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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엄마가 시장에 갔다 올게, 몇 시까지 올 테니까 동생 잘 보고 있어.라고 하고 시장에 갔던 적이 있었다. 나도 초등학교 저 학년이었고 동생은 더 어렸다. 점심시간까지 온다던 엄마는 오지 않고 계속 시간이 흘렀다. 동생은 방에서 재미있게 인형을 들고 놀고 있었고 나는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걱정이라는 게 어디에서 오는 건지 딱히 잘 모를 걱정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말 안 들으면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느니, 엄마가 놔두고 시장 가서 안 돌아온다는 이야기를 어른들이 했다. 주로 그렇게 말을 하는 사람은 엄마나 아버지가 아니라 동네 아주머니들이었다. 한 번 밖에 놀러 가면 날이 저물어서야 들어오는 나에게 그런 말을 자주 했다. 그래서였던지 엄마가 벌써 와야 했지만 오지 않아서 나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동생은 오빠, 배고파.라고 계속 말했다. 엄마는 아직 오지 않고 배고픈 동생 때문에 하릴없이 기다릴 수만은 없어서 밥을 챙겨줘야겠지만 뭘 해 먹을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다. 반찬통을 보니 김이 있었고 간장종지에 양념 간장을 붓고, 밥솥에서 밥을 퍼서 김에 밥을 싸서 간장에 찍어서 동생을 먹였다. 마른 김이라 입천장에 달라붙는데 동생은 또 그게 재미있어서 까르르 거리며 맛있다고 했다. 동생이 마른김에 싼 밥을 맛있게 먹을수록 나의 불안은 점점 더 커져갔다. 도착해야 하는 시간이 훨씬 지나 한 시간이 넘어갔지만 엄마는 오지 않았다. 엄마는 말 안 듣는 내가 미워서 버리고 간 것일까. 다리 밑에서 주워 온 내가 아닌 진짜 아들을 찾으러 간 것일까. 그런 생각에 불안이 깊어지니 울고 싶어 졌다. 곧장 터져버릴 것 같았지만 동생이 옆에서 인형을 들고 김에 싼 밥을 다 먹고 또 달라고 했다. 눈물을 꾹 참고 마른 김에 밥을 말아서 간장에 찍어서 동생 밥상 앞에 몇 개를 놓았다. 동생은 하나를 집어 먹고 인형을 가지고 놀고, 또 하나를 집어 먹고 인형과 이야기를 했다.


그러다가 김이 목에 걸렸는지 동생이 기침을 했다. 콜록콜록. 나는 물을 떠서 동생을 먹였다. 마른 김에 밥을 먹을 때에는 늘 엄마가 된장국을 끓여줬는데 고작 김과 밥과 간장뿐인 밥상에서 동생이 맛있다고 먹고 있으니 불안을 누르고 서러움이 올라왔다. 아버지 회사에 전화를 해볼까, 엄마가 시장 가서 오지 않는다고 아버지에게 울면서 말하면 좀 나아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집을 둘러보니까 꼭 여기가 우리 집이 아니라 우리 집을 가장하고 있는 어떤 공연장 같은 세트처럼 느껴졌다. 잘못 와 있다. 우리가 있을 곳이 아니다. 우리가 있을 곳에는 고작 마른 김에 밥을 먹지는 않을 것이다. 오빠, 더 만들어줘.라는 동생의 소리에 눈물이 콱 터질 것 같았다.


