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주의의 기원 1 한길그레이트북스 83
한나 아렌트 지음, 이진우, 박미애 옮김 / 한길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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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나 아렌트를 처음 소개한 사람은 철학자 강신주이다. 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을 소개하면서 아렌트의 철학을 들려주었을때, 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담'을 읽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나의 인생책이 되었다. 생각하고 항상 주인으로 살아야한다는 진리를 깨닫게해준 책이다. 그리고 그녀의 대표작을 읽고 싶었다. '전체주의의 기원'은 아렌트 철학의 바탕이 되는 책이다. 더욱이 '전체주의'는 역사를 전공한 나에게 친근한 주제가 아니던가! 쉽게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었던 것 처럼 이 책도 쉽게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착각이다. '전체주의의 기원' 1권을 간신히 읽었다. 한나 아렌트의 책을 읽는 것은 그녀의 깊은 사유를 흡수하는 고된 작업이다. 아렌트의 탁월한 통찰력에 감탄하면서도 그녀의 사상을 이해하는 것이 이렇게 힘들다는 사실에 한숨을 쉬기도 했다. 

 '전체주의의 기원' 1권을 읽는 것이 어려운 또다른 이유는 불친절한 번역 때문이다. 


  "이 새로운 경향이 반유대주의에서 직접 탄생한 곳은 독일 밖에 없다."-137쪽 


   이 문장은 비문이다. 무엇을 말하려고 이렇게 번역했는지 알 수 없다. '반유대주주의라는 새로운 경향이 직접 탄생한 곳은 독일 밖에 없다.'라고 의역해야하지 않을까? 번역자가 독자를 배려하는 사람이라면 직역보다는 적절한 의역을 해주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번역자는 독자에 대해서 친절한 해설을 제대로 해주지도 않았다. 430쪽에 등장하는 "독일의 슈퇴커운동"이라는 단어는 인터넷을 찾아봐도 정보가 없다. 이러한 어려운 단어를 친절히 독자를 위해서 친절히 해설을 해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번역자가 단어의 뜻을 모른다면 전공자에게 문의하여 해설을 달아주는 친전함을 보여주었어야했다. 제발 2권에서는 친절한 모습을 보이길 바란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전체주의의 기원' 1권을 통해서 새로운 사실과 깨달음을 얻었다. 첫째, 드레퓌스 사건에 대해서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새롭게 알았다. 중학교 1학년 겨울 방학 때, 유시민 작가의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통해서 드레퓌스 사건을 알았다.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지식은 한동안 그 시절 읽었던 내용을 벗어나지 않았다. 드레퓌스에 대한 정보나 그 시절 유대인들의 동향에 대한 서술이 없었기에 이에 대해서는 나의 상상으로 메꾸었다. 그런데, 드레퓌스 가족은 반유대주의를 채택함으로써 프랑스 사회에 동화하려 했던 부류에 해당하며, 당시 프랑스의 로스차일드가로 대표되는 유대인들은 드레퓌스 사건으로 프랑스가 떠들썩하던 그시기에 단결하지도 연대하지도,못했으며, 심지어는 적극적으로 프랑스 사회에 동화하려는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단결을 잘하며 4차에 걸친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도 유대인의 단결 때문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이러한 단결력을 보인것은 근현대 시기에 반유대주의에 의해서 단련되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거꾸로 생각하자면 그들이 단결하지 못했기에 나라가 멸망하고서 2천년 동안 나라를 세우지 못했다고 볼 수도 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드레퓌스가  사면을 받아들이고 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것도 이해할 수 있다. 현재의 선이견을 가지고 과거를 유추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실감했다. 

  드레퓌스 사건이 프랑스와 유대인에게 의미없는 사건은 아니다. 한나 아렌트는 반유대주의가 프랑스에서 결코 대량학살로 끝나지 않은 것은 '시인이나 소설가의 예리하고 열정적인 힘에 의해 기록'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양심있는 지식인이 반유대주의에 대응했기에 프랑스는 유대인과 인류에게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사회는 용기있게 자신의 소신을 말하고, 불의에 대응하는 지식인이 있는가? 그리고 나는 그러한 지식인이 되려 노력하고 있는지 반문해 본다. 

  둘째, 유대인에 대한 음모론은 끝나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류이 페르디낭 셀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843년 이후 유럽에서 일어난 모든 전쟁의 원인이었으며,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상호 적대감을 선동함으로써 양국의 파멸을 기도했다고 주장했다."


  '화폐전쟁'이라는 유명한 책이 있다. 책의 내용은 금본위제도를 무너뜨리고 미국 경제를 마음대로 주무르기 위해서 유대인들이 활동하고 있고 그 영향력은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유대인이 세계의 금융과 경제를 주무르며 정부를 뒤에서 움직이는 그림자정부라는 주장은 무척이나 흥미롭다. 많은 전문가들이 이책의 오류를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화폐전쟁'이라는 책은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런데, '화폐전쟁'에 나오는 음모론이 일찍이 몇백년 전에도 있었던 음모론이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유대인에 얽힌 음모론은 사라지지 않고 아직까지 많은 사람의 입을 오르내리고 있는 것일까? 과거에는 금융을 지배하는 유대인에 대한 부러움과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도 음모론이 사라지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 아마도 유대인의 힘이 너무도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의 금융과 언론, 예술계를 장악한 것이 유대인이다. 유대인의 로비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미국의 대 중동 정책의 핵심은 친이스라엘 정책이다. 그러니, 초강대국 미국을 움직이는 유대인의 힘이 얼마나 두렵겠는가!

  셋째, 우리 사회를 반추해보았다.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 1 곳곳에서 우리 사회를 되돌아보게하였다. 


  "신으로 하여금 단 하나의 민족, 즉 자신의 민족을 선택하게 만들었던 종교의 왜곡이 종족 민족주의이기 때문이다."-450쪽


  한나 아렌트는 유대교의 종족 민족주의를 직시하고 있다. 종족 민족주의는 범게르만주의와 범슬라브주의에서도 나타난다. 자신의 민족을 선택받은 민족으로, 우월한 민족으로 보고 싶은 욕망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상상력과 희망이 만들어낸 신기루일 뿐이다. 우리는 아프리카에서 탄생한 호모사피엔스의 후손이다. 신이 호모 사피엔스 중에서 특정 부류만 특별히 이뻐할 것이라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주장이다. 마찬가지이다. '환단고기'를 비롯한 각종 위서에서 우리민족을 대단한 민족으로 서술하고 있다. 위서는 있을 수 있으나, 그 위서를 맹신한다면 우리는 독일의 나치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테러를 안전하게 자행할 수 있으려면 이데올로기는 반드시 다수를, 심지어 대다수를 지지자로 확보해야만한다."-89쪽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 지위를 잃은 모든 계급은 결국 자신의 폭민조직을 통합하고 확립한다."-214쪽


