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의 정치 강의 - 사유하고 판단하지 않는 시민에게 정치적 자유는 없다!
이진우 지음 / 휴머니스트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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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의 의미는 자유이다.(The meaning of politics is freedom)" 책의 표지에 한나 아렌트의 말이 적혀있다. 그리고 이 말은 이책의 핵심이다. 한나 아렌트에게 정치는 자유를 뜻하며 정치가 없다면 자유는 보장되지 못한다.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서 미국으로 탈출한 한나 아렌트에게 전체주의 탐구는 그가 밝혀야할 수수께기였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고 그녀의 지적 아름다움에 매혹되었다. 지난 겨울, 그녀의 또다른 대표작 '전체주의의 기원1'을 읽으며 쉽게 그녀의 아름다움을 정복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한나 아렌트는 자신의 지적 아름다움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의 아름다움을 정복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았다. 이진우 교수의 '한나 아렌트의 정치 가의'가 나의 손에 잡혔다. 이 책을 디딤돌 삼아 그녀의 '전체주의의 기원2'를 정복하겠다는 야망을 갖았다. 그리고 그 디딤돌은 생각보다 유용했다. 


  좀비를 소재로한 영화와 드라마가 유행이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누군가의 명령에 의해서 움직인다. 총이나 칼로 혹은 주먹으로 그들을 물리치려하지만, 자신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도 주인의 명령에 복종하며 덤벼든다. 


  "복종하면서 꼭두각시처럼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인간들의 행렬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다."(31쪽)


  한나 아렌트는 그러한 좀비들을 보았다. 아무런 저항없이 아우슈비츠의 죽음의 가스실로 순순히 걸어들아가는 유대인과 레벤스라움을 건설하기 위해서 전차를 몰고 소련 국경을 넘는 독일인들을 보면서 한나 아렌트는 좀비를 실제 목적한 것 처럼 두려웠을 것이다. 

  지구 반대편에도 좀비들이 있었다. '덴노헤이카 반자이'를 외치며 인간 폭탄이 되어 출격했던 가미가제 특공대도 무서운 좀비들의 행렬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주변에는 좀비들이 없는가? 불행히도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좀비들이 있다. 탐욕에 눈이멀어 대한민국호를 버뮤다 삼각지대로 끌고가는 선장을 뽑은 좀비들이 있다. '나라 팔아 먹는 이완용이 출마한다고 해더라도 우리는 XXXX을 뽑겠다.'는 어리석은 아줌마의 인터뷰를 보며 우리 사회의 좀비를 보았다. 

  이들보다 더 무서운 좀비가 있다. 정치에 관해서 대화를 하려하면 '모른다.', '관심 없다.'는 말을 하며 더러운 정치에는 관심없는 순수한 사람임을 자랑스럽게 말하는 좀비가 있다. 한나 아렌트의 입장에서 그들은 탄생성과 다원성이 전제되는 자유로운 사회를 스스로 부정하는 좀비들이다. 


  "현실을 생각하지 않으면 악을 불러오고 악은 사유를 허용하지 않는다."(9쪽)


  선거에 관심 없고, 현실에 떨어져 사는 것을 고귀한 것처럼 생각하는 좀비는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악을 불러오면서 현실을 고민하지 않는다. 또는 고민기 싫어 무조건 XXXX를 뽑거나 자신의 탐욕을 충족시켜줄 악마에게 한표를 행사한다. 


  "희생자들을 실제로 죽인 것에서 알마나 가까이 또는 멀리 있었던가하는 것은 그의 책임의 기준과 관련된 한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중략) 살상 도구를 자신의 손으로 사용한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을 수록 책임의 정도는 증가한다."(71쪽)


  세월호 안에서 구조될 것이라 믿으며 죽어갔던 단원고 학생들, 즐거운 저녁을 보내려 이태원에 갔다 압사된 청년들!! 그들의 곁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책임이 없는 것이 아니다. 학교 폭력을 조장하며 자신의 똘마니를 시켜 약자를 괴롭히는 일진이 있다. 좀비 똘마니가 손에 피를 뭍혔지만 자신의 손은 깨끗하다며 처벌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일진을 보며 한나 아렌트의 단호한 이 말이 떠오른다. 오히려 '멀리 떨어져 있을 수록 책임의 정도는 증가한다.'

  너무나도 암담해 보이는 현실을 변화시킬 수는 없을까? 좀비들로 가득찬 대한민국호에서 좀비를 시민으로 바꿀 수는 없을까? 


  "우리의 사회가 아무리 부패하고 불의로 가득차 있다고 하더라도 자발적으로 행위를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58쪽)


  '민주주의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입니다.'라는 고 노무현 대통령의 말 처럼, 좀비를 시민으로 만들 수 있는 희망은 깨어있는 시민들에게 있다. 탐욕과 부정 부패가 넘쳐나는 현실을 바로잡으려 깨어있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행위'할 수 있다면 암담한 우리 현실을 바꿀 수 있다. 

  우리 주변의 좀비를 깨어있는 시민으로 일깨우고, 암담한 현실을 밝게 비추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갈등과 충돌이 두려워 절대적 진리를 구한다면, 그것은 곧 정치를 떠나는 일이다."(121쪽)


  한나 아렌트는 갈등과 충돌을 견뎌내고 조정할 줄 알아야 정치는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고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 시기에 방송에 수 많은 토론 프로그램이 있었다. 대통령이 검사와의 대화를 하면서 갈등과 충돌을 견뎌내면서 대화와 타협으로 우리 현실 속에서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려했다. 그러나, 독재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노무현을 만만하게보았다. 민주주의라는 정치를 불편해하는 사람들은 '민주주의는 말잘하는 사람이 이기는 시스템이다. 강력한 리더가 이끌어주었으면 좋겠다.'며 독재로의 회기를 갈망하기도 했다.


