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서 얻은 것 중 하나는 커피 맛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 전까지 나는 정신의 예민함을 위해 될

수 있으면 정신을 자극하는 커피나 담배, 알콜 등은 피하려고 노력했었다. 게다가 그런 것에 중독된다는 것은 이 미로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또 하나의 연을 쌓는 것이고, 그것은 내가 지향하는 심플 라이프에 반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나는 될수록 커피를 멀리 했었다. 하지만, 여행 중에는 어쩔 수 없이 커피를 마셔야 했는데 그 곳에서는 커피가 너무 일상적이었기 때문이다. (바에서 물을 달라고 하면 앤 뭐니? 하는 뚱한 시선을 마주쳐야 했다)

결국 귀국 후에는 한동안 보카디요스와 커피콘레체의 조합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셔야 했다. 하지만, 내 안에서는 여전히 커피는 인간을 미혹시키는 해로운 물질이라는 관념이 있었기에 나는 내 행동을 결정하기 위해 커피에 관한 자료를 접하기로 결정했다.

커피와 연관되는 단어를 쭉 적어보자 각성, 원기회복, 향정신성물질, 강화물질, 수면장애, 경기력 향샹...” 커피의 유해성 논란은 카페인으로 압축된다. 커피의 중추는 카페인이기 때문이다. “ 카페인 권하는 사회”(머리 카펜터,중앙북스)는 우리 주변 카페인의 여러 모습을 추적한 책이다. 저자가 포커스하는 카테고리는 커피보다 에너지음료, 탄산음료, 카페인제제,껌 등인데 커피는 카페인 섭취의 첨병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양반처럼 그려진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섭취하는 카페인 음료가 훨씬 많은 것이다. (콜라에 카페인이 들어있는지는 알고 있었는데 선키스트에도 카페인이 들어가는지는 처음 알았다.) 그럼 커피는 과연 유해한 것인가? 이 책에서 어떤 과학적 사실을 확정적으로 주장하지는 않는다. 아마 “10년 전에 암을 유발하는 것이 지금은 암을 치료하는 것으로 바뀐다든가 그 반대의 결과가 나오는 경우를 우리는 너무 자주 듣기 때문”(“커피, 만인을 위한 철학”(스콧.F파커,따비) 일 것이다. 하지만, 두 책에서 은근히 확신하는 과학적 팩트는 커피음용이 안정적이고 규칙적인 형태의 약물 자가 투여 행동”(카페 인권하는 사회)이라는 것이다. “커피는 약물인가? 그렇다.”(커피,만인을 위한 철학)

동시에 두 책 다 모든 문화권에서 고유의 카페인 음용이 있었으며 어떤 문화권에서도 이를 약물남용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마약과 카페인의 차이점은 뭘까? 카페인은 4~5시간 후에 분해되며 체내에서 배출되고, 마약 같은 반사회적 행동을 일으키지 않는 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경기력향상을 위해 선수들은 카페인을 복용한다. 그럼 경기 전의 커피한잔은 도핑인가? “커피, 만인을 위한 철학에 따르면 답은 그렇다이다. 그럼 이 두 책의 저자들은 커피를 마실까? 아주 행복하게 마신다고 한다. 커피가 진한, 지독하게 쓴 흙탕물인지 신을 믿는 사람들의 음료인지의 논쟁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고 약을 올리면서 말이다.

커피옹호론을 노골적으로 펼치는 책에는 커피가 죄가 되지 않는 101가지 이유”( 로잔느 산토스, 다르시 리마, 가갸날) 가 있다. 어디어디 박사라는 두 분이 쓴 책인데 일단 이런 책은 업계의 사주가 없는지부터 봐야한다. 색안경은 쓰지 않고 이 책을 읽을 때 드는 생각. 커피의 어느 성분이 그렇게 좋다면 왜 그걸 꼭 커피를 통해서 얻어야 할까?. 왜 에너지음료와 커피를 비교해서 커피옹호론을 펼칠까? (당연히 합성 카페인이 들어간 에너지음료보다 커피가 더 좋겠지) 어느부분에서는 에너지 음료보다 카페인이 적다고(카페인이 나쁘다는 소리다) 하면서도 어느 부분에서는 카페인의 어디가 좋다고 설명한다. (그럼 카페인 많은 에너지음료를 마시지) 옹호론을 펼칠 거면 두려움이나 죄책감은 확 날려버리도록 제대로 펼칠 것이지 이래저래 실망이다.