  강자에게는 강하고 약자에게는 약한 법꾸라지들이 있다. 그리고 그 법꾸라지가 권력을 잡고 수호하기 위해서 언론을 활용해서 사실을 호도하는 보도를 쏟아내고 있다. 조국교수 가족에게는 매섭게 조그만 티끌도 침소봉대하더니, 법꾸라지들의 죄에 대해서는 눈감아버린다. 그리고 이들의 호위부대가 있다. 태극기를 들고 저돌적으로 상대방에게 폭언을 알삼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나이어 사회적 지위를 잃은 노인들을 통합하여 자신의 전위부대로 만들었다. 한나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 1 에서 묘사하고 있는 유럽의 상황은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나 아렌트는 매력적인 정치철학자이다. 그녀의 통찰력에 감탄을 하며 그녀를 알고자 그녀의 저서를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은 그녀와 데이트하기에는 그녀에 대한 이해가 너무 적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체주의의 기원 2'는 이번 겨울 방학때 읽어야겠다. 그 전에, 한나 아렌트의 정치 철학에 대한 대중서적들을 읽으며 그녀의 사상에 대한 배경지식을 쌓아야겠다. 이번 겨울에는 '전체주의의 기원 2'를 읽으며 그녀와 멋진 데이트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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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3-03-05 16: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원래 책 자체도 어려운데 거기다 번역문제까지 있으면 진짜 읽으면서 난감해지는 순간이 한두번이 아니죠. 특히나 이런 철학서들은 더 한듯요. 그래서 번역 자체가 하나의 창작이며 연구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강나루 2023-03-05 17:01   좋아요 1 | URL
맞아요. ‘번역은 반역이다.‘, ‘번역은 제2의 창작이다.‘라는 말이 실감나네요^^

yamoo 2023-03-31 11: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박미애의 번역은 그냥 걸르는 게 답입니다. 명저를 망치는데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죠. 김웅권과 함께요..

그나저나...첫 문장..한나 아렌트를 처음 소개한 사람은 철학자 강신주이다.

강신주는 90년대 중반 이후부터 활동하기 시작하고, 대중 철학서를 써서 인기를 얻은 것은 2000년대 훌쩍 지난 이후인데요..아렌트를 처음 소개한 사람들은 많습니다. 아마도 아렌트 저서가 처음 번역된 때(제가 아는 선에서)는 1983년 문지 현대의지성 시리즈 중 15권째로 나온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이라 생각합니다. 더 위로 소급할 수도 있는데요, 우리나라에서 한나 아렌트를 처음 소개한 사람은 많은데 제가 아는 사람 중 한 명은 권영빈이지 않을까 합니다~

강나루 2023-04-03 20:01   좋아요 1 | URL
개인적으로 한나 아렌트를 알게 된 것이 강신주를 통해서 입니다.^^

차트랑 2023-05-12 1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무척 매력을 느끼고 있는 분이 바로 한나 아렌트입니다.
그분과 데이트하시고 난 후의 소감을 기대해도 될까요?
(한나 아렌트께서 바빠지시겠군요^^)

그리고
이런 말씀 어떠실지 모르겠지만 강나루님은 글을 참 잘쓰시네요.
더불어 독서력이 함께 전해옵니다.
잘읽었습니다 강나루님.

강나루 2023-05-12 16:42   좋아요 0 | URL
차트랑님 감사합니다.
한나 아렌트와 데이트를 위해서 독서력을 키우는 중입니다.
여름에는 그녀의 전기를 읽어야겠어요.
 
전체주의의 기원 1 한길그레이트북스 83
한나 아렌트 지음, 이진우, 박미애 옮김 / 한길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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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대주의 역시 유대인들이 공적 기능과 영향력을 잃고 재산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을 때 절정에 달했다. - P85

테러를 안전하게 자행할 수 있으려면 이 이데올로기는 반드시 다수를, 심지어 대다수를 지지자로 확보해야만 한다. - P89

차별은 집단이 시민적, 정치적, 경제적 평등의 영역 바깥에 속하는 존재임을 알게 하는일종의 보편 법칙이다. - P163

 만약 그대로 내버려두었다면 단순한 정치적 반유대주의가 걸어갔을 진로, 즉 반유대인법령이나 대중의 폭발로 귀결되었을 뿐 결코 대량학살로 끝나지 않았을 그런 진로를 바꾼 것은 바로 이런 사회적 요소였다. - P213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 지위를 잃은 모든 계급은 결국 그들 자신의 폭민 조직을 통합하고 확립한다.  - P214

신으로 하여금 단 하나의 민족, 즉 자신의 민족을 선택하게만들었던 종교의 왜곡이 종족 민족주의이기 때문이다. - P450

지도자 없는 대중은 한갓 무리에 지나지 않으며, 대중이 없다면 지도자는 아무런 존재도 아니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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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 사랑과 자유를 찾아가는 유쾌한 사유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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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신주라는 철학자는 다양한 방면에 자신의 철학적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철학이라는 무기를 이용해서 영화와 문학을 자유자재로 분석했다. 그리고 시도 해체한다. 보통의 철학자들이 한명의 철학자의 사상에 빠져서 자신의 온 역량을 소비하는데 비해서, 강신주는 동서양을 넘나들며 철학적 사유를 한다. 그리고 그 철학적 사유는 시와 영화, 소설 작품을 분석하고 해체하는 도구로 사용한다. 그의 철학적 놀이에 독자는 빠져들 수밖에 없다. 꾀 오래된 책이지만, 읽고 싶었으나 서가에 꼽아 놓고 읽지 않았던 책을 꺼내들었다. '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이라는 책이다. 


  사실 현대의 많은 시들이 읽기는 쉬우나 이해하기는 어렵다. 시를 읽으면 처음에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강신주가 소개하는 철학자들의 철학적 사유를 이해하고 시를 읽으면 시가 이해된다. 놀라운 경험이다. 시인은 이러한 철학을 몸으로 채득하고 본능적으로 시를 쓰는 것일까? 아니면, 철학적 사유 없이 글을 썼는데, 강신주가 적당한 철학을 가져다 붙여준 것일까? 강신주가 소개한 어느 독자의 글 을 읽으며 무릎을 탁! 쳤다.


 "시인은 그것이 무슨 씨인지도 모른 채 씨를 뿌리고 지나갑니다. 시간이 흘러 그 씨앗들이 다양한 꽃을 피우겠지요. 그러면 철학자가 뒤따라가면서 시인이 뿌린 씨가 어떤 꽃의 씨인지를 하나하나 알려줍니다."(22쪽)


 시가 시인의 손을 떠난 이상, 시는 시인의 것이 아니다. 그 시를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자의 것이다. 우리는 강신주의 도움을 받아서 시인의 손에서 시를 뺏앗아 올 수 있었다. 

