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를 보는 방법 - 박테리아의 행동부터 경제현상까지 복잡계를 지배하는 핵심 원리 10가지
존 밀러 지음, 정형채.최화정 옮김 / 에이도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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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계란 개념이 있다. 지금껏 과학은 대상을 세분화하고, 전문화하는데 초점을 맞추어왔다. 예를 들어 분자를 원자로 나누고, 물리학, 생물학 등으로 학문을 세분화한다. 저자는 “환원주의”라는 말로 이런 경향을 나타내는데, 이런 환원주의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설명하는데 적절하지 않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개구리를 이루는 각각의 생체기관을 분해해서 그 기능과 본질을 알 수는 있겠지만, 분해한 기관을 다시 연결한다고 해서 개구리가 숨을 쉬지는 않는 것이다. 문제는 각 부분이 주고받는 상호작용이다. 이런 상호작용의 개념까지 포함하여 유기적으로 활동하는 개체를 복잡계로 인식한다. 인간의 뇌나 생명체, 박테리아의 분자구조 같은 물리적 대상부터 시장이나 혁명같은 사회적 현상까지 포괄하는데 사실상 세계의 대부분은 이런 복잡계이며 <전체를 보는 방법>에서 주제로 삼는 것이다

책은 이런 복잡계의 여러 특성을 피드백, 이질성,소음, 네트워크 같은 키워드를 통해 설명한다. 각각의 키워드를 하나의 꼭지로 삼아 설명하는 식이다. 그리고, 이런 키워드 밑에 깔린 하나의 개념은 “상호작용”이라는 개념이다. 복잡계는 이런 상호작용이라는 요소가 가미되면서 각각의 부분이었을 때는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만들어 낸다. 하나의 피드백은 복잡계안에서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주식시장에서 하나의 컴퓨터 오류가 시장의 위기를 만들어 낼 수 있고(“피드백” 꼭지), 시스템의 이질성이 결과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이질성) 이러한 복잡계 안에서 해법을 찾기 위해서는 최선의 선택이 아니라 적절한 오류가 길을 제시하기도 한다.(소음). 복잡성이 넘쳐날 때는 단순한 요소들이 상호작용하며 복잡한 결정을 내리기도 하며(분자지능), 벌집의 예처럼 개체의 상호작용 속에서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슈퍼유기체가 생겨나기도 한다. (집단지성) 이 외에도 네트워크의 특징을 스케일링의 법칙이나 협력, 자기조직화 임계시스템 등의 단어로 설명한다. 서로 협력하는 과정에서 개체들은 더 많은 이득을 보기도 하고 하나의 복잡계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스케일링 법칙같은 법칙성을 보이기도 한다. “복잡계”라는 여러 가지 표정을 설명하는 책이다. 그런 표정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입문서나 방향을 제시하는 책이다.

P.S:과학책을 읽은 경험이 일천해서인지 책장이 빨리 넘어가지는 않는다. 분명 책의 구성은 꼭지별로 간단하게 구성되어 있는데 말이다. 책을 읽기 전에 가벼운 인내는 감수해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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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정상가족 - 자율적 개인과 열린 공동체를 그리며
김희경 지음 / 동아시아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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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왜 가족을 만들까? 사람들은 왜 아이를 낳을까?? 한 철학자가 “출산율을 높이려는 것은 축사에서 개체수 조절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개돼지가 맞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어떤 심리학자는 “자식을 낳는 것은 자신의 불멸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아이를 낳고 가족을 이루는 여러 가지 이유를 댈 수 있겠지만, 어찌됐든 그 바닥엔 이기적인 욕망이 있지 않을까. 그것이 숭고하고 당연하게 이야기되고 있지만 말이다.

