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정의로운 기만을 마다하지 않는다

 

신이 거짓말들을 할 만한 때라는 것을 존중하는 때가 있다.”

 

-아이스퀼로스-

 

상대주의와 절대주의 중 과연 어느 것을 택해야 할까? 다큐 <액트 오브 킬링>에는 인도네시아에서 과거 사람들을 학살한 살인자가 그 결과로 지금 부귀영화를 누리며 조금도 죄책감이나 후회를 보이지 않는 장면이 나온다. 인도네시아의 역사를 잘 알지 못하지만, 거칠게 비유하면 제주 4·3 사건 비슷한 것 같다. 싱글싱글 웃어가며 과거에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했던 기억을 무용담처럼 떠벌리는 이들 중 한 명이 말한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라고. 백인들은 인디언을 학살한 과거를 사과했느냐고. 절대주의는 분명 사람을 숨막히게 하는 면이 있다. 안티고네는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하지 말아야 했을까. 어떤 거 더 인간적일까. 이런 면에서 상대주의는 삶에 숨통을 트여주는 것 같다. 니체가 그리도 시원한 바람같이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를 추상같이 심판하는 도덕이나 법들이 사실 절대적이 아니라고 말하기 때문일 것이다. 삶을 난도질하는 심판자들이 실은 전부 허위라고 하면, 스스로의 양심의 가책에 자신을 찢어놓은 선량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위안이 될 것인가. 하지만, <액트 오브 킬링>의 뻔뻔한 살인자들을 보면 한숨이 나오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모든 것은 상대적이라고 말하며 과거의 학살을 정당화하는 장면을 보면 소름이 끼친다. 아마 전두환도, 친일파도 다 이것과 비슷한 정신이었으리라. “이중논변은 일종의 과시용 논증술이다. ‘좋은 것은 항상 좋은 것일까. 때와 상대에 따라 좋은 것일까. ‘좋은 것은 과연 어떤 때에는, 누군가에게는 나쁜 것이 될까? 익명의 저자는 처음에는 좋은 것은 항상 좋은 것이다, 라고 말했다가 나중에는 그 반대의 논증을 제시한다. “정의로운 기만은 과연 어떤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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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 가성비의 시대가 불러온 콘텐츠 트렌드의 거대한 변화
이나다 도요시 지음, 황미숙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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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중고등학교 때에도 비디오테이프를 결말만 보던 녀석들이 있던 게 기억나는 걸로 봐서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게 전혀 새로운 형태는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저자의 분석을 읽다보면 빨리 보기의 뉘앙스가 세부적으로 달라진 게-아무래도 빨리 감아 보기를 하는 세대가 Z 세대이다 보니- 결국 이 책은 일본 Z세대 문화론같은 성격을 띈다. 지금 Z세대가 처한 환경은 어떨까? ‘소셜 네이티브라고 불릴 만큼 인터넷과 sns가 일상화된 반면 저성장과 불확실성의 시대이고, 한 번의 실수가 나락으로 갈 수도 있는,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율과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사회다. 이들에게는 가성비소비자마인드가 기본 베이스로 장착되어 있다. 저자는 이런 자본주의 사회에서 영화 빨리 감아보기는 필연이라고 분석한다. 일단 보아야 하는 영상 자체가 많아졌고, 인터넷과 OTT라는 빨리 감아보기가 용이한 매체가 등장했다. OTT는 회차가 순차적으로 등장하던 기존 매체와 달리 모든 회차가 한번에 업로드되고 작품당 비용이 아닌 구독 개념이기 때문에 빨리 감아보기가 경제적으로 효율적인 양식이다. 여기서 작품감상’(행위 자체가 목적이 되는)하기 보다는 컨텐츠’(정보수집 목적의)소비하게 된다. 그리고 빨리 감아보기는 소비자의 커스터마이징에 가깝다. 내 돈 주고 산 내 상품을 왜 내 맘대로 못해? 같은 태도인 것이다. 소비의 목적은 FOMO나 공통의 화제 등 실리적인 이유다. SNS의 발달은 과잉접속과 도시를 마을로 만드는상황을 만들었다. 인터넷이 세계의 전부인 이들은 공통의 화제나 유행에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많은 영상을 섭렵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도 시간 가성비를 추구해야 한다. 개성을 추구하는 분위기도 한몫하는데 이들에게는 개성적이어야 한다는게 오히려 족쇄처럼 작용한다. 문화적인 주류가 사라진 상황에서 어딘가에 속해서 개성을 만들어야 하는데 오타쿠가 될 만한 에너지를 내기에는 이들은 이미 지쳐있기에 역시 가성비를 추구한다. 게다가 sns에서 조금이라도 잘못된 표현을 하면 강호의 고수들에게서 융단폭격을 받기 때문에 이들은 방어적인 태도를 취한다. 이 책에서 묘사된 Z세대는 좋게 말하면 자족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자폐적이다. 소비자마인드가 체화된 이들은 마치 체리피킹 하듯 영화를 소비한다. 무관심한 것을 빨리 감기로 넘기는 태도는 타자에 대한 태도로도 이어진다. 얼핏 보면 나와 상관없는 것에는 무심한 관용을 보이는 것 같지만 속내는 오히려 상처받기 싫어,날 내버려 둬같은 방어적 태도에 가깝다. 또한 신문같은 기존의 매체와는 달리 인터넷은 자기가 보고싶은 것만 보는 필터버블이 훨씬 심하다.

