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용운의 채근담 강의
한용운 지음, 이성원.이민섭 옮김 / 필맥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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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용운의 채근담 강의'이라니!! 만해 한용운을 김관호라는 청년이 찾아왔다. 한용운은 '정선강의 채근담'을 내어주며 이 책을 읽고 다시 오라고 말했다. 독립운동가이자, 승려이며 시인인 그가 김관호에게 불교서적도 아니며 시집도 아닌 '정선강의 채근담'을 왜 내주었을까? 아마도 식민지 조선이라는 어둠의 터널을 걸어가며 흔들리지 않고 조국 독립의 길을 갈 수 있는 마음가짐을 채근담을 통해서 얻길 바라지 않았을까? 수많은 채근담 번역서가 있다. 그 중에서 '한용운의 채근담 강의'를 선택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국 독립이라는 뜻을 꺽지 않고 당당히 나아간 한용운의 마음을 채근담을 통해서 만나고 싶다. 


1. 무엇이 그를 채근담으로 이끌었을까?

  고전은 나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다. 고민이 있을 때 접한 한줄기 글귀가 나를 덮고 있는 고민덩어리에서 해탈케한다. 식민의 고통을 겪었던 만해 한용운에게 어떤 채근담의 글귀가 힘과 용기를 주었을까? 

  친일파들이 난동을 벌이고 있다. 매국노들이 나를 일제에 팔아 넘겼다. 을사오적과 일진회 세력이 활개를 치는 그 시대에 만해는 고민했을 것이다. 어떠한 삶을 살 것인가? 승려로서 구도자의 삶을 살 것인가? 시인으로서의 삶을 살 것인가? 현실에 순응하는 소시민으로 살 것인가? 그 때 한용운은 현실에 순응하는 삶을 걷어차버린다. 그리고 당당하게 승려이면서 시인으로서 삶을 살아가는 동시에 독립운동가로서의 소명을 다한다. 아마도 그는 채근담의 다음 구절에서 용기를 얻었을 것이다. 


隨時之內善救時 若和風之消酷暑, 混俗之中能脫俗 似淡月之映輕雲.

(시대의 흐름을 따르면서도 시대를 잘 구제하는 것은 산들바람이 불어와서 무더위를 몰아내는 것과 같다. 세속에 섞여 있으면서도 세속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은 희미한 달빛이 가벼운 구름을 환히 비추는 것과 같다.) 84쪽


  칠흑같이 어두운 식민의 터널을 걷고 걸어가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다. '시대를 잘 구제'하여 독립의 꿈을 이룬다면 이것은 '산들바람이 불어와서 무더위를 몰아내는 것'과 같지 않은가? 일제 강점기 조선을 살면서도 조국 독립을 이루는 것은 '희미한 달빛이 가벼운 구름을 환히 비추는 것'과 같지 않은가? 

  누구는 절망했고, 누구는 변절했다. 그러나 만해 한용운은 현실과 굴복하지 않았다. 풀뿌리를 씹어 먹으면서도 자신의 올곧은 신념을 꺽지 않았다. 친일을 선택한 민족반역자들은 풍요로운 삶을 살아갈 때 한용운은 총독부가 보기 싫어 북향으로 집을 짓는다. 그리고 집이름을 심우장이라했다. 아이가 소를 찾아 깨달음을 얻듯이 그도 자신이 추구하는 참된 진리를 찾아 긴 여생을 보내며 자신의 집을 심우장이라 지었다. 


貧家淨掃地, 貧女淨梳頭, 景色雖不艶麗, 氣度自是風雅. 士君子一當窮愁寥落, 奈何輒自廢弛哉.

(가난한 집의 마당을 깨끗이 쓸고 가난한 여인의 머리를 곱게 빗으면 외관과 외모가 화려하지는 않아도 기품이 우아할 것이다. 사군자가 가난하고 불행한 처지에 놓이더라도 어찌 스스로 피폐해지고 해이해질 것인가) 290쪽

肝腸煦若春風 雖囊乏一文 還憐煢獨 氣骨淸如秋水 縱家徒四壁 終傲王公.

(마음이 봄바람처럼 따뜻하면 주머니 속에 먼지만 가득해도 오히려 의지할 데 없는 이들을 동정하며, 기개가 가을 강물처럼 맑으면 사는 집이 사방 벽으로 간신히 바람만 막는 정도라도 왕후장상을 우습게 여긴다.) 118쪽


  비록 가난했지만 한용운의 마음은 풍요로웠다. 창녀의 화려함을 절개 있는 처녀가 부러워할리 없듯이, 친일파의 부귀를 한용운이 부러워할리 없다. '사군자가 가난하고 불행한 처지에 놓이더라도 어찌 스스로 피폐해지고 해이해질 것인가'라는 글귀를 가슴에 새기며, 오히려 변절한 친일파들을 '동정'하였을 것이다. 부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자신의 신념임을 그들은 모를 것이다. 

  독립운동가의 삶은 순탄할리 없다. 수없이 감옥에 갖히고 죽을 고비를 넘겨야했다. 순탄한 삶을 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고난의 길을 선택했다. 어떤이는 그만 타협하고 편안한 삶을 살라고 그에게 말했을 것이다. 그때 한용운은 채금담의 이 귀절을 되새겼을 것이다. 


一念錯 便覺百行皆非 防之當如渡海浮囊 勿容一針之罅漏.

(한 생각이 잘못되면 백 가지 행동이 잘못된다. 이것을 예방할 때는 바다를 건널 때 쓰는 부낭에 바늘구멍만한 틈도 없게 하듯이 해야한다.) 18쪽

欲做精金美玉的人品 定從烈火中鍛來 思立欣天揭地的事功 須向簿氷上履過.

