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소설 쓰고 앉아있네 (교관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6999160</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하루키 좋아하는 동네 삼촌</description><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Fri, 09 Oct 2026 14:56:17 +0900</lastBuildDate><image><title>교관</titl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myface/pt_7369991603238771.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36999160</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교관</description></image><item><author>교관</author><category>영화 이야기</category><title>옵세션</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62565</link><pubDate>Fri, 09 Oct 2026 13:3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62565</guid><description><![CDATA[무시무시하게 변해버린 니키의 모습보다 찐따 베어의 모습이 더 공포스럽다. 이런 찐따가 주변에 하나 있다면 결국 주위 사람들까지 병들어간다. 영화에서는 그 끝이 끔찍하다. 찐따 베어 때문에 친구들이 하나둘 죽고, 심지어 고양이까지 죽어서 샌드위치 속으로 들어간다.​거시적으로 보면 영화는 무섭게 변해버린 니키를 앞세워 공포를 만든다. 그런데 더 무서운 건 사랑에 빠진 찐따가 사랑을 원하는 방식이다. 자신만을 사랑하도록 만들어버리는 것. 니키가 친구들 앞에서 자기 머리를 깨버려도, 세라의 얼굴을 아작 내서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로 만들어도 찐따 베어 선생은 무서움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결국 찐따 베어는 니키의 삶도, 친구들의 삶도, 자신의 삶도 전부 끝내버린다.​찐따가 이렇게 무섭다. 정작 본인은 그걸 잘 모른다. 내가 찐따라서 잘 안다.​남녀의 사랑이 언제나 같은 크기, 같은 방향으로 흘러갈 수 없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사랑에 빠지는 순간 그런 상식은 별 소용이 없어진다. 내가 알고 있는 공식이나 법칙도 사랑 앞에서는 힘을 쓰지 못한다. 초반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불 속으로 뛰어드는 나방처럼 그냥 들어간다.​그러다 한 사람의 사랑이 식어버리면 문제가 생긴다. 사랑이 식은 사람에게는 끝난 관계지만, 남은 사람에게는 이제부터가 시작일 수도 있다. 그게 집착이 된다.​내가 아는 동생도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다. 남자친구에게 헤어지자고 했더니 남자가 집 앞에 차를 대놓고 3일씩 집에도 들어가지 않은 채 지켜보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무섭다고 했다.​두 사람이 사랑할 때 한 번 같이 만난 적이 있었다. 남자친구는 잘생겼고 서글서글했다. 사람도 참 좋아 보였다. 그런데 헤어지자는 말이 트리거가 된 모양이다. 집착이 심해졌고 결국 경찰까지 오갔다. 그 뒤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할 수는 없지만. 다만 이런 일이 생각보다 너무 많이 일어난다.​요즘 들어 자주 하는 생각이 있다. 사람을 잘 만나야 한다는 것.​관심이 간섭을 넘어 집착이 되는 순간, 당하는 사람만 힘든 게 아니다. 가족도 힘들고 주변 사람들도 같이 끌려 들어간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한 사람의 삶 전체를 옥죄는 일이 되어버린다.​[옵세션]을 보면서 영화 자체에 대한 생각도 조금 들었다.​요즘은 정통적인 영화 연출을 고집하는 영화보다 사람들의 간지러운 곳을 정확하게 긁어주는 콘텐츠가 훨씬 빠르게 반응을 얻는다. 영화는 돈이 많이 든다. 아주 짤막한 독립영화 하나를 만드는 데도 몇천만 원에서 1억 원이 넘게 들어가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고 돈을 많이 쓴 영화가 반드시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옵세션]을 보고 있으면 이 영화가 그런 변화를 꽤 영리하게 이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장면 하나하나가 마치 쇼츠처럼 도파민을 건드린다. 특히 베어가 말을 한마디 던졌을 때 니키의 얼굴에 나타나는 표정과 행동이 그렇다. 보는 사람의 숨을 조여온다.​니키는 감정을 시시때때로 바꾼다. 두려워했다가 관능적으로 변하고, 천진난만해졌다가 사랑스러워진다. 그러다 광적으로 돌변하고 무서워지고, 다시 행복해졌다가 슬퍼진다. 짧은 시간 안에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감정의 낯선 얼굴을 거의 다 꺼내놓는다.​그래서 이 영화에서 진짜 무서운 건 괴물이 아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사람을 어디까지 망가뜨릴 수 있는지, 그리고 그걸 본인은 얼마나 늦게 알아차리는지다.​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미지의 공포를 영화는 꽤 집요하게 건드린다. 진짜 무서운 건 어제까지 사랑했던 사람이 돌변한 오늘의 사람이라는 걸 제대로 보여준 [옵세션]이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1009/pimg_639271498332526077.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62565</link></image></item><item><author>교관</author><category>영화 이야기</category><title>분노의 인형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60618</link><pubDate>Thu, 08 Oct 2026 12:2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60618</guid><description><![CDATA[1987년에 나온 이 영화는 권선징악이 아주 정확하다. 아이들을 괴롭히는 나쁜 어른들이 인형들에게 무참히 공격당한다. 요즘 영화처럼 인형이 매끈하게 움직이지는 않지만, 그 어색함이 오히려 묘하게 무섭다. 인형들이 움직이고 사람을 공격하는 장면도 꽤 잔인하다. ​특히 마지막에 가장 악독했던 어른이 서서히 인형으로 변하는 장면은 놀랍다. 어떤 의미냐면 요즘에 새로 나온 폴더폰보다 카세트 테이프나 카세트 플레이어를 보며 신기해 하는 느낌과 비슷하다. 아무튼 나쁜 놈은 이렇게 벌을 받아야지.​요즘 영화처럼 선과 악의 경계가 흐릿하지도 않다. 온갖 악행을 저지른 빌런이 마지막에 살아남거나 법망을 빠져나가면서 찝찝하게 끝나는 일도 없다. 80년대 공포영화는 이런 점이 분명했다. 나쁜 사람은 벌을 받고, 아이들은 살아남는다. 코믹한 공포영화라면 이불 뒤집어쓰고 보기에도 딱 좋다.​그리고 이 영화에는 아주 섹시하고 악독한 빌런으로 번티 베일리가 나온다. 어디에 나왔냐면 아하의 ‘Take On Me’에 나왔던 그 여자다. 카페에서 만화책을 보던 여자가 만화 속으로 들어가 모턴 하켓을 구해오는 그 유명한 뮤직비디오. 지금 다시 봐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대단한 영상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용필의 맥콜 광고에도 비슷한 기법이 사용됐다.​영화의 내용은 단순하다. 폭풍이 몰아치는 날, 탐욕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노부부가 사는 저택에 들어간다. 그 집에는 노부부가 만든 인형들이 가득하다. 그런데 그 인형들이 살아 있다. 사람들은 인형들을 무서워하지만, 이상하게도 어린 주디만은 조금 무섭게 생긴 인형들을 순수하게 반긴다. 인형들도 주디를 좋아한다. 그래서 주디를 괴롭히는 새엄마와 아빠에게 아주 제대로 복수한다.​지금 보면 인형의 움직임이 조금 어색하다. 그런데 이 영화가 만들어진 데 2년이 걸렸다는 걸 생각하면 그 움직임도 달리 보인다. 당시에는 인형을 조금씩 움직여 촬영하는 특수효과 자체가 상당한 작업이었을 테니까. 특히 인형들의 얼굴이 움직이는 장면은 80년대 영화라는 걸 생각하면 꽤 놀랍다.​결국 이 영화에서 가장 볼 만한 건 살아 움직이는 인형들이다. 한 시간 남짓한 러닝타임도 마음에 든다. 짧고, 잔인하고, 웃기고, 마지막에는 나쁜 놈이 확실하게 벌을 받는다. 이런 공포영화도 가끔은 좋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1008/pimg_639270587992026205.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60618</link></image></item><item><author>교관</author><category>영화 이야기</category><title>딥 워터</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58860</link><pubDate>Wed, 07 Oct 2026 12:4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58860</guid><description><![CDATA[<br>이 영화는 7년 전에 나온 [크롤]처럼 재난에 재난이 겹치는 엄청난 불행 속에서 탈출하는 생존기다. [크롤]이 태풍과 악어였다면 이 영화는 비행기 사고와 상어다.​재난 영화이긴 한데 심각하게 볼 필요는 없다. 그냥 신나게 즐기는 가벼운 공포물에 가깝다. 비행기에 불이 나고 기내가 폭발하면서 구멍 난 곳으로 사람들이 빨려 나간다. 물건이 날아와 사람을 덮치고,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지고, 사람이 죽는다. 이 부분에서 도파민이 한 번 터진다.​중반을 넘어서면 이번에는 태평양 한가운데다. 물에 빠진 사람들 주변으로 상어가 나타난다. 비행기 안에서는 사고가 사람을 죽이고, 바다에서는 상어가 사람을 물어뜯는다. 여기서 두 번째 도파민이 팡팡 터진다. ​좁은 비행기 안과 끝도 없이 펼쳐진 바다. 공간은 정반대인데 둘 다 지옥이다.​비행기는 통계적으로 가장 안전한 교통수단이라고 하지만 불이 나는 순간 이야기가 달라진다. 바다도 마찬가지다. 멀리서 보면 아름답고 낭만적인데 상어가 나타나는 순간 지옥으로 변해 그냥 살아남아야 하는 장소가 된다. 