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에 읽는 니체 - 지금 이 순간을 살기 위한 철학 수업 마흔에 읽는 서양 고전
장재형 지음 / 유노북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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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고, 가벼운 마음으로 오디오북을 열고 읽기 시작했다. 역시나 니체의 글은 쉽게 쓰여져 있다고 해서 쉽게 지나칠 수 없는 글이다. 니체를 전공하지 않은 장재형 작가의 글이다보니 아무래도 쉬울 것이며, 쉽게 지나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나의 오만이었다. 많은 생각꺼리를 던져주기에 오디오 북으로 읽기에도 한계가 있었다. 집안일을 하면서 오디오북을 듣다보니, 중간에 메모를 하기도 힘들었다. 할 수 없이 오디오 북을 다 읽고 나서, 머릿속에 남는 한가지를 가지고 글을 쓰기로 했다. 

  '죽음을 맞이하는 법을 배워라'라는 주제가 나의 머릿속을 맴돈다. 인생 초반기에는 살아기기 위해서, 도전하기 위해서 새로운 것을 찾았다. 그리고 어떻게 삶을 이루어갈지를 고민했다. 이제 인생의 반환점이 보이는 시기가 되자, 반환점을 돌고난 이후의 인생에 대해서 생각을 한다. 어떻게 나이들어갈지, 어떻게 죽음을 바라보아야할지를 고민한다. 

  니체는 어떻게 잘 죽을지를 고민하라는 화두를 던져주었다. 세상에 잘 태어났고, 잘 살았다면, 이제는 잘 죽을 것을 고민해야한다. 잘 죽기 위해서는 인생의 황혼기에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고민하고, 어떻게 건강을 관리할지도 고민해야한다.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TV프로가 남성들 사이에서 인끼를 얻는 이유도 이와 관련있을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자연에서, 자유를 누리면서, 건강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니체가 말한 잘 죽을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인생의 반환점을 돌고, 어떻게 인생 후반전을 살아가야할까? TV에 나오는 자연인들 처럼 시골에 내려가서 새로운 삶을 살아갈까? 사회에 봉사하면서 의미있는 삶을 살아갈까? 도서관을 오가면서 읽고 싶은 책을 읽으며 여생을 살아갈까?

  마흔을 지나서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 '마흔에 읽는 니체'는 새로운 화두를 던져주었다.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는 화두를 머릿속에 담아두며 새로운 내일을 맞이한다. 그 화두를 풀기 위해서는 더 많은 고민과 더 많은 독서가 필요하다. 그 길을 걸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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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2-11-27 14: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제가 오래 사용했던 배경 화면이라 반가워요. 이 배경 참 좋아요.
니체의 글을 좋아하는 1인입니당~~

강나루 2022-11-27 15:44   좋아요 1 | URL
저도 니체철학을 좋아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모든 사람을 위한, 그리고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이진우 옮김 / 휴머니스트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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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로보로스(Ouroboros)! 책 표지에 자신의 꼬리를 삼키는 우로보르스가 등장한다. 시작이 끝이요. 끝이 곧 시작을 의미하며, 무한한 순환과 윤회의 상징인 우로보로스가 책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 우로보로스는 스스로 자신을 만들어 내고 자신과 결혼하며 혼자 임신하고 스스로를 죽인다!!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을 뜻하기도하며 하나의 몰락이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다는 의미를 우리에게 전달해 준다. 니체가 몰락시키고 싶었던 핵심은 무엇일까? 신의 피조물인 인간이 신을 부정하고 신을 죽이는 것은 우로보로스가 자신의 꼬리를 먹어 치우는 것과 같지 않을까? 니체는 신의 노예에서 인간을 해방시키고 싶었다. 너무도 읽기 힘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에 니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1. 크리스트교의 신을 죽이다!!

서양에서 신은 보통 크리스트교의 신을 의미한다. 영어에서 'God'는 하느님을 뜻하고, 'god'는 잡신을 뜻한다. 니체가 말하는 신은 잡신이라기 보다는 크리스트교의 하느님을 뜻한다. 그리고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줄기차게 크리스트교의 하느님을 비판한다.

 

, 형제들이여, 내가 창조한 이 신들은 모든 신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작품이자 망상이었다! ... 고통과 무능, 이것이 모든 저편의 세계를 만들어 냈다.-54

"신들은 존재하지만, 하나의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신성함이 아닌가?" 귀있는자는 들을지어다.-330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어 니체가 한 말은 참으로 충격적이다. 크리스트교의 하느님이 '인간의 작품이자 망상'이라는 주장! 그리고 고통과 무능이 지옥과 천국을 만들어냈다는 주장은 크리스트교가 가지는 종교적 근거를 송두리채 무너뜨린다. 더욱이 시장에서 줄타기하다가 사고를 당해서 죽어가는 광대에게 차라투스크라는 '악마도 지옥도 없네'라며 헛된 종교적 망상을 부정하는 말을 내뱉었다. 종교를 비판하는 자들은 '종교가 불안 장사를 한다.'고 비판한다. 니체는 종교인들이 저지르는 불안장사를 비판하며 신을 죽이고 있다. 백번 양보해서 인간이 만든 신이 존재한다하더라도 하나의 유일신만 존재한다는 크리스트교의 주장은 성립할 수 없다고 성경 문구를 페러디하여 일갈한다. 크리스트교의 핵심인 유일신 사상을 니체는 무너뜨리고 있다! "변절자들에 대하여"라는 글에서는 십계명의 '나 이외의 신을 섬기지 마라!'라는 조항을 비판한다. 신이 자기의 아이를 돌보지 않았다고 비판하며 심지어 '그에게 아이가 있기나 한가'라는 의문을 제시하며 신을 비꼬고 있다. 니체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비판의 칼날을 들이댄다.

 

참으로 천천히 죽을 것을 설교하는자들이 존경하는 저 히브리사람은 너무 일찍 죽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그의 때 이른 죽음은 많은 사람에게 재앙이 되었다. 그가 이 히브리인 예수가 알고 있었던 것은 선하고 의로운자들의 증오와 함께 히브리사람들의 눈물과 비애뿐이었다.-136

그는 너무 일찍죽었다. 내 나이 만큼만 살았더라면 그는 자신의 가르침을 철회했을 것이다! 그는 철회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고귀한 자였다! 그러나 그는 아직 성숙하지 못했다.-137

인간이 존재한 이래 인간은 너무도 즐기지 못했다. 나의 형제들이여, 이것만이 우리의 원죄다! -162

 

크리스트교가 유대교와 다른 것은 예수의 죽음과 그의 부활이다. 창세기에 시작된 아담과 이브의 원죄를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으로써 씼었다는 크리스트교의 원죄론은 감히 그 누구도 함부로 부정할 수 없는 금기이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어 니체는 크리스트교의 원죄론과 예수의 부활을 철저히 부정한다. '히브리인 예수가 알고 있었던 것은' 그의 때 이른 죽음'과 함께 '증오'의 불길을 만든다. 결국 십자군에서 부터 시작하여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라는 만행의 근본 뿌리가 '예수를 죽인 유대인'이라는 낙인이었다. '히브리사람들의 눈물과 비애'가 인류의 역사 속에 깊게 상처로 남아 있을 수 밖에 없는 현실을 니체는 강하게 지적하고 있다. 더욱이 니체는 젊은 예수와 성숙한 예수를 분리하여 예수가 내 나이만큼만 살았더라면 예수의 가르침을 예수가 스스로 철회할 것이라는 파격적 주장을 했다. 아울러, 인간의 원죄를 들먹이며 금욕을 강조하는 크리스찬들에게 니체는 '너무 즐기지 못했다.'는 것이 우리의 원죄라고 일갈한다! 크리스찬들 중에서 니체의 서적들을 금서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니체의 파격적인 주장을 살펴보면 그들의 생각이 일면 이해되기도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의 사상이 많은 사상가들과 일반인들에 의해서 연구되고 그의 책을 탐독하고 있다는 사실은 엄청난 힘을 가진 크리스트교 세력에 대한 비판과 진실을 니체가 대신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신은 하나의 억측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나는 그대들의 억측이 그대들의 창조적 의지보다 멀리 나가지 않기를 바란다.-156

선하고 의로운자들을 조심하라! 그들은 자기 자신의 덕을 만들어 내는 자들을 즐겨 십자가에 매단다. 그들은 고독한 자를 증오한다. ... 성스러운 단순함도 조심하라! 그들에게 단순하지 않은 모든 것은 신성하지 않다. 그들은 불놀이를, 화형의 장작 더미를 좋아한다.-120

한때 의심은 악이었고 자아에 대한 의지도 악이었다. 그대 병든자도 악이었다. 그때 병든자는 이단자가 되었고, 마녀가 되었다.-71

그들은 자신이 가는 길에 핏자국을 남겨 놓았으며, 어리석게도 피로써 진리를 증명한다고 가르쳤다. -169

여기 성직자들이 있다. ... 그들은 사악한적들이다. 그들의 겸손보다 더 복수심에 불타는 것은 없다. ... 그들이 구세주라고 부르는 자가 그들을 굴레에 묶어 놓았다. 거짓 가치와 망상의 굴레다! , 누군가가 그들을 구원자에게서 구원해줄 것인가! -166~167

그대들에게 적이 있다면 그 악을 선으로 갚지는 마라. 그것은 적을 부끄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적이 그대들에게 선한 일을 했음을 보여주어라 -127

 

니체는 신을 부정하며 신을 죽였다. 중세 신중심의 암흑사회를 부정하고 근대 혹은 미래 사회의 창조적 인간! 초인을 예찬한다. 하나의 신을 창조할 수 없다면 모든 신에 대해서 침묵하라는 니체! 그러면서 그는 '하지만 그대들은 초인을 창조할 수 있다.'라며 우리를 격려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했던 시기 마을의 한 할머니가 '예수의 종이되어 선교활동하라!'며 나에게 교회에 다닐 것을 권유했던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유난히도 그 말이 싫었다. '자유인인 내가 어찌 노예가 될 수 있는가?'라는 생각을 하며 쓴 웃음을 지었다. 니체는 나와 같은 생각을 먼저했다. 신중심의 시대가 종말을 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의 노예로 사는 최후의 인간들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 항상 새로운 인간! 초인이 되어야한다.

