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애니메이션을 보고 이렇게 울컥 하기는 처음이다. 이는 목소리 더빙, 현실감 백퍼센터에 달하는 작화, 아이들을 대변하는 음악, 무엇보다 소리와 동순 그리고 호연의 이야기가 안타깝고 그립고 고마워서 그럴지도 모른다.

학폭 때문에 전학 간 학교에서도 소심한 소리가 호연에게 온 편지를 하나씩 찾아가는 보물찾기 방식을 따라 보는 우리도 소리와 동순이 되어 같이 따라간다.

도대체 왜 이런 편지를 숨겨 두었는지, 어쩌자고 이 힘들고 무서운 세계에서 이렇게도 다정하게 편지를 써 놨는지, 그리고 소리라는 걸 어떻게 알고 편지를 숨겨 두었는지.

세 명의 주인공들은 전부 아픔이 있다. 그것이 내면이든 병이든. 그리고 모두가 그걸 견디고 이겨내려고 한다. 그 동력이 바로 친구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산속에 숨어 있는 동순을 찾아온 호연. 사실 어떻게 찾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 애의 특이란 능력보다 잘 알지도 못하는 날 찾기 위해 산속을 찾아 헤맨 것이 내겐 훨씬 더 놀라웠기 때문에.

동순과 소리는 호연에게 도움을 받고 있었거나 있었다. 동순은 직접적으로, 소리는 편지를 통해 간접적으로. 그리하여 소리와 동순은 호연을 찾으려 한다.

호연은 마치 난 다 알아 하는 위치와 능력자 같은 면모를 지니고 있지만 실은 세 명 중에 가장 나약하고 아픈 아이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드러나는 비밀.

영화 속 배경이 요즘은 아니다. 휴대전화가 없고, 공중전화, 카세트테이프, 나무격자무늬의 방문 등. 아무렇지 않게 건넨 내 손을 잡을 수 있는 것도 용기가 필요할 때가 있다. 영화 속에는 좋고 멋진 대사들이 많이 나온다.

네가 숨처럼 내쉬던 작은 호의들을 난 평생 기억할 것이다.

소리는 연의 편지로 살아갈 희망을 가졌지만, 그건 소리에게 받은 호의를 갚는 연의 방식이었음을.

원작과 전학의 배경이 살짝 다르지만 거의 똑같이 이어진다. 악뮤의 이수현이 소리의 더빙을 맡았다. 이수현의 노래 ’연의 편지‘도 들어보자.

우리의 이야기였을지도 모를 아이들의 비밀 속으로 들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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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의 그림



the bird fights its way out of the egg. the egg is the world. who would be born first must destroy a world. the bird flies to God. That God's name is Abraxas.

데미안에서 한 세계를 파괴한 새가 신에게 날아간다고 했고 그 신의 이름을 아프락사스라 했다. 이름도 참 아프락사스하다. 아프락사스는 무엇일까. 아프락사스 아프락사스. 계속 되뇌어봐도 입에 더 담고 싶은 아프락사스. 내가 노래를 만든다면 제목을 아프락사스라고 하겠어.

우리는 모두 아프락사스다. 설령 그것을 부정하거나 또는 의식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욕망은 끊임없이 잠재된 초월을 건드려 아프락사스가 된다. 아프락사스는 결국 맹점을 지니고 우주를 한 바퀴 돌아 자기에 도달하는 원점이다.

융이 아프락사스에 대해서 말했다. 아프락사스란 삶과 죽음, 저주와 축복, 참과 거짓, 선과 악, 빛과 어둠. 아프락사스란 결국 우리, 나 자신을 말한다. 아니 그럴지도 모른다. 한 세계를 파괴하는 것도 나 자신이고 새가 되어 나는 나로 돌아간다.

