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단점이 없는 사람은 장점도 거의 없다고 링컨이 말했다. 그러니 우리는 타인의 단점을 찾기보다는 자신의 장점을 찾는 것이 바람직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의 장점 하나를 찾아보았다. 단점 투성이인 나에게도 장점이 하나 있었다. 나의 장점이라면 지금까지 반찬투정을 해 본적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에이, 그게 무슨 장점입니까,라고 할지는 모르겠지만 장점이 꼭 슈퍼파워를 가져야만 하는 건 아니기에.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장점이 없기 때문에 이거 하나 정도를 장점이라고 우기고 싶다. 거의 없다는 말은 매운 것을 먹지 못하기에 매운 음식에 대해서는 투정을 한 두 번 정도 했었다. 그 때문에 매운 것에 적응을 하기 위해 요즘은 집에서 왕왕 땡초를 곁들여 먹고는 있다.


매운 걸 먹으면 나는 피부가 뒤집어진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매운 고추를 먹으면 그저 땀이 나고 마는데 화학적인 조미료를 사용해서 만든 매운 음식은 먹으면 피부가 뒤집어지는데 얼굴이 정말 볼품없이 지고 피부가 따끔거리는 것이 꽤 고통스럽다. 그래서 식당에서 파는 매운 음식에 좋은 고춧가루를 사용했는지, 아니면 캡사이신 같은 화학적으로 매운 조미료를 사용했는지 모르기 때문에 집 밖에서 매운 음식은 먹지 않는다.


오래전일이지만, 친구와 친구의 여자 친구가(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다) 그런 내가 싫었던지 매운 주꾸미 구이 집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그때 나의 여자 친구도 합세를 해서 세 명이서 나에게 매운 주꾸미를 먹이려 했다. 나를 제외한 세 명은 주꾸미를 맛있게 먹고 나는 그에 딸려 나오는 것으로 밥과 술을 마시면 되니까, 라는, 늘 매운 음식 앞에서 하는 말을 했는데 그날따라 그들 모두가 만약에 먹지 않으면,으로 시작해서 어떤 무엇을 못 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나는 먹지 않겠다고 했다. 매운 음식을 못 먹는다는 걸 다 알면서 왜 굳이 나에게 매운 음식을 먹으려 하느냐. 그저 세 사람이 재미있으려고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분위기가 점점 안 좋아졌다. 기분이 나쁜 건 여자 친구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옆의 사람이 난처해하는 모습을 꼭 봐야겠다는 그런 마음을 이미 먹은 탓인지 동참하는 꼴이 너무 안 좋았다.


주꾸미는 나올 때부터 벌겋게 된 채, 불판 위에서 구우며 타들어갈 때 매 쾌한 매운 냄새만 났다. 친구의 여자 친구는 매운 음식을 너무나 좋아하는 사람으로 세상에서 가장 매운 음식에 땡초를 같이 넣어서 먹는 사람이었다. 매운 주꾸미 구이를 상추에 올려서 땡초와 마늘을 넣어서 맛있게 먹었다. 그래, 그렇게 너희들끼리 맛있게 먹으면 될 텐데. 하지만 그들은 내가 먹지 않으면 안 되는 분위기로 이끌었다. 할 수 없이 매운 주꾸미를 먹었다.


그리고 피부가 벌겋게 달아오르더니 나의 얼굴을 뒤집어졌고 눈은 금세 붉게 물들었다. 매움 뒤에 따라오는 땀과 혀의 고통보다는 피부가 따끔거렸고 무엇보다 그런 일행들이 너무나 싫었다. 왜 꼭 이런 모습을 보고 싶어 할까. 왜 이런 모습을 봐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일까. 그래서 그 뒤로 나는 그들과는 자주 보지 않게 되었다. 사람들은 자그마한 나쁜 마음을 먹게 되면 꼭 옆에 있는 가장 친한 사람에게 그걸 확인하려고 하는 것 같다. 그런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 틈 속에 꼭 껴 있다. 그런 사람들이 이 세계를 호러블 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어떻든 밥상 위에 올라온 반찬이나 밥에 대해서 질다, 짜네, 다네, 같은 말은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반찬이나 밥을 내주는 사람이 너 오늘 한 번 죽어봐라, 라며 그렇게 만들어 내놓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다 실수로 양념이 많이 들어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너무 맛이 없어서 먹지 못하는 음식이면 다음부터는 먹지 않으면 된다. 밥투정이 없는 이면에는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좋아하는 음식이 확고해서 그 음식을 일정기간이 지나면 찾아서 먹거나, 또 그 음식을 판매하는 식당에 가는 행위가 나에게는 전혀 없다.


