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한푼 안 쓰고 1년 살기
마크 보일 지음, 정명진 옮김 / 부글북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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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29세의 아일랜드 출신 남자가 돈 한 푼 안 쓰고 1년 살기에 도전한다-

자, 어떤 느낌이 드나? 나는 꼭 “물 한방울 마시지 않고 1년 살기”같은 느낌이 들었다. 돈을 많이 썼을 때 “출혈이 심하다”고 표현하는 것처럼 이제 돈은 거의 혈액같은 느낌이 든다. 1인 가구인 나는 식료품과 옷을 돈을 내고 사고, 돈을 내고 술을 마시고 돈을 내고 주거지를 임대해 잠을 잔다. 돈은 혈액이고, 공기이다. 하지만, 마크 보일은 돈에 지배당하기 싫었고, 현재의 체제에서 환경이 파괴되는 광경을 참을 수 없었다. 프리이코노미라는 프로젝트를 만들어서 매스컴의 주목을 받으며 돈없이 1년살기에 도전한다.

  예상대로 “정상인”의 눈으로 보기에 이것은 가시밭길에 미친 짓이다. 자전거, 퍼스널 컴퓨터,휴대폰, 태양열 전지 등 기본적 인프라 이외에 전부 스스로 에너지를 창출해야 한다. 한겨울에 찬물로 샤워를 하고,심지어는 씻기 위해 바다로 뛰어든다. 신문으로 뒤를 닦으면 치질에 걸리지 않을까? 여자친구와 잠자리는 가질 수 있을까? 혹시 아프기라도 하면 어쩌지? 히치하이킹이 그렇게 쉽게 될까? (이 난리부르스를 직접 읽고 느껴보시기 바란다.) 그는 대체 왜 이런 무모한 짓을 한 걸까? 아마도 저자가 보기에 지금은 극단의 시대이고, 그런 극단의 시대에는 그에 상응하는 고강도의 대안이 필요하다고 여긴 것 같다. 올해같이 찌는 듯한 무더위, 비싼 전력요금에 대한 원망은 있었지만, 이런 기후변화가 무분별한 환경파괴에서 왔다는 것과 닥쳐올지도 모르는 파국에 대한 걱정은 드물었다. 내가 근시안이겠지만 사실 자기의 실공간안에서 환경문제를 절실히 실감하는 사람이 있을까. 미세먼지가 많아지면 외출을 자제하는 정도이지 우리의 문명이 미세먼지를 가져온 원인 중 일부이고, 지금의 소비수준을 지구를 위해서 줄이려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우리는 항상 돈이 부족하다. 이미 풍족한 삶이 어떤 것인지 알아 버렸다. 환경보호같은 거대한 주제는 뜨뜻미지근하게 다가올 법한데 저자에게 이 문제는 실험을 시작하게 된 주요한 동기이다. 그리고, 저자의 또다른 문제의식은 돈이 우리를 갈라놓고, 불평등과 인간에 대한 경멸을 부추긴다는 것이다. 우리는 돈 때문에 하기 싫은 일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누군가를 즐겁게 하기 위해 일을 한다면? 저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유대이며 행복은 거기에서 나온다. 이런 저런 책에서 읽을 수 있는 “순수증여”를 저자 역시 강조한다. “우주가 돕는다”는 말을 하고 싶진 않지만 삶이 당신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할 것을 믿고, 누군가에게 증여를 한다면 반드시 보답이 돌아올 것이라고 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영적으로 성숙하고, 관계는 강화될 것이며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안전해질 것이다. 저자의 최종목표는 교환이 아닌 증여로 이루어진 자급공동체이다.

