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의 사진과 밑의 사진의 시간차가 좀 있다. 스파이디들이 좀 늘었고 히데의 피규어도 있다. 



우리는 하릴없이 걷고 또 걸었다. 얼마나 걸었는지 중요하지 않았다. 함께 걸었다는 것이 중요했다.라고 시작하는 글을 적고 있었는데 누가(매일 보지만 그저 인사만 하는 옷가게 여자 사장님) 와서 나에게 참 특이하다고 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있는데도 택배가 옷가게로 배달되어서 옷가게 여자 주인이 들고 왔다. 잘 모르겠지만 글 적느라 주위의 소음에 소홀했던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어릴 때부터 넌 참 특이하구나, 라는 말을 종종 들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특이하다는 말은 이상하다는 말이었다.


성인이(위의 사진처럼) 되어서도 그렇지만 어린 시절에도 장난감, 프라모델을 좋아했다. 아버지는 가난해도 내가 좋아하는 장난감은 어떻게든 사주려고 했다. 나는 어렸지만 비싸고 좋은 장난감은 조르지 않았다. 손으로 만들 수 있는, 내가 좋아하는 만화 주인공이 있는, 문방구에서 파는 프라모델을 좋아했다. 앉아서 프라모델을 만드는 그 시간이 좋았다. 왜냐하면 그러고 있으면 아버지가 같이 앉아서 프라모델 만들기를 함께 했다. 그 어린 시절에 잘 설명할 수는 없지만 아버지와 함께라는 것이 정말 좋았다. 아버지와 함께 문방구에 가서 장난감을 고르고 그것을 손에 쥐고 오면서 아버지에게 무엇인가 이야기를 하고 집에 와서 볕이 드는 곳에 앉아서 같이 장난감을 만든다. 옆에서 동생이 얌전하게 앉아 있고 어머니는 떡국 같은 것을 끓이고 있다. 장난감을 만들다가 내가 만들지 못하는 부분은 아버지가 기분 좋게 만들어 주었다. 어릴 때에도 집에 있는 찬장에 장난감이 가득했는데 요즘도 진열장에 피규어가 가득하다. 진열장 두 개가 더 있는데 그곳에도 피규어가 있고 옷장 위에는 아직 뜯지 않은 피규어도 좀 더 있다. 어린 시절에도 아이들이 집에 그렇게 놀러를 왔다. 너는 참 특이하다면서. 어른이 되어서 진열장에 피규어가 가득하니 역시 특이하는 소리를 계속 듣게 되었다.


피규어는 내가 좋아했던 만화의 주인공들 위주의 피규어다. 코난, 라나, 포비나 빨강머리 앤, 은하철도 999, 엄마 찾아 삼만리의 마르코 같은 주인공의 피규어가 아주 좋다. 이런 피규어는 이제 잘 구할 수도 없다. 그리고 꾸준하게 좋아하는 건 역시 스파이디들이다. 스파이더맨이 좋다. 다른 슈퍼파워를 지닌 주인공들에 비해 좀 떨어지는, 멀리 날아가지도 못하고, 비행기를 들지도 못하지만 늘 곁에 있어서, 뭐 그런 스파이더맨을 어릴 때부터 좋아했다. 슈퍼맨보다 더 좋아한 것 같았다. 


가끔 코난을 좋아하는 어른을 만나서 이야기해보면 사실 미래소년 코난에 대한 이야기는 잘 모르는 것 같다. 드러나는 디스토피아적인 세계관이나 인더스트리아의 거대한 음모나 그런 이야기들. 포비는 가장 친하다고 생각하는 친구에게는 절대 주지 않는 도마뱀 꼬리를 준다던가, 덕분에 라나는 기절을 하기도 하고. 또 은하철도 999는 더 난해하고 심오하지만 그걸 나눌 수 있는 곳은 인터넷밖에 없다. '빨강머리 앤'은 넷플릭스 '빨간 머리 앤'으로 시리즈 3까지 나왔는데 참 재미있었다. 넷플릭스 시리즈가 길다면 만화를 재미있게 보는 방법은(순전히 개인적인 방법이지만) '빨강머리 앤'을 두 편 보고 소설을 읽는다. 그러면 두 편 정도가 소설 한 3, 40페이지 정도를 차지한다. 대사도 거의 똑같기 때문에 이렇게 번갈아 가면서 보는 재미가 있다.