  많은 시를 강신주의 철학적 분석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중에서 만해 한용운 시인이 그토록 불렀던 '님'은 누구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에 색다른 결론이 무척 흥미로웠다. 중학교 1학년 국어시간에 '님'은 조국일 수도있으며, 부처일수도 있고, 사랑하는 님일 수도 있다고 배웠다. 그러나, 독립운동가 한용운을 강렬하게 기억했기에 그의 '님'은 조국이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강신주는 '서여연화'라는 여인이라고 단정한다. 어려서 결혼하고 55ㅔ에 유씨 또다시 결혼한 만해 한용운이 서여연화라는 여인을 또 사랑했다니... 정말 충격적이다. 쉽게 그의 님이 '조국'일 것이라 단정한 것은 역사를 사랑하는 나의 바램이었던 것일까? 인간 한용운에 대한 고민 없이 너무도 쉽게 내가 믿고 싶은 한용운을 상상하며 '님'은 조국이어야 한다고 단정한 것이다. 

  강신주의 철학 강의에서 빠지지 않는 화두는 '사랑'이다. 대중 강연에서 강신주는 사랑을 강조했다. 이 책에서도 사랑에 대해서 한마디를 던졌다. 


  "사랑은 히드테리와 강박증 사이에서 미묘한 균형을 잡을 때에만 가능한 겁니다."-41쪽


  타자의 욕망과 자신의 욕망의 균형을 추구해야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리이타의 경지와 비슷한 것이 건전한 사랑의 경지가 아닐까? 나의 욕망만을 추구하면 이는 스토킹 범죄가 되고, 타자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데만 골몰한다면 이는 가스라이팅이 될 것이다. 참된 사랑은 이렇게 힘들다. 결혼을 한 부부 사이라할지라도 때로는 나만의 욕망을 추구하며 상대방에게 불만을 품을 때가 있다. 지나고보면 나의 옹졸한 생각임을 깨닫지만, 그때는 그 욕망에 매몰되어 진정한 사랑을 보지 못한다. 


  "남자가 모여서 지배를 낳고

 지배가 모여서 전쟁을 낳고 전쟁이 모여서 억압세상 낳았지


 여자가 뭉치면 무엇이 되나?

  여자가 뭉치면 사랑을 낳는다네" -89쪽


고정희 시인의 시 '여자가 뭉치면 새 세상 된다네'라는 시는 사랑의 관점에서 본다면 낙제점이다. 진정한 사랑은 강신주가 말했듯이 자신의 욕망과 타자의 욕망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를 보듬어야한다. 그런데, 고정희 시인의 시에는 여성적인 것은 우월하고 남성적인 것은 열등하다는 이분법적 사고가 녹아있다. 여성이 남성의 이데올로기를 극복 못하고 폭력적인 모습을 띄는 경우가 있다. 남성의 것은 폭력적이기에 열등하고 여성은 사랑을 낳기에 우월하다는 생각도 또다른 폭력적 모습이다. 서로의 다름을 우월함과 열등함으로 치환해버린다면 남성과 여성의 대립은 더욱 심해질 것이다. 남성과 여성의 특성을 조화시켜 하나될 수 있는 사랑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 남성의 욕망과 여성의 욕망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는 첩경이 아닐까?


  시가 어려워 평론가나 철학자의 도움을 받아야 시를 이해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물론, 시적 감수성을 키우지 못한 나의 게으름도 시를 어렵게 느끼는데 한몫했다. 철학자 강신주의 '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은 난해한 시를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징검다리가 되어준다. 체력이 많이 약해진 강신주가 체력을 회복하여 많은 저서를 남겨주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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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12-15 11:3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2022년 알라딘 서재의 달인 추카합니다
여기로 가셔서
https://blog.aladin.co.kr/zigi/14178206
주소 입력하시고
알라딘이 보내주는 선물 꼬옥 받으세요

강나루 2022-12-19 01:50   좋아요 1 | URL
scott님, 감사합니다.
scott님, 연말 행복하게 보내시고, 새해에 복많이 받으세요.

서니데이 2022-12-15 17: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알라딘 서재의 달인과 북플마니아 축하합니다.
행복한 연말 보내시고, 새해에도 좋은 일들 가득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따뜻하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강나루 2022-12-19 01:50   좋아요 2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도 새해에는 행복한 일만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마흔에 읽는 니체 - 지금 이 순간을 살기 위한 철학 수업 마흔에 읽는 서양 고전
장재형 지음 / 유노북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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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고, 가벼운 마음으로 오디오북을 열고 읽기 시작했다. 역시나 니체의 글은 쉽게 쓰여져 있다고 해서 쉽게 지나칠 수 없는 글이다. 니체를 전공하지 않은 장재형 작가의 글이다보니 아무래도 쉬울 것이며, 쉽게 지나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나의 오만이었다. 많은 생각꺼리를 던져주기에 오디오 북으로 읽기에도 한계가 있었다. 집안일을 하면서 오디오북을 듣다보니, 중간에 메모를 하기도 힘들었다. 할 수 없이 오디오 북을 다 읽고 나서, 머릿속에 남는 한가지를 가지고 글을 쓰기로 했다. 

  '죽음을 맞이하는 법을 배워라'라는 주제가 나의 머릿속을 맴돈다. 인생 초반기에는 살아기기 위해서, 도전하기 위해서 새로운 것을 찾았다. 그리고 어떻게 삶을 이루어갈지를 고민했다. 이제 인생의 반환점이 보이는 시기가 되자, 반환점을 돌고난 이후의 인생에 대해서 생각을 한다. 어떻게 나이들어갈지, 어떻게 죽음을 바라보아야할지를 고민한다. 

  니체는 어떻게 잘 죽을지를 고민하라는 화두를 던져주었다. 세상에 잘 태어났고, 잘 살았다면, 이제는 잘 죽을 것을 고민해야한다. 잘 죽기 위해서는 인생의 황혼기에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고민하고, 어떻게 건강을 관리할지도 고민해야한다.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TV프로가 남성들 사이에서 인끼를 얻는 이유도 이와 관련있을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자연에서, 자유를 누리면서, 건강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니체가 말한 잘 죽을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인생의 반환점을 돌고, 어떻게 인생 후반전을 살아가야할까? TV에 나오는 자연인들 처럼 시골에 내려가서 새로운 삶을 살아갈까? 사회에 봉사하면서 의미있는 삶을 살아갈까? 도서관을 오가면서 읽고 싶은 책을 읽으며 여생을 살아갈까?

  마흔을 지나서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 '마흔에 읽는 니체'는 새로운 화두를 던져주었다.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는 화두를 머릿속에 담아두며 새로운 내일을 맞이한다. 그 화두를 풀기 위해서는 더 많은 고민과 더 많은 독서가 필요하다. 그 길을 걸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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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2-11-27 14: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제가 오래 사용했던 배경 화면이라 반가워요. 이 배경 참 좋아요.
니체의 글을 좋아하는 1인입니당~~

강나루 2022-11-27 15:44   좋아요 1 | URL
저도 니체철학을 좋아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모든 사람을 위한, 그리고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이진우 옮김 / 휴머니스트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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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로보로스(Ouroboros)! 책 표지에 자신의 꼬리를 삼키는 우로보르스가 등장한다. 시작이 끝이요. 끝이 곧 시작을 의미하며, 무한한 순환과 윤회의 상징인 우로보로스가 책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 우로보로스는 스스로 자신을 만들어 내고 자신과 결혼하며 혼자 임신하고 스스로를 죽인다!!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을 뜻하기도하며 하나의 몰락이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다는 의미를 우리에게 전달해 준다. 니체가 몰락시키고 싶었던 핵심은 무엇일까? 신의 피조물인 인간이 신을 부정하고 신을 죽이는 것은 우로보로스가 자신의 꼬리를 먹어 치우는 것과 같지 않을까? 니체는 신의 노예에서 인간을 해방시키고 싶었다. 너무도 읽기 힘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에 니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1. 크리스트교의 신을 죽이다!!

