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1 : 태조 - 혁명의 대업을 이루다 조선왕조실록 1
이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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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능가하는 책을 만들겠다.!' 이덕일의 포부가 담겨져있는 말이다. 그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한 수많은 역사책을 저술했다. 그리고 그 책들은 하나같이 재미있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그의 역사책은 역사책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대하드라마였다.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 조차도 이덕일의 글재주는 인정한다. 탁월한 필력을 자랑하는 이덕일의 야심작 '조선왕조실록1' 태조편을 펼쳤다. 그만의 박진감 넘치면서도 가슴을 울리게 만드는 글재주를 다시한번 느껴보자.

 

1. 한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조선왕조 실록

  이덕일의 역사책들은 한편의 영화와 같은 서술을 하고 있다. 처음부터 강렬한 인상을 주면서 독자들을 책속으로 빨아들인다. '조선왕조실록1'도 처음부터가 극적이다. 하날에서 불길한 징조가 조정에 보고된다. '나라가 망하고 임금이 죽으리라, 천하가 임금을 바꾸리라'라는 점사가 보고된다. 바로 이때, 변방의 한 장수가 토지개혁을 주장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그가 바로 태조 이성계였다. 이 얼마나 이성계의 등장을 가장 극적으로 묘사하는 장면인가! 007 스리즈를 비롯한 미국 헐리우드 영화에서 영화 초반부에 대규모 액션씬을 보여주어, 관객을 영화에 빨려들어오게한 다음, 이야기를 풀어가는 서사구조와 너무도 흡사하다.

  이덕일은 고려말 조선초의 사건들을 시기순대로 서술하다가 갑자기 시기를 거슬러 올라갔다가 다시 현재로 오는 '플래쉬 백'을 사용하고 있다. 자칫 민밋한 서술로 따분함을 줄 수 있는 역사서술을 '플래쉬 백'을 사용하여 독자가 손에 땀을 쥐며 책에 몰입하도록 구성한다. 타 역사책들과는 달리 이덕일은 독자들을 철저히 분석하고 그들이 따분해할 즈음에, 강력하면서도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들을 배치했다. 이것은 이덕일 이기에 가능한 역사 서술이다.

 

2.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역사책

  이덕일을 '단재 신채호를 계승한 역사학자'라고 평가한다. 이덕일 스스로가 자신을 '단재에게 사사받았다.'라고 말한다. 그의 책을 읽고 있노라면, 단재 신채호를 비롯한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의 학맥을 잇고 있다는 생각이 물신 배어난다. 한예로, 고려의 강역에 대한 주장 자체가 기존 교과서와는 달랐다. 중국'명사'를 근거로 명나라 철령위의 위치를 요동에 비정한다. 주원장이 화주에 철령위를 설치한다고 했는데, 난데 없이 요동을 정벌한다는 말 자체가 이해되지 않았던차에, 이덕일의 설명은 나의 의문점을 말끔히 해소해주었다.

  이덕일은 요동정벌이 충분히 승산이 있는 싸움으로 보았다. 특히, 정도전에 의해서 준비되었던 요동정벌의 경우, 중국 명나라의 정세를 본다면 충부히 승산이 있다고 평가한다. 정도전의 북벌이 이덕일 처럼 비중있게 서술한 역사서는 드물다. 타인이 관심 없어하고, 실현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며 버려버린 역사를 이덕일은 보듬어 안았다. 그리고 이덕일의 시선으로 새롭게 서술했다. 이덕일의 책을 읽고 있노라면, 피가 끓고 결정적인 순간에 북벌이 이뤄지지 않은 현실에 땅을 치고 통곡하게 만든다. 이것이 이덕일의 힘이다.

 

3. 입체적으로 역사를 복원하는 이덕일

  기본의 역사책들이 널리 알려진 정사류의 책들을 이용해서 서술되었다면, 이덕일은 '화동인물총기' 처럼 잘 알려지지 않은 책들을 발굴하여, 그 동안 아무런 발언권이 없었던, 역사의 패배자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노력한다. 조선왕조의 입장에서 씌여진 고려 말의 역사가 아닌, 고려왕조를 대변할 수 있는 사서를 준비하는 그의 노력에 절로 감탄이 난다.

  이덕일은 사료를 발굴해서 역사를 복원하는 작업에서 더 나아가서, 이덕일만의 날카로운 분석을 통해서 역사적 인물을 입체적으로 되살려낸다. 앞에서는 손을 잡고 뒤에서는 공격하는 이성계 특유의 전략을 잘 분석해낸 것도 이덕일의 책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또한 압록강 건너 원세력을 몰아낸 인당장군의 목을 베서 원나라에 보낸 공민왕의 모습을 그릴 때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공민왕의 마키아벨리스트적 모습을 그려내기도 했다. 날카로운 이덕일의 분석력으로 정도전과 이성계를 분석하고 그들의 장점과 한계를 명확히 드러내는 부분에서는 역시 이덕일이구나 하는 감탄을 자아냈다.

 

  이덕일의 글이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과잉된 민족주의를 불러 일으키는 면도 있고, 이색의 죽음을 적으면서, 그가 이성계 일파가 보낸 술을 마시고 독살되었다는 내용의 기록은 싣지 않고 있다는 점은 그의 책의 한계이기도하다. 특히, 이덕일의 민족주의는 그를 돋보이게하면서도 그의 한계를 도드라지게하는 양날의 칼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덕일이 동북항일 연군을 전공하고서는 왜? 고대사와 조선시대를 기웃거리냐고 비웃을 수록, 이덕일에 대한 애정은 더욱 깊어진다. 박사학위를 받은 분야만 전문가이고, 그외의 곳은 아무리 연구를 할지라도 비 전문가라는 그들의 우수운 논리에 대한 반발심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덕일이 시작한 조선왕조실록 편찬 프로잭트가 부디 좋은 결실을 맺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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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12-19 21: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서재의 달인 선정되신 것 축하드립니다.
올해도 좋은 이웃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따뜻하고 좋은 연말 보내세요.^^

강나루 2018-12-19 21:14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도 서재달인이시죠
항상 많이 배우고 있어요
새해에도 즐거운 이웃 되자구요^^
 
광해군 - 역사인물 다시 읽기
한명기 지음 / 역사비평사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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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해군!! 그 처럼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많은 임금도 드물 것이다. 광해군을 소재로한 많은 드라마와 영화에서 그는 탁월한 비운의 군주로 그려졌다. 광해군과 고 노무현 대통령을 오버랩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그리워했다. 한반도 균형자론을 주장하면서 강대국들 틈바구니 속에서 중진국 지도자의 리더십을 발휘하려 노력했던 고 노무현대통령!! 임진왜란과 명청 교체기에 조선이라는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 중립외교정책을 펼치면서 부던히도 노력했던 비운의 광해군!! 두사람의 비극적 죽음은 우리에게 더욱 많은 그리움을 남긴다. 학생들에게 한명기 교수의 광해군을 추천해주면서도 정작 나는 '광해군'이라는 책을 읽지 않고 있었다. 이번 기회에 광해군이라는 책을 단숨에 읽기 시작했다.