 "정치는 많은 사람이 지닌 차이와 이들에게 공동으로 주어진 공간을 전제한다.(111쪽)


  차이를 견디지 못하고 주어진 공간을 회피하려는 사람들이 권위적 지도자를 불러들였다. 친일적 발언을 하는 사회 지도층 인사가 늘어났다. 청소년들 사이에서도 '일베'들이 늘어났다. 독재를 찬양하고 친일을 미화하며 독립운동가 가족을 비하하는 악마의 졸개들이 늘어났다. 


  "다원성이 버거울수록 여론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의견만 절대화하는 전체주의의 유혹이다."(127족)


  친일을 미화하는 악마의 졸개들도 다원성을 존중한다는 측면에서 그들을 존중해야할까? 5.18을 모독하는 인간 말종들의 의견마져도 존중해야할까? 아마 아닐 것이다. 유럽에서 나치를 미화하고 히틀러를 찬양하며 처벌받는다. 홍세화가 말했듯이, 똘레랑스가 허용되는 정치의 장, 자체를 뒤흔드는 무리까지 똘레랑스를 허용해서는 안된다. 

  어둠을 헤치고 좀비들 사이에서 희망의 빛을 쫓는 일은 혼자만의 힘으로는 힘들다. 


  "'뿌리 뽑힌 대중'은 전체주의 운동의 자원이다. 전체주의 운동은 원자화되고 개인화된 대중의 특별한 조건에 의존하기 때문에 전체주의 운동은 이런 저런 이유로 정치조직에 대한 욕구를 가진 대중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나타날 수 있다."(26쪽)


  '뿌리 뽑힌 대중'이 되지 않으려면, 뿌리 내린 대중에 되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연대를 해야한다. 원자화되고 개인화된 대중은 제2의 히틀러에게 좋은 먹이감이 된다.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을 길러야한다. 우리는 혼자가 아님일 깨달아야한다. 좀비 이웃과 대화하며 그들이 깨어있는 시민이 될 수 있도록 선한 영향력을 미쳐야한다. 그럴때 우리는 불의의 권력에 맞설 수 있다. 


  "어떤 정권이 권력을 폭력으로 대체하려는 경향을 보일 때 우리는 더욱 정치적 행위를 해야한다. 왜냐하면 "모든 권력의 감소는 폭력에 대한 공개적인 초대이기" 때문이다."(175쪽)


  검찰 폭력에 연대로 대응해야한다. 조국을 짖밟는 무리에게 우리는 연대로 대응해야한다. 그들은 권력을 폭력으로 대체하려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자유로운 공간과 다원성을 전제로하는 정치를 지킬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두려움이 든다. 과연 우리의 판단은 정확한가? 소수 엘리트의 세뇌에 우리가 현혹된 것은 아닐까? 한나 아렌트의 마지막 화두는 '판단'이었다. 그녀는 '정신의 삶'이라는 책의 제3부 '판단'을 쓰려 타자기 앞에 앉았다. 타자기에 '판단'이란 제목과 두 개의 머리 인용문을 쓰고는 더 이상 글을 쓰지 못했다. 그녀는 '판단'의 문제를 우리에게 숙제롤 남기고 저 세상으로 갔다. 

  이진우 교수는 그녀가 채우지 못한 빈 공간을 그녀의 이전 저서를 토대로 '판단'문제를 추론했다. 한나 아렌트는 정치적 판단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관찰자'를 강조했다. 현실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서 한걸음 뒤로 물러섯 전체를 조망해야한다. 대중에 매몰되지 않는 관찰자이면서 현실과 유리되지 않는 참여자가 되어야한다. 한나 아렌트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요구한다. 아니, 다원성과 자유의 공간이 전제되는 정치를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는 이정도 비용을 지불해야한다. 댓가 없는 열매는 기대할 수 없다. 



 책장을 덮으려할 때 쯤, 한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인민에게 배출된 엘리트에 의한 인민의 정부"(222쪽)


  우리의 현실을 너무도 잘 설명하는 문장이다. 선거 때만 국민이 주인으로 대접받는다. 어느 거리의 철학자는 이러한 현실을 비판하며 대의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직접 민주주의를 주장한다. 투표할 필요를 부정하는 괴변까지 '철학자'라는 간판을 걸고 짖어댄다. 투표라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완벽한 노예가 될 뿐이다. '인민에게 배출된 엘리트에 의한 인민의 정부'라 할지라도 그 공간에서 자유라는 이름의 정치를 누리기 위해서 우리는 투표해야한다. 정치에 관심을 갖고 참여해야한다. 관찰자와 참여자로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관찰자이면서 동시에 참여자가 되어야한다. '복종하면서 꼭두각시 처럼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관찰자 이면서 참여자가 되어야한다.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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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 평화론 - 하나의 철학적 기획, 개정판
임마누엘 칸트 지음, 이한구 옮김 / 서광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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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탁월한 철학자가 있다. 그 이름은 바로 임마누엘 칸트이다. 그는 영원한 평화를 꿈꾸었다. 그래서 '영구 평화론'을 집필했다. '하나의 철학적 기획'이라는 부제가 말하듯이, 전쟁이 많았던 시대를 살았던 그는 영원히 전쟁을 떠나보내기 위해서 철학적 기획을 했다. 임마누엘 칸트라는 탁월한 철학자가 우리 인류에게 던져준 축복의 메시지이다. 그가 인류에게 던져준 축복의 메시지를 읽어보자.

