐오증을 가지고 있으며, 모범적 단일민족 국가로 한국을 뽑았다는 사실이 인상적이었다. 사랑을 갈구하지만, 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사랑은 분노로 폭발한다. 니체와 노르웨이의 극우청년의 경우, 여성에게 사랑받고 싶고 사랑하고 싶었으나,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폭력적 말이나 행동으로 이것이 표출된 것은 아닐까?

  니체는 수많은 철학자들의 이름을 나열하면서, 철학자는 결혼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단지 소크라테스가 실수를 했을 뿐이라고 한다. 이는 결혼하지 못한 니체 자신에 대한 변명으로 들린다. '나도 연애하고 결혼하고 싶다!! 천재인 내가 무엇인 못나서 여성이 없겠는가?'라는 니체의 절규가 나의 귓가에 들린다. "모든 위대한 사랑은 동정의 단계를 초월해 있다." 진정한 사랑은 동정이 아니며, 상대를 동정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하나의 인간! 하나의 인격체로 사랑한다. 악마가 "신은 죽었다. 인간에 대한 동정 때문에 죽었다."라는 말을 했다는 말도 결국 동정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뜻이다. 니체는 여성에게 동정의 대상이고 싶지 않았다. 한남자로서, 사랑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루 쌀로메에게 니체는 동정의 대상! 그 이상은 아니었나 보다. 니체를 알면 알수록 그가 더욱 측은해지는 것은 왜일까?

 

3. 크리스찬 가정에서 자란 니체!!

 니체를 공부하면서 도올 김용옥 선생이 떠오른다. 크리스찬 가정에서 자라났지만, 현실 교회를 가장 날카롭게 비판한다. 그렇다고 그가 예수님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니체와 도올은 예수를 성인으로 인정한다. 가장 독실한 크리스찬이었기에 예수의 말과 달리살며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기득권을 지키려는 세력에 쓴 소리를 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신의 자식으로서 누구든다 동등하다. 그런데 예수를 영웅으로 만들어 놓다니!'라고 소리친다. 이 말은 '도마복음'에서 예수를 인간으로 표현한 것과 유사하다. 예수와 인간이 동등하다는 니체의 주장은 크리스찬들에게는 엄청난 발발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나는 신에게 영예를 돌려 신을 악의 아버지로 생각"한다는 니체의 말을 가히 충격적이다. 더 큰 폭탄발언을 소개할까? "형제들이여, 내가 지어낸 이 신은 다른 신들이 모두 그러하듯이 사람들이 만들어낸 사람들의 작품에 불과하며 망상에 불과하다.' 니체의 이 말은 자신을 전투적 무신론자로 규정한 니챠드 도킨슨을 떠올리게 한다. 크리스찬 가정의 엄격함이 니체를 이렇게 급진적인 철학자로 키웠던 것일까?

  "저 도덕이야 말로 위협가운데서도 가장 위험한 것이라면?"이라 주장하며 '도덕'에 대한 의심을 한다. 서구 기독교 사회에서 기독교 윤리에 대한 의심은 보통 용기있는 자가 아니라면 할 수 없다. 한편으로는, 니체의 말이 타당해 보이기도 하다. 한사회에서의 도덕이 다른 사회에서는 부도덕한 것으로 규정된다.(공간의 차이) 또한 한시대의 도덕이 다른 시대의 부도덕일 수도 있다.(시간의 차이) 남편이 죽으면 부인이 따라죽는 사티라는 인도의 풍습 과거에는 도덕적인 행동일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시대 인도를 벗어나면 사티는 부도덕한 일이 된다. 그리고 오늘날 사티는 법으로 해서는 안되는 악습으로 규정되어 있다. 현실의 그 어떤 철창도 부수려했던 망치의 철학자 니체! 그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모든 억압을 부수려했다.

