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선생 지식경영법 - 전방위적 지식인 정약용의 치학治學 전략
정민 지음 / 김영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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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 정약용! 500권의 저술을 남긴 천재라고 많은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다. 중학교 시절, 역사선생님은 그를 '아마데우스'의 모짜르트에 비교하며 자신은 이런 천재에게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않는다고 했다. 열정은 있으데 능력이 바춰주지 않는 쌀리에르에게 연민을 느낀다고 했다. 그당시 정약용은 천재적인 능력 덕분에 실학을 집대성할 수 있었다고 알게 되었다. 과연 그럴까? 정약용은 천재이기에 500여권의 저서를 남길 수 있었을까? 그 명쾌한 해답을 들어보자.

 

  1. 그의 공부법에는 어떠한 비결이 있었을까?

  문심혜두! 지혜의 구멍이열리지 않는다면 만권의 책을 독파한다한들 않읽은 것과 같다!라는 다산의 지적은 나의 폐부를 찔렀다. 정독보다는 다독을 추구하는 나였기에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그책을 잡고 언제까지나 고민하지 않았다. 재빨리 다음 부분으로 넘어가며 책을 읽어 내려갔다. 내가 이해를 제대로 할 때만이 진실로 그 책을 읽는 보람이 있다! 다산의 지적은 나의 독서법을 반성케했다.

  그의 독서법(저술법)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자신이 책을 읽다가 새롭게 깨달은 점을 메모해둔다는 것이다. 이를 한데 모았다가 분류를 지어 책으로 묶어낸다. 메모의 중요성을 일찍이 들었지만, 귀차니즘과 그 실효성에 의문을 품었기에 이를 실천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산의 500여권 저술의 힘이 바로 이 메모에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나도 실천하기로 마음 먹었다. 이 책부터 메모를 시작했다. 서평을 쓰는 지금 이 메모가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불취하문(不恥下問)이라 했다.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수취로 알지 말라는 공자님의 말씀을 다산이 실천하고 있었다. 다산이 유배지에서 주인 노파에게서 배운 일화는 너무도 감동적이었다. 남존여비 사상에 매몰되어 있는 당시 조선의 선비들에게 노파는 여자를 차별하는 현실을 지적한다. 그리고는 "아버지는 씨앗이고 어머니는 땅인 셈이지요. 씨를 뿌려 땅에 떨어 뜨리는 것은 크게 힘든 일이 아니지만, 땅이 양분을 주어 기르는 일은 그 공이 몹시 큽니다."라며 여성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설파한다. 그러자 다산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표했다. 우리나라 페미니즘의 선구라고 할만한 노파의말에 다산이 진심으로 감복한 것이다. 남자보다 비천하다는 여성에게 다산이 여성의 소중함을 깨달은 것이다.

  이렇듯 다산은 어느 누구와도 토론하고 싶어했다. '어린 시절 티격태격하던 것 처럼 싸워보자'라는 다산의 편지글은 지금의 '하브루타' 학습법을 떠올리게 만든다. 토론수업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지금! 유대인 교육의 핵심인 '하브루타'를 다산은 이미 하고 있었다. 그 전통을 우리는 왜? 잃어버렸을까?

  다산은 귀양지에서 '과골삼천'의 모습을 보였다. 책을 읽고 저술하느라 복사뼈 살이 세번이나 구멍이 났다. 그정도로 공부에 매진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선 자리를 사랑했다. 일상득취법! 그것은 귀양지 생활을 이겨낸 힘이었다. 나무를 심고 연꽃을 연못에 기르며 자신이 생각하는 아름다운 다산초당을 만들었다. 얹혀살고 있는 다산은 자신의 집처럼 초당을 꾸미고 주인처럼 살고 있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 머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된다면 그곳이 바로 진리의 세계이다!라는 임제스님의 말을 그가 실천하고 있었다. 좌절과 실의에 빠지기 보다는 지금의 현실속에서 주인이 되어 당당히 자신의 학문세계를 닦아가는 그의 태도가 그의 진정한 공부법의 비결이었다.