(순금이나 좋은 옥과 같은 인품을 만들기를 원한다면 뜨거운 불 속에 단련되어야한다. 천지를 들었다 놓을 만한 업적을 이루기를 생각한다면 살얼음 위를 걷듯 해야 한다.) 16쪽


 조금의 타협도 용납할 수 없다. 식민의 바다를 건너는데 '부낭'에 '바늘구멍만한 틈'이 생긴다면 이는 곧 친일의 나락으로 빠져든다. 순금을 '뜨거운 불 속에 단련'하듯이 자신의 이 고통도 자신을 단련하는 하나의 과정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리고 만해는 다음과 같은 해설을 남긴다. 


  역사상 위대한 충국의 열사와 절개 있는 사람은 칼날을 밟고 뜨거운 피를 뿌리는 외롭고 고통스럽고 험난한 환경에서 나오고, 세상에 드문 영웅과 호걸은 구사일생의 어려움 속에서 생깁니다." 17쪽


  한용운은 앞으로 자신의 삶을 예견하듯이 해설을 달아 놓았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라면 '칼날을 밟고 떠거운 피를 뿌리는 외롭고 고통스럽고 험난한 환경'을 마다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를 내 보였다. 그리고 자신의 결의를 한마디로 표현한다. 


若果一念淸明, 淡然無欲, 天地也不能轉動我, 鬼神也不能役使我, 況一切區區事物乎! 

(생각이 청명하여 담당하고 욕심이 없으면 천지도 나를 흔들지 못하고 귀신도 나를 부리지 못하는데 하물며 모든 사소한 사물이야 오죽하겠는가.) 160쪽


  그렇다. 조국 독립에 대한 '생각이 청명하여 담당하고 욕심이' 없기에 '천지도 나를 흔들지 못하고 귀신도 나를 부리지 못'한다. 그 누가 나의 곧은 지조를 꺽겠는가? 한용운의 피맷힌 포효가 느껴진다. 


2. 우리는 채근담을 통해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채근담이 만해 한용운의 마음을 단단하게 하는데 일조했다면, 우리의 마음도 단단하게 만들 수는 없을까? 채근담에는 우리마음을 단단하게 해주는 주옥같은 글귀가 많다. 그 중에서 몇가지를 꼽아보자.


紅顏失志 空貽皓首之悲傷.

(젊어서 뜻을 잃으면 늙어서 슬픔만 남는다.) 44쪽


  청소년기에 수많은 고민에 휩싸인다. 때로는 좌절하고 때로는 자신의 능력에 회의를 품기도한다. 힘들어하는 이땅의 청소년과 젊은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글귀이다. '젊어서 뜻을 잃으면 늙어서 슬픔만 남는다.' 그러니 용기를 잃지 마라. 정면대결이 힘들다면 우회로를 생각해 보라. 

  패기가 있고 도전정신이 있는 젊은이들에게 사회적 경험이 적어 실패를 맛보기도 한다. 이러한 청년에게 들려주고 싶은 글귀가 있다. 


欺人者非福, 而受人欺者遇一番橫逆便長一番器宇, 可以轉禍而爲福.

(남을 속이는 것은 복 받을 일이 아니다. 그러나 속임을 당한 사람은 한 번 속을 때마다 한 번 더 자신의 도량을 키워 화를 바꾸어 복으로 만든다.) 136쪽


  현명한 자는 실수로 부터 배우고, 멍청한 자는 실수를 반복한다. 타인에게 속임을 당했다면 그것으로부터 배워야한다. 그래야 다시는 같은 이유로 속임을 당하지 않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대학에 입학할 때 잡상인에게 영어 교재를 강제 구매 당한적이 있다. 너무도 어리석은 일이라서 남에게 말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 그와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나의 어리석은 일로부터 배워야한다. 그러한 배움이 쌓이면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바위처럼 굳건히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사회에 나아가서 여러사람을 만나다보면 자신과 맞지 않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러한 사람은 어떻게 대처해야할까?


 士君子之涉世, 於人不可輕爲喜怒 喜怒輕 則心腹肝膽 皆爲人所窺, 於物不可重爲愛憎 愛憎重 則意氣精神 悉爲物所制.

(사군자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남들에게 기쁨과 노여움을 쉽게 품지 말아야 한다. 기쁨과 노여움을 쉽게 품으면 남이 속마음을 샅샅이 엿보게 된다. 외부 사물에 지나친 애증을 품지 말아야 한다. 애증이 지나치면 의기와 정신이 모두 외부 사물의 지배를 받게 된다.) 64쪽


  나는 사회 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이 나의 감정을 얼굴에 쉽게 드러낸다는 것이다. 싫어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사람을 얼굴에 분명히 드러내어 대인관계에서 불이익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채근담에서는 나의 기쁨과 노여움을 드러내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들에게 기쁨과 노여움을 쉽게 품지 말아야'하며, '외부 사물에 지나친 애증을 품지 말아야'한다. 이것은 인생을 현명하게 살기 위해서 우리가 가져야할 마음 가짐이다. 

  때로는 열심히 노력하는데도 하늘이 운이 따르지 않을 때가 있다. 