인간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공간이 얼마나 쉽게 뒤집히는지를 보여주는 셈이다.​영화에는 중국인 배우들이 꽤 많이 나오고 비행기 목적지도 상하이다. 중국 시장을 의식한 흔적도 보인다.​감독은 [다이하드 2], [클리프행어], [딥 블루 씨]를 만든 레니 할린이다. 그래서인지 영화를 보는 재미는 확실하다. 사람들을 폐쇄된 공간에 몰아넣고 계속해서 위기를 만들어낸다. 레니 할린 영화에서 익숙하게 보던 방식이다.​[데스티네이션] 시리즈처럼 생각하면 편하다. 사고가 끝나면 또 다른 사고가 나오고, 한숨 돌릴 만하면 다시 일이 터진다. 긴장감의 깊이를 파고드는 영화라기보다는 놀이기구를 타듯 계속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쪽이다.​그것만으로는 조금 아쉬웠는지 애런 에크하트와 벤 킹슬리까지 데려왔다. 묵직한 연기를 하는 배우들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런 배우들의 무게감을 기대하기보다는 그냥 이 난장판에서 어떻게 살아남는지를 보는 게 맞다. 감독의 전작에서 느껴지던 묵직함까지 기대하면 실망할 수 있다.​대신 설정은 꽤 재미있다. 사고로 바다에 떨어진 비행기에서 겨우 빠져나왔더니 상어가 달려든다. 그렇다고 밖으로만 나갈 수도 없다. 가라앉고 있는 비행기 안에도 아직 사람들이 남아 있다. 밖으로 나가도 죽고, 안에 있어도 죽는다.​그리고 이런 영화에는 빌런이 꼭 한 놈씩 있다. [부산행]의 용석 같은 인간이다. 결국 비행기에 불이 난 것도 이 사람 때문인데 마지막까지 사람들을 괴롭힌다. 그런데 영화가 영리하게도 마지막에 권선징악을 하나 집어넣는다.​담배가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주는 장면이다. 끝까지 담배를 피우겠다고 불을 붙이다가 상어의 먹이가 되는 장면은 단연 압권이다.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1007/pimg_639269736708292087.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58860</link></image></item><item><author>교관</author><category>영화 이야기</category><title>경주기행</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57076</link><pubDate>Tue, 06 Oct 2026 12:0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57076</guid><description><![CDATA[.경주기행은 이름도 경주고 지명도 경주다. 미국 영화에서는 지명을 사람 이름으로 쓰는 경우가 흔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드물다. 경주라는 이름이 사람 이름으로도 꽤 잘 어울린다. 영화 제목부터 묘하게 재미있다. 얼핏 보면 경주여행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블랙코미디를 표방한 가족 복수극이다. 8년 전 수학여행을 갔던 막내딸 경주가 사이코패스에게 살해당한다. 시간이 흐른 뒤 엄마와 세 딸은 범인을 납치한다. 약물을 먹여 기절시킨 뒤 경주로 데려가 가족여행으로 가장하고, 그곳에서 죽인 뒤 알리바이를 만들려고 한다. 그런데 일이 계획대로 될 리가 없다. 사이코패스 살인마 백상현이 세 모녀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면서 영화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재미있다. 그런데 굉장히 재미있지는 않다. 이게 좀 아쉽다.​소재만 놓고 보면 더 재미있을 수 있는 영화다. 세 모녀는 전문적인 납치범도 살인범도 아니다. 평범하게 살아가던 사람들이 딸과 동생을 죽인 놈을 직접 죽이려고 나선 것이다. 그러니 계획에 구멍이 생기고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오히려 그 부분이 이 영화의 가장 재미있는 지점이 될 수 있었다.​누군가를 죽이는 일은 생각보다 복잡하다. 시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알리바이는 어떻게 만들 것인지, 경찰의 수사는 어떻게 피할 것인지 하나하나 신경 써야 한다. 법대를 졸업한 둘째가 이 일에 관여하는 것도 그래서 흥미롭다. 그런데 가족 사이의 갈등과 복수 계획이 맞물리면서 다음 장면을 기다리게 만드는 힘이 조금 부족하다. 잘만 끌고 갔다면 세 모녀가 서로를 믿지 못하게 되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긴장감이 되었을 텐데.​반대로 복수극의 힘이 조금 빠진 뒤에는 백상현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스릴러처럼 밀어붙여도 괜찮았을 것 같다. 문제는 그가 정말 무서운 살인자라는 느낌이 생각만큼 강하지 않다는 것이다.​'추격자'의 하정우나 '악마를 보았다'의 최민식처럼 등장만 해도 불안해지는 종류의 악인처럼 보이지 않는다. 후반부에 셋째와 엄마에게 폭력을 행사하면서 본색을 드러내기는 한다. 하지만 영화 속 뉴스에 도배될 만큼 무시무시한 범죄자라는 설정에 비하면 폭력성이 충분히 느껴지지는 않는다.​그래서 영화가 밋밋하게 느껴진다. 재미가 없는 건 아니다. 볼 만하다. 다만 ‘이 영화는 꼭 봐야 한다’는 데까지는 가지 않는다.​더 아쉬운 것은 이 시나리오가 2021년 영화진흥위원회 공모전에서 3등을 했다는 점이다. 막내딸을 죽인 범인을 납치한 엄마와 세 딸이 가족여행을 가장해 경주로 복수여행을 떠난다는 한 줄만으로도 상당히 흥미롭다. 영화가 되려면 그 여행길에 사건이 하나씩 터지고, 그것들이 서로 얽히면서 처음의 복수 계획이 엉망이 되어야 한다. 영화에는 이미 8년이라는 시간이 있다. 8년이면 복수를 준비하기에 충분히 긴 시간이다.​그 긴 시간 동안 네 모녀가 무엇을 준비했고, 무엇을 숨겼고, 무엇 때문에 서로 갈라지는지를 조금 더 깊게 파고들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복수를 하러 가는 길에서 가족이 오히려 무너지는 과정도 더 극적으로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 배고픔 같은 아주 사소한 문제와 예상하지 못한 사고가 계속 끼어들었다면 영화의 블랙코미디도 훨씬 살아났을 것 같다.​그럼에도 영화가 좋았던 건 무거운 소재를 주인공들이 무겁게만 끌고 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딸을 죽인 사람을 죽인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뒤에 해결해야 할 일이 더 많이 남는다.​가족이라는 것도 그렇다. 내 몸에서 떼어낸 것처럼 지켜주고 싶은 존재인 동시에, 한편으로는 돌아서서 신경 쓰지 않고 살고 싶은 존재이기도 하다. 가까워서 더 잔인하고, 가까워서 쉽게 놓을 수도 없다.​경주기행은 경주로 가는 여행이면서 경주에게 마지막 여행을 보내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옥실은 8년 동안 붙잡고 있던 경주를 마지막에 그렇게 놓아준다. 그 장면은 뭉클했다. 옥실의 삶은 세 딸과 달리 8년 전에 멈춰있었으니까. ​재미가 없어서 아쉬운 영화가 아니다. 재미가 있어서 더 아쉬운 영화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1006/pimg_639268850831016219.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57076</link></image></item><item><author>교관</author><category>영화 이야기</category><title>사카모토 데이즈</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55311</link><pubDate>Mon, 05 Oct 2026 12:4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55311</guid><description><![CDATA[<br>이게 영화로 나오다니, 하고 생각했는데 은혼도 있고 시티헌터도 있고 진격의 거인까지 실사화된 마당에 이제 와서 이상할 것도 없다. 일본은 정말 만화라면 일단 실사영화로 만들어 보는 것 같다.​우리나라 액션 그래픽이 마녀 같은 느낌이라면 일본은 시티헌터 같은 느낌이 강하다. 만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액션과 과장된 움직임을 그대로 가져오는 쪽이다. 사카모토 데이즈도 그렇다. 말도 안 되는 만화를 영화로 옮기다 보니 말도 안 되는 그래픽이 화면을 계속 뒤덮는다.​사카모토 데이즈는 애니메이션으로 꽤 재미있게 봤다. 전설적인 킬러 사카모토가 어느 날 편의점에 들렀다가 한눈에 반한 여자에게 고백하고 결혼한다. 그리고 킬러 생활을 그만둔다. 이후 행복하게 딸과 함께 편의점을 운영하며 살아간다. 왕년의 날렵한 킬러는 어디 가고 엄청나게 푸짐해진 아저씨가 되어 있다.​그런데 킬러들이 사카모토를 죽이러 찾아오면서 이야기가 달라진다. 몸은 예전 같지 않은데 실력은 그대로다. 초능력자가 나오고 총알을 이리저리 피하고 방탄 안경에 무술에 총질까지 나온다. 뭐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세계다.​사카모토 역은 메구로 렌이 맡았고 일본에서 잘나가는 젊은 배우들이 줄줄이 등장한다. 은혼이나 진격의 거인도 그랬다. 일본에서 이름 있는 배우들을 잔뜩 데려다가 만화 속 인물을 연기하게 한다. 배우들을 보는 재미는 있는데, 그것과 영화가 재미있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사카모토가 지키려는 건 가족이다. 아내와 한 약속도 있다. 이제 다시는 사람을 죽이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그래서 아무리 자신을 죽이려는 킬러들이 달려들어도 예전처럼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원작의 설정을 그대로 가져왔으니 액션이 벌어지는 방식도 원작과 크게 다르지 않다.​이 영화는 액션영화라기보다 코미디에 가깝다. 피식 웃게 만드는 장면이 계속 나온다. 사카모토를 죽이러 온 킬러와 사카모토, 그리고 능력자 신을 나란히 앉혀 놓고 아내가 훈계하는 식의 장면이 많다. ​이러나 저러나 만화에서는 재미있었을 법한 장면인데 사람이 실제로 연기하고 CG를 입히니 묘하게 어색하다.그래서 어떠냐고 묻는다면 재미가 없다. 영화로서는 실패에 가깝다고 생각한다.​일본은 만화를 실사화하는 데 상당히 적극적이다. 그런데 문제는 원작을 얼마나 똑같이 옮기느냐가 아니라 영화로 옮겼을 때 무엇이 달라져야 하는가에 있는 것 같다. 우리나라 웹툰 실사화 작품들을 보면 원작의 설정이나 캐릭터를 가져오면서도 실사영화에 맞게 이야기를 바꾸는 경우가 있다. 원작을 그대로 복사하는 것과 원작을 영화로 만드는 것은 다른 일이다.​사카모토 데이즈는 애니메이션으로 보면 만화적인 과장이 재미가 된다. 그런데 그 과장을 실제 배우와 실제 공간에 그대로 갖다 놓으면 재미가 아니라 어색함이 될 때가 있다. 