엄마 찾아 삼만리의 마르코 그림의 작화가 마음에 들어오는 이유 중 하나는, 장면 설정이나 레이아웃을 젊은 시절의 미야자키 하야오가 맡았다. 그 외 당시 최고의 작화 화가들이 엄마 찾아 삼만리에 매달렸다  총 52화로 마르코의 엄마 찾아가는 길은 험하고 고단하고 지치고 힘들지만 울며 웃으며 엄마를 찾으러 간다. 마르코의 엄마는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가정 형편이 너무 어려워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정부 일을 하러 갔는데 엄마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에 머나먼 길, 삼만리라는 어마어마한 길을 엄마 찾아 혈혈단신으로 가게 된다. 벌써부터 눈시울이 따가운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당시 아르헨티나의 시대 상황을 찾아보면 마르코의 엄마가 왜 그 먼 곳까지 갔는지 알게 된다. 그 당시 아르헨티나는 밀을 수출하는 신흥 부국이었다. 때문에 이탈리아나 스페인의 이민자들을 오냐오냐하며 받아들였다. 마르코가 얼마나 긴 거리를 가느냐 하면 1880년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출발하여 마르세유를 거쳐 바르셀로나, 말라가, 다카르를 지나 대서양을 종단한다. 그리고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배를 타고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지나 바이아블랑카에서 다시 부에노스아이레스, 로사리오, 코르도바, 투쿠만에서 결국 엄마를 만난다. 엄마를 만날 때 정말 눈물이 철철 난다.


그리고 마르코는 반대 여정으로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마르코가 물어물어 힘겹게 엄마가 있는 집에 가면 이사를 가 버리고, 또 미칠 듯 엄마가 있는 집에 가면, 어떡해? 또 이사를 가버렸다. 또 찾아가면 일주일만 일찍 오지, 같은 말만 듣는다. 얼어 죽을 놈의 이사. 이렇게 마르코가 다닌 거리가 25,910 킬로미터다. 지구 둘레의 70%를 돌아다녔다. 조그마한 몸으로. 마르코의 여정도 딱하지만 시작하는 마르코 주제가가 '시' 다. 노래를 따라 부르다가 끝 부분에서 혈관 터질 뻔하지만 이 노래는 한 편의 장엄한 시다.


아득한 바다 저 멀리 산 설고 물길 설어도

나는 찾아가리 외로운 길 삼만리

바람아 구름아 엄마 소식 전해 다오

엄마가 계신 곳 예가 거긴 가

엄마 보고 싶어 빨리 돌아오세요

아아아 외로운 길

가도 가도 끝없는 길 삼만리


삼만 리는 끝이 없다. 정말 끝없다. 한하운 시인의 전라도 길을 읽어봐도 맨발로 전라도까지 가는 길도 험난하고 끝이 없어 문둥이 발가락이 다 떨어져 나가 끝에는 하나만 남는데, 마르코는 삼만 리를 엄마가 보고 싶어 지치지 않고 간다. 마르코는 여행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뱃사람, 철도원, 서커스 단원,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 소매치기 등 인간 군상은 죄다 만난다. 그들에게 도움을 받고 그들에게 도움을 준다. 마르코의 이야기는 여행하는 로드무비 식의 형식이 아니라 마르코라는 어린아이의 성장기다. 그래서 이 만화를 유심이 보면 감동이 밀려온다. 만화 주제곡 주제에 산 설고, 물길 설다는 표현도 참 애틋하다. 게다가 마지막 부분은 울먹이며 부르는 것처럼 들린다. 이 가사는 당시에 너무 슬퍼서 개사가 되어서 다시 불렸다. 요컨대 ‘엄마가 계신 곳 내가 거기 있다’로 바뀌었다. 주제가는 두 곡이다. 이 슬픈 버전이 있고 빠른 버전으로 한 곡이 더 있다. 원작은 이탈리아의 아동작가 에드몬드 아미치스의 ‘사랑의 학교’에 실려있던 단편 ‘아페 니니 산맥에서 안데스 산맥까지’인데 그걸 주욱 늘려서 52부작으로 만들었고 엄마 찾아 삼만리는 극장 애니메이션 편도 있다. 극장판도 좋으니 보기 바람. 


라고 이야기를 하면 참 특이하네.라는 말을 듣게 된다. 


