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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소포타미아의 역사 2 한국문화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716
조르주 루 지음, 김유기 옮김 / 한국문화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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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슬람 출현 이후의 서아시아사(중동)에 관한 역사책들을 비교적 많이 출판되어 있는 반면에, 무지의 시기라 불리우는 이슬람 출현 이전의 역사책은 찾아보기 힘들다. 단편적인 역사 인식에서 벗어나 서아시아의 역사 전체를 알고 싶은 마음에 '메소포타미아의 역사2'를 읽었다. 이 책에 대한 칭찬으로 인터넷이 도배되어 있지만, '무지의 시기'에 대해서 지식이 일천한 나에게는 칭찬할 수없는 책이다. 지도와 연표가 본문 서술과 분리되어 책의 맨뒷페이지에 제시된 점은 독자에 대한 배려가 전혀없는 출판사의 출판편의주의에 분노하게 만든다. 텍스트와 이미지가 결합되어 독자의 이해를 유기적으로 돕는 편집이 못내 아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판된 책들 중에서 무지의 시기를 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책이기에 불편한 마음을 꾹참고 읽어 내려갔다. 


 '메소포타미아의 역사2'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저부조작품에 대한 설명이었다.(168쪽) 조르주 루는 "군사들이 지여엥서 쉬면서 말을 돌보고 짐승을 도살하고 먹고 마시고 즐기고 하프와 탬버린에 맞춰춤을 춘다."라고 묘사하며 "그것은 보잘 것 없는 인간"이라는 단서를 붙인다. 역사서에는 등장하지 않는 병사들의 고닮픔과 희노애락을 표현한 저부조작품에서 인간적인 냄새가 풍겨나온다. 잔혹한 아시리아 군대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병사들을 바라보면 그들은 살인마로 오해할 수도 있지만, 저부조 작품을 바라보면 그들도 원치않는 전쟁에 끌려나온 우리의 이웃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역사는 왕과 귀족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전쟁에 강제 동원되어 목숨을 걸어야만 했던 이름없는 평민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아시리아의 영광도 있었다. 저자 조르주 루가 감탄했던, 그 저부조 작품을 사진으로 첨부해주었다면, 나도 조르주 루가 느꼈던 감동을 느겼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든다. 

  까마득하게 먼 오래전의 서아시아의 역사를 배워야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역사를 가르치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 나에게 하는 질문이다. 우리 역사도 아니고 멀고 먼 서아시아의 역사를, 그것도 아주 오래전의 역사를 배워야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저자 조르주 루의 말을 빌어 말한다면, 우리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빚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뉴턴에 자신이 멀리 볼 수 있는 이유는 거인의 어깨위에 서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우리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라는 거인이 닦아 놓은 토대 위에서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서양 문명의 원류인 그리스 로마 문명에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유럽 문명은 활짝 만개하여 아메리카 대륙과 아시아 대륙을 비롯한 세계 곳곳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우리는 숙명적으로 서구세력이 주도한 근현대사 속에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면 배울 수록, 역사 앞에 겸손해진다. 오늘의 문명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서아시아의 역사를 들어다 본다. 

  오늘의 문명이 성립하는데 많은 기여를 한,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왜 단절되었을까?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정치는 격변하더라도 이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계속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단절된 이유는 무엇일까? 아케메네스왕조 페르시아 시기에 기록하기 쉽고 배우기 쉬운 아람어가 보급되었다. 이로인해서 아카드어와 수메르어는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언어를 잃은 민족은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힘들다. 저자 조르주 루는 "자기 언어를 잊은 민족은 동시에 자기 과거를 잊고 머지 않아 자기정체성을 잃는다."(245쪽)고 말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자신의 언어를 잃어버리고 정체성을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철저한 파괴에 의해서 문명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언어를 잃어버림으로써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사라진 것이다. 그후,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의 강줄기가 변경되면서, 강주변에 있었던 도시들은 쇠락해졌으며, 강주변의 수로 관리 또한 제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번성했던 도시들은 하나, 둘 모래속에 파묻혀버렸다. 그러면서 메소포타미아 문명도 역사속에 파묻혀 버렸다.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해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다시 모래 속에서 깨어났다. 그러나 제국주의 국가들은 발굴이라는 명목으로 문화재를 약탈해갔다.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 강 주변에 사는 사람들 조차도 자신의 조상들의 유물을 보기 위해서 멀리 영국과 프랑스의 박물관을 찾아가 입장료를 내고 유물을 보아야한다. 그런데, 더욱 슬픈 사실은 걸프전쟁과 이라크 전쟁을 비롯한 수많은 사건들에 의해서 메소포타미아의 유적들이 파괴되고 있다. 저자 조르주 루는 "현대 무기가 이 위대하고 매력적인 문명의 마지막 증거를 없애지 못하도록 신께 기도하자."라고 책을 끝맺고 있다. 이슬람 사람들이 많이하는 말이 있다. "인샬라"! 신의 뜻대로라 뜻의 말이다. 찬란한 고대 문명을 이룩한 메소포타미아 지역이 더 이상 전쟁과 폭력으로 얼룩지지 않기를 바란다. 이제 이 곳에 평화가 깃들기를 신께 기도한다. 인샬라~~


ps. 메소포타미아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기록들을 참고로 기록해둔다. 