 

2. 다산에게 대한 오해와 편견

  다산은 잘알려져 있지만, 너무 잘알려져 있기에 그에 대해서 자세히 모르는 사람이 많다. 그 중에는 편견으로 가득한 사실들도 많다. 다산이 '기기도설'을 보고 거중기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잘알려져있다. 일부 사람들은 거중기가 특별할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미 '기기도설'에 나와 있기에 그걸 그대로 재현했을 뿐이라고 다산을 깎아내린다. 그러나 다산은 거중기를 재현한 것이 아니다. '기기도설'의 원리를 이용하여 조선의 현실에 맞게 전혀 다른 거중기를 만들어냈다. 이것이 바로 다산의 위대성이다. 핵심원리를 취득하여 제2의 창조를 하는 모습 그것을 우리는 주목해야한다.

  어떤 사람은 정약용이 주자를 비판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그를 성리학자라고 말하기도 한다. 역사를 좀 안다는 선생님이 이런 말을 할때, 나는 별로 반박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것이 오해였다. 주자 절대주의에 빠져있는 교조적 조선사회에서 주자를 비판한다는 것은 사문난적으로 몰릴 수도 있는 일이다. 자신의 죽음을 부를 수 있는 현실에서 대놓고 주자를 비판할 수 없다. 그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주자의 학설을 비판했다. '인'에 대한 입장이 주자와 달랐던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당시의 시대상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얇은 지식으로 다산을 평가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다산에 대한 많은 오해와 편견 중에서, 가장 큰 것은 다산이 혼자서 500여권의 책을 저술했다는 점과 그에게는 제자가 없었으리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는 다산에 대해서 너무도 무지한 소치였다. 다산은 그의 저술에 아들들의 힘을 빌리기도 했으며, 직접 외가쪽의 아이들을 모아다가 가르쳤고 그들이 일정한 경지에 오르자 자신의 저술작업에 참여시켰다.

  이들 제자중에서 황상이라는 제자가 그의 수제자라 할 수 있다. 황상과의 첫만남은 참으로 인상 깊다. 황상이 자신은 둔하고 앞뒤가 막혀있으며 답답한 성격이라고 말하며 문사를 공부하라는 다산의 권유에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인다. 다산은 "배우는 사람에게 큰 병통이 세 가지 있다. 네게는 그 것이 없구나. 첫째, 외우는 데 민첩한 사람은 소홀한 것이 문제다. 둘째, 글 짓는 것이 날래면 글이 들떠 날리는 게 병통이지. 셋째, 깨달음이 재빠르면 거친 것이 폐단이다. 대저 둔한데도 계속 천착하는 사람은 구멍이 넓게 되고, 막혔다가 뚫리면 그 흐름이 성대해진단다."라는 말로 황상을 감복시켜 학문의 길로 인도한다. 그리고 황상은 다산이 죽어서도 그를 잊지 않는다.

  그뿐이아니다. 18년 동안 날마다 저술만 하다보니 복사뼈가 세번이나 구멍이 나는 모습을 보여주어 황상을 감복시키기도 했다. '과골삼천'의 모습!! 이를 보고 학문을 게을리할 제자가 있었을까?

  다산의 저작은 다산학단의 집체 활동의 결과물이다. 다산은 저술의 총 기획자였고 제자들은 자료를 모으고 발췌했으며 이를 편집했다. 그러면서 이들 제자들의 학문수준도 높아졌다. 황상을 비롯한 이청, 이강회 등의 제자들이 많은 저작을 남겼다. 이 부분은 앞으로 더 많은 연구와 자료의 발굴이 필요하다. 다산이 다시 등용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기에 그의 제자들의 학문적 업적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그 부분이 다시 세상에 제대로 알려질 때! 다산의 위대성은 범접할 수 없는 경지가 아니라, 누구든지 노력하면 따라갈 수 있는 길임을 많은 사람들이 인식할 것이다.

 

3. 조선 중화법!!

 다산은 중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의 앞선 것을 받아들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반드시 우리것을 근본으로 삼는다. 바로 조선 중화법이다. 그렇다고 우리것을 고수하지는 않는다. 변화를 두려워하기 보다는 변화를 추구한다. 이것이 다산의 학문정신이다. 개방적이면 주체성이 없고, 주체적이면 자기것을 고수하여 타국의 장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산은 이 극단을 취하지 않고 뿌리를 조선에 두지만, 외부의 장점을 받아들여 변화를 추구했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다산에게서 배워야할 학문하는 모습이다.