 

1. 광해군은 폭군인가?

  오항녕을 비롯한 노론중심의 사관을 가지고 있는 학자들은 광해군을 폭군으로, 혹은 혼군으로 묘사한다. 물론, 오항년의 책은 읽지 않았지만, 그가 기고한 글들을 읽으면서, 그의 노론중심의 역사관에 자못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광해군이 무척이나 백성들을 쥐어짰으며, 그가 제대로 준비를 하지 않았기에 병자호란의 비극이 있었다는 주장이다. 그의 단편적이 기고글들을 읽으면서, 노론 중심의 역사관에 찌들어 있는 모습에 씁쓸함을 금치 못했다.

  그렇다면 과연 광해군은 백성을 괴롭힌 폭군이었을까?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당시, 다른 왕자들의 집은 불탔지만 광해군의 집은 멀쩡했다. 또한 송유진의 난이 일어났을 때, "임금이 스스로 허물을 뉘우치고 동궁에게 왕위를 넘겨주도록 종용"하겠다는 그들 주장은 참으로 신선했다. 광해군이 군주로서 가져야할 탁월한 자질과 역량을 짐작하게 하는 기록이다. 광해군은 백성들로 부터 탁월한 군주가 될 수 있는 역량이 있는 왕자로 인식되고 있었다.

  광해군을 비판하는 자들은 '조선왕조 실록'의 사료적 가치를 주장하며, 승리자의 기록인 '광해군 일기'의 기록을 근거로 광해군을 혼군으로 배척한다. 그러나, 광해군의 눈부신 분조활동을 기록흐나 유대조의 상소문이 정족산본 '광해군 일기'에는 없다. 의도적으로 광해군의 좋은 기록을 말살하려한 증거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이러한 사례 말고서도, 인조반정을 일으킨 서인들에 의해서 얼마나 많은 광해군의 업적을 기록한 기록들이 사라졌을까? 이것을 생각해본다면, '광해군 일기'를 근거로 광해군을 비난하는 것에는 일정한 경계를 해야할 것이다.

  광해군 시기를 병자호란을 막을 수 있는 기회를 무위로 만든 시기라 주장하는 사람들은 광해군이 궁궐 조영에만 힘쓸 뿐이지, 후금을 막을 만한 군사력 증강에는 노력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기민한 외교전략으로 명과 후금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펼치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후금의 주요 진격로상에 방비를 강화하고, 기마병이 장점이 그들을 대항하기 위해서 화포를 배치하는 노력을 그들은 애써 외면한다. 광해군이 그토록 군사력 증강을 위해서 노력한 역사를 외면한다. 그래야 진정한 혼군인 인조와 서인정권을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2. 광해는 왜? 궁궐 공사와 왕권에 집착했는가?

  임진왜란이라는 7년 동안의 참혹한 전쟁이 휩쓸고 가자, 많은 사람들이 도가나 운수에 빠져들게 된다. 사람의 생명이 파리 목숨보자 못한 취급을 받는 비극적인 시대상황속에서 어쩌면 그들의 피난처는 도가와 운수였을지도 모른다. 광해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당시의 시대상황뿐만 아니라, 후궁 소생의 왕이라는 태생적 한계가 그를 더욱 작아지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뿐인가? 광해군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못난 아버지, 선조는 그를 박대하며 문안조차 받지 않았다. 선위파동을 수시로 일으켜 자신의 왕권과 신하들의 충성심을 확인하고 싶어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입지가 약화된 광해군! 세자에서 폐위된다면 잔혹한 정치권력의 속성상, 자신의 목숨조차도 보존할 수 없었다. 그는 왕위에 더욱 집착했다. 큰 궁궐을 지어 왕의 위엄을 드러내고 싶어했다. 그러나 진정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싶다면, 백성들의 고혈을 뽑아서 으리으리한 궁궐을 짓기 보다는 백성들의 삶을 어루만지며, 백성들의 지지를 국정과제 추진의 원동력으로 삼아야한다는 진리를 그는 몰랐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로'에서 시민에게 사랑을 받는 군주는 성을 높이 쌓지 않는다고 했다. 시민들의 군주의 성채가 되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광해군에게는 좋은 신하를 얻는 복도 없었다. 그를 지지했던, 대북들은 정치적 감각이 너무도 미숙했다. 적을 살려주어 은전을 베푸는 길이 권력을 강화시키는 길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몰랐다. 폐모살제의 어리석음은 서인과 남인들에게 반정의 명분을 제공해주었다. 북인들이 독점한 권력이 강해보이지만, 독점된 권력은 모래성과 같다. 강한 강철일 수록, 충격에 깨지기 쉽다. 노자 '도덕경'에 상선약수(上善若水)라 했다. 가장 강한 것은 강철이 아니라, 유약해보이는 물과 같은 부드러움을 지닌자이다. 정치적 감각이 미숙한 북인들과 권력을 지켜야했던 광해군!! 북인은 광해군을 지켜주지 못했다.

 

3. 광해군, 그는 왜? 몰락했는가?

  '외교는 내정의 연장이다.'라는 한명기의 말처럼, 광해군의 탁월한 외교적 성과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내정에서 반정의 명분을 제공했다. 광해군은 외교의 성과를 내부 결속을 다질 수 있는 원동력으로 삼기 위해서 '대내협상'을 했어야했다. 그러나 시대적 한계속에서 다수 사림들의 지지를 얻어내는데 실패했다. 심하전투로 인해서 많은 백성들이 고통을 받는데도, 사림들은 '재조지은'을 지켜야한다며 광해군을 비난한다. 백성은 백성대로, 사림은 사림대로 불만이 쌓여갔다. 광해군은 백성의 지지를 끌어내어 이를 통해서 국내 정치에서 주도권을 장악해야했다. 그러나 광해는 그러지 못했다.