이 영화가 딱 그렇다.​그럼에도 일본은 계속 실사화를 할 것이다. 사카모토 데이즈도 이 한 편으로 끝날 것 같지는 않다. 원작이 있으니 다음 이야기도 만들 수 있고, 등장인물도 많다. 다만 다음에는 원작을 그대로 옮기는 것보다 영화가 되는 방법을 먼저 생각했으면 좋겠지만.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1005/pimg_639268011580962123.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55311</link></image></item><item><author>교관</author><category>바닷가에서</category><title>완벽한 초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53644</link><pubDate>Sun, 04 Oct 2026 12:0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53644</guid><description><![CDATA[스레드에 14년 동안 붕가리스로 살아온 아내가 자신의 사연을 올렸다. 결혼 생활의 행복을 상식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변수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내가 행복하다고 생각해도 아내나 남편은 전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가족들이 행복하다면 나 정도의 불행은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관계라는 건 눈에 보이지 않는 곰팡이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조금씩 영역을 넓힌다. 그러다 어느 날 서로에게 커다란 상처를 남긴다.​사연을 올린 아내는 남편과 잠자리를 가지려고 할 때마다 컨디션이 안 좋다는 핑계, 아이들 핑계, 씻지 않았다는 핑계, 오늘은 운이 안 좋다는 핑계까지 들으며 14년을 살았다고 한다.​이 영화도 아찔한 관계를 다룬 블랙코미디다. 리메이크작이고 우리나라에서는 하정우와 이하늬 주연의 [윗집 사람들]로 다시 만들어졌다.​등장인물은 달랑 네 명이다. 그런데 이 네 명이 아주 탄탄하다. 코미디 연기의 천재 세스 로건, 이번에는 감독까지 맡은 올리비아 와일드, 페넬로페 크루즈, 에드워드 노튼.​이사 온 부부를 집으로 초대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특별히 와일드한 액션이 벌어지는 것도 아니고 엄청난 사건이 터지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조마조마하다. 다른 부부의 아내와 남편의 품에 안기기까지 두 사람이 살아온 결혼생활이 무너져가는 과정이 보이기 때문이다.​겉으로 보면 조와 엔젤라는 너무 다정하고 행복한 부부다. 하지만 이미 1년이 넘도록 성관계를 하지 않았다. 부부 사이에 성관계만 없고 다른 모든 것이 행복하다면 괜찮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을 그렇게 간단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진 일은 단순히 육체적인 문제만은 아니다.​조는 피아노 연주가다. 자신의 실패가 점점 자신과 가족의 삶을 조여오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실패가 쌓일수록 그는 움츠러들고, 그 좌절감은 결국 부부관계에도 금이 가게 만든다. 엔젤라 역시 그런 남편을 지켜보는 일이 힘겹다.​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는 영화 같은 장면이었다. 데이트 상대가 엔젤라를 집까지 바래다줬지만 엔젤라는 곧바로 조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던 퍼브까지 뛰어간다. 조가 너무 보고 싶어서였다. 조는 그때를 떠올리며 그렇게 땀을 많이 흘리는 여자는 처음 봤다고 말한다.​과거로 돌아가면 두 사람은 열렬히 사랑했다. 매일 서로를 안고 뒹굴던 사이였다. 그런데 눈을 뜨고 보니 현실에는 갈등만 남았다.​과연 두 사람은 어떻게 될까.​이야기의 큰 줄기는 원작이나 우리나라 리메이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멀리서 동경하던 야한 모습을 실제로 마주하게 되면 오히려 낯설고 힘겨워질 때가 있다. 익숙함은 편안하지만 어느 순간 권태가 되기도 한다.​대사만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데도 도발과 자극이 꽤 세다. 그래서 보는 내내 묘하게 긴장하게 된다. 블랙코미디답게 웃기면서도 그 웃음 뒤에 씁쓸한 맛이 남는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1004/pimg_639267124167589551.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53644</link></image></item><item><author>교관</author><category>바닷가에서</category><title>그 시절, 가을운동회</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52075</link><pubDate>Sat, 03 Oct 2026 11:2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52075</guid><description><![CDATA[라디오에서 가을 운동회에 관한 이야기가 흘러나온다.​국민학교 시절 시월은 가을 운동회의 달이었다. 운동회 날이면 학교 앞에 병아리 아저씨, 잉어 아저씨, 솜사탕 아저씨가 진을 치고 아이들을 유혹했고, 운동장 하늘에는 만국기가 걸렸다. 지금 생각하면 왜 만국기를 걸었는지 모르겠다. 어느 나라를 기념하는 것도 아니었고, 우리가 특별히 국제적인 행사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형형색색의 만국기를 보면 알았다. 아, 오늘 운동회구나.​아침에 집을 나서면 가을 햇살이 체육복 위에 내려앉았다. 하얀 체육복이 유난히 반짝거렸다. 이상하게도 그 시절 가을 운동회 날에는 늘 날씨가 좋았다. 요즘처럼 덥지도 않고, 비가 올 것처럼 흐리지도 않았다. 딱 운동회 하기 좋은 날이었다.​줄다리기, 박 터뜨리기, 장애물 달리기, 기마전.​운동회의 꽃은 역시 계주였다.​점심시간이 되면 엄마가 김밥이나 찬합에 도시락을 싸서 운동장으로 왔다. 돗자리를 깔고 가족끼리 둘러앉아 밥을 먹었다. 가족이 많은 집은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전부 나왔다. 운동회는 학교만의 행사가 아니었다. 학교가 있는 동네 전체가 하루 동안 들썩이는 축제였다.​점심시간이 끝나면 매스게임이 시작됐다. 매스게임을 하는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보다 유난히 새까맸다. 여름 내내 남아서 연습했기 때문이다. 한여름 운동장에서 매일 연습한 아이들의 얼굴에는 가을이 와도 여름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나는 이상하게도 육 년 전부 청군이었다.​한 번쯤은 백군이 되고 싶었다. 체육복도 하얗고 운동화도 하얀데 모자까지 하얀색이면 얼마나 예쁠까. 어린 마음에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런데 육 학년이 되어서도 나는 청군이었다. 내게 백군은 끝내 오지 않았다.​운동회에는 별일도 많았다.​손바닥만 한 모래주머니를 힘껏 던졌다가 엉뚱하게 날아가 얼굴에 맞고 우는 아이도 있었다. 부모님과 함께 달리는 순서에서는 자식 체면을 살려주겠다고 마음만 앞선 엄마 아빠들이 넘어졌다. 나이를 잊은 사람들처럼 달리다가 운동장에 그대로 나뒹굴었다. 아이들은 웃었고, 부모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일어났다.​좋아하던 아이가 청군과 백군으로 갈리면 그것도 일이었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던 사이인데 그날만큼은 묘하게 경쟁심이 생겼다. 청군이 이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아이가 백군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운동회가 끝나면 먼지가 잔뜩 묻은 체육복을 벗고, 씻은 다음 방바닥에 엎드렸다. 엄마가 싸준 김밥이 남아 있으면 그걸 마저 먹으면서 만화를 봤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잠이 들었다.​그때는 운동회가 그렇게 시끄러운 행사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운동장은 원래 시끄러운 곳이었고, 아이들은 원래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니는 존재였다.​요즘은 시끄러워서 민원이 들어와 축소되거나 운동회를 하지 않는 초등학교가 많다고 하니 예전 가을 운동회가 그립기만 하네.​가까운 미래에 가을 운동회가 다시 돌아온다면 어떨까.​그때는 바쁜 부모들 대신 휴머노이드가 운동장에 나와 아이를 응원할지도 모른다. 다른 집 휴머노이드가 우리 집 것보다 더 다정하고, 더 재미있고, 더 좋은 말을 해줄 수도 있다.​그러다 주인공 아이가 자기 부모보다 다른 집 휴먼로이드를 더 좋아하게 되고, 그걸 본 다른 아이가 화가 난다.​그리고 누르지 말아야 할 버튼을 누른다.​인간말살 프로젝트가 실행되는데.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1003/pimg_639266232035020286.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52075</link></image></item><item><author>교관</author><category>영화 이야기</category><title>사냥의 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50511</link><pubDate>Fri, 02 Oct 2026 13:0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50511</guid><description><![CDATA[<br>이 영화는 러시아에서 만든 공포 액션 영화다. 등장인물이라고 해봐야 네 명이 전부다.​아내가 있는 젊은 부자 막스가 애인 리나를 별장으로 데려간다. 둘이 한창 즐기고 있는데 사냥을 하러 온 막스의 동생과 또 다른 남자가 합류한다. 그러면서 리나를 바라보는 남자들의 눈빛이 조금씩 달라진다. 결국 여자를 건드리기 시작하고, 일이 꼬이면서 리나를 죽이려고 한다.​그런데 리나는 죽지 않는다.​산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은 리나는 자신을 죽이려던 남자들을 하나씩 상대한다. 결국 남자 셋은 차례로 저세상으로 간다. 이야기는 이게 전부라고 해도 될 만큼 단순하다.