 

그럼 난 커피를 마셔도 되는 걸까? 의외로 나는 그 대답 비슷한 것을 커피와 담배”(짐 자무시) 라는 영화에서 찾았다. 흑백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배우들의 디테일한 연기 때문인지 지루하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11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영화인데 어찌 보면 허무개그 같고 어찌 보면 넌센스 같은 상황이 펼쳐진다. 물론 커피와 담배가 놓인 식탁 앞에서다. 사람들은 커피와 담배를 나누면서 진료를 두려워하는 상대방 대신 치과에 가기도 하고 만담 같은 대화를 주고받기도 한다. 재미있는 것은 사람들이 그 와중에 상대방에게 형식적으로라도 악의를 감추고 예의를 지키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애기를 나누면서 서로 움찔, 짜증을 주고 받으면서도 끝까지 악수를 나누고 포옹을 한다. 딱 한번 홍차가 등장하는데 그 때는 서로 얄짤없다. (“제가 너무 속보였나요?”,“” ) 솔직하다면 솔직하지만 어째 좀 야박하다는 느낌도 든다. 영화에서 커피와 담배는 그렇게 이미 삶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성질 나쁜 오래된 친구처럼 나쁜 걸 알지만 내치기에는 너무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끊을 수는 없지만 모르는데 굳이 알 필요 까지는 없는 친구. 영화에는 로베르토 베니니부터 빌 머레이,케이트 블란쳇 등등, 팔색조의 배우들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이기라고 하는데 알고 보니 이기 팝이었다!) 영화에서처럼

커피와 담배는 소품처럼 내 인생 주변에 존재하지 않을까. 난 거기에 관심을 주기도 하고 무시하기도 할 것이다. 다만 그걸 접할 때는 신을 믿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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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17-12-27 21: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스페인에 오셨었나보군요! ㅎㅎ 커피는 향이 더 좋죠. 전 심장이 두근거려서 자주는 못마시지만 스페인 커피 맛있습니다. 하지만 이탈리아 커피 맛보시면 그 때부턴 스페인 커피 눈에도 안차실듯.. 암튼 언급하신 영화에서처럼 이 사람들에게는 커피나 담배가 ‘필요’에 의한거라기 보단 그냥 일상, 기호, 소품에 더 가까운 것 같아요. ㅎㅎ
한국에서 그란데 혹은 밴티 사이즈로 커피 들이붓는 건 거의 약에 가까운 것 같구요.
 
무엇이 탁월한 삶인가
리처드 테일러 지음, 홍선영 옮김 / 마디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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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야마 겐지의 철학교수 버전 선동적인 어투에 별로 재미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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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ᆢ 예수 시체를 과연 들개가 먹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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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지 않는 삶
알렉상드르 졸리앙 외 지음, 송태미 옮김 / 율리시즈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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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스님 , 정신과 의사가 마음과 관련한 여러가지 대화를 나눈다. 우리가 살면서 흔히 부딪히는 문제들, 흔하다보니 딱지가 앉아서 이제는 그냥 무심히 넘어가는 문제들에 관한 애기다.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얼까? 왜 우리는 타인의 시선에 연연할까? 분노나 좌절같은 부정적감정과 고통으로부터 어떻게 자신을 보호할 수 있을까? 하루하루의 실천을 어떻게 해야할까?