소문난 맛집이라고 해서 들어가서 먹어보면 눈이 번쩍 뜨일 만큼 맛있지도 않고, 돌아다니다 허기가 져 보이는 식당에 들어가서 먹는 음식은 또 대체로 맛있었다. 배가 고프면 뭐든 맛있으니 식당에서 돈을 지불하고 먹는 음식이면 맛은 좋았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줄을 서서 음식을 기다리는 건 정말이지 싫다.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 몇 년 서울에 일 년에 두 번 이상 올라간 적이 있었다. 돌아다니며 볼일을 보고 저녁이면 고가다리 밑에서 생선구이도 먹고, 인사동에서 막걸리도 마셨다. 인사동에서 자주 먹었던 게 인사동 노가리였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예전에는 자리가 꽉 차도 기다리지 않았다. 두 명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 합석을 시켜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당연하게도 한 테이블의 사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된다. 나는 경상도에서 올라왔기에 사투리가 심했고 술을 한 잔 두 잔, 노가리를 질겅질겅 씹어 먹다 보면 모두가 친밀하게 이야기를 주고받곤 했다. 서울은 전국에서 음식을 맛있게 하는 식당이 가장 많이 모인 곳이다. 물론 다 맛있지는 않겠지만 위에서 말한 곳은 대체로 기분 좋을 정도로 맛이 좋았다. 특히 여름이 다가오는 밤의 기운이 오소소 내려앉음과 함께 고가다리 밑에서 생선구이를 파먹으며 술을 한 잔 마시고 주위의 이야기를 듣는 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재미다. 이제 서울에 가면  주머니에 돈을 두둑하게 넣어서 '몽로'에 가서 맛있고 먹고 멋지게 술이 취해야지, 같은 생각을 했는데 그럴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좀 재미있는 것은 나는 '몽로'에는 한 번도 안 가봐놓고서 몇 년 전부터 인스타그램의 팔로워들에게는 '몽로'라는 주점이 생겼는데, 박찬일 요리사가 주점을 열었어, 그런데 김치도 가격을 받는데 아주 맛있나 봐, 그러니까 하루키가 주업이 소설이고 부업이 에세이지만 어떤 사람들이 에세이를 더 좋아하는 것처럼, 박찬일 요리사가 식당을 하면서 주점을 연 거지, 거기서는 비교적 식당보다는 저렴하게 박찬일의 요리를 먹을 수 있는데 아주 좋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서울에 있는 팔로워들은 오오 그래? 하면서 가서 먹어보고 리뷰를 올리곤 했었다. 그게 벌써 8, 9년 전의 이야기다. 지금은 '몽로'도 여러 분점이 생긴 걸로 아는데, 어떻든 코로나를 핑계로 이제는 가야지 하는 생각이 많이 반감이 되었다. 


군대에서도 맛이 좀 떨어지는 추어탕이 나오는 날이 있다. 군대 추어탕에는 간 미꾸리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고등어를 갈아서 만든다. 그렇다고 해서 맛이 이상하거나 추어탕에서 벗어나지 않는데 맛이 없다며 아이들은 대부분 먹지 않았다. 나는 그게 맛있어서 한 그릇 먹고는 또 한 그릇을 먹기도 했었다. 거짓말이 아니라 미꾸리의 추어탕보다 더 맛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 두 그릇이나 먹었지. 어어 저 녀석 오늘 두 그릇 먹겠네, 라며 고참들은 그런 말을 했고, 나는 보란 듯이 한 그릇을 기분 좋게 미우고 다시 돌아서 한 그릇을 받아와야 깔끔하게 해치웠다. 그날은 저녁이 오기까지 든든한 것이다. 