요즘(근 10년 정도)도 그 소리를 듣게 되는 건 매일 비슷한 시간에 조깅을 하고 비슷한 시간에 비슷한 정도의 글을 쓰고 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특히 조깅을 하는 부분에 대해서, 대단하구나, 어떻게 매일 그렇게 할 수 있지? 같은 소리를 듣는데 어릴 때부터 그 소리를 듣던 내 귀에는 이상하구나로 들려 버린다. 하루가 24시간이고 그중에 1시간 정도 조깅을 하는 것이 정말 대단한 일일까 생각해보지만. 우리는 매일 하는 일들이 있다. 잠을 자고, 밥을 먹고, 배설을 하고, 집으로 가고, 집에서 나오고. 우리가 그런 일에 대단하다고 하지는 않는다. 뭐 하지만 좀 이상하게 보이면 어때, 타인에게 피해만 주지 않으면 나는 그만이다.


작년인가 해운대 고깃집에서 일행과 함께 고기를 먹었다. 고기가 다 익었는데 일행이 계속 젓가락을 사진 찍고 있는 것이다. 젓가락 손잡이 부분을 폰으로 유심히 이리저리 찍었다. 이렇게 보고 있으니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진지하게 젓가락을 찍고 있었다. 웃기기도 했고 신기하기도 해서 나는 그 표정을 몰래 찍었다. 일행은 젓가락의 무늬를 찍고 있었다. 그게 미묘하지만 식당마다 젓가락, 쇠젓가락 무늬가 다 다르다는 것이다. 식당을 자주 가지 않아서 나는 그런 세계가 있다는 것을 몰랐다. 너 참 특이하구나,라고 해버렸다. 그랬더니, 그 말 오빠가 자주 듣던 말 아니야, 라며 일행이 웃었다. 남들에게 듣던 말을 나도 하다니 결국 나도 그저 그런 인간이었다.


일행은 클래식 공연에 관한 일을 한다. 그들을 섭외하고 공연장의 세세한 부분(음향이라던가 장비 그런 것들)을 책임져야 한다. 그래서 공연이 잡히고 연주회가 시작되면 그 기간 동안 합숙을 하듯 공연자와 함께 공연장을 뒷받침하는데 그 세계가 참으로 재미있고 놀라운 일들이었다. 그리고 피아니스트들의 험담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 드뷔시의 이야기로 접어들었다. 드뷔시의 곡 중에 라메르가 있다. 드뷔시는 살아생전 바다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런데 일본에서 건너온 그림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가나가와의 파도’를 보고 그대로 ‘라메르’를 작곡했다.


그 곡을 듣다 보면 기분 나쁠 정도로 파도가 치는 광경과 그 속에 몸이 빠져 들어가는 기분이 든다. 게다가 후반부로 갈수록 더 드러나지만 곡 전체에 깔린 일본풍의 기이한 느낌은 소름까지 돋는다. 어째서 달랑 그림 한 장을 보고 이렇게 작곡을 할 수 있을까. 드뷔시는 정말 특이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우리는 고깃집에서 ‘라메르’를 들었는데 우리는 정말 이상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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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지금 벤과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나는 실은 여기에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나의 모습이 여기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나면 나는 여기에도, 지금 잠들어 있는 해미의 몸속에도 그리고 아버지가 있는 구치소에도 있다.    


 남자들 앞에서 가슴을 드러내 놓고 춤을 추고 그래, 창녀나 옷을 그렇게 벗는 거야.    


 내가 왜 그런 말을 해미에게 했는지 알지 못한다. 그날 이후 해미는 보이지 않는다. 해미는 완벽하게 사라진 것이다. 흔적도 없고 가방도 두고 아프리카에도 가지 않고 그대로 어딘가에 동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휴대전화로, 해미에게 온 전화만으로 그것이 해미라는 것을 알 수는 없었다. 마치 해미라는 생령이 나에게 전화를 하여 어떤 메타포를 던지고 간 것 같았다. 윌리엄 포크너가 그랬다. 인간의 오류는 몰라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다 안다고 착각하는 데서 오는 것이라고.    


 설령 나의 착각이라 할지라도 나는 해미를 찾아야 했다. 나는 어릴 때 해미에게 못생겼다고 말했다고 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이 없는 것일 뿐이 아니라 내가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다. 해미가 잘못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역시 나의 없는 기억도 나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해미는 그런 말을 나에게 들었고 나는 그런 말을 해미에게 해 버렸다. 어린 해미에게 나는 상처를 준 것이다. 해미는 그 상처를 입고 어딘가에 풀지도 못한 채 어른이 되어 버렸다. 나는 해미에게 그 상처를 풀어주기 위해서라도 해미를 찾아야 했다. 나는 해미를 좋아하게 되었으니까. 해미의 미소와 담배 피우던 모습과 나에게 말을 할 때 눈빛과 나를 잡아주던 그 손길을 나는 사랑하게 되었다.   

