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플] 1인가구가 이제는 대세라고 한다. 사람들은 이제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는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사회단위로 등장한 개인이 모든 것을 시장에서 해결하기 때문이다. 즉, 모든 것을 돈을 주고 사는 것이다. 돈이 사회를 살아가는 안전망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 결국 문제는 돈이다. (뭐니뭐니해도 money가 최고라는 수십년전 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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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진 소크라테스 - 철학자의 탄생
아먼드 단거 지음, 장미성 옮김 / 글항아리 / 2022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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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는 교양다큐. 넷플릭스 마걸님의 자극적인 영상이 이제는 약간 피곤하게 느껴지는 분께 추천. 이 책을 읽고 새롭게 알게된 것..

1. 소크라테스는 중상류 가문출신이었다: 요새로 치면 분당이나 동탄 거주자 정도? 물려받은 유산과 부동산이 있었다는데 부동산임대수익이 있었다는 썰까지. (소크라테스가 건물주였다는?). 물론 가난하게 살았지만 먹고 살만했으니까 철학했다는 얘기다

2. 게다가 그렇게 못 생긴 것도 아니었다: 희극 작가 아리스토파네스가 젊은 소크라테스의 외모를 트집잡지 않은 게 증거. 중년이후 갑상선이상으로 눈알이 튀어나왔을까? 젊은 소크라테스는 여타 청춘처럼 세상이 전부 자기 것처럼 보이는 청춘이다. (게다가 호색한이었다는 썰까지)

3. 크산티페는 두번째 부인 혹은 정부였다: 소크라테스가 50대 때 크산티페를 들였다는데 당시 크산티페는 20대였다. 더 놀라운 건 그러고도 아들 하나를 낳았다는 것. 당시 그리스 여성의 결혼 적령기는 10대였다고.

4. 책에 등장하는 아스파시아는 마릴린 먼로 더하기 허난설헌 또는 신사임당 이미지. 제우스라 불린 남편 페리클레스는 일론 머스크나 스티브 잡스 이미지다. 둘의 나이 차 역시 두 배 이상 난다고. 아 제우스 되고 싶어라…이런 남자의 아내를 사랑했으니 그게 이루어질리가 없지,,,저자는 야망이 넘치던 청년 소크라테스가 철학으로 방향을 튼 것은 다이몬과 아스파시아와의 만남을 계기로 본다(향연의 디오티마의 말은아스파시아와의 경험이 원전일까?)

고대 그리스 생활상을 히스토리 채널 보는 기분으로 재밌게 볼 수 있다. 이렇게 당시 생활상과 소크라테스 이야기를 하나로 엮어 낸 것은 아마 저자가 대가이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단 정작 책 제목인 소크라테스와 아스파시아와의 관계는 어물쩍 넘어간게 함정. 그래도 읽을만 하다. 대체 알키비아데스가 얼마나 미남이길래?


ps. 파이돈에서 소크라테스가 죽기 전 한 마지막 말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마리를 갖다주라" 때문에  의견이 분분하다. 니체는 노인네가 죽기 전에 혀가 풀려서 삶을 혐오하는 본성이 드러났다고 맹비난 했고, 이 책의 저자의 의견은 아스파시아(혹은 플라톤)이 병에 걸렸고, -당시 플라톤은 병에 걸려 스승의 마지막에 참석하지 못했다고 파이돈에 나온다- 소크라테스가 쾌유를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빌었으며 그 보답으로 닭 한마리를 주라고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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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연>을 읽으면 사랑에 관해 능숙해질까? 인간들이 덕과 행복을 얻는 일과 관련하여 가장 권위있는신인 에로스에 관해 말이다.


파이드로스; 결국 에로스는 애인에게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다. 추한 것들에 대한 수치심을, 아름다움에 대한 열망을 갖는 것 이다. 그러한 덕을 갖출 때 애인은 상대방을 우러러보고 , 애인에게 중요한 사람이 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무엇이 덕인지에 대한 합의가 전제되어야 한다.


에로스 자신이, 덕을 향한 열망을 갖도록 신지핀 상태로 만들어 나면서부터 아주 용감한 자와 비슷하게 되도록 하지 못할 만큼 그렇게 비겁한 자는 없네. ....실로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죽으려고 하네-문장이 왠지 이펙트가 있다. 이런 게 원문의 힘일까?

 

사랑하는 자가 소년 애인보다 신적이거든. 신 지펴 있으니까 그렇지

 

파우사니아스가 뒤를 잇는다:

행위 자체로만은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네....이것들 가운데 아무것도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은 없네. 다만 행위 속에서 어떻게 행해지느냐에 따라 그러그러한 것이라고 드러나게 되는 거지 -자연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는 버트런드 러셀의 무신론 에세이를 떠올리게 한다. 나름 그렇지 않은가? <화양연화>는 불륜을 권하는 영화인가요? 하고 앙코르와트를 설명하던 가이드가 물었다. 아마 이게 답일까? “

 

파우사니아스는 잇달아 지금의 통념과 그리 벗어나지 않는 말을 한다...

천상의 에로스는 본성상 더 건장하고 지성을 더 많이 가진 것을 소중히 여겨 남성에게로 향한다네...(이들은) 전 생에 동안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과 함께 삶을 공유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 말이네-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시대부터 미덕이었다. 게다가

여기 법이 말해주는 바에 따르면 신들도 인간들도 사랑하는 자에게 마음 놓고 행동할 수 있게 허용해 주었네“- 즉 사랑을 위한 8,90년대 식 깽판도 그리스 시대에 통용되었다는? 지금은 스토킹인데.