서양에서 신은 보통 크리스트교의 신을 의미한다. 영어에서 'God'는 하느님을 뜻하고, 'god'는 잡신을 뜻한다. 니체가 말하는 신은 잡신이라기 보다는 크리스트교의 하느님을 뜻한다. 그리고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줄기차게 크리스트교의 하느님을 비판한다.

 

, 형제들이여, 내가 창조한 이 신들은 모든 신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작품이자 망상이었다! ... 고통과 무능, 이것이 모든 저편의 세계를 만들어 냈다.-54

"신들은 존재하지만, 하나의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신성함이 아닌가?" 귀있는자는 들을지어다.-330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어 니체가 한 말은 참으로 충격적이다. 크리스트교의 하느님이 '인간의 작품이자 망상'이라는 주장! 그리고 고통과 무능이 지옥과 천국을 만들어냈다는 주장은 크리스트교가 가지는 종교적 근거를 송두리채 무너뜨린다. 더욱이 시장에서 줄타기하다가 사고를 당해서 죽어가는 광대에게 차라투스크라는 '악마도 지옥도 없네'라며 헛된 종교적 망상을 부정하는 말을 내뱉었다. 종교를 비판하는 자들은 '종교가 불안 장사를 한다.'고 비판한다. 니체는 종교인들이 저지르는 불안장사를 비판하며 신을 죽이고 있다. 백번 양보해서 인간이 만든 신이 존재한다하더라도 하나의 유일신만 존재한다는 크리스트교의 주장은 성립할 수 없다고 성경 문구를 페러디하여 일갈한다. 크리스트교의 핵심인 유일신 사상을 니체는 무너뜨리고 있다! "변절자들에 대하여"라는 글에서는 십계명의 '나 이외의 신을 섬기지 마라!'라는 조항을 비판한다. 신이 자기의 아이를 돌보지 않았다고 비판하며 심지어 '그에게 아이가 있기나 한가'라는 의문을 제시하며 신을 비꼬고 있다. 니체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비판의 칼날을 들이댄다.

 

참으로 천천히 죽을 것을 설교하는자들이 존경하는 저 히브리사람은 너무 일찍 죽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그의 때 이른 죽음은 많은 사람에게 재앙이 되었다. 그가 이 히브리인 예수가 알고 있었던 것은 선하고 의로운자들의 증오와 함께 히브리사람들의 눈물과 비애뿐이었다.-136

그는 너무 일찍죽었다. 내 나이 만큼만 살았더라면 그는 자신의 가르침을 철회했을 것이다! 그는 철회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고귀한 자였다! 그러나 그는 아직 성숙하지 못했다.-137

인간이 존재한 이래 인간은 너무도 즐기지 못했다. 나의 형제들이여, 이것만이 우리의 원죄다! -162

 

크리스트교가 유대교와 다른 것은 예수의 죽음과 그의 부활이다. 창세기에 시작된 아담과 이브의 원죄를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으로써 씼었다는 크리스트교의 원죄론은 감히 그 누구도 함부로 부정할 수 없는 금기이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어 니체는 크리스트교의 원죄론과 예수의 부활을 철저히 부정한다. '히브리인 예수가 알고 있었던 것은' 그의 때 이른 죽음'과 함께 '증오'의 불길을 만든다. 결국 십자군에서 부터 시작하여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라는 만행의 근본 뿌리가 '예수를 죽인 유대인'이라는 낙인이었다. '히브리사람들의 눈물과 비애'가 인류의 역사 속에 깊게 상처로 남아 있을 수 밖에 없는 현실을 니체는 강하게 지적하고 있다. 더욱이 니체는 젊은 예수와 성숙한 예수를 분리하여 예수가 내 나이만큼만 살았더라면 예수의 가르침을 예수가 스스로 철회할 것이라는 파격적 주장을 했다. 아울러, 인간의 원죄를 들먹이며 금욕을 강조하는 크리스찬들에게 니체는 '너무 즐기지 못했다.'는 것이 우리의 원죄라고 일갈한다! 크리스찬들 중에서 니체의 서적들을 금서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니체의 파격적인 주장을 살펴보면 그들의 생각이 일면 이해되기도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의 사상이 많은 사상가들과 일반인들에 의해서 연구되고 그의 책을 탐독하고 있다는 사실은 엄청난 힘을 가진 크리스트교 세력에 대한 비판과 진실을 니체가 대신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신은 하나의 억측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나는 그대들의 억측이 그대들의 창조적 의지보다 멀리 나가지 않기를 바란다.-156

선하고 의로운자들을 조심하라! 그들은 자기 자신의 덕을 만들어 내는 자들을 즐겨 십자가에 매단다. 그들은 고독한 자를 증오한다. ... 성스러운 단순함도 조심하라! 그들에게 단순하지 않은 모든 것은 신성하지 않다. 그들은 불놀이를, 화형의 장작 더미를 좋아한다.-120

한때 의심은 악이었고 자아에 대한 의지도 악이었다. 그대 병든자도 악이었다. 그때 병든자는 이단자가 되었고, 마녀가 되었다.-71

그들은 자신이 가는 길에 핏자국을 남겨 놓았으며, 어리석게도 피로써 진리를 증명한다고 가르쳤다. -169

여기 성직자들이 있다. ... 그들은 사악한적들이다. 그들의 겸손보다 더 복수심에 불타는 것은 없다. ... 그들이 구세주라고 부르는 자가 그들을 굴레에 묶어 놓았다. 거짓 가치와 망상의 굴레다! , 누군가가 그들을 구원자에게서 구원해줄 것인가! -166~167

그대들에게 적이 있다면 그 악을 선으로 갚지는 마라. 그것은 적을 부끄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적이 그대들에게 선한 일을 했음을 보여주어라 -127

 

니체는 신을 부정하며 신을 죽였다. 중세 신중심의 암흑사회를 부정하고 근대 혹은 미래 사회의 창조적 인간! 초인을 예찬한다. 하나의 신을 창조할 수 없다면 모든 신에 대해서 침묵하라는 니체! 그러면서 그는 '하지만 그대들은 초인을 창조할 수 있다.'라며 우리를 격려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했던 시기 마을의 한 할머니가 '예수의 종이되어 선교활동하라!'며 나에게 교회에 다닐 것을 권유했던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유난히도 그 말이 싫었다. '자유인인 내가 어찌 노예가 될 수 있는가?'라는 생각을 하며 쓴 웃음을 지었다. 니체는 나와 같은 생각을 먼저했다. 신중심의 시대가 종말을 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의 노예로 사는 최후의 인간들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 항상 새로운 인간! 초인이 되어야한다.