  

 이후 꿈을 꾸면 비닐하우스를 태우고 있는 어린 나를 바라보는 꿈을 꾼다. 그 비닐하우스에 불을 낸 사람은 나는 아니다. 하지만 나는 내가 불을 낸 것처럼 희열을 느끼며 바라보고 있다. 그 어린 종수를 나는 쳐다보는 꿈이다.     


 어린 종수는 어른이 되어 버린 어른 유전자의 종수를 태우며 희열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꿈을 꾸고 나면 개운하지 않게 일어났다. 마치 잠이 들면서 현실의 비닐하우스를 끌고 꿈속으로 들어가 꿈속과 현실이 뒤섞여 몹시 불편한 현실의 자투리처럼 느껴졌다.    


 나는 비현실의 비닐하우스를 태우면서 현실의 비닐하우스를 찾아다녔다. 벤이 태웠을 비닐하우스가 있는지. 그는 가까이 있는 비닐하우스를 태우며 희열을 느낀다고 했다. 바람에 힘없이 날리는 쓸모없어진 현실의 비닐하우스 속에 들어가 있으니 결락감이 몸으로 파고들었다. 결락은 차갑고 무서워서 두꺼운 옷을 입고 있었지만 몸이 덜덜 떨렸다.


 낡고 못쓰게 된 비닐하우스를 바라보고 있으니 비닐을 통해서 내 모습이 읽혔다. 그리고 해미의 모습도.    


 변변찮은 동네의 변변찮은 집에서 변변찮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변변찮은 유전자의 모습이 비닐하우스 속에 있었다. 아무리 발버둥을 치고 노력을 해도 결국에는 못쓰고 볼품없는 비닐하우스가 될 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원래대로, 원래 이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비닐하우스는 태워지기를 바라고 있다. 포근하면서도 불안한 비닐하우스는 언젠가 태워질 것이다. 아주 빠르고 깨끗하게, 십 분 만에 타 없어질 것이다.    


 너무 가까워서 놓칠 수 있다. 너무 가까우면 안 보일 수 있다. 벤은 그렇게 말했다. 너무 가까이 있어서 우물을 놓치고 해미를 놓쳤다. 너무 가까우면 안 보인다. 해미가 너무 가까이 있어서 보이지 않는다. ‘너무’라는 부사는 너무 어둡고, 너무 크고, 너무 깊은 것과 어울렸던 부정적인 투영을 나타낸다. 해미는 나에게 너무 가까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해미를 놓치고 만 것이다.    


 해미는 마지막으로 나에게 전화를 했다. 그것이 진정 해미가 전화를 한 것인지, 해미인지 아니면 해미를 가장한 누구인지, 생령인지 알지 못한다. 해미의 방은 나와 해미가 나눴던 그 방이 이미 아니었다. 서울타워의 유리에 비친 햇빛이 아슬아슬하게 들어왔던, 위태로운 해미의 숨결이 남아있는 방이 아니었다.    


 그녀를 찾아야 했다. 보일이처럼 영원히 보이지 않게 되기 전에 해미를 찾아야 했다.    


 문득 해미가 아주 가까이 있는 비닐하우스라는 생각이 들었다. 벤의 집 화장실에서 해미의 손목시계를 보고 깨달았다. 해미 이전의 해미들이 서랍 속에는 가득하다는 것을.     


 정말 너무 가까이 해미가 있어서 놓친 것이다. 이 세계는 수수께끼 같은 곳이다. 혼잡한 세상 속에서 나 하나쯤 타 없어진다고 해도 사람들은 관심도 없다. 쓸모없는 유전자를 물려받은 냄비에 지나지 않는 육체는 타 없어지는 게 맞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해미는 안 된다. 해미에게 창녀라고 해서 상처를 줬던 것도 사과를 해야 한다. 벤이 끼어들면서 상처 받은 내 마음도 털어놓고 싶다. 해미를 찾아야 한다. 이제 소설을 쓸 수 있다고, 너와 함께 다시 한번 잠들고 싶다고 말을 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찾아야 한다.   


 애초에 집으로 전화를 건, 수화기 너머 긴 얼굴의 사람이 해미일지도 모른다. 해미는 거기에 있으면서 내가 있는 곳에 전화를 한 것이다. 나에게 무엇인가 말을 하기 위해서, 나에게 손을 내밀기 위해서, 나에게 입은 상처를 제대로 나에게 표현하기 위해서 전화를 한 건지도 모른다.    


 태우고 나면 그 후에는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태우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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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르르르릉.


 “여보세요…….”