​문제는 이 간단한 이야기를 한 시간이 훨씬 넘도록 끌고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는 시작부터 리나와 막스의 정사 장면을 꽤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재미있는 건 이 두 배우가 영화 [서큐버스]에도 함께 나온다는 점이다. 그 영화에서도 비슷하게 거의 벗다시피 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공포보다 다른 쪽에 신경을 쓰게 만들더니, 여기서도 시작부터 그러하다.​두 남자가 별장에 들어오고 리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야릇해진다. 그리고 결국 강제로 겁탈하는 장면까지 나온다. 이후부터는 분위기가 완전히 바뀐다. 산속에서 살아남은 리나가 남자 셋을 하나씩 상대하고, 영화는 그 과정에서 고어한 장면들을 꽤 노골적으로 보여준다.​저예산 영화에다 내용도 어디선가 한 번쯤 본 것 같은 이야기다. 그런데 이상하게 리나를 응원하게 된다. 처음에는 그냥 또 이런 영화인가 싶다가도 어느 순간부터 남자들이 빨리 당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끝까지 보게 된다.​스릴러나 공포 액션 영화가 저예산으로 만들어졌다면 아무래도 재미의 한계가 생긴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극한의 공포를 느끼는 인물의 심리 변화를 오래 붙잡고 가거나, 수중 촬영처럼 배우들이 몸을 아끼지 않은 장면을 집어넣었다. 제한된 공간과 네 명의 배우만으로 영화를 끌고 가려는 감독의 고생도 어느 정도 느껴진다.​감독의 첫 장편영화라고 한다. 별장과 산이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 인간의 폭력성을 ‘사냥’이라는 방식으로 풀어내려 한 영화다. 거창하게 말하면 그렇고, 그냥 보고 있으면 한 여자가 자신을 죽이려던 남자들을 차례로 잡아 죽이는 이야기다.​아무튼 여자는 자나 깨나 남자를 조심해야 한다. 남자도 남자를 조심하고.​요즘은 정말 좋은 사람 하나 만나는 게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악독한 인간들도 처음부터 얼굴에 ‘나는 나쁜 사람입니다’라고 쓰고 다니지는 않는다. 지금 사랑하는 사람의 감정이 죽을 때까지 그대로 간다는 보장도 없다.​부부 사이에서도, 친구 사이에서도,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도 믿기 어려운 사건들이 벌어진다. 결국 사람을 잘 만나야 한다는 아주 뻔한 이야기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그게 제일 어렵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1002/pimg_639265429800948772.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50511</link></image></item><item><author>교관</author><category>영화 이야기</category><title>다운타임</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48717</link><pubDate>Thu, 01 Oct 2026 12:3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48717</guid><description><![CDATA[<br>이런 얼굴로 살아가는 나의 고통을 의사인 네가 알 수 없다. 그러니 위험하게 보이든 말든 성형해 달라는 말입니다. 이런 얼굴로 사람들 앞에 나설 바엔 죽어버리는 게 더 나아요.​이 시리즈는 지금의 사회를 꽤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TV에 나오는 연예인들은 물론이고 일반인들까지 얼굴에 손을 대지 않은 사람을 찾기가 어려운 세상이다. 성형은 한 번 시작하면 끝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저기 또 손을 대게 되고, 그러다 위험한 수술을 감수하는 사람도 생긴다. 법정 싸움으로 번지기도 하고 실제로 환자가 죽는 경우도 있다.​이 시리즈는 대학병원에서 일하던 의사가 어떤 일에 휘말려 유명 성형외과로 옮기면서 시작된다.​얼굴이나 가슴을 수술하는 장면이 꽤 여과 없이 나온다. 수술 전과 수술 후의 얼굴도 그대로 보여준다. 처음에는 이런 장면을 어떻게 촬영했을까 싶었다. 그런데 보다 보면 수술 자체보다 그 수술을 받기 전과 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배우들이 더 대단해 보인다. 실제 주인공인 마츠오카 마유나 나카 리아사보다 매회 등장하는 성형 환자 역할의 배우들에게 자꾸 눈이 간다. 이 시리즈는 수술 후 수술 전보다 훨씬 예뻐진 얼굴이 나오지만 교묘하게 수술한 얼굴이 대체로 전부 엇비슷하게 보인다. 할리우드 성형한 배우들이 비슷한 얼굴처럼. ​주인공은 한때 천재 응급 외과 의사였다. 그런데 이런저런 일을 겪고 유명 성형외과로 옮긴 뒤에는 그 천재적인 외과 의사라는 설정이 별로 쓸모가 없다. 환자는 수술을 받을 수 없는 상태인데 계속 성형을 해달라고 한다. 의사 입장에서는 무리하게 수술해서 환자를 위험에 빠뜨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환자가 느끼는 고통을 단순히 허영이라고 치부할 수도 없다.​무리한 수술로 고통받는 것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로 살아가는 고통이 더 큰 환자를 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1화에서 인기 인플루언서가 몸이 아파 쓰러져 응급환자로 실려 온다. 가슴의 실리콘 보형물을 빼야 살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수술을 앞두고 절대로 가슴 보형물을 빼지 말아 달라고 한다.​결국 보형물을 빼고 수술해서 목숨은 건진다. 그런데 몸이 회복된 뒤 환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린다. 납작해진 가슴으로 팬들 앞에 설 수 없다는 이유였다.​이런 이야기를 보다 보면 성형이라는 게 단순히 예뻐지고 싶다는 욕망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본인이 보는 자기 얼굴과 다른 사람들이 보는 얼굴 사이에는 꽤 큰 간격이 있을 수도 있고, 그 간격 때문에 실제로 삶을 견디기 어려워하는 사람도 있다.​총 8화인데 나는 5화까지 봤다.​‘신의 손’이라고 불리는 성형외과 원장으로 나카 리이사가 나온다. 돈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사람이고, 상상하기 어려운 수술을 요구하는 환자들이 계속 찾아온다. 그런데 이 원장은 환자에게 “할 수 없다”는 말을 거의 하지 않는다. 병원에 있는 의사들도 마찬가지다.​그러다 회장인 아버지와 조금씩 균열이 생기면서 원장의 인간적인 모습이 드러난다. 마츠오카 마유 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4화까지는 정말 휘몰아친다. 환자가 계속 나오고, 수술이 이어지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 궁금해서 다음 화를 바로 누르게 된다. 그런데 5화부터는 갈등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수술 장면에서 오는 시각적인 재미는 조금 줄어든다. 지금까지는 성형외과라는 공간 자체가 굉장히 자극적이었는데, 이제는 인물들 사이의 이야기가 앞으로 나오기 시작한다.​그리고 이 시리즈에서도 주인공은 일본에 있는 한국 술집에서 술을 마신다. 파전이나 잡채 같은 걸 파는 곳이다. 일본 드라마나 영화에서 한국 술집이 나오는 걸 보면 괜히 눈이 간다.​또 술집에서 담배를 피우는 장면이 꽤 자주 나온다. 일본은 아직 이런 식으로 실내에서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곳이 있나 보다. 술 마시면서 담배 피우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나온다.​기무타쿠의 딸도 갑질하는 환자로 등장한다.​일본 드라마 재미없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던데, 적어도 이 시리즈는 성형이라는 소재 하나만 가지고도 꽤 세게 밀어붙인다.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1001/pimg_639264546304666340.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48717</link></image></item><item><author>교관</author><category>영화 이야기</category><title>괴물: 리지 보든 이야기</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45579</link><pubDate>Wed, 30 Sep 2026 12:5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45579</guid><description><![CDATA[리지 보든 이야기는 처음부터 사람을 꽤 당황하게 만든다. 앞서 봤던 [괴물 에드 게인 이야기]처럼 잔인한데, 이번에는 그 잔인함이 조금 더 노골적이고 시원하다. 말 그대로 사람을 자르고, 도끼로 찍는다. 1화 시작부터 허걱 하게 만드는 장면이 나오니 심장 단단히 붙잡고 보는 게 좋다.​리지 보든을 다룬 이야기는 이 괴물 시리즈에서 [다머 이야기], [메넨데스 이야기]를 지나 에드 게인으로 이어지는 계보 안에 놓여 있다.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출연한 [리지]가 있다. 여기서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리지 보든이 아니라 브리짓이라는 인물로 나온다. 리지의 곁에서 정신적으로 버팀목이 되어주고, 결국 리지가 도끼를 들 수 있게 만드는 인물이다.​이번 시리즈 속에는 세 가지 이야기가 있다. 중심에는 당연히 리지 보든이 있고, 브리짓이 들려주는 마녀 이야기가 하나 끼어든다. 그리고 100년 뒤 리지 보든을 우상처럼 떠받드는 여성 살인마 에일린의 이야기가 또 하나 들어간다. 에일린을 연기한 사라 폴슨은 정말 신들린 것처럼 연기한다. 등장하는 순간부터 인물 자체가 좀 불안하다. 눈빛이며 표정이며, 저 사람이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는 느낌을 제대로 만들어낸다.​리지의 집안은 처음부터 정상적인 가족과는 거리가 멀다. 새엄마는 아버지의 재산을 노리고 있고 삼촌 역시 마찬가지다. 새엄마는 리지를 두 살 때부터 키웠지만, 끊임없이 무시하고 업신여긴다. 아버지라고 다르지도 않다. 리지에게는 집 안에 자기 편이 없다.​그나마 리지가 숨을 돌릴 수 있는 곳은 마당 한쪽의 비둘기 사육장이다. 