 요즘에는(언젠가부터) 한 번 먹게 되면 많이 먹는 경향이 있어서 먹는 시간을 한 시간 이상 늘여놓고 있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와 함께 식사를 하는 건 무리가 되었다. 예전에 거래처 사장님과 함께 국밥을 먹으러 갔는데 그 뜨거운 국밥을 15분 만에 다 먹어 버리는 것이다. 물론 국밥은 그렇게 먹는 게 맛있지만 나는 아직 3분의 1 정도 먹었을 뿐이었다. 맙소사. 거래처 사장님은 한 그릇을 다 먹고 난 후에, 왜 이렇게 잡내가 나는 거야,라고 했다. 이런 태도는 좋다고 생각한다. 무슨 말이냐 하면 먹으면서 비난이나 욕을 하기보다 다 먹고 난 후 한 마디 하고 난 후에 그 집의 음식이 맛이 없으면 다시는 안 오면 된다. 그렇게 생각한다. 집에서 밥을 차려주면 먹으면서 이렇네 저렇네 하는 건 아주 옳지 못한 태도다. 정말 맛이 없거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 먹고 난 후에 그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음식을 차려준 사람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아주 어린 시절에는 밥을 먹지 않아서 숟가락을 들고 다녀야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워낙에 밥을 먹지 않는 아이로 소문이 날 정도로 밥상 앞에 앉아 있는 것을 힘겨워했다고 한다.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린 시절의 사진을 보면 정말 말라서 뼈만 남아 있다. 밥뿐만이 아니라 과자나 다른 빵 같은 것에도 그렇게 달려들지 않았다. 아이스크림이나 문방구에서 파는, 그 좋다는 불량식품도 썩 마음을 잡아당기지 않았다. 그렇게 어른이 될 동안 죽 지내다 보니 무엇인가 먹는 것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 덜하다. 오늘은 뭘 먹지? 같은 선택에서 고민하지 않는다. 있으면 있는 것으로 먹고 없으면 팔을 뻗을 수 있는 안에서 해결을 한다. 우리나라는 아무리 가난해도 라면을 먹을 수 있으니 먹을 게 없을 때 라면을 먹으면 더없이 행복하다. 보통 배고플 때 사람들은 짜증을 많이 내는데 그런 점은 아직 없는 것 같다. 배고플 때 맛없는 것으로 배를 채우는 것만큼 화가 나는 일은 없다고 내가 아는 여자들은 말하는데, 위에도 말했지만 배고프면 아무거나 먹어도 맛있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나물 하나에 밥을 먹어도 꽤나 맛있고, 김치찌개를 대충 끓여서 먹는 것도 좋고, 고등어를 구워서 먹는 날이면 진수성찬이고, 컵라면에 만두를 빠트려서 먹어도 기분 좋다. 그리고 물김치만 있을 때는 거기에 밥을 말아서 먹어도 맛있고 좋다. 물김치에 밥을 말아 오물오물 먹으면 참 별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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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의미가 없다면 스윙은 없다’는 하루키의 음악 평론집에 가깝다. 하지만 다른 작가들의 음악평론처럼 어렵지 않다. 그저 늘 보는 하루키의 에세이의 분위기에 음악이 짙게 깔려 있다고 보면 된다. 


슈베르트부터 루빈스타인, 비치보이스에 이르기까지 팝과 클래식에 관한 하루키가 좋아하는 11명의 음악가와 그들의 음악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다. 6천여 장의 소장 앨범 중에 고작 이 정도만 소개하는 하루키는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래서 재즈 에세이 집은 따로 있다. 그건 나중에 또 다루기로 하자.