 나는 잠결에 전화를 받았다. 내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 있는 긴 얼굴의 누군가에게 닿았을 테지만 아무런 소리도, 말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집으로 온 후 벌써 몇 번째 이런 전화가 오고 있다.    


 아버지는 자존심 때문에 곤란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변호사는 말했지만 실은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집을 나간 이후 더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아버지는 나와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도 마치 나 이외의, 내 뒤에 있는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건 꼭 나를 가장하고 있는 아버지의 유전자를 잉태하고 아버지의 모습으로 나타난 아버지 자신의 또 다른 모습에게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나와 이야기를 하지만 아버지는 지극히 공허와 대화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남은 삶을 세상과 타협을 하며 살아가는 방법이라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게 아버지 자신의 자기 방어 기저를 만들었고 그건 아버지 자신에게 어떤 면으로(생활에 대해서) 미저러블 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아버지에게 장소는 중요하지 않다. 아버지는 이미 장소를 옮겨 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전화를 하는 건 아버지일지도 모른다. 아버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나의 착각이라는 것을 알지만 아버지는 나에게 공허를 통해 무엇인가 말을 하려고 한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전화를 하는 건 벤일지도 모른다. 벤에게서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매일 잠이 들면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꿈을 꾼다. 벤은 두 달에 한 번쯤 태우는 페이스가 제일 좋다고 했다. 당연하지만 남의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것, 범죄행위를 저지르는 것, 명백한 범죄 행위, 이 명백하고 사실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건 너무나 간단한 것이라 했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지게 할 수 있다고 했다.    


 해미가 그랬다. 원래 없는 것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 형태에 대해서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없는 그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를 생각하지 않는 것.    


 벤이 하는 말을 듣고 어쩐지 해미가 한 말이 떠올랐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리지게 하는 것. 그건 어쩌면 나는 원래 나오지 말았어야 했을지도 모를 인간이었는데 아버지의 유전자를 옮겨 받아서 후세에 그것을 다시 옮겨주는 어떤 냄비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벤은 뭘 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포르셰를 몰고 다니며 좋은 집안에 태어나서 늘 유쾌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인간인지 알 수 없었고 집에 친구들을 초대해 와인파티를 한다. 일정 시간을 들여 좋은 곳에 위치한 Gym에서 운동을 해서 에너지를 억지로 소모했다.


 여자들이 싫어할 리 없는 종류의 인간이다. 벤이란 그런 인간인 것이다. 그렇게 타고 난 인간이다. 세상에는 그런 인간이 있다. 이미 그런 인간은 정해져 있다. 그렇게 정해져 있는 인간에게 세상의 어떤 틀은 그런 인간을 어쩌지 못한다.

   

 해미도 벤의 주위에 감도는 그런 분위기에 그만 끌리고 말았다. 밖에서 보면 옅은 물이지만 막상 발을 담그면 무릎까지 차올라 놀라게 되는 그런 몹쓸 개울물에 해미는 들어간 것이다.    

 

 큰 비닐하우스가 다 타는데 십 분도 걸리지 않는다. 벤은 대마초를 흡입하고 연기가 뇌를 건드리기도 전에 그런 말을 했다. ‘나'라고 하는 비닐하우스를 만드는데 이만큼의 시간이 걸렸어도 사라지는 건 한순간이다. 십 분 정도 만에 나는 사라질 수 있다. 범죄행위란 해보지 않는 이상 간단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는 없다.    


 나는 어릴 때 엄마의 옷을 아버지가 태우라고 해서 직접 태운 적이 있다. 나는 그 말을 벤에게 했다. 엄마의 옷을 태우는 꿈을 꾼다. 엄마의 옷은 불이 붙자마자 홀라당 타서 없어졌다. 엄마의 깊은 냄새가 배어있는 옷은 그을음으로 바뀌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버지와 나는 홀랑 타고 있는 옷을 지켜본다. 타 없어지는 것, 타고 남은 재도 사라지고 나면 그을음으로 동력 삼아 우리는 살아갈지도 모른다. 그것의 또 다른 이름은 추억일지도 모르고 미미하게 남은 그리움이라 부를지도 모른다.    


 해미를 만나고 벤을 알고 난 뒤부터 나는 고립이라는 것에 들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이대로 홀랑 타서 죽어버리는 것보다 이대로 두 사람의 주위에서 고립된 채 영원히 살아가는 것이 무섭다. 그것이 나에게는 무서운 일이다.     