꽃과 자연을 좋아하는 리지에게 비둘기는 거의 유일한 친구다. ​아버지는 하녀들의 몸을 탐하기 바쁘고, 새엄마는 남편에게서 돈을 받아내 이혼하고 떠날 생각만 한다. 하녀가 만든 음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얼굴에 뜨거운 음식을 끼얹어버리는 장면에서는 이 집안 사람들이 얼마나 뒤틀려 있는지 단번에 드러난다. 그런 집에 새로운 가정부 브리짓이 들어온다.​그리고 리지와 브리짓이 만난다.​둘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결정적인 장면이 비둘기다. 시끄럽게 구구거린다는 이유로 새엄마가 비둘기의 목을 따버리는 장면을 리지가 보게 된다. 리지에게 비둘기는 그냥 새가 아니다. 아무도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 집에서 유일하게 마음을 붙일 수 있었던 존재다. 그걸 눈앞에서 잃는 순간, 안에 눌러놓았던 무언가가 터져버린다.​그래서 이 작품의 살인은 단순히 누군가를 죽이는 장면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계속 참고, 무시당하고, 짓밟히던 사람이 어느 순간 선을 넘어버리는 과정이 꽤 노골적으로 펼쳐진다. 물론 그렇다고 살인이 정당화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리지가 왜 그렇게까지 가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방식은 상당히 직접적이다.​리지 보든을 연기한 엘라 비티도 재미있다. 처음에는 어딘가 어수룩하고 못나 보이는 얼굴인데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얼굴이 달라진다. 순진한 사람처럼 보이다가 어느 순간 섬뜩한 표정이 나오고, 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얼굴로 돌아온다. 배우가 얼굴 하나로 리지의 변화를 꽤 잘 보여준다. 부모의 외모를 보면 도대체 외모 유전자가 어디로 갔나 싶을 정도인데, 리지 보든이라는 역할에는 그 얼굴이 오히려 딱 맞았다.​[괴물 에드 게인 이야기]에서 에드 게인을 연기했던 찰리 해냄은 여기서는 리지의 아버지로 나온다. 이 인간도 만만치 않다. 딸에게는 아버지답지 않고, 하녀들에게는 인간으로서의 선을 넘나들며 행동한다. 그러다 결국 딸에게 도끼를 맞는다.​보고 있으면 이 장면을 기다리게 된다.​무엇보다 이 시리즈는 살인을 질질 끌지 않는다. 도끼가 나오면 찍고, 잘라야 하면 자른다. 그런 점에서 상당히 직선적이다. 마지막에 법정에서 리지가 무죄를 받는 모습까지 보여주니, 실제 사건을 알고 보는 사람에게도 나름의 재미가 있다.​역사적으로 유명한 리지 보든 사건을 가져와 세 편의 이야기를 엮어놓은 방식도 괜찮고, 배우들의 연기도 전체적으로 좋다. 특히 리지의 변화와 에일린의 광기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불편하다.​앞서 본 [괴물 에드 게인 이야기]가 기괴함 쪽에 가까웠다면, 이번 리지 보든 이야기는 억눌린 사람이 끝내 도끼를 드는 순간까지 끌고 가는 재미가 있다.​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1화 시작하자마자 한 방 나오니 심장 딱 부여잡고 보자.]]></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930/pimg_639263695490999252.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45579</link></image></item><item><author>교관</author><category>영화 이야기</category><title>가능한 사랑에서 말하는 불평등</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43127</link><pubDate>Tue, 29 Sep 2026 12:0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43127</guid><description><![CDATA[‘가능한 사랑’에서 조여정이 해고 노동자, 해직 부부를 인터뷰하려든다. 금수저가 가난한 부부를 인터뷰하려고 한다. 진정성을 가지고 가난한 자에게 공감하며, 그들의 곁에 바짝 붙어 인터뷰를 하고 싶다. 그건 그저 메소드 일 뿐이야. ​격차가 나는 사람은 이미 날 때부터 각자 그렇게 태어난다. 그 격차는 생각보다 쉽게 좁혀지지 않는다.​최광희 평론가가 이 영화를 이창동 감독의 전작 ‘버닝’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나는 ‘버닝’을 정말 좋아해서 서른 번쯤 봤다. 머리가 나빠서 지금은 대사 하나하나가 떠오르지는 않지만,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영화의 구석진 화면 하나까지 머릿속에 남아 있을 정도였다.​‘버닝’은 불평등에 관한 영화다. 유전자라는 건 대를 타고 내려온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있고, 종수는 그걸 온몸으로 보여준다.​‘가능한 사랑’에서 조여정 부부는 부자다. 조여정은 방송 일을 하지만 남편인 조인성은 무슨 일을 하는지는 잘 모른다. 부자의 특징이라고 해야 하나. 늘 어디선가 전화가 오고 뭔가를 확인한다. 그런데 정작 무슨 일을 하는지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돈은 많다.​‘파묘’에서도 비슷한 대사가 나온다. ‘버닝’의 벤도 그렇다. 딱히 뭘 하는지는 모르는데 세계 여행을 다니고, 헬스장에 가고, 포르셰를 몰고 다닌다. 벤에게는 그런 유전자가 있다.​부자는 격차가 나는 사람들과 어울리기 싫어하면서도 때로는 그들 곁에 간다. 부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내가 얼마나 가진 사람인지, 얼마나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인지. ​버닝의 원작자 하루키의 소설도 그렇다. 하루키의 대부분 소설에도 유전자에 대해서 많이 나온다.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이미 정해진 것은 어떤 노력을 한들 정해진 대로 흘러간다. 결과가 그렇다는 건 이미 그렇게 정해져 있다. ​불평등에 관한 영화를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든다. 부자인 연예인이 가난한 사람을 연기하면 그게 정말 와닿을까.​연기자니까 배역의 옷을 입고 가난한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그런데 연구하지 않은 연기는 금방 표가 난다. 가난이라는 건 옷 한 벌 갈아입는다고 되는 게 아니니까.​돈이 많은 연예인들도 일반인들과 섞이는 게 싫을지 모른다. 더 높은 곳에 있는 연예인들과 어울리고 싶을 것이다. 예능이나 뉴스, 기사에 보면 유난히 서로 친한 톱클래스 연예인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만의 세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불평등이라는 걸 제대로 들여다보게 만드는 매개는 결국 소설이나 영화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감독들은 영화 한 편을 만들기 위해 몇 년씩 준비한다. 칠순이 다 되어가는 이창동 감독도 이번 ‘가능한 사랑’을 위해 10년을 준비했다고 한다.​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연예인보다 더 불편한 부류가 있다.​정치인이다.​몇십억, 몇백억씩 가진 사람들이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통을 안다는 듯 정치를 한다. 그걸 보면 가끔 어이가 없다.​일반인과 가장 섞이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선거철만 되면 일반인들 틈으로 들어온다. 그러고는 자기 권력과 자산을 이야기한다. 자기 자랑을 하다가 나중에는 자식 자랑까지 한다.​몹시 이상한 일이,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고 있다. ​이미 권력을 가지고 있어서 자신의 한 마디가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는지 아는 사람이 자신을 욕하는 일반인들에 대해서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정말 잘못된 일이 벌어지고 있다. 같은 잣대를 들이대고 남이 하면 잘못, 자신이 하면 올바른 것으로 말하고 있다. 정말 불평등하다. ​불평등이라는 게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 가진 사람과 가지지 못한 사람이 얼마나 다른 세상에 사는 것인지, 그런 모순을 제대로 들춰내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영화에서라도 말이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929/pimg_639262801561504701.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43127</link></image></item><item><author>교관</author><category>영화 이야기</category><title>비광</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41058</link><pubDate>Mon, 28 Sep 2026 11:4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41058</guid><description><![CDATA[주조연들의 열연이 끝없이 펼쳐지는데도 그 열연이 화면 밖으로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느낌의 영화다. 스릴러인지 드라마인지 분명하지 않아서 보는 동안 흥미는 계속 생긴다. 그런데 정작 재미라는 것은 자꾸 빠져나간다. 궁금하게 만드는 데에는 성공했는데, 그 궁금증을 따라가고 나서 남는 것이 별로 없다.​비광이라는 제목 때문인지 색감에도 신경을 쓴 것 같다. 지금 시대의 이야기인데 화면은 마치 80년대 필름으로 찍은 것처럼 보인다. 선명하지 않고 조금은 바랜 듯한 색감. 불완전한 화면이다. 그런 불완전함이 오히려 영화에 없어서는 안 될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영화가 가진 분위기와는 잘 맞는다.​그런데 아무리 그럴듯한 미사여구를 갖다 붙여도 결국 영화가 재미있어야 하는데, 이 영화는 그 지점에서 너무 멀리 가버린다. 정말 ‘와, 이 정도야?’ 싶을 만큼 재미가 떨어진다.​더 아쉬운 것은 이 영화가 2021년에 촬영을 끝냈다는 점이다. 코로나와 배급 문제를 거치면서 무려 5년 뒤에야 관객을 만나게 됐다. 