 天薄我以福, 吾厚吾德, 以迓之  天勞我以形, 吾逸吾心, 以補之  天阨我以遇,吾亨吾道, 以通之  天且我奈何哉 

(하늘이 나에게 복을 박하게 주면 나는 나의 덕을 두텁게 하여 박한 복을 맞아들이고, 하늘이 내 몸을 힘들게하면 나는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힘든 육체를 돕고, 하늘이 나에게 액운을 내리면 나는 나의 도를 형통하게 해서 앞길을 열리니 하늘인들 나를 어찌하겠는가)- 296쪽


  운명론적 삶을 거부하라! 채근담은 말한다. 사회의 일부 지도층 사이에서 역술인에 의존하는 자가 있다. 부적을 차고 다니고, 무속인이 쓴 글자를 손에 적고 다닌다. 자신의 삶이 떳떳하지 않거나, 자신의 마음가짐이 단단하지 않을 수록 역술에 의존하게 된다. 하늘이 나아게 나에게 복을 박하게 주면 나는 덕을 두텁게하고, 하늘이 몸을 힘들게하면 나는 마음을 편하게 할 것이며, 하늘이 액운을 주면 나는 도를 형통하게 할 것이다. 그렇다면 하늘인들 나를 어찌하겠는가! 얼마나 아름답고 멋있는 말인가! 운명에 나의 모든 것을 내 맡기기 보다는 나의 운명을 내가 만들어가자.

  내가 사회적 리더가 되었을 때는 어떠한 마음 가짐을 가져야할까? 채근담은 이렇게 말한다. 


我果爲洪爐大冶 何患頑金鈍鐵之不可陶鎔 我果爲巨海長江 何患橫流汚瀆之不能容納
(내가 큰 화로와 거대한 대장간이 되면 단단한 쇠를 녹이지 못할까를 어찌 걱정하며, 내가 큰 바다와 긴 강이 되면 내가 제멋대로 흐르거나 더러워진 강물을 용납하지 못할까를 어찌 걱정하리오.)


  리더가 될 사람은 그릇을 키워야한다. 그릇이 크지 않은자가 큰척한다면 마음에 큰 상처를 얻을 것이다. 나의 마음을 거대한 대장간으로 만들고, 커다란 바다와 긴 강으로 만든다면 때로는 치기 어린 아랫사람도 품어 안을 수 있다. 우리 자존감의 그릇을 키우자.

  나에게는 세상을 사는 젊은이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 현실 정치에 혐오감을 느끼더라도 절대 현실정치에 무관심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이를 채근담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居軒冕之中,  不可無山林的氣味. 處林泉之下,  須要懷廊廟的經綸

(관직에 있어도 산림 속에 사는 듯한 기질과 취미를 버리지 말아야 하고, 산속 샘가에 살더라도 반드시 조정에 있는 듯이 경륜을 품어야 한다.) 224쪽


  자연인으로 산다 할지라도 현실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한다. 정치는 우리의 삶에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한다. 국민이 정치에 무관심하기를 바라는 자는 바로 독재자들이다. 로마의 황제들이 빵과 써커스 정책을 펼치면서 로마 시민들에게 정치에 관심을 가지 않도록했다. 너의 눈과 귀, 그리고 배를 채워줄테니 황제의 독재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 이러한 우민화 정책은 전두환 정권의 3S 정책으로 이어졌다. 성과 영화, 스포츠을 보면서 즐기면서 전두환 독재정치에 관심을 갖지 말기를 그들은 바랬다. 이러한 상황은 지금도 다르지 않다. 관직에 있으면서도 산림 속에 사는 기질을 버리지 말아야하듯이, 산속에 살더라도 반드시 나랏일에 관심을 가져야한다. 이것은 홍자성이 살았던 명나라 시기만의 교훈은 아닐 것이다.



  만해 한용운은 단순한 독립운독가가 아니다. 만해는 '고려대장경'을 낱낱히 열람하여 1000권을 선정하고 그 중 중요한 구절을 정선하여 번역했다.(1914) 그리고 그 이듬해에는 '정선 강의 채근담'을 집필했다. 그는 보통의 승려 이상의 능력과 실천력을 가진 분이시다. 중학교 시절, '님의 침묵'을 읽고 30여년이 지나서 그가 강의한 채근담을 읽었다. 채근담을 읽으며 자신의 마음가짐을 가다듬었을 만해의 뜨거운 열정이 나의 가슴속에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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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루이)는 자신이 한 국가의 장관을 그의 가족과 함께 맨 밑바닥으로 끌어내리고 극심한 불만감에 귀족을 짓밟을 수는 있어도 귀족이나 귀족의 혈통을 완전히 말살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그에게는 소용이 없다. 그가 자신의 장관들에게 같은 혈통의 왕자들보다도 높은, 국가에서 가장 높은 권한을 부여하려 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생시몽 회고록

술탄들 중의 술탄이자 국왕들 중의 국왕이고, 지구상의 군주들에게 왕관을 나눠 주는 사람이며, 이 세상의 신의 그림자이고, 백해와 흑해의 술탄이자 최고 통치자이며, 루멜리아, 아나톨리아, 카라마니아의 최고 통치자인 내가 (중략) 프랑스 왕인 그대 프랑수아에게 전한다.
그대는 나의 정부에 서한을 보냈다. (중략) 그대는 그대를 구해 달라며 원군을 요청했다. (중략) 용기를 내고 낙담하지 말라. 우리의 영예로운 전임자들과 걸출한 조상들(신께서 그들의 무덤에 빛을 밝혀 주기를!)은 적을 물리치고그의 영토를 정복하기 위해 전쟁을 중단하지 않으셨다. 우리도 그들의 발자국을 따랐고 아주 강력하고 접근하기 어려운 성채와 지역도 늘 정복해 왔다. 우리의 말에는 밤낮없이 안장이 얹혀 있고 허리에는 우리의 칼이 걸쳐있다.
-술레이만 - P128