  재미있는 것이 최근에 읽은 여러 가지 책들에서 키워드가 “증여”와 “공동체”라는 것이다. (고미숙 씨의 “호모코뮤니타스”나 우치다 타츠루의 “절망의 시대를 건너는 법”) 다가오는 저성장의 시대에서 지성인들이 제시하는 생존전략이다. 저자는 돈 한 푼 안 쓰는 1년 동안 행복했을까? 여기에 대한 저자의 평가는 믿을 수 없다. 이미 자신의 선판단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돈없이 살고 싶지만, 저자의 생활은 감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증여를 하며 유대를 통해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세계, 지금 현재로는 오즈의 나라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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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시대 - 근대적 여성성과 사랑의 탄생 고미숙의 근대성 3부작 2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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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이후 우리 문화의 핵심 코드는 사랑(혹은 섹스)이다. 마치 사회 전체가 무슨 열병에나 걸린 듯이 사랑을 갈구하고, 또 갈구한다”(p.157) 『연애의 시대』에서 바라보는 현대는 연애의 전성시대이지만, 그 연애는 분열적이다. 연애는 한없이 지고지순한 불멸의 멜로 환타지를 향하고 있고, 공적인 담론에서 사라진 성은 포르노그라피를 질주하고 있다. 이 책의 문제의식은 이런 연애와 성의 분열이 우리에게 스트레스를 가중시키고, 삶을 이끌어가는 동력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분열적인 모습이 연애의 본질일까? 저자는 연애의 기원을 추적하는 계보학의 관점에서 연애의 본질을 조망한다. 바로 우리나라의 근대성이 형성되기 시작한 1894년에서 1910년까지의 계몽기가 그 대상이다. 저자는 이 기간 동안 사랑이 어떻게 “탈성화” 되었는지를 <변강쇠가>, <덴동어미화전가> 등의 텍스트와 계몽기 신문에 실렸던 텍스트를 통해 고찰한다.

연애와 성은 어떻게 나뉘었는가

저자는 먼저 우리에게 “하드코어포르노”처럼 느껴지는 <변강쇠가>를 소개한다. <변강쇠가>는 성에 관해 억압적으로 여겨지던 중세에 공적인 공간에서 이야기되었으나, 근대에 이르러 그 모습이 사라졌다. 이것은 전근대로 갈수록 성에 대해 억압적이었다는 상식을 깨는 반증 아닐까? 그리고, 네 번이나 개가를 한 덴동어미 이야기를 그린 <덴동어미화전가>는 연애와 성이 일상의 삶이었고, 정절과 순결의 이미지와 멀었던 당시의 모습을 묘사한다. “그녀를 움직이는 건 윤리나 이념이 아니라, 일상, 곧 생계의 논리다...... 서민들에게 있어 생계란 곧 식食과 색色을 의미하기 때문이다.”(p115)

그렇다면 계몽기의 어떤 변화가 성이란 담론을 공적인 공간에서 추방했을까? 저자는 “애국심과 신앙, 순결과 비극성 등의 표상이 연애에 덧씌워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계몽기에 서구는 우리가 따라야 할 전범이었으며 당시의 모든 시대적 관심은 민족의 계몽과 역량강화에 쏠려있었다. 이러한 관심은 성담론의 배치도 변화시켰는데, 서구처럼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해서는 서구와 다른 조혼, 축첩 등 기존의 관습은 폐지되어야 했다. 또한 민족의 계몽이라는 이상에 복무하는 연애 역시 숭고한 것이어야 했다. “우수한 인종을 생산하는 것, 인구가 번성해야 한다는 것-이 두 가지가 성의 목표로 설정된 것이다. 따라서 성은 국가의 철저한 통제와 관리 하에서 행해져야 한다.”(p85). “부부간의 열정조차 허용되지 않는 확고부동한 성적 규범화가 이루어지자, 성적 욕망은 쾌락의 수준을 넘어 악의 표상이 된다.” (p45)

여기에 계몽기에 유입된 기독교적인 육체와 정신의 이분법이 더해지면서 연애와 성의 이분법이 완성된다.“연애는 거룩해야 한다. 신과 민족에 대한 숭배를 대체한 것이므로”(p108). 이런 이분법은 주체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동반하는데 “신과 민족의 이름으로 ‘탈성화’하는 훈련을 고도화해야 하고, 다른 한편 포르노와 사창가를 통해 성욕을 ‘음험하게’ 배설하는 노하우를 터득해야”(p.96)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근대국가의 국민이 되기 위해 호명된 주체는 나라는 자의식에 갇힌 채 접속불능의 연애 무기력증에 빠져든다. “근대국민국가는 명분상 개별적이고 독립된 주체들 사이의 계약관계를 전제한다.....마치 사람마다 고유한 아이덴티티가 따로 존재하는 듯이 끊임없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유도한다” 결국 접속불능의 신체는 연애 무능력 상태에서 권태에 빠져든다. 이러한 이분법과 권태는 연애와 성을 삶의 원동력으로 작동할 수 없게 만든다. “성적 욕망이 조금도 삶 속으로 진입하지 않고 있다는 것, 즉 삶의 능동적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다는 것이다. ”(p154)