어렵게 세상에 나온 영화이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배우들이 한꺼번에 등장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관객 수가 10만에도 미치지 못했다.​김시아 배우는 감독과 인연이 깊다. 감독의 첫 장편 연출작이었던 [미쓰백]에서 김시아를 보고 이번 영화에도 출연시켰다. 그래서인지 [비광]에서도 [미쓰백]에서 보았던 인물의 서사를 풀어가는 방식이 느껴진다. 아이를 둘러싼 상황과 그 안에서 조금씩 드러나는 이야기를 따라가는 방식이 그렇다.​류승룡은 여기에서도 이전 작품들에서 보여줬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물불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마초적인 남자. 상처받고 감정을 제대로 다루지 못해 폭력을 휘두르다가도 옆에서 하지원이 한마디 하면 멈춘다. 배우가 못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 익숙해서 문제다. 새로운 인물을 보고 있다는 느낌보다 류승룡이 연기했던 여러 캐릭터가 겹쳐 보인다. 국밥 먹는 장면, 돌쇠처럼 숟가락을 쥔 모습, 머리에 깍두기 국물을 붓는 장면 같은 모습의 류승룡은 어딘가 다 비슷하다. ​하지원의 캐릭터도 [스캔들]의 손예진을 닮았다. 하지원에게도 그런 것을 만들어내려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어딘가 맞지 않는다. 너무 맞지 않는다.예쁘긴 하나 눈빛 하나 만으로도 농염을 표현하고 가만히 있어도 남자들이 빠져들 것 같은 퇴폐미는 손예진에게서 빠졌다. 하지원도 손예진과 비슷하다. 이 역할이 너무 낯설게만 느껴진다.​결국 연기력으로 그 빈틈을 메우려고 하다 보니 하지원이 보여주려 했던 새로운 얼굴이 오히려 너무 멀리 가버린 느낌이다. 캐릭터가 배우를 끌고 가는 게 아니라 배우가 캐릭터를 붙잡고 끌고 가는 모습처럼 보인다.​동주가 범인이라고 몰아붙이며 경찰들이 우르르 몰려와 거칠게 데리고 가는 장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작 여중생 한 명인데 경찰들이 그렇게까지 몰려들어야 했을까. 장면이 만들어내려는 긴장감보다 연출된 장면이라는 느낌이 먼저 들었다.​마지막에 범인이 밝혀지는 과정도 아쉽다. 그렇게 많은 시간을 들여 이야기를 끌고 왔는데 정작 중요한 사실은 너무 짧은 설명으로 정리해버린다. 지지고 볶고 했던 모든 과정이 뭐야? 이게? 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다.​결국 영화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황중구라는 사람이 왜 비광이 되었는지,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불완전한 가족의 모습과 불평등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데 그것들이 하나의 이야기로 묶이지 않는다.​서사는 서사대로 가고, 캐릭터는 캐릭터대로 움직이고, 음향은 음향대로 존재한다. 각각 따로 보면 공을 들인 흔적이 보이는데 그것들이 한 편의 영화 안에서 만나지 못한다. 영화라는 예술이 감독의 영역이라고 해도, 이 정도면 보는 사람이 어디에 마음을 두고 따라가야 할지 모르겠다.​그래서 오히려 이 영화를 보고 나니 무명배우들이 출연하는 잘 만든 독립영화들이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이름이 알려진 배우들이 많이 나온다고 해서 영화가 저절로 단단해지는 것은 아니다. 많은 배우와 많은 제작비, 오랜 시간의 기다림 끝에 나온 영화보다 아무도 이름을 모르는 배우들이 나와도 자신의 이야기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독립영화가 훨씬 오래 마음에 남을 때가 있다.​[비광]은 어렵게 세상에 나온 영화라는 사실 때문에 더 아쉽다. 좋은 배우들이 많이 나오고, 분명 공들인 흔적도 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한곳으로 모이지 않는다. 영화가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는 알겠는데, 그것이 관객에게 닿는 과정에서 자꾸 흩어진다. 결국 기억에 남는 것은 영화가 말하고 싶었던 것보다 ‘왜 이렇게까지 재미가 없을까’라는 생각이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928/pimg_639261923365322133.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41058</link></image></item><item><author>교관</author><category>영화 이야기</category><title>듣보인간의 생존신고</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39221</link><pubDate>Sun, 27 Sep 2026 13:1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39221</guid><description><![CDATA[이 영화의 핵심은 어쩌면 이승윤이 아니다. 처음에는 분명 이승윤을 찍고 싶어서 시작했는데, 끝까지 보고 나면 세 명의 감독이 자기 자신을 찍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하정은 영화 일을 하다 지쳐 한없이 밑으로 꺼져 있던 2018년, 우연히 만난 선배에게 “너 살아있었네?”라는 말을 듣는다. 그 한마디가 영화의 제목이 된다. [듣보인간의 생존신고]. 듣보라는 말이 우습기도 하지만 이상하게 이 영화와 잘 어울린다. 아직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사람들. 하고 싶은 것은 분명한데 어디에도 자리가 없는 사람들. 잘하고 싶은 마음만큼은 누구보다 큰 사람들.​하정은 그때 무명 가수였던 이승윤의 노래를 듣는다. 자신의 처지와 묘하게 겹치는 노래였다. 지쳐 있던 자신에게 누군가 건네는 선물처럼 느껴졌고, 그렇게 팬이 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을 한다.​'이 가수의 뮤직비디오를 내가 찍고 싶다.'​참 알 수 없는 자신감이다. 가진 것도 별로 없고, 이승윤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 그냥 해보기로 한다. 친구 두 명을 끌어들인다. 셋 다 이름을 알린 감독이 아니다. 말 그대로 듣보 감독들이다.​“이 가수와 한 번 작업해 보고 싶어.”​그 말 하나로 일이 시작된다.​일단 이승윤에게 연락을 한다. 답장이 올 리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답장이 온다. 그리고 실제로 만난다. 그때부터 세 사람은 정말 맨땅에 헤딩한다. 뮤직비디오를 만들기 위해 장소를 구하고, 사람을 만나고, 무대를 만들고, 의상까지 준비한다. 전통시장을 돌아다니고 여기저기 전화를 한다. 누군가는 안 된다고 하고, 누군가는 어렵다고 하고, 코로나라는 상황까지 앞을 막아선다.​그런데 이 영화에서 재미있는 건 그들이 안 된다는 말을 들을수록 더 열심히 한다는 것이다. ​보통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어려움을 극복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어려움이 해결되지 않는다. 계속 생긴다. 하나를 해결하면 또 다른 문제가 나타난다. 돈도, 인맥도, 유명세도 없는 사람들이 뭔가를 만들어내려고 하니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오히려 보는 입장에서는 그들의 행동이 더 절실하게 다가온다.​포기하면 편하다.그런데 포기하지 않는다.​처음에는 이승윤을 좋아해서 시작한 일인데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달라진다. 이승윤의 뮤직비디오를 찍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빠져든다. 이게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이다.​꿈이라는 게 원래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누군가를 보고 시작할 수 있다. 저 사람처럼 되고 싶어서, 저 사람과 일하고 싶어서, 저 사람의 무언가를 만들어주고 싶어서 시작한다. 그런데 한참 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 그 사람이 사라지고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었는지가 남는다.​이승윤 역시 당시에는 지금처럼 유명한 가수가 아니었다.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것 같아서 2020년까지만 활동하겠다는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그런데 2021년 [싱어게인]에서 우승하면서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다.​영화 속 이승윤은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이승윤보다 훨씬 풋풋하다. 아직 이름을 알리기 전의 얼굴이 있고, 그때의 노래가 영화 곳곳에 흐른다. 훗날 유명해진 사람의 과거를 보는 것이면서 동시에, 아직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사람들의 시간을 보는 영화이기도 하다.​무엇보다 세 명의 감독이 뮤직비디오를 완성해가는 과정을 보고 있으면 묘하게 마음이 움직인다. 거창한 성공담이 아니다. 대단한 사람들이 대단한 일을 해낸 이야기도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사람들이, 그래도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한번 해보겠다고 계속 움직이는 이야기다.​그래서 제목이 좋다.​듣보인간의 생존신고.​살아 있다고 말하는 데 꼭 유명해질 필요는 없다. 아직 아무도 몰라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면, 어쩌면 그것 자체가 생존신고일지도 모른다. 세 사람은 이승윤의 뮤직비디오를 만들면서 자신들이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그리고 영화를 보는 나는 그 생존신고를 가만히 보고 있다가 어느 순간 조금 위로받는다.​나도 아직 살아 있나 보다, 하는 식으로.]]></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927/pimg_639261119277142133.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39221</link></image></item><item><author>교관</author><category>영화 이야기</category><title>페이블 2</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37536</link><pubDate>Sat, 26 Sep 2026 12:3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37536</guid><description><![CDATA[정확한 제목은 [더 페이블: 죽이지 않는 암살자]다. 