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을 쫓아서 가고만 있다. 지금까지 이렇게 오기만 했는데 앞으로는 점점 자신이 없다. 아무도 듣지 않는 노래를 부르고 있는 기분이다. 일주일째 비가 오고 날이 흐리다. 날씨가 흐린 건 참겠는데 이러다가 마음이 메말라 비틀어져 버릴 것만 같다. 아무리 물을 마셔도 마음은 점점 메말라 가는 것 같다. 입구는 있지만 출구는 없는 방에 들어와 버린 기분이다. 그 방에 들어가면 나오는 게 어렵다. 그런 방에서 출구를 찾지 못해 불안해하다가 숨이 막혀 죽어 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다. 사람이 많은 곳에 가는 것도 싫고 사람이 없는 곳에 혼자 있는 것도 싫은 이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마음의 여자는 남자를 찾아간다.

좋아하는 것을 서른두 살까지 찾아 헤매는 여자와 잘 하는 것을 놓으려 하는 남자가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이 같아서 나란히 걸으려 하는 이야기. 하지만 같은 것을 잡으려는 사람과 놓으려는 사람은 사소한 것에서 균열이 간다.

그 균열의 발화는 남자의 옛 애인이자 여자의 친구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는 사실 어울릴 수 없다. 여자는 남자를 아주 싫어했기 때문에. 재수 없어서. 그러나 지금은 남자가 놓으려는 음악을 여자가 붙잡고 싶어 하기 때문에 같이 있다. 둘 사이에는 옛 애인이자 친구의 민경이의 부재가 형태를 띠고 있다.

두 사람은 만나면 한 번은 민경이의 부재가 몰고 온 존재를 확인한다. 두 주인공은 영화 속에서 노래를 부르는데 노래를 너무 잘 부른다. 이 영화의 또 다른 매력은 영화 속 주인공들이 부르는 노래를 듣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노래 가사를 들으며 영화를 보다 보면 영화에 드러나지 않는 어떤 이야기를 상상하게 된다. 두 사람은 바다를 보러 가는데 두 사람은 어떻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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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말이라 불리는 김영미. 뻐드렁니라 목도리로 늘 입을 가리고 다니는 김영미. 세기말이라 불리는 이유는 얼굴이 못생겼기 때문이다. 김영미는 돈이 필요해서 낮에는 공장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물건을 받아와서 미싱 박음질을 한다. 때는 1999년. 말 그대로 세기말이다.

김영미는 소주 중독자인 할머니와 같이 산다. 부스스하고 화장도 안 하고 꼬질꼬질 못난 김영미는 고장에서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그를 보기 위해 점심시간에 맞춰서 식당에 간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세기말을 싫어하기 한다. 그런 세기말을 이유영이 해낸다.

세기말, 1999년 12월 31일에 같이 살던 할머니가 돌아가신다. 썰렁한 빈소. 카메라는 김영미의 최대 약점인 입을 자주 클로즈업한다. 김영미는 오늘 세상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렇게 죽는다면 너무 억울할 것만 같다. 그러던 중 장례식장에 경찰이 김영미를 찾아온다. 횡령 방조죄에 해당한다며 잡아간다.

그 좋아하던 공장 직원 구 기사에게 속아서 그렇게 된 김영미. 결국 형을 살고 나오게 되는데 교도소 앞에 구도영(좋아하는 공장 기사)의 마누라가 찾아온다. 자동차를 몰고 와서 찾아와서 서울까지 태워준다고 하는데, 구도영의 아내는 사지마비 환자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그녀를 화장실에 데리고 가야 하는 김영미. 싸가지라고는 1도 없는 사지마비 구도영의 와이프는 이제 남편과 이혼하니까 너 가져라며 세기말 김영미의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렇게 해서 김영미는 구도영의 사지마비 아내와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 동거가 시작된다. 이유영의 불안하면서 눈치 보는 연기가 좋다. 예쁜데 못생기게 나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런데 이유영이 그걸 해내네.

김영미는 참 기묘한 존재다. 삐삐 같은 외모에 좋아하는데 안 좋아한다고 말하고. 상처를 안고 살아가지만 그 상처는 시간이 지나 다 나아서 흉터가 되었다. 그러나 흉터를 볼 때마다 상처는 꽃처럼 다시 피어나고 그렇게 삶은 질척질척 치정 거리는 맨드라미다.