사물에 대한 감수성은 어떻게 변화하는가

고양이의 울음소리를 한국인과 미국인에게 물어보자. 한국인은 고양이가 “야옹야옹”, 미국인은 “음미냐옹,음미냐옹”하고 운다고 대답할 것이다. 같은 고양이 울음소리가 왜 두 사람에게 다르게 들리는 것일까? (고양이 종자가 달라서 그렇다거나 한국인과 미국인의 신체구조가 다르다는 주장은 일단 접어두자.) 하나의 공통분모가, 그것도 가장 신체적인 감각이 다르게 표현된다는 것. 어쩌면 이것은 우리의 원초적인 감각이나 사물에 대한 감성이 시공간의 차이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단편 아닐까?

『연애의 시대』가 연애의 의미와 표상이 시대적 흐름에 따라 다르게 감각되는 것을 고찰한 것처럼, 사물에 대한 감수성은 스스로 자명한 것도 아니고 절대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거시적인 흐름에 의해 형성되며, 어떤 시대적 필요에 의해 권장되기도 하고 배척되기도 한다. 『연애의 시대』에서 보여주는 현대 우리가 감각하는 연애와 성의 모습은 계몽기 시대의 민족, 계몽 같은 시대정신들의 자장 아래 형성된 것들이다. 민족의 계몽을 위하여 연애와 성은 통제되어야 했고, 민족과 국가에 봉사하는 연애는 신성한 것이어야 했다. 하지만, 이렇게 숭고한 연애에는 오히려 폭력적인 면이 있는 것 아닐까 . “근대 이전에는 연애라는 감정이 결코 ‘절대적’이지 않았다”라고『연애의 시대』는 말한다. 숭고화된 연애는 그 범주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의리나 우정 같은 관계들을 평가절하하고, 숭고함을 추구하도록 사람들에게 압력을 가한다. 무엇이 숭고하다는 것은 당연히 그걸 실천하기가 힘들다는 말이다. 그 어려움이 우리를 무기력하게 할 것인가, 고양시킬 것인가. 적어도 저자가 보기에 연애의 분열적인 숭고함은 우리의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 책에서는 거대한 시대의 흐름 아래의 개인들이 빠져 있다는 것이다. 한 명의 개인이 하나의 시대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이미 그 개인의 내부에 그 시대에 호응하는 요소가 이미 존재했기 때문 아닐까. 그런 개인과 시대와의 “교집합”이 있었기 때문에 개인들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호응” 했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인간의 마음속 깊숙이 스스로 연애가 숭고해지기를 원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책은 계몽기에 대한 상황판단을 전제로 한 후 논리전개가 이루어진다. 때문에 그런 전제들에 의문을 가진다면 이 책은 여러 가지 사유가 시작되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저자는 근대성 시리즈 3부작(『계몽의 시대』, 『연애의 시대』, 『위생의 시대』)의 일부로 이 책을 저술했다. 우리나라 근대성 형성의 기원에 관해 더 의문을 갖는 독자라면 다른 근대성 시리즈를 일독함으로써 이 책의 이해를 더할 수 있을 것 같다.