만약 폐하께서 외국 무역을 금지하는 그 오래된 법을 폐지해도 안전하다는 데 만족하지 못한다면, 실험을 해 보기 위해 그 오래된 법을 5년에서10년 정도 유예할 수도 있습니다. 바라던 만큼 이롭지 않은 것으로 판명나면, 그 법을 다시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 미국은 종종 해외 국가와의 조약을몇 년 정도로 제한한 다음, 희망에 따라 그 조약의 갱신 여부를 정합니다.
-페리가 가져온 필모어 대통령의 서한 - P211

1. 이 서약으로 "우리는 광범위하게 국가의 부를 축적하고 헌법과 법률의틀을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세운다.
2. 심의회가 널리 설립되고 모든 문제가 열린 토론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3. 모든 계층은 국가의 문제를 힘차게 관리해 나가는 데 힘을 합쳐야 한다.
4. 불만이 존재하지 않도록 문관과 무관은 물론 일반인들도 각자의 소명을 추구할 수 있어야 한다.
5. 과거의 악습은 중단되어야 하고 모든 것이 공정한 자연법에 근거해야한다.
6. 황제 통치의 기초를 강화하기 위해 세계 전역에서 지식을 추구해야한다.
-메시지 유신 대관식에 서명한 5개조 서문 - P213

우리는 열강들로 이루어진 집단이나 어떤 진영에도 연루되지 않을 계획이다. 36그래야만 우리가 인도의 대의명분뿐 아니라 세계 평화의 대의명분에도 기여할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때때로 이 정책으로 한 집단의 열렬한지지자들은 우리가 다른 집단을 지지하고 있다고 상상할 수도 있다. 모든국가는 외교 정책을 수립할 때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한다. 다행히도 인도의이익은 평화로운 외교 정책과 일치하며, 모든 혁신적인 국가들과의 협력과도 일치한다. 필연적으로 인도는 우리에게 우호적이고 협력적인 국가들과가까워질 것이다.
-네루, 뉴 리퍼블릭, 1947 - P231

인도 대표단이 미국을 자극할까 두려워 소련 진영을 피했다면 터무니없고 현명치 못한 행동이 되었을 것이다." 미국이나 다른 나라가 계속해서 비우호적인태도를 보이면 불가피하게 다른 곳에서 친구를 찾을 거라고 그들에게 분명하고 확실하게 말해야 할 때가 올 수도 있다.
-네루 - P232

우리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은 친공산주의나 반공산주의가 되는 것 외에는 확실한 입장을 취할 수 없습니까? 세계에 종교를 비롯한 온갖 종류의것을 안겨 준 사상계의 대표자들이 이런저런 종류의 집단에 꼬리표를 붙이고 자신들의 소망을 실행에 옮기면서 가끔은 아이디어를 주는 이런저런 집단 주위를 어슬렁거려야 하는 지경이 되었습니까? 이는 자존심이 있는 민족이나 국가에게는 가장 모멸적이고 굴욕적인 것입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훌륭한 국가들이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상태가 된 뒤 결국 이런식으로 굴욕을 당하고 비하된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입니다.
-네루, 1955, 반둥회의 - P232

독일 국민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이렇다. 만약 그들이 전쟁이끝난 뒤에도 세계 평화를 어지럽히는 데 관심이 있는 야심과 음모를 꾸미는지배자들, 다시 말하면 세계의 다른 민족들이 믿을 수 없는 사람들 밑에서계속 살아야 한다면, 차후에 세계 평화를 보장해야 할 국가들의 동반자로 그들을 인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윌슨 - P293

따라서 그리스와 터키를 포함한 서유럽 지역에서의 활기차고 독립적인정치 활동의 보존을 요구하는 대서양 해양 세력의 이해관계와 늘 불안한 유라시아 대륙 세력의 이해관계 간에 근본적 충돌이 유럽에서 발생할 것인데, 유라시아대륙 세력은 늘 서쪽으로 세력 확장을 추구해야하기 때문이다. 대륙 세력의입장에서 보았을 때, 대서양 외에는 안전하게 팽창을 멈출 수 있는 장소를발견하지 못한다..
-1945,케넌, 소련이 적으로 돌아설것 예상 - P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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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답에서 배우는 禪의 지혜 - 벽암록 종용록 무문관이 전하는 선사들의 가르침, 개정판
윤홍식 지음 / 봉황동래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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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상사' 강의를 들으며 화두를 처음 접했다.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화두를 접하며 '불교는 이해하기 어렵다.'라는 편견을 더욱 견고화 시켰다. 그러던중, 강신주의 '메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라는 책을 읽으며 화두가 이렇게 재미있는지 처음 알았다. 그리고 강신주가 화두에 관한 책을 더 집필해주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강신주는 화두에 관한 책을 더 이상 펴내지 않았다. 화두에 관한 갈증이 높아갈 때 윤홍신의 책을 집어들었다. 과연 윤홍신은 나의 갈증을 풀어주었을까?


 '선문답에서 배우는 선의 지혜'를 읽으며 가장 인상에 남는 간어는 '반조선'이다. 조선에 반역한다는 뜻일까? 아니다. 화두를 통해서 수행하는 방법에는 화두선과 반조선이 있다. 화두선이 선문답을 제3차의 입장에서 묻고 의심하며 화두를 풀어 깨달음을 얻는다면, 반조선은 스님의 대답을 듣고 곧장 자신을 돌이켜보고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윤홍신은 간화선이라고도하는 화두선 또한 반조선의 방편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화두선만을 알던 나로서는 반조선은 더 어렵다는 선입견이 몰려왔다. 그러나, 윤홍신의 반조선은 화두를 어렵게 풀지 않는다. 강신주가 서양 철학의 개념을 이용해서 화두를 풀었기에 읽으면서 묵직한 깨달음을 얻었다면, 윤홍신의 반조선은 너무도 쉽게 설명하여 가볍다는 느낌이 들었다. 