  1622년 광해군은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폐모살제를 부추긴 북인 정권에 진절머리가 난듯하다. 북인에 의해서 내쳐졌던, 서인과 남인 중진들을 다시 벼슬길에 나서도록 배려한다. 그러나 이때 풀려난, 최명길과 이귀는 1년 후에 인조반정을 일으킨다. 적을 끌어 안지 않은 것이 광해군의 실수라기 보다는, 끌어 안아야할 적과 내쳐야할 적을 구분못한 것이 광해군의 패착이었다. 물론, 그 구분선이 참으로 불분명하다.

  자신들의 권력 강화를 위해서 광해군을 이용하려했던 북인들과, 현실을 모르고 명분만을 주장하는 서인과 남인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광해군은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바닷가에서나 살며 여생을 마치고 싶다'라고 스스로 말할 정도로 그는 지쳐있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정치판에서 진절머리가 난 광해군! 인저반정이 일어나고도 19년을 더 살아, 삼전도의 치욕을 보며 세상을 관조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도 집착했던 왕권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홀가분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4. 광해와 노무현!! 그리고 문재인

  한명기는 '광해군'이라는 책 곳곳에서 오늘과 광해군이 살았던 당시를 비교하며, 현명한 선택을 할 것을 당부한다. 재조지은을 배풜었다며, 후금을 공격할 것을 종용하면서도, 조선에게 염초제조법을 알려주지 않는 명나라와, 한미동맹을 강조하면서도 한국의 미사일 사정거리를 180km로 묶어 놓는 미국을 비교하며,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냉혹한 국제관계의 현실을 직시하게 만든다.

  그리고 우리는 그 속에서 광해와 노무현을 보게 된다. 중립외교정책을 추진하며, 조선이 살길은 '재조지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강대국의 틈바구니 속에서 백성과 나라를 지키는 일임을 강조한 사람이 광해군이라면, 노무현 대통령은 북한과 대화하며 강대국들 속에서 균형자역할을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퇴임할 무렵, 외국언론에서는 중진국 지도자의 리더십을 보여주었다며 그의 리더십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이들은 사림들과 국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다. 명나라에 사대를하며, 재조지은을 지켜야한다는 꼴통들에게 광해군의 현명한 외교전략은 '배은망덕'한 말일 뿐이었다. 북한과는 대화할 수 없으며, 미국의 주장에 반대해서는 안된다는 '종미주의자'들에게는 노무현은 이상주의자이고 현실을 모르는 사람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타의에 의해서, 또한 사람은 임기가 끝나서 자리에서 물러나야했다. 그리고 광해군은 19년 동안을 모진 고통속에서도 세상을 달관하며 살았고, 노무현은 정치적 보복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광해군은 미국에서 중국으로 세계의 패권이 옮겨가는 시기에 다시 부활했고, 노무현은 이명박근혜정권을 거치면서 국민들에 의해서 다시 소환되었다. 우리는 광해와 노무현과 같은 리더를 필요로하고 있었다.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었다. 탁월한 외교전략을 구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광핸군이 다시 환생한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광해군에게서 문재인 정권은 교훈을 얻어야한다. '외교는 내정의 연장이다.' 아무리 외교를 잘한다해도 내정을 못한다면 정권의 불행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문재인 정권의 '한반도 운전자론'이라는 자주적 외교는 국내 경제가 얼마나 살아나느냐에 따라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도 있고, 수구세력에게 다시 정권을 내놓아야할 수도 있다. 이것이 냉엄한 정치 현실이다.

 

  우리는 광해군과 노무현을 끊임없이 소환하고 있다. 그들의 리더십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는 아직도 기득권을 가진자와 그 후손들이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광해를 무덤에서 다시 불러들이는 것을 두려워하고, 노무현과 같은 지도자가 다시 나타나는 것을 극도로 혐오하고 있다. 그들 수구세력에서 광해와 노무현을 떠올리는 문재인이라는 정치가는 얼마나 두려운 존재일까?? 역사는 오늘을 비추는 거울이다. 명청 교체기라는 격변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서 겪은 고통을, 미국에게서 중국으로 패권이 넘어가는 오늘을 사는 우리는 잊지 말아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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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07-03 15: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강나루 2018-07-03 18:10   좋아요 0 | URL
감사^^ 감사^^

레삭매냐 2018-07-03 15: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말 오래 전에 읽은 책이네요.

조선시대 유삼(노산군-연산군-광해군)한
세 명의 군주 중의 하나로, 인조반정으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 군주가 아닌
가 싶습니다.

동아시아 질서가 바뀌던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친명배금 정책을 고수하다
망국으로 나라를 이끈 서인세력이 반성을
했던가요? 아니죠.

503호를 앞세워 호가호위하던 정치세력
과 어찌나 그렇게 비슷한지 모르겠습니다.

강나루 2018-07-03 18:10   좋아요 1 | URL
맞아요 당시의 시대상과 오늘날이 자꾸 오버랩되었어요

야상곡(夜想曲) 2018-07-03 18: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금의 헬조선에선 조조나 손권,제갈량,관중,왕맹,유기,강희제같은 리더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지금의 헬조선에선 더더욱 왕맹의 리더쉽이 매우 많이 필요하다.(지금의 중국은 절대 한족들만의 중국이 아닌 북방과 서방의 힘으로 거대해진 대륙의 집합체로서 다민족국가의 장점으로 운영되는 나라이다)

만화애니비평 2018-08-10 16: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향녕 교수의 그런 시점은 기축옥사 관련 도서입니다. 상당히 어이 없는 글입니다.
임진왜란의 불씨가 기축옥사와 관련 있는 이유가 대부분의 의병장들이 동인(북인)들이 위주이고, 그 중에 정인홍이나 곽재우 장군은 남명 조식 선생의 수제자들 점에서 많은 여파가 나옵니다.
군권에서도 동인(남인) 세력은 이순신을 지원하고, 서인은 원균을 지지하죠....
광해군이 집권하자 원균의 집에 내려준 녹봉을 없애버리는데, 인조반정 이후 다시 원균의 집안에게 녹봉을 하사합니다. 그런 겁니다..허허
 