  순수와 참여의 논쟁이 있었다. 어찌보면 대가들의 논쟁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현실을 직면할 용기없는 작가들의 변명에 지나지 않는 논쟁이라 생각된다. 현실을 떠난 문학이 문할일 수 있을까? 다산은 당시 조선 사회를 고발하는 다양한 문학 작품을 남겼다. '애절양'을 비롯해서 수많은 시들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는 조선의 민초들의 모습을 그려냈다.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의 삶을 개선시킬 수 있는 방법을 궁리했다. 그 결과 '목민심서', '흠흠심서'와 같은 대작들이 나온 것이다. 잊지 말자! 현실에 뿌리밖지 않는 문학은 문학이 아니다. 단지 말장난일 뿐이다.

 

4. 잡상

  다산은 글쓰기 방법도 알려준다. 스토리텔링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인물을 드러낼 때는 반드시 예화를 들라고 한다. 이것은 이덕일의 글쓰기와 정확히 맥이 닿아있다. 이덕일의 평전과 타인물의 평전의 가장 큰 차이점은 한인물에 대한 막연한 왜침만을 부르짖는 평전들과 달리, 이덕일은 다양한 예화를 통해서 그 인물을 드러낸다. 스토리텔링의 중요성을 다산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지기췌마법' 즉, 기미를 분별하고 미루어 헤아려라라는 다산의 말을 통해서, 그가 혹시 한비자를 읽은 것은 아닐까?라는 상상을 해본다. 기미를 제대로 헤아리라는 말은 한비자에 있는 내용이다.  무오년(1798) 겨울에 돌림병이 서쪽 길을 따라 퍼졌다. 나이든 사람들이 죽어나가자, 그는 황해도 배천의 강서사에 가서 화문석을 사오게 했다. '칙사'가 오는 것도 아닌데 왜? 화문석을 사오게했을까? 얼마후, '황제가 붕어하여 칙사가 왔다.' 그는 서쪽에서 온 돌림병에 노인들이 죽어나가자, 나이가 80이 넘은 황제가 무사할리 없다고 판단하고, 칙사가 올 것을 예상하고 화문석을 가져오라고 했던 것이다. 기미를 살펴 앞으로의 일에 대비한다는 한비자의 당부를 다산은 실천하고 있었다,

  사실 그는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탁월한 재판관으로서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유가만을 공부했다면 보일 수없는 모습들을 보면서 그가 다양한 학문을 섭렵하며 그 바탕을 마련했을 것이라 상상해본다.

 

  오래보아야 아름답다라는 말이 있다. 오래보아야 제대로 알 수 있다. 다산에 대해서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그를 평가하는 사람들이 범하는 우를 이 책을 통해서 바로잡게 되었다. 다산은 천재이기 보다는 노력하는 학자였다. 혼자 공부하기 보다는 여러 사람이 팀을 이루어 집단 연구를 통해서 학문적 성취를 이루는 노련한 기획자였다. 그의 모습을 바로 바라보면 우리가 어떠한 교육과 학문연구를 해야하는지 방향이 보인다. 21세기를 살아가는 모든 분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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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버린 천재들 - 역사의 선각자로 부활하다
이덕일 지음 / 옥당(북커스베르겐)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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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덕일의 책들을 20여권을 읽어본 나로서는 이제는 내가 읽었던 시기의 이덕일의 책을 읽지 않기로 결심했다. 과거에 읽었던 책들과 유사한 내용이 많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책은 책 제목이 나를 휘어 잡았다. '조선이 버린 천재들'이라! 어찌 매력적이지 않는가? 시대를 잘못만나서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가야만 했던 자들! 이덕일의 역사서술의 커다란 축은 그러한 자들을 찾아내어 조명하는 것이다. 그점이 이덕일의 매력이다. 그러다면 이 책의 면모를 살펴보자.

 

1. 정사와 야사를 넘나드는 글쓰기

  이덕일은 조선왕조 실록만을 참고하지 않는다. '동각잡기'를 비롯한 많은 야사류의 책들을 참고한다. 그것이 정사의 딱딱함을 야사의 부드러움으로 채우는 이덕일의 비결이다. 햇볕 비치면 정사가 되고, 월광에 바래면 신화가 된다는 말이 있다. 야사류라해서 정확하지 않은 기록은 아니다. 야사류는 오히려 일반 민중들이 평가가 담겨있으며, 일반 민중들이 바라는 인물상이 투영되어 있다는 점에서 오후려 정사 못지 않은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특히 사료가 부족한 홍경래에 관해서 '홍경래 실기', '홍경래전', '신미록' 등의 글들을 풍부하게 인용하여 홍경래를 부활시켰다. 그중 일부를 인용해보자.