  윤홍신이 풀이한 화두 중에서 '세존, 침묵의 설법'이 가장 인상적이다. 세존께서 법좌에 올랐다. 세존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러자 문수보살이 나무방망이를 쳐서 설법이 끝났음을 알렸다. 이 화두를 읽으며 존 케이지의 '4분 33초'가 생각났다. 음악에 조회가 있는 사람들은 존 케이지가 모든 소리가 음악이 될 수 있음을 '4분 33초'를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었다고 말한다. 비움이 있어야 새로움을 채울 수 있다. 음악이 연주되는 홀에서 음악을 비움으로써 새로운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만들었다. 우리가 소음이라는 이름을 붙이 소리들이 음악으로 재탄생했다. 

  세존도 자신의 설법으로 가득 채워야할 장소를 비우셨다. 그리고 대중들에게 침묵을 듣도록하였다. 침묵의 설법으로 우리의 내면을 직시하고, 세존의 말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의 마음의 소리에 귀기울이면서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했다. 그릇은 비워 있어야 쓰임이 있을 수 있다. 우리의 눈을, 우리의 귀를, 우리의 생각을 비울 때 진리로 세상을 담을 수 있다. 

  '오조, 어느 것이 진짜 몸인가'에 대한 풀이도 인상적이다. 윤홍신은 이 화두를 풀이하기 위해서 '유설이혼기'라는 글을 소개한다. 장감이라는 청년이 천녀라는 여인과 도망가서 아이를 낳는다. 천녀가 마음의 병을 앓자, 장감은 장인집에가서 그간의 일을 설명한다. 그런데, 장감의 아내 천녀는 장인 집을 떠난적이 없단다!! 천녀는 모든 힘을 잃고 5년 동안 방에서 앓고 있었다. 장감이 아내를 데로오자 두 천녀는 하나로 합쳐졌다. 혼은 죽으면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죽으면 땅으로 사라진다. 천녀의 혼백은 장감을 따라 갔지만, 육신은 집에 남겨져 있었다. 마치 뇌사에 빠진 것처럼.... 

  그렇다면 혼백과 육신 중에서 누가 천녀일까? 이러한 이분법적 질문이 잘못이다. 혼백과 육신도 천녀이다. 나의 손과 발이 나이듯이 말이다. 온전한 천녀는 육신과 혼백이 분리되지 않은 천녀이다. 

  그런데, 윤홍신은 의외의 설명을 한다. 


  "살아 생전에 '혼과 백'을 자유로이 다스려서 육신을 여관방 출입하듯이 드나들 수 있는 자라야, 죽은 뒤에도 자유자재로 의생신을 나투며 온 천지의 중생을 구제할 수 있는 것이다. (중략) 이것에 대한 대답은 자신이 진정 혼백의 주재권을 장악하고 지수화풍을 자유자재로 모이고 흩어지게 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398~399쪽


  지수화풍을 자유자제로 모이고 흩어지게 한다니? 살아 생전에 '혼과 백'을 자유로이 다스려서 육신을 여관방 출입하듯이 드나들다니? 정말 쌩뚱 맞다는 생각이든다. 도교의 도사들이 도술을 부릴 수 있다며 어리석은 백성들을 속이는 혹세무민을 저지르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21세기 과학문명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도사 혹은 사이비 종교인들이나 할 것 같은 표현을 불교 서적에서 읽으니 못내 불편하다. 



  화두에 대한 갈증에서 읽기 시작한 책을 내려 놓았다. 강신주의 '메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라는 책의 인상이 너무도 강렬했기에 쉽게 풀어쓴 윤홍식의 반조선이 묵직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강신주의 책을 읽기 전에 읽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든다. 강신주의 화두 풀이를 듣기 전에 화두에 관한 기초체력을 키울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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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 관한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물음 49 - 어디다 대놓고 묻기 애매한
장웅연 지음, 니나킴 그림 / 담앤북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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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품은 디테일에 강하다고 한다. 불교관련 책을 좀 읽었지만, 불교에 관해서 잘안다고 자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소한 질문에 제대로 대답못하는 자신을 보며, 불교라는 거대한 산을 오르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체감할 뿐이다. '불교에 관한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물음 49'는 불교에 관한 사소하지만 중요한 질문을 모아 놓았다. 정말 사소하지만 불교에 관한 깊이 있는 이해가 없다면 답할 수 없는 질문들을 모아 놓았다. 불교에 관한 책을 좀 읽었기에 목에 힘주던 내가 사소한 질문에 대답못하며 무너졌던 기억을 떠올리며 한장 한장 재미있게 읽었다. 


  불교에 관한 사소하지만 결정적으로 중요한 질문 중에서 나에게 깊은 울림을 준것은 4가지 이다. 

  첫째, "불교에서는 신을 믿지 않는다고?"라는 질문이다. 일반적으로 종교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절대자와 내세관이 있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잣대로 한국의 무속 신앙과 불교를 살펴본다면 종교라 할 수 없다. 절대자와 내세관이라는 기준은 서구의 기준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기독교의 잣대이다. 절대자가 없이도, 내세관이 없이도 종교는 존재할 수 있다. 인간이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종교가 될 수 있다. 무속과 불교가 바로 그 예이다. 특히, 불교는 철저히 신을 부정한다. 


