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문단인데 묘한 느낌이 드는 문장들. -독립은 강자의 특권이다. 강자가 독립이 필요해서(need) 가 아니라 권리로써(right) 독립을 인식할 때 그 강자는 강할 뿐만 아니라 무분별하기까지 하다. 묘한 문장. 강자는 그가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독립이 포기할 수 있는 권리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선택한다. 그는  독립을 포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을 선택하는 이유는 그가 단순한 강함을 넘어 무분별한 정도로 대담하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삶의 위험을 천배나 불리고 미궁 속으로 들어가 양심이라는 동굴 안에서 괴수에게 갈갈이 찢길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이해를 받지 못할 정도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몰락할 것이고  그는 사람들의 동정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강한 자의 특성을 말한 전반부 이후 음산한 문장이 이어진다. 독립은 소수의 특권이며 대담할 정도로 강한 자가 독립을 추구한다.-여기까지는 상투적인 레토릭 아닌가. 하지만, 그 이후의 음산한 문장은 우울한 느낌을 준다. 독립을 추구하는 자는 필연적으로 몰락하고 실패하게 된다는 뜻일까. 그는 인간의 이해를 받지 못할 것이고 그래서 인간의 동정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니체는 인간(human) 이란 단어를 대부분 부정적으로 쓰지 않나. 범인들의 이해를 벗어나고, 범인들의 관점에서 강자는 몰락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일까. 인간의 동정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마지막 문장. 그것은 인간의 동정을 받지 못한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강자는 인간의 동정심을 잃어버린다는 의미일까. 독립을 추구하는 자는 필연적으로 타자와 불화를 겪거나 범인들의 시야를 벗어나 홀로 죽어간다는 의미일까.

 

p.s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예전에 니체를 동화읽기 수준으로 일독한 적이 있다. 사람들이 지적하는 니체 철학의 문제 중 하나가 특유의 반민주성이다. 그리고, 폭력과 착취를 옹호하는 듯한 뉘앙스를 받게 되는데 자주 등장하는 단어 중 하나가 “동정”이다. 내 기억으론 공감조차 진화론적으로 해석한 대목이 있는 걸로 아는데 니체는 요즘 대세인 공감에 반대한다는 점에서 “반시대적 고찰”을 한다. 레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에 나오는 문둥병환자의 비유가 떠오른다. 그 동정이란 단어가 서서히 이 장부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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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이해받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쉽게 친한 척하는 사람들은 계속 오해하도록 내버려 두어라.

 

28 .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것중 가장 힘든 것은 문체의 속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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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혹은 인간성은 환멸을 불러 일으킨다. (여기서 엘리트주의의 냄새) 하지만, 인식본능은 결국 위대한 인식자를 인간을 연구하게 만들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처럼 흥미로운 것은 없으므로. 하지만, 위대한 인식자가 인간성을 연구할 때 환멸에 빠질 수 밖에 없는데, 그 때 도움이 되는 사람들이 냉소주의자이다. 그들은 분노없이 쿨하게 인간에게서 허영심, 기아, 성욕만을 찾으려고 하고, 찾기를 원한다. (이는 냉소주의자의 인식의지이다) 그들은 인간을 나쁘게(badly) 말하지 사악하게(wickedly)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니체는 이들의 말에 기를 귀울이라고 한다. 니체는 인간의 동물성이 진실의 일면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가장 주의할 자는 분노한 자들이다. 분노한 자는 거짓말을 많이 한다.

 

p.s 니체는 동물성에 대해 말한다.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인간은 먹고 싸고 죽는 존재라고. 그건 인간이 죽는 존재라는 것. 두 군데가 아니라 한군데 밖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 언젠가 죽으며 살아있는 동안은 결코 죽음을 체험할 수 없고, (체험한다는 것이 벌써 죽은게 아니다.) 죽음 이후를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유한성과 한계. 이 장을 읽으며 내가 느낀 것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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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진리를 위해 순교하지 말 것. 왜냐하면 그것은 아마도 진리가 아닐 것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어떤 철학자도 정당한 주장을 하지 못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당신이 엄숙하게 믿는 진리가 아니라 당신이 지키는 진실의 구석에 붙어 있는 작은 의문부호일 수 있다. 진리를 지키기 위해 벌이는 적과의 오랜 대치는 결국 자신을 복수심에 불타게 하고, 중립성을 잃어버리게 만든다. 여기서 니체는 지극히 자기충족적인 스피노자가 자산의 철학에 치졸한 분노를 심었다는 암시를 한다. (하긴 앉아있을 때나 서 있을 때나 저주받는 처지라면 그럴만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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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즐긴다는 것- 그것은 무분별해지고 경솔해지고 대담하게 비약하는 것이고 이유없는 자유에 고양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오류와 성급한 비약을 열망할 정도로 영리하다. 앎에의 의지는 무지에의 의지에 기반한 것이며 이것은 앎에의 의지보다 더 강력하며 더 세련된 것이다! 우리가 언어를 사용할 때 앎과 무지를 대립되는 것으로 사용하고(실은 이것은 일종의 그라데이션같은 차이이다)   앎이란 단어에서 육화된 도덕적 위선을 발견하더라도  가끔씩 최고의 학문이 우리를 단순하고 위조된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는 것에, 최고의 학문이 삶을 사랑하기 때문에 얼마나 오류를 사랑하는지에 대해 웃음을 터뜨릴 것이다. "진실"에 대한 강박. 예를 들면 "그녀가 나를 '진실로' 사랑할까? " " 진심으로 사람을 대해라" 등등 . 니체의 말을 들으면 왠지 긴장이 풀리는 기분이다. 니체는 무지에의 의지가 더 강력하고 세련된 것이라고 한다. 물론 이것도 앎의 의지가 있을 때에 -그게 더 세련되어 졌을 때- 가능 한 것이지만 . 니체가 동생에게 쓴 편지를 본 적이 있다. 그것은 아무리 비참한 것이라고 해도 자신은 허위보다는 진실을 원한다는 내용이었다. 비슷한 내용을 소로우의 월든에서도 본 적이 있다. 거기에는 어떤 비장하고 단순한 진심 같은 것이 있다. 하지만, 반대를 말하는 니체의 이 글에서 나는 어떤 편안함을 느낀다. 마치 창문을 열고 방안을 환기시킨 것처럼...굳은 근육을 마사지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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