 

  이 중에서도 평안도 사람들은 더욱 당세에 쓰이지 못했다. 조선 초에는 고려 유민이라 하여 위험하게 여겨 쓰지 않았고, 나중에는 천하게 여겨 쓰지 않았다. 서울의 하인배나 충청도의 졸개들까지도 서북인을 '사람'이라 부르지 않고, '놈'이라 불렀다. 서북지방의 감사, 수령들이 백성의 재물을 다반사로 토색한 것도 서북민을 내심으로 천시한 까닭이다. -홍경래전-

 

생동감 있는 이러한 글들은 '홍경래'라는 인물을 더욱 생동감 있게 되살려주고 있다.

 

2. 평전으로 꾸며도 좋을 인물들

  이 책에는 각 인물들에 대해서 심도있게 파악하기에는 자료가 너무도 적게 제시되어 있다. 그러하기에 이 책을 입문서로 해서 각인물들에 대한 심도있는 평정이 집필된다면 나름의 의미가 있어 보인다. 정도전과 윤휴은 이미 이덕일이 평전으로 쓴 인물들이기에, 이징옥, 홍경래, 김개남, 강홍립등의 인물은 독자적인 평전을 써도 좋을 것 같다.

  이징옥은 세조의 계유정난에 반발해서 그가 보여 주었던 웅대함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홍경래는 민중의 시각에서 그를 새롭게 부활하고, 대부분 동학농민운동하면 전봉준만을 떠올리는 현실속에서 김개남을 중심으로 동학농민운동을 새롭게 조명하고, 광해군의 중립외교의 첨병이자, 정묘호란이 신속히 마무리 될 수 있도록 조력한 강홍립의 삶을 조명하는 것은 크나큰 의미를 갖는다. 이덕일이 개별 인물에 대한 평전을 내 놓기를 기대해본다.

 

  예전에 읽었던 책에, 이덕일 자신이 크게 자동차 사고를 당했어도 멀쩡하게 살수 있었던 것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패배자들아 자신을 보살펴 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들을 회피하려해도 그들을 회피할 수 없다고 토로하고 있다. 이덕일의 숙명과도 같은 역사의 패배자들에 대한 재조명이 계속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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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 독살사건 2 - 효종에서 고종까지
이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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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왕 독살 사건1'을 읽고, 2권을 읽어 내려갔다. 흡입력있는 이덕일의 글은 너무도 쉽게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물론, 효종과 관련된 내용은, 이덕일이 쓴 '조선 왕을 말하다2'에서 읽었던 내용이고, 현종은 '윤휴와 침묵의 제국'과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에서 읽었던 내용이다. 경종은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 정조는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에서 이미 읽었던 내용들이다. 이미 아는 내용이기에 그냥 술술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1. 독살 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왕들

  2권에서 독살이 확실시 되는 왕은 '고종'이다. 고종은 이태진 교수도 독살되었을 것으로 여기고 있으며, 이 책에서는 인용되지 않고 있으나, 친일파 윤치호의 읽기에서도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전언을 싣고 있다. 사도세자의 후예들은 독살이라기 보다는 모함에 의해서 죽어간 사도세자의 후손들이다.

  경종은 독살 되었을 것으로 짐작은 되나 단언은 하기 힘들어 보인다. 목호룡의 고변에서 볼 수 있듯이 경종은 그가 살아있을 때부터 신변의 위협을 받아왔다. 그리고 영조는 자신이 경종을 죽이지 않았다고 끊임없이 주장해왔던 것도 경종 독살설을 반증해주는 사실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2. 독살되었다고 단정하기에 애매한 왕들

  이덕일은 효종과 현종, 정조도 독살되었다고 단언을 한다. 물론 효종의 경우, 손을 떠는 신가귀를 시켜 침을 놓게한 점, 현종의 경우 갑작스런 복통을 한점, 정조의 경우 노론이 그를 죽이려 끊임없이 노력한 점 등을 본다면 독살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결정적인 근거가 부족한 상황 속에서 독살되었다고 단언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효종의 경우 단순한 의료 사고로 볼 수도 있으며, 현종의 경우는 그 동안 잠재되었던 지병이 분노로 인해서 죽음으로 그를 몰았을 가능성도 있다. 정조의 경우는, 등에 난 종기가 울화병과 상승작용을 일으켜서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을 가능성도 있다.