  칸트는 국가 간의 영원한 평화를 위해서 예비조항6개와 확정 조항 3개를 제시했다. 

  우선 국가 간의 영원한 평화를 위한 예비 조항 6개를 살펴보자. 


 1. 장차 전쟁의 화근이 될 수 있는 내용을 암암리에 유보한 채로 맺은 어떠한 평화 조약도 결코 평화 조약으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 

 2. 어떠한 독립 국가도 (크고 작고에 관계없이) 상속, 교환, 매매 혹은 증여에 의해 다른 국가의 소유로 전락될 수 없다. 

 3. 상비군은 조만간 완전히 폐지되어야 한다 

 4. 국가 간의 대외적 분쟁과 관련하여 어떠한 국채도 발행되어서는 안된다. 

 5. 어떠한 국가도 다른 국가의 체제와 통치에 폭력으로 간섭해서는 안된다. 

 6. 어떠한 국가도 다른 나라와의 전쟁 동안에 장래의 평화 시기에는 상호 신뢰를 불가능하게 할 것이 틀림없는 다음과 같은 적대 행위, 예컨대 암살자나 독살자의 고용, 항복 조약의 파기, 적국에서의 반역 선동 등을 위해서는 안된다. 


  칸트가 제시한 1번 조항은 전쟁의 화근을 뿌리 뽑는 평화조약을 맺을 것을 당부했다. 칸트는 완전한 평화 세계를 꿈꾸었지만, 현실은 완전한 평화에 다가가려 노력해야하는 것이이다. 지금 벌어지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휴전으로 마무리 된다할지라도 이것은 평화조약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완벽한 평화조약을 체결하기 위해서는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승리해야한다. 그러나, 핵을 가진 국가와 핵을 가진 국가의 지원을 받는 나라의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며, 자칫잘못하면 핵전쟁으로 비화될 수도 있다. 현실을 고려한다면, 전쟁의 화근을 뿌리 뽑지 못한 미봉책의 조약도 평화를 위한 시간을 벌었다는 점에서 평화 조약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2번 조항과 4번조항, 5번 조항, 6번 조항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을사늑약도 제국주의 열강들이 약소국 대한제국을 일제가 식민지로 삼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에 강제 조인된 것이 아닌가! 또한 전쟁은 돈이 없으면 치룰 수 없다. 전쟁을 위한 국채를 발행할 수 없다면 전쟁은 지속될 수 없다. 타국에 대해서 폭력으로 간섭하지 못하게 하는 것도 인권을 비롯한 다양한 핑게꺼리를 들이밀며 타국강제 병합시키려는 야욕을 사전에 제거하려 목적일 것이다. 전쟁을 하더라도 암살자난 독살자를 고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서 전쟁이 끝나더라도 화해할 수 있는 칸트의 의도일 것이다. 

  그러나, 상비군을 조만간 완전히 폐지하자는 3번 조항은 이뤄지기 힘들다고 본다. 상비군이 완전히 폐지되기 위해서는 모든 나라가 서로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동시에 폐지해야한다.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국가간에 군사비 지출이 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해본다면, 실현가능성이 없다고 본다. "평화를 원하는 이들은 전쟁을 준비한다.(Igitur qui desiderat pacem, praeparet bellum)"라는 로마의 플라비우스 베게티우스 레나투스가한 말을 우리는 흘려들을 수 없다. 

  칸트가 제시한 국가 간의 영구 평화를 위한 확정 조항 3가지를 살펴보자. 


 1. 모든 국가의 시민적 정치 체제는 공화 정체이어야 한다. 

 2. 국제법은 자유로운 국가들이 연방 체제에 기초하지 않으면 안된다. 

 3. 세계 시민법은 보편적 우호의 조건들에 국한되어야 한다. 

  

  칸트가 제시한 확정 조항 3가지는 그의 평화에 대한 탁월한 안목을 실감케한다. 우선 모든 국가는 공화정체이어야한다는 1번 조항을 살펴보자. 1816년부터 2005년까지 발생한 전쟁을 살펴보면 비민주국가들 사이에서는 205건의 전쟁이 발생했으나, 민주국가 사이에서는 0건의 전쟁이 발생했다. 정확히 말하면 칸트는 민주주의를 외친 것이 아니라 공화 정체를 외쳤다. 칸트가 생각하기에 민주정치는 그리스 시대의 중우정치와 같은 의미의 정치형태였을 것이다. 칸트가 제시한 공화 정체를 현대의 민주 공화정으로 수정한다면 그의 안목을 적중했다.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이를 확산시키는 것은 세계 평화를 수호하는 길이기도 하다. 자신의 가족이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것을 민주 공화국의 국민들은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명의 미군 생명이 사라지는 것도 미국인들은 견디기 힘들어한다. 그러나, 전체주의 국가, 혹은 독재 국가에서 사람의 목숨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충분히 희생시킬 수 있는 도구일 뿐이다. 

  2번 조항은 국제연맹이나 국제 연합을 염두해둔 것이다. 미국의 대통령 우드로우 윌슨이 국제연맹을 제창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칸트가 제시한 영구 평화론의 확정 조항 2번이 있었다. 물론, 국제연맹과 국제연합이 가지는 수 많은 문제점과 한계점을 간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렇게 부족한 국제연맹과 국제연합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야심에 가득찬 독재자들은 더 많은 침략전쟁을 일으켰을 것이다.