신중심의 무지의 시대가 가고 이성이라는 등불이 대지를 환하게 비추는 현대 사회이기에 신을 부정하고도 살아 남을 수 있다. 만약 중세 서양 사회에서 내가 '신의 종이되라'는 말에 쓴 웃음을 지었다면 나는 '불놀이를, 화형의 장작 더미를' 좋아하는 크리스찬들에 의해서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자신의 신만이 의롭다고 말하는 자, 단순하게 맹목적으로 신을 따르라는 노예 근성을 심어주는 자들은 '성스러운 단순함'으로 세상을 아귀다툼이 벌어지는 지옥으로 만든다. 예수의 부활을 믿고 예수를 구세주라고 믿으며 크리스트교를 정립한자들이 이 망상의 굴레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크리스트교로부터 구원할 것을 니체는 주문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십자군 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희생했는가! 크리스트교의 배타성과 폭력성, 야만성을 비판하며 니체는 '어떤 사람이 자신의 가르침을 위해 물속에 뛰어든다해도 무엇을 증명할 수 있는가'라며 반문한다. 마녀사냥, 이단 화형, 종교박해에 맞선 순교 등, 이 모든 것을 부정하며 니체는 '내게 구역질을 일으킨다.'라고 일갈했다.

니체는 마태복음 5장에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 대어라'라는 구절을 더 탁월한 문구를 비판한다. 니체에게는 크리스찬들이 오른뺨을 맞고도 왼뺨을 들이대는 행동은 위선적인 행동이거나 무기력한 노예의 모습으로 보였을 것이다. 니체는 '전혀 복수하지 않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복수하는것이 더 인간적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적이 그대들에게 선한 일을 했음을 보여주'는 행동일 것이다.

니체의 아버지 카를 루트비히 니체는 목사이다. 더욱이 그의 어머니 프란치스카 윌러도 목사의 딸이다. 독실한 크리스찬 집안에서 크리스트교를 맹렬히 비판하는 니체가 만들어졌다. 니체가 진정으로 원한 것은 안티크리스찬일까? 그가 진정으로 원한 것은 무엇일까?

 

2. 크리스트교의 새로운 돌파구를 찾다.

니체는 자신의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제5복음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무슨 뜻일까? 분명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에는 '나는 이러한 약속의 땅을 찬양하지 않는다. 그곳에서는 모든 나무 중에서 가장 나쁜 나무, 곧 십자가가 자라났기 때문이다.'(365)라는 반기독교적인 내용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가득차 있다. '안티크리스트' 혹은 '적그리스도'라는 이름의 책까지 저술한 니체가 자신의 책을 크리스트교의 4복음서에 이은 제5복음서라고 말하는 자체가 모순으로 들릴 수 있다.

니체와 비슷한 가정환경에서 자라난 한국의 철학자가 있다. 바로 도올 김용옥이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났다. 그리고 이 시대 최고의 지성이자 철학자로 한국사회에 많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그런데, 그는 대중강연에서 한국의 기독교를 많이 비판한다. 그의 실날한 비판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눈쌀을 찌푸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나는 도올 김용옥의 삶과 그의 강의를 통해서 니체의 사상을 유추해 보았다.

도올 김용옥의 대중강연과 '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1,2,3'에는 크리스트교에 대한 도올의 생각이 잘 묻어 있다. 도올은 불교가 상좌부불교(소승불교)에서 모든 대중을 구제하는 대승불교로 발전하는 과정을 거친다고 말한다. 그런데, 불교의 위대성은 대승불교에서 신의 반열에 올린 부처를 스스로 부정하는 단계로 까지 발전한 것이라고 말한다. 불교가 중국땅에 이르자 선불교로 발전한다. 임제스님은 '살불살조(殺佛殺祖)' ,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단계로까지 발전한다. 부처의 종이 되는 종교가 아니라, 누구나 깨달은 자, 부처가 될 수 있는 종교가 바로 불교이다. 이것이 불교가 다른 종교와는 다른 불교의 위대성을 보여준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을 통해서 이루려한 최종 목표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나는 판단한다.

니체는 크리스트교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기 위해서 크리스트교의 뿌리를 살폈다. 니체가 주목한 크리스트교의 뿌리는 옹졸한 민족종교인 유대교가 아니라 유대교와 크리스트교를 비롯한 많은 종교에 영향을 준 조로아스터교이다. 조로아스터의 독일식 발음이 차라투스트라인점에 유의한다면, 니체가 차라투스트라의 목소리를 빌려 크리스찬들에게 크리스트교를 새롭게 선불교의 단계로 발전시켜야한다는 계시를 주려했다는 주장이 이해될 것이다.

차라투스트라가 산을 내려오면서 늙은 성자를 보며 "이 늙은 성자는 숲속에 살아서 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아직 듣지 못했구나!"라고 한탄한다. 성자는 신을 사랑하지만 시대는 변하여 중세 신중심의 낡은 시대에서 이성 중심의 근대가 되었다. 더 이상 인간은 신의 노예이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제 신의 노예가 아니라 주인으로 살아야한다. 진정한 깨달음을 얻으려면 속세를 떠나서 깨달음을 얻기 보다는 세속에 살면서 깨달음을 얻어야한다. 현실에 뿌리 내리지 못한 진리는 진정한 진리라할 수 없다. 니체는 늙은 성자 처럼 현실의 변화를 깨닫지 못하는 크리스찬들에게 신은 죽었다며 현실을 인정하라고 말한다.

절대신을 믿는 크리스찬들에게 '신은 죽었다.'라는 말은 크리스트교를 부정하는 말로 들릴 수있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곳곳에서 '~파멸해야하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많이 쓴다. '파멸', '몰락'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니체! 그러나 '파멸''몰락'을 니체는 부정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마치 동양 사상에서 하나의 끝은 새로운 시작의 출발이라는 관점을 떠올린다면 '파멸''몰락'을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인도 힌두교의 시바신이 세상을 파괴해야 브라흐만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듯이, 기존의 체계를 파괴해야만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 신의 노예로 살 것을 강요하는 크리스트교도들이 신은 죽었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이를 받아들일 때만이 크리스트교는 새롭게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선불교에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야만 자신이 부처요 조사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이치와 같다. 니체는 크리스트교가 소승불교에서 대승불교로 발전하는 과정을 거쳤다면, 이제는 선불교의 단계로 발전해야한다고 일갈하는듯하다. 많은 논쟁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부활을 믿고 예수를 신의 아들이라 믿는 크리스찬들이 선불교로까지 발전하기 위해서는 그 신을 죽여야한다는 것이다.

그럼, 신이 죽은 그자리에 누가 있어야할까? 신을 죽인 인간이 이제는 새로운 신을 그 자리에 앉혀야할까? 니체는 '초인'을 말하다. 내가 이해한 초인은, 자신을 새롭게 하려는 자, 자신을 거듭나게하는 자이다. 고사성어로 표현하면, 일일신 우일신(日日新 又日新)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신의 노예로 사는 존재가 아닌 스스로 새롭게 태어나려 끊임 없이 노력하는자! 그 사람이 '초인'이라면 이는 불교의 부처나 보살로 볼 수 있다. '그대들은 모든 구세주보다 더 위대한 자들에 의해 구원받아야한다.'(-170) 는 니체의 말은 구세주에 의탁해서 구원을 받기 보다는 스스로 더 나은 존재로 거듭나려는 초인이 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이는 불교에서 부처가 되라는 말과 같다.

 

고귀한자는 새로운 것과 새로운 덕을 창조하려한다. 반면에 선한자는 옛것을 원하며 옛것이 보존되기를 원한다.-79

 

고귀한자는 예수를 비롯해서 석가모니와 무하마드와 같은 분들이다. 그에 비해서 선한자는 중세 교황과 타락한 성직자들 처럼 고귀한자의 힘을 빌어 권력을 누리고 그 권력을 추종하는 자들이다. 니체가 한명의 진정한 크리스찬이 있었으나 그분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고 말했듯이, 진정한 크리스찬은 예수그리스도이다. 그러나 그 이후에 고귀한자의 힘을 빌려 권력을 누리려는 '선한자'들이 그의 이름으로 크리스트교를 타락시켰다. 니체는 인간 권력의 속성을 꿰뚫어보고 이를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말하고 있다. 진정한 크리스찬이 되려면 예수의 추종자가 되지 말고 예수처럼 삶을 살아가라는 절규이다.

