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한 죽음을 맞으려면 의사를 멀리하라
나카무라 진이치 지음, 신유희 옮김 / 위즈덤스타일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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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한줄요약

던진 돌은 반드시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진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다안티에이징이니 뭐니 떠들어대지만 모두 이 한계내에서 부리는 의학의 잔재주일 뿐이다.이런 생명연장을 위해 과잉치료는 환자에게 고통만 줄 뿐이다. 삶의 유한성을 받아들이고 고통없는 죽음을 맞이하자.

 

결론: 죽는 방식을 살아있을 때 고민하자. 살아가는 방식이 죽는 방식을 결정한다. 우리 삶은 어제의 원인이 오늘의 결과로 이어지는 연속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감상: 항상 느끼는 거지만 몰라서 못하는게 아니다. 알지만 행하기 힘들거나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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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레드포드는 과연 미스캐스팅일까? 아닐까?,, 분명 젊었을 때의 로버트 레드포드를 기억하는 나에겐 모든 것을 잃은 노인이 최후까지 삶의 의지를 불태운다는 이 영화의 주제가 이 미남(이었던)배우에게 어울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근데 문제는... 그런 로버트 레드포드가 여전히 멋있게 보인다는 사실.. 영화에서 주인공은 갖은 위기를 겪으면서도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적어도 망연자실해 하지 않고 위기에 무기력하지 않다.,.. 게다가.. 할아버지인 그가 나보다 머리숱이 많다는 사실.... 그는 여전히 멋있다...

 

근데 나이든다는게 항상 무엇인가를 잃는다는 의미일까.. 하루키의 태엽감는 새에서 우시카와가 말한다. 늙는다는 결국엔 무엇인가를 계속 잃어가는 것이라고,,, 그러고보니 무엇을 버리고 잃어간다는 표현이 하루키 소설에는 계속 등장하는 것 같다. 청춘 3부작에서 무엇인가를 계속 버려야 하는 추락하는 비행기의 비유처럼...누구는 나이든다는 것이 와인처럼 숙성하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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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왜 외로움을 느끼는가
존 카치오포 외 지음, 이원기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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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과 사랑을 포괄하는 말,연대감... 좀 산만하긴해도 위기를 넘기면 읽을만 합니다. 결론은 이거죠 ˝같이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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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에 관한 책을 몇권 읽었습니다. 하나같이 어두운 갈색, 한번 발디디면 다시 발을 뺄 수 없는 바닥이 없는 늪을 연상시키더군요. 절망이라는 것은 사람을 위축시킵니다. 저는 그런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을 상상할 때 제 자신이 작아지는 것이 느껴집니다. 저는 아직 그런 가난을 겪어보지 못했고 그것은 저에게 낯설게 느껴집니다.혹여 그보다 못한 상황을 한 때 겪어보았다 하더라도 자발적 가난이란 것과 저의 의지와 관계없이 닥쳐오는 가난은 다른 것일 것입니다. 그건 마치 손을 들면 언제든지 빠질 수 있는 서바이벌 게임 같다고 할까요. 그들은 이를 앙다물고 두다리로 버티고 서서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조금씩 마모되어가며 무엇인가를 조금씩 잃어갑니다. 그들의 공통점이 한가지 있다면 그들이 저소득 노동에 종사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과연 가치있는 노동인지, 그런 가치는 누가 부여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일단 묻지 맙시다. 현재의 교육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어떤 가치를 생산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그런 교육을 받지 못했고, 그들의 생산하는 노동이 왜 그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지 알 수없지만 그들은 낮은 소득을 받고 반대로 자신이 가진 것 중 많은 것을 내어 놓고 힘들어 합니다. 그리고, 그런 순환은 반복됩니다. 누군가가 계속 생산라인의 바코드를 찍듯 한번 가난의 바코드가 찍히면 같은 일이 반복되며 대구를 이룹니다. 그런 순환속에서 그들이 원하는 것은 조금 더 풍족한 생활입니다.