정도전과 그의 시대 이덕일의 역사특강 1
이덕일 지음, 권태균 사진 / 옥당(북커스베르겐) / 2014년 1월
평점 :
절판


 정도전이라는 인물은 무척 흥미로운 인물이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그를 고려를 무너 뜨린 역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 세계관도 성장하는 법!! 그를 바라보는 시각도 성장했다. '왕조의 설계자'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그를 만나고 싶어서, 몇년전에 '인간 정도전(문철영)'을 읽었다. 이제 그를 다시한번 만나고 싶어서 이덕일의 '정도전과 그의 시대'라는 책을 꺼내 읽었다. 이덕일 특유의 글재주로 풀어낸 '정도전'을 만나고 싶었다. 이덕일이 바라본 정도전은 어떤 모습일까?

 

1. 이덕일만의 필법

  이전에 읽었던 '인간 정도전'이라는 책보다 이 책은 확실히 흡입력이 있다. 정도전을 다년간 연구한 교수의 책과 비교해도 그 깊이가 절대 얕지 않았다. KBS 대하사극 "정도전"의 제작진과 연기자들을 대상으로 강의한 내용을 묶어낸 이 책에는 정도전이 살았던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 배경이 되는 토지문제와 성리학에 대한 깊이 있는 설명이 서술되어 있다. 연기자들이 당시 시대를 이해하고 연기할 수 있도록 강의를 구성하다 보니, 정도전의 숨결보다는 그가 살았던 시대의 고민들을 강의에 담아내려 노력한 듯 하다.

  이덕일의 필법이 흡입력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과거를 과로만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크로체가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 말했다. 이덕일은 과거의 혁사를 현재를 이해하는 도구로 사용한다. 예를 들어 '소강사회'를 설명하면서, 현재의 스웨덴을 언급한다. 그리고 우리사회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 물음을 던진다. 이러한 그의 설명방식은 역사와 마주하면서 오늘을 생각하고 내일을 고민하게 만든다. 그러니 우리가 이덕일의 필법에 빠져들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러한 이덕일의 필법은 이책을 마무리하면서 빛을 발산한다. 고려말의 상황을 설명하며, 현재 우리의 모습과 비교해서 설명한다. 그리고 우리사회의 현실을 직면하고 우리가 나갈 방향이 무엇인지를 질문한다. 고려의 구가세족이 다수 백성의 토지를 빼앗아 자신들 만의 나라를 만든 결과 고려는 망하고 고려의 왕족들도 비참하게 죽어갔다고 지적하며, 부와 권력을 잡은 특권세력이 자신이 더 많은 것을 가지려하는 오늘과 대비시킨다. 오늘날의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어떠한 일이 벌어질 것인지를 질문하며 글을 맺는다. 독자들은 깊은 여운 속에서 깊이 있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것이 이덕일 필법의 강점이다.

 

2. 알을 깨고 나오자!

  이덕일은 '태조실록'을 편찬하면서 정도전의 행적을 지우지 않은 점을 높이 평가한다. 정도전을 태종 이방원이 반역자로 규정하고 죽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도전이 행적을 지우지 않은 것은, 정도전이 조선 건국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기 대문이기도 하지만, 조선초 사관들의 건강한 역사인식 덕분이라고 평가한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나와 정치적 입장이 다르다고 역사를 자기식대로 창조하여 가르치려 했던 '국정화 프로잭트'를 떠올리면, 조선초 사관들의 역사인식이 오늘보다 높다는 생각이 든다. 그뿐이아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신라가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도움을 받아 왜를 물리쳤다는 기록이 없다. 왜? 없겠는가?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고 기록을 남겨 놓을 때, 자신들에게 불리한 기록을 없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광개토대왕릉비가 없었다면 그 사실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조선초 사관의 건전함이 없었다면, '왕조의 설계자' 정도전에 관한 많은 기록을 찾아볼 수 없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후지와라 세이카를 아는가? 모른다면 '강항'은 아는가? 역사에 관심이 있는분이라면 강항의 이름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강항은 임진왜란때 일본에 끌려가서 후지와라 세이카에게 주자학을 가르쳤다. 일본에 주자학을 전해준 강항을 생각하며 우리는 많은 우월감을 갖는다. 그러나 그후 일본의 학문은 일취월장하게 된다. 반면 조선의 성리학은 '성리학 유일사상'으로 파탄을 맞이한다. 윤휴가 주자와 다른 주장을 했다고 해서, 그를 사문난적으로 몰아 죽여버렸다. 우리가 일본에게 문화를 전수해주었고, 일본은 우리의 아류라는 우월감에 취해있을 때, 일본의 이토 진사이는 상인계급의 시각으로 논어를 해석한다. 그리고 우리를 넘어서기 시작한다. 이덕일은 우리에게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하라고 당부한다. 무조건적인 자문화 중심주의에 빠진 우리를 질타하고 있다. 이덕일이 강한 민족주의 사학자라고 평가한 내게는 이덕일의 이러한 주장이 너무도 신선했다. 우리것이 무조건 좋은 것이여! 라고 주장하리라 생각했는데, 이덕일은 우리에게 냉정히 역사를 바라보라고 주문한다. 우리의 단단한 선입견이라는 껍질을 벗으라고 망치를 휘두르고 있다.

 

3. 아쉬운점

 이덕일의 책을 읽으며 두가지 아쉬운점이 발견되었다. 75쪽에 '예기' 일부분을 인용한다.

"貨惡其弃於地也 不必藏於 그 재물을 땅에 버리는 것은 미워했지만, 반드시 자기를 위해 쌓아두지는 않았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몸기()자를 써야하는데, 이미이() 자를 써버렸다. 이를 바로 잡으면,

"貨惡其弃於地也 不必藏於己"라고 써야한다. 물론, 교정을 보는 과정에서 놓친 사소한 실수일 수 있다. 그러나, 책을 읽는 독자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야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사소한 실수를 줄여주길 바란다.