 

3. 독살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왕들.

  효명세자는 독살로 보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이덕일도 명확한 독살 증거를 제시하고 있지 못하며, 각혈을 했다는 말은 폐병을 앓고 있었다는 증거이기에 독살로 단정하는 것은 많은 무리가 있다. 지난 겨울에 창덕궁에 답사를 갔다. 그때 효명세자가 살았던 전각을 보았다. 정오였는데도 그늘이 지었고 유난히 추운 장소였다. 이런 장소에서 오랫 동안 살았다는 것은 스스로 병을 키웠다는 증거이다. 습하고 추운곳은 사람이 살곳이 아니다. 폐병을 유발 시키기에 너무도 좋은 장소이다. 효명세자는 정조를 본받기 위해서 정조가 있었던 주합루에 가까운 곳이 집을 짓고 살았으나, 오히려 그의 몸을 상하게 하여 정조 곁에 빨리가는 불운을 얻었다.

 

  조선의 왕들에 대해서 독살설이 높아지는 것은 그들이 더 살았다면 우리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 때문이리라... 특히 정조의 죽음은 우리에게 많은 아쉬움을 남겨주고 있다. 그래서 정조가 10년만 더 오래 살았다면 어떠했을까? 정조는 독살된 것이 아닐까?라는 상상을 하게 만든다. 그 아쉬움에 이 책을 다시한번 들추어 본다.

 

ps. 이덕일의 책을 많이 읽다보니, 책의 내용이 너무도 많이 곁친다. 알고 있는 내용을 제목과 약간의 주제만 변경하여 다시읽는 느낌이다. 이제는 이덕일의 책을 고를 때는 내가 읽었던 시대와 겹치지 않도록 책을 선정해야겠다.

  이 책을 읽으며, 세도정치기에도 강직한 신하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러한 시대에도 강직한 인물이 있었다는 것이 하나의 위안이 된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후 침묵이 너무 지나쳐 정령 등 사무를 일체 아래 신하에게 일임하시고, 장주(상소)와 품계(아뢰는 것)에 모두 '윤(허락함)'자로 판하하시며, 가부에 대하여 재결하시는 분부가 전혀 없으시니, 이해의 구분과 공사의 구별이 저젉로 권병(권력자)에게 돌아갔습니다. 뇌문(뇌물을 받는 문)이 크게 열려 뇌물이 공공연히 거래되어서 관직 하나, 과거 하나도 족당이 아니고 거실이 아니면 뇌물로 사는 것이 지름길이 되었습니다. -순조실록, 19년 4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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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 독살사건 1 - 문종에서 소현세자까지
이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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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교에 계신 교수분들이 조선시대를 강의하다가 '어느 작가는 조선시대 대부분의 왕들이 독살된 것 처럼 주장해서, 조선을 독살왕국 처럼 묘사 한다.'라는 말을 하곤한다. 여기서 '어느 작가'는 바로 이덕일을 지칭한다. 인터넷에서는 이덕일을 '독살중독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덕일의 책을 많이 읽어왔지만, 이덕일이 2005년 발간하여 초판 90쇄를 찍었으며, 개정증보판을 여전히 15쇄 이상을 찍어내고 있는 스태디 셀러 '조선 왕 독살사건'을 미처 읽지 못했다. 이덕일의 꼬리표가 되어 따라다니는 조선왕 독살설들을 이제는 밀도 있게 읽어보고 싶었다. 이제 그 1권을 살펴보자.

 