니체의 사상은 불교와 너무도 유사한 점이 많다. 그의 말들과 논리들은 불교에서 힌트를 얻은 것은 아닌가? 의문이 든다. 그의 핵심 사상인 영원회귀 사상 또한 불교의 윤회와 비슷하다. 니체는 말한다. 만약 악령이 어느 날 당신에게 다가와서 네가 살고 있고 살아왔던 삶을 다시 살아야만 한다고 제안한다면 과연 당신을 이를 받아들일 것인가? 영원히 반복될 수 있는 삶이라는 문구에 윤회의 수레바퀴가 떠오른다. 물론, 니체의 영원회귀가 윤회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가설로 자신의 삶을 다시 살아도 좋을 만큼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이 순간을 행복하게 살라는 니체의 제안일 뿐이다. '프레임'을 쓴, 최인철 교수가 현재를 잘 살아가고 싶다면 지금 이 삶이 2번째로 주어진 삶이라고 생각하고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라고 제안했다. 니체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서 이 삶이 몇만년을 다시 반복해서 살아도 좋을 만큼 현재를 사랑하며 살아가라고 말하있다. 바로 아모르 파티(Amor Fati)를 말하고 있다 .

니체의 사상이 불교에서 많은 힌트 혹은 영감을 얻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고, 니체가 모든 불교를 긍정한 것은 아니다. 81쪽에 '죽음을 설교하는 자들'은 누구일까? 니체는 '노란 사람들'이라고 지적한다. 노란 사람들은 노란 가사를 입은 승려를 뜻한다. '병자나 노인이나 시체와 마주치면 그들은 즉시 '삶은 부정되었다.'라고 말한다.'라고 지적하며 자신이 죽음을 설교하는자들이라며 비판하는 사람들이 불교도들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육욕은 죄다.', '삶은 고통일 뿐이다.'라고 지적하며 불교에 대해서 비판하는 니체의 모습이 무척 낯설어 보인다. 그러나 진정한 크리스찬이 예수이듯이, 진정한 불교도는 부처일 수 밖에 없다. 기존 종교조직에 의탁해서 그 권위로 먹고 살려하며, 그 종교의 노예로 살려는 사람들을 니체는 비판한다. 진정한 주인으로서의 삶을 살려한다면 스스로 예수가 되려해야하며, 스스로 부처가 되려해야한다. 그러한 존재가 바로 '초인'인 것이다.

크리스트교도인들의 숫자가 시간이 지날 수록 줄어들고 있다. 이러한 위기는 예견된 것이다. 더 이상 신의 종이되기를 원하는 자가 줄어들고 있다. 스스로 초인이되려는 자가 늘어나는 현실 속에서 크리스트교가 다시 태어나려면 니체의 말에 귀기울여야할 것이다.

 

3. 초인을 꿈꾸다.

'비밀로 가득찬 숨은 신이있다. 참으로 그는 아들에게 올 때 조차 샛길로 왔다. 그리하여 그의 신앙의 문에는 간음이란 것이 있게된 것이다.'(146)라며 니체는 노골적으로 크리스트교를 비판한다. 신은 죽었으며, 신의 노예로 살기보다는 초인이 되라고 차라투스트라는 말한다. 그렇다면 초인이 되려면 어찌해야할까? 초인은 어떠한 존재인가?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을 평등하다고 보지 않았다. '평등의 설교자'를 격멸하며 그들을 치명적인 독이 있는 타란툴라와 같은 존재로 보았다.

 

설령 내가 자신의 오류를 밟고 걸어 다니더라도 나는 여전히 그들과 그들의 머리 위에 있을 것이다. 인간은 평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의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원하는 것을 그들은 감히 원해서는 안 될 것이다!-233

시장에서는 아무도 우월한 인간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런데도 거기서 말하고 싶은가. 좋다! 하지만 천민은 눈을 깜박이며 말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고"라고. ..."....신 앞에서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 신 앞에서라고! 그러나 이제 이 신은 죽었다. -502~505

 

만인이 법앞에 평등하다면, 법질서가 붕괴된 사회에서는 평등은 사라진다. 만인이 신앞에 평등하다면 신이 사라진 사회에서는 평등도 사라진다. 우월한 인간과 천민 사이에 구분이 시작될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를 보더라도 고위 공직자가 법위에 군림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또한 우리 사회에서 신은 사라졌다. 우리 사회는 평등하지 않다. 인간들 사이에서 지적 수준과 판단력, 정의감이 평등하지 않다. 이번 대선에서 자신의 탐욕을 위해서 수준 이하의 후보에게 투표한 자가 있지 않은가! 인간이 평등하지 않기에 민주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평등하다는 신화를 쓰고 있지 않은가!

니체는 인간을 어떻게 구분하고 있을까? 인간의 맨 아래에는 천민이 자리하고 있다. '권력의 천민, 문필의 천민, 그리고 쾌락의 천민들과 함께 살지 않기 위해서였다.(179)'라고 외치며 천민을 경멸한다. 니체가 말한 천민이 우리사회에서도 널려 있지 않은가? 권력에 아부하며 국민을 속이는 언론의 천민, 검찰의 천민, 돈의 천민, 무속의 천민 ... 삶을 주인으로 살기 보다는 권력과 돈, 탐욕을 위해서 노예로 살기를 즐거워하는자들이 바로 천민인 것이다. 그러한 천민을 니체는 경멸하고 있다.

천민 위에는 누가 있을까? '우월한 인간'이 있다. 그러나 우월한 인간은 천민으로 언제나 떨어질 수 있는 존재들이다. 신은 죽었다는 사실을 직시했음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신을 만들어내는 나약한 존재들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4부에 재미 있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1~3부가 차라투스트라의 경구(잠언)들로 역여있다면, 4부는 소설적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두명의 왕, 일자리 잃은 교황, 사악한 마술사, 자발적으로 거지가 된 자, 그림자인자, 늙은 예언자, 정신의 양심을 지닌자, 더없이 추착한자들이 차라투스트라의 영토인 동굴에 모여 만찬을 즐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들을 우월한 인간이라 부르며 자신의 동굴로 인도했으나, 그들은 차라투스트라가 없는 사이에 나귀를 신으로 만들었다. 차라투스트라는 분노했다. 그리고 사자의 울부짖음이 들리자 순식간에 그들은 사라졌다. 차라투스트라는 '동정이다. .... 우월한 인간들에 대한 동정이다! ... 좋다 그것도 이제는 끝이다.!'라고 되뇌이며 이글거리는 태양을 바라보며 동굴을 떠났다.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의 동굴로 초대했던 우월한 인간은 초인이 되지 못하고 천민의 나락으로 떨어진 겁쟁이들이었다. 그리고 니체는 그들에 대한 연민을 거둬들인다.

우리 사회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니체가 말한 우월한 인간이다. 언제나 진실을 보았으나, 그 진실을 잊어 버리고 다시 타락의 길에 빠져든다. 박근혜라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았고, 그녀의 무능력함과 탐욕스러움에 분노하여 많은 우월한 인간이 탄핵의 촛불을 들었다. 그런데, 5년 후에 다시 최악의 선택을 했다. 그러하기에 니체는 이러한 우월한 인간에 대한 동정을 거두어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니체가 이상으로 생각하는 인간은 무엇일까? 바로 '초인'이다. 초인이 되기 위해서는 세가지 변신을 해야한다. 그것이 바로 '낙타 - 사자 - 아이' 이다. 낙타는 짐을 잔득 실고 사막을 횡단한다. 주인의 말을 묵묵히 수행할 뿐이다. 이러한 존재는 천민이나 중세 시대 신의 노예와 비슷한 존재들이다. 종처럼 주인의 말에 순종할뿐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말하지 못한다. 낙타의 상태에서 깨어나서 사자가 된자는 용과의 대결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강한 이빨과 발톱으로 주장한다. 그렇다고 사자가 초인인 것은 아니다. 사자는 아이가 되어야한다. 부드러움은 강함을 이긴다. 강한 사자가 부드러운 아이가 되어야 '자신의 세계를 얻'을 수 있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아이가 되어야 초인이 될 수 있다. 민주화 운동가를 만나본 사람들은 '평소에 이렇게 조용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자가 어떻게 서슬퍼런 독재정권에 맞서 민중의 요구를 강하게 주장하는 투사가 되었는가?'라며 의아해한다. 진정한 초인은 아이의 부드러움과 아이의 가능성과 창조성을 품은 사람이다.

그렇다면, 니체가 말한 '초인'을 보다 자세히 탐구해보자. 니체가 칭찬하는 인간의 모습이 바로 초인의 모습일 것이다. 니체가 이상으로 여긴 인간상을 추적해보자.