 3번 조항을 보면 솅겐조약이 떠오른다. 유럽연합 가입국 국민은 자유롭게 유럽연합 내의 국가들의 국경을 넘을 수 있다. 국경이 의미를 잃은 유럽연합은 적어도 유럽연합 내의 국가들 사이의 전쟁은 사라지게 했다. 이것은 세계로 확대시킬 수 있을까? 그것은 무리일 것이다. 칸트가 그의 책에서 제시했듯이, 서구의 제국주의 국가는 그들이 방문한 지역의 주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그들을 식민지로 삼았다. 솅겐조약을 세계로 확대 시킬 수는 없지만 이방인을 환대하고 우호적으로 대해야한다는 칸트의 제안은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할 원칙이다. 

  칸트가 영원한 평화를 원했다고 해서 전쟁을 죄악시하는 극단주의자는 아니다. 놀랍게도 '영구 평화론'에는 전쟁의 긍정적인면도 소개되어 있다. 


  "전쟁은 또한 전제정치를 자제시키고, 자유를 가능하게하는 유일한 요인으로 작용한다."-96쪽

  "모든 집단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기술의 개발과 촉진에 노력을 경주함으로써, 전쟁은 과거에서나 현재에서나 소질을 계발시키는 원동력이된다"-96쪽


  어니스트 볼크먼의 '전쟁과 과학 그 야합의 역사'라는 책에서 소개한 내용을 다시 읽는듯하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기술 개발을 촉진한 사례를 1, 2차 세계 대전에서 우리는 경험했다. 1차 세계 대전 이후에 전제군주정 혹은 입헌군주제 국가가 몰락하고 민주주의가 확산된 경험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전쟁의 긍정적인 면이 있다하더라도, 전쟁이 벌어지는 것보다는 전쟁이 없는 세계가 더 안전하고 인류를 행복하게할 것이라는 진실은 부정할 수 없다. 칸트도 이를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현실을 냉정하게 보았던 철학자 칸트! 그는 철학자가 인류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해냈다. 그것은 영원한 평화가 가능하다는 자신의 철학적 기획을 책으로 출판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수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국제연맹, 국제연합이 탄생했으며, 세계 여러나라 시민들에게 민주 공화국의 이념을 전파했다. 그가 살았던 유럽에는 유럽연합이 탄생했다. 그가 바란 영구평화는 이뤄지지 않았지만, 인류를 사랑하는 그의 따뜻한 마음만은 영원히 우리 가슴에 남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정의와 이익 사이의) 실용적으로 제약된 법이라는 중간 노선을 추구해서는 안된다. 모든 정치는 도덕 앞에 무릎을 꿇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이렇게 함으로써 정치는 비록 완만하기는 해도 영원히 빛나게 될 단계에 도달할 것을 희망할 수 있다."-79쪽


  현실 정치는 도덕 앞에 무릎을 꿇고 칸트가 제시한 영구평화의 길을 걸어야한다.


ps.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칸트가 29쪽에 제시한 정치체제 분류를 이해해야한다. 칸트는 국가형태를 본래적인 지배형식과 통치 형식에 따라 각각 3가지와 2가지로 분류했다. 본래적인 지배 형식(최고권력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의 차이)에 따라서 군주제, 귀족제, 민주제로 분류했다. 통치형식(국민에 대한 통치자의 통치 형식)에 따라서 공화정체와 전제정체로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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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의 법고전 산책 - 열다섯 권의 고전, 그 사상가들을 만나다
조국 지음 / 오마이북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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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목에 칼을 찬 채로 캄캄한 터널을 묵묵히 걷겠습니다."(9) 조국은 이렇게 나에게 말을 걸었다. 조국이 검찰 개혁을 이루려 가시밭길을 걸었다. 그 가시밭길에 조국의 가족의 핏자국도 선명히 뿌려졌다. 몸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도 병보석은 허락되지 않았으며, 가혹하리만치 여러번 압수수색이 진행되었다. 법무부 장관이라는 권력을 휘두르지 않고 조국은 묵묵히 그 채찍을 견뎌냈다. 소위 강남좌파 조국은 안락한 주류 사회에 일원으로 쾌락을 즐기며 살아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에밀'이라는 위대한 교육책을 썼으나 다섯 자녀를 보육원에 보낸 '분열된 영혼' 루소에 자신을 비유한다. 진보적 지식인으로 살아가려했으나 토마토가 되지 못했다며 자신을 책직질한다. 어찌하여 도덕적 잣대는 진보 인사에게 더욱 혹독하단말인가! 가족과 친척이 부동산 투기에 주가조작 등등의 혐의가 있어도 제대로 수사를 받지 않고 권력을 누리는 이들도 있지만, 진보인사는 조그만 잘못도 용납되지 않는다. 그가 가시밭길을 가면서 이 사회의 무엇을 밝히려 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조국의 법고전 산책'을 읽어 내려갔다.

 

1. 어떻게 권력을 제지할 것인가?

조국은 15권의 법고전 중에서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맨 앞장에 배치했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프랑스 혁명에 큰 영향을 미친 책이다. 로베스피에르와 장들 마라가 탐독했을 뿐만 아니라, 감옥에서 루소와 볼테르의 책을 읽은 루이 16세는 '이 두 사람 때문에 내 왕국이 무너졌구나!'라고 한탄했을 정도이다. 붓이 칼보다 강하다는 말은 이러한 때에 사용하나보다!