 해미는 벤을 만나기 이전에는 나를 좋아했다. 나의 페니스에 콘돔을 끼워주던 해미의 손길을 나는 기억한다. 보일이의 밥을 챙겨주러 들어가면 집구석구석 박혀있는 해미의 냄새에 도취되어 나는 자위행위를 했다. 그 순간은 절실하게 해미를 떠올릴 수 있었다.    


 “한국에는 비닐하우스가 정말 많아요. 쓸모없고 지저분하고 눈에 거슬리는 비닐하우스는 몽땅 내가 태워주기를 바라고 있어요. 그리고 나는 그 불타는 비닐하우스를 보며 희열을 느끼는 거예요.” 벤은 말을 하면서 미소를 지었다. 난 다 알고 있어, 하는 표정의 미소.    


 자신의 손을 심장 가까이 대고 뼛속까지 울리는 베이스가 있다고 했다. 그건 뭘까. 그건 정말 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이다.


 태. 우. 지. 안. 고. 서. 는. 알. 수. 없. 다.


 “그건 형이 판단하는 거예요?”


 “나는 판단 같은 것은 하지 않아요. 그냥 받아들이는 거죠. 그것들이 태워지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거기에 옳고 그름은 없어. 자연의 도덕만 있지.”


 “자연의 도덕이요?”


 “자연의 도덕이란 동시 존재 같은 것이에요. 나는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는 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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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한 고속도로에 구멍이 뻥 뚫린 날 같은,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다. 전혀 크리스마스이브 같지 않지만 이브다. 도저히 올 것 같지 않던 시간도 어느 순간 보면 다가와 있다. 10년 전에는 지금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는데 어느새 이렇게 십 년이 흘러 이 자리에 있다. 크리스마스 이브라 여기저기서 웸의 라스트 크리스마스가 쩌렁쩌렁 울려 퍼져야 하겠지만 이번 겨울은 처음 경험하는 감염병의 도래로 인해 모두가 허덕이느라 '라스트 크리스마스'가 많이 울려 퍼지지 않는다. 


한때 '웸'인지 '왬'인지에 대해서 한창 뜨거운 논쟁이 있었다. 마룬 5의 아담 리바인인지 아담 르바인인지 아담 르빈인지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말이 있었다. 그래서 배캠의 배철수가 논쟁을 없애버리기도 했다. 대학교 때에는 자취방에 남아서 아이들과 함께 크리스마스에 집으로 가지 않고 모두 모여서 케이크 따위를 사놓고 파티를 즐기며 웸과 머라이어 캐리의 캐럴을 실컷 들었다. 그러다 술이 취하면 모두 국밥을 먹으러 갔지만. 

어딘가에 가지 못하니 크레마의 깊은 향이 가득한 커피를 마시면서 듣기에도 좋고 그냥 낮부터 와인을 마시면서 듣기에도 좋다. 라스트 크리스마스는 뮤직비디오 보는 재미가 있다. 한 편의 이야기로 되어 있어서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집중해서 보지 않았을 때는 뮤직비디오는 첫 장면과 끝 장면이 같은 기법을 사용했다. 영화로 치면 로자먼드 파이크가 나왔던 나를 찾아줘 와 비슷할까,라고 그동안 생각하고 있었는데 뮤직비디오를 다시 보니까 그렇지 않네.


첫 시작부터 신나고 어깨를 들썩이게 만들지만 지난 크리스마스의 나의 슬픔을 노래하는 내용이다. 노래 후렴구를 부를 땐 뮤직비디오는 현재 크리스마스가 아닌 지난 크리스마스로 간다. 지난 크리스마스에 주인공 조지 마이클은 사라(라고 하자)에게 마음을 고백했지만 거절당하고 만다. 여자 친구였고 서로 사랑한 줄 알았는데 그래서 크리스마스가 오기를 기다려 사랑을 고백했지만 그녀는 조지를 차 버리고 만다.


조지는 그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현재 옆에 여자 친구가 있음에도 눈은 계속 사라에게로 향하고 있다. 또 후렴구를 부를 때 다시 과거로 돌아가서 지난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포장해서 그 안에는 쪽지와 함께 사랑을 고백했지만 거절당하고 만다. 다시 돌아온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피곤해하는 친구들을 뒤로하고 조지는 사라에게, 영혼은 아직 당신에게 가 있다고 시선을 보낸다. 하지만 조지는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이 진정한 자신의 사랑이니 이제 다시는 자신을 가지고 놀지 못하게 될 거라고 사라에게 독음한다. 그렇지만 마음은 사라를 잊지 못하는, 상등신 같은 모습으로 무엇보다 주인공인 자신이 더 괴롭다.