<히타이트군대의 바빌론 공격>

  삼수-디타나의 시대에 하티인들이 아카드 지방을 향해 진군해 왔다. 그러고 나서 그(무르실리스)는 바빌론으로 가서 바빌론을 파괴하고 후리인들을 무찌르고 사람과 물건을 바빌론에서 하투샤로 끌어갔다.(31쪽)-바빌로니아 연대기


<키루스의 움만-만다(메디아인) 정복>

  네가 말하는 이 움만-만다와 그들의 나라, 그리고 그들과 동맹을 맺은 모든 왕은 더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셋째 해에 마르두크가 그들에 대항하기 위해 안샨의 왕이며 자신의 젊은 종인 키루스를 일으켜 세웠다. 그(키루스)는 수많은 움만-만다 사람을 적은 수의 군대로 물리쳤다. 그리고 움만-만다의 왕 이슈투메구(아스티아게스)를 포로ㅗ 작아 끌어와 자기 나라에 가두었다.-211쪽


  이슈투메구 왕은 군대를 동원해 안샨의 왕 키루스를 잡기 위해 진군했다. (중략) 이슈투메구의 군대가 왕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고 왕은 포로가 되었다. 군대는 왕을 사슬에 묶어 키루스에게 넘겨주엇다. -211쪽 '나보니두스의 연대기'


<키루스의 바빌로 점령>

  타슈리투 월(9~10월)에 키루스가 티그리스 강변 우파(오피스)에 있는 아카드의 군대를 공격하자 아카드인들은 퇴각했다. 그는 재물을 약탈하고 사람들을 학살했다. 제14일에 시파르는 전투 없이 점령 당했다. 나보니두스는 달아났다. (중략)

  제16일에 구티움의 총독인 우그바루와 키루스의 군대가 전투 없이 바빌론에 들어갔다. 그 후 나보니두스가 돌아와서 사로잡혔다. 월말까지 구티인의 방패병들이 에사길의 문을 포위했지만 에사길이나 (다른) 신전에서 (의식)의 중단은 전혀 없었다.(중략)

  아라흐삼누 월(10~11월)3일에 키루스가 바빌론에 들어갔다. (도로가?) 그의 앞에서 가득 채워졌다. 키루스는 바빌론 전체에 인사했고 바빌론에는 평화가 깃들었다.-214쪽, '나보니두스의 연대기'


  비빌론의 모든 주민과 수메르와 아카드 모든 지방의 주민은 그 군주들과 총독들과 더불어 그(키루스)의 앞에 몸을 굽히고 그의 발에 입을 맞추면서 그가 왕위를 얻은 것을 기뻐했다. 그리고 그 눈부신 얼굴에 기쁨으로 경의를 표했다. 마치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주고 손해와 재난을 피하게 해 준 주인을 맞이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들은 그의 이름을 그렸다. -214쪽


<다리우스의 바빌론 점령>

  나는 그에게 말했다. '가거라!' 나에 대해 반대 의사를 밝힌 이 바빌로니아의 군대와 싸워라!' 빈다파르나는 (페르시아) 군대를 거느리고 바빌론을 향해 진군했다. 아후라마즈다는 나를 위해 그에게 도움을 주었다. 빈다파르나는 아후라마즈다의 뜻에 따라 바빌로니아인들과 맞서 싸워 그들을 포로로 사로잡았다. 마가자나 달의 22일이 흐른 후 그는 아라카와 그의 주요 지지자인 귀족들을 사로잡았다. 그때 나는 명령을 내렸다. '이 아라카와 그의 주요 지지자인 귀족들을 바빌론에서 말뚝에 박아 처형할 것이다."-2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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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소포타미아의 역사 1 한국문화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715
조르주 루 지음, 김유기 옮김 / 한국문화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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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게사 교과서에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대해서 설명이 나와 있지만, 제대로된 정보를 얻기 힘들다. 메소포타미아에 대한 교양을 쌓고자 선택한 책이 바로 '메소포타미아의 역사'이다. 이 책에 대한 독자들의 글들은 '최고의 책'이라는 감탄들이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에 대한 지식이 일천한 나로서는 쉬운 책만은 아니다. 물론, 메소포타미아의 역사1만 읽고 무리하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지만, 지금으로서는 쉽지 않은 책이다. 