 

이제 그대들에게 명하노니 나를 버리고 그대들 자신을 찾도록하라. 그리고 그대들 모두가 나를 부정하게 될 때 비로소 나는 다시 그대들에게 돌아올 것이다. -146

언제나 학생으로 머물러 있는자는 선생에게 제대로 보답하지 못한다. 그대들은 어찌하여 내게서 월계관을 잡아채려하지 않는가? 그대들은 나를 숭배한다. 어느날 그 숭배가 무너진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 입상에 깔려 죽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 -146

삶은 언제나 자신을 거듭해서 극복해야한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덜거덕거리는 표지가 되어야한다. -185

 

초인은 거급해서 극복해야하는 그 무엇이다.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보다 나은 자, 보다 새로운 자가 되려고 끊임 없이 노력하는 자이다. 임제스님의 '살불살조(殺佛殺祖)'라는 사자후 처럼, 스승을 넘어선 존재가 되기 위해서 끊임 없이 노력하는 자이다. 스승의 제자로만 남아있으려는 자는 영원히 스승이 될 수 없다. 그러한 자는 사이비교의 신도로 전락할 우려가 많은 노예이다.

니체는 용기를 예찬한다. 용기는 초인이 갖추어야할 기본중에 기본이다.

 

용기는 최고의 살해자다. 공격하는 용기야말로. 모든 공격 속에는 낭랑하게 울려 퍼지는 승리의 소리가 있기 때문이다.-283

용기는 죽음 조차 죽인다.-284

뱀이 목구멍 속으로 기어들어 간 그 양치기는 누구인가? ...어쨌든 양치기는 내가 고함을 쳐 말한 대로 물어뜯었다. 제대로 물어뜯었다! 뱀 대가리를 저 멀리 뱉어버렸다! 그러고는 벌떡 일어섰다. 더는 양치기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변화한 자, 빛에 둘러싸인자로서 그는 웃고 있었다. -288

 

뱀에 두려워하기 보다는 뱀의 대가리를 물어 뜯는 용기를 가진자를 니체는 예찬했다. 더러움에 맞서 싸우는 용기는 니체의 말대로 '죽음 조차 죽인다.' 어떠한 두려움과도 맞서 싸울 수 있는자가 초인이다. 용기 있는 초인은 타인이 만든 선과 악의 구분도 붕괴 시킨다.

 

선과 악에서 창조자가 되려는 자는 우선 파괴자가 되어 가치를 파괴해야한다. 이렇게 하여 최고의 악은 최고의 선에 속한다. 그러나 최고의 선은 창조적인 선이다. -213

굶주리고 난폭해지고 고독해지고 신을 믿지 않는자. 사자가의 의지는 스스로 이렇게 되기를 원한다. 노예의 행복에서 해방되고, 신들의 경배에서 구제되고,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남을 두렵게하고, 위대하면서 고독해지는 것. 진실된자들의 의지는 이와 같은 것이다. -189~190

 

선이 악이되는 시대! 악이 선이되는 시대! 선과 악의 개념 자체가 그 시대 지배이데올로기의 산물인 경우가 많다. 다산(多産)이 무지한 국민들의 모습이었던 것이, 지금 다산은 애국의 상징이 되었다. 무엇이 변하였는가? 지배 이데올로기가 변했을 뿐이다. 변한 것은 없다. 초인은 선과 악을 창조적으로 파괴한다. 누군가에 의해서 주입된 선악이 아니라, 자신이 선악을 새롭게 규정한다. 그러하기에 신에 의지해 살기 보다는 사자처럼 당당하게 살아간다. 신의 노예이기 보다는 고독한 초인의 길을 선택하길 니체는 염원한다.

그렇다면 초인의 뒷모습은 어떠할까?

 

인간들 사이에서 배고픔과 갈증으로 죽고 싶지 않은자는 어떠한 잔으로든 마실줄 알아야한다. 그리고 인간들 사이에서 깨끗하게 남아 있고자하는 자는 더러운 물로도 씻을 줄 알아야한다.-262

권력이 자비를 베풀고 눈에 보이는 세계로 내려올 때, 나는 그러한 하강을 아름다움이라고 부른다. -217

나는 삶을 완성하는 죽음. 산자에게 가시가 되고 굳은 맹세가 될 죽음을 그대들에게 보여주고자 한다. 삶을 완성하는 자는 희망에 차 있는 자들과 맹세하는 자들에 둘러싸여 승리에 찬 죽음을 맞는다. ... 나는 그대들에게 나의 죽음을 권한다. 내가 원하기 때문에 나를 찾아오는 자유로운 죽음을. -134~135

 

인간들 사이에서 살고자 한다면 어떠한 잔도 가려서는 안되며, 깨끗하게 살기 위기 위해서는 어떠한 물로도 씻을 줄 알아야한다. 정치를 하려면 구정물에 손을 담글 각오를 해야하는 것처럼! 초인은 눈앞에 더러움을 피하려 대의를 망각하지 않는다. 권력을 쥐고 나서는 칼을 쥔 망나니 처럼 폭주하지 않는다. 자비를 베풀고 서민들 사이로 내려올 때 우리는 그러한 지도자를 사랑한다. 고 노무현 대통령이 그러했던 것 처럼! 죽음을 대할 때도 초인은 죽음을 삶의 완성으로 본다. 마치 이순신 장군 처럼 죽음에 임해서도 당당하며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고 승리에 찬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죽음과 함께 임진왜란도 끝났다. 그렇게 초인은 떠나가는 뒷모습도 아름답다.

인간이라고 모두 같은 인간이 아니다. 삶이라고 모두 같은 삶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초인과 같은 고귀한 삶을 살고자한다면 지금 당장! 끊임 없이 새롭게 거듭나려 노력해야한다.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자들만이 '더는 천상의 모래밭에 머리를 처박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머리를 처들'(56~57)고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다.

 

중학생에 다닐때, 천원짜리 '작은 책'이 있었다. 천원으로 유명한 책들을 살 수 있었다. 그때 산책중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도 있었다. 재미있는 소설책으로 알고 샀던 그 책은 너무도 어려웠다. 서문과 니체에 대한 소개글을 읽고는 책장을 덮어 버렸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고등학교 윤리 선생님은 대단한 학생이라며 나를 칭찬해주었다. 그리고 세월은 흘렀다. 다시 한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에 도전장을 던졌다. 쉽지 않은 독서의 시간이었다. 문장이 이해되지 않아서 같은 문장을 몇번씩이나 반복해서 읽기도 했으며, 한쳅터를 읽고 나서는 전혀 내용이 이해되지 않아서 다시 한번 읽은 쳅터도 너무도 많았다. 그렇게 힘들게 읽으면서 뿌듯한 점이 있었다. 그것은 나의 정신이 많이 성장했다는 사실이다. 그때는 그렇게 이해되지 않던 것이 이제는 이해되는 부분이 많아졌다. 그리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에서 가장 아름다운 글귀도 발견했다.

 

우리가 삶을 사랑하는 것은 삶에 익숙해져서가 아니라 사랑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74

더러워지지 않으면서 더러운 물을 받아들이려면 우리는 먼저 바다가 되어야한다. -20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어서 행복하다는 말이 있다. 우리가 삶에 익숙해지기 보다는 사랑에 익숙해진다면 우리는 삶을 사랑하고 우리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 그렇게 사랑에 익숙해지면 우리는 바다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아름다운 독일어 경구들로 이루어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생각날때 마다 펼쳐 읽으며 가슴속에 담을 문장을 찾아야겠다. 그러면 그 문장은 나의 가슴에 별이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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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11-09 15: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루님 이달상 추카합니다
11월 건강 잘 챙기세요
주변에 코로나 확진 급증입니다 ㅜ.ㅜ

강나루 2022-11-10 04:41   좋아요 0 | URL
scott님, 감사합니다.
저는 이미 10월달에 코로나19에 걸렸습니다.
그래도 조심해야죠.
scott님도 건강 잘 챙기세요^^

서니데이 2022-11-09 15: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강나루 2022-11-10 04:41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도 행복하고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이하라 2022-11-09 15: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평화로운 시간 되세요.^^

강나루 2022-11-10 04:42   좋아요 0 | URL
이하라님 감사합니다.
이하라님도 행복하면서 평화로운 시간 보내세요.^^

thkang1001 2022-11-09 18: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한 주 되시길 바랍니다.

강나루 2022-11-10 04:42   좋아요 0 | URL
thkang1001님 감사합니다.
행복과 사랑이 넘치는 한주 보내세요.^^

bookholic 2022-11-09 20: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나루 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늘 좋은 책 소개해 주셔서 감사하고요..^^

강나루 2022-11-10 04:43   좋아요 1 | URL
bookholic님 감사합니다.
좋은 책으로 봐주시는 bookholic님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마루☆ 2022-11-09 22: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당선 축하드려요. ~^^

강나루 2022-11-10 04:43   좋아요 1 | URL
마루☆님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하나의책장 2022-11-09 23: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강나루 2022-11-10 04:44   좋아요 0 | URL
하나의책장님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22-11-10 07: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처음에 말씀이 있었다‘는 구절이 중세 시대를 열었다면,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말이 정신사적 의미에서 중세를 끝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만, 니체가 말한 기독교(그리고 종교)의 문제가 교리상의 문제인지, 이러한 도그마를 바탕으로 한 집단(교회 등)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인지 더 생각하게 됩니다. 인류의 4대 성인이라고 하는 분들, 각자가 한 명의 초인이었다는데 큰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들이 창시한 종교/사상이 배타적인 사상으로 자리한 것이 인류사에 미친 종교의 악영향이라면, 어쩌면 초인이 문제가 아니라, 초인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가 더 중요한 것은 아닐까를 강나루님의 글을 통해 생각해 봤습니다... 강나루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

강나루 2022-11-10 08:15   좋아요 1 | URL
겨울호랑이님은 내공이 깊으시네요.
한수 배웁니다.
초인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가 중요하다는 말에 깊이 공감합니다.