얻을 수 있는 하나의 자유

『연애의 시대』에서는 민족, 계몽 같은 하나의 시대정신이 그 시대의 전체적인 감성에 영향을 미치는 과정을 고찰한다. 이 방법은 지금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쓸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감수성이나 관념이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인식하게 한다. 지금 여기를 다시 되돌아보게 하고, 지금 여기를 바꾸기 위해 행동할 수 있는 빈틈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마치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빨간 약을 먹고 진실을 본 것처럼, 이런 계보학적인 관점은 연애를 포함하여 지금 여기를 당연히 여기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망치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예를 들면 우리가 선망하는 연예인의 아름다움조차 상대적인 것 아닐까? 먹을 것이 부족했던 선사시대의 비너스는 뚱뚱하기 때문에 오히려 아름답다고 하지 않는가. 지금의 이상화된 연애와 사랑이 우리를 옥죄는 족쇄로 작용한다면-아직 구체적인 방법은 모르겠지만- 그 족쇄를 부술 때 우리는 하나의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연애와 사랑이 오히려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덧붙여 우리 주변에 우리를 부자유스럽게 만드는 것들을 한 번 찾아보고 그것이 당연한 것인지 한 번 생각해 보자. 그런 식으로 우리의 자유를 조금씩 늘릴 수 있을 여지가 생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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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력 - 무엇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사이토 다카시 지음, 황선종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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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는 신성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역설은 사림들이 신성한 것을 재미없어 한다는 것이다. 이제 독서라는 단어는 고리타분한 곰팡내 나는 단어만 연상시킨다. 사이토 다카시가 <독서력>을 쓴 이유다.

 

이 책의 전반부는 독서의 역능을 서술하고 있고, 후반부에서 구체적인 독서법을 기술하고 있다. 이 독서라는 신성한 기도에 참가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하나의 나침반이 되리라 생각한다. 사이토 다카시에게 독서는 자아를 형성하게 하는 것이고, 커뮤니케이션을 원활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의 자아에게 독서라는 것은 하나의 경험이고(input) 저자와의 대화이다. 그레서, 일종의 소통이다. (이건 묵독은 고립이라고 보는 <낭송의 달인,호모큐라스>(고미숙,북드라망)과는 다른 관점이다.) 독서보다 몸으로 하는 경험이 중요하다는 주장에는 독서가 체험을 이끌어내기도 하고, 체험에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고 하면서 반론을 제기한다. 또한 독서라는 간접경험을 통해 체험을 상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독서를 통해 자신이 풍성해진다는 애긴데, 이를 위해서는 내면의 마찰을 일으키는 책을 읽으라고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저자가 시종일관 책을 사서 보라고 한다는 것이다.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받아서 읽고, 중요한 문장을 필사한 후 반납하는 나로서는 심히 거슬리는 대목이었다. 저자가 책을 강매(?)하는 이유는 첫째, 돈을 들여야 긴장감있게 책을 읽을 수 있고(다치바나 다카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 걸로 기억한다) 둘째 자신만의 책장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건 위험한 출발점이다. 책장을 만드는 순간부터 지옥의 제1관문이 시작될지 모른다. 오키자키 다케시의 <장서의 괴로움>을 보라. 책 무게 때문에 방바닥이 꺼지는 일은 유도 아니다. 도서관에 가서 총류코너를 찾아보라. 이 지옥의 천태만상을 접할 수 있을 것이다.

책장을 만들게 되면 나만의 지도가 완성되고, 책을 읽는 행위 자체를 떠올리기 쉬워진다. 책장을 바라보며 영감을 얻을 수도 있다. (강신주 선생님도 그래서 e-book을 읽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책을 사라는 이유는 저자의 독서법과도 관련이 있다. 저자는 독서는 스포츠라며 독서력을 높이는 단계를 기술하고 있는데(독서 역시 피아노 연습처럼 계속해야 좋은 연주를 하며 즐길 수 있다.) 듣기, 음독하기, 묵독하기, 삼색 볼펜을 사용하여 책에 밑줄긋기이다. 이런 독서법을 따르려면 당연히 책을 사야 한다. 저자에게 책은 소비재가 아니라 자신이 보낸 시간의 한 부분이다. 밑줄을 긋는 순간 그 책은 자신만의 것이 되어 버린다.(알라딘에 팔 수도 없다) 이렇게 하면 나중에 책의 내용을 떠올리기도 쉽고, 책에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긴장감 있는 독서를 할 수 있다.