하지만 나로 돌아가는 길은 멀고 험하다. 기도처럼 아프락사스를 말한다. 아프락사스. 아프락사스. 데미안이여 아프락사스라고 몇 번을 외쳐야 합니까. 같이 놓일 수 없는 두 가지의 모순이 한 마음에 내재되어 있어서 때로는 비참한 순간에 접어든다. 신과 악마를 동시에 받아들인다. 아프락사스란 그런 것이다. 미워할 수밖에 없는 존재를 사랑하고 있는 감정은 우리가 아프락사스이기 때문이다. 잊고 있더라도 우리는 우연이라는 묘한 시공간을 뛰어넘는 상황을 맞이하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는 아프락사스가 된다.

아프락사스 속에서도 내 영혼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한 번만이라도 살아있다고 느끼고 싶도록 영혼에 불을 지른다. 가능성을 열어 둔 채 나는 아프락사스가 된다. 한 세계를 파괴하고 알에서 깨어나 아프락사스에게 날아간다.

아프락사스는 입구이자 출구가 된다. 의심이 없는 세계 그곳이 아프락사스. 정신의 혼돈과 방황은 때로 육체를 단단하게 만든다. 단단해진 육체를 가지고 아프락사스가 된다. 그곳에서 모성적인 에로티시즘 그녀를 만난다. 그녀와 나는 서로 소름 돋는 애무를 한다. 마치 뱀에게 쫓긴 쥐가 궁지에 몰려 뱀에게 마지막으로 대들다가 뱀의 아가리에 박히는 순간 쾌락과 동시에 공포를 맛보는 것처럼. 그리고 우리는 버브의 노래를 듣는다. 아프락사스에서 버브가 사랑을 노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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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의사 텐마가 살려준 아이가 정교하고 무참히 연쇄살인을 하는 바람에 의사를 던지고 희대의 살인마가 된 요한을 찾아다니는 이야기다. 몬스터에는 선과 악의 구분이 애매하다.

등장하는 모든 인물, 심지어는 엑스트라까지 선과 악이 공존하는 모습을 보인다. 텐마는 사람을 살리는 일이 병원을 물려받는 일보다 먼저이지만 이해관계에 얽힌 병원장이나 권력자들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텐마는 자신의 선함으로 세기의 절대악을 살려낸 것에 대한 트라우마가 깊다. 개인적으로 텐마는 마스터 키튼보다 매력이 떨어지는데 전체 이야기는 몬스터가 몰입감이 더 좋다.

몬스터에는 천재 작가(그림도 잘 그리고, 그림보다 글을 더 잘 쓰며 밴드 공연을 하는 음악인으로 작곡도 뛰어난) 나오키의 정치성향이 강하게 드러난다.

요한은 제2의 히틀러가 되어 세상을 극우화시키려 들고 텐마는 그걸 막으려 한다. 극우집단은 어린이들을 어릴 때부터 정신개조와 신체를 단련시킨다. 서로 한 방에 모아두고 편을 가르게 해서 상대방 편을 헐뜯고 공격하게 해서 이기는 집단으로 키워간다.

리박스쿨에서 보던 방식이다. 초반러쉬가 중반부에 들어 힘이 빠지는 스타일을 지적받기는 하지만 이런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으니 몬스터가 더욱 재미있다.

텐마가 신체를 단련하고 훈련받을 때 베트남 여자 아이와 함께 지낸다. 그때 엄마를 잃은 그 여자아이는 절대 웃지 않는데, 마지막에 웃는 장면이 나오는데 나오키는 그런 장면을 잘 만들어 낸다.

그럴 것 같지 않은데 보고 있으면 빠져들어 울컥하게 만든다. 몬스터에는 그런 장면이 많다.

텐마는 독일과 여러 나라를 돌며 요한을 잡으러 다닌다. 요한을 둘러싼 엄청나고 거대한 세기말적 미스터리 음모도 드러나면서 보는 이들을 놓아주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거시적으로는 미스터리를 헤치며 요한과 대결을 벌이는 이야기지만 미시적으로는 인간의 양면성, 인간의 두 얼굴을 말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 사람이 죽었으면 좋겠다는 그 마음대로 되었는데 왜 괴로워하는가? 이건 비록 나쁜 짓일지라도 이걸 함으로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는데? 이런 마음이 생겼을 때 나는 과연 어느 쪽으로 마음이 기울까.