  니체를 대표하는 사상중에 하나가 '니힐리즘'이다. 허무주의!! 니체의 니힐리즘은 '최고 가치들이 가치 없어지는 것'을 뜻한다. 이를 하이데거는 '종래의 가치들에 대한 부정은 새로운 가치 선정에 대한 긍정'이라고 말했다. 서구 기독교 도덕에 대한 '니힐리즘'은 새로운 시대의 도덕을 세우기 위한 창조적 파괴일지도 모른다.

 

4. 고통속에 철학을 꽃피운 니체!!

  이책 곳곳에 '병자', '고통', '죽음'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이러한 단어들이 자주 그의 글에 등장한다는 것은 그를 가장 괴롭히는 것이 '질병', '고통',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니체가 매독을 앓기 시작했으며, 결국은 이 매독균이 뇌에 침투하여 그를 미치게 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어느 팟캐스트에서는 뇌종양이 그를 괴롭혔고 이것이 그를 죽음으로 인도했다는 주장을 했다. 매독과 뇌종양 중에서 한가지만이 니체를 괴롭혔다기 보다는 이 모두가 니체를 괴롭혔을 것이다.  

 

"괴로움이 철학을 낳는다면 만약에 생각 자체가 병으로 부터 압력을 받게 된다면 어떻게 될것인가?"

"우리 철학가들 역시 우리가 병이 났을 때는 우리의 몸과 영혼은 병에게 맡기고 우리 자신들로부터 눈을 감아버린다."

"인간의 죽음에 대한 생각을 전혀하지 않은 것을 보는 것은 나에게는 무거운 일이다."

 

니체는 괴로웠을 것이다. 매독은 잠시 발생했다가 치료를 중단하면 잠복기에 들어가고 이 매독이 재발할 경우 척수에도 침투할 수도 있고, 뇌에 침투할 수 있다. 뇌에 침투할 경우, 매독성 치매로 진행된다.그 고통 속에서 니체는 고통과 죽음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니체는 이 고통에 무릎꿇지 않았다. 니체는 '그들에게 있어 삶에 대한 생각이 몇백배나 더 생각할 만큼 가치있는 것이 되도록'하겠다며 당당히 고통과 죽음에 맞선다.

  혹시 니체의 좌우명이 무엇인지 아는가? "상처에 의해 정신이 성장하고 힘이 회복된다."는 그의 좌우명은 고통에 좌절하지 않겠다는 그의 불굴의 의지를 보여준다. 심지어 그는 '모든 경우가 하나의 행운이다. 무엇보다도 전쟁이 그렇다.'며 고통의 극단인 전쟁을 찬미하는 어리석은 모습까지 보인다. 그만큼 그는 절실했다. 고통에 무릎꿇지 않으려 몸부림쳤다. 그러면서 희망을 노래했다. '철학은 고작 신체의 해설과 신체에 대한 오해'라고 말하며, '지금까지 행해진 모든 철학의 목표는 진리가 아닌 다른것 '건강, 미래, 성장, 힘, 생명'이라고 말한다. 신체! 아니 건강한 신체를 그는 희구했다. 그러면서 그는 고통을 승화했다.

 

"내가 심하게 아팠던 시절에 얻은 이득을 난 아직도 다 소모하지 못했다."

"삶이란 또한 우리에게 상처를 입히는 모든 것이다."

"오직 거대한 고통만이 영혼의 최종적인 해방자인 것이다."

 

  니체는 고통속에서도 철학을 했다. 그리고 그 고통을 통해서 우리에게 많은 주옥같은 명언들을 쏟아낸다. "가장 강한자로서 가장 정신적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파멸을 보는 곳에서 행복을 발견한다."라는 그의 말은 병으로 무너져가고 있는 자신은 그 질병을 통해서 더 많은 깨달음을 얻을 것이며, 고통과는 상관 없이 행복하다는 신념을 말하고 있다.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가 떠오른다. 힘든 감옥속에서도 자신의 자유와 신념을 지키려는 지식인의 불굴의 신념이 떠오른다. 20여년을 감옥에서 보내며 인생과 고전의 지혜를 갈고 닦은 신영복이 생각난다. 니체에게 고통은 감옥이었다. 그러나 그 고통이라는 감옥에 굴하지 않고, 신영복이 고전의 지혜를 갈고 닦았듯이, 니체는 고통을 통해서 자신의 철학을 더욱 날카롭게 벼렸다.