루소의 사상은 참으로 혁명적이다. 루소는 인민의 자기계약을 통해서 국가 권력이 형성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어디서나 쇠사슬에 묶여 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노예가 되어있으면서도 자기가 그들의 주인이라고 믿는자들이 있다."(24)며 어리석은 인간을 꾸짖는다. 이러한 어리석은 자들은 우리 주변에도 흔하게 보인다. 독재에 뿌리가 있는 정당을 지지하면서 그들에게 개, 돼지 취급을 당하면서도 그들을 지지한다. 그리고 이것을 자랑스럽게 말한다. 스스로 노예의 길을 걸으면서도 주인이라 착각한다. 고집을 신념이라 착각하며 젊은이의 말을 귀담아 들으려하지 않는다. 어리석은 이들을 어찌하랴!

모든 인간이 현명하지는 않다. 모든 인간이 어리석지는 않듯이 말이다. 그리고 한인간이 항상 어리석지 않듯이, 한인간이 항상 현명하지도 않다. 몽테스키외는 인간의 선함에 의존해서 독재를 막기보다는 "권력이 권력을 제지하도록해야한다."(75~76)고 주장한다. 아프리카의 여러국가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인물들이 독립 후에 독재자로 군림한 예를 우리는 자주 보았다. 중국의 마오쩌둥도 독재자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가! 인간이 권력을 쥐는 순간 독재의 유혹에 빠진다. 그래서 권력이 권력을 제지하도록 시스템을 만들어야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6월 민주항쟁 이후, 형식적 민주주의는 갖추어졌다. 루소는 "힘이 권리를 만드는게 아니며, 오직 합법적인 권력에만 복종할 의무가 있다."(26)고 말했다. 그런데, 박근혜정권에서는 국정농단이 벌어졌다. 행정부의 농단에 사법부가 호응하여 일명 '사법농단 의혹 사건'이 벌어져 공분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제는 검찰이 새로운 권력 기구로 떠오르고 있다. '법비'들이 기승을 부린다며 한탄하는 사람도 자주본다. 합법적으로 선출된 권력이 국정농단을 벌이고,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며 구조적으로 농간을 부리고 있다면 우리는 이러한 '합법적인 권력'에 복종해야할까? 이러한 농간을 원천적으로 막을 수는 없을까? 몽테스키외가 권력이 권력을 저지하도록 해야한다고 말했으나, 우리사회는 권력들끼리 단합하며 그들만의 카르텔을 형성하는 것은 아닌지 답답한 마음을 지울 수 없다.

 

2. 악법에 복종해야할까?

조국은 8장에서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고 서술한다. 이미 널리 알려져있지만, 의외로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많아 우리를 놀라게 한다. 독재정권에서 '악법도 법'이라는 논리로 자신들이 만든 악법에 복종할 것을 강요했다. 그렇다면, 악법에 복종해야할까?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수립 과정에서 백범의 족적은 너무도 크다. 백범을 암살한 인물이 친일파 안두희이다. 역사의 정의를 세우기 위해서 정의봉으로 안두희를 처단한 버스기사 박기서씨에 대해서 학생들에게 설명한 적이 있었다. 어느 학생이 안두희를 처단한 박기서씨를 사적처벌을 했다며 비판했다. 친일파가 권력을 쥐고 역사를 굴절시킨 것이 우리의 현대사이다. 백범을 암살한 친일파 안두희를 처단할 수 없는 현실에서 희생을 각오하며 정의봉으로 친일파 안두희를 처단한 박기서씨의 행동은 정의로운 것일까? 이러한 딜레마 상황에서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우리에게 현명한 조언을 한다.

 

"법에 대한 존경심 보다는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함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403

 

법의 이념에는 합목적성과 법적 안정성뿐만 아니라, 정의가 있다. 정의롭지 않은 법은 법일 수 없다. 루소의 말을 빌어 소로의 말을 다시 표현하자면, '법이 법자체로 정당성을 만드는 것이 아니며, 오직 정의로운 법에만 복종할 의무가 있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독재자가, 법비들이 악법으로, 그들만의 법논리로 정의로운 사람을 압제한다면, "정의로운 사람이 진정으로 있을 곳은 감옥뿐이다."(405) 일제 강점기에도, 독재 정권하에서 정의로운 사람이 많이 있는 곳은 감옥이 아니었을까? 시대의 모순이 정의로운자를 감옥에 보낸다.

이 책에 한국 검찰의 '마녀사냥'에 대해서 언급하며 고 노무현 대통령의 사례를 들고 있다. 그런데, 정의로운 조국은 '마녀사냥'의 대상이 될줄 그는 알았을까?

정의를 용감하게 실행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악법을 어길 수밖에 없다. 악법은 어겨야 악법이 고쳐진다. 이를 루돌프 폰 예링은 이렇게 표현했다.

 

"현행법이 이해관계를 배경으로 하는 모든 경우에 새로운 법이 자신의 진입을 강행하기 위하여 치러야 할 투쟁이 존재하는데, 이 투쟁은 종종 몇 세기 동안 계속되기도 한다. 이러한 투쟁은 이러한 투쟁은 이익들이 기득권의 형태를 취할 때 그 강도가 최고조에 달한다."-314

 

한홍구 교수가 대중강연에서 '악법은 어겨야 바뀐다.'라고 말했다. 악법은 법이 아니다. 민중을 옥죄는 법의 탈을 쓴 족쇄이다. 악법을 어겼기에 미국은 노예해방을 이룰 수 있었으며, 식민지 조선 민중은 독립을 달성할 수 있었다. 법 위에 정의가 있음을 우리는 명심해야한다. 그래야 사회의 진보를 이룰 수 있다.