저자는 출판문화진흥을 위해서라도 책을 사라고 하는데(아닌게 아니라 조금 전 출판업계가 고사 직전 이라는 신문기사를 보기는 했다) ... 이럴려면 자기만의 주거공간이 있는 사람에게나 가능하지 않을까. 2년마다 메뚜기로 이사를 해야 하는 사람에게 장서는 큰 부담이다. 만만한 서재가 있는 사람에게는 그 공간을 장서로 채울 수 있겠지만, 열악한 주거공간을 떠나고 싶은 사람에게 도서관은 구원의 장소다. 저자는 도서관에서 절판된 책을 구하고, “책의 지도를 그릴 수는 있지만, 자신은 대여해서 책을 읽지는 않는다고 한다. 나는 책을 대여해서 읽고, 중요한 문장은 필사하고 다시 반납하는데 책을 읽은 경험을 떠올리려면 필사한 문장을 보면 되고,(사이토 다카시도 책을 기억하고 싶으면 필사하라고 한다.) 반납할 책이기 때문에 긴장감있게 책을 읽을 수 밖에 없다. 단점은 문장을 필사하다 보면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것이다.

아마 이 점이 저자에게 가장 고깝게 여겨지지 않을까. 저자는 음독을 소개하며 예전에는 독서가 신체적 행위였고 수양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의 여건상 자신은 정신적 긴장을 수반하는 독서(묵독)”를 권한다고 하는데, 그 밑바탕에는 책은 정보에 가깝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이미 모래알만큼 많은 책이 깔려 있고, 책을 요약할 수 있다면 통독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더 많은 책을 읽기 위해서다. 문장을 일일이 필사하는 것보다 책에 밑줄을 긋는게 훨씬 빠른 독서일 것이다.

저자는 마지막에 독서는 커뮤니케이션의 기초라는 주장으로 책을 마무리한다. 여기서는 저자가 말하는 대화의 요령이 오히려 주목할만 하다. 요는 독서가 대화의 맥락을 더 잘 파악하게 한다는 것인데 일종의 테니스게임처럼 대화라는 과정을 묘사한다.

 

입덕은 신중해야 한다. <책장의 정석>(나루케 마코토,비전피엔피) 같은 책이 나올 정도로 책에 집착하는 책중독자들이 있다. <어느 책중독자의 고백>(톰 라비, 돌베개)에 나오는 것처럼 책은 이들에게 일용한 양식이고, 책중독은 은근한 자랑질이기도 하다.(장서의 괴로움, 오키자키 다케시,정은문고). 하지만, 다치바나 다카시처럼 고양이 빌딩을 사지 못할 바에야 책덕후에는 고난의 길이 있을 뿐이다. 멋모르고 이 요지경의 세계에 입덕했다간 일터에서 쫓겨나고(왜냐면 당신은 사무실 서류더미에 구멍을 내고 그 사이로 책을 읽을 테니까), 인간관계는 파탄에 이르고(왜냐면 당신 애인이 더 이상 서점에서 데이트하려 하지 않을 테니까) 집에서도 쫗겨날 것이다.(당신 집은 이제 처치불가능한 책들로 거주 자체가 불가능할 테니까) 하지만, 책이라는 술의 유혹도 만만찮은 것이어서 이 책을 읽고나면 어느 정도의 장서는 한번 만들어볼까 하는 생각도 든다. 오죽하면 피에르 바야르가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피에르 바야르,패러덕스) 같은 책을 썼을까. 나는 아직도 이 책이 피에르 바야르가 세상의 모든 책을 읽을 수 없다는 슬픔을 감추기 위한 일종의 기만술이라고 생각한다.

하루키의 소설 <도서관에서 있었던 기이한 이야기>에는 도서관 방문객을 납치해서 공부를 시킨 다음 그 사람의 뇌를 먹는 악당이 나온다. 공부를 한 다음의 사람의 뇌수는 쫄깃쫄깃한 응어리가 들어있어 맛있다나 뭐라나. 나 역시 책을 읽으며 머릿 속에서 음악이 들리는 것 같아하는 약간 뽕맞은 느낌이 든 적이 있다. 나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지만  동시에 나를 궤도에서 이탈시키는 세이렌의 노랫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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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송의 달인 호모 큐라스 낭송Q 시리즈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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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씨네21에 실린 게임평론에서 한 평론가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만약 청각,시각,촉각,후각,미각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자신은 시각을 선택하겠다는 것이다. 눈으로는 맛볼수도 있고, 들을수도 있고, 느낄 수도 있단다. 카프카는 폐렴에 걸려 맥주를 마실 수 없게 되자 술집에서 처음 보는 사람에게 맥주를 사주며 그 사람이 맥주를 들이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아마 지금 사람들이 먹방을 보는 심리와 유사하지 않을까 한다. 영화나 연극을 보고 공감하는 것도 무언가를 본다는 것이 상상력을 자극하여 대리체험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시각이 우리의 감각 중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인데 <호모 큐라스>에서 고미숙 선생님은 오히려 <청각의 복원>을 주장한다.