  Amorfati(운명애)!!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 서서히 죽어가는 니체는 절규한다. "적어도 나는 언젠가 반드시 하나의 긍정자가 되고 싶다."이 말은 지금은 긍정자가 아니라는 말이 된다. 병마와 싸우며 긍정자가 되기 위해서 니체는 노력한다. "오늘 가장 좋게 웃는 자는 역시 최후에도 웃을 것이다." 지금 당장 웃는다면, 그는 죽을 때도 웃을 것이다. '영원회귀'라는 말을 이때 사용해야되지 않을까? '고통'이라는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며, 긍정자로 살기 위해서 노력한 니체!! 그는 초인을 찾는다. '초인이란 필요한 일을 견디어 나아갈 뿐아니라 그 고난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고통을 견디어 나갈 뿐만 아니라, 고통을 사랑하려하는 니체의 모습이 느껴진다. 세상에 고통까지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까? 더 나아가 상대방의 아픔까지 사랑하는 자가 있을까? 있다면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일 것이다. 사랑할때 우리는 고통을 인내하며 상대방의 고통까지 사랑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할때 초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자랑스럽게 사는 것이 그 이상 가능하지 않을 때, 사람은 자랑스럽게 죽어야 한다."

 

  니체는 자랑스럽게 살고 싶었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죽음을 선택하고 싶었다. 그러나 니체의 이 소망을 이뤄지지 않는다. 1889년 투린에서 마부의 채찍을 맞는 말을 감싸 앉으며 그는 쓰러진다. 인간에 대한 사랑을 뛰어 넘어 살아 있는 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려했던 초인은 그렇게 쓰러졌다. 그리고 10여년을 병실에서 살다가 1900년 바이마르에서 사망한다. 그때가 8월 25일이었다.

 

5. 니체가 들려주는 아포리즘!!

  니체의 글은 문학적이며 많은 명언들로 가득차 있다. 이 책에 소개된 많은 명언들이 나의 가슴을 울리게 한다. 그 명언중에 일부를 소개해본다.

 

"현명한 사람은 자기가 그 법칙을 획득해 낸 윤리 이외의 어떤 윤리도 알지 못한다."

  '그 법칙을 획득해낸 윤리'란 무엇일까? 외부에서 강요되거나 맹목적 복종을 요구하는 윤리를 구체적 '삶의 문답'으로 해부해내는 능력을 말한다. 노예의 윤리를 거부하고 당당히 자신의 윤리로 살면서 주인으로 살아가라는 의미일 것이다.

 

"인간만이 웃음을 고안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깊이 괴로워하고 있다."

  동물중에서 '우울증'을 알고, 스스로의 목숨을 끊고, 혹은 과로사를 하는 동물은 인간이 유일하지 않을까?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가장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는 니체의 탁월한 지적은 한국의 현실에서 너무도 유효하다.

 

"아무것도 버릴 수 없는 자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

  모든 것은 댓가를 필요로한다. 그런데 인간은 아무것도 버리고 싶어하지 않고 더 많은 것을 얻으려한다. 희생없이 댓가만을 바란다면 그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사랑하는 여성을 원한다면 시간과 돈과 사랑을 한여성에게 쏟아야하듯이....

 

"알맞은 정도라면 소유가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 도를 넘어서면 소유가 주인이 되고 소유하는 자가 노예가 된다."