1. 독살 의혹이 제기된 7명의 왕들

   1권에서 다루고 있는 왕은 7명이다. 이중에서 소현세자의 경우는 독살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으며, 선조의 경우는 이덕일이 유일하게 독살설을 부정하고 있다. 역사 추리소설을 읽는 듯한 밀도있는 구성과 박진감은 이책의 커다란 매력이다. 어린이날! 놀이공원에 가서 3시간 동안 줄을 서는 동안 1권을 읽어내려갔다. 금새 한권을 다 읽었을 정도로 상당히 재미있는 책임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제기하고 있는 주장은 타당할까?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소현세자의 경우는 독살 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점에서 이덕일의 주장을 수긍할 수 있다. 단종의 경우도 사육신 사건 처럼 단종 복위운동이 계속 일어나는 상황에서 집권세력들이 단중을 죽였을 가능성에 깊은 공감이 된다. 그러나 문종과 예종, 인종의 경우는 독살의 가능성은 있지만, 독살이라고 단정지어서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본다. 독살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가 없는 상황에서 독살되었을 개연성만을 가지고 독살설을 주장하는 것은, 도둑을 잡으려다 무고한 사람들을 잡아들이는 우를 범할 수 있기에 이덕일의 주장에 100% 공감하기는 어렵다. 연산군의 경우는 독살되었다고 생각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왕은 왕을 죽이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못난 임금 인조가 광해군을 죽이지 않았듯이, 왕은 왕을 죽이지 않는다. 특히 권력에서 밀려나 실권이 없는 경우는 죽이기는 것 보다는 살려두는 것이 문제가 될 것이 없다. 특히 연산군의 경우는 못난 왕으로서 반정이 일어났을 때, 어느 누구도 연산군의 편을 들지 않았다. 반란을 일으키기에는 너무도 못난 왕이었기에 궂이 그를 죽일 이유는 없다.

 

2. 역사 대중화에 새로운 지평을 열다.

  이덕일은 분명, 다양한 문학서적과 추리소설들을 많이 읽었을 것이다. 그의 책을 읽다보면, 많은 문학적 표현과 극적 구성이 돋보인다. 특히 이 책 '조선왕 독살사건'에서는 그만의 탁월한 역사추리 기법이 돋보였다. 역사를 이렇게 문학작품처럼 서술할 수 있고, 추리소설처럼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이덕일 만의 글재주를 보면 볼 수록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덕일을 따라 다니는 또하나의 꼴표는 다작이다. 많은 역사 책들을 이렇게 잘 써내려갈 수 있는 비결을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한다. '다작'의 비밀 중에 하나는 역사적 사실을 다양한 주제로 중복해서 서술하는 방법이 있다. 이 책에서 서술된 문종 독살 설은 이미 '김종서와 조선의 눈물' 편에서 접했으며, 예종을 비롯한 연산군은 '조선의 왕을 논하다.'라는 책에서 이미 접해본 내용들이다. 그밖의 왕들도 이덕일의 다양한 책들에서 한번은 다루었던 인물들이다. 그러하기에 이전에 읽었던 적이 있었던 것처럼 흐릿하게 머릿속에서 그 내용이 떠오를 때가 자주 있었다.

 

  역사는 끊임 없이 재해석 될 때, 생명력을 갖는다. 이덕일은 기존의 우리역사를 그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끊임 없이 재해석 하고 있다. 이것이 역사의 대중화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앞으로 이덕일이 어떠한 책을 내놓을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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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 하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2
박지원 지음, 길진숙.고미숙.김풍기 옮김 / 그린비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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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상권이 산해관 까지의 길고긴 여정이라면, 하권은 산해관에서 연경으로 다시 황제가 있는 열하까지의 길을 다녀오는 숨가쁜 여정이다. 상권에 비해서 하권은 여정이 바쁜 날들의 연속이다. 특히 연경에서 황제의 명령으로 열하까지오라는 전갈을 받고 사흘밤낮을 가리지 않고 9개의 강을 건너야하는 숨가쁜 여정은 이 책의 백미였다. 이러한 바쁜 여정속에서도 연암은 중국의 지식인들과 필담으로 날을 지셌다. 그리고 연암과 필담을 나누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연암과 헤어지는 것을 너무도 슬퍼했다. 마치 피를 나눈 친구와 같은 정경을 연출하며 그들은 연암을 떠나보냈다. 중국인과 한국인이라는 국경선이 그들에게는 존재하지 않은 듯했다. 그리고 한문이라는 소통의 도구는 그들과 생각을 나누고 밥을 먹다가 밥알이 튀어나오는 웃음을 던져주기도 했다. 언어라는 소통의 도구가 청나라사람들과 조선사람 연암을 하나로 묶어주었다.

 

  이 책을 읽으며 새롭게 알게된 사실은 우리나라의 특산물이 인삼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조선의 부채와 청심환은 중국인들이 그 토록 원하는 조선의 보물이었다. 그중에서 조선의 청심환 중국인들이 그토록 탐내는 보물이있다. 심지어는 중국의 한 노파가 연암 일행이 참외값도 내지 않고 참외로 값을 달라는 자신을 먹던 참외를 던지는등의 무례를 저질렀다고 하소연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연암에게 청심환을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조선 사신일행에게 청심환을 얻고자하는 잔꾀였을 뿐이다. 그리고 조선의 사신을 만나면 중국인들은 끊임 없이 청심환을 달라고 하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의문이 생겼다. 중국에도 청심환이 있고 청심환의 원조는 중국이아니던가? 그런데 왜? 조선 사신에게 청심환을 요구했을까?