이 분의 공부에 관한 열정은 어디까지일까? 수유너머에서 시작해서 남산 감이당까지, <공부와 백수의 공동체>를 운영하고 <호모 쿵푸스>에서 공부의 중요성을 역설했던 저자는 <호모큐라스>에서 공부의 “새로운 사잇길”을 찾아낸 것 같다. 그 사잇길은 우리가 공부하고 하면 익히 떠올리는 “묵독”이 아니라 “낭독과 구술, 낭송”이다. 일반화하고 싶진 않지만, 우리가 예전보다 몸을 쓰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대체로 차로 이동하고, 티비와 컴퓨터를 의자에 앉아 시청하며 보내는 우리의 신체적 활동이다. 고미숙씨는 영화 <아바타>와 <인상여강>을 대비시키며 시각과 청각을 대비시킨다. 시각을 이미지, 환영으로 치환하며 시각보다는 청각이 우리의 신체성을 표상하며 신체성이 잠식되어 야생을 갈구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소리, 청각의 복원이라고 주장한다. 말할 때 우리는 현재시점에서 말하는 것이며 우리의 몸을 쓰는 것이다. 말을 할 때의 단순한 의미 뿐만 아니라 소리와 파동이 우리의 뼈에, 우리의 몸에 새겨진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최순실 시국에 이런 표현을 쓰고 싶진 않지만, 우주의 리듬을 만들어내는 원천도 소리와 파동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소리와 파동이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의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라는 것이다. 저자의 지적편력을 보면 동의보감과 사주명리학이 있는데 이 대목에서 이런 지적편력이 백그라운드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런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에게는 이 대목에서 설득력이 떨어질 것 같다. 하지만, 지금껏 상대적으로 우리가 외면한 소리, 청각, 말하기에 중요성을 상기한다는 것은 하나의 시사점이 될 것 같다.

이런 전제에서 저자는 이러한 소리와 파동의 철학을 낭독, 낭송이라는 공부의 방법과 연결시킨다. 저자가 보기에 묵독은 신체를 쓰지 않는 <뇌의 특권화>이며 고립이고, 체화되지 않은 정보일 뿐이다. 그리고, 체화되지 않은 정보는 삶에 활용할 수 없다. 묵독과 연결되는 암기는 뇌의 비대화를 가져오는 정보의 집적일 뿐이고, 텍스트를 고정화시켜 비판,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에 비해 낭송은 텍스트를 새로 생성하는 창조이며 청중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소통의 장이다. 그리고, 정보가 아닌 체화되는 지혜이다. 저자는 친구들끼리나 학교에서 낭독회를 가져보는 것이 소통의 장이 될 것이며, 수학,물리학에서 말로 읊조리고 표현하는 소리의 공부법이 또다른 알찬 공부방법이 될 것이라고 한다. 낭송 후 내용은 잃어버려도 상관없다. 소리와 파동은 몸에 새겨질 것이므로.(여기에서도 <동의보감>적인 시각이 끼어든다.)

이렇게 한 공부는 결국 삶을 변화시키는 <양생의 기술>로 쓰일 수 있을 것이다. (또다시 동의보감적 시각) 낭송이 가진 신체성이 몸을 자극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울증에는 열하일기, 불면증에는 목민심서가 좋을 것이라고 한다.) 저자는 마지막에 산책을 하면서 낭송을 하는 이미지를 제시한다. 마치 철학자의 산책처럼, 저자가 꿈꾸는 삶의 한 이미지일 것이다. 더 나아가 손으로 직접 필사하는 신체성을 더한 후 최종적인 지성의 산출을 도모한다. 저자는 이책을 시작으로 낭송시리즈 28권을 출간 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 책은 일종의 총설이다.