 

3. 조국이 꿈꾸는 대한민국의 모습은 무엇인가?

조국은 평등한 사회를 원한다. '조국의 법고전 산책'은 조국의 눈을 거친 법고전들이다. 조국의 프리즘을 거친 고전들에서 조국은 자신이 원하는 대한민국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지위와 재산은 상당히 평등해야한다. 안그러면 권리와 권위의 평등은 오래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루소, 43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때 우리는 헌법과 국가를 자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 어느 나라보다도 우리의 빈민은 행복하고, 그들에게 무지와 불행이 없으며, 감옥에는 죄수가 없고, 거리에는 거지가 없으며, 노인들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고, 세금이 과중하지 않으며, 우리는 세계의 행복과 친구이기 때문에 합리적인 세계가 우리의 친구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렇다."-페인, 225~227

 

루소와 페인의 이 말은 사실 조국이 그리는 대한민국의 미래상이다. 자유와 평등, 지위와 재산의 평등이 있어야 권리와 권위의 평등이 오래지속될 수 있다. 한사회에서 부가 편중되면 그들은 권력도 쥐려할 것이기 때문이다. 빈민이 행복하고 죄수와 거지가 없는 세상, 노인빈곤이 없으며 세금이 과중하지 않은 대동 세상을 조국은 꿈꾸고 있다.

이러한 이상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나는 두가지를 꼽고 싶다. 첫째가 소수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관용이 필요하다.

 

"인민의 51퍼센트가 다른 49퍼센트의 권리를 빼앗는 곳에서는 민주주의는 폭도의 규칙에 불과하다."-토머스 제퍼슨, 242

 

'다수의 전제'를 피하기 위해서는 약자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관용이 필요하다. 그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않는다면 왕정 혹은 1인 독재의 시대에서 다수 독재의 시대로 이행 될뿐, 진정한 진보를 이룰 수 없다. 소수를 어떻게 대하는가가 그 사회의 진보의 척도라는 평범한 진리를 우리는 잊지 말아야한다.

 

둘째,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권리에 대한 경시와 인격적 모욕의 성질을 지니고 있는 형태로서의 권리 침해에 저항하는 것은 의무이다. 이것은 권리이자 자신에 대한 의무이다. - 이것은 도덕적인 자기 보존의 명령이며 또한 공동체에 대한 의무다. - 왜냐하면 권리의 실현을 위해서는 불법에 대한 저항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중략) 도덕적 생존의 여러 조건 가운데 하나가 바로 권리 주장이다."-예링, 321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면 '이기적'이라는 인식과 '분위기를 망치는 행동'이라는 인식이 아직도 남아있다. 루돌프 폰 예링은 이러한 우리의 풍조에 일침을 가한다. 딸의 학예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외출을 신청하자 교장이 "애 엄마는 뭐하고 자네가가 가나?"라고 물었던 적이 있다. 자녀는 부모의 사랑을 먹고 자란다. 부모로서 자녀의 학예회에 참석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이다. 사회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권리를 행사해야한다. 그 변화가 너무도 늦더라도 말이다.

체사레 베카리아는 '범죄를 예방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형벌의 잔혹성이 아니라 형벌의 확실성에 있다.'(192)라고 말했다. 마키아벨리도 '군주론'에서 형벌의 잔혹성보다는 일관성을 중요시했다. 지강원이 말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명언이 한국사회의 대다수에게 공감을 얻는 이유는 우리 사회의 법이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법질서를 제대로 세우기 위해서는 진보에게 들이대는 도덕성의 잣대를 보수세력에게도 똑같이 들이대야할 것이다. 법적 책임을 물을 때도 빈부차이, 권력의 유무와 관계없이 똑같이 들이대야할 것이다. 너무도 당연한 진리가 행해지지 않기에 조국은 가시밭길을 걸어야한다. 함께라면 두려울 것이 없다. 그 가시밭길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 길이 값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조국은 대중들에게 '울프피쉬 호리'라는 물고기를 소개한다. 작은 어항에서는 1cm 정도 자라고, 연못에서는 5cm 정도 자란다. 그러나 울프피쉬 호리가 강에서 자라면 15cm까지 자란다. 더 넓은 바다에 나간 울프피쉬 호리는 50~60m까지 자란다. 환경이 울프피쉬 호리의 성장에 영향을 크게 미친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어떠한 사람과 어울리고 어떠한 책을 읽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내면과 외연이 얼마나 성장할지를 결정한다. '조국의 법고전 산책'은 우리의 정신이 자유롭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책이다. 혼자 읽는다면 너무도 힘든 고전 15권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를 안내한다. 지적으로 더욱 성숙하고 싶은자에게 이책을 강력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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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주의의 기원 1 한길그레이트북스 83
한나 아렌트 지음, 이진우, 박미애 옮김 / 한길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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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나 아렌트를 처음 소개한 사람은 철학자 강신주이다. 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을 소개하면서 아렌트의 철학을 들려주었을때, 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담'을 읽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나의 인생책이 되었다. 생각하고 항상 주인으로 살아야한다는 진리를 깨닫게해준 책이다. 그리고 그녀의 대표작을 읽고 싶었다. '전체주의의 기원'은 아렌트 철학의 바탕이 되는 책이다. 더욱이 '전체주의'는 역사를 전공한 나에게 친근한 주제가 아니던가! 쉽게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었던 것 처럼 이 책도 쉽게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착각이다. '전체주의의 기원' 1권을 간신히 읽었다. 한나 아렌트의 책을 읽는 것은 그녀의 깊은 사유를 흡수하는 고된 작업이다. 아렌트의 탁월한 통찰력에 감탄하면서도 그녀의 사상을 이해하는 것이 이렇게 힘들다는 사실에 한숨을 쉬기도 했다. 