하루키 소설의 매력이라면 풍부한 음악이 다채롭게 나온다는 것이다. 요컨대 다자키 쓰쿠루의 이야기 속에는 리스트의 ‘순례의 해‘가 사정없이 나왔고, 해변의 카프카에서는 베토벤의 ‘대공 트리오’가 나오는데 까막 귀인 나는 어떤 버전의 음악가라도 대공 트리오는 정말 좋았다.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브라이언 윌슨’을 다루는 챕터다. 브라이언 윌슨은 비치 보이스의 리더다. 하루키는 초기에 비틀스보다 비치 보이스를 더 좋아했다. 그리고 비치 보이스의 음악에 대해서 많은 곳에서 말하곤 했다. 


브라이언 윌슨 하면 전 세계가 깜짝 놀라는 ‘팻 사운드’ 앨범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존 쿠삭과 폴 다노 주연으로 된 ‘러브 앤 머시’로 탄생되었다. 브라이언 윌슨은 환청과 정신병에 시달리며 해변과 여자를 노래하던 서핀 뮤직의 대가 ‘비치보이스‘에서 탈피하려고 노력을 무지하게 했다. 브라이언 윌슨이 팻 사운드 앨범을 만들게 된 계기가 비틀스의 ‘러버 소울’ 앨범을 만든 존 레넌 때문이었다. https://brunch.co.kr/@drillmasteer/1048 이곳에도 팻 사운드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존 레넌 역시 비치보이스의 브라이언 윌슨의 팻 사운드를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게 보이지 않는 음악적 영향을 주고 있었다. 


하루키는 이 ‘팻 사운드’에 대한 자신의 생각, 그리고 브라이언 윌슨이 느끼는 고독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음악이 어떤 식으로 나열되는지 그 형태를 하루키만의 작법으로 독자들에게 조근조근 말해준다. 


시작은 하루키가 맥주가 무한 제공되는 한 공연장에 브라이언 윌슨이 공연을 한다고 해서 기다린다. 그런데 야외 공연장인데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날은 덥고 시원한 맥주에 시원한 비까지, 이 나라의 이런 계절에 이런 비라면 얼마든지 맞을 수 있다. 무엇보다 브라이언 윌슨이 공연을 한다. 그것만으로도 만족이다. 


그러면서 하루키는 브라이언 윌슨이 팻 사운드에 대한 생각과 그 앨범을 만든 브라이언에 대해서 언급을 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팻 사운드 이전의 브라이언 윌슨이 모든 풍파를 겪는 것까지의 이야기를 하루키는 들려준다. 쓰러지고 쓰러지면서 노래를 만들고 노래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들려주려고 했던 브라이언 윌슨에 대해서. 그리하여 윌슨 형제들이 모두 죽고 난 후 약물에서 빠져나온 브라이언 윌슨이 공연장에 서서 '러브 앤 머시'를 부른다. 하루키는 브라이언 윌슨이 아직은 정상인에 가까운 모습이 아니지만 그 노래를 듣고 크게 감격하고 감동한다. 아직 그때는 영화 '러브 앤 머시'가 나오기 전인데 하루키는 이 노래 '러브 앤 머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글로 바꾼다.


[브라이언의 최근 곡인 '러브 앤 머시'를 듣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진다. 그는 늘 콘서트 마지막에 홀로 키보드 앞에 앉아 깊은 자비심을 담아 이 노래를 부른다. 아름다운 곡이다. 그는 이 곡을 노래하는 것으로 죽은 이들을 진혼하고 자신의 잃어버린 세월을 조용히 애도하는 듯이 보인다. 배신한 이들을 용서하고, 모든 운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분노나 폭력이나 파괴나 절망을, 모든 부정적인 생각을 열심히 어딘가로 밀어내려 하고 있다. 그 절실한 느낌이 우리 마음에 곧바로 전해진다. - 본문 내용 중]