 

범속한 사랑은 영혼보다 몸을 사랑하는 것이고,그는 또 확고부동하지도 않은데, 이는 그가 사랑하는 대상이 확고부동하지 않기 때문이지. 그가 사랑했던 몸의 꽃이 시들자마자 그는 날아가 버린다네 -파이돈 때부터 일관되게 등장하는 플라톤의 논리는 불교의 염오라는 개념이 떠오를 정도로 물질적인 것, 육체적인 것에 대한 배척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무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음 문장은

 

덕을 위해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에게 살갑게 응하는 것은 전적으로 아름다운 것이네

 

살갑게 응한다는 것은 성적인 함의를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즉 성인남자는 어린 애인에게 덕을 가르치고, 그 어린 애인은 성인남자를 성애의 대상으로 삼는 관계를 이상적으로 삼는 건데 역설적으로 육체가 에로스에서 빠질 수 없다는 반증 아닌가?

 

에뤽시마코스: 의사답게 가장 나이브하고 쿨한 에로스 묘사. 에로스는 자연의 생명력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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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스형은 죽음을 앞두고 있다. 당연히 죽음에 대한 토론이 벌어진다. 테스형은 헤어진 여친 앞에서 나 잘살고 있어 라고 객기를 부리듯이 죽음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철학자는 오히려 죽음을 반길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내가 지금 죽여줄께, 하는식으로 성질을 부릴 필요는 없다. 그냥 문학적 레토릭으로 읽어도 무방하다. 아마 고대 그리스는 현대와 같은 분위기 아니었을까. 지극히 물질주의적이고, 현세적인, 세속적인 시대. '건강한 육체의 건강한 정신'이라는 표어는 원래 끝에 물음표가 붙는 의문문으로, 비아냥의 의미가 담긴 것이었다고 한다. , 너처럼 건강하면 머리도 알차냐? 이 골빈 것들아, 하는 빈정거림 정도의 의미인 것이다. 어째 요즘 육체파 인스타 프로필이 떠오르지 않는가. 테스형에게 감각과 육체는(삶은) 기본적으로 믿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철학자들의 직무인 현명함과 진리에 대한 탐구를 왜곡시킨다는 것이다. 물론 감각은 상대적이다. 가장 좋은 예가-마이클 셔머가 직관을 믿지 말라고 하며 종종 드는 예인데- 지동설과 천동설의 차이이다. 감각적으로는 지구가 돈다는 것을 체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지동설도 감각적인 데이터로 규명되긴 하지만, 테스형에게 진리는 '추론'으로 증명되는 것이다. (여기서 추론이라는 것이 현대의 상식적인 의미인지 맥락에 따라 다른 의미가 있는지 알아볼 필요는 있다.) 문제는 테스형이 말하는 진리라는 것이 추론이라는 단어의 관점에서 보면 e=MC2 같은 명제적 진리를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몸으로부터의 영혼이 풀려남과 분리"(67E)라는 문구에서 보면 불교의 수행과 열반의 이미지를 모두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김주일 선생님의 답변에 따르면 진리와 현명함은 모든 삼라만상의 배후에 있는 일종의 이법같은 것이다.) 고대철학이 현대의 분석철학이나 언어철학이 아닌 하나의 삶의 태도이자 방식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고대철학이란 무엇인가>(피에르 아도) 실제 파이돈에서 테스형이 몸과 영혼,‘철학자의 수행을 말하는 대목은 불교의 염오나 위빠사나 수행을 떠올리게 한다. 모든 감각으로부터 평정심을 유지하며 완벽히 평온한 상태. 하지만, (테스형의 어법을 빌리면) 현명한 이여, 그대는 과연 어떠한 감각적 쾌락없이도 충만한 삶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인가? 퇴근 후 한 잔의 맥주와 애인과의 달콤한 키스를 모두 버리면 거기에 남는 것은 어떤 삶인가? 아니 그것을 삶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한 마디 덧붙이자면 감각의 특징 중 하나가 적응성이라고 한다. 아무리 자극적인 감각도 결국 적응이 되면 평범해 진다는 거다. 고통과 쾌락은 결국 짝지어져 있다는, 고통이 있기 때문에 쾌락도 존재한다는 불교식 통찰을 테스형은 두 개의 머리를 가진 한 마리 뱀으로 설명한다.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철학자는 왜 진리와 현명함을 열망하는가? 그것이 철학자에게 어떤 쾌감과 만족감을 안겨주는가? 그 만족감은 감각적인 쾌락과 어떻게 다를까?

이후 주제는 상기설로 이어지는데 이는 영혼이 존재함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앎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원래 알고 있던 것을 상기하는 것인데 때문에 영혼이 존재한다는 식이다.

 

p.s. 우리는 신의 소유물이기 때문에 신이 부르시기 전까지는 스스로 죽음을 택해서는 안된다... 소크라테스의 이 논리를 나는 중학교 때 (기독교신자인) 학생주임으로부터 들었다. 그리고, 그 때 학생주임의 말은 고3 때 자살폭풍에 시달리던 나에게 죽음을 막을 수 있는 훌륭한 하나의 알리바이가 되어 주었다. 물론 여기서도 딴지를 걸 수 있다 어떤게 신의 부름인지 아닌지(소크라테스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필연이라고 이야기한다.)를 어떻게 아느냐는 거다. 필연이라는 것도 여러 가지의 겹쳐진 우연이거나 단지 인간이 만든 여러 가지 사회적 조건이 겹친 것일 수 있다. (, 그것은 얼마든지 다른 모습일 수도 있었다.) 그럼 난 여전히 지금 죽음을 생각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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