 

  저자가 묘사하는 한국사회의 가족은 각자도생이 이루어지는 단위이다. 이처럼 각박한 한국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족은 대외적으로 남을 배척해야 하고, 대내적으로는 가부장적인 위계질서를 지켜야 한다. 이건 국가의 직무유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사회가 갖춰야할 안전망을 가족에게 떠넘긴 것이다. (사회복지에 대한 저자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이 책의 전반적인 내용에 동의하기 힘들 것이다.) 결국 가족은 살아남기 위해 총력전을 펼치게 되고, 이를 위해 내부적으로 구성원들의 개별성이 사라진 위계관계가 지배하게 된다. 저자는 이런 증상의 하나로 아동의 체벌문제를 든다. 단적으로 말해 체벌이란 아이를 하나의 인격체가 아닌, 소유물로 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본질적으로 관점이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잠시 다른 애기를 하자면, “학교는 왜 불행한가?” 라는 명제가 있다. 여기에 대한 답은 학교의 목적이 애초부터 학생의 행복이 아니라는 것이다. 학교의 목적은 사회를 위한 노동력의 생산, 삐딱하게 말하면 시스템을 지배하는 기득권을 위한 노동력의 생산이다. 같은 관점으로 사람들은 왜 부모가 되려고 할까라는 질문에서 그 답은 노후보장이거나 자신의 연장(延長)같은 도구적 의미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훈육이나 체벌은 아이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부모의 행복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저자의 관점으로 아이를 바라본다면 가정을 이루어야 할 다른 이유를 찾는 사람이 나올지 모른다. 저자는 곧이어 한국에서 “비정상가족”이 어떤 대접을 받는지 서술한다. 미혼모가 겪어야하는 사회적 차별, 해외입양, 인종차별 등 저출산을 걱정하지만, 정작 가족을 형성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이 요구되는 한국의 현실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대안은 이것이다. “자울적이고 평등한 개개인 사이에서만 사랑과 우정같은 인간적 교류가 이루어진다.” 국가가 할 일은 “서로 의존적이고 굴욕을 강요하는 권력관계를 해방”시키는 것이다. 자, 이 대목에서 허탈해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관점의 차이겠지만 “지금까지 차별이 없는 사회는 단 한순간도 존재하지 않았다”라는 사쿠라이 마코토 일본 재특회 회장의 말이 와 닿는 사람이라면(사쿠라이 마코토가 딱히 대단한 사람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저자의 기획이 오아시스의 신기루처럼 보일 것이다. 저자는 이 기획을 설득하기 위해 스웨덴의 예를 든다. 스웨덴의 가족정책과 체벌금지 법안 등을 예를 들며 현실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국가가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개인의 연대를 위해 노력하는 사회. 그런 사회분위기에서는 아동은 하나의 인격으로 대우받을 것이며 체벌은 사라질 것이다. 생존경쟁에서 해방된 가족 구성원들은 조금 더 상대에게 관심을 가지고 배려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가 인용한 것처럼 “한 사회가 아이를 다루는 방식보다 더 그 사회의 영혼을 정직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것은 없을 ” 것이기 때문이다. 교육이나 가족의 문제에 한국사회의 현실과 모순이 압축적으로 들어가 있을 것이다. 저자의 기획은 단순히 가족정책 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을 뒤엎는 기획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갑질”이라는 용어에 너무나 익숙하지 않은가. 그런 우리에게 저자가 내세우는 사회상은 사이다처럼 시원하다. 동시에 그런 관계를 경험하지 못한 우리들은 울타리 앞의 양떼처럼 머뭇거린다. 조그만 목소리로 “그게 정말로 가능해?” 하고 수군거리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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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으로서의 문학
조영일 지음 / 비(도서출판b)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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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설을 읽지 않는다, 라는 문장은 왠지 문학적인 느낌이 든다. 실제로 나는 소설을 읽지 않는다. 소설 내지는 문학이라고 하면 하루키의 10억 선인세설이나 신경숙의 표절논란 같은 이미지가 떠오르는데 이건 손흥민의 FA이적이나 정유미,공유 열애설 같은 의미로 내게 다가온다. 이런 게 문학의 위기일까? 