겨울호랑이 2022-11-10 08:36   좋아요 1 | URL
에고 아닙니다. 강나루님의 깊은 사색을 따라가다보니, 초인 이후의 세계에 대해 조금 생각해봤을 따름입니다. 모두가 초인인 세계에서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세계가 된다면 정말 좋은 세상에 될 것이란 생각을 해봤습니다. 강나루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좋은 아침 되세요! ^^:)

thkang1001 2022-11-10 09: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강나루 2022-11-11 06:15   좋아요 0 | URL
thkang1001님, 감사합니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 철학자 강신주 생각과 말들 EBS 인생문답
강신주.지승호 지음 / EBS BOOKS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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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자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강신주이다. 한 동안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그를 잠시 잊고 지냈다. 그런데, 텔레비젼에 다시 모습을 보인 그는 너무도 병약해져 있었다. 건장한 체격에 자신감 넘치는 강한 목소리의 철학자는 노쇠하여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병자의 모습이었다.순간 나의 머릿 속에는 강신주가 혹시 불치병에 걸린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도 만족할만한 정보를 얻기 힘들었다. 내가 무관심했던 사이에 강신주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지 무척 궁금했다. 불교방송에 나와서는 책을 쓰느라 무리한 것이 원인이라고 말했다. 나의 상식으로는 이해 되지 않았다. 아니, 책을 쓴다고 그렇게 병약해진다는 것이 말이되는가? 그때,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라는 책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분명, 강신주가 병약해진 이유가 쓰여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제목만 본다면, 강신주가 삶을 포기하려했다가, 어떠한 계기로 삶을 되찾는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책을 펼쳐 보았다. 


  책을 펼치는 순간, 내가 강신주의 낚시질에 걸려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강신주가 나를 속이려하지는 않았을지라도, 나는 그가 정한 제목에 낚였다. 5권의 책을 쓰려고 동시에 집필을 시작했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게 되었단다. 정신이 몸을 이끌었던 시간이 지나가고, 이제는 몸의 말을 들어야하는 상황이 되었단다. '철학 vs 철학'이라는 엄청난 두께의 책을 쓴 그가, 이제는 무척 두꺼운 책을 동시에 5권을 집필하려는 욕심을 부리다가 몸이 병약해졌다. 강신주의 몸도 나이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했다. 강신주는 병약해짐으로써 노인의 쇠약함을 이해하게 되었다며 쇠약해짐으로서 얻은 장점을 말하기도 했다. 철학자는 불행속에서도 철학적 사유를 잃지 않는다는 놀라운 사실을 목도했다. 이렇게 나의 상상력과는 전혀 다른 결론을 들었지만, 그덕에 이책을 열심히 읽었다. 

  강신주는 자본주의를 싫어한다. 아니, 격멸한다. 그는 "하늘은 더불어 있는 것이지 누가 소유하는 공간이 아니에요."(35쪽)라며 자본주의의 기본인 '소유'를 배격한다. 유현준 교수는 '공유'라는 말을 싫어한다고 밝혔다. 반면 강신주는 공유를 좋아한다. 철학자와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건축가의 차이는 '공유'라는 개념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지점에서 극명하게 차이가 난다. 모두가 함께 더불어사는 대동 세상을 꿈꾸는 강신주! 반면, 자본주의 시대에 뿌리박은 유현준! 우리는 어느 쪽 삶을 살아가야할까? 

  이상은 '공유'로 대표되는 대동세상을 꿈꾸지만, 현실은 '사유'에 기반한 자본주의 사상에 뿌리 내릴 수 밖에 없지 않을까? 공유지의 비극을 말하지 않더라도, 이번 대선에서 보수당 후보가 당선된 것은 우리 사회가 '공유' 보다는 '사유'를 더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공공 임대 주택을 지어 청년 주택난을 해결하겠다는 이재명 후보의 공약에 많은 사람들이 난색을 표명했다. 작은 평수라도 내것을 원하지, 임대 주택에 왜 사는가! 라며 열변을 토하는 민주당 지지자를 보기 까지 했다. 우리 사회는 뼈 속까지 자본주의 체제에 물들어있다. 우리의 진보 세력들이 욕망에 충실한 국민의 마음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 자신의 이상으로 국민을 이끌려했다. 우리사회는 배고픈 소크라테스보다. 배부른 돼지를 원한다. 그것이 이번 대선 결과로 나타났다. 

  "자본주의가 파괴하지 않고 남겨둔 마지막 공동체"(193쪽) 가족! 1인 가구가 증가하고, 가족이 해체되고 있다. 이제 자본주의는 가족에게까지 파고든다. 어쩌면 이제 신자유주의는 최후의 보루인 가족도 해체할것이다. 1인가구가 증가하면서 예전에는 가족 내에서 해결하던 일들이 이제는 시장에 맡겨질 것이다. 자본주의 편리성과 맞물려 이는 너무도 급속히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한 자본주의의 무서운 질주를 지적하며, 자본주의에 대한 맹렬한 비판을 가한다. 

  억압 구조(명령하는 자와 명령을 듣는 자의 구조)의 전복!!, 신자유주의와 벤담적 사유의 전복!! 핏대를 세우며 새로운 사회를 추구하는 강신주! 그는 페미니즘도 벤담적 사유론을 벗어나지 못했다며 강한 비판을 한다. 나로서는 강신주의 급진적 주장이 버겁기만하다. 그렇다면, 억압구조의 전복, 신자유주의와 벤담적 사유의 전복을 통해서 강신주는 어떠한 사회를 만들려고하는가? 그리고 이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하는가? 강신주는 강하게 자본주의 체제를 비판하지만,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대안을 제대로 제시하지는 못했다. 아니, 다른 책에서 새로운 사회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을 제시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의 내용만으로는 강신주의 이상사회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과 실현 방법을 알 수 없다. 강신주의 과격한 주장을 읽으며, 자본주의를 전복시킨 후, 그 다음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자본주의 시스템을 붕괴시키면, 인류의 삶 자체가 불가능할 수도 있지 않은가?

  4차 산업혁명과 기후 위기에 대한 강신주의 생각은 무엇일까? 강신주는'바둑판을 뒤엎어라.'(133쪽)라고 말한다. 바둑을 잘두는 전문가에게 당할 수밖에 없다며, 판을 뒤집으라고 강신주는 강변한다. 전문가를 양산하는 체제 속에서는 실업자는 증가할 수밖에 없다. 즉, 하나 밖에 못하는 전문가가 되지 말라고 강신주는 주장한다. 이어령 교수가 말과 경쟁하지 말고 말에 올라타라고 조언했다. 그런데, 강신주는 판을 뒤집어 엎으라고 한다. 역시 강신주의 해법은 더 과격하다. 

  기후 위기를 막기 위해서 채식주의자가 된 사람들이 있다. 강신주는 채식주의자에 대해서도 살생을 하지 않는 다는 착각을 버리라고 말한다. 그리고 인간은 자족적이지 않기에 살생을 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또한 채시주의자에게 식물을 먹는 것은 살생이 아닌가?라며 채식주의자를 비난하는 자들에 대해서도 '최소한의 살생을 하려 노력'하는 채식주의자를 비난하지 말것을 당부한다. 그렇다. 채식주의자도 살생을 하지 않느냐며 비난하지 말자. 그들은 최소한의 살생을하려 노력하는 자이다. 우리는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 생명을 빼앗아 자신의 생명을 연장하는 존재이다. 


  오랜만에 강신주의 책을 만났다. 이번책은 과거 강신주의 책을 정리하는 느낌의 책이다. 그리고 강신주가 자본주의에 대해서 무척이나 염증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단순한 비판의 수준을 넘어선다. 예전 같으면 강신주의 주장에 많은 공감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도 변했다. 강신주의 주장에 현실성이 없어 보인다. 한예로 면접장에서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것을 합격을 위해서 좋아한다고 말해야하는 세상을 강신주는 비판한다. 당당하게 카프카를 좋아한다고 말해야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나는 카프카를 그토록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카프카를 소재로 콘텐츠를 만들라고 조언하고 싶다. 크리에이터가 되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찾으라고 말하고 싶다. 현실에서 가능성을 보지 못하고 현실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현명한 처세술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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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06 07: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9-06 07: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22-09-06 11: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살이 빠진 게 무리해서 였군요.
저도 좀 놀랐습니다. 전 다이어트를 하나 했습니다.
요즘 젊으나 늙으나 다이어트 하던데 나이들어 다이어트는
별로 권할만하다 게 못되는 것 같더군요.
암튼 한꺼번에 5권을…? 무리하다 못해 위험했음 것 같습니다. 제가 알기론 곧 60이 가까운 줄 아는데ᆢ
요즘 강신주 인기가 예전만 같지는 않죠? 사람들은 TV에 자주 안 나오면 그렇게 생각한다더군요. ㅋ

강나루 2022-09-06 18:54   좋아요 1 | URL
나이가 60 가까이 인데도 집필에 대한 열의는 크더군요.
하루에 2시간 집필할 수있는 체력 밖에 안된다고해요.
그런데도 목표로한 책을 집필하려 노력하네요.

