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받은 걸작까진 아니고 저주받은 수작 정도의 평가를 받은 봉준호의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의 한줄평이 한낮 아파트의 지리멸렬 헛소동이었던 걸로 기억난다. 이 영화를 즐기려면 일상의 소소한 재미를 느끼는 자세가 필요하다. 별 것 아닌 얘기를 작은 설정 변화와 배우들의 연기로 끌고 가기 때문이다. 뭔가 터지나? 싶어서 기대를 하고 보면 아주 극적인 대목은 없다. 그런데도 끝까지 보게 되는 건 작은 변화들이 계속 시선을 끌기 때문이다. <미키17>을 보고 난 뒤 <플란다스의 개> 의 향기를 느꼈다.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 줄기가 전개되는 게 아니라 각각의 이야기들이 갈래를 치는데 그 지리멸렬함이 <플란다스의 개>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나는 그럭저럭 볼만했는데 재미없다고 하는 사람들은 거대서사에 어울리는 SF 라는 장르와 <플란다스의 개> 식의 미세정서가 충돌하기 때문 아닐까? 차라리 아무런 사전지식 없이 이 영화를 봤더라면 티모가 잘 죽고 내일 보자라고 인사할 때 <플란다스의 개>를 봤을 때처럼 작은 아이러니와 재미를 느꼈을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작은 아이러니가 연속될 때 영화의 만족감은 올라갔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예고편이 스포일러처럼 되어 버렸다. 그만큼 스토리 자체는 <플란다스의 개>처럼 별 것 아닌데 예고편의 장면들이 그런 설정변화들을 노출시키며  소소한 재미를 앗아간다. 이 영화는 나에게 전혀 어렵지 않다. 사실 한국에서 직장생활 좀 해본 사람이면 미키의 정서는 직빵일 것이다. 미키가 나 아직 먹을 만해하고 소리칠 때 객석에서 웃음이 터져나오던데, 그거 우리가 면접 볼 때 맨날 하는 짓 아닌가? 일파가 왜 소스에 집착하는지는 전혀 궁금하지 않다. 부임 첫날에 기이한 취향으로 사무실 인테리어를 뒤집는 관리자를 얼마나 많이 봤던가? 지롤하는 직장상사 앞에서 미키18처럼 한 마디 던지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이것도 일종의 서구동경이겠지만 어쨌든 흥행에 성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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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가 울고 있다 - 융 심리학이 밝히는 내 안의 낯선 나
로버트 A. 존슨 지음, 고혜경 옮김 / 에코의서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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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어둠을 몰아내는게 아니라 빛이 커질수록 그림자는 더 커진다. 언젠가 감당할 수 없게 된 어둠은 삶이라는 판을 뒤집고 중년의 위기를 불러올 것이다. 저자가 정의하는 자아란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자신이자 자기가 누구라고 인식하고 있는 자신이지만 그림자는 그런 자아가 거부하는 우리 자신의 일부분이다. 마치 라캉이론에서 상징계에 진입하기 위해 주체가 자신의 일부를 희생하는 것처럼, 저자의 모델에서 인간은 문명을 이룩하는 과정에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부분을 그림자로 만든다. (여기서 저자가 짚는 아이러니한 부분은 선악의 기준이 문화마다 모두 다르다는 것이다.) 하지만, 게임의 룰은 신에게 받은 것은 전부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장 발전된 유럽에서 세계대전이 일어난 것처럼 억눌린 것은 반드시 돌아온다. 저자의 드는 주된 메커니즘은 투사이다.(저자는 낭만적인 사랑도 투사로 설명한다.) 우리는 자기 안의 인정하기 싫은 그림자의 부정적인 면을 타자에게 투사하는데 그 결과가 인종주의나 전쟁 등으로, 그림자의 긍정적인 면을 투사할 때는 영웅숭배가 나타난다.

저자가 제시하는 대안은 그림자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내면작업>(동연출판사)을하는 것이다. 상징이라고 우습게 보면 안된다. 무의식에게 상징은 진짜 현실과 같다. 내면작업을 하면서 자신의 자아가 다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읽어보면 거의 오컬트 느낌이 들 정도다,) 책에 나오는 방법은 그림자의 특질을 표현하면서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을 하거나, 단편소설을 쓰거나, 춤을 추거나, 불에 태우거나, 땅에 묻어버리는 행위이다.