신중심의 무지의 시대가 가고 이성이라는 등불이 대지를 환하게 비추는 현대 사회이기에 신을 부정하고도 살아 남을 수 있다. 만약 중세 서양 사회에서 내가 '신의 종이되라'는 말에 쓴 웃음을 지었다면 나는 '불놀이를, 화형의 장작 더미를' 좋아하는 크리스찬들에 의해서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자신의 신만이 의롭다고 말하는 자, 단순하게 맹목적으로 신을 따르라는 노예 근성을 심어주는 자들은 '성스러운 단순함'으로 세상을 아귀다툼이 벌어지는 지옥으로 만든다. 예수의 부활을 믿고 예수를 구세주라고 믿으며 크리스트교를 정립한자들이 이 망상의 굴레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크리스트교로부터 구원할 것을 니체는 주문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십자군 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희생했는가! 크리스트교의 배타성과 폭력성, 야만성을 비판하며 니체는 '어떤 사람이 자신의 가르침을 위해 물속에 뛰어든다해도 무엇을 증명할 수 있는가'라며 반문한다. 마녀사냥, 이단 화형, 종교박해에 맞선 순교 등, 이 모든 것을 부정하며 니체는 '내게 구역질을 일으킨다.'라고 일갈했다.

니체는 마태복음 5장에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 대어라'라는 구절을 더 탁월한 문구를 비판한다. 니체에게는 크리스찬들이 오른뺨을 맞고도 왼뺨을 들이대는 행동은 위선적인 행동이거나 무기력한 노예의 모습으로 보였을 것이다. 니체는 '전혀 복수하지 않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복수하는것이 더 인간적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적이 그대들에게 선한 일을 했음을 보여주'는 행동일 것이다.

니체의 아버지 카를 루트비히 니체는 목사이다. 더욱이 그의 어머니 프란치스카 윌러도 목사의 딸이다. 독실한 크리스찬 집안에서 크리스트교를 맹렬히 비판하는 니체가 만들어졌다. 니체가 진정으로 원한 것은 안티크리스찬일까? 그가 진정으로 원한 것은 무엇일까?

 

2. 크리스트교의 새로운 돌파구를 찾다.

니체는 자신의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제5복음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무슨 뜻일까? 분명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에는 '나는 이러한 약속의 땅을 찬양하지 않는다. 그곳에서는 모든 나무 중에서 가장 나쁜 나무, 곧 십자가가 자라났기 때문이다.'(365)라는 반기독교적인 내용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가득차 있다. '안티크리스트' 혹은 '적그리스도'라는 이름의 책까지 저술한 니체가 자신의 책을 크리스트교의 4복음서에 이은 제5복음서라고 말하는 자체가 모순으로 들릴 수 있다.

니체와 비슷한 가정환경에서 자라난 한국의 철학자가 있다. 바로 도올 김용옥이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났다. 그리고 이 시대 최고의 지성이자 철학자로 한국사회에 많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그런데, 그는 대중강연에서 한국의 기독교를 많이 비판한다. 그의 실날한 비판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눈쌀을 찌푸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나는 도올 김용옥의 삶과 그의 강의를 통해서 니체의 사상을 유추해 보았다.

도올 김용옥의 대중강연과 '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1,2,3'에는 크리스트교에 대한 도올의 생각이 잘 묻어 있다. 도올은 불교가 상좌부불교(소승불교)에서 모든 대중을 구제하는 대승불교로 발전하는 과정을 거친다고 말한다. 그런데, 불교의 위대성은 대승불교에서 신의 반열에 올린 부처를 스스로 부정하는 단계로 까지 발전한 것이라고 말한다. 불교가 중국땅에 이르자 선불교로 발전한다. 임제스님은 '살불살조(殺佛殺祖)' ,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단계로까지 발전한다. 부처의 종이 되는 종교가 아니라, 누구나 깨달은 자, 부처가 될 수 있는 종교가 바로 불교이다. 이것이 불교가 다른 종교와는 다른 불교의 위대성을 보여준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을 통해서 이루려한 최종 목표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나는 판단한다.

니체는 크리스트교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기 위해서 크리스트교의 뿌리를 살폈다. 니체가 주목한 크리스트교의 뿌리는 옹졸한 민족종교인 유대교가 아니라 유대교와 크리스트교를 비롯한 많은 종교에 영향을 준 조로아스터교이다. 조로아스터의 독일식 발음이 차라투스트라인점에 유의한다면, 니체가 차라투스트라의 목소리를 빌려 크리스찬들에게 크리스트교를 새롭게 선불교의 단계로 발전시켜야한다는 계시를 주려했다는 주장이 이해될 것이다.

차라투스트라가 산을 내려오면서 늙은 성자를 보며 "이 늙은 성자는 숲속에 살아서 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아직 듣지 못했구나!"라고 한탄한다. 성자는 신을 사랑하지만 시대는 변하여 중세 신중심의 낡은 시대에서 이성 중심의 근대가 되었다. 더 이상 인간은 신의 노예이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제 신의 노예가 아니라 주인으로 살아야한다. 진정한 깨달음을 얻으려면 속세를 떠나서 깨달음을 얻기 보다는 세속에 살면서 깨달음을 얻어야한다. 현실에 뿌리 내리지 못한 진리는 진정한 진리라할 수 없다. 니체는 늙은 성자 처럼 현실의 변화를 깨닫지 못하는 크리스찬들에게 신은 죽었다며 현실을 인정하라고 말한다.

절대신을 믿는 크리스찬들에게 '신은 죽었다.'라는 말은 크리스트교를 부정하는 말로 들릴 수있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곳곳에서 '~파멸해야하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많이 쓴다. '파멸', '몰락'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니체! 그러나 '파멸''몰락'을 니체는 부정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마치 동양 사상에서 하나의 끝은 새로운 시작의 출발이라는 관점을 떠올린다면 '파멸''몰락'을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인도 힌두교의 시바신이 세상을 파괴해야 브라흐만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듯이, 기존의 체계를 파괴해야만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 신의 노예로 살 것을 강요하는 크리스트교도들이 신은 죽었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이를 받아들일 때만이 크리스트교는 새롭게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선불교에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야만 자신이 부처요 조사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이치와 같다. 니체는 크리스트교가 소승불교에서 대승불교로 발전하는 과정을 거쳤다면, 이제는 선불교의 단계로 발전해야한다고 일갈하는듯하다. 많은 논쟁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부활을 믿고 예수를 신의 아들이라 믿는 크리스찬들이 선불교로까지 발전하기 위해서는 그 신을 죽여야한다는 것이다.