  "불교는 절대자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스스로의 성찰로 완성되는 종교이다."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신이란 인간의 나약과 미망을 먹고 자라는 헛것에 불과하다. 미안하지만 인간이 신을 창조한 것이다."(13쪽)


  '만들어진 신'을 쓴 리처드 도킨슨이 이말을 듣는다면 너무도 기뻐할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우주적 종교로 불교를 지목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불안을 먹고 사는 타종교와는 달리, 당당히 스스로 성철하며 주인이 되라는 불교의 가르침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너무도 감동적인 가르침이다. 

  개인적으로 사찰에 가면 편안함을 느끼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불교의 핵심 가르침이 나의 생각과 일치한다. 물론 심오한 불교의 이론을 내가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불교의 가르침이 나의 생각과 일치하기에 불교를 만나면 마음이 편안했던 것이다. 

  반면, 성당이나 교회에 가면 불편했던 이유가 비로소 이해되었다. 성탄절에 교회에 가서 방백을 하는 신도들을 보면서 몹시 불편했다. 사이비 종교인을 만난듯이 너무도 불편해서 자리를 떴다. 신의 종이되라는 말도 몹시 불편했다. 인생을 주인으로 살고 싶은 나에게 신의 종으로 살라니 너무도 어이가 없었다. 

  신도를 노예로 만드는 종교보다는 모두가 주인으로 살기를 바라는 불교가 우리를 더 가치있게 만든다. 

  둘째, "절은 왜 산속에 많은가?"라는 질문이다. 선생님들과 절에 갔던 기억이 난다. 한분이 "이곳은 예전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던 곳인가봐, 조선의 숭유억불책으로 절이 산속에 갔다잔아"라는 말을 했다. 그러자 한분이 "글세요. 불교가 원래 속세를 떠나서 스님들이 수도하는 산속에 있지 않나요?"라고 맞받아쳤다. 역사를 전공했다고 자부하던 나는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열심히 불교 서적을 읽었지만, 절은 왜 산속에 많은가라는 질문에 의문을 던지지 않았다. 책속의 불교 지식을 흡수할 궁리만 했지, 당연한 것에 의문을 던지며 그 이유를 탐구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 책을 읽으며 비로소 의문이 해소되었다. 절이 산속에 많은 이유는 탈속주의와 풍수지리 때문이란다. 속세를 벗어나 수도를 하는 불교의 원래 모습을 떠올린다면 절이 산속에 많은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여기에 풍수지리설이 더해져 마치 인체에 뜸을 놓듯이, 기운을 북돋기 위해서 절과 탑을 세웠다. 여기까지 읽고 조선의 숭유억불책 때문에 절이 산속으로 숨어들었다는 주장은 잘못된 주장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 장웅연은 절이 산속에 많은 마지막 이유를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 때문이라 말한다. 그랬구나! 불교의 탈속주의와 풍수지리, 여기에 조선의 숭유억불책이 더해져서 절이 산속에 많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만들어졌다. 저자는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원인"으로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을 꼽고 있으나, 나의 생각으로는 숭유억불책은 부차적 원이으로 보인다. 지금 남아 있는 사찰들이 대부분 임진왜란 이후에 중건된 것들임을 떠올린다면 사대부들은 숭유억불을 했을지 몰라도 서민들의 삶속에 불교는 녹아들어 있었다. 

  셋째, "천도제인가, 천도재인가?"라는 주제는 제와 재의 심오한 차이를 깨닫게해주었다. 


  "불교에는 '재'만 있지 '제'는 없다. 자세히 살펴보면 '제'는 조상의 보이지 않는 도움을 받고 싶다는 일종의 투자에 가깝다. 이와 반대로 재는 철저하게 나를 버리고 비우겠다는 다짐이 먼저다. 아울러 제사상은 여인들의 명절 증후군을 발판 삼아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차리는 게 원칙이다. 그러나 잿밥은 맨밥이어도 괜찮다! 눈물을 흘리고 있다면, 눈물을 닦아 줄 수만 있다면."(233쪽)


  유교의 '제'가 조상의 음덕을 바라며 지내는 것이라면, 불교의 '재'는 죽은자와 산자 뿐만 아니라, 짐승을 포함한 만물을 위해서 지낸다. 불교의 하해와 같은 만물에 대한 사랑이 느껴진다.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이러한 심오한 차이를 알기나 했을까?

  넷째, "무아를 이야기하는데, 어떻게 윤회가 가능한가?"라는 주제에 대해서 저자 장웅연은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못했다. 단지 '밀린다왕문경'의 메난드로스 왕과 학승 나가세나의 문답에 제시한 논리를 제시해주었다. 


  "촛불은 금방이라도 꺼뜨릴 수 있지만, 한 촛불이 다른 촛불로 옮겨 붙을 수도 있다. 촛불이라는 '존재'는실체가 없으나, 촛불이란 '현상'은 영속적으로 이어지는 것이다."(174쪽)


  '밀린다왕문경'을 소개하면서도 저자 장웅연은 '딱히 결론이 없는 주제'라고 얼버무린다. 그러나, 나는 이를 설명할 수 있다.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에 윤회를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별이 폭발하면서 많은 원소들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원소들은 우리몸을 이루는 일부분이 되었다. 사람이 흙으로 돌아가면, 사람의 육신을 이루던 원소들은 자연으로 돌아간다. 이들은 음식물을 통해서 다시 사람에게 흡수된다. 우리의 원소는 과거 수많은 위인들의 몸을 이루었다.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면 우리의 원소는 미래 새로운 세대의 몸을 이룰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윤회한다. 불교의 윤회는 과학적으로 다시 해석할 필요가 있다. 