요즘 한국 상업 영화는 재미가 없는데 독립영화는 아주 재미있어서 좋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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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탕을 먹은 지 십 년은 넘은 것 같다. 어제는 온도가 15도가 넘어서 반팔에 반바지를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학생들이 있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난 오늘은 느닷없이 차가운 비가 내리고 바람이 심하게 불더니 온도가 급격하게 떨어졌다. 비가 하루 종일 내리나 싶더니 며칠 동안 비가 그치지 않고 쏟아졌다. 두꺼운 패딩을 이미 넣어 버려서 봄옷을 입고 나왔다가 추위에 머리통이 얼어 버릴 것만 같았다.

봄을 알리는 계절에 덮치는 이런 추위가 한파 때 몰아치는 추위보다 더 혹독하고 생각한다. 한파 때는 온통 뉴스에서 춥다고 하니 각오를 하고 옷도 여러 겹 입으니까 한파가 지금의 추위보다 더 추울지라도 몸으로 느껴지는 추위는 지금이 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추위는 알탕 속에 들어있는 고기 같다. 그 고기는 돼지고기다. 어울리지 않는다. 왜 알탕 속에 돼지고기 같은 게 들어 있을까. 하지만 또 먹다 보면 괜찮다.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어울려 살아가고 있는 곳이 바로 이곳, 이 세상이니까 먹다 보면 어울리지 않는 것들의 알탕도 괜찮다.

예전에도 이런 추위가 있었지. 이런 기묘한 추위가 몸과 마음을 잠식하던 추위가 시기에 맞지 않게 왔던 때가 있었다. 스무 살 적에 친구들과 자주 가던 알탕 집에서 알탕을 먹곤 했다. 그때는 알탕을 자주 먹었다. 좀 춥다 싶으면 알탕이었다. 알탕이 특별히 맛있는 건 아니었다. 알탕 집이라고 하지만 전문점이 아니었고 그 알탕 집의 알탕은 가격이 저렴했다. 푸짐했다. 조미료가 잔뜩 들어갔고 미나리도 별로 들어가 있지 않은, 어딘가 못 미더운 모양이지만 우리의 소울 푸드 같은 음식이었다. 알이 많고 국물이 떨어지면 바로 채워 주었다. 소주 안주에 딱 안성맞춤이었다.

무엇보다 기묘한 추위에 몸을 데울 수 있는 좋은 음식이었다. 친구들과 자주 찾았다. 작은 선술집으로 테이블이 네 테이블이 고작이었고 술집 이름도 그냥 [알탕]이었다. 알탕은 여러 안주 중에 그저 하나였다. 그래도 분위기만큼은 하라주쿠 저 뒷골목 이자카야 못지않았다. 술집은 작고 늘 오던 사람들이 오는 곳이라 그곳에 가면 단골들은 서로 인사를 했다. 알탕이 굉장히 맛있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의 맛이 있었다. 무엇보다 그 안에는 돼지고기가 들어 있었다.

처음에는 묘했다. 기묘했지. 돼지고기는 좋은 부위는 아니지만 푸짐해서 이게 알탕인지 뭔지 애매했지만 먹다 보면 그게 어울렸다.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데 어울렸다. 그 알탕 집의 알탕이 그랬다. 조금 식으면 가득 들어간 조미료와 소금 때문에 짰지만 그때 육수를 더 붓고 돼지고기를 더 넣어주었다. 재탕해서 먹는 알탕의 맛은 2차전의 맛이다. 처음에 끓였을 때와 다른 맛이다. 밥까지 주문해서 같이 먹곤 했다. 2차전의 알탕 맛은 배를 채우기에 딱이었다. 우리의 입맛은 그다지 고급스럽지 않았다. 그다지 맛이 있지 않아도 먹을 만하면 맛있게 먹었다. 그럴 때였다.