  이덕일은 과전법을 비롯해서 고려와 조선의 토지제도를 자세히 설명했다. 각종 제도들은 글로만 이해하기에는 무척 힘든 것이 사실이다. 독자를 위해서 도표를 그려서 쉽게 설명해주었다면 이해가 쉬웠을 것이다. 이덕일의 책이 읽기 쉽고 재미있다는 강점이 있으나, 독자를 위해서 도표를 그려 제도나 개념들을 설명해주는 친절함은 결여되어 있다. 도표를 첨가하는 친절함을 보여주길 기대한다.

 

  두번째 만나는 '정도전'!! 그를 우리가 그리워하는 이유는, 우리 현실이 고려말의 현실과 닮아 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정도전과 같은 위대한 개혁가를 기대하기 이전에, 우리가 정도전이 되어 우리 현실을 하나하나 개혁해 간다면, 고려말과 같은 소용돌이를 경험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지난 촛불혁명에서 보여준, 대한민국의 시민들의 모습은 정도전이 부활한 듯한 모습이었다. 고려말에는 정도전을 비롯한 소수의 혁명파 사대부들이 개혁을 추진했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은 다수의 민중들이 혁명을 요구하며 혁명을 추동하고 있다. 이점이 고려말의 현실보다 오늘의 현실이 더 희망적인 이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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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이산 어록
손인순 지음 / 포럼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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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년 전서부터 다산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다산에 관한 책들을 읽으며, 그가 어버이처럼 생각했던 군주! 정조에 대해서 알고 싶어졌다. 그의 생각이 묻어나는 책들을 고르기 시작했다. '일득록'!! 생소한 책이었다. 정조가 책일 읽고, 신하들과 대화한 것들을 모아서 기록한 책이 일득록이다. 매일 읽기를 썼고, 이것이 '존현각일기'와 '일성록'으로 남아있다. 그런데 정조는 '일득록'도 작성했다.정조 그의 엄청난 독서력과 기록 정신은 정말 신기! 그 자체이다. 애민군주, 정조의 생각을 읽어 보자.

 

1. 독서광 정조!!

  조선시대를 통털어 책읽기를 즐긴 왕을 꼽으라면, 조선전기는 세종이요, 조선후기는 정조를 꼽을 수 있다. 정조는 책을 어떠한 순서로 읽었을까? 그는 경전을 중심으로 하고, 역사책을 먼저 익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역사책과 경전을 같이 두루 읽어야 세상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정조의 생각은 지금의 나의 생각과 일치한다. 대학을 다닐때만 하더라도 역사책만 두루 읽으며 세상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부단히 역사책을 읽었다. 그러면서 많은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사회생활을 하면서 역사의 지식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러면서 심리학책과 철학서적을 읽기 시작했다. 심리학을 통해서 인간을 이해하고, 철학서적을 통해서 인생의 지혜를 얻어갔다. 나의 독서는 자연스레, 역사와 심리학, 철학을 머릿속에서 엮어가는 방향으로 이뤄졌다. 철학을 현실과 괴리된 학문으로 생각했던 내가, 철학을 통해서 역사와 세상을 꿰뚫어보려 노력하고 있었다. 역사와 철학, 심리학 책들은 우리가 항상 옆에 두고 읽어야할 보배이다.

  그럼, 정조는 역사책을 읽을 때, 가장 경계해야할 점이 무엇이라 했을까? 사사로운 생각을 조심하라 했다. 유명인이 말을 하면, 의심할 만한 것도 옳은 것으로 이해하고, 명성이 보잘 것 없는 자는 취할 만한 것도 싸잡아 나쁘게 평가하는 세태를 조심하라고, 정조는 말하고 있다. 문학의 거두가 성추행을 했는데도, 이를 쉬쉬하는 것은 그가 유명하기에 흠결이 있더라도 덮어 주자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그러한 사람일 수록, 힘없는 사람의 말은 좋은 말이라도 귀담이 들으려하지 않는다. 문학계 뿐만 아니라, 학문세계의 권력도, 유명한 스승 밑에서 배운 자들은, 그가 스승이기에 그의 학설을 함부로 부정하려하지 않는다. 정조는 우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의 배경에 집중하여 그사람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고!!

  조선후기는 성리학이 절대화되고 교조화된 시기였다. 윤휴가 사문난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한 사실을 떠올린다면, 성리학 이외의 서적을 읽는다는 것은 자칫하면 이단을 공부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다. 그런데, 조선후기의 군주, 정조는 장자를 인용했을 뿐만 아니라, 금강경 주를 인용하기도 했다. 성리학이라는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장자와 금강경까지 섭렵하는 그의 넓은 시야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그럼, 정조는 암기력도 좋아서 책을 많이 암기했다. 그럼 그는 몇번 이나 읽었을까? 10번이면 충분할까? 아니 너무 적다고? 그런데 정조는 '마음이 바르면 어찌 열번이나 일어야 외워진단 말인가?'라고 반문한다. 책을 10번 이상 읽어도 많이 잊어버리는 나로서는 정조의 물음이 황당하기까지하다. 정조대왕님! 대왕님의 총명함으로 타인을 재단하면 곤란합니다. 저와같은 우매한 백성은 어찌하란 말이십니까?

 

2. 정조와 혜경궁의 마음을 읽다.

  '느닷없이 화를 내는 병통이 많다.' 정조가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탓닛한 스님이 우리는 화를 어린아이 다루듯이 하라했다. 어린아이가 울면, 혼부터 내기 보다는 왜? 우는지 물어야한다. 화를 내는 사람을 본다면 그 사람이 왜? 화를 내는지, 그의 무의식에는 무엇이 있는지를 살펴보아야한다. 12살의 어린나이에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갖혀 죽어가는 모습을 보아야했던 정조! 그의 가슴에 울분이 얼마나 컸겠는가? 이를 억누르고 성군이 되어야했다. 그러나 무의식속으로 억누른 분노가 억누른다고 잠잠히 있겠는가? 그의 분노는 느닷없이 화를 내는 병통으로 표출된다. 정조의 위대성은 그러한 병통을 스스로 고치려 노력했고, 그 분노를 딛고 성군이 된 것에 있다.