뭐 이런 노래다. 뮤직비디오는 화면이 겹쳐지는 오버랩되는 부분이 많은데 과거와 현재의 오고 감을 그렇게 표현하지 않았나 싶다. 웸은 당시 노래 잘 부르는 조지 마이클보다 얼굴이 잘 생긴 엔드류 리즐리의 인기가 더 좋았다. 물론 여자들에게.


조지 마이클의 얼굴은 뭐랄까 김병지의 약간 살 붙은 얼굴 같다. 뮤직비디오에서 가사의 내용에 충실하려고 파티 중에도, 파티가 끝나고 조지는 계속을 술을 마시며 살벌한 눈빛 연기를 한다. 조지 마이클은 듀엣에서 솔로가 되면서 스타일도 바뀌고 정말 노래를 잘 불러서 사람들이 그의 진가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조지 마이클이 잠자리 선글라스를 쓰고 청바지를 입고 가죽재킷과 기타를 들고 노래를 부른 '페이스'는 정말 인기 대폭발이었다. 아주 멋진 모습이었다. 아마도 당시 엠티비에서는 이 버전이 끊임없이 나왔을 것이다. 음악감상실에서도 단골 신청곡이라 자주 보여줬다. 신승훈도 조지 마이클의 가죽재킷을 걸치고 많이 따라 불렀다.


런던 올림픽의 폐막식에서도 감미롭고 씩씩하게 노래를 불렀던 조지 마이클은 거짓말처럼 4년 전 크리스마스에 죽고 말았다. 장국영처럼 거짓말이지? 사람들은 그랬다. 정말 조지 마이클은 라스트 크리스마스가 되었다. 마치 티브이처럼 불만 없이 옆에 있다가 리모컨을 누르니 그대로 꼼짝없이 꺼져서 검은 화면이 되듯 그대로 사라지고 말았다. 조지 마이클은 이반이 되기까지는 그걸 숨기려고 힘들었고 이반이 된 이후에 좀 편해지려나 했지만 그렇게 별이 되었다. 그래도 조지 마이클은 라스트 크리스마스를 남겨 놓았다. 매년 겨울이 되면 라디오에서 울려 퍼지니까 사람들의 마음에 노래로 남아 불멸할 것이다. 그 노래를 들으며 따뜻한 곳에 앉아서 겨울 햇살을 느끼기 딱 좋은 날이다 오늘은.




https://youtu.be/E8gmARGvP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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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조깅을 하고 오는데 동네가 이렇게나 예쁘게 바뀌었다. 인공조명은 광합성은 없지만 사람들을 즐겁게 한다. 그에 비해 자연광은 살아있지만 피부와 눈에 좋지 않다. 거리는 비록 휑 했지만 본격적인 크리스마스 시즌인 것이다. 거리 사이로 스티비 원더와 안드라 데이의 캐럴이 흘렀다. 아아 이제 완연한 겨울, 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 겨울은 춥지만 뜨뜻한 계절인 것이다. 한 달 전에 내가 일하는 건물에도 트리가 설치되었다. 자주 쳐다보게 된다. 기묘하지만 트리의 반짝이는 불빛은 질리지 않는다. 트리의 전구보다 더 화려하고 멋있는 네온의 반짝이는 불빛은 그렇게 오랫동안 쳐다보게 되지 않는다. 트리 자체도 멋있다. 촌스럽지 않고 세련미가 철철 넘친다.



요즘도 초등학교 교실에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에는 각자 조금씩 들고 온 장식품으로 주렁주렁 촌스럽게 교실을 꾸몄다. 다른 반보다 더 멋있게 보이기 위한 미화부장의 역할이 무엇보다 빛을 발해야 한다. 보통 미화부장은 여자애가 하지만 어쩐지 내가 미화부장으로 뽑혀 여기저기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낑낑거리고 장식을 지휘했다. 보통 남자애들은 말을 듣지 않는다. 장식하는 것에 의미도, 의지도 없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는 건 나와 장식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아이들을 제외한 나머지의 여자애들이다. 창문 끝에서 끝까지 반짝이를 달고 나서 멀리서 보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다시 가서 좀 고치고. 트리를 보면 산타할아버지 인형이 너무 한 곳에 많이 붙어 있어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럼 다시 전부 떼서 다시 붙이고.