영화 빨리 감아보기가 낳는 변화는 무엇일까? ‘자극의 역치가 올라갔다는 것이다. 영상 내의 정보량이 급증하다 보니 이제 사람들은 웬만큼 지루한 것은 견디지 못한다. 게다가 sns의 발달은 모든 이에게 발언권을 부여했다. 모든 대중의 취향을 고려하다 보면 작품은 하향평준화 될 수 밖에 없다. 이제 창작자들은 게임의 오픈월드처럼 다양한 감상자들이 각각의 수준에 맞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작품의 폭을 넓혀야 하는 과제에 직면했다. 책은 단순하면서도 명쾌하다. 하나의 논리에서 약간 엇나가는데? 하는 부분도 있지만,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어떤 성향을 조망할 수 있는 책이다.

 

ps 추가로 필터버블에 대해 더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인셀테러에서는 남성들이 매노스피어로 빠져드는 과정을 추적한다. 인터넷을 비롯한 저자가 분석한 Z세대의 성향들이 매노스피어로 빠져드는데 어떤 영향을 끼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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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순간에는 얼마나 많은 필연과 우연이 겹쳐 있을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토마스가 테레사를 만나는 과정을 회상하는 장면이 있다만약 상사가 아프지 않아서 토마스가 왕진을 가지 않았다면 테레사를 만나지 않았을 것이고만약 그 호텔에 묵지 않았더라면 테레사를 만나지 않았을 것이고만약 그 호텔에 딸린 그 술집에 가지 않았더라면 테레사를 만나지 않았을 것이고...... 그런 식으로 따져보니 토마스가 테레사를 만나기까지 대충 대여섯개의 우연이 겹쳐 있더라는 것이다그런데한번 생각해 보자이 정도의 우연이 겹쳐 토마스가 테레사를 만났다면그건 우연이 아니라 이미 필연 아닐까밀란 쿤데라는 인간의 삶은 한없이 가벼우면서도 무겁다라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사실 우주의 탄생 이래 수많은 인과들이 있었을 것이고하찮게 여겨지는 무심한 일상의 순간도 그 수많은 인과들이 축적되어 있을 것이다보통 사람들은 그중 한두 가지의 인과만을 가지고 현재에 의미를 부여하지만그렇게 우주적 차원으로 조감도를 올리면 지금 이 순간이 더 숭고하게 느껴지고그런 순간 앞에서 사람들은 겸허해진다더 나아가, ‘나의 탄생을 두고 비슷한 성찰을 하지만 전혀 다른 결론을 내리는 두 가지 책이 있다.

 

 <어느 불교무신론자의 고백>(스티븐 배철러,궁리은 한 영국인의 불교수행편력기이다저자의 수행 여정은 달라이라마 친견부터 시작해 티벳 라마승 생활을 거쳐 다시 환속하기까지에 이르는데 그중에는 전두환 정권 아래의 송광사도 있다저자는 불교의 주요주제인 연기를 고찰하는 대목에서 말한다.