다른 에세이만큼, 아니 다른 에세이보다 더 재미있는 음악 에세이, 하루키 음악평론집 ‘의미가 없다면 스윙은 없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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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전에 은행에 갔었다. 동네 은행이지만 일하는 직원원들이 7명, 6명? 정도 되는 것 같았다. 한 명 빼고는 다 여성이었고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1년 전 오늘은 한국의 모든 은행원들이 마스크를 쓰고 있지는 않았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지금의 은행의 모습은 몹시 기이하고 낯선 풍경이어야 하겠지만 마치 아침에 눈이 떠지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모습이 되었다. 그것은 아무래도 1년 동안 마스크 생활에 인간이 흡수되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흡수를 하는 것은 시간이고 우리는 시간 속에 흡수되는 동시에 적응이라는 모멘텀을 형성하게 되었다.

 

은행의 풍경 속에는 투명 칸막이가 생겨났고 마스크를 한 채 직원들은 고객을 응대했다. 초기에는 고객을 상대하는 직업군에서 손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이유로 마스크를 벗기도 했지만 1년이 지나는 동안 사람들은 마스크에 적응이 되었고 이제는 마스크를 벗거나, 쓰지 않으면 은행에는 발을 들일 수 없게 되었다. 마스크를 쓰고 하루 종일 고객을 응대한다는 것이 대단해 보였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감염병 일선에서 환자들과 선별 진료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위대한 것이다.

 

미세먼지가 많은 날입니다, 물을 많이 드시고... 같은 뉴스 앵커의 당부를 듣고 마스크를 마음껏 벗고 물을 마시는 행위를 할 수 없는 것이다. 은행에서 일하는 직원들도 마스크를 하루 종일 쓰고 있다가 점심밥을 먹을 때 잠깐 벗는 정도가 되었고 사람들은 불편하지만 불안하지 않는 방법을 선택했다. 1년이 흐르는 동안 우리는, 우리 주위에는 많은 것들이 변했고 앞으로 1년 그 이전의 일상으로는 다시는 돌아가지는 못 할 것이다. 감염병 시대에 빈익빈 부익부는 더 벌어져 저소득층 아이들은 1년이 넘게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것이 후에 분명하게 표가 날 것이다.

 

은행에 앉아서 볼일을 보고 있는데 문을 열고 한 아이와 엄마가 들어왔다. 아이는 남자아이로 5살? 4살? 정도 되어 보였다. 아이는 엄마의 손을 잡고 엄마에게 종알종알거리다가 은행 문을 열고 들어와서 은행의 로비에 들어오니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조용해졌다. 아이도 감염병 시대에 맞게 적응을 한 것이다. 마스크를 쓰면 나 좋을 대로 집에서처럼 마음대로 떠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 버렸다. 아이는 엄마가 볼일을 보는 동안 엄마 옆에서 한 손에 들린 아이언맨을 가지고 놀며 조용하게 엄마의 볼일을 기다렸다. 남자아이는 마스크를 썼지만 너무 귀엽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옆의 할머니 고객이 여느 때 같으면 고개를 돌려 아이를 보며 이런저런 관심을 보였을 텐데 그런 모습은 이제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행을 나와 아파트 단지를 지날 때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그네를 타고 있다. 엄마는 그네를 밀어주고 아이들은 신나는 듯 그네에 올라타서 재미있다고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가 마스크를 뚫고 놀이터를 휘감았다. 적막할 줄만 알았던 놀이터가 아이들의 소리로 인해 순간 봄날의 곰처럼 변했다. 