그렇게 하다 보면 금세 저녁이 되어 버린다. 겨울의 해는 빨리 떨어진다. 선생님은 깜짝 놀라며 어서 집으로 가라고 한다. 그전에 선생님에게 듣고 싶은 말이 있다. 그건 수고했다, 정말 잘했네, 같은 말이었다. 어쩌면 그 말 한마디를 들으려고 초등학교 때에는 그렇게 헤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근데 어느 날 어른이 되고 보니 '그래 수고했네, 오늘도 고생 많았어'라는 말을 잘 듣지도, 잘 하지도 않게 되었다. 초등학교에서 주렁주렁 크리스마스 장식의 기억이 있다면 '라떼는'이 된다. 초딩 때 들리던 스티비 원더의 노래들을 아직도 듣고 있다는 게 신기하기만 하다. 

https://youtu.be/MaA7B9cu4kU


이 캐럴은 광고에 나온 이후 한동안 겨울에 많이 울려 퍼졌다. 뮤직비디오를 보면 참 행복하게 보인다. 인간의 삶이 이렇게 거짓말처럼, 뮤직비디오처럼 행복하면 얼마나 좋을까. 아마도 뮤직비디오 속의 이야기가 행복하게 보이는 이유는 스티비 원더가 앞이 보이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스티비 원더는 시각장애를 겪고 있다. 사람들은 그가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안고 태어났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는 안타깝게도 출산 예정일보다 6주 일찍 태어났다. 뇌에서 눈으로 가는 혈액이 원활히 공급되지 않아서 그는 인큐베이터 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이었는지 당시 인큐베이터 기계의 고장인지 간호사의 실수인지 아기 스티비 원더가 들어가 있던 인큐베이터에 산소가 과다 공급이 된다. 때문에 스티비 원더는 망막의 기능을 잃어버리게 된다. 시력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었지만 결국 그렇게 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는 시력을 잃은 대신 노래를 얻었다고, 그 덕분에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열 살 때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고, 오르간, 베이스, 리코드 등 그가 완벽에 가깝게 연주하는 악기만도 스무 개가 넘는다고 한다.


아마도 지구에서 하모니카를 가장 잘 부르는 사람이 스티비 원더가 아닐까. 


스티비 원더 하면 많은 노래가 있지만 isn't she lovely가 있는데 싱글 버전과 앨범 버전이 있다. 앨범 버전에는 첫 시작에 아기 울음소리가 들린다. 이 노래는 잘 알겠지만 자신의 첫째 딸 '아이샤 모리스'에 대한 자신의 이야기다.


이 노래의 내용은 아이샤 모리스를 볼 수 없어서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내용이다. 이봐 내 딸 예뻐? 정말 작고 귀여운 거야? 나 닮진 않았지?(하지만 정말 빼닮았다) 하며 딸을 볼 수 없는 안타까움과 기쁨을 그대로 표현한 곡이다. 보이지 않아서 느낄 수밖에 없는 아빠의 마음이었다.


유튜브의 라이브 공연을 보면 그의 딸인 아이샤 모리스가 늘 따라다니며 백 보컬을 맡고 있다. 그래서 공연에서 이 노래가 나오는 영상을 보면 카메라가 아이샤를 비추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스티비는 7명인가? 자녀를 두고 있다. 아이샤의 동생들도 아빠! 나는! 나는! 하며 나의 노래도 만들어 달라고 할 법하다. 스티비 원더가 2009년인가 올림픽 경기장에서 콘서트를 한 적이 있었다. 내가 그때 앞자리에서 노래를 들었던 그 굉장한 감동은 새빨간 거짓말이고 헤헤. 그때 우리나라에서 콘서트 티켓이 최단 시간에 매진이 되었다. 말 그대로 순삭이었다. 공연장에는 일반인들 반, 우리나라 연예인과 최정상 가수들 반이었다. 김태우가 가장 열광했던 것으로 안다.


스티비의 원래 이름은 스티브 랜드 하드웨이 모리스다. 10살 때 길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는 스티비를 보고 한 무명가수가 픽업을 해서 당시 기획사에 데리고 가서 그곳의 사장에게 보여줬는데 그 사장이 스티비의 노래를 듣고 이건 불가사의다! 그랬다고 한다. 


그 사장의 말을 빌리면, 세계의 7대 불가사의가 있는데 이 아이는 8대 불가사의다. 그래서 불가사의? 궁금하다? 원더? 뭐 이렇게 파생되어 스티비 원더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즌쉬 럽 미 노래 시작 전 아기 울음소리는 모리스의 울음소리는 아니라고 한다. 어떻든 그래서 그런지 스티비 원더의 노래는 여기, 가슴을 뜨뜻하게 해 주는 것 같다. 모두가 뜨뜻한 크리스마스가 되길 바라며.


https://youtu.be/x9gXgiHSs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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