이 책에 쉽지 않은 책일 수밖에 없는 근본원인은 나에게 있다. 메소포타미아에 대한 지식이 일천하기 때문이다. 

두번째는 이책에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유적지와 지명들의 위치를 나로서는 알 수없다. 적어도 독자를 배려한다면, 해당 쳅터에 등장하는 지명을 지도에 표시하서 삽화와 함께 제공해야하지 않을까? 처음듣는 지명들의 홍수로 나의 머리속은 홍수에 떠밀려가는 나룻배의 모습을 면치 못했다.

게다가 이책에는 왕조 계보도를 제공하지 않고 있다. '메소포타미아의 역사2'를 미리 살펴보니, '메소포타미아의 역사2'의 말미에 연표가 제시되어 있다. 이를 잘게 쪼개서 해당 쳅터에 배치했다면, 책을 읽는 것이 무척 수월했을 것이다. 일본에서 나온 역사책들에는 도표와 계보도가 잘 나와 있다. 이러한 배려를 타국의 저자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은 무엇때문일까?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재미있는 일화들이 소개되어 있다. 카슈시대(기원전 15세기)에 쓰인 바빌로니아 연대기의 저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에라-이미티 왕은 엔릴-바니라고 하는 정원사를 대리왕으로 자기 왕위에 앉히고 그의 머리 위에 왕권을 씌웠다. 에라-이미티가 너무 뜨거운 죽을 삼키다가 궁전에서 죽자 엔릴-바니는 왕위를 차지하고는 돌려주려 하지 않았고, 이리하여 군주가 되었다.-245쪽


불길한 징조가 있어서 왕이 신의 분노를 두려워하여 정원사를 대리왕으로 세웠는데, 왕이 갑자기 죽음으로서 정원사가 왕의 직책을 내려놓지 않고 실질적 왕이 되었다는 읍픈일이 고대 바빌로니아에서 있었다. 


쉽지 않은 책이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의 역사를 제대로 알아보겠다는 도전을 연기서 멈출수는 없다. 이제 '메소포타미아의 역사2'를 도전해 보자.


ps. 기록들을 첨부한다. 

<수메르의 종교 사상>

깊은 꿈 가운데 갑자기 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의 키는 하늘에 이르렀고 그의 키는 땅에 닿았다. .... 그의 오른쪽과 그의 왼쪽에는 사자들이 누워 있었다. 그는 나더러 자기를 위해 신전을 지으라고 했지만, 나는 그의 심장(=바람)을 이해하지 못하했다. .....갑자기 한 여자가 나타났다. 이 여자는 누가 아닌가? 이여자는 누구인가? .... 그 여자는 손에 빛나는 금속으로 만든 갈대를 쥐고 있었다. 하늘의 아름다운 글씨가 쓰인 토판을 들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220쪽

<고대 왕조 시대-수메르>

모든 나라의 왕 엔릴이 루갈자게시에게 이 나라의 왕권을 주고, 이 나라 앞에서 그의 정당성을 증명하고, 모든 나라가 그를 섬기게 하고, 해 뜨는 곳에서 해 지는 곳까지 모든 나라가 그의 법에 복종하게 했다. 그때 그(엔릴)는 아래 바다(아랍-페르시아 만)에서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를 지나 위 바다(지중해)까지 그(루갈자게시)에게 안전한 길을 허락했다. 나라들은 평화롭게 살았고 백성은 즐거운 가운데 밭에 물을 댔으며 수메르의 모든 왕조와 모든 나라의 군주가 우르크에서 그의 주권의 법에 복종했다. -1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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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와 함께 떠나는 소아시아 역사문화산책 - 터키에서 본 문명, 전쟁 그리고 역사 이야기
조윤수 지음 / 렛츠북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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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접종을 했을 즈음부터 읽기 시작했다. 소아시아사에 대한 많은 공부를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책은 예상외로 불친절했다. 해당 유적지를 방문한다면, 방문지에 대한 지도를 친절하게 제시해야했다. 그러나, 불친절한 커다란 지도를 한장 제시할 뿐, 해당 유적지가 터키의 어느 부분에 위치한지를 파악하기 위해서 인터넷에 신세를 져야했다. 가볍게 읽을 수는 있지만, 불친절한 자료제시에 실망감을 감출 수 없다. 