흔히 페이블 2라고 부른다. ​킬러가 직업인 남자가 잠시 일을 접고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세상 일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자신과 비슷한 인간들이 하나둘 나타나고, 결국 라이벌과 맞붙게 된다. B급 감성에 액션을 버무린 일본 영화다.​원작 만화가 워낙 인기가 많아서 영화로 만든다고 했을 때 걱정도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오카다 준이치가 아키라를 맡으면서 꽤 괜찮은 영화가 되었다. 액션은 액션대로 제대로 해내면서, 이상하게 힘을 빼고 있는 듯한 B급 코미디까지 아주 찰지게 살려낸다.​2019년에 1편이 나왔고 2021년에 2편이 나왔다.​아키라는 암살자 세계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로 통한다. 어느 날 보스에게 명령을 받는다. 아무도 죽이지 말 것. 그리고 평범한 사람처럼 살아갈 것. 이게 아키라에게는 꽤 어려운 일이다.​요코와 남매로 위장해 신분을 숨기고 살아가는데, 평범하게 살라는 명령을 받은 암살자가 평범한 인간처럼 행동하는 모습 자체가 웃긴다. 오카다 준이치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도 재미있고, 요코 역의 키무라 후미코도 만만치 않다. 둘이 붙어 있을 때 영화의 B급 냄새가 확 살아난다.​그런데 이 영화는 결국 액션을 봐야 한다.​오카다 준이치와 키무라 후미코의 액션이 생각보다 훨씬 좋다. 특히 오카다 준이치의 표정이 재미있다. 아침에 막 일어나서 아직 정신도 덜 깬 사람 같은 얼굴로 총을 쏘고 사람을 때려눕힌다.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총질을 하는 게 오히려 웃긴다.​2편에는 츠츠미 신이치, 사토 코이치 같은 배우들도 나온다. 배우 보는 재미도 있다.​가장 기억에 남는 액션은 건물 공사 현장에서 벌어지는 장면이다. 공사장의 구조물을 이용해 뛰고 구르고 매달리면서 싸우는데, 성룡식 액션에 존 윅의 살벌함을 조금 섞어놓은 느낌이다. 이 장면 하나만으로도 2편을 다시 볼 이유가 생긴다.​페이블 같은 일본식 B급 액션을 좋아한다면 몇 번씩 다시 보게 될 영화다. 이퀄라이저처럼 묵직하게 멋을 부리는 영화는 아닌데, 이상하게 한번 보고 나면 또 생각난다. 특히 아키라의 그 멍한 얼굴과 후미코의 귀여움과 섹시 그 어디쯤 얼굴이.]]></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926/pimg_639260226533932263.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37536</link></image></item><item><author>교관</author><category>영화 이야기</category><title>소영의 노력</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36054</link><pubDate>Fri, 25 Sep 2026 10:3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36054</guid><description><![CDATA[<br>소영이는 걷는 것 자체가 힘들다. 그래도 센터에서 타라고 하는 전동차는 죽어도 타기 싫다. 전동차를 타면 편하다. 하지만 편해지는 만큼 두 다리의 힘은 빠질 것이다. 지금보다 더 걷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소영이는 무용을 하고 싶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어떻게든 자신의 두 다리로 걷겠다고 한다. ​사람들이 쳐다본다. ​걷다가 다리가 꼬여 넘어지기도 한다. 창피하고 힘들다. 그래도 다시 일어나 걷는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벚꽃이 피고, 그 사이로 사람들이 조깅을 한다. 소영이는 그 모습을 바라본다. 나도 저렇게 한 번 뛰어 보고 싶다. 그게 소영이의 소원이다. 겨울을 지나 봄을 보내고 어느 따뜻한 날, 소영이는 동네 공원으로 나간다. ​그동안 갈고닦은 무용을 혼자 펼친다. 아무도 보지 않는다. 박수도 없다. 그래도 상관없다. 무용을 하는 동안만큼은 날 수 있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몸으로 표현할 수 있으니까. [소영의 노력]은 장애를 바라보는 흔한 방식에서 조금 벗어나 있다. ​장애를 극복하는 이야기로 몰아가지도 않고, 소영을 안타까운 사람으로 바라보게 만들지도 않는다. 다큐멘터리인데도 일반적인 다큐멘터리와는 조금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가 있다. 카메라의 시선 때문이다. 영화는 소영을 바라보는 카메라로 시작하지만 어느 순간 소영이 직접 카메라를 들고 자신의 모습을 찍는다. ​집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기록한다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움직이지 않는 몸, 마음대로 나오지 않는 말, 점점 굳어가는 몸을 자기 손으로 찍어야 한다. 무엇보다 자신의 모습을 꾸미지 않고 그대로 바라봐야 한다. 그럼에도 소영은 카메라를 든다.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아도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마음은 남아 있다. 그래서 소영에게 무용은 단순히 춤을 추는 일이 아니다.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방법에 가깝다. 소영 곁에는 희정 선생님이 있다. ​주인공 소영의 김소영도 대단하지만 옆에서 끝까지 소영을 잡아주는 희정 선생님도 대단하다는 생각이다. 영화를 보면서 소영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상하게 희정 선생님이 더 생각났다. ​소영이 포기하지 않도록 바로 옆에서 동작 하나하나를 반복하게 하고, 넘어지면 다시 일으키고,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말해주는 사람. 자신의 역량을 알고 삼십 대에 현역 무용수의 길에서 내려와 무용을 가르치는 사람. 두 사람은 서로에게 무언가를 주고받고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선생님 역시 자신의 불안과 우울을 안고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소영을 가르치면서 오히려 자신도 힘을 얻는 것처럼 보인다. 희정 선생님은 소영에게 동작을 가르친다. 잘되지 않는 동작을 다시 하고, 잊어버리면 다시 기억하고,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또 처음부터 한다. 결국 무용도 삶도 그런 것인지 모른다. ​한 번 잘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넘어졌다고 끝나는 것도 아니다. 다시 하고 또 하는 것. 그 과정에서 희정 선생님이 소영에게 말한다.“소영아? 잘한다 못한다 이런 거 생각하지 말고, 제일 중요한 게 뭐냐면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선생님이 쳐 줄 거야. 알겠지? 당황하지 말고.” ​격려와 반복된 고된 노력에 소영은 희정 선생님 앞에서 결국 눈물을 터트린다.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도 쉽지 않다. 연습하다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고, 같은 동작을 계속 반복한다. 공연 당일까지 몸을 붙잡고 또 연습한다. 그렇게 어렵게 공연을 끝낸다. 공연이 끝났다고 소영의 삶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화려한 조명이 꺼지고 관객이 돌아간 뒤에도 소영은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가서 카메라를 들고 다시 자신의 모습을 찍는다. 장애를 가진 사람이 무언가를 해냈다는 이유로 마지막에 찬란한 음악을 깔고 끝내지 않는다. 꿈을 이루었으니 이제 모든 것이 괜찮아졌다는 식으로도 말하지 않는다. ​공연은 끝났지만 삶은 계속된다. 걷는 일도 계속해야 하고, 몸과 싸우는 일도 계속해야 한다. 무용 역시 계속해야 한다. 그래서 소영에게 노력은 공연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살아가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 영화에는 마음을 건드리는 장면이 많다. 그래서 갱년기라면 처음부터 눈물을 줄줄 흘릴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영화를 보고 나서 한동안 소영이 공원에서 혼자 춤추던 모습이 떠올랐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혼자 춤을 추던 소영. 그 순간만큼은 몸이 자신을 배신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달릴 수 없지만 춤출 수 있고, 마음대로 말할 수 없지만 몸으로 말할 수 있다. 몸이 점점 굳어가더라도 표현하고 싶은 마음까지 굳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소영의 노력]은 장애를 극복하는 영화가 아니라, 장애를 가진 한 사람이 자신의 몸과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영화에 가깝다. 소영은 특별한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다. 그저 오늘도 걷고, 다시 연습하고, 춤을 춘다. 공연이 끝난 뒤에도.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도.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계속.]]></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925/pimg_639259293110905019.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36054</link></image></item><item><author>교관</author><category>영화 이야기</category><title>레지던트 이블: 0번째 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34667</link><pubDate>Thu, 24 Sep 2026 11:5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34667</guid><description><![CDATA[밀라 요보비치가 나오지 않는데도 재미있다.