사람을 믿을 수밖에 없지만,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가끔 본질이라는 단어를 쓴다. 사실 본질이란 무엇일까. 특히 인간의 본질이란 뭘 말하는 것일까.

오래전부터 철학자들은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연구를 했다. 하지만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사이코패스는 인간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일까 본질이라는 맹점은 가지고 있으면서 살짝 비켜나간 것일까.

절대악으로 나오는 요한 역시 실험으로 탄생한 실험체다. 텐마 역시 다니면서 사람들을 살리지만 마음속에는 요한을 죽여야 한다는 악한 신념 하나만 있다. 본질이란 무엇인가, 에 대해서 생각하며 볼 수 있는 시리즈 [몬스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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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11-17 20: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일본 만화 중 <20세기 소년>과 더불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교관 2025-11-18 11:34   좋아요 0 | URL
정말 좋아요 재미있어요!
 

크로넨버그가 마치 80년대에 21세기를 내다본 듯한 이야기로 만든 것 같은 영화다. 아마도 당시 크로넨버그 같은 감독은 약간은 답답했을 것이다. 상상력은 뇌와 피부를 뚫고 나오는데 그걸 표현할 방법이 적었던 시대라 영화로 표현하기에도 힘들었다.

하지만 크로넨버그가 누구인가. 환상과 욕구를 기괴하고 괴괴한 자극으로 표현하는 감독이 아니었던가.

현재 21세기에 인공지능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시기의 영화들을 보라. 모든 영화가 재미있지는 않다. 오히려 80년대보다 상상력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해서 어설픈 영화만 줄창 나오고 있다.

중간계 같은 영화를 영화로 봐야 하나 싶다. 80년대에 나온 비디오드롬의 발치에도 미치지 못한다.

영화 [비디오드롬]은 인간 내면에 숨어 있는 잔인하고 알 수 없는 욕망을 잘 꼬집었다. 인간은 안 그런 척 하지만, 타인의 싸움을 좋아하며, 타인의 불행을 즐기며, 살인을 할 수 없으니 살인자를 마음으로 응원하며, 성적으로 복종하거나 당하고 싶어 한다.

인간은 어쩌면 전부 성악설에 근거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교육과 훈련, 법규와 도덕적 관점을 통해서 그걸 꾹 누르고 참고 있을 것이다. 영화와 시리즈로 탄생한 [웨스트 월드]를 보면 인간이라는 존재를 잘 알 수 있다.

수잔 손택의 [사진에 관하여]와 [타인의 고통]를 봐도 티브이를 통해 흘러나오는 타국의 가난한 어린이들의 모습을 저녁 식사를 하면서 보는데, 타인의 고통을 식사를 즐기면서 시청한다. 화면이 지나가면 그걸로 끝이다. 같은 의미의 글들이 있다.

영화는 티브이가 보급되고 비디오가 세계적으로 흘러넘치면서 비디오에 중독이 되면 환각을 일으켜 뇌에 종양이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렇게 되면 이 비디오드롬에서 빠져나올 수 없고 더 깊게 들어가서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무너지게 된다.

이 비디오드롬을 현재까지 죽 끌고 와서 나온 버전(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소년의 시간]이다. 유튜브, 쇼츠, 틱톡이라는 비디오를 대체한 짧고 강력한 영상에 매몰되면 어떻게 되는지 너무나 잘 보여준 시리즈였다. 특히 1화는 모두가 알겠지만, 원테이크다. 미친 연출인 것이다.

83년에 나온 [비디오드롬]을 극장에서 봤다면 영화 속 환각을 관객들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연출이라고 생각된다. 사람들은 자극을 원한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겉으로는 안 그런 척 하지만, 실제로는 이 평범하고 고루한 일상을 벗어날 수 있는 자극을 비디오에서 찾는다.