한가지 위로라면, 조윤수 대사가 제시한 사진 자료를 통해서 미처 알지 못한 소아시아의 다양한 유물 유적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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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 평전
윌리엄 J. 듀이커 지음, 정영목 옮김 / 푸른숲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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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만들어지는 것일까? 탄생하는 것일까? 호치민에 대해서 아는 것은 없을 찌라도, 호치민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백범 김구와 몽양 여운형을 떠올리며, 호치민은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이루었는데, 우리는 왜? 그 과업을 온전히 이루지 못했는지를 생각하며 베트남을 부러워했다. 호치민에 대한 제대로된 서적을 서가에서 찾아보았다. 900페이지라는 묵직한 벽돌책이 나의 눈에 들어왔다. 사실 내가 구할 수 있는 제대로된 호치민 평전은 미국인 역사학자 윌리엄 J. 듀이커의 '호치민 평전'이 유일했다. 선택의 여지 없이 벽돌책을 넘기기 시작했다. 호치민은 어떻게 조국의 통일과 독립을 이뤄낼 수 있었을까? 그는 만들어진 존재일까? 탄생한 존재일까?

 

1. 호치민의 신화는 만들어진 것일까?

이 책의 저자 윌리엄 J. 듀이커는 베트남 전쟁에서 베트공을 상대로 싸웠던 사람이다. 베트남의 적국 출신인 그는 역사학자가 되어 호치민을 연구했다. 아무리 객관적인 시선으로 호치민을 바라본다하더라도, 그가 베트남의 적극 출신이며, 미국인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의 책을 읽으며, 강대국의 시선으로 쓰여진 구절들이 못내 아쉬웠다. 객관성을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그의 에필로그는 '신화에서 인간으로'라는 주제로 쓰여 있다.

윌리엄 J. 듀이커의 한계를 느끼게 만든 구절들은 여러 곳이 있었다. 윌리엄 J. 듀이커는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시대적 배경에 대한 설명에 상당히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그러하다보니, 정작 호치민을 1인칭 시점에서 살펴보는 서술은 찾아보기 힘들다. 객관성을 강조하다보니, 호치민의 내면을 서술하지 못한 셈이다. 호치민이 쓴 자서전 또한 1차 사료로서 비중있게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한 윌리엄 J. 듀이커의 거리두기의 결과였다.

그래, 역사학자로서 객관성을 유지하고 픈, 그의 노력이라고 넘어가자며 위안을 했다. 그럼에도, 프랑스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려 투쟁한 베트남의 애국자 판보이차우를 "반역자"로 지칭한 것은 나의 심기를 무척이나 불편하게 했다. 그는 호치민이 바쁜 시간을 쪼개면서까지 조국 독립을 위한 글들을 저술하는 것조차 비아냥 거리기까지 했다.

 

"응우옌 아이 쿠옥은 사진 손질을 하고도 시간이 많이 남았던 모양이다."-121

 

생계를 위해서 사진 손질을 하고, 시간을 쪼개서 조국 독립을 위한 글을 쓰는 응우예나 아이 쿠옥(호치민)"시간이 많이 남았던 모양"이라는 비아냥거리는 표현은 나로하여금 윌리엄 J. 듀이커의 인격을 의심케했다. 아니, 세계 초강대국 미국 출신의 역사학자로서는 조국 독립 투쟁이라는 거룩한 가시밭길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일까?

윌리엄 J. 듀이커는 '객관성'이라는 매쓰를 사용해서, 응우옌 아이 쿠옥(호치민)을 마음껏 해부했다. 그리고 그 해부는 응우예나 아이 쿠옥을 흠집내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을까?’라는 합리적 의심을 갖게한다. 베트남인들이 존경한 판보이챠우가 베트남인의 밀고로 프랑스 당국에 체포되어 베트남으로 압송되었다. 판보이차우를 밀고한 사람을 그의 비서 응우옌 투옹 후옌으로 볼 것인가, 응우옌 아이 쿠옥의 동료 람둑 투로 볼 것인가를 두고, 윌리엄 J. 듀이커는 세심하게 검증의 매쓰를 들이댔다. 어쩌면 응우예나 아이 쿠옥이 범인일수도 있다는 뉘앙스가 풍기기도 했다. 다행히 윌리엄 J. 듀이커는 판보이차우를 밀고한 인물은 응우옌 투옹 후옌으로 결론 내렸다. 객관성, 실증성, 논리성이라는 명목으로 응우옌 아이 쿠옥을 해부했다. 애국이라는 뜻의 응우옌 아이 쿠옥으로 이름을 바꾼 호치민이 독립운동의 선배를 내부 권력투쟁을 위해서 밀고했을 수도 있다고 전제하고, 이를 상세히 서술한 윌리엄 J. 듀이커를 나는 이해할 수 없다. 독립전쟁이라봐야 방임적 통치를한 영국에게서 전쟁한 것이 고작인 미국! 그러한 미국인으로서 가혹한 프랑스의 지배를 받아야했던 베트남인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과 희생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 불가능함을 응우옌 아이 쿠옥에게 들이대는 '객관성'이라는 매쓰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저자 윌리엄 J. 듀이커는 호치민에게 덧씌워진 '호 아저씨'라는 신화를 깨고 싶었나보다. 이 책의 곳곳에 "호는 인자한 호 아저씨 역할을 완벽하게 해냈다."(742)라는 글이 난무하고 있다. 조국의 독립과 통일이라는 목숨을 건 투쟁을 하는 사람이 자신의 야망과 탐욕을 숨기고 '호 아저씨'의 역할을 수행했다는 전제 자체에 동의할 수 없다. 평생을 인자하고 검소하게 살았다면, 그것은 배우로서의 가면을 쓴 것이 아니라, 그의 본모습이아닐까? 설령 저자의 말대로 "호 아저씨 역할"을 했을지라도, 평생을 "호 아저씨 역할"을 하며 살았다면, 호치민은 호 아저씨로 보아야하지 않을까?