  '일은 완벽하기를 요구하지 말고, 말은 다하려고 하지 말라' 이 글을 정조는 벽에 써 놓고 자신을 살폈다. 자객이 난입하는 밤을 지세워야했던 정조는 밤새도록 책을 읽었다. 그러하기에 누구보다 많은 독서를 했고, 학문은 신하들보다 한참은 위였다. 정조의 눈에는 신하의 일처리가 완벽해보일리 없다. 정조는 신하에게 완벽하기를 요구하지 말자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리고 말은 다해서는 않된다. 노론 벽파가 조정을 장악하고 있는 현실에서 자신의 감정을 모두 쏟아낸다면 노론의 쿠데타를 초래하게 된다. 정조는 살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감정을 절제해야했다. 원수와 웃으며 궁궐에서 만나야했다. '평생에 하지 않은 것이 있은 뒤에야 비로소 남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한 정조! 아버지의 원수를 아직 일망타진하지 않은 뒤에야 그 누구도 못한 조선왕조의 개혁을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 현실의 힘을 가진 노론 벽파를 일망타진하지 않고 있지만, 왕권을 강화시키는 일련의 개혁을 추진하여 언젠가는 천개의 강을 비추는 성군으로 우뚝서겠다는 포부를 정조는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아버지의 릉을 참배하고 돌아가면서 비를 만나자, 비 때문에 행차가 더디어진 것을 오히려 기뻐한다.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사랑이 비가오는 현실도 기뻐하게 만들었다. 일생을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아버지의 원수에 대한 분노를 안으며 살아야했던 인간 정조의 아픔이 느껴진다.

  혜경궁 홍씨는 역대 왕들의 제도 수십권을 언문으로 번역하고 손수베끼기 까지했다. 왜? 역대 왕들의 제도를 번역하고 손수베끼기 까지 했을까? 혹시 정조의 개혁정치에 참고자료로 제공할 의도에서 한 작업이 아닐까? 자신의 남편이 하지 못한 제왕의 모습을, 아들을 통해서 보고 싶었던 혜경궁의 바램이 역대 왕들의 제도 번역으로 나타난 것은 아닐까?

 

3. 시대를 읽다.

  '지금 사람이 사리에 밝지 않은 것은 글을 읽지 않아서이다.' 정조대왕의 말이다. P를 위한 집회에 나오는 노인들을 보면서, 정조대왕의 말을 해주고 싶다. 우리나라 10대의 학습능력은 세계 최고를 달린다. 그러나 이러한 능력은 20대 초반에 꺾이기 시작한다. 30대 후반을 넘어서서는 세계 평균에서 멀어지기 시작하여, 50대가 되면, 하위권으로 밀려난다. 10대에 열심히 공부를 시키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는 책을 읽지 않고, 공부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자신이 10대에 배운 지식과 신문으로 주입된 지식이 세상의 진실이라 믿는 노인들이 양산되는 비참한 현실을 우리는 직시해야한다. 저 불쌍한 노인들에게 무슨 대화와 설득이 가능하가?

  정조는 크게 간사한자(대간)은 용남해서는 안되며, 조그만 허물이 있는자(소과)는 용서해야한다고 말한다. 대간을 용서하면 나라가 어지러워질 것이요. 소과를 용납하지 않으면 온전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정조는 우리가 적폐세력을 왜? 처단하지 않으면 안되는지를 명확히 말해주고 있다. 대간이 법원에 의해서 풀려나고, 소과는 법에 따라 엄벌에 처해지지는 않는지 생각해본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쳤던 지강원이 지금 이시대에는 없을까?

  그럼 정조는 소과를 저지른 신하를 어떻게 깨우쳤을까? 책을 베고 자는 규장각 각신에게 정조는 복숭아를 소반에 담아 선물하였다. 복숭아는 맛있게 먹고, 소반은 남겨서 경계토록한 정조!! 매보다는 따뜻한 마음으로 신하를 대했다. 보통의 갑질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보다 약한자에게 호통을 치면서 쾌감을 얻으려한다. 정조는 '사람은 언어로 한대의 쾌감을 얻으려 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정조는 마부에게도 이놈 저놈이라 부르지 않았다. 강자가 약자의 소과는 불같이 호통치면서, 자신보다 강한자의 대간은 용서하는 현실!! 갑질하는자여! 정조의 말을 귀담아들어라!

 

4. 정조의 사생활과 잡설

  우리는 조선시대 양반들이 도교의 양생법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 이를 조선의 왕도 했을까? 조선시대 양반들이 했던 양생법을 정조도 했다. 취침전에 두발바닥 가운데를 마주 문질러 비비기도 했으며, 담배를 피우더라도 침을 뱉지 않았고, 머리를 많이 빗었다.

  정조의 개혁정책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화성건설이다. 정조는 화성건설에 인중기와 치원거를 사용했다. 신하들이 문집에 이들 기구를 싣자고 주장했지만, 정조는 백성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아니기에 실을 필요가 없다며 거절한다. 백성의 성쌓는 고통을 줄여준 기구가 백성을 위해서 왜? 필요하지 않겠는가? 정조를 존경하지만, 정조의 이번 의견을 동의할 수 없다.

  한편, 정조는 경기 산군에 장용영의 산군 2초를 두고 둔전을 설치한다. 이는 정전제와 뜻을 같이한다고 정조는 말한다. 장용영을 운영하면서 그 운영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 정조는 다양한 토지개혁 방법을 모색한다. 우리는 실학자들의 토지개혁론과 정조의 개혁정치를 분리해서 배우고있다. 박제가를 비롯한 많은 실학자들이 정조시대 활약했다는 점에 유의하여 조선시대 실학자들의 개혁론과 정조의 개혁정치를 유기적으로 연구해야한다는 필요성을 절감한다.

  마직막으로 조선시대 잠채의 성행, 민영광산의 발달을 알 수 있는 생생한 글을 소개하겠다.