  <직업으로서의 문학>은 평론가 조영일이 쓴 문단에세이. 문예지, 도서정가제, 문학진흥법, 문단 내 성폭력 등의 이슈를 통해 현재 한국문단의 여러 가지 표정이 묘사되어 있다. 지금 한국문학은 위기인가? 저자는 근대문학에 기대감은 없다고 하면서도 현재 한국문학은 일본문학의 식민지라고 서술하며 위기감을 표현한다. 여기서 먼저 저자가 집중하는 것은 문학을 한다는 것과 생계를 한다는 것의 성찰이다. 예술은 배고픈 직업이라는 이미지가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지만, 대부분의 문학인은 전업으로서 생계를 유지하지 못한다. 때문에 이들이 예술에 집중할 수 있도록 문학진흥법이 도입되었다. 그럴듯한 전개인데 저자는 여기에 의문을 던진다. 박정희시대의 문예진흥법이 우리 문학에 도움을 주었나? 경제적인 지원이 이루어지면 한국문학이 살아날까? 오히려 회복해야 하는 것은 문학에 대한 신앙아닐까? 저자가 일별하는 문학사는 특이하다. 문학은 원래 직업이 아니었으며, 8,90년대 이문열, 황석영 등이 등장하면서 전업이 이루어졌다. 문학성=상품성의 등식이 이루어지며 베스트셀러가 예술성이 있다는 환상은 이 때 퍼진 것이다. 동시에 대학교육이 대중화되고, 대학에 국문과, 문창과가 늘어나면서 문학에 관한 출판시장과 교육시장이 분화되었다. 역설적으로 출판시장이 아닌 교육시장에서 문학을 전업으로 하는 문학인이 늘어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문학으로 먹고 산 적이 없었다고 저자는 애기한다. 그리고 교육제도를 통해 재생산된 이런 문학에 대한 환상은 결국 전업작가는 되기 힘든데, 신춘문예에 지원하는 문청들은 갈수록 늘어나게 만든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의 지원은 보나마나 신경숙 표절사태에서 드러났던 문학권력만 공고히 할 것이다. 교육시장과 출판시장의 분화는 비평이라는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교육시장에서 자신의 지분을 확보한 비평가는 문단 내에서 상대적으로 더 나은 입지를 확보하고 문학시장을 좌지우지하는 선생님노릇을 한다. 반면 출판시장에서 활동하는 비평가는 한국문학의 위기에 따라 조용히 사라진다.

저자는 문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문학인의 자존감과 독립성이며 이들에게 가난은 숙명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런 독립성을 훼손하는 한 정부의 지원은 도움이 되지 않으며 예전 청빈과 안빈낙도를 애기하는 선비정신 같은 것이 오히려 필요할 것이다. 저자는 근대 일본문학의 선구자들이 대부분 단명했는데 이런 태도가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암시한다.

 

  어찌 보면 저자가 애기하는 것은 초심으로 돌아가라라는 식의 고리타분한 애기인지도 모르겠다. 이 무신론의 시대에서 이런 태도는 종교적이기까지 하다. 이런 것을 감수할 생각이 없으면 아예 문학인이 되지 말라는 것일까? 좀 다른 애기인데 예전에 도서대여점이 늘어날 때 만화가들이 생계애기를 하며 이에 반발한 적이 있다. 한 만화가는 흙 파먹는 만화가를 그리며 예술은 배고픈 것이라는 말풍선을 달았다. “배고플 각오 없으면 소설 쓰지마라는 애기는 어째 폭력적으로 느껴진다. 직접 바둑 두는 것보다 옆에서 훈수하는 것이 편하지만, 바둑 두는 사람에게는 그게 얄밉게 보이는 것이다. 그럼 저자가 한국문학의 위기에 대하여 내놓는 대안이 있나? 저자가 건드리는 이슈 중에 도서정가제나 문예지 권력 같은 것이 있는데 이것을 건드리는 것이 저자는 대안일지도 모르겠다. 모르겠다,라고 한 것은 이 책이 전반적으로 소설을 읽지 않는 나에게 애매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게 저자의 태도 때문인지 내 견문이 짧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후자쪽이겠지 아마) 여러 지면에 발표한 글을 책으로 묶은 것이라 논지가 일정하지 않고 논리의 비약도 가끔 있는 것 같다.(물론 내가 무식한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저자가 논지를 전개하는 가장 근본적인 전제인 문학이란 무엇인가”,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없다. 저자는 맨 마지막 꼭지에서 톨스토이의 예술론을 소개하며 의문을 던지는 것으로 이 책을 마무리한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문청이거나 문단 관계자들일까? 아니면 아직 문학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일반 시민들일까? 예전에 프로 축구에서 승부조작이 일어났을 때 기사에서 요새 누가 축구 보냐, 이참에 K 리그 없애버려라라고 댓글을 본 적이 있다. 이 책을 읽고 내가 떠올린 건 이 댓글이었다. 그렇다. 한국문학은 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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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리 : 운명을 조율하다 - 심화편 명리 시리즈
강헌 지음 / 돌베개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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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읽어도 절대 사주 못봄(노력하면 볼 수 있을지 모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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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 흐름출판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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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책을 다 읽었다. 도서관에 반납하기 전에 뭐라도 쓰고 싶다. 왜냐하면 나에게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책에 실린 추천사와 내가 읽은 것 사이에 부조화가 느껴졌기 때문일까. 이 책을 이해할 수 없어서 간만에 알라딘에서 다른 사람의 서평을 읽어 봤다. 호평일색의 서문과 읽고 난 다음의 인지부조화가 나만의 경험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조금 안심했다.