저자 윌리엄 J. 듀이커는 호치민의 신화를 깨기 위해서 매쓰를 호치민의 여자문제에 들이댔다. 여기에 주석의 개인 간호사인 수안이라는 젊은 여성이 등장한다.

 

"(1955년 국경의 카오 방 성 출신의 한여자가 하노이에 도착했다. 예쁘장한 수안은 곧 나이가 들어가는 주석의 눈길을 끌었으며, 그는 그녀에게 개인 간호사 일을 맡겼다. 결국 수안은 주석의 아들을 낳았으며, 훗날 이 아들은 호의 개인 비서인 부키가 양자로 데려갔다. 1957년 어느 날 수안의 주검이 교외의 한 도로변에서 발견되었다. ......(중략).... "처음에 이 사건은 거의 공개되지 않았다. 그러나 몇 년 뒤 죽은 여자들 가운데 한 여자의 약혼자가 국회에 진정서를 보내, 수안 양은 찬 쿠옥 호안에게 강간당했으며, 호안이 자신의 죄를 덮으려고 그녀를 죽이라고 명령했고, 다른 두 여자 역시 진상 공개를 막기 위해 비슷한 방법으로 처리했다고 주장했다. 진정서 사건은 금방 흐지부지되고 호안은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으나......(중략).... 호치민이 이 애처로운 이야기를 상세하게 알고 있었는지는 분명치않지만, 어쨌든 그는 이 일을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다."-738

 

윌리엄 J. 듀이커는 이 부분을 서술하면서 "주석"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 혹은 "호치민"이라는 단어를 사용해도 될텐데, 굳이 "주석"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이유는 무엇일까? 호치민이 수안을 정식 아내로 등록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의 말대로, 호치민이 "호 아저씨"라는 배역을 강요받았기에 평생을 혼자서 살아야만 했던 것일까? 호치민은 왜? 억울하게 죽은 수안의 원한을 풀어주지 못했을까? 수안 사건은 박정희 정권시기에 있었던 정인숙 사건과 비슷한 사건일까? 숱한 의문이 나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윌리엄 J. 듀이커의 검증의 칼날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남자의 가장 약한 급소는 배꼽아랫일이다. 유력 대선후보가 여자문제로 감옥에 가는 일이 있을 정도로, 청렴결백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진보 개혁진영에서 여자문제는 치명상을 입힌다. 윌리엄 J. 듀이커는 호치민의 급소를 직접 건드린다.

70대의 할아버지가 된 호치민은 중국의 당 지도자 타오 주가 하노이를 공식 방문했을 때, 벗을 삼으려하니 중국 광둥성의 젊은 여자를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타오가 베트남에서 시중드는 사람을 구하지 않느냐고 묻자, 호치민은 "모두 나를 호 아저씨라고 부른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평생을 혼자 살아야했던 호치민! 그는 너무도 외로웠을 것이다. 조국과 결혼했다고 생각해도 되겠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가정을 이루며 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이 아닌가! 그런데, 호치민은 그의 아우라 때문인지, 윌리엄 J. 듀이커의 말대로 호 아저씨의 역할을 강요받아서인지 몰라도 공식적으로는 여성을 가까이할 수 없었다. 윌리엄 J. 듀이커가 들이댄 검증의 칼날을 보며, 이것이 만약 사실이라면, 호치민을 위선자로 비난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한여인을 사랑하고 싶고 한여인을 사랑하고 싶은 평범한 남성의 바램을 느낄 수도있다. 나는 그를 후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싶다.