 

  경연 신하 가운데 어떤 사람이, 은점을 금하기 때문에 은값이 매우 올랐다고 우러러 아뢰니, "관점은 금하여 막는다 하더라도 사적인 채굴은 낭자할 것임을 알 수 있다. 해마다 사행의 역관이 포은 외에 몰래 들여오는 것이 몇만 냥이 되는지 알 수 없고 잠상이 왕래하며 들여오는 것 또한 몇만 냥이 되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기명과 패식에 순은을 쓰는 것이 그 수효를 알 수 없을 정도인데 이것이 모두 어디에서 생산된 것이겠는가? 만약 사점이 아니라면 강남에서 얻어오겠는가, 일본에서 얻어오겠는가? 관청에서 채광을 허락하지 않아 나라에 은이 부족하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으니 염려하지 말라. 게다가 은을 캐는 놈들이 모두 무뢰하고 놀고먹는 무리들이니 지금 만약 은점을 설치하도록 허락한다면 그 폐단을 만드는 것을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일득록

 

  영정조시대 잠채의 성행을 예측할 수 있는 생생한 사료이다.

 

 

  누구나 다 알듯이 정조는 애민군주이다. 적임자를 지역에 보내지 못한다면 자신이 백성을 구덩이에 멀어 넣는 것과 같다고 말하는 정조! 이 책은 정조의 인간적인 매력에 마음껏 빠져 볼 수 있는 책이다. 그러나 이책의 아쉬운 점도 많다. 정조의 '일득록' 모두 번역한 것이 아니라, 일부를 발췌 편집한 것이 첫번째 아쉽움이다. 두번째 아쉬움은 박지원이 규장각을 통해서 배출된 당대의 문장가라 설명한 부분이다. 정조가 반성문을 쓰라고 명했는데도 박지원은 이를 거부했다. 벼슬을 주겠다는 정조의 회유책도 거부한 박지원이 규장각을 통해서 배출되었다는 설명은 명백한 오류이다. 이러한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정조의 생각을 살펴보고 싶어하는 독자에게 권할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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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 교양 교양인 시리즈 4
박석무 지음 / 한길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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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 정약용은 높은 산과 같고, 박지원은 깊은 물과 같다.' 어느 학자의 말이다. 조선의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영정조 시대를 살아간 두 인물!! 그러나 서로 만나보지도 못했지만, 서로 정치적 입지가 달랐지만, 우리에게 영정조 시대의 커다란 빛으로 기억되고 있다. 찬란한 두 빛중에서 나는 다산에게 끌린다. 해학이 넘치는 박지원의 글보다는, 시대의 아픔을 고뇌하며 언젠가 정조와 같은 현군이 나타나면 개혁의 자료로 쓸 수 있는 책을 저술하는데 심혈을 기울인 다산의 모습이 나의 가슴이 더 다가온다. 다산을 알면 알 수록 다산을 다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뿐, 다산을 알았다고 말하기가 어려웠다. 이덕일의 책과 정민 교수의 책도에서 무척이나 감동을 받았지만, 다산에 대한 갈증은 더욱 커졌다. 그래서 다산학의 대가로 불리는 박석무님의 책을 빼들었다.

 

1. 다시는 아들 낳았다 기뻐하지 않겠네요.

  농경사회에서 아들은 커다란 재산이다. 커다란 노동력을 얻었으며, 부모의 노후를 책임지는 노후대책이기도 하다. 그런데, 유배가는 길목에서 다산은 부모에게 시를 짓는다. 그 시에, '다시는 아들 낳았다 기뻐하지 않겠네요.'라는 글귀가 있다. 10달을 배속에서 키워 장성 시켰는데, 그 아들들이 줄줄이 유배를 가고, 혹은 천주교를 믿는다는 죄목으로 죽음의 길에 들어선다. 낳은 기쁨보다 아들을 먼저 떠나보내는 아픔이 더 크기에, 다시는 아들 낳았다고 기뻐하지 않고 이제는 슬퍼할 것이라는 말이다. 노론 벽파의 정치적 보복과 공서파의 공격으로 수많은 남인 신서파가 죽음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다산은 천주교를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노론과 공서파는 다산을 죽이려했다. 황사영 백서 사건이 일어나자, 아무런 관련이 없는 다산을 다시 한번 불러들여 국문한다. 특히 정승 서용보는 다죽여도 다산을 죽이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다며 다산을 죽이려한다. 다산의 암행어사 시절, 서용보의 비행을 왕에게 보고한 것을 그는 잊지 않고 처절히 보복한다. 피의 정치보복 앞에서 다산의 가문은 풍비박산 된다. 이를 지켜보는 부모의 마음은 어떠했겠는가? 죽어서도 편히 누워있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다산은 천주교를 믿은 것이 자신을 죽음의 문턱으로 이끌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다산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버이와 같은 정조가 살아 있을 때, 반성문을 쓴다. 이른바 '자명소'이다. 자신이 한때 새로운 학문을 배우려는 호기심에서 천주교를 믿었으나, 제사를 배척하는 천주교의 교리를 알고 나서는 이를 멀리했다는 내용의 반성문을 담은 상소문이다. 노론의 영수 심환지 조차도 글이 아름답다고 칭찬할 정도였다. 그가 공개 반성문을 써야할 정도로 다산은 삶의 끈을 놓치 않으려 처절히 노력하고 있었다. 그도 아마 신유박해의 '기미'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정조라는 어버이 군주가 사라진다면, 죽음의 먹구름이 맹렬히 그에게 다가올 것이라는 것을..... 

 

2. 나는 저술로 평가받으련다.

  유배지에서 그는 몰락한 가문을 걱정하고, 흑산도로 유배된 형을 그리워했다. 불행은 혼자오지 않았다. 6남 3녀를 낳았지만, 2남 1여만 살아남았다. 유배지에서 두 아이를 잃은 다산은 얼마나 괴로웠을까? 유배지에서 자식을 잃은 다산은 자신의 상실감보다 아내의 건강을 더 걱정했다. 자신의 아들에게 어머니에게 효도할 것을 당부하는 편지는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이순신 장군이 자신의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기 전에, 어수선한 꿈을 꾼다. 그리고 아들의 죽음을 듣고 나서는 너무도 괴로워한다. 두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다산의 심정도 이순신 장군과 같지 않았을까?

  연이은 불행 속에서도 다산은 불굴의 의지를 불태운다. 유배지 장기에서 '촌병혹치', '이야슬', '기해방례변'을 저술하는 무서운 집중력을 보인다. 강진에서는 해남윤씨 처가의 도움으로 책을 빌려 볼 수 있었으나, 장기에서는 참고서적조차 구하기 힘들었을 텐데, 이러한 책들을 저술한 그의 집중력에 감탄을 한다. 그후, 유배지에서 500여권이라는 놀라운 저술 활동을 한다. 다산은 왜? 이리도 저술에 자신의 모든 열정을 쏟아 부었을까?