그럼, 신이 죽은 그자리에 누가 있어야할까? 신을 죽인 인간이 이제는 새로운 신을 그 자리에 앉혀야할까? 니체는 '초인'을 말하다. 내가 이해한 초인은, 자신을 새롭게 하려는 자, 자신을 거듭나게하는 자이다. 고사성어로 표현하면, 일일신 우일신(日日新 又日新)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신의 노예로 사는 존재가 아닌 스스로 새롭게 태어나려 끊임 없이 노력하는자! 그 사람이 '초인'이라면 이는 불교의 부처나 보살로 볼 수 있다. '그대들은 모든 구세주보다 더 위대한 자들에 의해 구원받아야한다.'(-170) 는 니체의 말은 구세주에 의탁해서 구원을 받기 보다는 스스로 더 나은 존재로 거듭나려는 초인이 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이는 불교에서 부처가 되라는 말과 같다.

 

고귀한자는 새로운 것과 새로운 덕을 창조하려한다. 반면에 선한자는 옛것을 원하며 옛것이 보존되기를 원한다.-79

 

고귀한자는 예수를 비롯해서 석가모니와 무하마드와 같은 분들이다. 그에 비해서 선한자는 중세 교황과 타락한 성직자들 처럼 고귀한자의 힘을 빌어 권력을 누리고 그 권력을 추종하는 자들이다. 니체가 한명의 진정한 크리스찬이 있었으나 그분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고 말했듯이, 진정한 크리스찬은 예수그리스도이다. 그러나 그 이후에 고귀한자의 힘을 빌려 권력을 누리려는 '선한자'들이 그의 이름으로 크리스트교를 타락시켰다. 니체는 인간 권력의 속성을 꿰뚫어보고 이를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말하고 있다. 진정한 크리스찬이 되려면 예수의 추종자가 되지 말고 예수처럼 삶을 살아가라는 절규이다.

니체의 사상은 불교와 너무도 유사한 점이 많다. 그의 말들과 논리들은 불교에서 힌트를 얻은 것은 아닌가? 의문이 든다. 그의 핵심 사상인 영원회귀 사상 또한 불교의 윤회와 비슷하다. 니체는 말한다. 만약 악령이 어느 날 당신에게 다가와서 네가 살고 있고 살아왔던 삶을 다시 살아야만 한다고 제안한다면 과연 당신을 이를 받아들일 것인가? 영원히 반복될 수 있는 삶이라는 문구에 윤회의 수레바퀴가 떠오른다. 물론, 니체의 영원회귀가 윤회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가설로 자신의 삶을 다시 살아도 좋을 만큼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이 순간을 행복하게 살라는 니체의 제안일 뿐이다. '프레임'을 쓴, 최인철 교수가 현재를 잘 살아가고 싶다면 지금 이 삶이 2번째로 주어진 삶이라고 생각하고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라고 제안했다. 니체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서 이 삶이 몇만년을 다시 반복해서 살아도 좋을 만큼 현재를 사랑하며 살아가라고 말하있다. 바로 아모르 파티(Amor Fati)를 말하고 있다 .

니체의 사상이 불교에서 많은 힌트 혹은 영감을 얻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고, 니체가 모든 불교를 긍정한 것은 아니다. 81쪽에 '죽음을 설교하는 자들'은 누구일까? 니체는 '노란 사람들'이라고 지적한다. 노란 사람들은 노란 가사를 입은 승려를 뜻한다. '병자나 노인이나 시체와 마주치면 그들은 즉시 '삶은 부정되었다.'라고 말한다.'라고 지적하며 자신이 죽음을 설교하는자들이라며 비판하는 사람들이 불교도들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육욕은 죄다.', '삶은 고통일 뿐이다.'라고 지적하며 불교에 대해서 비판하는 니체의 모습이 무척 낯설어 보인다. 그러나 진정한 크리스찬이 예수이듯이, 진정한 불교도는 부처일 수 밖에 없다. 기존 종교조직에 의탁해서 그 권위로 먹고 살려하며, 그 종교의 노예로 살려는 사람들을 니체는 비판한다. 진정한 주인으로서의 삶을 살려한다면 스스로 예수가 되려해야하며, 스스로 부처가 되려해야한다. 그러한 존재가 바로 '초인'인 것이다.

크리스트교도인들의 숫자가 시간이 지날 수록 줄어들고 있다. 이러한 위기는 예견된 것이다. 더 이상 신의 종이되기를 원하는 자가 줄어들고 있다. 스스로 초인이되려는 자가 늘어나는 현실 속에서 크리스트교가 다시 태어나려면 니체의 말에 귀기울여야할 것이다.

 

3. 초인을 꿈꾸다.

'비밀로 가득찬 숨은 신이있다. 참으로 그는 아들에게 올 때 조차 샛길로 왔다. 그리하여 그의 신앙의 문에는 간음이란 것이 있게된 것이다.'(146)라며 니체는 노골적으로 크리스트교를 비판한다. 신은 죽었으며, 신의 노예로 살기보다는 초인이 되라고 차라투스트라는 말한다. 그렇다면 초인이 되려면 어찌해야할까? 초인은 어떠한 존재인가?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을 평등하다고 보지 않았다. '평등의 설교자'를 격멸하며 그들을 치명적인 독이 있는 타란툴라와 같은 존재로 보았다.

 

설령 내가 자신의 오류를 밟고 걸어 다니더라도 나는 여전히 그들과 그들의 머리 위에 있을 것이다. 인간은 평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의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원하는 것을 그들은 감히 원해서는 안 될 것이다!-233

시장에서는 아무도 우월한 인간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런데도 거기서 말하고 싶은가. 좋다! 하지만 천민은 눈을 깜박이며 말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고"라고. ..."....신 앞에서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 신 앞에서라고! 그러나 이제 이 신은 죽었다. -502~505

 

만인이 법앞에 평등하다면, 법질서가 붕괴된 사회에서는 평등은 사라진다. 만인이 신앞에 평등하다면 신이 사라진 사회에서는 평등도 사라진다. 우월한 인간과 천민 사이에 구분이 시작될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를 보더라도 고위 공직자가 법위에 군림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또한 우리 사회에서 신은 사라졌다. 우리 사회는 평등하지 않다. 인간들 사이에서 지적 수준과 판단력, 정의감이 평등하지 않다. 이번 대선에서 자신의 탐욕을 위해서 수준 이하의 후보에게 투표한 자가 있지 않은가! 인간이 평등하지 않기에 민주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평등하다는 신화를 쓰고 있지 않은가!

니체는 인간을 어떻게 구분하고 있을까? 인간의 맨 아래에는 천민이 자리하고 있다. '권력의 천민, 문필의 천민, 그리고 쾌락의 천민들과 함께 살지 않기 위해서였다.(179)'라고 외치며 천민을 경멸한다. 니체가 말한 천민이 우리사회에서도 널려 있지 않은가? 권력에 아부하며 국민을 속이는 언론의 천민, 검찰의 천민, 돈의 천민, 무속의 천민 ... 삶을 주인으로 살기 보다는 권력과 돈, 탐욕을 위해서 노예로 살기를 즐거워하는자들이 바로 천민인 것이다. 그러한 천민을 니체는 경멸하고 있다.