 

  인터넷을 찾아보았다. 중국은 지금만 가짜기 많았던 것이 아니었다. 중국 청심환에는 가짜도 많았다. 그러나, 조선의 청심환은 궁제 즉, 나라에서 만들어 동짓날에 왕이 신하들에게 하사해주었다. 국가에서 청심환의 품질을 책임지고 관리했던 것이다. 그랬기에 조선의 사신은 100~200개정도의 청심환을 가지고 중국에가서 여비로 사용했던 것이다. 그리고 조선의 청심환 한 환에 3돈 은에 거래되었다. 명품은 그져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끊임 없는 품질관리만이 명품을 탄생시키다. 얼마나 그 품질이 좋았으면, 조선의 청심환에는 바다 깊은 곳에 있는 녹지 않는 얼음 즉 고빙(古氷)이 있다는 소문까지 만들어졌을까? 

 

  한가지더! 조선의 금이 청나라에서 유명했다고 한다. 연암집에 피서산장에서 청나라 사람이 연암을 보고 금이 있느냐고 묻자, 연암은 조선에는 금이 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청나라 사람은 열하의 궁전의 금은 조선의 금이라고 되받아친다. 그렇다 조선후기 광산 개발의 붐이 일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금이 열하까지 흘러들어가서 조선사람을 보면 금이 있느냐고 물었던것이다. 열하일기를 살펴보자.

 

압록강을 건너기 전, 박천 땅에 이르러 길 옆에 말을 세우고 버드나무 밑에서 땀을 훔치고 있을 때였다. 한 떼거리의 사람들이 남부여대를하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모두 8~9세 되는 사내와 계집아이들을 데리고 가는 품이 마치 흉년에 정처 없이 떠들면서 빌어 먹느라 유리걸식을하는 것 같았다. 내 이를 이상히 여겨서 이디로 가느냐고 물었더니, 성천 금광으로 가는 중이라고 한다. 손에 든 기구를 살펴보니 나무 바가지 하나, 포대 하나, 끌 하나분이다. 끌로 흙을 파낸 다음, 포대에 담아서 바가지로 이는 것이다. 온종일 흙 한포대만 파내면 별로 애쓰지 않고도 먹고 살 수 있단다. 조그만 계집아이들이 흙을 잘 파기도 하려니와, 원체 눈이 밝아서 금을 잘 찾아낸다고 하기에 하루 종일 일을 하면 금을 얼마나 얻느냐고 물었다.

  "그건 운에 달렸지요. 하루에 여남은 알을 얻는 때도 있고요. 운이 없으면 서너 알에 그치기도 하죠 뭐. 운수대통하면 단박에 부자가 되기도 하구요."

  "그럼, 그 알 모양은 얼마만 한고?"

  "거의 낟알만 합지요."

  금을 태는 것이 농사짓는 것보다 이익이 낫다한다. 한 사람이 하루에 얻는 금이 적어도 예닐곱 푼쭝은 되기 대문이다. 그걸 돈으로 바꾸면 두세 냥이나 된다. 그러다 보니 농장을 떠나 여기로 모여드는 농사꾼들뿐 아니라, 사방의 건달패와 놈패이들까지 가세하여 절로 부락을 이뤄 무려 십여만 명이 들끓게 되었다. 아울러 쌀이며 술과 밥, 떡과 엿 같은 것을 파는 장사치들이 산골에 그득하다 하는데, 나는 도무지 알지 못하겠노라. 그 많은 금들이 대체 어디로 가는지, 또 금을 그렇게 많이 캐내는데도 금값이 더욱 오르는 건 어인 연유인지.

 

  그렇다. 열하일기에 나오듯이 조선후기에는 역동적인 조선사회의 변화가 있었다. 그것을 연암은 알았을까?

 

이밖에도 호질을 비롯하여 허생전등과 같은 낮익은 소설들이 열하일기에 담겨있다. 과연 이 이야기를 연암이 직접 짓고 비판을 피하기 위한 장치로 베낀이야기 들은 이야기로 포장한 것일까? 아니면 진정 베끼고 들은 이야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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