저자의 최종목표는 전일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자신의 그림자를 통합한 상태를 역설로, 그렇지 못한 상태를 모순으로 개념화하는데 가장 애매모호한 부분이다. 말로 표현할 수 있으면 도가 아니라는 맥락인지 저자는 각자의 상황이 다르다는 말로 구체적인 언급을 피한다. 모순은 한 가지 대극만 추구할 때 발생하는 것으로 바른 것에 의존한다. 반면 역설을 두 대극을 전부 존중하는 것으로 충돌을 의식으로 온전히 견디는 것이다. 정신적으로 강인한 자만이 역설을 견딜 수 있다. 좀 더 현실적으로 묘사한다면 딜레마에 빠졌을 때 타협’(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을 때 떡볶이를 먹고 죽는 게) 아니라 상이한 동력을 에너지로 해결책(떡볶이를 먹고 싶은 욕망과 죽고싶은 욕망의 공통점을 찾는 것?)을 찾는 것이다. 저자는 선악은 하나이고 죄책감은 오만이라고 까지 말하는데 저자의 논리는 상대주의와 관련된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전쟁과 죄책>(노다 마사아키, 또다른 우주) 은 죄책감이 삭제된 전후일본사회가 다시 극우로 기울어지는 상황을 지적한다. 인간의 발달을 직선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포토라인 앞에서 고개를 뻣뻣이 드는 사람들한테 기가 차는 우리 사회에서는 차라리 죄책감 좀 느끼라고 말해주고 싶은 사람이 많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만돌라를 설명한다. 두 개의 원이 겹치는 이미지이고 대극 사이에 연결점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언어는 동사를 이용해 주어와 목적어를 일치시키는 만돌라이고, 바흐의 마태 수난곡 중 십자가 처형장면은 잔잔한 음조와 거슬리는 음조를 이용한 만돌라이다. 저자는 죄책감에 쏟는 에너지를 이용해 만돌라를 창조하라고 조언한다. 뭐 당장은 만돌라가 뭔지 모르더라도 딜레마의 상황에서 공통점을 찾으려고 하는 관점은 즉시전력으로 실생활에 투입할 수 있을 것 같다. 추상적이고 계시적인 문장은 이 책의 장점과 단점이다. 위안과 영감을 주지만 동시에 읽어도 뭘 읽었는지 멍해지는 그런 효과를 가져온다, 책의 내용에 동의 여부를 떠나서 위안과 영감을 얻고 싶은 분에게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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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여성성 마주하기 로버트 존슨 융심리학 7
로버트 A. 존슨 지음, 이주엽 옮김 / 동연출판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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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현대 남성의 전장은 관계의 영역이라고까지 강조한다. (마초의 시대는 확실히 갔다.)여성성과의 관계가 남성의 행복 가치, 의미를 결정짓는데 여러 가지 여성성을 섞는 것이 문제의 시작이라고 한다. 저자가 드는 해결책은 명료한 의식으로 구별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명료한 의식으로 구별할 수 있는지까지는 나와 있지 않다. 이 책에서 여성성을 의미하는 단어는 부드러움, 상대성, 이성과 객관성,추상성에 대비되는 감정, 생명의 이미지이다. 남성성은 "거만하게도" 힘과,소유,지배가 행복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하지만, 여성성 없이는 행복할 수 없다. 좋은 남성성이 결여되면 무기력하지만 반대로 여성성은 힘과 의미, 가치를 일깨워주는 건 여성성이다. 저자가 드는 여성성의 여러 유형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어머니 콤플렉스와 아니마이다. 저자가 정의하는 어머니 콤플렉스는 패배하고 싶은 의지. 다시 유아로 돌아가 돌봄받고 싶은 욕구, 자살은 어머니 콤플렉스의 승리다. 수많은 남자들이 어머니 콤플렉스에 휘둘리고 평생 계속되는 중세 신화의 용과의 전쟁이다. 정직하고 분명해야 하고 명료함과 의식을 도구로 싸워야 한다.(저자는 어머니콤플렉스의 예로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든다. 그의 남성적 행동이 어머니컴플렉스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아니마는 내면과의 연결성을 통해 남자의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불어넣어 주는 의미의 운반자이고 환히 빛나며 생기를 주는 내면의 성질이다. 인간은 완결성과 전체성을 원하는데 (플라톤의 향연의 거인 이야기.) 남성성이 원하는 것은 자신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여성성이다. 남자의 인정욕구, 여성의 공감욕구는 연애담에서 흔한 이야기인데 저자도 아니마라는 개념으로 결국 같은 말을 한다. 남자는 취약해서 인정받지 못하면 견디지 못한다. “자신의 숙녀가 가볍게 비웃기만 해도 모든 승리는 재로 돌아간다...남자의 힘과 기운의 주인이 그녀이기 때문이다”(혹시 윤통과 그 배우자가 이런 관계일까?) 문제는 이들 원형이 뒤섞이거나 오염될 경우이다. 청년기에 용과의 전투라는 통과의례를 거치지 못하면 중년의 통과의례에서 대혼란에 빠진다. “ 21세에 자기 인생을 두 팔로 꽉 붙들지 못한 남자가 45에 요구되는 희생을 제대로 치르기란 불가능하다,.가져본 적이 없는 것을 비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니마를 구체적 여성에게 투사하는 예도 나온다. 저자는 20세기의 여성의 반란은 남성아니마 담지자가 되는 것에 대한 여성들의 본능적 거부감 때문이라고 한다.