어린이들은 고아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어린이였으니까 의도를 가지고 좋아하기보다 그냥 보이는 그 자체를 좋아하지 않았을까. 특정한 장면이나 특정한 모습이나. 그러고 보면 어린이들은 대체로 좋아하는 이야기 속 주인공들이 대부분 고아다. 내가 어린이였을 때 좋아한 ‘프란다스의 개’의 네로도 고아다. 할아버지와 단 둘이 산다. 그 속에 역시 버려진 파트라슈가 들어온다. 라푼젤 역시 고아며 각종 공주들 역시 부모에게 버려지거나 부모가 없다. 김영하 소설가도 그랬지만 해리포터도 고아다. 엘사 역시 모두에게 버려져 홀로 지낸다. 헨젤과 그레텔도 계모와 친부에게 버려진다. 아이들은 이런 고아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건 고아가 좋아서라기 보다 고아가 되는 게 무섭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좋아하는 거라고 한다. 아이는 고아가 되지 않더라도 고아가 되는 시간이 있다. 아이의 하루는 어른의 하루 같지 않다. 고작 3, 4년 정도 살아왔기에 하루라는 시간은 몹시도, 아주, 너무 길다. 그 긴 시간에 엄마와 떨어져 낯선 곳에서 낯선 친구들과 낯선 선생님들과 몇 시간 동안 고아가 되어 지낸다. 그러다가 저녁에 엄마를 만나게 되면 그렇게 반기고 기분이 좋아 죽는다. 인생은 위험한 것 투성이다. 나를 미워하는 친구를 만날 수 있고 요즘처럼 때리는 선생님을 만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아이에서 어른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금이 가게 된다.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위험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 어쩌면 더 위험한 삶이 어른의 삶이다. 어른이 되면 낯선 사람과 사랑을 하게 된다. 대체로 낭만적으로 보이지만 위험하기도 하다. 마음이 맞아 매일 일하는 동안 이야기가 잘 통해 잠까지 자는 사이가 되었다. 하루는 모텔의 침대에서 그녀가 이렇게 묻는다. 나와 결혼하기 위해 이혼은 언제 할 거야? 세상은 위험천만한 곳이다. 


나는 아이들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싫어하지도 않는다. 아이들에게 내가 먼저 달려가지는 않지만 나에게 달려오는 아이들과는 곧잘 어울린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어울리게 되면 최선을 다해 같이 어울려 논다. 개인적으로 이유를 달자면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현실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비현실 같기 때문에 꼭 소설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을 마음껏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몇 시간 같이 있어주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할지도 모르지만 이미 어른들도 아이들의 시기를 거쳤다고 생각하면 길어진 시간 동안 아이들과 있어야만 한다면 조금이라도 힘든 것에서 벗어날지도 모른다.  


감염병 시대에 모두가 화가 나 있어서 성냥을 그으면 그대로 폭발할 것 같은 사람들이 많아졌다. 여기저기서 얼굴도 모르는 불특정 소수를 향해 독버섯을 뱉어버리는 사람들은 대체로 어른들이다. 그들은 자신보다 나약하고 힘없는 상대를 골라 폭력을 행사했다. 편의점에서 취식은 금지되었지만 안 된다는 아르바이트에게 먹던 라면을 집어던진다든가, 9시 이후에는 장사를 안 한다는 주인을 폭행한다든가, 모두가 자신보다, 자기들보다 힘없어 보이면 폭력을 행사한다. 물리적인 힘을 사용한다. 그리고 가장 나약한 아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아이들은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말이 무색하게 아이들을 폭행하는 어른들이 늘어났다. 


정인이를 죽인 혐의를 받고 있는 양모의 반성문을 보면 '짜증'이라는 말이 아주 많았다. 글을 쓸 때 김영하는 이 '짜증'이라는 단어를 될 수 있으면 남용하지 말라고 했다. '짜증'이라는 단어를 풀어헤치면 수많은 감정들이 있다. 화가 나고 울화가 치밀고 기분이 안 좋고, 등등. 그런데 우리는 이 많은 감정을 그저 '짜증'이라는 한 단어에 묶어서 사용해버리기 일쑤다. 정인이 양모의 반성문은 반성이라기보다는 반성 그 이외에 중점을 두고 있다. 아마도 법은 또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릴지도 모른다. 오늘은 날이 풀려 봄날이 되었다. 봄날이라고 착각할만한 날이다. 이렇게 겨울의 틈을 벌려 따뜻한 날 모두 행복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행복해도 괜찮지 않을까. 아이들은 전쟁 속 폐허에서도 늘 행복했는데 지금 아이들은 이 풍족한 세상에서 어른들 때문에 왜 행복하지 못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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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나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찾는다'라는 챕터를 읽어보면 하루키는 아주 사소한, 정말 조그마한 일에서 큰 기쁨을 누리고 있었고, 누리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래서 하루키의 독자들 내지는 하루키의 소설은 멀리하더라도 에세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소확행'을 실행하고 있고 느끼고 있다는 인증샷을 SNS를 통해 나누고 있다. 모두가 작은 일에서 행복을 찾는다면, 작은 일에서 행복하다면 인간의 삶은 지금보다 좀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하루키가 작은 일에서 행복을 느끼는데, 김수영 시인은 고기가 별로 없는 설렁탕에 화가 나고, 당당한 말을 하다가 잡혀간 소설가들을 위해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는 작은 일에 화가 나서  '나는 왜 자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를 썼다. 그리고 후에 소설가 박완서도 김수영 시인의 글을 읽고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라는 산문집을 냈다. 


