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름다운 사랑이 굽이굽이 맺혔어라 - 사랑의 고시조 원문으로 읽기
임형선 지음 / 채륜 / 2018년 10월
평점 :
아름다운 사랑이 굽이굽이 맺혔어라
따뜻한 거실에서 LED 등 아래서 이 책을 읽지만 한적한 시골에서 바람소리, 새소리, 문풍지 우는 소리 들으며 호롱불 아래서 읽으면 더 운치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고시조집을 만났다. 바로 『아름다운 사랑이 굽이굽이 맺혔어라』라는 제목의 고시집으로 10월 말에 출간된 책이다. 책이 나오게 되기까지를 간단하게 적은 ‘책을 써내며’를 보고 깜짝 놀랐다. 30년을 기다려 빛을 보게 된 원고인데 원고지에 한 글자 한 글자 눌러 쓴 글자하며 꼼꼼하게 실로 묶어서 보관하게 온 정성이 참으로 대단하다. 200자 원고지 1,500여 장은 여간 해서는 쓰기도 힘들지만 이 원고를 쓰기 위해 기울인 정성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알겠다. 자료를 찾고 비교하고 해석해낸 일 만도 엄청난 일이다. 독자를 배려해 사랑을 노래한 고시조를 선택해 엮은 덕분에 훨씬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을 펴낸 임형선 작가는 1987년 『현대시조』로 등단해 『월간문학』과 <부산 MBC>에서 주최한 문학상에 당선되었다. 지은 책으로 소설 『소설 황진이』, 동화 『컴퓨터 귀신』, 『컴퓨터 유령』(전3권),이 있고 『시조의 이해』, 『이야기로 읽는 고시조』 동시집 『햇살 줍기』 이외에도 50여 권을 출간했고 함께 지은 시집도 『분이네 살구나무』를 비롯해 여러 권이 있다.
이 책의 구성은 1부, 평시조에서 유명씨와 무명씨로 나뉘고 2부 사설시조 엇시조에서 다시 유명씨와 무명씨에서 나뉜다. 마지막 부록 작가 소개와 작품 번호, 참고 자료 등을 실었다. 총 279수의 고시조는 고시조 원문만 소개했다면 읽기도 뜻을 헤아리기도 힘들었을 텐데 친절하게도 각 작품마다 원문, 해설, 어구풀이, 작품이 쓰인 배경까지도 소개하고 있어서 읽기에 무리가 없다.
앞에 소개한 유명씨의 몇몇 작품에는 기녀들이 등장하는데 옛날 기녀들은 詩, 書, 畵, 춤, 악기에까지 모두 능하다 보니 만능인이다. 요즘처럼 드러내놓는 표현보다 살짝 감추듯이 돌려 표현하는 재미있는 작품도 있지만 요즘처럼 적극적인 표현을 한 시조도 있어서 사랑은 시대를 초월해 상대의 마음을 얻기 위해 또는 자신의 현재 감정상태를 표현하는데 많은 노력을 해야 하는 건가 보다.
희기 눈갓트니 西施에 後身인가
곱기 ㅅ곳갓트니 太眞의 넉시런가
至今에 雪膚花容은 너를 본가 ᄒᆞ노라
<안민영> • 금옥총부 53
희고 흰 살결은 눈과 같으니 서시의 후신인가
곱고 곱기는 꽃 같으니 양귀비의 넋이런가
지금의 그 눈처럼 흰 살결과 꽃처럼 고운 얼굴은, 마치 서시와 양귀비를 본 듯 하여라
미의 기준이 이 시조가 나온 시대와 다르겠지만 얼마나 미인이었는지 궁금하게 하는 시조다. 이 시조를 읊은 대상인 옥수선에 대한 시조만도 9수나 된다니 보통의 사이에서는 힘든 일이 아닌가 싶다.
思朗과 辭說과 둘이 밤새도록 힉ㅅ구든이
思朗이 힘이 물러 辭說의게 지닷말가
思朗이 辭說들여 닐으기를 나죵 보자
<무명씨> • 일석본 해동가요 275
사랑과 사설과 둘이서 밤새도록 서로 힐난하며 싸우더니
사랑이 힘이 없어 사설에게 졌단 말인가
사랑이 사설에게 이르기를 나 좀 보자
사랑싸움인가? 사랑과 잔소리는 세트는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심한 잔소리는 서로에게 독이 되기도 한다. 적당한 잔소리는 관심이기도 하니 귀담아 듣는 것이 서로의 관계를 더 발전시키는 지름길이다. 마지막 종장은 현대시에 적용해도 참 재밌겠다는 생각이다.