조셈 캠벨의 글에서 어떤 여학생이 캠벨의 영웅신화에서 여성은 영웅이 될 수 없냐고 물었다는 일화를 본 적이 있다. 조셉 캠벨은 퇴직할 때가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고 썼던 거 같다. 이 책에서 말하듯 신화는 내면세계이고 상징이다. 탑 안의 공주 때문에 또 기분나빠하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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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여성성 마주하기 로버트 존슨 융심리학 7
로버트 A. 존슨 지음, 이주엽 옮김 / 동연출판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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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에겐 여성성의 신비를 경험함으로써 자신의 남성성 일변도를 넘어서고자 하는 목마름이 있다. 그래서 남자는 부드러움, 따스함, 친절함의 영역에 호기심과 당혹감을 - P53

느끼면서 발을 들여놓는다. 이때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자기 남성성 세계의 정당성을 승인받는 것이다. 여성성의 가치만이 이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다. 남자가 의미의 선물을 발견하는 것. 그래서 자신의 존재와 행위를 승인받는 것만큼 달콤한 일이 없다. 남성은 이러한 완결성을 여성성의 영역에서 찾는다. 실제 피와 살을 지닌 여인이든 내면의 여성성을 통해서든 간에 말이다. 신화 속 남성들은 늘 대단한 공을 세우고 머나먼 여정과 순례의 길을 떠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아름다운 숙녀의 인정하는 고갯짓 하나또는 부적 같은 뭔가를 얻어내려고 벌이는 것이다. 여성은 따로 하는 일이 없이 성에서 마냥 그를 기다린다. 영웅이그녀 또는 그녀로 대표되는 원리를 위해 위대한 행동을 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전투를 벌이는 동안에도 여전히 기다린다. 신화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면 세상 속 여성의 역할이 무척이나 형편없다. 하지만 신화는 내면세계에 속한다.
신화의 내용을 내적으로 받아들이면 남성의 절반인 여성성을 지키고 돌봐야 함을 일러준다. 영웅의어머니가남자와 여자는 그렇게 서로에게서 제각기 다른 경험을 얻고자 한다! - P54

