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뻥 뚫어 주고 싶다 ㅣ 시 읽는 어린이 121
조기호 지음, 윤지경 그림 / 청개구리 / 2020년 12월
평점 :
따뜻한 미소 같은 동시집
『뻥 뚫어 주고 싶다』/조기호/청개구리/2020
겨울은 항상 다른 계절에 비해 긴 느낌이었는데 올해는 유난히 봄이 빨리 시작되는 느낌이다. 벌써 화단에 매화며, 산수유, 목련이 폈다. 물론 이름 모르는 화초들도 쏙쏙 돋아나고 있다. 이런 걸 보면 단단하게 굳어있는 내 마음도 스르르 풀리는 것만 같다. 코로나19의 영향으로 답답한 마음까지 뻥 뚫어주면 좋겠다. 초봄에 만난 동시집은 마음을 뻥 뚫어 주는 것까지는 아니어도 살살 어루만져 준다. 위로의 동시집이다.
이 동시집은 전남 목포에서 태어나 1984년 광주일보 신춘문에에 동시 「박 영그는 마을」이, 199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영희의 관찰일기」가 각각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지은 책으로 동시화집 『숨은 그림 찾기』와 학교 동시집 『나비처럼 날아간다』, 『꽃처럼 향기롭게 바람처럼 훨훨』, 동시집 『‘반쪽’이라는 말』 등이 있다. 2015년 동시 「‘반쪽’이라는 말」로 ‘제5회 열린아동문학상’을 받았다. 현재 목포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동시를 지도하고 있다.
좁은 숲길을 걷다 말고/ 아이가 묻는다.//이게 뭐야?/ 그루터기지/ 그루터기가 뭐야?/ 나무의 발자국이지./ 발자국이 왜 둥그래?/ 눈물을 흘려서지./ 왜 눈물을 흘렸어?/ 많이 아파서지./ 왜 아팠어?/ 몸을 베여서지./ 왜 몸을 베였어?/ 발길 빼곡이 쌓인 조그만 숲길을 위해서지.// - 20~21쪽 「그루터기」 전문
도심에 사는 아이들은 좁은 숲길이 호기심 천국이다. 대부분 처음 마주하는 것들에 질문이 쏟아진다. 아이와 주고받는 대화에서 화자의 여린 감성이 느껴진다.
남의 흉,/ 덮는 거란다.// 산을 오르시던 아버지/ 돌멩이 주워 모아/ 풀섶에 버려진 개똥을 덮는다.// 엄마도 입을 가리며 한 덩이/ 나도 코를 움켜쥐고 한 덩이// 달그락 달그락/ 돌멩일 얹을 때마다/ 슬몃 꼬리를 감추는 개똥// 우와,/ 조그맣고 예쁜 돌탑이 되었다.//
-26쪽 「개똥도 돌탑이 되는구나」 전문
아름다운 동시를 읽을 때는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이 동시도 그렇다. 자신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뒤에 오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이기도 한 행동, 개똥을 보이지 않게 작은 돌멩이로 덮어 돌탑을 만들었다. 산을 오를 때 자주 본 돌탑도 처음엔 개똥 때문에 쌓아올린 걸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든다. 돌탑을 쌓는 일도 좋지만 반려견을 데리고 나온 사람은 개똥을 꼭 수습하고 가는 책임 있는 견주 있으면 좋겠다.
한번/ 목소리 들려주고 싶다.// 문 슬그머니 열어놓고/ 콜록 콜록/ 기침을 막 하고// 배를 움켜쥐고/ 하이고, 하이고!/ 방바닥을 뒹굴기도 하고// -엄마, 집 앞 만둣집 새로 생겼대?/ -엄마, 천 원 열 개나 준대?/ 통/ 들은 척도 않는 그 마음/ 뻥 뚫어 주고 싶다.//
- 34~35쪽 「뻥 뚫어 주고 싶다」 전문
원하는 게 있을 때 아무리 이야기해도 못 들은 척 하는 엄마를 볼 때 얼마나 답답할까? 아이의 마음을 겪었기도 하고 나 자신이 엄마의 입장에서 행동한 적도 많은 것 같아 공감이 간다.
나를 가장 사랑한다는 엄마/ 무엇이든 가장 잘 해야 한 대요// 나를 제일 사랑한다는 아빠/ 어디서든 제일 앞장서야 한 대요// 엄마, 아빠/ 날마다 힘내라고/ 등을 두드려 주시지만// ‘가장’이라는 말/ ‘제일’이라는 말/ 내겐 돌덩이 같은걸요.
- 36쪽 「무거운 말」 전문
아이들이 제일 싫어하는 말이 무엇인지 부모들은 잘 모른다. 어쩌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자꾸만 아이들은 세뇌시키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가장’, ‘제일’, ‘일등’, ‘우등생’, ‘모범생’ 등은 부모가 원하는 틀에 아이를 자꾸 가두는 말인 듯 하다. 아이들을 무겁게 짓누르는 말인데. 무게를 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말인데.
싸악싸악/ 앞마당 쓸어 놓고/ 귀 슬그머니 열어 둬도 좋겠다// 우물가 은행잎 떨어지는 소리/ 멍석 위에 고추열매 익어 가는 소리/ 참새들 빨랫줄 넘나드는 소리/ 푸른 하늘 휘저어 가는 기러기 소리// 하나씩 하나씩/ 빗자루로 쓸어 모아/ 불을 지피면// 아,/ 밤하늘 별도/ 삥 둘러 내려앉겠다.// -76쪽 「가을밤은 따뜻하겠다」 전문
어릴 때 여름밤에는 마당에 멍석 펴놓고 밤하늘 별 보는 날이 많았지만 어른이 된 뒤에 밤하늘 보는 일이 한 해에 손꼽을 정도다. 도시에는 하늘을 올려다봐도 별이 보이지 않아서인지 굳이 밤하늘을 일부러 올려다보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 시골에 가면 쏟아져 내릴 듯 많은 별을 보면 황홀해지곤 했다. 시인의 시처럼 밤에 불 피워 놓고 별마중 하고 싶다. 밤새 별이 들려주는 이야기 듣고 싶다. 이처럼 이 동시집에는 도시에서 찌든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주고 위로의 말을 건넨다. 시인의 위로에 손을 내민다. 오늘, 아니 요즘 힘든 사람이라면 『뻥 뚫어 주고 싶다』를 권한다. 잔잔한 시어로 위로의 말을 건네는 동시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