  황금만능의 시대! 감질! 금수저가 활개치는 시대! 우리사회에 적절한 니체의 명언이다. 회사원들을 자신의 기쁨조로 여기며 갑질을 해대는 재벌 2세와 3세는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부로 인해서 물질의 노예가 되었다.

 

"진리는 힘이 필요로 한다."

  '정의는 힘이 필요하다.'라는 말로 치환가능하다. 정의도 진리도, 진실도 힘이 있어야 정의일 수 있고 진리일 수 있다. 세월호의 진실은 촛불혁명이라는 힘을 필요로했고, 그 진실에 다가설 수 있었다.

 

 

   니체는  "그 같은 자유정신은 존재하고 있지도, 전에 존재해 본 적도 없다."라고 말했다. '자유정신에 대한 부정이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몸이 약하고 지독한 고통속에서 살아야했던 니체에게 '자유정신'은 부정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이것이 건강한 육체에 대한 희구로 이어졌을 것이다. '니체의 신은 죽었다.'라는 책을 읽으며, 나는 강한 니체의 모습이 떠오르기 보다는 아프고 고뇌하는 인간 니체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그 고통속에서 완성된 철학을 나의 지식으로 단시일내에 정복하기란 너무도 힘들다. "산맥 중에서 가장 가깝게 가는 길은 산봉우리에서 산봉우리까지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긴 다리를 갖고 있어야만 한다."라는 니체의 말처럼, 그의 명언을 읽기 위해서는 긴다리가 필요했다. 나에게 긴다리가 없다면 긴 장대가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어린시절 기다란 장대를 개울에다 짚고 반대편으로 넘어가던 일이 생각난다. 스타북스 출판사에서 만약 니체를 이해할 수 있는 장대를 이책의 곳곳에 배치했다면 '니체의 신은 죽었다.'라는 책을 읽기에 좀더 수월했을 것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20-09-03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가 너무 길어 앞에 조금 봤는데 시간이 많으신가 보네요. 저 같으면 리뷰 안 쓰고 책 한권이라도 더 볼 듯^^;;

강나루 2020-09-03 21:25   좋아요 0 | URL
독서 초보는 책을 읽고 독서를 좀한 사람은 책을 읽고 서평을 쓰고 독서 고수는 자신의 책을 쓰지요

candidx 2022-10-16 16: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상세한 리뷰 너무 감사합니다. 책을 읽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강나루 2022-10-16 17:58   좋아요 0 | URL
도움이 되었다니 제가 감사합니다^^
 
세상 벽암록
윤용진 지음 / 애니빅 / 201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무문관'을 강신주 방식으로 풀어낸,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라는 책을 읽고 나서부터 선문답에 대한 책들을 더 읽어 보고 싶었다. 사실 강신주가 '벽암록'을 비롯한 선문답 관련 서적들에 관한 책을 쓰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중에 나와 있는 선문답책들이 쉽게 풀어 놓았다고 말들하지만,  강신주 처럼 쉬우면서도 깊이있는 설명을 해내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깊으면서도 쉽게 글을 쓴다는 것은 왠만한 고수가 아니면 해낼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아무리 기대려도 강신주는 새로운 선문답 관련 책들을 내놓지 않고 있다.그를 기다리느니, 다른 책들을 읽으며 갈증을 해소해 보기로 결심했다. 푸른 바위위에 무엇을 기록했는지, 책제목이 '벽암록'이다. 5권으로 풀어 놓은 벽암록이 있지만,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아마추어가 쉽게 풀이한 '세상 벽암록'을 선택해다. 과연 이책은 선문답에 대한 나의 갈증을 풀어줄 수 있었을까?