조주은씨가 쓴 <현대가족이야기>를 보면 자동차공장 노동자 가족의 꿈은 자식에게 기름밥을 먹이지 않는 것입니다. 반면 중산층 화이트 칼라 가족을 다룬 <기획된 가족>의 사람들은 자식들이 좀 더 다양한 경험을 했으면 좋게다고 말합니다. 억대연봉을 받는 어머니는 자신은 공부하느라 많은 경험을 하지 못했다고 말하지요. <사당동 더하기 25>에서 사람들은 단칸방에서 칼잠을 잡니다. 반면 <우리는 다은 집에 산다>의 사람들은 대출을 받아 자신들이 원하는 집을 직접 짓습니다. 사당동의 주민들이 대출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대포폰과 대포차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물론 <기획된 가족>의 화이트칼라들과 성미산 마을의 중산층들에게 비난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들 역시 주어진 환경 속에서 한계에 부딪히고 사당동 사람들처럼 몸부림치며 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씁쓸하게 여기는 것은 계층에 따라 계층에 따라 원하는 것이 다르다는 사실, 원하는 집을 지으면서 살고 싶다는 욕망이 어떤 사람에게는 애초에 금지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다른 환경에 태어났더라면 그들 역시 다른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좀 더 나은 삶이 자신의 것인지 모르고, 그런 욕망을 상상하지도 않습니다. 아니 스스로 하지 않는 게 아니라 하지 못하도록 외부의 강제를 받는 것일 것입니다. 왜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금지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에게는 둘 사이의 차이가 느껴지지 않기 떄문입니다. 좀 지루하게 말하자면 저는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같다고 느껴집니다. 물론 잘났냐”, “못났냐하는 표현은 알고 있습니다. 어째서 잘난인간은 그런 꿈을 꾸고, “못난인간은 그런 꿈을 꿀 수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그 잘남이라는 것을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일브로너는 <자본주의,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책에서 자본주의 경제사를 간략하게 요약했습니다. 제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자본주의가 최초로 스타트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축적이 일어나서 어떤 임계치를 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어떤 임계치를 넘어섰을 때 자본주의는 무한질주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 때 자본주의는 인간과 자연을 연료로 삼아 끝없이 앞으로 나아갑니다. 만약 그 질주를 멈춘다면 그것은 이제 자본주의가 아닐 것입니다. 누군가와 자연의 희생으로 자본주이는 점점 여분의 것을 만들어내고, 그 여분 중 대부분을 소수의 누군가에게 주어버리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예전보다 많은 것을 가지게 됩니다.

, 그전까지 임계치에 달하는 자본을 축적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대개 사회적인 약자입니다) 극심한 고통을 겪으며 자본의 축적을 위해 희생됩니다. 이 과정이 서구의 경우에는 장시간에 걸쳐 이루어졌지만, 새로이 자본주의가 유입된 곳에서 이러한 시스템의 재구축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독재입니다. 독재와 독재자. 그들에 의해 기존의 시스템은 변형되고 그 와중에서 많은 고통이 생기며 그 고통은 그 사회의 약자들에게 전가됩니다. 어저면 그 때 사당동 사람들은 그 당시의 약자들이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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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팅숏이라는 게 있습니다. 영화에서 쓰이는 용어인데 아마도 갑자기 화면이 끝나는 숏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 단어를 처음 접한 건 미카엘 하케네의 <아무르>였습니다. 씨네21에 올드독이 영화평을 쓰면서 마지막 커팅숏이 너무 날카롭다는 뜻의 글을 썼었지요.저는 이 것 덕분에 이 용어를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르>에서 출연배우가 빈 방안에서 가만히 앉아 있는데 갑자기(cutting) 영화가 끝납니다. 제 느낌을 말하자면 굉장히 하드보일드 하다는 느낌입니다. 회한이나 여운,변명, 설명, 용납도 없이 그냥 끝나버리니까요. 어쩌면 그것은 완벽한 허무일지도 모릅니다. 허무가 제게 무섭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패자부활전도 없이 존재함이 영원히 사라진다는 것, 존재하는 것이 사라진다는 것은 저를 낙담시킵니다. 어쩌면 마룽마 켄지가 어릴 적 농사짓는 아버지를 보며 느꼈던 감정인지도 모릅니다. 바람구멍이 뚫린듯한, 허무. 커팅숏, 그것은 제게 최종적으로 허무라는 감정을 유발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매일매일이 커팅숏이 아닐까요 저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간다는 것 그것을 실제로 체험하게 되면서 저의 존재가 사라진다는 것을 좀 더 쉽게 상상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이 영원히 사라진다는 것, 마치 커팅 숏처럼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것

이런식으로 생각하다 보면 결국 매일매일이 커팅숏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칼 위를 걷는 기분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커팅숏을 매일매일 받아들여야 하겠지요 그리고, 그런 커팅숏이 최종적으로 불러오는 허무라는 감정을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힘들지만, 무의미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죠,. 하루키 소설의 문장이 떠오르는 군요, 이것도 <아무르> 못지 않는 커팅숏입니다.

 

낯의 빛이 밤의 어둠의 깊이를 알게 뭐냐” (무라카미 하루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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