저자가 동의보감과 사주명리학에 관심을 가진 동기가 “왜 공부를 해도 삶이 바뀌지 않는가”라는 질문인 것으로 알고 있다. 낭송과 듣기는 결국 앎이 신체와 만나야 한다는 결론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여러 책을 읽는 다독가에게는 좀 뜨악한 애기일 수도 있다. 어떻게 모든 책을 낭송한담? 하고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택스트를 접하는 복원된 경로 중 하나라고 받이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약발이 좋다고 저자가 강조하니 속는 셈 치고라서도 한번 해보는 건 어떨까. 불면증과 우울증에 효과가 있다고 하니 말이다.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은 저자가 묵독의 폐해를 늘어놓는데 이걸 읽고 그나마 하던 묵독마저 팽개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지금은 금서가 아니라 책 자체를 금하는 세상이니 말이다. (강신주 선생님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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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홀로 부모를 떠안다 - 고령화와 비혼화가 만난 사회
야마무라 모토키 지음, 이소담 옮김 / 코난북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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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부모님께서 부쩍 나이가 드셨다. 아버지는 팔십, 어머니는 칠십이 넘으셨는데 아직 정정하시다. 아직 내가 <개호介頀>하는 상황은 아니지만 역시 이 책은 내게 남다르게 읽혔다. 물론 여러 가지 경우가 있겠지만, 대부분 부모님에게 애틋함을 가지고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개호 때문에 자식과 부모가 서로 날을 세우는 이 책의 일화들은 가슴이 아프다. 개호 때문에 결혼과 일상을 포기하고 자식들은 부모를 돌본다. 효자라는 주변의 시선이라도 있으면 도움이 될 텐데 오히려 부모에게 기생한다라는 시선을 개호자들은 느낀다고 한다. 책에 나오는 문장대로 즐거운 개호는 없다”.

개호자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정은 우울감이라고 한다. 기본적으로 개호는 부모와 자식간의 닫힌 세계이기 때문에 고립된 세계다. 저자는 개호자들이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이 이 고립감이라고 한다. 누군가와의 대화가 큰 도움이 된다고, 개호를 미리 준비하라고 충고한다. 결국 <관계부족>이 원인이라고 저자는 진단하는 것 같다. 저자는 독신자가 부모를 떠안은 개호 스타일을 주목하는데 독신개호자가 미혼으로 생애를 보내게 되고 또다시 고립된 노령자가 되는 악순환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본은 이런저런 보완책과 서비스가 있는 것 같다. 예전에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서평에서 그래도 일본은 한국에 비하면 천국이라는 취지의 글을 본적이 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면 비슷한 느낌이 든다. 부족하나마 여러 가지 개호보험과 의료지원서비스가 있기 때문이다. 갑자기 시작되고 갑자기 끝나는 개호, 결국 문제는 죽음으로 수렴된다. 개호 후에는 예외없이 후회가 남는다고 한다. 그래서,개호 중에는 이를 항상 염두에 두라고 한다.

누군가는 비웃겠지만 그래도 나이드신 부모님은 나를 짠하게 한다. 개호라는 상황은 러시안 룰렛처럼 사람을 덮친다고 저자는 환기시킨다. 어머니, 아버지 내가 기억하는 모습들은 전부 과거가 되어버리고 사라질 것이다. 그러면, 나는 이 책에 나오는 누군가처럼 같이 죽자고 부모님께 악을 쓸지도 모른다.

책을 읽는 내내 마음 한 쪽이 가라앉았다. 최근에 읽은 책들 중의 키워드가 <관계>였다. (절망의 시대를 건너는 법,돈의 달인 호모 코뮤니타스,유쾌한 혁명을 작당하는 공동체 가이드북...)예전에는 수명이 짧아 개호문제라는 게 그리 부각되지 않은 건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풍성한 가족이나 기타 친족관계가 서로를 의지하는 계기가 되질 않았을까. 1인가구가 대세인 요즘 우리 모두 마음 한 구석에는 누군가를 절실히 원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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