호치민은 여러차례 유언장을 수정했다. 전쟁 이후, 국민들을 위한 정책을 제시하며, 자신의 시신을 화장해서 베트남의 북부, 중부, 남부에 흩어 뿌리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자신의 재를 뿌린 장소를 알리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베트남의 정치가들은 호치민의 바램을 짓밟았다. 권력을 잡은 레 두안은 호치민의 시신을 방부처리했다. 유언장에서 세금 감면과 소박한 장례식을 요청한 부분을 삭제했다. 베트남 공산당은 그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호치민을 신격화했다. 그렇게 그는 신화가 되었다.

윌리엄 J. 듀이커는 이 책에서 끈질기게 호치민의 신화를 해체하려했다. 그러나, 그도 결론에서는 "호는 전세계의 추방당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진정한 목소리를 찾아주기 위해 강력하게 투쟁했던 혁명적 영웅의 한 사람으로 확실하게 자리잡고 있다."(840)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호치민의 신화는 지구상의 억압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신화로 남을 수밖에 없다. 호치민이 그러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2. 그는 가능했고, 우리는 불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베트남은 독립과 통일을 이루어냈다. 그것도 국제 정세를 기민하게 이용해서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을 이뤄냈다. 우리는 강대국들에 의해서 독립을 했고, 그들에 의해서 분단이 되었다. 베트남은 이루었고, 우리는 이루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에게 김구와 여운형이 있었다면, 그들에게는 호치민이 있었다. 베트남 독립과 통일의 비결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호치민을 탐구하는 것이 유용한 방법이다. 호치민은 베트남 독립을 위해서 일생을 살았던 판보이 차우와 판쭈친의 영향을 받으로 성장했다. 독립 정신을 가지고 계신 아버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영향을 받으며 호치민이라는 거목이 자라났다. 호치민의 형 응우옌 신키엠과 누나 응우옌 티 타인 또한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반프랑스 저항운동에 참여했다. 한그루의 거목이 자연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듯이, 베트남 식민지배라는 상황속에서 수많은 애국지사의 영향을 받으며 그는 혁명가로 자라났다.

예수가 광야를 헤매고, 공자가 천하를 주유하며 자신을 달련했듯이, 호치민은 프랑스로 가는 배의 주방보조역할을 하며 세계를 탐방한다. 인도차이나를 비롯해서, 베트남을 식민지배하는 프랑스와 세계 초강대국으로 성장하고 있는 미국, 식민지배의 고통을 당하고 있는 아프리가 등지를 전전하며 견문을 넓힌다. 이 시기가 그에게 국제 정세에 대한 탁월한 식견을 갖게했다. 호랑이가 사냥감을 기다리며 엎드려있듯이, 그는 조국 독립을 준비하며 조용히 세계를 여행했다.

어떤이는 우리의 독립운동 세력이 분열되었기에 우리의 비극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1920년대 베트남에는 3개의 공산당이 존재할 정도로 공산주의 세력은 분열되어있었다. 또한 이들은 민족주의 세력과도 대립했다. 독립운동세력의 분열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베트남은 이루었고, 우리는 이루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첫번째 이유는 호치민이 공산주의 보다는 민족을 먼저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에게도 백범 김구와 몽양 여운형 처럼 민족을 우선시하는 분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분들은 권력의 핵심을 잡아내지 못했다. 그에 반해서 호치민은 코민테른에서 활동하면서도 소련에게 그의 공산주의 사상을 의심받을 정도로 민족을 계급투쟁보다 중시했다. 그가 소련과 친밀했던 이유는 베트남의 독립을 도와줄 나라가 소련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19241월 레닌의 죽음과 1925년 쑨원의 죽음, 1920년데 판보이 처우와 판쭈친의 죽음, 그리고 그후, 베트남 국내에서 활동하던 기라성 같은 독립운동가가 죽음으로써, 사실상 베트남 독립을 이끌 수 있는 리더가 호치민밖에 없었다. 1940년 봄 베트남으로 귀환한 그는 "아시아 혁명은 자기 나름의 역할이 있으며, 볼셰비키 모델을 따를 필요가 없다."(392)라고 말하며 자신의 독립운동 전략을 실현해 나갈 수 있어다. 그랬다. 그는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다. 생존투쟁에서 살아남았기에 민족을 우선시한 그의 독립운동 전략을 실현할 수 있었다.