 '전체주의의 기원' 1권을 읽는 것이 어려운 또다른 이유는 불친절한 번역 때문이다. 


  "이 새로운 경향이 반유대주의에서 직접 탄생한 곳은 독일 밖에 없다."-137쪽 


   이 문장은 비문이다. 무엇을 말하려고 이렇게 번역했는지 알 수 없다. '반유대주주의라는 새로운 경향이 직접 탄생한 곳은 독일 밖에 없다.'라고 의역해야하지 않을까? 번역자가 독자를 배려하는 사람이라면 직역보다는 적절한 의역을 해주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번역자는 독자에 대해서 친절한 해설을 제대로 해주지도 않았다. 430쪽에 등장하는 "독일의 슈퇴커운동"이라는 단어는 인터넷을 찾아봐도 정보가 없다. 이러한 어려운 단어를 친절히 독자를 위해서 친절히 해설을 해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번역자가 단어의 뜻을 모른다면 전공자에게 문의하여 해설을 달아주는 친전함을 보여주었어야했다. 제발 2권에서는 친절한 모습을 보이길 바란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전체주의의 기원' 1권을 통해서 새로운 사실과 깨달음을 얻었다. 첫째, 드레퓌스 사건에 대해서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새롭게 알았다. 중학교 1학년 겨울 방학 때, 유시민 작가의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통해서 드레퓌스 사건을 알았다.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지식은 한동안 그 시절 읽었던 내용을 벗어나지 않았다. 드레퓌스에 대한 정보나 그 시절 유대인들의 동향에 대한 서술이 없었기에 이에 대해서는 나의 상상으로 메꾸었다. 그런데, 드레퓌스 가족은 반유대주의를 채택함으로써 프랑스 사회에 동화하려 했던 부류에 해당하며, 당시 프랑스의 로스차일드가로 대표되는 유대인들은 드레퓌스 사건으로 프랑스가 떠들썩하던 그시기에 단결하지도 연대하지도,못했으며, 심지어는 적극적으로 프랑스 사회에 동화하려는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단결을 잘하며 4차에 걸친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도 유대인의 단결 때문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이러한 단결력을 보인것은 근현대 시기에 반유대주의에 의해서 단련되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거꾸로 생각하자면 그들이 단결하지 못했기에 나라가 멸망하고서 2천년 동안 나라를 세우지 못했다고 볼 수도 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드레퓌스가  사면을 받아들이고 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것도 이해할 수 있다. 현재의 선이견을 가지고 과거를 유추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실감했다. 

  드레퓌스 사건이 프랑스와 유대인에게 의미없는 사건은 아니다. 한나 아렌트는 반유대주의가 프랑스에서 결코 대량학살로 끝나지 않은 것은 '시인이나 소설가의 예리하고 열정적인 힘에 의해 기록'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양심있는 지식인이 반유대주의에 대응했기에 프랑스는 유대인과 인류에게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사회는 용기있게 자신의 소신을 말하고, 불의에 대응하는 지식인이 있는가? 그리고 나는 그러한 지식인이 되려 노력하고 있는지 반문해 본다. 

  둘째, 유대인에 대한 음모론은 끝나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류이 페르디낭 셀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843년 이후 유럽에서 일어난 모든 전쟁의 원인이었으며,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상호 적대감을 선동함으로써 양국의 파멸을 기도했다고 주장했다."


  '화폐전쟁'이라는 유명한 책이 있다. 책의 내용은 금본위제도를 무너뜨리고 미국 경제를 마음대로 주무르기 위해서 유대인들이 활동하고 있고 그 영향력은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유대인이 세계의 금융과 경제를 주무르며 정부를 뒤에서 움직이는 그림자정부라는 주장은 무척이나 흥미롭다. 많은 전문가들이 이책의 오류를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화폐전쟁'이라는 책은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런데, '화폐전쟁'에 나오는 음모론이 일찍이 몇백년 전에도 있었던 음모론이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유대인에 얽힌 음모론은 사라지지 않고 아직까지 많은 사람의 입을 오르내리고 있는 것일까? 과거에는 금융을 지배하는 유대인에 대한 부러움과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도 음모론이 사라지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 아마도 유대인의 힘이 너무도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의 금융과 언론, 예술계를 장악한 것이 유대인이다. 유대인의 로비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미국의 대 중동 정책의 핵심은 친이스라엘 정책이다. 그러니, 초강대국 미국을 움직이는 유대인의 힘이 얼마나 두렵겠는가!

  셋째, 우리 사회를 반추해보았다.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 1 곳곳에서 우리 사회를 되돌아보게하였다. 