그때 엄마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엄마는 배고팠구나, 라며 만두를 굽고 국을 만들어 동생을 먹였다. 제자리로 돌아왔다. 제자리라는 건 사람의 마음을 평온하게 한다. 그 자리가 비록 찌질하고 누추하고 마른 김에 밥 밖에 없을지라도. 사실 그 뒤로 마른 김이 밥상에 올라오면 잘 먹지 않았다. 조미김보다 맛도 없었다. 무엇보다 목을 콱 막히게 하거나 입천장에 달라붙는 기분이 동생을 챙겨 먹이기 전과 후로 나누어졌다. 그러다가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고 아버지와 동네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고 집으로 온 겨울의 어느 날 아버지가 마른 김에 밥을 싸서 간장에 찍어 나에게 먹였다. 씹고 있으면 아버지가 된장국을 한 숟가락 떠서 또 먹였다. 아아 참 맛있었다. 그 기억은 따뜻함으로 내내 남아있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흘러 영화 ‘괴물’에서 마지막 장면에 강두 역의 송강호가 죽은 현서 대신 아들로 들인 세주를 깨워서 밥을 먹일 때 김에 밥을 돌돌 말아서 먹는데 어릴 때 기억이 확 밀려왔다. 영화 속 그 장면의 계절도 겨울이었다. 매점 밖으로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일요일 아침에 늦잠을 자고 있으면 아버지가 깨우고, 눈을 비비며 일어나서 바로 먹던 마른 김, 뜨거운 밥, 간장, 된장국. 지금 이렇게 먹어도 그때의 맛은 날리 없어서 일부러 입천장에 마른 김을 붙여보고 한 번 웃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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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의 그 사람은 ‘나‘다. 화가 나지 않니? 화를 왜 안 내는 거냐? 같은 말을 지금까지 줄곧 들으며 지내왔는데 화가 안 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싶다. 단지 화를 내야 할 타이밍을 놓쳤거나, 화를 내고 나서 화를 내느라 쏟아부은 에너지가 커서 회복하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게 싫거나, 화를 내봐야 소용없을 것 같다고 생각이 들면 화를 내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보통 제삼자와 어떤 문제로 부딪혔을 때는 지금까지 그런대로 큰 문제없이 잘 넘어온 것 같다.


화가 나는 일이 있어서 화를 내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어른이 되고 나서 화가 나는 일은 주로 직장에서 일어난다. 맡겨놓은 일처리를 하지 못했거나, 상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결국 그대로 하루를 넘겨버렸거나, 계약 건이 날아갔거나, 하는 일에는 화가 나는 것이 당연하기에 직원들에게 화를 낸다. 그러면 화는 밑으로 밑으로, 부하직원에게로 내려간다.


개인적으로는 회사생활을 한 번도 하지 않았기에 이런 일에 화가 나는 일이 없어서 그런지 시간이 이만큼 지나가 버려서 주로 화가 나는 일은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의 마찰 때문인데 그때에도 나는 보통 화가 확 났을 때 그 화를 내야 하는 것이 마땅한 건지 잘 몰라서 그 타이밍을 넘기고 만다. 그러고 나면 애초의 전투적이었던 마음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그대로 넘어가버린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순전히 내 입장에서 하는 말이며, 내가 겪었던 이야기며, 어제의 일이다. 그래서 비교적 기억은 제대로라고 생각한다. 내가 일하는 건물에는 지하 주차장이 4층까지 있다. 지하 주차장 바닥의 공사 문제로 토요일 정오까지 폐쇄하니까 정오에 오픈을 한 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전에 오는 사람은 건물 앞이 강변이라 강변주차장을 이용하라고 했다. 강변의 공영주차장은 카드만 사용이 가능해서 카드가 없는 나는 느긋하게 출근하리라 마음을 먹고 정오가 넘어서 도착을 했다.


그런데 주차장은 아직 폐쇄되어 있고 입구에 정오까지 공사가 마무리가 되지 않아서 오후 2시, 즉 14시에 오픈을 한다는 것이다. 통보라든가 연락을 받지 못한 나는 주차장 입구에 공간이 있다. 공사가 끝나고 철문이 올라가면 바로 주차장에 들어가면 되니까 그 입구에 주차를 하고 나는 건물로 들어와서 일을 했다. 그리고 오후 2시가 되어서 연락이 와서 나는 차를 주차장에 넣었다. 여기까지가 어제 있었던 일이다.


그러고 난 후 2시간 정도 있다가 번영회 회장이 나에게 와서 폰에 찍힌 사진을 보여주며 나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그 입구에 차를 주차를 해 놓는 바람에 아직 바닥에 칠해 놓은 페인트가 덜 말라서 벗겨졌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왜 강변에 주차를 하지 않고 그 입구에 주차를 해놔서 이런 일을 만드냐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 때문에 주차감시를 제대로 하지 못한 관리인 아저씨만 회장 자신에게 혼났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 때문에 아무런 잘못도 없는 관리인 아저씨가 시말서(경위서)를 써야 할 판이라고 했다.