 

   어찌보면 전형적인 이 스토리가 왜 사람들의 호평을 이끌어 내는 걸까. 네 능력탓이라면 할 말 없지만 난 이 책을 읽고 나서 왠지 모르게 모호한 안개 속에 있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기분의 정체를 아직 모르겠다. 이 글도 책을 읽고 나서 바로 작성하는 것이다. 보통은 종이에 초고를 쓴 다음에 퇴고를 하는데 말이다. 어쩌면 주인공의 정치적인 태도가 모호하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쉽게 말해서 남 탓하지 말고 노력하라는 애기인데 이미 대한민국에서 "노오력"은 이미 충분한 조롱을 받고 있지 않은가. 이 부분에서 공화당 느낌인 주인공은 예일대 진학 후에는 사회적 자본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아마도 이런 사회적 자본에서 힐빌리들이 소외되어 있다는 애기일 것이다. 이런 접근은 민주당적인 접근 아닌가?  이야기만 놓고 보면 우리가 익히 듣던 흑인 하류층(흑인을 폄하하는 의도 아니다. 이미 나에게 그런 이미지가 장착된게 나의 현실이다.) 애기 같은데 다른 점은 주인공이 백인이라는 것. 그런데, 이 이야기가 그토록 호평을 받았다는 것은  미국사회에서 이들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부족했었나하는 것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것 같다.(여기서 잠시 삐딱한 생각이 든다. 추천사를 쓴 빌게이츠가 왠지 잘난척하는 것 같다). 그리고, 왜 할보와 할모가 파탄난 결혼생활을 했는지, 그게 왜 자식에게 유전되었는지에 대한 이유도 불분명하다. 어느날 할보는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어머니는 마약을 하고 남자를 바꾸기 시작했다. 물론 러스트벨트가 배경으로 깔리지만 나에게는 여전히 이들의 행동의 이유가 와닿지 않는다.

 

 오히려 내게 인상적인 것은 예일대 로스쿨 커뮤니티에 대한 묘사였다. 제1세계 주류 사회를 살짝 엿본 2등 국민의 위화감이랄까. 아마 주인공이 느꼈을 그런 감정을 나도 느꼈다.(결국 중요한 것은 인맥이야 하는 보수적이고 전근대적인 느낌도 함께. 공부해서 서울대 가라고~ㅍㅎ) 하지만, 주인공에게도 나는 위화감을 느꼈다. 주인공은 학창시절 그렇게 분탕질을 치고, 4년이나 해병대로 이라크까지 갔다왔는데도 대학과 로스쿨을 졸업하고 주류사회에 안착했다. 분위기로 보아 주인공이 엄청 똑똑한 것 같지는 않는데 이건 미국사회가 그만큼 아직 열려있다는 애기 아닐까?  본인의 의지가 있다면 그래도 아직 길이 있는 것이다. 수능 하루에 원샷으로 인생의 대부분이 결정되는 우리와 비교하면 그런 점에서는 주인공이 오히려 여유가 있어 보인다. 그리고 계속 삐딱한 생각을 해 본다. 그가 지금 가진 주류적 가치에도 헛점이 있을 지도 모른다. 한 여자와 평생 바른생활 가정을 유지하는 것이 반드시 미덕이 아닐 수도 있다. 물론 아이에게는 지옥이겠지만 서로 쌍욕하며 싸워대는 커플이 되길 원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어쨌든 부럽다. 만족스러운 일터, 사랑스런 아내, 귀여운 반려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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