둘째, 기민하게 국제 정세를 파악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을 달성하려했다. 몽양 여운형이 국내에서 다양한 세력을 끌여들여 조선 건국동맹을 조직하고, 백범 김구가 광복군과 미 OSS와 손을 잡고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했지만, 일본의 빠른 패망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호치민은 일제가 패망하기 전에 베트남으로 잠입하여 조직을 정비하고 다가오는 조국독립의 때를 준비했다. 그리고 일본이 패망하고 프랑스가 아직 베트남에 들어오지 않은 절묘한 기회를 틈타서 전국적 봉기를 일으켜 독립을 달성한다. 다른 민족주의자들이 중국 남부에 그대로 남아 연합군이 일본을 물리쳐주기를 기다린 반면, 호치민과 그의 동료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서서 도전했다. 그리고 다가온 기회를 이용해서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을 달성했다. 피를 흘리며 댓가를 당당히 요구한 호치민과 그의 동료들은 독립이라는 결실을 얻을 수 있었지만, 남이 대신 피를 흘리기를 기다린 그의 경쟁자들은 결실을 얻을 자격이 없었다.

셋째, 희망을 잃지 않았다. 어떤이는 베트남의 상황보다 한국의 상황이 매우 나빴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1945년의 상황은 베트남이 더 나빴다. 북부는 중국군과 프랑스군이 군침을 흘리고 있었으며, 남부는 영국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한때, 미약하게나마 베트남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미국은 베트남 편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호치민은 희망을 잃지 않았다. 악조건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다. 파리에서 베트남으로 돌아모며 신생국 베트남에 대해서 호치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부족하다. 우리한테는 기계도 없고, 원료도 없고, 심지어 숙련된 노동자도 없다. 우리 재정은 거의 바닥이 난 상태이다. 그러나 우리 조국에는 산과 숲, 강과 바다가 풍부하다. 그리고 우리 동포는 결의, 용기, 창의성이 강하다."-565

 

빈약한 무기로 프랑스와 다시 전쟁을 시작해야하는 상황에서도 그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칠흑같은 암흑 속에서 한줄기 빛을 볼 수 있는 자가 바로 호치민이었다. 인간의 가장 큰 무기는 희망이다. 호치민은 베트남인들에게 희망을 불어 넣었다. 이를 통해서 베트남인들은 인도차이나 전쟁이라는 30년 전쟁에서, 프랑스를 물리쳤고, 세계 초강대국 미국을 물러나게했다.

세계적 초능력자 유리겔러에게 고 노무현 대통령이 한국의 통일을 이룰방법을 묻자. "한국사람 모두가 한마음으로 통일을 외친다면, 그때 통일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베트남인들에게는 호치민이라는 탁월한 리더가 있었고, 그 리더를 믿고 한마음으로 독립과 통일을 외쳤다. 우리에게는 탁월한 리더가 많았다. 몽양 여운형을 비롯해서, 백범 김구 등등... 수많은 탁월한 리더가 있었지만, 우리는 그들을 중심으로 한마음으로 외치지 못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아직도 분단체제를 이용해서 자신의 기득권을 누리려는 세력이 존재하는한, 우리의 소원은 쉽게 이뤄지지 못할 것이다.

 

900페이지의 벽돌책을 내려 놓으며 새해를 맞이했다. 영웅은 만들어지는 것이다. 프랑스 식민지배라는 매서운 추위를 견디며 봄이 오기를 기다려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을 달성한 베트남인들은 호치민을 만들었다. 그들의 영웅을 만들었다. 베트남인들이 호치민이라는 리더를 믿고 희생하지 않았다면,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리더십보다 팔오우십이 약했다. 많은 사람이 좋은 리더가 되려했지, 현명한 팔로우가 되려하지 않았다. 프랑스와의 전쟁(1차 인도차이나전쟁), 미국과의 전쟁(2차 인도차이나 전쟁), 중국과의 전쟁(3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의 리더 호치민이 죽었으나 베트남이 쓰러지지 않은 것도, 베트남인들의 탁월한 팔로우십 때문이다. 호치민의 신화가 만들어진 것이며, 호치민은 평범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윌리엄 J. 듀이커는 증명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베트남인들에게 그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다. 호치민 신화는 베트남인들에 의해서만들어진 것이기에, 베트남이 다시 위기에 빠진다면, 그들은 호치민 신화를 소환하거나, 새로운 신화를 만들것이다. 신화는 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기 때문이다. 그 신화는 다시 한번 베트남을 일으켜 세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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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iKim 2022-03-08 10: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습니다. 사실 듀이커는 자유주의자 입장에서 베트남 전쟁을 비판적으로 봤던 학자죠. 호의 가족 및 청렴 문제를 건드리기도 하지만, 저는 그런 점들 보단, 듀이커가 인간 호치민의 혁명적 생애를 보다 조명하는데 더 시간을 할애했다는 생각이 책을 읽으며 들었었죠. 아이러니 하게도 예전에 미국서 만난 베트남계 미국인 하버드 대 교수는 저랑 대화하면서, ˝듀이커의 호치민 전기는 좋은 책이지만, 호치민의 과오에 대해선 별로 언급하지 않는다.˝고 얘기했던게 기억이 납니다. PBS에서 만든 베트남 전쟁 시리즈가 명작임에도 미국 위주의 편향성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는 비판을 피하기 힘들듯이, 듀이커도 그렇겠죠. 저는 베트남 여행가기 전인 2020년 1월에 다시한번 듀이커의 《호치민 평전》을 읽었었는데, ‘실패한 사회주의‘라는 듀이커의 표현이 다소 불편했습니다. 베트남 도이모이의 배경에는 미국의 살인적인 경제제재가 분명히 있는데, 듀이커는 이에 대해 입을 닫았죠. 서방학자가 가지는 한계랄까요.