 







동시에 대단히 불안하게 만들었던 내 어린 시절 기억 중 하나는 어머니가 무심코 '라는 것에 대한 본능적인 확실성을 시험대에 올렸던 일과 관련이 있다때는 크리스마스였고나는 아마도 열여섯 살쯤 되었던 것 같다어머니와 베티 이모가 식탁에서 사진첩을 뒤적이다가 군복을 입은 어떤 남자-사막의 태양에 눈은 찡그리고 파이프를 이로 꽉 물고 있는-의 스냅 사진을 보게 되었다어머니가 내게 말했다. “ 일이 다르게 풀렸다면 이 사람이 네 아버지가 되었을 거야나는 생각했다하지만 그 남자가 내 아버지였다면 내가 나일 수 있었을까이것이 나를 궁금하게 만들었다나의 실제 아버지의 수많은 정자 중 다른 것이 어머니의 난자와 수정되었다면 그 염색체 혼합에서 태어난 아이가 나였을까만일 바로 그 동일한 정자가 어머니의 다음번 난소 주기에 파고 들어갔다 해도 과연 그 아기가 나였을까?”

 

이 대목을 통해 저자는 자신이 존재한다는 감각과 근본적 자아에 대한 믿음의 허구성,그런 자아에 대한 집착이 고통을 불러일으킨다는 불교의 가르침을 성찰한다여기서 자아는 우리를 속이는마치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도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환상이다우리는 이런 환상에 속아 자아에 집착하고스스로를 고통에 빠뜨린다.

 

반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고양이를 버리다>(무라카미 하루키,김영사)에서 개인의 의미는 비슷한 성찰을 하지만 사뭇 다른 결론으로 나아간다책은 거의 소책자나 문건에 가까운하루키의 사적인 인생사를 담은 글이지만 전부 하루키의 실제 경험이고-아마 작가 하루키의 가장 골수를 이루는 경험일 것이다내면을 엿볼 수 있는 글이라 묘한 여운을 남긴다특히 하루키와 아버지의 관계가 눈에 띄는데 세계적인 작가가 자신의 아버지와 20여년 넘게 의절 비슷한 것을 하고아버지가 죽기 직전에야 어색한 화해를 했다는 사실이연도를 계산해보면 하루키도 중년의 나이였을 때다대체 이유가 뭐였을까?- 기이하게 느껴진다



 












만약 아버지가 병역에서 해제되지 않아 필리핀이나 버마 전선으로 보내졌다면...음악 교사였다는 어머니의 약혼자가 전사하지 않았다면...그렇게 생각해 가다 보면 정말 기분이 묘해진다만약 그랬다면나라는 인간은 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그리고 그 결과당연히 나라는 의식은 존재하지 않고따라서 내가 쓴 책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면 소설가로서 이렇게 살아있는 나의 삶 자체가실체가 없는 덧없는 환상처럼 여겨진다나라는 개체가 지닌 의미가점차 모호해진다손바닥이 비쳐 보인다 한들 이상할게 없다. ”

 

내가 이 개인적인 글에서 가장 말하고 싶었던 것은 딱 한 가지 뿐이다딱 한 가지 당연한 사실이다나는 한 평범한 인간의 한 평범한 아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그것은 아주 당연한 사실이다그러나 차분하게 그 사실을 파헤쳐 가면 갈수록 실은 그것이 하나의 우연한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 점차 명확해진다우리는 결국어쩌다 우연으로 생겨난 하나의 사실을 유일무이한 사실로 간주하며 살아있을 뿐이 아닐까.

바꿔 말하면 우리는 광활한 대지를 향해 내리는 방대한 빗방울의 이름 없는 한 방울에 지나지 않는다고유하기는 하지만교환가능한 한 방울이다그러나 그 한 방울의 빗물에는 한 방울의 빗물 나름의 생각이 있다빗물 한 방울의 역사가 있고그걸 계승해간다는 한 방울로서의 책무가 있다우리는 그걸 잊어서는 안 되리라가령 그 한 방울이 어딘가에 흔적도 없이빨려 들어가개체로서의 윤곽을 잃고 집합적인 무언가로 환치되어 사라져간다해도아니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그것이 집합적인 무언가로 환치되어가기 때문에 더욱이.”

 

는 우연 혹은 환상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부여되어져야 한다는우연이기 때문에 더 의미가 있다는 어째 애잔한 느낌의 지극히 소설가적이고 소설가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할 수 있는 통찰이다자아를 바다에 뿌려지는 빗방울에 비유하는 것은 불교나 힌두교 같은 전통에서 곧잘 등장하는데 하루키가 승려가문 출신이기 때문에 이런 비유에 익숙한 게 아닌가 싶다어쩌면 이런 생각이 하루키가 소설을 쓰게 하는 동력인지도 모르겠다곧 사라질 물방울에게-사라지기 때문에 그 물방울을 최대한 애도하고 추념해주는 것마치 어떤 책 제목처럼 버릴 것인가 찾을 것인가?” 라는 화두가 떠오른다.