  "신으로 하여금 단 하나의 민족, 즉 자신의 민족을 선택하게 만들었던 종교의 왜곡이 종족 민족주의이기 때문이다."-450쪽


  한나 아렌트는 유대교의 종족 민족주의를 직시하고 있다. 종족 민족주의는 범게르만주의와 범슬라브주의에서도 나타난다. 자신의 민족을 선택받은 민족으로, 우월한 민족으로 보고 싶은 욕망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상상력과 희망이 만들어낸 신기루일 뿐이다. 우리는 아프리카에서 탄생한 호모사피엔스의 후손이다. 신이 호모 사피엔스 중에서 특정 부류만 특별히 이뻐할 것이라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주장이다. 마찬가지이다. '환단고기'를 비롯한 각종 위서에서 우리민족을 대단한 민족으로 서술하고 있다. 위서는 있을 수 있으나, 그 위서를 맹신한다면 우리는 독일의 나치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테러를 안전하게 자행할 수 있으려면 이데올로기는 반드시 다수를, 심지어 대다수를 지지자로 확보해야만한다."-89쪽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 지위를 잃은 모든 계급은 결국 자신의 폭민조직을 통합하고 확립한다."-214쪽


  강자에게는 강하고 약자에게는 약한 법꾸라지들이 있다. 그리고 그 법꾸라지가 권력을 잡고 수호하기 위해서 언론을 활용해서 사실을 호도하는 보도를 쏟아내고 있다. 조국교수 가족에게는 매섭게 조그만 티끌도 침소봉대하더니, 법꾸라지들의 죄에 대해서는 눈감아버린다. 그리고 이들의 호위부대가 있다. 태극기를 들고 저돌적으로 상대방에게 폭언을 알삼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나이어 사회적 지위를 잃은 노인들을 통합하여 자신의 전위부대로 만들었다. 한나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 1 에서 묘사하고 있는 유럽의 상황은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나 아렌트는 매력적인 정치철학자이다. 그녀의 통찰력에 감탄을 하며 그녀를 알고자 그녀의 저서를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은 그녀와 데이트하기에는 그녀에 대한 이해가 너무 적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체주의의 기원 2'는 이번 겨울 방학때 읽어야겠다. 그 전에, 한나 아렌트의 정치 철학에 대한 대중서적들을 읽으며 그녀의 사상에 대한 배경지식을 쌓아야겠다. 이번 겨울에는 '전체주의의 기원 2'를 읽으며 그녀와 멋진 데이트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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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3-03-05 16: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원래 책 자체도 어려운데 거기다 번역문제까지 있으면 진짜 읽으면서 난감해지는 순간이 한두번이 아니죠. 특히나 이런 철학서들은 더 한듯요. 그래서 번역 자체가 하나의 창작이며 연구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강나루 2023-03-05 17:01   좋아요 1 | URL
맞아요. ‘번역은 반역이다.‘, ‘번역은 제2의 창작이다.‘라는 말이 실감나네요^^

yamoo 2023-03-31 11: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박미애의 번역은 그냥 걸르는 게 답입니다. 명저를 망치는데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죠. 김웅권과 함께요..

그나저나...첫 문장..한나 아렌트를 처음 소개한 사람은 철학자 강신주이다.

강신주는 90년대 중반 이후부터 활동하기 시작하고, 대중 철학서를 써서 인기를 얻은 것은 2000년대 훌쩍 지난 이후인데요..아렌트를 처음 소개한 사람들은 많습니다. 아마도 아렌트 저서가 처음 번역된 때(제가 아는 선에서)는 1983년 문지 현대의지성 시리즈 중 15권째로 나온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이라 생각합니다. 더 위로 소급할 수도 있는데요, 우리나라에서 한나 아렌트를 처음 소개한 사람은 많은데 제가 아는 사람 중 한 명은 권영빈이지 않을까 합니다~

강나루 2023-04-03 20:01   좋아요 1 | URL
개인적으로 한나 아렌트를 알게 된 것이 강신주를 통해서 입니다.^^

차트랑 2023-05-12 1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무척 매력을 느끼고 있는 분이 바로 한나 아렌트입니다.
그분과 데이트하시고 난 후의 소감을 기대해도 될까요?
(한나 아렌트께서 바빠지시겠군요^^)

그리고
이런 말씀 어떠실지 모르겠지만 강나루님은 글을 참 잘쓰시네요.
더불어 독서력이 함께 전해옵니다.
잘읽었습니다 강나루님.

강나루 2023-05-12 16:42   좋아요 0 | URL
차트랑님 감사합니다.
한나 아렌트와 데이트를 위해서 독서력을 키우는 중입니다.
여름에는 그녀의 전기를 읽어야겠어요.
 
전체주의의 기원 1 한길그레이트북스 83
한나 아렌트 지음, 이진우, 박미애 옮김 / 한길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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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대주의 역시 유대인들이 공적 기능과 영향력을 잃고 재산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을 때 절정에 달했다. - P85

테러를 안전하게 자행할 수 있으려면 이 이데올로기는 반드시 다수를, 심지어 대다수를 지지자로 확보해야만 한다. - P89

차별은 집단이 시민적, 정치적, 경제적 평등의 영역 바깥에 속하는 존재임을 알게 하는일종의 보편 법칙이다. - P163

 만약 그대로 내버려두었다면 단순한 정치적 반유대주의가 걸어갔을 진로, 즉 반유대인법령이나 대중의 폭발로 귀결되었을 뿐 결코 대량학살로 끝나지 않았을 그런 진로를 바꾼 것은 바로 이런 사회적 요소였다. - P213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 지위를 잃은 모든 계급은 결국 그들 자신의 폭민 조직을 통합하고 확립한다.  - P214

신으로 하여금 단 하나의 민족, 즉 자신의 민족을 선택하게만들었던 종교의 왜곡이 종족 민족주의이기 때문이다. - P450

지도자 없는 대중은 한갓 무리에 지나지 않으며, 대중이 없다면 지도자는 아무런 존재도 아니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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