  이책의 49가지 질문에 완벽히 대답할 수 있는 내공을 가진 사람이 몇펴센트있을까? 교사인 나에게 불교의 심오한 이론을 묻는 학생은 거의 없다.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질문을 던지는 학생들에게 이 책은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상대해야하는 역사교사에게 많은 도움을 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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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의 정치 강의 - 사유하고 판단하지 않는 시민에게 정치적 자유는 없다!
이진우 지음 / 휴머니스트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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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의 의미는 자유이다.(The meaning of politics is freedom)" 책의 표지에 한나 아렌트의 말이 적혀있다. 그리고 이 말은 이책의 핵심이다. 한나 아렌트에게 정치는 자유를 뜻하며 정치가 없다면 자유는 보장되지 못한다.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서 미국으로 탈출한 한나 아렌트에게 전체주의 탐구는 그가 밝혀야할 수수께기였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고 그녀의 지적 아름다움에 매혹되었다. 지난 겨울, 그녀의 또다른 대표작 '전체주의의 기원1'을 읽으며 쉽게 그녀의 아름다움을 정복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한나 아렌트는 자신의 지적 아름다움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의 아름다움을 정복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았다. 이진우 교수의 '한나 아렌트의 정치 가의'가 나의 손에 잡혔다. 이 책을 디딤돌 삼아 그녀의 '전체주의의 기원2'를 정복하겠다는 야망을 갖았다. 그리고 그 디딤돌은 생각보다 유용했다. 


  좀비를 소재로한 영화와 드라마가 유행이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누군가의 명령에 의해서 움직인다. 총이나 칼로 혹은 주먹으로 그들을 물리치려하지만, 자신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도 주인의 명령에 복종하며 덤벼든다. 


  "복종하면서 꼭두각시처럼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인간들의 행렬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다."(31쪽)


  한나 아렌트는 그러한 좀비들을 보았다. 아무런 저항없이 아우슈비츠의 죽음의 가스실로 순순히 걸어들아가는 유대인과 레벤스라움을 건설하기 위해서 전차를 몰고 소련 국경을 넘는 독일인들을 보면서 한나 아렌트는 좀비를 실제 목적한 것 처럼 두려웠을 것이다. 

  지구 반대편에도 좀비들이 있었다. '덴노헤이카 반자이'를 외치며 인간 폭탄이 되어 출격했던 가미가제 특공대도 무서운 좀비들의 행렬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주변에는 좀비들이 없는가? 불행히도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좀비들이 있다. 탐욕에 눈이멀어 대한민국호를 버뮤다 삼각지대로 끌고가는 선장을 뽑은 좀비들이 있다. '나라 팔아 먹는 이완용이 출마한다고 해더라도 우리는 XXXX을 뽑겠다.'는 어리석은 아줌마의 인터뷰를 보며 우리 사회의 좀비를 보았다. 

  이들보다 더 무서운 좀비가 있다. 정치에 관해서 대화를 하려하면 '모른다.', '관심 없다.'는 말을 하며 더러운 정치에는 관심없는 순수한 사람임을 자랑스럽게 말하는 좀비가 있다. 한나 아렌트의 입장에서 그들은 탄생성과 다원성이 전제되는 자유로운 사회를 스스로 부정하는 좀비들이다. 


  "현실을 생각하지 않으면 악을 불러오고 악은 사유를 허용하지 않는다."(9쪽)


  선거에 관심 없고, 현실에 떨어져 사는 것을 고귀한 것처럼 생각하는 좀비는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악을 불러오면서 현실을 고민하지 않는다. 또는 고민기 싫어 무조건 XXXX를 뽑거나 자신의 탐욕을 충족시켜줄 악마에게 한표를 행사한다. 


  "희생자들을 실제로 죽인 것에서 알마나 가까이 또는 멀리 있었던가하는 것은 그의 책임의 기준과 관련된 한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중략) 살상 도구를 자신의 손으로 사용한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을 수록 책임의 정도는 증가한다."(71쪽)


  세월호 안에서 구조될 것이라 믿으며 죽어갔던 단원고 학생들, 즐거운 저녁을 보내려 이태원에 갔다 압사된 청년들!! 그들의 곁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책임이 없는 것이 아니다. 학교 폭력을 조장하며 자신의 똘마니를 시켜 약자를 괴롭히는 일진이 있다. 좀비 똘마니가 손에 피를 뭍혔지만 자신의 손은 깨끗하다며 처벌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일진을 보며 한나 아렌트의 단호한 이 말이 떠오른다. 오히려 '멀리 떨어져 있을 수록 책임의 정도는 증가한다.'

  너무나도 암담해 보이는 현실을 변화시킬 수는 없을까? 좀비들로 가득찬 대한민국호에서 좀비를 시민으로 바꿀 수는 없을까? 


  "우리의 사회가 아무리 부패하고 불의로 가득차 있다고 하더라도 자발적으로 행위를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58쪽)


  '민주주의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입니다.'라는 고 노무현 대통령의 말 처럼, 좀비를 시민으로 만들 수 있는 희망은 깨어있는 시민들에게 있다. 탐욕과 부정 부패가 넘쳐나는 현실을 바로잡으려 깨어있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행위'할 수 있다면 암담한 우리 현실을 바꿀 수 있다. 