ᄇᆞ람도 부나마나 눈비도 오나개나
님 아니와 계시면 엇지려뇨 ᄒᆞ련마ᄂᆞᆫ
우리님 오오신 後니 부나 오나 내 알랴
<무명씨> • 고금가곡 192
바람도 불든지 말든지, 눈비도 오든지 개든지 나와는 상관이 없어라
임께서 아니 와 계시면 어찌할 것인가 걱정하겠지마는
우리 임께서 이미 오신 후이니, 바람이 불든지 눈비가 오든지 내 알바 아니다
재밌는 것은 유명씨의 작품은 대상이나 의미를 드러내는 부분도 있지만 간접적이고 소극적인 표현이 많은 반면에 무명씨의 작품은 솔직하고 직접적이고 대범한 표현이 많다. 시조가 나온 지 오래되어 작자 미상인 경우도 있겠지만 일부러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읊은 시조도 꽤 있을 것이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복면가면>이 있는데 이름이나 얼굴을 가리면 사람들은 훨씬 대담해진다는 게 진리인 듯하다.
바독이 검동이 靑揷沙里中에 죠 노랑 암ᄏᆞㅣ갓치 얄믜우랴
뫼온 님 오면 반겨 ᄂᆞㅣ닫고 고은님 오면 캉캉 지져 못 오게 ᄒᆞᆫ다
門밧긔 ᄀᆞㅣ장ᄉᆞ 가거든 찬찬 동혀 주이라
<김수장金壽長> •교주 해동가요 543
바둑이, 검둥이, 청삽사리 중에 저 노랑 암캐같이 얄미울까
미운 임 오면 반겨 내닫고, 고운 임 오면 캉캉 짖어 못 오게 한다
문밖에 개장사 가거든 칭칭 동여매어 주리라
나도 모르게 깔깔 웃고 만 작품이다. 개도 질투를 하는가? 아니면 짖궂은 개인가? 주인 입장에서 보면 얄미운 만도 하리라. “개 사요~ 개 삽니다!”하는 개장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뭐든 눈치껏 살아야 귀염도 받고 제명대로 사는 법인데 사람도 동물도 더러 눈치 없는 경우가 있기도 하다.
오ᄂᆞᆯ도 져무러지게 져믈면은 새리로다
새면 이님 가리로다 가면 못보려니 못보면 그리려니 그리면 病들려니 病곳 들면 못살리로다
病드러 못살줄 알면 자고간들 엇더리
오늘도 날이 저물었도다. 저물면 다시 날이 샐 것이로다
날이 새면 이 임 갈 것이로다. 가면 못 볼 것이니, 못 보면 그리워하려니, 그리워하면 병이 들려니, 병이 들면 살지 못하리로다
병이 들어 내가(작자) 못 살 것 같으면 나와 자고가면 어떻겠는가
<무명씨> • 진본 청구영언 506
그리워하는 마음은 처음엔 작았더라도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커진다. 그렇게 되면 함께 있고 싶어 하는 게 사람 마음이다. 사설시조에는 같은 사랑을 읊더라도 앞부분의 평시조보다 훨씬 자유분방하고 외설적이다. 현대시나 소설에서보다 더 노골적인 표현이 상투 틀고 뒷짐 지고 다니던 사람에게서 나왔다고 하니 놀랍기만 하다.
휴머니스트에서 나온 정민의 『한시미학산책』과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이장우, 우재호, 장세호가 옮기고 황견이 엮은 『고문진보』 두 권이 한시로 당시의 사고방식과 동양적인 정신을 배울 수 있다면 이 책 『아름다운 사랑이 굽이굽이 맺혔어라』은 우리 선조들의 일상에 좀 더 깊이 들어가 그들의 사랑을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어쩌면 그 사랑으로 인해 세상이 돌아가고 있지 않을까. 흔해 빠진 사랑이라 하지만 또 그 사랑이 없는 세상은 상상하기 힘들다.
겨울이다 보니 한파가 오락가락하고 있다. 지금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또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선조들의 사랑 한 소절 빌려와 들려줘 보자. 참사랑은 거짓말을 안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