이하라 2022-09-08 13: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행복하고 풍성한 한가위 보내세요.^^

강나루 2022-09-09 04:57   좋아요 1 | URL
이하라님, 감사합니다.
이하라 님도, 풍요로운 한가위 보내세요^^

thkang1001 2022-09-08 14: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행복하고 풍성한 한가위 보내세요!

강나루 2022-09-09 04:57   좋아요 0 | URL
thkang1001님 감사합니다.
언제나 한가위 처럼 풍성하고 여유있는 시간 보내세요.^^

thkang1001 2022-09-09 08: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강나루 2022-09-16 19:42   좋아요 0 | URL
thkang1001님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scott 2022-10-07 14: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이달상 추카 합니다!
건강 잘 챙기세요 ^^

강나루 2022-10-08 05:47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코로나19로 일주일 동안 고생하고 있습니다. 이제 좀 괜찬아 지네요. 감사합니다.
scott님도 건강 잘 챙기세요.^^

이하라 2022-10-07 14: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강나루 2022-10-08 05:47   좋아요 2 | URL
이하라님, 감사합니다.
즐거운 연휴 보내세요.

thkang1001 2022-10-07 16: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주말과 휴일 보내세요!

강나루 2022-10-08 05:47   좋아요 1 | URL
thkang1001님, 감사합니다.
즐거운 연휴 보내세요.

mini74 2022-10-07 21: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축하드려요 ~ 연휴 즐겁게 보내세요 *^^*

강나루 2022-10-08 05:48   좋아요 1 | URL
mini74님, 감사합니다.
즐거운 연휴 보내세요.

서니데이 2022-10-07 22: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연휴 보내세요.^^

강나루 2022-10-08 05:48   좋아요 2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즐거운 연휴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22-10-10 08: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의 글을 읽으며, 서로 다른 처지에 놓인 이들의 장기 목표와 단기 목표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궁극적으로 지향점으로 가야 할 방향은 같은 곳일지라도 활동가는 운동을 위해서 보다 큰 힘을 모으기 위해 비판점에도 불구하고 단기 목표를 추구하는 반면, 지향점을 제시하는 사상가는 모두까기(?)를 보여주며 현실성 없어보이는 이상향을 제시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수의 대중들은 이러한 점을 모두 이해하고 자신의 관점을 형성하는 과제를 이로부터 부여받겠지요... 강나루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

강나루 2022-10-10 13:54   좋아요 2 | URL
장기 목표와 단기 목표로 나누어 발화자의 목표까지 나누어 생각할 수 있겠네요.
감사합니다.

보보코 2023-05-17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상과 현실은 같은겁니다. 이상을 품어야 극복할려는 현실이 보이는거고. 반대로 현실에 순응하게 되면 체념하는 현실만 보며 살아가는거죠. 자본주의가 나쁜데, 그게 불편하니 애써 그건 이상이야. 이뤄질 수 없어. 자위하지 말고요. 본인이 체념하는 현실 속에서 아무것도 변할려고 하지 않을려고 하는 비겁한 사람이 아닌지 스스로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대안이요? 대안 얘기할 때 이미 끝난겁니다. 강신주의 말에 찔리는데 비판 할 수 없으니 대안 타령하는건데요. 그건 할 말이 없기 때문이거든요. 본질을 건드렸는데 할 말은 없고 그래서 대안이 뭔데? 이러는건데요. 대안은 사랑, 연대로 뭉친 공동체죠. 대안이 없다고 하지 마세요. 지금 당장 불이 났는데, 불 끌 생각보다 불끄고 나서 뭐할건데? 대안있어? 이러는거와 같죠. 참 안타깝네요.

강나루 2023-05-17 20:40   좋아요 0 | URL
님은 이상주의자로 사세요.
난 이상을 품지만 현실 감각을 잃지안는 현자로 살겠습니다.
이상만으로 살다가 죽은 조광조와 같은 삶은 싫네요.
김대중 대통령이 말씀하셨죠
철학자의 이상과 상인의 현실 감각을 가지고 살라고요.
현자는 불을 끈서도 불을 끄고난 이후를 생각합니다.

보보코 2023-05-18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인의 문해력 지수가 꼴찌인 이유가 있나봅니다. 이상과 현실은 같다는데 무슨 말을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강한 이상을 품어야 극복할려는 현실을 본다는 말이 어려우면 심각한겁니다. 모든 문명과 인간은 이상을 품어 극복할려는 현실을 하나하나 극복 했을 때 진보가 이뤄 졌던거지 체념하는 현실에 안주하며 살면 발전은 없는거죠. 불을 꺼야 될 상황에는 불부터 꺼야 한다는 말인데, 이걸 불끄고 아무것도 안한다로 받아들이시면 어쩌자는거죠;; 제가 말한건 님의 스탠스가 불도 끄기전에 그게 현실성이나 있냐며 마치 불 끄는 것 조차 이상이라 치부하는 그런 비겁함을 말하는겁니다.

강나루 2023-05-18 20:48   좋아요 0 | URL
부처님 눈에는 부처가 보이고 개에게는 똥만 보이지요.
자신을 되돌아 보세요.*
 
플라톤의 대화편 - 개정판
플라톤 지음, 최명관 옮김 / 창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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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자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말했다고 전해지는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이 사실은 그가 하지 않은 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의외로 적다. 일본의 법철학자 오다카 도모오가 '법철학'이라나는 책에서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든 것은 실정법을 존중했기 때문이며, '악법도 법'이므로 이를 지켜야한다."라고 쓴 것이 마치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와전되었다. 그래서, ,,고등학교에서 윤리 선생님을 비롯한 수 많은 선생님들이 소크라테스의 말이라며 '악법도 법이다.'라고 강조했다. 이것은 관성이되었다. 2004년 헌법재판소에서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다.'며 독약을 먹었다."는 내용이 준법사례로 적절하지 않다고 언급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는 왜? 독배를 들었을까? 그래서 '플라톤의 대화편'을 집어들었다.

 

플라톤은 자신의 스승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고 죽기까지의 일련의 사실을 알 수 있는 내용들로 이 책을 구성했다. 그래서 '플라톤의 대화편'은 크게 5부분으로 이루어져있다. 첫번째 에우튀프론은 '경건에 대하여'라는 부제가 달려 있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소크라테스가 에우튀프론과 경건에 대해서 대화를 한 내용을 서술했다. 그러나, 첫번째 장에 에우튀프론을 배치한 것은 소크라테스가 재판을 받기 전에 소크라테스가 어떻게 그리스 청년들을 일깨워주었는지를 알 수 있도록 독자를 배려하기 위해서 배치한 글이다.

소크라테스는 에우튀프론에게 "자네 일로 알고 생각해 주게, 그런 전제 아래 자네가 약속한 대로 나를 잘 가르쳐 줄 수 있는지 말이야.(25)"라고 말하며 대화의 주도권을 상대에게 넘긴다. 그러나 대화의 주도권은 사실 소크라테스가 가지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치밀한 계산 아래 에우튀프론에게 질문을 하고 스스로 대답하도록 한다. 에우튀프론이 스스로 진실을 말하게 함으로써 소크라테스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우치게 했으며 이를 통해서 소크라테스의 의견에 동의하도록 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설득의 심리학을 알고 있었다. 타인의 생각을 바꾸게 하려면 진실을 가르쳐 주기 보다는 스스로 진실을 말하도록 해야한다. 학교 현장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있는 나로서는 문답법으로 학생을 깨우치는 것이 얼마나 큰 내공이있어야하며, 얼마나 큰 인내가 있어야하는지 잘 알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내공이 느껴진다.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가장 유명한 부분은 '소크라테스의 변론'이다. 일본에서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라고 번역했기에 아직도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일본이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일 때 자신에게 알맞게 오역을 했다. 천황중심의 전체주의 국가 일본은 개인의 자유를 지키고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 국가에 저항할 수 있는 서구의 양심 있는 사상을 왜곡해서 들여왔다. 결국, '소크라테스의 변론''변명'이라 오역했다. 국가가 시키는 일을 거부하고, 국가와 당당히 맞서며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는 소크라테스의 행동과 말이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는 변명으로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법정에서 진술한 내용은 '변론'이라고 번역해야 타당하다.