  그 해답은 다산의 편지에서 찾을 수 있다. '후세 사람들이 단지 사헌부의 계문과 옥안만 믿고 나를 평가할 것 아니냐' 라는 글귀에서, 다산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이며, 왜? 그가 그토록 저술활동에 매진했는지를 알 수 있다. 유럽인들이 신을 두려워 한다면, 동양인들은 역사를 무서워한다. 다산은 역사에 자신이 죄인으로 기록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자신을 죽이려는 벽파와 공서파의 기록만 보고, 자신을 못난 죄인으로 후세인들이 평가하는 것을 그는 두려워했다. 그는 사마천이 궁형의 치욕을 참고, '사기'를 저술했듯이, 500여권의 저술활동을 통해서 당당히 시대의 참다운 지식인으로 평가받고 싶었던 것이다. 아홉마리 소의 한가닥 털이기 보다는, 당당한 한마리의 소로, 닭들 속의 학으로 평가 받고 싶었던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서, 다산은 폐족이기에 더 큰 인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산은 그의 아들에게 쓴 편지에서 과거 공부만 하지 않고 참다운 학문을 할 수 있는 기회라고 말하면서, 학문에 정진하도록 당부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환경 탓을 한다. 나의 환경이 이렇기에, 부모를 잘못 만나서 자신은 이럴 수밖에 없다고.... 그러나 다산은 유배지에서 500여권의 저술을 남겼으며, 신영복 선생은 감옥에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초고에 해당되는 글들을 썼다. 그리고 이책의 저자 박석무는 감옥에서 다산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문재인은 친구 노무현의 죽음과 대선에서 박근혜에게 패하고 나서 더욱성숙했다. 시련이 그들을 강하게 만들었다. 인간이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기도 하지만, 강한 인간의 신념이 냉혹한 현실을 자신을 벼리는 숫돌로 만든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머루르는 곳마다 주인이 된다면, 그곳이 참다운 진리의 세계가 된다!!

 

3. 조선시다운 조선시를 짓겠다.

  이 책은 다른 다산 관련 서적과는 달리, 다산의 시가 많이 소개되어 있다. 탁월한 시인이로서의 다산의 모습을 이책을 통해서 마음껏 보았다. 또한 다산이 그린 그림도 수록되어있어, 다산을 조선의 다빈치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다산의 시는 다른 한시와는 달리, 아가, 납하 등의 우리의 토속어를 시어로 참음해서 사용하고 있다. 중국의 고사를 즐겨 사용해야 지식인이라는 잘못된 믿음을 갖고 있는 조선의 선비들에 비해서 그는, 우리 조선의 산천과 사람들, 그리고 말에 관심을 갖고 그들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그들의 말을 차음해서 시를 지었다. 문학면에서도 엄청난 시도였다.

  한편, 아쉬움도 남는다. 첫째는 장기현 마현리에 다산과 관련된 일화가 제대로 전승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다산은 마현리 사람들의 말과 생활을 시로 읊조리며 그들을 잊지 않았는데, 그 지역 사람들은 노론의 거두 송시열의 일화는 전승하면서도 다산의 일화는 전승하고 있지 않다. 정확한 다산의 유배집터 조차도 모르는 현실이 서글플 뿐이다.

  둘째는 다산이 한글시조를 남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다산의 외가 6대조인 고산 윤선도는 한글시조를 다수 남겼다. 그러나 나산은 그러하지 않았다. 그가 민중의 삶과 애환을 한글시조로 노래했다면, 다산이라는 산은 더욱 높이 솟았을 것이다. 못내 아쉬움이 남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왜? 고산 윤선도는 한글시조를 남겼는데, 다산은 남기지 않았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아마도, 정계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산천에 은거해 사는 사람과, 사회 개혁의 의지를 버리지 않고 언젠가는 정조와 같은 군주를 만나 민초들을 구제하겠다는 사람의 차이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정계에 다시 진출하기 위해서라도 양반의 글자인 한자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은 것은 아닐까? 나의 상상일 뿐이다.

 

4. 아쉬운 점, 그리고 잡다한 생각

  논개는 기생일까? 다산은 논개를 '의기' 즉, 의로운 기녀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학자들의 연구결과 논개는 기녀가 아니다. 평민 여성일뿐이다. 다산을 비롯한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논개를 기녀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를 '의기'로 묘사했다. 이것은 시대의 한계이고 다산의 한계이다. 이러한 한계를 저자가 지적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책을 읽는 내내 '다산선생 지식경영법'이라는  책과 비교가 되었다. 정민 교수는 '다산선생 지식경영법'이라는 책에서 전염병이 번지는 모습을 보고 중국황제의 죽음을 예측한 다산의 '기미' 관찰법을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단 5줄로 서술을 마무리지었다. 서술 목적에 따라서, 보는 관점에 따라서 같은 주제의 책도 이렇게 다를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사람은 보이는데로 보지 않고, 보고 싶은 것만을 본다.

  다산에 대한 연구는 남한보다는 북한에서 먼저 활발히 시작됐다는 사실을 아는가? 다산의 매력을 북이 먼저 알았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다산이 저술한 500여권의 책은 이 시대에도 많은 지혜를 주고 있다. 다산에 대한 연구가 남북한 모두에게서 활발히 진행되고, 더 나아가서 남북한이 함께 다산연구를 하는 그날을 기대해본다.

 

  초등학교 시절에 읽은 위인전을 제외하면, 다산과 관련된 책을 읽는 것은 이번에 3번째이다. 매번 책을 읽을 때, 다산은 나에게 많은 감동을 선사하고, 많은 깨우침을 주었다. 그리고 나 자신이 얼마나 다산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것이 많은지를 느끼게 해주었다. 다산에 대한 더 좋은 연구서가 나온다면 다시한번 다산에 오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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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iKim 2018-01-30 01: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의외네요. 남한보다 북한에서 먼저 다산을 연구했을 줄이야. 무튼 남북공동연구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강나루 2018-01-30 05:34   좋아요 0 | URL
여전론 처럼 다산의 혁신적인 개혁론의 매력 때문에 연구를 시작하지 않았나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