회장은 내가 잘못을 했으니 너의 잘못으로 인해 죄 없는 사람이 시말서를 쓰게 생겼고, 바닥의 페인트가 좀 벗겨진 것으로 인해 다시 폐쇄를 하게 되면 너(나를 말한다) 때문에 모두가 피해를 보는데 어떻게 할 거냐는 것이다. 하지만 회장의 말을 아무리 들어도 내가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정오까지라고 해서 정오까지 왔는데 아직 공사 중이다. 그리고 그 앞에 오후 2시까지 연장이 되었다고 써 놨는데 나는 그 소식을 듣지 못했다. 집에서 나오는 도중에 그렇게 바뀌었는데 그렇다면 나에게 연락을 해 주던지 해야지, 게다가 나는 강변주차장에 주차를 할 수 없다. 카드로만 계산이 가능한 무인 주차장에 카드가 없는 나는 들어가지 못한다. 회장이 나를 향해 나무랄 때 나는 이렇게 나의 입장을 이야기했다.


회장이 화가 나는 건 알겠지만 굳이 잘못을 따지자면 회장의 잘못이 가장 크다고 생각한다. 입점해있는 세입자들이 주차를 하기 전에 문자나 메시지로 연락을 주지 않았다는 점. 만약 입구에도 주차를 하지 못 한다면 관리인이게 그렇게 지시를 내리게 하고 관리인이 그 지침을 어겼다면 그건 회장과 관리인의 잘못이 맞지 나 때문에 시말서를 썼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여기서 내가 화가 나는 부분이다. 회장은 자꾸 나 때문에 관리인이 시말서를 쓰고, 나 때문에 다시 폐쇄를 하면 모든 사람에게 피해를 준다는 말을 했는데 그게 가스 라이팅이 아닌가. 너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 너 때문에 누군가가 이렇게 당하고 있다. 그러니 너에게 잘못이 있다. 이렇게 말을 하는 것에 화가 나는 것이다.


하지만 화를 내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회장에게 위에서 말한 내 입장을 말했을 때 회장도 앞으로 서로 조심하자며 갔다. 회장이 화를 내고 나도 같이 화를 내면 나는 회장에게 이기지 못한다. 나는 그동안 그런 회장의 모습을 자주 봐왔다. 회장은 경찰들과도 싸워서 이기는 그런 사람이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이 화를 낼 때는 들어주고 나의 입장을 말하면 된다. 하지만 마지막에 가스 라이팅처럼 너 때문에, 너 때문에 일이, 너 때문에 누군가가 이렇게 되었다는 말은 참 화가 난다. 멍청해서 폰을 들고 바로 녹음 버튼을 누르지도 못했다. 그런 일로 찾아오리라고는 몰랐기 때문이다. 또 모른다. 하루 이틀이 지나서 계속 화가 난 회장이 다시 찾아와서 뭐라 뭐라 할지도. 직장인이든 자영업이던 인간관계에 대해서 들어가면 참 복잡하고 짜증 나는 일들이 잔뜩 있다. 그게 인간의 삶이라면 할 수 없지만 그래서 인간의 삶이 힘든 것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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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바다가

계절의 옷을 입으면

차가운 바다에

차가운 달은

괴테의 시처럼

미광이 비치고

그러면

나는

너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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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을 이길 수는 없으나 라면보다 간단하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있다면 만둣국이다. 아파트 주위에는 중형마트가 하나씩 딸려 있고 그 안에는 대형마트만큼 다양한 식품을 판매한다. 거기서 일회용 곰탕과 만두를 구입해서 같이 넣어서 끓이면 된다. 끝이다.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파가 있다면 좀 썰어서 넣어주면 된다. 간단해서 맛이 별로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곰탕에도 만두에도 내 입맛에는 슴슴하나마 간이 되어 있어서 아무것도 넣지 않고 그대로 퍼 먹는다.