소크라테스가 살고자 했다면 충분히 살 수 있었다. '크리톤'에서 친구 크리톤은 소크라테스를 살리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한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탈옥하자는 그의 제안을 거절한다. 만약 그가 살고자 했다면 유죄판결을 받고 나서 자신이 받을 죄값으로 "프로타네이온에서 향응을 받는 것 이상 어울리는 것이 없습니다."(79)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라를 위해서 공을 세운자나, 올림피아의 우승자를 위한 잔치가 벌어지는 프로타이네온에서 향응을 베풀어 달라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에 많은 그리스인이 반대표를 던졌다. 소크라테스는 보통 사람들이 살고자 발버둥치는 것과는 달리 죽음과 당당히 맞서고 있었다. 이를 통해서 아테네의 재판 결과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를 자신의 목숨을 걸고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악법도 법이다.'라며 법에 순응하는자가 아니라, 법을 뛰어 넘은 진리를 보여주기 위해서 죽음과 맞서려한 초인이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는 왜? 살려고 노력하지 않았을까? ? 그는 죽음과 맞서려했을까? 그 이유를 나는 세가지로 정리해보았다.

첫째, 소크라테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 '장자'라는 책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시집을 가기 싫어했던 처자가 시집을 가고 나서는 너무도 좋아서 친정으로 돌아가기를 싫어한다는 내용의 이야기이다. 장자는 이에 빗대어 우리의 죽음도 이러하지 않겠는가?’라며 질문을 던진다. 장자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서양의 철학자가 바로 소크라테스이다.

 

"여러분,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지혜가 없으면서 지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또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죽음에 대하여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죽음은 사람에게 가장 큰 선일지도 모르는데, 사람들은 죽음이 가장 큰 해악임을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무서워합니다. 알지 못하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장 비난받을 만한 무지가 아니겠습니까?"(65)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기쁘게 죽음을 맞이한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파이돈'에서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그는 죽음으로서 여러 위인들과 만나서 철학적 대화를 나눌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가보지 않았기에 두려워하는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그는 철학적 사유를 통해서 죽음이 오히려 행복한 일일 수도 있음을 설파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적 추론을 통해서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오히려 기쁘게 죽음에 다가갔다.

둘째, 완벽한 철학적 사유를 하기 위해서 죽음을 선택했다. 소크라테스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 그는 정신과 육체를 하나로 보지 않고 영혼과 육체를 분리될 수 있는 존재로 보았다.

 

"영혼은 육체를 떠나될 수 있는 대로 육체와 상관하지 않을 때, 육체적 감각이나 욕망을 전혀 갖지 않고 참으로 존재하고자 추구할 때 가장 잘 사유하게 되는 거야."-파이돈, 129

 

영혼이 육체를 떠나 육체와 상관하지 않을 때 가장 잘 사유할 수 있다는 소크라테스의 사상은 영혼과 육체가 분리될 수 있으며, 영혼이 육체에서 분리될 때에야 비로소 가장 잘 사유할 수 있다는 극단적 사고에 이르게 된다. 소크라테스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서 육체를 깨끗하지 못한 것으로 묘사한다.

 

"모든 쾌락과 고통은 못과도 같아서, 영혼을 육체에다 넣어 결부시켜 마침내 육체와 닮게 하여 육체가 옳다고 하는 것을 같이 하기에 이르도록 하기 때문이지. 그리고는 육체와 어울려 똑같은 습성을 가지게 되어 세상을 하직할 때에 절대로 깨끗해지는 법이 없고 하데스에 깨끗이 갈 수 없으며 언제나 육체에 물들어 있기 때문이지."- 파이돈, 162

 

영혼이 육체와 어울려 똑같은 습성을 가지게 되면 절대로 깨끗해지는 법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소크라테스는 육체를 더러운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반면, 영혼은 깨끗한 것이고, 육체와 어울려 똑같은 습성을 가지지 않도록 조심해야한다고 말한다. 심지어는 눈과 귀와 같은 신체 감각을 통해서 얻는 정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눈이나 귀나 아니 온 신체는 영혼과 관계하여 영혼이 진리와 지혜를 얻는 것을 방해한다고 보고, 가능한 한 이런 것과 관계를 끊고 이런 것에서 벗어난 사람이야말로 참 존재의 인식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파이돈, 130

 

신체가 진리와 지혜를 얻는 것을 방해한다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에 동의할 수는 없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라틴어 아식스(ASICS)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현대 뇌과학을 통해서 밝혀진 사실로만 보더라도 정신과 육체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존재이다. , 신체의 특정 부분을 사용하지 않으면, 그 부분을 담당하는 뇌영역이 퇴화한다. 반면 새로운 운동을 배우면 뇌에서 운동을 담당하는 영역이 활성화된다.

영혼과 육체는 분리할 수 없으며,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관계임에도 소크라테스는 이원론적 사고관에 빠져 영혼은 고귀한 것이고 육체는 껍데기에 불과한 존재로 파악하고 있다. 육체라는 거추장스러운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보다 자유로운 철학을 하기 위해서 그는 죽음을 선택했다.

셋째, 불의에 맞서는 투사로서 당당한 죽음을 맞이하고 싶었다. 철학자라는 단어를 처음 접하는 사람은 유약한 사람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강력한 권력을 가진 절대군주에 비하면 철학자는 약한자 일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 힘이 없다고, 그의 정신 세계마져 유약하다고 생각하면 커다란 오판이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시민으로서 전쟁터에 나가서 싸운 경험이 있는 전사이기도 했다. 그는 강인한 체력의 소유자였으며, 위대한 철학자였다. 그는 자신을 고발한 자와 자신에게 유죄를 선고한 배심원들에게 아킬레우스를 예로들며 영웅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신념을 지키며 배심원들과 자신을 고발한 자에게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심지어는 "저는 몇번 죽음을 당한다해도 다른 일은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주십시오."(67)라며 당신들이 나의 목숨을 앗아간다고 협박한다 하더라도 자신은 이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태도를 보인다.

 

"저는 투옥이나 사형을 두려워하여 옳지 않은 일을 제안하고 있는 여러분 편이 되느니 오히려 위험을 무릅쓰고 법률과 정의의 편을 들어야 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소크라테스의 변론, 71

"여러분, 어려운 것은 죽음을 면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비열함을 면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습니다. 비열함을 죽음보다 발이 빠르니까요."-소크라테스의 변론, 83

 

훌륭한 전사는 전쟁터에서 적에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듯이, 옳은 일을 하고 있는 자신을 고발하고, 유죄를 선고한 그들에게 소크라테스는 목숨을 구걸할 의사가 없었다. 오히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부러질 지언정 굽히지 않는 당당함으로 그들과 대결했다. 죽음 앞에서 당당한 태도를 보이며 오히려 죽음이 나를 육체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함으로써 더 높은 차원의 철학을 할 수 있는 기쁨을 누리려 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한가지 의문을 해결할 수 있다. 오다카 도모오는 '법철학'이라나는 책에서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든 것은 실정법을 존중했기 때문이며, '악법도 법'이므로 이를 지켜야한다."라고 적었을까? 1930년대 일본은 전체주의 광풍이 휩쓸고 있을 때였다. 국가가 결정하며 질문을 하지 않고 따라야했다. 집단주의 문화를 가지고 있는 일본인들에게 소크라테스는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죽음 조차도 나의 신념을 꺽을 수 없다는 당당한 모습을 보인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소개한다면 전체주의 국가 일본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러하기에 소크라테스의 본뜻을 무시하고 "악법도 법이다."라는 논리를 만들어 냈으며, '소크라테스의 변론''소크라테스의 변명'으로 오역했다. 그들에게는 국가의 명령에 저항한 소크라테스의 주장이 '변명'으로 들려야만했다.

그리고 이 논리를 받아들인 독재자들은 교과서에 이 논리를 그대로 옮기며 자신들이 만든 악법을 충실히 따르라고 국민들에게 세뇌했다. 특히 도덕 교과서에서 윤리 교과서에서 반복해서 가르쳤다. 교과서에서 '악법도 법이다.'라는 내용이 삭제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악법도 법이다.'라는 독재자들의 논리를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있는 불쌍한 노예들이 있다. 소크라테스가 저승에서 이 사실을 안다면 땅을 치며 통탄할 것이다.