 

개인적으로는쿤데라의 소설을 읽고 난 뒤 결국 결과론적인 관점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 적이 있다즉 어떤 일이 발생한 후 사후에 과거를 반추하다보니 이런 생각이 나오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었다완벽한 무가 아니고 무엇인가가 존재하는 이상그 존재는 우연이든 필연이든 어떤 사건을 겪을 수 밖에 없다그리고어떤 사건이 발생한 후 시간을 전제로 해서 과거의 인과를 찾다보니 이런 관점이 나오는 거 아닐까현재의 순간은 우연필연을 따질 거 없이 그다지 심각하지 않은투박하고 단순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같은 통찰을 가지고 다른 결론이 나온다는 것은 흥미롭다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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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우리는 모두, 각자 세대의 공기를 숨쉬며 그 고유한 중력을 짊어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틀의 경향 안에서성장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좋고 나쁘고를떠나 그것이 자연의 섭리다.  - P62

만약 아버지가 병역에서 해제되지 않아 필리핀이나 버마 전선으로 보내졌다면...음악 교사였다는 어머니의 약혼자가 전사하지 않았다면...그렇게 생각해가다 보면 정말 기분이 묘해진다. 만약 그랬다면, 나라는 인간은 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그 결과, 당연히 나라는 의식은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내가 쓴 책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면 소설가로서 이렇게 살아있는 나의 삶 자체가, 실체가 없는 덧없는 환상처럼 여겨진다. 나라는 개체가 지닌 의미가, 점차 모호해진다. 손바닥이 비쳐 보인다 한들 이상할게 없다. - P88

나는 한 평범한 인간의 한 평범한 아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그것은 아주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차분하게 그 사실을 파헤쳐 가면 갈수록 실은 그것이 하나의 우연한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 점차 명확해진다. 우리는 결국, 어쩌다 우연으로 생겨난 하나의 사실을 유일무이한 사실로 간주하며 살아있을 뿐이 아닐까.
바꿔 말하면 우리는 광활한 대지를 향해 내리는 방대한 빗방울의 이름 없는 한 방울에 지나지 않는다. 고유하기는 하지만, 교환 가능한한 방울이다. 그러나 그 한 방울의 빗물에는 한 방울의 빗물 나름의 생각이 있다. 빗물 한 방울의 역사가 있고, 그걸 계승해간다는 한 방울로서의 책무가 있다. 우리는 그걸 잊어서는 안 되리라. 가령 그 한 방울이 어딘가에 흔적도 없이빨려 들어가, 개체로서의 윤곽을 잃고 집합적인 무언가로 환치되어 사라져간다해도. 아니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집합적인 무언가로 환치되어가기 때문에 더욱이.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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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 영화제 각본상이라는데  한 10여년 전?... 정도라면 이 이야기의 복선이 아주 큰 충격일 수도 있겠지만, 이제는 복선의 파격을 호들갑스럽게 말하던 기사를 읽고 혹시?.. 라고 떠올릴 수도 있는 정도의 반전이다. 오히려 보다보면 저 이야기는 앞뒤가 안 맞는데.. 하는 부분도 군데군데 보이고, 깔려있던 복선이 뒤에 나오는 결말로 이어질 때 반전으로 드러나는 펀치는 오히려 약간 편이다. 포인트도 약간 흐릿한데, 이야기를 비트는 어떤 시스템과 구조를 탓하고 싶은 건지,-그럴려면 그런 부분에 대한 묘사가 더 뚜렷했어야 했다.- 사회적 가치관과 문화를 이슈로 삼고 싶은건지- 그럴려면 등장인물이 내뱉는 대사의 파워가 약하다. 나쁘게 보면 그냥 깊이있게 보이고 싶어하는 잰체하는 대사같다.그나마 기억에 남는 것은 등장인물 모두가 무의식적으로 뒷담화를 하는 장면이다. 각본을 쓴 사람이 말하고 싶은 것은 결국 뒷담화보다 진실이 더 복잡하다는 것일까.. (스포일 안하고 쓰려니 참 힘드네 쩝,,왜 이선균 생각이 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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