  우리 주변의 좀비를 깨어있는 시민으로 일깨우고, 암담한 현실을 밝게 비추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갈등과 충돌이 두려워 절대적 진리를 구한다면, 그것은 곧 정치를 떠나는 일이다."(121쪽)


  한나 아렌트는 갈등과 충돌을 견뎌내고 조정할 줄 알아야 정치는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고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 시기에 방송에 수 많은 토론 프로그램이 있었다. 대통령이 검사와의 대화를 하면서 갈등과 충돌을 견뎌내면서 대화와 타협으로 우리 현실 속에서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려했다. 그러나, 독재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노무현을 만만하게보았다. 민주주의라는 정치를 불편해하는 사람들은 '민주주의는 말잘하는 사람이 이기는 시스템이다. 강력한 리더가 이끌어주었으면 좋겠다.'며 독재로의 회기를 갈망하기도 했다.


 "정치는 많은 사람이 지닌 차이와 이들에게 공동으로 주어진 공간을 전제한다.(111쪽)


  차이를 견디지 못하고 주어진 공간을 회피하려는 사람들이 권위적 지도자를 불러들였다. 친일적 발언을 하는 사회 지도층 인사가 늘어났다. 청소년들 사이에서도 '일베'들이 늘어났다. 독재를 찬양하고 친일을 미화하며 독립운동가 가족을 비하하는 악마의 졸개들이 늘어났다. 


  "다원성이 버거울수록 여론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의견만 절대화하는 전체주의의 유혹이다."(127족)


  친일을 미화하는 악마의 졸개들도 다원성을 존중한다는 측면에서 그들을 존중해야할까? 5.18을 모독하는 인간 말종들의 의견마져도 존중해야할까? 아마 아닐 것이다. 유럽에서 나치를 미화하고 히틀러를 찬양하며 처벌받는다. 홍세화가 말했듯이, 똘레랑스가 허용되는 정치의 장, 자체를 뒤흔드는 무리까지 똘레랑스를 허용해서는 안된다. 

  어둠을 헤치고 좀비들 사이에서 희망의 빛을 쫓는 일은 혼자만의 힘으로는 힘들다. 


  "'뿌리 뽑힌 대중'은 전체주의 운동의 자원이다. 전체주의 운동은 원자화되고 개인화된 대중의 특별한 조건에 의존하기 때문에 전체주의 운동은 이런 저런 이유로 정치조직에 대한 욕구를 가진 대중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나타날 수 있다."(26쪽)


  '뿌리 뽑힌 대중'이 되지 않으려면, 뿌리 내린 대중에 되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연대를 해야한다. 원자화되고 개인화된 대중은 제2의 히틀러에게 좋은 먹이감이 된다.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을 길러야한다. 우리는 혼자가 아님일 깨달아야한다. 좀비 이웃과 대화하며 그들이 깨어있는 시민이 될 수 있도록 선한 영향력을 미쳐야한다. 그럴때 우리는 불의의 권력에 맞설 수 있다. 


  "어떤 정권이 권력을 폭력으로 대체하려는 경향을 보일 때 우리는 더욱 정치적 행위를 해야한다. 왜냐하면 "모든 권력의 감소는 폭력에 대한 공개적인 초대이기" 때문이다."(175쪽)


  검찰 폭력에 연대로 대응해야한다. 조국을 짖밟는 무리에게 우리는 연대로 대응해야한다. 그들은 권력을 폭력으로 대체하려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자유로운 공간과 다원성을 전제로하는 정치를 지킬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두려움이 든다. 과연 우리의 판단은 정확한가? 소수 엘리트의 세뇌에 우리가 현혹된 것은 아닐까? 한나 아렌트의 마지막 화두는 '판단'이었다. 그녀는 '정신의 삶'이라는 책의 제3부 '판단'을 쓰려 타자기 앞에 앉았다. 타자기에 '판단'이란 제목과 두 개의 머리 인용문을 쓰고는 더 이상 글을 쓰지 못했다. 그녀는 '판단'의 문제를 우리에게 숙제롤 남기고 저 세상으로 갔다. 

  이진우 교수는 그녀가 채우지 못한 빈 공간을 그녀의 이전 저서를 토대로 '판단'문제를 추론했다. 한나 아렌트는 정치적 판단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관찰자'를 강조했다. 현실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서 한걸음 뒤로 물러섯 전체를 조망해야한다. 대중에 매몰되지 않는 관찰자이면서 현실과 유리되지 않는 참여자가 되어야한다. 한나 아렌트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요구한다. 아니, 다원성과 자유의 공간이 전제되는 정치를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는 이정도 비용을 지불해야한다. 댓가 없는 열매는 기대할 수 없다. 



 책장을 덮으려할 때 쯤, 한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인민에게 배출된 엘리트에 의한 인민의 정부"(222쪽)


  우리의 현실을 너무도 잘 설명하는 문장이다. 선거 때만 국민이 주인으로 대접받는다. 어느 거리의 철학자는 이러한 현실을 비판하며 대의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직접 민주주의를 주장한다. 투표할 필요를 부정하는 괴변까지 '철학자'라는 간판을 걸고 짖어댄다. 투표라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완벽한 노예가 될 뿐이다. '인민에게 배출된 엘리트에 의한 인민의 정부'라 할지라도 그 공간에서 자유라는 이름의 정치를 누리기 위해서 우리는 투표해야한다. 정치에 관심을 갖고 참여해야한다. 관찰자와 참여자로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관찰자이면서 동시에 참여자가 되어야한다. '복종하면서 꼭두각시 처럼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관찰자 이면서 참여자가 되어야한다.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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