크리톤이 감옥에서 편히 잠자고 있는 소크라테스를 보고 깜짝 놀란다. 그는 죽음 앞에서도 초연했다. '파이돈'편에서 당당히 죽음을 맞이한 소크라테스는 편히 저세상으로 간다. 그런데, 갑자기 '향연'이 이어진다. 소크라테스의 죽음과는 상관 없는 에로스에 대해서 아가콘의 집에서 연설을 하고 토론을 했다. 매우 낯설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상관없는 '향연'을 맨마지막에 배치한 이유는 무엇일까? '에우튀프론'이 재판을 받으러 가는 도중에 에우튀프론을 만나 경건에 대해서 대화하면서 소크라테스가 어떠한 방식으로 아테네의 젊은이들을 깨우쳤는지를 보여주었고,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통해서 소크라테스가 사형을 받는 것이 부당함이 서술되었다며, '크리톤'을 통해서 탈옥을 거부하며 당당히 죽음을 맞이할 준비하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파이돈'에서는 소크라테스의 사상과 그의 마지막 모습을 독자에게 전해주었다. 그런데, 갑자기 '향연'이 펼쳐진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플라톤이 '향연'을 맨 마지막에 배치함으로써, 소크라테스가 철학적으로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가를 돋보이기 위함으로 보인다. 특히 알키비아데스가 소크라테스를 얼마나 찬양했던가! 아마도 이는 플라톤이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를 찬양하는 내용이 보태어졌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당당히 죽음을 맞이했다. 그는 죽었으나 그는 영원히 인류의 가슴속에 살아남았다. 플라톤의 가슴 속에서 살아남아 아리스토텔레스로 그 생명력은 이어졌다. 그리고 그의 철학은 오늘날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의 가슴속에 남아있다. 죽더라도 어떻게 죽음을 맞아하는가에 따라서 그는 우리 가슴속에서 영원히 살아남을 수도 있고, 잠시 타올랐다 꺼지는 촛불처럼 사라지는 존재일 수도 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고발한 자들과 유죄를 선고한 배심원들에게 당당히 맞섬으로써, 죽음 앞에서도 초연한 영웅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해서 영원히 살아 남을 수 있었다. 우리가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라는 논리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소크라테스를 지옥의 불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는 행동이며, 우리 스스로를 독재자의 노예로 만드는 어리석은 일이다. 스스로 노예의 길을 선택하는 자보다 어리석은 자는 없다. 나는 말하고 싶다. 깨어있으라! 깨어있으라! 그 누구도 당신을 노예로 삼을 수 없도록, 지혜의 횃불을 들고 깨어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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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7-08 17: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강나루님 *^^*

강나루 2022-07-09 12:21   좋아요 1 | URL
mini74님, 감사합니다.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이하라 2022-07-08 18: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강나루님^^
기분 좋은 기쁜 시간 되세요.^^

강나루 2022-07-09 12:20   좋아요 2 | URL
이하라님 감사합니다.

이하라 님도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22-07-10 10: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크라테스의 많은 사상이 제자 플라톤에 의해 정리되었기에, 소크라테스의 사상이 곧 플라톤의 사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사실 이들의 사상을 구별하기 쉽지 않은 듯 합니다. 그러면서도 미세하나마 작은 차이도 있을 듯 합니다. 강나루님의 글을 읽으며 소크라테스의 지행합일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아는 것과 행위를 하나로 보는 소크라테스의 사상은 추상적인 수학적 질서가 지배하는 이데아의 세계에서 구현가능하다면, 소크라테스는 이를 지향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죽음을 향한 그의 여정이 그러했듯이요. 반면, 플라톤 <국가>의 유명한 ‘동굴의 비유‘는 동굴 밖에서 진리를 발견하고 다시 동굴로 돌아오는 죄수의 모습이 그려지는데, 이러한 방향성에서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의 작은 차이가 있지 않았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강나루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

강나루 2022-07-10 10:24   좋아요 1 | URL
겨울호랑이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 대한 이해가 깊네요^^ 많이 배움니다.
감사합니다.^^

겨울호랑이 2022-07-10 10:36   좋아요 1 | URL
에고 아닙니다... 정확하지 않은 개인의 생각입니다. 강나루님의 페이퍼를 읽으면서 잠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어 오히려, 제가 감사드립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러블리땡 2022-07-09 23: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

강나루 2022-07-10 10:24   좋아요 0 | URL
러블리땡님 감사합니다.^^

thkang1001 2022-07-10 09: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휴일 보내세요!

강나루 2022-07-10 10:25   좋아요 0 | URL
thkang1001님 감사합니다.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thkang1001 2022-07-10 21: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강나루 2022-07-11 05:39   좋아요 0 | URL
thkang1001님 감사합니다.
즐거운 한주 보내세요.

bookholic 2022-07-10 23: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주말은 잘 보내셨는지요~~~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늘 좋은 글과 좋은 책 추천 고맙습니다.
더운 여름, 마음만은 늘 뽀송뽀송 시원하시길...

강나루 2022-07-11 05:40   좋아요 0 | URL
bookholic님 감사합니다.
행복한 한주 보내세요.

scott 2022-07-11 00: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이 달의 당선 축하 드립니다
자주 리뷰 올려 주세요 ^ㅅ^

강나루 2022-07-11 05:42   좋아요 1 | URL
scott님 감사합니다.
언제나 그렇듯 행복하게 보내세요.
 
숫타니파타를 읽는 즐거움 - 보경 스님의 친절한 해설
보경 스님 지음 / 민족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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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숫타니파타를 처음 알게된 것은 도올 김용옥 선생의 강의를 통해서이다. 도올 김용옥 선생이 읽어주는 숫타니파타의 글귀는 나의 심장을 요동치게 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탕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 처럼

 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39쪽


  숫타니파타를 읽기 전서부터 나의 가슴을 울렸고, 지금도 숫타니파타의 이 구절처럼 나의 삶을 뚜벅뚜벅 걸어가겠다는 다짐을 한다. 도올 김용옥 선생의 ebs 강의를 듣고 언젠가는 숫타니파타를 읽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러나, 불교 경전에 대한 울렁증이 있어 쉽게 시작을 하지 못했다. 불교라는 거대한 철학의 바다를 건너기에는 나의 역량이 너무도 작았기 때문이다. 요즘, 코로나19로 가족이 힘들어하고 있다. 나의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 숫타니파타가 필요했다. 그래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숫타니파타의 내용은 부처님께서 제자들과 나눈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일반 대중을 위한 강설이라기 보다는 구도자의 길을 가려면 어떠한 마음가짐을 가져야하는가를 친절하게 강설하는 내용이다. 그러하기에 속세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좋은 문장은 찾기 힘들었다. 아니, 일반 대중들에게도 좋은 글귀이지만, 이미 불교에 대한 상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탐욕과 집착을 벌리고 선한 삶을 살아가라는 내용은 새롭게 들리지 않는다. 


  "이때 마라(파피만)는 이렇게 말했다. 

   자녀가 있는 사람은 자녀로 인하여 기뻐하고

   소를 가진 사람은 소로 인하여 기뻐한다. 

   사람이 집착하는 바탕은 기쁨이다. 

   집착하는 바탕이 없는 사람은 참으로 기쁜 일도 없으리라.


  스승이 대답하셨다. 

   자녀를 가진 사람은 자녀로 말미암아 걱정하고,

  소를 가진 사람은 소로 말미암아 걱정한다. 

  참으로 사람이 집착하는 바탕은 근심 걱정이다. 

  집착하는 바탕이 없는 사람은 근심할 일이 없다. "-25쪽


  보경 스님은 부처님의 말이 옳다고 강설하셨다. 출가자 혹은 구도자의 입장에서는 부처님의 말씀이 백번 옳은 말씀이다. 그러나, 속세를 살아가야하는 중생들에게는 마라의 말도 옳고 부처님의 말씀도 옳다. 자녀를 기르며 자녀가 건강히 자라기를 바라며 걱정한다. 또한 자녀의 해맑은 웃음을 보며 기뻐한다. 자녀에 대한 집착은 고통인 동시에 행복을 가져다준다. 자녀에 대한 집착이 심해지면 고통이 심해지고, 자녀에 대한 무관심은 자녀를 불행하게 한다. 자녀에 대한 건강한 거리를 두고 건전한 사랑을 준다면 자녀도 행복하고 부모도 행복하다. 집착을 버릴 수없는 속세인들에게 건전한 관계를 형성하는 지혜를 갖는다면 집착도 행복으로 만들 수 있다. 

  숫타니파타의 글은 출가자를 위해서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들이기에 일반 사람의 입장에서는 거리감이 있는 내용도 있고, 불교에 대한 상식적인 말들로 채워져 쉽게 책장을 넘길 수 있는 내용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숫타니파타에 보경스님이 붙여놓은 해설은 쉽게 넘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중에서 중세 아랍시인 루미에게 수피 한사람이 경전을 읽는 것이 유익한지에 대해서 물었다. 그 대답이 걸작이다. 


  "그대 자신이 그 책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상태인지 스스로에게 묻는 것이 더 나을 것이오."-106쪽


  자신이 경전의 말씀을 담을 그릇이 되지 못한다면 경전은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경전의 말씀을 담을 그릇이라면 그 경전은 너무도 큰 기쁨을 줄 것이다. 어디 경전뿐이랴, 세상의 어느 책이든 매한가지가 아닐까? 가벼이 초기 불교의 맛을 보려는 사람들에게 숫타니파타를 추천한다. 이왕이면 보경 스님처럼 좋은 해설을 덧붙여주는 분의 책을 읽기를 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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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holic 2021-11-10 18:3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도올 선생의 불교 강의는 약 20년 전의 그 불교강의를 말씀하시는건가요?^^
저도 그 강의를 재미있게 보고 법정스님께서 옮기신 <숫타니파타>과 <법구경> 읽었던 기억이...
소개해주신 책도 읽어보고 싶네요~~

강나루 2021-11-10 18:41   좋아요 3 | URL
네 맞아요.
그때 생각보다 시청율이 안나와서 강의를 오래하지는 못한 걸로 알고 있어요.

붕붕툐툐 2021-11-10 23: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 읽고 싶어용!!

강나루 2021-11-11 06:05   좋아요 1 | URL
명상하듯 읽으실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