그래서 맥스 렌은 자극적은 콘텐츠를 찾아 나선다. 그리고 일상에서 너무나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중독으로 신체가 변형되고 극단적인 공포와 흥분을 느끼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극과 일상은 실은 상당히 밀접하다.

비디오드롬을 크로넨버그는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크로넨버그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장르가 크로넨버그다.

비디오드롬에는 당시 최고 주가를 달리고 있던 블론디의 보컬 데보라 헤리가 성적 유혹미를 뽐내며 등장한다.

자극이란 익숙해지면 자극을 뛰어넘는 자극을 원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중독이 되고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어디에 있는지 조차 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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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11-16 22: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비디오드림이네요.지금1020세대들은 퍽 낯설은 단어지만 과거에는 영화는 극장이니면 비디오였다고 하지요.비디오가 처음 나왔을 당시에 나온 비디오드림은 참 충격적이었을 것 같은데 지금봐도 오래된 느낌이 들어서 그렇지 내용은 상당히 충격적인 것 같아요

교관 2025-11-17 11:40   좋아요 0 | URL
화면은 구리지만 이야기는 지금도 충격적이네요 ㅎㅎ
 

신발을 만드는 일을 하는 도경은 자신을 어릴 때 버린 어머니를 찾고 싶었다. 신발을 유심히 보고 신발을 디자인하고 신발을 만드는 도경은 어머니는 어떤 신발을 신고 살아가는지 궁금해졌다.

어머니가 속초에서 작은 게스트 하우스 [파랑새정원]을 운영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간다. 어머니는 어떤 사람이며, 어떤 모습이며, 어떤 신발을 신고 있는지.

게스트 하우스에서 처음 본 어머니의 모습은 젊고 아름다운 모습이며 야외에서 야외용 슬리퍼를 신었다. 어머니를 보고 바로 돌아가기로 했지만 도경은 파랑새정원에서 숙박을 하게 된다.

도경은 어머니에게 왜 나를 버렸냐고 이야기를 할까? 어머니는 도경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을까? 푸른 바다가 펼쳐진 속초에서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 영화는 독립영화답게 등장인물에 총 네 명에 불과하다. 영화에는 어머니가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훌쩍 커버린 아들에게 어떤 말을 하지 않는다.

마지막 돌아오는 길에 앞으로의 여지를 남겨둬서 열린 결말을 상상하게 한다. 아들을 버리고 말할 수 없는 사연을 지닌 어머니 역할을 7년 만에 복귀한 남상미가 했다.

남상미는 더 이상 얼짱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모습은 아니었다. 홀로 작지만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하는 중년 여성 같은 모습이다. 하지만 화장기 없는 얼굴을 그대로 드러내며 카메라를 보고 표정 연기를 하는 남상미는 배우라는 느낌이 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도경은 어머니에게 [바다가 반짝이는 것을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라는 메시지를 보낸다. 이 문장에서 아들을 어릴 때 버릴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를 용서하는 도경의 마음을 잘 보여준다.

남상미는 어떤 답장을 보낼까. 두 주인공 외에 도경의 여자친구와 같은 동네의 중국집 사장으로 해수(남상미)를 마음에 둔 준호(박성일)가 감초 역할을 한다. 감초 역할이라고 하지만 메시지는 두 주인공보다 더 강하게 전달하는 대사를 한다.

독립영화는 재정상 녹음기술이 상업영화보다 달리는데 [이름에게]는 대사가 잘 들려 좋다. 언뜻 보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을 따라 하고 싶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고감독은 찢어진 가족, 헤어진 가족, 바뀐 가족 등 가족에 대한 영화를 많이 담았다.

이 영화도 가족서사에 가깝다. 조용하고 고요하게 서사를 풀어가려고 한다. 아쉬운 부분도 있지만 남상미를 오랜만에 배우로 봐서 괜찮았던 영화 [이름에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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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5-11-15 18: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화 한 편, 덕분에 잘 보고 갑니다.

교관 2025-11-16 12:2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