 이해받기 원하는 갈망은 남자가 지닌 특징 중 가장 강한 것이다. 인정의 고갯짓, 부적, 심지어 말 한마디 듣는 것만으로도 남자에게 의미의 정수요, 영혼이 되는 것이다. 수 없는 영화와 소설이 영웅의 인정욕구, 사랑하는 이에게 승인받고자하는 목마름을 다뤘다. 불붙는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는 어떤 여정도 길지 않았고, 어떤 영웅적 무훈도 위험한 것일 수 없다. 남자가 거만으로 자기 존재의 승인을 얻으려 드는것은 서툰 짓이다. 사실 남자는 취약해서 인정받지 못하면 견디지 못한다. 자신의 숙녀가 가볍게 비웃기만 해도 모든승리는 재로 돌아가고 만다. 그런데 여자는 남자의 이런 심리를 잘 모른다. 자신이 남성에게 어떤 힘을 가졌는지도 알지 못한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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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 햄릿, 파우스트 - 인간 의식 진화의 세 단계 로버트 존슨 융심리학 6
로버트 A. 존슨 지음, 이주엽 옮김 / 동연출판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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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심리학이 주는 위안이 있다. <반지의 제왕>을 읽는 듯한, 종교에서 느낄 수 있는 경건함, 따듯함, 피안을 보는 경계를 초월하는 듯한 신비감, 엄숙함이다. 결국 현실이 보잘 것 없다는 것을 모두가 은연 중에 알기 때문 아닐까. 융심리학 류의 책은 인간의 원형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예를 들어 <나는 나>(캐럴 피어슨, 연금술사) 저자가 택한 모델은 돈키호테, 햄릿, 파우스트이다. 돈키호테는 에덴동산 추방 전의 인간, 초등학교 입학 전의 아이 같은 이미지다. 키워드는 본능믿음이다. 내면의 세계에서만 사는 인간이다.(라캉의 상상계?) 반면 햄릿은 낀세대. 개와늑대의 시간, 이미 선악을 알아버려서 에덴동산에서 추방됐지만 아직 구원은 얻지 못했다. 자의식 강하고 고독하고 공허감에 시달리면서 우유부단한 인간이다. 저자는 의식의 진화라는 표현을 쓰는데 돈키호테가 비리비리한 먹물 스타일의 햄릿으로 성장하는 것도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라고 한다. 커리어에서 성공했지만 공허감에 시달리는 4,50. 사다리 끝에 고생해서 올라갔지만 잘못된 벽에 사다리를 세웠다는 것을 깨달은 중년의 위기남들이다. 여기서 햄릿이 우유부단한 이유를 저자는 자신의 그림자를 통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로버트 존슨이라는 이름을 꿈해석을 하는 고혜경씨를 통해 알게 됐는데 이 분의 주요 콘텐츠가 그림자, 내면작업, 여성성 등이다. 그림자는 문명화과정에서 의식에서 배제된, 자신의 어두운 면이다. (라캉의 팔루스와 비슷하다.) 저자는 우리가 인간답게 살 에너지를 전해주는 것은 그림자라고 한다. 이후 저자는 자신의 주요 키워드로 파우스트를 해석한다. 메피스토텔레스는 그림자, 파우스트가 회춘해서 벌이는 소동은 내면작업, 헬레네를 다시 만나는 것은 여성성으로의 회귀로 설명하는 식이다. 저자가 의식의 최종심급으로 생각하는 파우스트는 에고를 죽이고 더 큰 자기가 된 인간이다.(마이클 싱어의 <될일은 된다>와 비슷한 느낌이다.) 좀 더 현실적으로 묘사한다면 소년기의 에너지와 모든 것이 시들해지는 중년의 위기에서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을 쳇바퀴 돌리듯 되풀이하지 말고 시와 음악, 새로운 느낌으로 달리기, 샘솟는 철학적 탐구, 심오한 종교적 통찰 등 ‘4차원 의식이라는 전언이다.

내가 돈키호테, 햄릿, 파우스트에 정통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면 저자의 주장이 진지한 것인지, 터무니없는 것인지 알 수 있었을 텐데. 그래도 하나의 비교대상은 찾을 수 있었는데 라캉은 햄릿이 우유부단한 이유를 오이디푸스 논리로 설명한다는 것이다. 저자처럼 그림자와의 분열이 아니다. 프로이트의 이론은 검증불가능한 신화이며 유통기한이 지난 화석이라는 비판이 박혀있어서인지 저자의 주장에 얼룩이 보인다. 저자가 말한 것은 신뢰도를 검증할 수 있는 모형이 아니라 하나의 스케치, 이미지 뿐인 것 아닐까? 읽으면 지혜롭고 무게가 있는 것 같은데 위안은 되겠지만 삶에 구체적인 함의는 무엇일까? 그림자를 통합하라는 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라는 이야기인지? 물론 저자의 책은 시리즈로 있다. (<내면작업> 등등)

삐딱하게 보면 중년의 위기를 겪는 4,50대라면 융이론 말고 한겨레21의 안광복 칼럼이 더 실용적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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