나는 과연 작은 일에서 확실한 행복을 찾는가 물어보면 대답하기 애매한 것이 큰 일로 행복을 찾는 경우가 없었기에 행복을 느끼는 모든 것이 먹는 것, 입는 것, 자고 보는 것에서 느낄 수밖에 없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작은 일, 큰 일 나누는 일이 나의 인생에는 애당초 없었다는 것이다. 소확행이라는 말은 하루키로 인해 언젠가 우리의 삶 속에 뿌리 깊게 파고 들어왔다. 하루키가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느끼는 건 대작가로 일반인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하루키는 직장을 다니는 보편적인 일반인의 생활방식에서 벗어났다. 새벽 5시나 6시에 일어나서 하루키의 방식으로 하루를 보내고 밤 9시 정도에 잠이 든다. 이렇게 작가의 삶으로써 지켜가야 할 무엇인가를 위해 하루키는 '글'이라는 소통창구를 통해 '글로소득'을 얻고 그것으로 독자들과 만나왔다. 이렇게 우리와는 다른 하루키가 작은 일에서 큰 기쁨을 얻는 것은 우리가 작은 것에서 얻는 기쁨보다 확실하게 크다는 느낌이 든다. 


요컨대 티브이의 예능에서 연예인들이 작품을 하나 끝내고 일반 친구들과 만나 우리가 늘 하는 것들, 거리를 걷고 떡볶이를 리어카에서 서서 먹고,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을 마치 세상에서 처음 해보는 것 같은 기쁨으로 충만한 일들이라고 말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런 작은 일들은 분명 '소확행'이다. 그렇다면 영화가 흥행을 하고 100만을 넘어 900만으로 관객이 넘쳐나고 그리하여 여러 국제 영화제에 불려 다니면서 대배우의 길에 들어섰을 때 느끼는 행복함을 의미상 '대확행'이라고 한다면, 소확행보다는 대확행이 더 몰아치는 파도처럼 와 닿지 않을까. 그런 사람들, 일반인들과의 거리가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 '소확행'이라는 것이 우리가 느끼는 '소확행'보다는 크게 느껴질 것이다. 


왜냐하면 창작의 고통은 해보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가늠할 수 없는 것이고, 실패를 거듭하던 배우들이 시간이 많이 지나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을 때 예전의 어려웠던 시절, 다시는 돌아보기도 싫은 그때의 삶을 그리워하고 그때 먹던 것들을 먹으며 작은 행복감을 크게 느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팔을 뻗어서 안을 수 있는 것에서 느끼는 작은 것들에서 행복함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추울 때 조깅을 하고 들어가서 먹는 따끈한 된장국 한 그릇에 위로를 받고 행복하니까. 단지 크고 넘쳐나는 엄청난 일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기에 작은 것들에서 느끼는 모든 것이 불행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 