천민 위에는 누가 있을까? '우월한 인간'이 있다. 그러나 우월한 인간은 천민으로 언제나 떨어질 수 있는 존재들이다. 신은 죽었다는 사실을 직시했음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신을 만들어내는 나약한 존재들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4부에 재미 있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1~3부가 차라투스트라의 경구(잠언)들로 역여있다면, 4부는 소설적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두명의 왕, 일자리 잃은 교황, 사악한 마술사, 자발적으로 거지가 된 자, 그림자인자, 늙은 예언자, 정신의 양심을 지닌자, 더없이 추착한자들이 차라투스트라의 영토인 동굴에 모여 만찬을 즐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들을 우월한 인간이라 부르며 자신의 동굴로 인도했으나, 그들은 차라투스트라가 없는 사이에 나귀를 신으로 만들었다. 차라투스트라는 분노했다. 그리고 사자의 울부짖음이 들리자 순식간에 그들은 사라졌다. 차라투스트라는 '동정이다. .... 우월한 인간들에 대한 동정이다! ... 좋다 그것도 이제는 끝이다.!'라고 되뇌이며 이글거리는 태양을 바라보며 동굴을 떠났다.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의 동굴로 초대했던 우월한 인간은 초인이 되지 못하고 천민의 나락으로 떨어진 겁쟁이들이었다. 그리고 니체는 그들에 대한 연민을 거둬들인다.

우리 사회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니체가 말한 우월한 인간이다. 언제나 진실을 보았으나, 그 진실을 잊어 버리고 다시 타락의 길에 빠져든다. 박근혜라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았고, 그녀의 무능력함과 탐욕스러움에 분노하여 많은 우월한 인간이 탄핵의 촛불을 들었다. 그런데, 5년 후에 다시 최악의 선택을 했다. 그러하기에 니체는 이러한 우월한 인간에 대한 동정을 거두어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니체가 이상으로 생각하는 인간은 무엇일까? 바로 '초인'이다. 초인이 되기 위해서는 세가지 변신을 해야한다. 그것이 바로 '낙타 - 사자 - 아이' 이다. 낙타는 짐을 잔득 실고 사막을 횡단한다. 주인의 말을 묵묵히 수행할 뿐이다. 이러한 존재는 천민이나 중세 시대 신의 노예와 비슷한 존재들이다. 종처럼 주인의 말에 순종할뿐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말하지 못한다. 낙타의 상태에서 깨어나서 사자가 된자는 용과의 대결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강한 이빨과 발톱으로 주장한다. 그렇다고 사자가 초인인 것은 아니다. 사자는 아이가 되어야한다. 부드러움은 강함을 이긴다. 강한 사자가 부드러운 아이가 되어야 '자신의 세계를 얻'을 수 있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아이가 되어야 초인이 될 수 있다. 민주화 운동가를 만나본 사람들은 '평소에 이렇게 조용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자가 어떻게 서슬퍼런 독재정권에 맞서 민중의 요구를 강하게 주장하는 투사가 되었는가?'라며 의아해한다. 진정한 초인은 아이의 부드러움과 아이의 가능성과 창조성을 품은 사람이다.

그렇다면, 니체가 말한 '초인'을 보다 자세히 탐구해보자. 니체가 칭찬하는 인간의 모습이 바로 초인의 모습일 것이다. 니체가 이상으로 여긴 인간상을 추적해보자.

 

이제 그대들에게 명하노니 나를 버리고 그대들 자신을 찾도록하라. 그리고 그대들 모두가 나를 부정하게 될 때 비로소 나는 다시 그대들에게 돌아올 것이다. -146

언제나 학생으로 머물러 있는자는 선생에게 제대로 보답하지 못한다. 그대들은 어찌하여 내게서 월계관을 잡아채려하지 않는가? 그대들은 나를 숭배한다. 어느날 그 숭배가 무너진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 입상에 깔려 죽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 -146

삶은 언제나 자신을 거듭해서 극복해야한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덜거덕거리는 표지가 되어야한다. -185

 

초인은 거급해서 극복해야하는 그 무엇이다.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보다 나은 자, 보다 새로운 자가 되려고 끊임 없이 노력하는 자이다. 임제스님의 '살불살조(殺佛殺祖)'라는 사자후 처럼, 스승을 넘어선 존재가 되기 위해서 끊임 없이 노력하는 자이다. 스승의 제자로만 남아있으려는 자는 영원히 스승이 될 수 없다. 그러한 자는 사이비교의 신도로 전락할 우려가 많은 노예이다.

니체는 용기를 예찬한다. 용기는 초인이 갖추어야할 기본중에 기본이다.

 

용기는 최고의 살해자다. 공격하는 용기야말로. 모든 공격 속에는 낭랑하게 울려 퍼지는 승리의 소리가 있기 때문이다.-283

용기는 죽음 조차 죽인다.-284

뱀이 목구멍 속으로 기어들어 간 그 양치기는 누구인가? ...어쨌든 양치기는 내가 고함을 쳐 말한 대로 물어뜯었다. 제대로 물어뜯었다! 뱀 대가리를 저 멀리 뱉어버렸다! 그러고는 벌떡 일어섰다. 더는 양치기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변화한 자, 빛에 둘러싸인자로서 그는 웃고 있었다. -288

 

뱀에 두려워하기 보다는 뱀의 대가리를 물어 뜯는 용기를 가진자를 니체는 예찬했다. 더러움에 맞서 싸우는 용기는 니체의 말대로 '죽음 조차 죽인다.' 어떠한 두려움과도 맞서 싸울 수 있는자가 초인이다. 용기 있는 초인은 타인이 만든 선과 악의 구분도 붕괴 시킨다.

 

선과 악에서 창조자가 되려는 자는 우선 파괴자가 되어 가치를 파괴해야한다. 이렇게 하여 최고의 악은 최고의 선에 속한다. 그러나 최고의 선은 창조적인 선이다. -213

굶주리고 난폭해지고 고독해지고 신을 믿지 않는자. 사자가의 의지는 스스로 이렇게 되기를 원한다. 노예의 행복에서 해방되고, 신들의 경배에서 구제되고,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남을 두렵게하고, 위대하면서 고독해지는 것. 진실된자들의 의지는 이와 같은 것이다. -189~190

 

선이 악이되는 시대! 악이 선이되는 시대! 선과 악의 개념 자체가 그 시대 지배이데올로기의 산물인 경우가 많다. 다산(多産)이 무지한 국민들의 모습이었던 것이, 지금 다산은 애국의 상징이 되었다. 무엇이 변하였는가? 지배 이데올로기가 변했을 뿐이다. 변한 것은 없다. 초인은 선과 악을 창조적으로 파괴한다. 누군가에 의해서 주입된 선악이 아니라, 자신이 선악을 새롭게 규정한다. 그러하기에 신에 의지해 살기 보다는 사자처럼 당당하게 살아간다. 신의 노예이기 보다는 고독한 초인의 길을 선택하길 니체는 염원한다.