뭐 그래도 듀이커의 《호치민 평전》이 훌륭한 역작이고, 지금까지 나온 호치민 주석 관련 책들 중에선 결정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 봅니다. 강나루 님의 좋은 서평 잘 읽었습니다.

강나루 2022-03-08 21:48   좋아요 1 | URL
듀이커에 대한 정보와 개인적으로 만난 학자와의 대화 내용이 흥미롭군요. 호치민에게 관심이 많은 NamGiKim님의 견해 잘들었습니다. <<호치민 평전>>에 많은 기대를 했기에 몇몇 부분에서 실망을 했지요. 그렇다 하더라도, 한글로된 호치민에 대한 책이 희소한 현실에서 <<호치민 평전>>은 소중한 책이라는 견해는 동의 합니다.

NamGiKim 2022-03-08 21:58   좋아요 1 | URL
하버드 대 교수로 호치민시와 미국을 왔다갔다 하는 사람이었죠. LA에서 인천으로 귀국하는 비행기 옆자리에 앉았죠. 그래서 얘기를 좀 나눴습니다. 제가 베트남 역사를 제법 아니, 반가웠는지 명함도 주더군요. 호치민 보다 응오딘지엠을 긍정적으로 말했었죠. ˝응오딘지엠은 애국자지만 잔인하기도 했다.˝고 ㅋㅋㅋㅋㅋㅋㅋ

보트피플의 태생적 한계랄까요.
 
몽골제국의 후예들 - 티무르제국부터 러시아까지, 몽골제국 이후의 중앙유라시아사
이주엽 지음 / 책과함께 / 2020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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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골제국의 후예들'이라는 제목은 박진감 너치는 영웅들의 활약을 기대하게한다. 티무르를 비롯한 몽골제국의 후예들이 펼치는 영웅담을 기대며 이 책을 펼쳤다. 그러나, 책의 내용은 쉽지 않았다. 처음 들어보는 제국의 이름과 너무도 많은 인물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얇은 책에 넓은 이야기를 담으려니 수박 겉핥기 식의 서술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나의 기대와는 다른 책이었다. 


  이 책을 읽으며 얻은 가장 큰 수확은 13세기 유라시아 대제국을 건설한 몽골제국이 어느 순간 사라진 것이 아니라, 칭기즈칸의 후예들이 그 이후에도 줄기차게 역사의 족적을 남겼다는 사실이다. 세계사에서 티무르제국과 무굴제국 정도만 기억하던 나에게 모굴 칸국을 비롯해서 우주벡 칸국까지 여러 몽골제국 계승국가를 알게 되었다. 역사는 단절되기 보다는 하나의 거대한 흐름으로 앞시기의 역사가 뒷시기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확인했다. 


  물론, 저자 이주엽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있다. 칭기즈칸의 피가 섞였다고 해서 그 왕국을 몽골제국 계승국가로 여길 수 있느냐는 문제이다. 이주엽은 10장 청제국 : 몽골인의 협력으로 건설된 만주인의 제국을 저술했다. '청제국'을 독립된 장으로 저술한 것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청제국은 엄연한 만주인의 제국인데 '4부 동내륙아시아의 몽골제국 후예들'이라는 제목으로 10장 청제국과 11장 북원을 하나로 묶어 편성한 것은 지나친 논리적 비약으로 보인다. 또한 맘룩 제국의 지도자 중에서 몽골인의 피가 섞인 자들을 골라내어 강조한 것도 논리적 비약으로 보인다. 


  광대한 스케일을 자랑하던 몽골제국이 멸망했다. 그후,  수많은 계승국가들이 출현했다. 이들의 역사를 하나의 책으로 정리한다는 것 자체가 무척이나 힘든작업이다. 이 작업을 해낸 이주엽의 학문적 성취는 마땅히 인정해야한다. 이책을 덮으며 저자 이주엽의 집념과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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