덜 불행하게 지내는 것. 인생은 끊임없이 거짓말을 갈구하기에 일정한 선, 그 밑으로 내려가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것. 자아의 확대보다 축소하는 것. 인간관계를 줄이는 것. 새로운 것보다 가진 것에서 만족하는 것. 읽었던 책을 계속 읽는 것. 아직 대출이 한 번도 없다는 것. 빚이 하나도 없다는 것. 이런 것들이 나를 대체로 지탱하고 있다는 것. 그리하여 행복하기보다 앞으로도 덜 불행하기를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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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표지


최근에 나온 무라카미 라디오의 전신 같은 책이다. 2001년도 책이니까 이 책도 나이가 스무 살이나 먹었다. 도서출판 ‘까지'는 현재 인문학 위주의 책만 출판하고 있는 모양이다. 최근에 출판사 까치의 창립자 대표의 안타까운 기사도 있었다. 도서출판 까치는 ‘까치글방’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까치에서 출판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무라카미 라디오’가 현재 묶음으로 되어 있는 무라카미 라디오 시리즈의 전신 격이다. 사람들이 하루키의 소설보다는 에세이를 좋아하게 만든 책이 이 에세이 집일지도 모른다. ‘슬픈 외국어’처럼 깊은 고찰이 있는 에세이가 아니라 하루키가 룰루랄라 하며 적어 놓은 일상적인 이야기가 가득하다. 

하루키가 여러 에세이에서 말하는 것을 한 줄로 요약을 하면 ‘인간이라는 실체는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그다지 달라지지 않는다, 무엇인가의 계기로, 자 오늘부터 달라지자!라고 결심을 해봤자, 그 무엇인가가 없어져 버리면 원래의 모습으로 엉거주춤 돌아가버리고 만다, 결심 따위는 어차피 인생의 에너지 낭비에 지나지 않는다'로 요약할 수 있겠다.

요컨대 사람들은 행복하기를 바라며 그 행복이라는 건 저축과도 같아서 필요할 때 주머니에서 꺼낼 수 있다고 착각한다. 계획이나 결심이니 하는 건 좋지만 행복은 그 당시, 그 시점에 다 써버려야 한다. 여기서 행복이 흥청망청을 말하는 것이 아니지만 이렇게 말을 하면 사람들은 행복을 소진하는 것을 ‘흥청망청’과 묶어 버린다. 인간이란 달라지지 않는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어떻든 무라카미 라디오는 다들 알겠지만 깊은 생각 따위 없이 읽을 수 있는 글들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독자들의 바람이 이루어져 이 무라카미 라디오가 실제 라디오 방송이 되었다. 그날은 역사적인 날로 하루키가 1일 디제이가 되어서 도쿄 FM 라디오에서 ‘런 앤 송’을 해버렸다. 하루키는 음악을 직접 선곡해서 틀었고 중간중간 음악에 대해서 짤막하게 언급을 했다. 독자들은 환호를 했고 1회 성으로 끝날 것 같았던 무라카미 라디오는 아직까지도 하루키가 직접 육성으로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하루키는 작년 2월 뉴요커지에서 ‘일큐팔사 4권의 주인공은 덴고의 16살 딸‘이라는 인터뷰를 했는데 직접 들어가서 읽어보시면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됩니다. 뭐? 일큐팔사 4권? 덴고의 딸? 정말 소설 '일큐팔사'를 좋아한다면 환호를 즐길만한 인터뷰가 실려있다. https://www.newyorker.com/culture/the-new-yorker-interview/the-underground-worlds-of-haruki-murakami


하루키가 '무라카미 라디오'라고 말하는 것이 이제는 어색하지 않은 지금 코로나 잘 이겨내고 있지요. 독자들은 언제나 당신의 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속표지



https://www.bilibili.com/video/BV1k7411r7vG/?spm_id_from=333.788.videocard.0

하루키의 육성으로 음악을 소개하는 무라카미 라디오를 들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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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책읽기 2021-01-15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관님은 하루키 덕후??

교관 2021-01-16 12:44   좋아요 1 | URL
ㅎㅎㅎ 저 다른 곳에서는 하루키 덕후로 활동하고 있어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