나의 입맛이라는 건 지금까지 그렇게 이어졌다. 못 먹을 정도가 아니면 그냥저냥 맛있게 먹었다. 그래서 어딘가 여행을 가더라도 크게 맛없어서 못 먹는다거나 하는 경우는 없다. 못 먹는 음식 빼고는 그저 다 잘 먹었다. 못 먹는 음식이라면 매운 음식이다. 예전에 친구들과 자주 찾았던 알탕은 매콤하지 않았다. 붉은색을 띠고 있지만 맵지 않았다. 오히려 달큼했다. 그게 마음에 들었다. 알탕을 먹으러 다닐 때 같이 다니던 친구들은 전부 맛을 많이 따지는 사람들이 되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점심 한 끼에 피로를 풀고 시간을 즐기며 대화를 하는 것이 하루의 낙처럼 되어서 음식이 맛없으면 투덜투덜거렸다. 그 투덜거림이 뭔가 부하직원에게 하는 말처럼 느껴져서 이제는 같이 식당에 가서 음식을 먹지 않는다.

환경은 그렇게 사람을 변하게 한다. 내가 일하는 곳의 환경과 회사 다니는 친구 주위의 환경은 너무 다르다. 회사 주위는 정말 맛있는 음식점들이 많다. 회사원들에게 음식이 맛없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내가 일하는 근처는 다운타운이라 주로 학생들이 많이 나오고 학생들의 입맛에 맞는 음식점들이 많다. 내가 이 근처 음식이 마음에 드는 건 귀찮지 않은 음식들이 대부분이라서 그 점을 좋아한다.

회사원 친구들 근처의 식당은 찌개나 구이처럼 테이블 위에서 굽고, 끓이고, 찌고 뜯는 음식들이 많다. 내가 일하는 다운타운에 있는 식당은 테이블 위에 나오면 바로 먹으면 되는 음식들이다. 햄버거, 돈가스, 파스타, 쌀국수, 떡볶이 같은 음식들이다.

예전의 그 알탕 집의 알탕은 조리가 다 되어서 나오는데 테이블 위의 가스레인지에 올렸다. 그래서 식으면 다시 재탕, 삼탕 해 먹었다. 알탕 집도 예전에 다운타운의 뒷골목에 있었다. 뒷골목에 술집들이 자리 잡고 옹기종기 있었다. 알탕 집, 빈대떡 주점, 선술집들이 꼬불꼬불 골목에 죽 붙어 있었다. 맛은 둘째치고 운치가 있었다. 봄이 다가왔지만 겨울의 끈을 놓지 못한 매서운 추위가 몰아치면 운치가 짙은 골목으로 들어가 알탕을 퍼먹으며 소주 한 잔이 그리워진다.

알탕의 붉은색은 매혹적이다. 그렇지만 맵지 않았다. 맵지 않은 음식의 붉은색은 붉은색이지만 붉은색처럼 보이지 않는다. 알탕에는 알 말고도 곤이도 들어가 있다. 곤이가 물고기 정액이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알고도 맛있게 먹지만 몰랐을 때 곤이는 천상의 맛이었다. 정액과 곤이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데 어울렸다. 어울린다기보다 한 몸인 게지. 정액과 곤이라 한 몸이라니. 큭큭큭. 그런 게 바로 세상이지. 그런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곤이는 입안에서 그대로 녹아 없어지는 음식이 이렇게나 맛있다니. 봄이 되면 그제야 알탕 집에서 미나리를 많이 넣어 주었다.

알탕 집 이모님은 호호 아줌마 같았다.

작고 왜소하고 작은.

그래서 주방에서 알탕이 나오면 우리가 알탕을 테이블로 직접 들고 왔다. 웃으면 영락없는 호호 아줌마였다. 지친 마음을 달래기에 좋은 장소, 좋은 알탕이었다.

얼마 전에 그는 그 알탕 집이 있는 장소에 가봤다. 그곳에는 무인모텔이 들어섰다. 호텔 같은 모텔. 그런 모텔들이 세상을 점령하고 있다. 골목과 모텔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데 모텔이 들어서고 나니 떠 어울렸다. 이제 알탕 정도는 집에서도 밀키트로 간편하고 맛있게 먹을 수 있다. 그래서 맛이 없다. 맛있는데 맛없다. 세상에는 그런 음식이 존재한다. 세상은 넓기 때문에. 밀키트로 그저 끓이기만 하면 되는 알탕 역시 귀찮은 음식이다. 귀찮은 음식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지만 어울린다. 알탕은 나에게 그런 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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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자신의 차 위에 누군가 떨어져서 차 지붕이 찌그러지면서 시작되는 이야기. 적당히 흥미로우면서 적당히 재미있고 적당히 볼 만해서 아주 괜찮은 영화다.