그렇다면 초인의 뒷모습은 어떠할까?

 

인간들 사이에서 배고픔과 갈증으로 죽고 싶지 않은자는 어떠한 잔으로든 마실줄 알아야한다. 그리고 인간들 사이에서 깨끗하게 남아 있고자하는 자는 더러운 물로도 씻을 줄 알아야한다.-262

권력이 자비를 베풀고 눈에 보이는 세계로 내려올 때, 나는 그러한 하강을 아름다움이라고 부른다. -217

나는 삶을 완성하는 죽음. 산자에게 가시가 되고 굳은 맹세가 될 죽음을 그대들에게 보여주고자 한다. 삶을 완성하는 자는 희망에 차 있는 자들과 맹세하는 자들에 둘러싸여 승리에 찬 죽음을 맞는다. ... 나는 그대들에게 나의 죽음을 권한다. 내가 원하기 때문에 나를 찾아오는 자유로운 죽음을. -134~135

 

인간들 사이에서 살고자 한다면 어떠한 잔도 가려서는 안되며, 깨끗하게 살기 위기 위해서는 어떠한 물로도 씻을 줄 알아야한다. 정치를 하려면 구정물에 손을 담글 각오를 해야하는 것처럼! 초인은 눈앞에 더러움을 피하려 대의를 망각하지 않는다. 권력을 쥐고 나서는 칼을 쥔 망나니 처럼 폭주하지 않는다. 자비를 베풀고 서민들 사이로 내려올 때 우리는 그러한 지도자를 사랑한다. 고 노무현 대통령이 그러했던 것 처럼! 죽음을 대할 때도 초인은 죽음을 삶의 완성으로 본다. 마치 이순신 장군 처럼 죽음에 임해서도 당당하며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고 승리에 찬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죽음과 함께 임진왜란도 끝났다. 그렇게 초인은 떠나가는 뒷모습도 아름답다.

인간이라고 모두 같은 인간이 아니다. 삶이라고 모두 같은 삶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초인과 같은 고귀한 삶을 살고자한다면 지금 당장! 끊임 없이 새롭게 거듭나려 노력해야한다.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자들만이 '더는 천상의 모래밭에 머리를 처박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머리를 처들'(56~57)고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다.

 

중학생에 다닐때, 천원짜리 '작은 책'이 있었다. 천원으로 유명한 책들을 살 수 있었다. 그때 산책중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도 있었다. 재미있는 소설책으로 알고 샀던 그 책은 너무도 어려웠다. 서문과 니체에 대한 소개글을 읽고는 책장을 덮어 버렸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고등학교 윤리 선생님은 대단한 학생이라며 나를 칭찬해주었다. 그리고 세월은 흘렀다. 다시 한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에 도전장을 던졌다. 쉽지 않은 독서의 시간이었다. 문장이 이해되지 않아서 같은 문장을 몇번씩이나 반복해서 읽기도 했으며, 한쳅터를 읽고 나서는 전혀 내용이 이해되지 않아서 다시 한번 읽은 쳅터도 너무도 많았다. 그렇게 힘들게 읽으면서 뿌듯한 점이 있었다. 그것은 나의 정신이 많이 성장했다는 사실이다. 그때는 그렇게 이해되지 않던 것이 이제는 이해되는 부분이 많아졌다. 그리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에서 가장 아름다운 글귀도 발견했다.

 

우리가 삶을 사랑하는 것은 삶에 익숙해져서가 아니라 사랑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74

더러워지지 않으면서 더러운 물을 받아들이려면 우리는 먼저 바다가 되어야한다. -20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어서 행복하다는 말이 있다. 우리가 삶에 익숙해지기 보다는 사랑에 익숙해진다면 우리는 삶을 사랑하고 우리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 그렇게 사랑에 익숙해지면 우리는 바다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아름다운 독일어 경구들로 이루어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생각날때 마다 펼쳐 읽으며 가슴속에 담을 문장을 찾아야겠다. 그러면 그 문장은 나의 가슴에 별이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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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11-09 15: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루님 이달상 추카합니다
11월 건강 잘 챙기세요
주변에 코로나 확진 급증입니다 ㅜ.ㅜ

강나루 2022-11-10 04:41   좋아요 0 | URL
scott님, 감사합니다.
저는 이미 10월달에 코로나19에 걸렸습니다.
그래도 조심해야죠.
scott님도 건강 잘 챙기세요^^

서니데이 2022-11-09 15: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강나루 2022-11-10 04:41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도 행복하고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이하라 2022-11-09 15: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평화로운 시간 되세요.^^

강나루 2022-11-10 04:42   좋아요 0 | URL
이하라님 감사합니다.
이하라님도 행복하면서 평화로운 시간 보내세요.^^

thkang1001 2022-11-09 18: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한 주 되시길 바랍니다.

강나루 2022-11-10 04:42   좋아요 0 | URL
thkang1001님 감사합니다.
행복과 사랑이 넘치는 한주 보내세요.^^

bookholic 2022-11-09 20: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나루 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늘 좋은 책 소개해 주셔서 감사하고요..^^

강나루 2022-11-10 04:43   좋아요 1 | URL
bookholic님 감사합니다.
좋은 책으로 봐주시는 bookholic님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마루☆ 2022-11-09 22: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당선 축하드려요. ~^^

강나루 2022-11-10 04:43   좋아요 1 | URL
마루☆님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하나의책장 2022-11-09 23: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강나루 2022-11-10 04:44   좋아요 0 | URL
하나의책장님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22-11-10 07: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처음에 말씀이 있었다‘는 구절이 중세 시대를 열었다면,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말이 정신사적 의미에서 중세를 끝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만, 니체가 말한 기독교(그리고 종교)의 문제가 교리상의 문제인지, 이러한 도그마를 바탕으로 한 집단(교회 등)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인지 더 생각하게 됩니다. 인류의 4대 성인이라고 하는 분들, 각자가 한 명의 초인이었다는데 큰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들이 창시한 종교/사상이 배타적인 사상으로 자리한 것이 인류사에 미친 종교의 악영향이라면, 어쩌면 초인이 문제가 아니라, 초인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가 더 중요한 것은 아닐까를 강나루님의 글을 통해 생각해 봤습니다... 강나루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

강나루 2022-11-10 08:15   좋아요 1 | URL
겨울호랑이님은 내공이 깊으시네요.
한수 배웁니다.
초인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가 중요하다는 말에 깊이 공감합니다.

겨울호랑이 2022-11-10 08:36   좋아요 1 | URL
에고 아닙니다. 강나루님의 깊은 사색을 따라가다보니, 초인 이후의 세계에 대해 조금 생각해봤을 따름입니다. 모두가 초인인 세계에서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세계가 된다면 정말 좋은 세상에 될 것이란 생각을 해봤습니다. 강나루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좋은 아침 되세요! ^^:)

thkang1001 2022-11-10 09: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강나루 2022-11-11 06:15   좋아요 0 | URL
thkang1001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