 

  세 명의 대화를 기록한 책이다보니 이야기의 물줄기가 물 위에 떨어트린 물감처럼 사방으로 퍼진다. 말 한마디 마다 화자의 내공이 들어있어 내용을 곱씹게 되고 , 요약하기가 쉽지않다. 나는 책을 읽다 마음에 드는 문장을 필사하곤 하는데 이렇게 많은 문장을 필사하기는 "딜라이라마의 행복론" 이후로 처음인 것 같다. 상처받지 않는 삶, 그런게 가능할까? 이 책을 읽고 나도 마음의 고통이 사라지는 "한방"같은 것은 없다. (있다면 오히려 경계할 일이다.) 철학자, 스님, 정신과의사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바라본 진실을 각자의 어조로 말할 뿐이다. 전체적인 느낌은 불교적인 세계관이 짙게 깔려있다. (마티유 리카르는 스님이고, 철학자 알렉상드르 졸리앙은 기독교 신자이면서도 한국에서 참선수행을 하고 있고, 정신과 의사인 크리스토프 앙드레는 명상을 심리치료 기법으로 사용한다) 

  모든 것은 변하니 집착을 내려놓고, 자기 자신안의 진실한 나를 찾으라는 것이다. 그러한 나를 찾을 때 타인의 시선에 좌우되지 않고, 외부의 조건에 흔들리지 않는 용골이 튼튼히 박힌 배와 같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진정한 행복은 타인에 대한 측은지심에 있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에고의 쾌락이 아닌 내면의 평화라고 애기한다. 철학자가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이야기하며 물꼬를 트면(장애인이라는 정체성에 관한 갈등은 가슴에 절절히 와 닿는다) 스님인 마티유 리카르는 불교이론으로, 정신과의사인 크리스토프 앙드레는 좀더 현실적인 심리치료를 이야기하는 식이다. 추상적인 단어들이 많고 , 명상, 기도, 영적 수행같은 어찌 보면 미적지근 한 내용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진부하다고 해서 전부 진실이 아닌 것은 아닐 것이다. 타인을 도울 때 우리는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을지 모른다. 새로 나온 테슬라의 전기차를 사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정말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복수가 아니라 용서일지도 모른다....

 

  결국 "상처받지 않는 삶"에 도달하는 비방같은 것은 없을 것이다. 저자들이 말하는 명상, 기도, 이타심 같은 매일매일의 실천이 있을 뿐이다. 철학자,스님, 정신과의사 모두 자신의 부족함을 털어놓는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책의 마지막 문장이다.

 

    "자유와 지혜, 깨달음에 한층 더 가까이 다가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독자에게 보내는 감사의 글 중)

 

   그래요, 스님, 철학자선생님, 의사선생님, 저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정말, 정말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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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으로부터의 해방 - 탈성장 사회로 가는 길
니코 페히 지음, 고정희 옮김 / 나무도시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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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말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계속 이렇게 살면 우리 모두 앞으로 X될거니까 미리 대비하자”는 것이다. 저자가 진단하는 문제는 두 가지다. “환경파괴”와 “부채”. 이 책에서는 이걸 기본 베이스로 깔고 논리를 전개하는데 결론은 우리 모두 소비를 줄이는 게 대안이다. 막시즘은 잉여가치를 놓고 벌이는 노동자와 자본가의 대립을 다뤘다. 하지만, 그 잉여가치 자체가 환경파괴를 통해 부당하게 얻어진 것이라면? “착취”의 정의가 본인의 수고와 전혀 비율이 맞지 않는 것들을 소유하고 소비하는 것이라면 자본가나 사업가들만이 착취자가 아니다. 소비라는 것 자체가 극히 효율적인 착취의 도구다. 더욱이 생태계의 파괴를 전제로 하여 얻어진 것이다. 책의 전반부에서 저자는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이 결국 환경의 착취로부터 나왔음을 주장한다. 기술향상, 분업으로 효율 증가 등을 이야기하지만, 이는 결국 더 많은 환경 에너지를 투입해서 만든 결과이다. 혹자는 녹색성장을 애기하지만 이것은 기만이다. 인프라 구성에 투입되는 자원부터, 신기술은 새로운 유해물질을 발생시킨다. 전세계가 부유한 소비자로 가득하다면, 누군가의 말처럼 지구가 몇 개 더 필요할 것이다. 저자가 내놓은 결론은 하나다. 책제목과 같은 “성장으로부터의 해방”. 생활방식의 변화만이 진정한 지속가능성을 보장할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와의 결별이기도 하다. 저자는 간단한 모델로 자본주의가 이윤을 내기위해서는 성장에의 압박에 직면할 수 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경제학 수업을 떠올리면 되는데 간단하게 소개 되어 있으니 너무 부담 갖지 말자. 내가 중학교 때 미술선생은 수업시간에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갔다온 애기를 들려줬다. 단체 신혼여행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가는 커플이 있을까? 서울에 사는 나에게 이제 심리적으로는 부산보다 제주도가 가깝게 느껴진다. 저가항공을 이용해 한 시간이면 제주도에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항공여행에 대해 비난을 늘어놓는다. 저가항공은 국가의 보조가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지금껏 평생동안 딱 한번 비행기를 이용했다고 한다.)