서울에서 인테리어 일을 하는데 일은 늘 있는 것은 아니고, 나이가 많고 적고 간에 적당히 반말을 섞어 하고, 사람들 눈치를 보는데 욱하면 눈치 없이 말이 튀어나오고, 상대방은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데 본인은 중요해서 다그치지지만 상대방 반응이 자신의 생각과 다르게 나오면 또 곧바로 받아들이지만 혼자서 욕을 한다.

서울에 살지만 대구 사람이라 사투리를 쓰는데 그 사투리가 교묘하게 듣는 이로 하여금 아슬아슬하다. 여기서 듣는 이는 관객이다. 영화 속 상대방은 그렇지 않다.

호감 있는 여자에게 관심을 보이다가 안 좋은 말 들으면 또 그대로 포기를 한다. 관심을 보이는 방법은 역시 반말을 섞어서 하니까 여자는 그저 기분이 나쁘다.

주인공 주위의 사람들 역시 어딘가 기묘하니 묘한 구석이 많은 사람들이다. 그럴 것 같지 않은데 그렇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데 주인공과 주위 사람들은 어울려 지낸다. 아 그러고 보니 그게 세상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것들이 뒤섞여 살아가고 있는 게 이 세계니까. 영화 속에서도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어울리는 것들이 잔뜩 나온다. 주인공이 사는 집의 부부가 그렇다. 부부는 서로 전혀 어울리지 않지만 같이 살고, 주인공과 노랑머리 여자는 가해자와 피해자이지만 같이 어울린다.

바람이 없는 날 반영된 물속의 세상은 물 밖의 세상 같지만 전혀 다른 세계. 이 세계는 뒤틀린 세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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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와인은 잘 모르지만 영화는 꼭 묵직하고 진한, 쌉사름하고 짙은 와인을 마신 기분이다. 인상은 써지는데 끝 맛이 뭔지 모르게 괜찮네, 같은 기분. 영화는 내내 답답하고 우울하지만 잘 만들었다.

이 현실감 쩌는 이야기. 내가 사는 도시의 이야기다. 우리의 이야기. 서민의 이야기. 사람 이야기. 사는 이야기. 그러나 힘든 이야기. 삶을 살아가는 건 살아내야 하는 거야.

울산의 중추적인 별이 대한민국을 지탱하던 때가 있었다. 그 찬란한 울산의 별이 지면서 실제로도 많은 사람들이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되었다. 지는 해와 뜨는 해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나고 마찰을 겪고. 그러나 헌 별이 지면 새 별이 떠오른다.

영화 속 영화적 허용을 말하자면 윤화가 새마을금고에서 대출하려고 주소 적을 때 동구 전화동이라고 적는데 전화동은 없고 전하동이 있다. 윤화가 잘못 적었나 싶었는데 영화 속 윤화가 벽보에 쓴 글을 보면 한글을 제대로 배우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 아주 디테일한 장면이었다.

영화는 방어진 전하동과 조선소가 배경인 것 같은데 전하동은 사실 전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지 오래되어서 영화 속 주인공들이 사는 집과 마을을 어디서 찾아냈는지 잘 도 찾아낸 것 같다.

윤화가 조선소에서 그 난리를 피우고 등대 같은 곳에 앉아서 소주를 마시는데 아마 슬도의 등대 같다. 실제로 조선소 내에서 슬도 등대까지 먼 거리다. 회사에서 걸어 나와 등대에 앉아서 소주를 마시기는 무리다.

딸과 연예인 지망생 친구가 서울로 가기 위해 공업탑에서 버스를 타려는 장면이 나온다. 조선소가 있는 방어진에서 바로 서울로 가는 버스를 타거나, 공업탑과 방어진 사이에 있는 고속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타면 되는데 굳이 끝과 끝의 공업탑까지 간 것을 보면 울산의 상징 같은 공업탑 로터리를 보여주려 한 것이 아닌가 싶다.

마지막 장면에서 대문 옆에 청명길이라고 붙어있는데 전하동에는 청명길은 없다. 영화를 위해 만든 것 같고, 영화 속 조선소와 작업복을 역시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다. 울산의 현대 조선소의 작업복은 전혀 저렇지 않은데 아마 현대 조선소를 직접적으로 영화에 나오게 하는 것이 안 되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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