1.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조린다.
  강신주의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를 읽고 이 책을 읽으니, 몇개의 화두는 풀 수가 있었고, 몇개는 저자 윤용진의 풀이를 읽고서 이해를 했다. 그런데, 나의 풀이와 저자 윤용진의 풀이가 다른 부분이 있다. 
  제2칙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에 대한 풀이를 어떻게 해야할까?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다만 간택만을 꺼리면 된다. 도의 경지를 말하려는 것도 간택이다. 그러니 도는 명백함도 없다. 라는 조주화상의 말에 수행승이, '명백함이 없다면 무엇을 지켜야 합니까?'라고 묻는다. 그러자 조주화상은 '나는 모른다.'라고 답한다. 이에 대해서 저자 윤용진은 '명확하지도 않으면서 어찌 크다고 할 수 있는가?', '도 또한 그러하지 않는가?'라고 풀이한다. 이러한 풀이가 나로서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수행승의 입장에서는 윤용진의 풀이가 오히려 궁금증을 더해주지 않을까?

  도는 간택을 꺼린다. 도의 경지를 말하려는 것도 간택이다. 간택하지 않으니 도는 명백함도 있을 수 없다. 노자가 말했지 않은가? 도를 도라하면 도라할 수 없다고.... 인간의 개념으로 도를 명백히 규정한다면 도는 하나의 도그마로 떨어진다. 인간의 도그마에 의해서 규정된 도를 과연 도라할 수 있겠는가? 한예를 들어보자. 조선 후기 송시열을 중심으로한 노론세력에 의해서 절대화되고 교조적으로 변한 조선의 성리학을 유학의 정통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들은 주자와 송시열의 사상만을 정통으로 생각하며 독자적인 해석을 시도한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몰아 죽이기까지 했지 않는가? 그들을 학자라 말할 수 있을까? 자신의 생각에 반론을 제기하고 동의하지 않았다고 칼을 들이 대는 행동은 파시스트들이나 하는 야만적인 행동이다. 절대화된 도는 도가 아닌 것이다.

  제3칙 일면 월면 (日面佛 月面佛)에 대한 풀이도 동의할 수 없다. 몸이 아파 누워있는 마조화상에게 원주스님이 '법체가 어떠하십니까?'라고 묻자, 마조화상이 '일면 월면 (日面佛 月面佛) 이네.'라고 답한다. 일면불의 수명은 단 하루요. 월면불의 수명은 8천 1백세이다. 윤용진은 이를 '수명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고 풀이한다. 그럴까? 마조화상의 말씀을 너무 낮은 수준에서 풀이한듯한 인상을 받는다.

  이승에서의 삶은 하루 같이 짧지만(일면불(日面佛)), 저승에서의 삶 혹은 윤회의 삶은 억겁의 시간이다.(월면 (月面佛))라고 해석해야하지 않을까? 마조화상은 지금 이순간의 삶보다는 우주적 시각에서 자신의 삶을 조망하고 있으며, 이러한 시각에서 원주스님의 말에 답하고 있다. 불교의 스케일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한다.

  제20칙 거기엔 뜻이 없다.의 풀이는 너무 의아스럽다. 용아납자가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취미화상이 선판을 가져오라 한다. 용아납자에게 선판을 받아 들고는 즉시 내려쳤다. 이를 윤용진은 "분명 거기엔 아무런 뜻도 없다."라고 풀이했다."라고 풀이한다. 선판과 포단을 내리친 것이 어찌, '거기엔 아무런 뜻도 없다.'라고 풀이되는가? 선판과 포단은 참선을 할 때 필요한 것들이다. 나에게 묻지 말고, 네 스스로 좌선하여 깨달으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것이 '용아납자'를 깨우치는 스승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제29칙 온 세상이 파멸할 때라는 주제는 불교를 순응적인 종교로 오해하기 쉽도록 풀이를 해놓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수행자가 '온 세앙이 파멸할 때' 그것을 따라가겠다고 말하자, 대수화상이 '따라가라!'라고 말한다. 이를 윤용진은 '그날을 맞이하는 수밖에 없다.'라고 풀이했다. 얼마나 순응적인 풀이인가! 나는 풀이를 달리한다. 불교의 생각의 넓이와 폭은 헤아릴 수가 없다. 미륵보살도 56억 8천만년 후에 이 세상에 오신다 하지 않았는가? 그러하기에 온 세상이 파멸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지금의 우주가 사라지고, 새로운 우주가 생성되는 새로운 종말이자, 새로운 시작의 시점이다. 그러하기에 대우주적 순환 속에서 온 세상의 파멸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수행자가 '그것을 따라가겠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대수화상은 '따라가라!'라고 말했던 것이다.