저자가 내세우는 대안은 “절제”와 “자급”으로 요약된다. 언뜻 생각하면 궁색해지자는 애기 같은데, 저자는 이 대목에서 일종의 윤리의식을 도입한다. 책임감 있게 소비하는 사람이 더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리고, 이 대목에서 브레이크가 걸리는 것도 사실이다. 요즘 사람들에게 이런 애기가 씨알이 먹힐까? “지들은 다 해먹고, 왜 우리는 안된다고 해?” 라는 반응이 나오지 않을까. 한번 익힌 소비습관을 줄인다는 것은 만만하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나나 너나 다들 근시안적 인간 아닌가. 내일 당장 지구가 멸망하는 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한 지금 살던대로 살아갈 것이다. 이미 돈으로 무엇을 사서 생활 구석구석을 채우는게 우리들의 삶이 되어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절제는 궁색함이 아닐까? 절제와 무기력의 차이는 무엇일까?

 

하지만, 여기서 잠깐, 만약 돈이 불행의 씨앗이라면? 저자가 말하는 행복은 “인간관계, 자신이 속한 사회에 대한 소속감,능력을 인정받는 것, 자기구현, 건강, 안전, 및 온전한 환경 등”에 기원한다. 저자가 내놓은 반전은 이러한 가능성을 찾기 위해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시간이라는 것. 현재의 분업시스템에서는 마르지 않는 원천인 돈이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선 자신에게 필요하지 않는 일을 하기 위해 각자의 능력과 시간을 분업시장에 내놓아야 한다. 현재의 부와 소비는 가장 중요한 “시간”이라는 자원을 좀먹는다. 돈은 썩지 않지만 우리는 늙는다! 그것도 금방!

그럼 자급하는 데에는 시간이 들지 않나? 저자는 시장의존적인 삶은 결국 무기력하고, 불안을 가중시키는 삶이며, 자급이 주는 성취감과 충만감이 있다고 한다. 소비는 결국 피상적인 것이며 삶을 소진시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정말로 행복해지려면 직장을 그만두고 자급의 기술을 익혀야 할까? 살아가면서 보통 우리를 괴롭히는 것 중의 하나가 돈인데 돈 없이 사는 것이 가능하다는 저자의 애기가 솔깃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몸에 좋은 유기농 음식이 맹맹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저자의 애기가 일반대중에게 얼마나 매력적으로 다가갈까. 어디까지가 “적정소비생활”인지도 불분명하다. “탄소산출법”같은 애기를 하지만 신뢰성은 마뜩찮다. 아침에 마시는 아메리카노 한잔을 사치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럼 무슨 재미로 살란 말인가”하고 반문할 것이다.

결국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자급의 삶을 살 수 밖에 없게 하는 강제일 것이다. 아마도 지금과 같은 경기불황이나 최악의 더위 같은 것 말이다. 그리고, 저자는 "우리가 스스로를 제어하지 않으면 언제가 운명적인 힘이 그 일을 대신할 것이며, 그 때는 부드럽게 처리되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어쨌거나 일과 관계에 치인 우리는 여전히 아메리카노 한잔으로 하루를 시작할 것이다. 우리는 근시안적 인간들 아닌가. 인간이 그 정도로 현명했다면 세상은 진작에 좋아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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