삶은 닭이 있다면 죽죽 찢어서 같이 넣어주거나, 떡국떡이 있다면 넣고 후추를 뿌리거나 땡초를 넣어서 먹을 뿐이다. 양념장을 넣어서 먹지 않는다. 그래도 맛이 꽤 나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차이가 있겠지만 내 입맛에는 이 정도의 간이 딱 좋다. 예전에는 설렁탕을 먹으러 가서 소금 간을 전혀 하지 않고 먹었다. 사람들은 무슨 맛으로 먹냐고 했지만 밍밍하지만 고소한 맛이 좋았다. 스프맛이 좋은 라면은 라면의 맛대로 좋은 맛이지만 그저 하얀 국물의 고소한 맛이 있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걸레 빤 물 같은 평양냉면에 빠진 사람들을 보면 될 것 같다.


이런 맛에 길들여진 건 자취할 때 이런 식으로 간단하게 자주 해 먹었는데 간이 들어가서 맛이 나면 아이들이 다 먹기 때문이다. 그래서 간이 될 만한 건 싹 없애고 오로지 슴슴하고 고소한 맛으로 국물을 낸 만둣국을 그대로 냠냠 먹고 있으면 아이들 중 반은 맛이 없다며 먹지 않았다. 지금은 인기가 1도 없어서 내 주위에 사람들이 없지만 대학교 때에는, 특히 복학을 하고 난 뒤에는 남자 후배 녀석들이 늘 따라다녔다. 자취할 때에는 방에서 혼자 편안하게 잠을 자본적이 없었다.


매일 찾아오거나 학교에서부터 자취방에까지 몇 놈은 꼭 따라왔다. 하지만 그러던 놈들도 몇 번 오다가는 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술이 취하면 나는 비린내가 잔뜩 나는 꽁치통조림을 그대로 뜯어서 안주로 하거나 그걸 밥에 비벼서 먹거나 했다. 나는 비린내가 나는 음식도 꽤나 좋아했기에 아침에 일어났을 때 그 비린내에 질식할 것만 같았던 녀석들은 눈을 뜨자마자 방을 나갔다. 그리고 밥을 먹으면 닝닝한 국물에 밥도 없이 만두를 몇 개 빠트려서 먹곤 했다. 그러면 아이들은 학교 식당에서 밥을 사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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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하루키가 알려지게 된 계기가 소설 ‘노르웨이 숲’인데 미국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노르지안드 우드’를 시발점으로 하여 많은 하루키의 소설이 미국으로 번역이 되어 들어갔다.


미국은 같은 책이 문고본과 양장본으로 나온다. 문고본으로 마구 들고 다니며 읽다가 어? 이 책은 완전 나의 스타일이야,라고 생각되면 두껍고 질 좋은 양장본으로 구입하여 소장을 하게 된다. 그래서 책에 대한 느낌? 의미? 같은 것들이 우리와는 좀 다를 수 있다.


격정적이고 피 같은 이 붉은색의 표지는 아마도 나오코를 의미하지 싶다. 나오코가 붉은 피 같은 존재라면 미도리는 이름처럼 대책 없는 녹음의 싱그러운 존재다. 그리하여 아마도 최근의 ‘노르웨이 숲’의 표지는 붉은색과 녹색의 보색이 책 표지를 채우고 있는 것 같다.


문고본의 영문판 ‘노르웨이 숲’의 책 표지는 마치 키즈키의 죽음 후 파도가 몰아치듯 스무 살이 되어 버린 와타나베와 나오코의 목적지도, 결말도 없이 걷는, 영혼 없이 어떤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주인공 와타나베는 나오코에 더 기대고 있다. 그리하여 나오코의 닿을 수 없는 붉은 우울에 빠져들어가는 것을 정화시키는 사람이 맑고 투명한 미도리다. 하자만 우울이란 밝음 속에 숨어 있는 우울이 더 단단하고 크고 위험하다.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살지 못한다. 미도리는 그런 투명함으로 몸을 채우고 있다.


사실 ‘노르웨이 숲’ 속 미도리는 현실감은 제로다. 소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인물이다. 그래서, 그리하여 더더욱 사랑스럽다. 붉은 피로 온통 세상이 덮이려 할 때 미도리 하나 만의 존재로도 와타나베는 살아갈만하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대책 없이 어른이 되고 보니 행복하게 잘 지내기보다 불행하지 않게 잘 견뎌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소설은 그 의미를 내게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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