  제63칙 남전의 일도양단에 대한 풀이도 저자와 나의 생각이 다르다. 선승들이 고양이를 가지고 서로 다투자. 남전화상이 고양이를 잡아들고서, '말할 수 있다면 이 고양이를 절단하지 않겠다.'라고 말한다. 선승들이 말이 없자, 남전화상은 칼로 고양이를 두 동강 내어버렸다. 이를 윤용진은 '한번 분열된 국민의 마음을 되돌리기 어렵듯이 한번 죽은 고양이도 다시 살아올 수 없다.'라고 풀이한다. 남전화상이 분열된 선승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고양이의 생명을 거두었다는 풀이로는 남전화상의 의도를 다 설명할 수 없어 보인다. 고양이에 대한 집착이 선승들의 분열을 가져왔으며, 더 나아가서 선승들의 수행을 방해할 것이다. 그 집착을 없애려 고양이를 죽였다고 풀이해야 보다 근본적인 풀이가 되지 않을까?

 

2. 불친절한 용진씨

  이 책은 대중을 위해서 씌여졌다. 그런데, 불교에 대해서 많이 알지 못하는 대중들을 위해서 보다 친절한 풀이를 해주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리 친절하지 않았다.

  제43칙 산놀이를 설명하면서 '오노봉'이 무엇을 뜻하는지 설명해주지 않았다. 또한 제69칙 남전의 일원상 또한 불친절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남전화상이 혜충국사를 만나러 가는 도중에 깨달은 바가 있어, 혜충국사를 만나러 가지 않겠다고 말한 것이라 풀이한다. 그렇다면, 남전화상이 과연 무엇을 깨달았는지를 설명해주어야한다. 그러나, 저자 윤용진은 이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고 넘어간다. 제62칙 우주 가운데 보물은 원문과 저자의 설명을 아무리 읽어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책에는 우리가 한국사 교과서에서 보았던 "혜초"라는 인물의 이름도 등장한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혜초가 맞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설명해 놓지 않아서 알 수가 없다. 화두의 내용을 살펴보면, 혜초스님이 '무엇이 부처입니까?'라는 질문을 하자, 문익화상이 '네가 혜초니라.'라고 말했다. 저자는 '모든 문제의 중심에는 항상 자신이 있다.'라는 뜻으로 풀이했다. 그러나 문익화상이 일깨우고자 했던 참된 의미는 '네가 부처다.'라는 의미를 전달하려한 것이 아닐까?

  저자 윤용진이 스스로 밝혔듯이, 불교 철학자도 아니요, 스님도 아니기에 깊이 있는 설명을 바랬던 것이 무리일 수도 있다. 다음에 '벽암록'의 본칙과 송, 수시, 착어, 평창까지 자세히 설명해 놓은 책을 읽을 때, 이 책과 비교하면서 나름의 이해를 해보기로 마음 먹었다. 이 책은 벽암록의 끝이아니라, 시작점이 셈이다.

 

  불교에 많은 관심이 있는 윤용진이 심혈을 기울여 풀이를 달아 놓았다. 여행을 하면서 틈틈히 볼 수 있는 책이다. 하나의 화두를 읽고 그 뜻풀이를 하고, 이를 윤용진의 풀이와 비교하는 재미가 나름 쏠쏠하다. 선문답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간단히 읽을 수 있는 책으로 추천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