​이번 '레지던트 이블: 0번째 밤'을 보고 있으면 묘하게 익숙한 공포영화들이 떠오른다. 괴물들이 서로의 몸을 집어삼키며 전혀 다른 형태로 변해가는 모습은 '더 씽'을 생각나게 하고, 라쿤시티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부터 펼쳐지는 도로와 터널, 건물들은 '사일런트 힐'의 미로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단순히 어디선가 본 것을 가져다 붙인 느낌은 아니다. '레지던트 이블' 특유의 괴물과 고어가 다른 영화의 공포와 섞이면서 나름의 재미를 만들어낸다.​병원에 의료용품을 배달하러 갔던 브라이언은 어쩌다 라쿤시티까지 긴급하게 백신을 배달하게 된다. 그런데 그곳은 이미 사람이 살아갈 만한 도시가 아니다. 오염으로 변이된 괴물들이 돌아다니고 있고, 브라이언은 그 안을 통과해야 한다.​내용만 놓고 보면 아주 단순하다. 백신을 가지고 들어가서 배달하고 살아남으면 된다. 그런데 브라이언이 문제다. 총을 처음 잡아보는 사람이라 총을 쏘는 모습부터 어설프고, 괴물을 만날 때마다 튀어나오는 욕과 추임새도 심각한 상황과 묘하게 어울리지 않는다. 이 사람이 영웅인지 그냥 운 좋게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인지 헷갈릴 정도다.​그게 오히려 재미있다.​잭 크레거가 감독을 맡은 것도 영화의 분위기를 만드는 데 한몫한다. '웨폰'과 '바바리안'에서 보여줬던 불편하면서도 기묘한 상황을 만들어내는 감각이 이번에도 느껴진다. 공포를 한 방향으로만 밀어붙이지 않고, 무서운 장면 한가운데에 이상한 웃음을 끼워 넣는다. 그래서 끔찍한 장면을 보다가도 피식하게 된다.​괴물들은 이전의 '레지던트 이블'보다 한층 더 과격해졌다.​촉수가 몸에서 뻗어나오고, 하나의 괴물이 다른 괴물을 흡수하면서 더 크고 끔찍한 형태로 변한다. 괴물의 몸이 더 이상 인간의 몸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계속 변해가는 모습은 아무래도 '더 씽'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특히 어린아이처럼 보이는 괴물이 기억에 남는다. 얼굴이 갈라지면서 완전히 다른 괴물로 변하는데, 이상하게도 새하얗고 고른 치아는 그대로 남아 있다. 저 치아를 굳이 저렇게 만들어놓은 이유가 뭘까 싶었다. 무서운 장면인데 한편으로는 우스꽝스럽다. 이런 순간이 이 영화에는 꽤 있다.​라쿤시티에 들어간 뒤의 공간도 보는 재미다. 도로에서 터널로, 터널에서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데 어디로 가든 정상적인 길이 아니다. 공간 자체가 사람을 잡아먹을 것처럼 꼬여 있다. '사일런트 힐'에서 죄의식과 공포가 도시를 미로로 만들어버린 것처럼, 이 영화의 라쿤시티도 사람이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장소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엄브렐라 역시 이번에는 조금 다르게 보인다. 이전 시리즈에서는 세계를 뒤흔들 정도로 거대한 조직처럼 묘사됐는데, 이번 영화에서는 그 규모가 상당히 축소되어 있다. 물론 이것이 앞으로의 이야기와 어떻게 연결될지는 알 수 없다. 후속작에서 다시 엄브렐라가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지도 궁금해지는 부분이다.​브라이언은 그 와중에도 백신을 정말 자기 목숨처럼 끌어안고 다닌다. 어떻게든 배달을 끝내려고 한다.  우리나라나 미국이나 배달기사는 정말 투철하다. 그런데 치아가 하옇고 고른 어린 괴물에게 팔을 물린 뒤부터 몸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한다.​여기서 이 영화가 기존의 '레지던트 이블'과 조금 달라진다.​밀라 요보비치가 연기했던 앨리스처럼 처음부터 강력한 능력을 가진 영웅이 등장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브라이언은 강하지도 않고 싸움을 잘하지도 않는다. 총도 제대로 쏘지 못한다. 거대한 괴물이 나타나면 맞서 싸워서 쓰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일단 도망가고, 어떻게든 살아남는다.​마치 게임에서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는 것 같다.​강한 괴물이 나오면 그것을 압도적인 힘으로 죽이는 것이 아니라 우연히 약점을 찾거나, 운이 따라주거나, 주변의 상황이 맞아떨어지면서 겨우 살아남는다. 그래서 괴물을 죽였을 때의 통쾌함보다 ‘이번에도 살았네’ 하는 안도감이 더 크다.​어쩌면 그래서 더 재미있었는지도 모르겠다.​기존 '레지던트 이블'의 주인공들은 괴물을 상대하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었다면 브라이언은 그냥 그곳에 떨어진 평범한 사람이다. 괴물이 나타났을 때 싸우기보다는 도망치는 것이 정상인 사람. 그런데 그 평범한 사람이 끝까지 백신을 들고 가야 한다.​그 단순한 이야기가 이상하게 끝까지 끌고 간다.​오랜만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본 공포영화였다. 밀라 요보비치가 없어도 '레지던트 이블'은 이렇게 재미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영화였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924/pimg_639258476013594945.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34667</link></image></item><item><author>교관</author><category>영화 이야기</category><title>로드 하우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32577</link><pubDate>Wed, 23 Sep 2026 11:3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32577</guid><description><![CDATA[로드 하우스를 한번 더 봤다.​요즘 액션영화를 보고 있으면 묘한 흐름이 느껴진다. 기존 할리우드 액션 스타들이 하나둘 전성기를 지나면서, 최근에는 리처처럼 선이 굵고 힘으로 밀어붙이는 액션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다. 어쩌면 할리우드에서 마동석을 보고 배운 건지도 모를 일이다.​그런데 '로드 하우스'의 제이크 질렌할은 조금 다르다. 몸이 크고 강한데 움직임은 굉장히 날렵하다. 힘으로 찍어 누르는 것 같으면서도 동작 하나하나가 빠르고 정확하다. 아무리 봐도 멋있다.​예전에 스파이더맨의 톰 홀랜드가 제이크 질렌할의 운동량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인터뷰 영상이 인상적이었다. 본인도 운동을 엄청 좋아하고 많이 하는데 제이크 질렌할은 자신이 생각하는 그 단계를 아예 넘어선 사람이라는 식의 이야기였다. 영화를 다시 보니 그 말이 조금 이해가 된다.​제이크 질렌할은 원래 액션배우라는 이미지가 강한 배우가 아니다. '페르시아 왕자'에서는 굉장히 벌크업한 몸으로 액션을 보여줬고, 이후에도 액션영화에서 몸을 쓰는 모습은 계속 인상적이다. '로드 하우스'에서는 아예 액션배우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액션배우가 아니었던 배우가 액션배우보다 더 액션배우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그렇다고 제이크 질렌할이 비슷한 역할만 해온 것도 아니다. '옥자'에서는 어딘가 나사가 하나 빠진 듯한 박사 역을 맡았고, '라이프'에서는 우주에서 외계 생명체와 사투를 벌인다. '나이트크롤러'에서는 인간의 광기를 보여주었다. 역할을 바꿀 때마다 사람이 달라 보이는 배우인데, 그 사람이 몸까지 만들어 액션을 하니 묘하게 더 강력해진다.​'로드 하우스'가 1989년 패트릭 스웨이지 주연의 동명 영화를 다시 만든 작품이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제이크 질렌할은 이 영화의 주연을 위해 엄청난 양의 훈련을 했고, 그 과정을 맨즈헬스 채널에서도 볼 수 있다. 영화를 보고 나서 그 영상을 찾아보면 왜 화면 속 몸이 그렇게 만들어졌는지 조금 알 것 같다.​그리고 역시 이 영화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건 코너 맥그리거다. 실제 격투기 선수인 코너 맥그리거와 제이크 질렌할이 한판 붙는 장면은 액션 자체가 꽤 통쾌하다. 배우와 실제 선수가 부딪히는 데서 오는 묘한 날것의 느낌도 있다.​두 번째로 봐도 액션은 여전히 멋있다. 특히 제이크 질렌할이 그렇게 만들어진 몸으로 날렵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앞으로 액션영화를 한두 편 더 찍어줬으면 싶어진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923/pimg_639257600434696254.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32577</link></image></item><item><author>교관</author><category>영화 이야기</category><title>니글리 시즌 1</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30626</link><pubDate>Tue, 22 Sep 2026 12:0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30626</guid><description><![CDATA['리처' 시즌 4가 끝나자마자 '니글리'가 시작됐다.​'리처' 마지막 장면이 아직 머릿속에 남아 있다. 지하철역에서 리처가 노숙하는 할머니에게 샌드위치의 반을 건네고 둘이 나눠 먹을 때, 어두운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오는데 그 순간 햇빛이 비친다. 리처라는 인간을 생각하면 이상할 만큼 조용하고 따뜻한 장면이었다. 사람을 때려눕히는 장면보다 그 장면이 아주 좋다.​그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니글리'가 시작된다. 첫 화부터 리처가 잠깐 모습을 보인다. 니글리를 도와주고 다시 사라진다. 마치 이제부터는 네가 알아서 해보라는 듯하다. 실제로 이 시리즈는 리처가 사라진 자리를 니글리가 이어받는 느낌이다.​원작 소설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긴 작품은 아니다. 니글리라는 인물을 가져와 그 사람의 성격과 과거를 바탕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 같다. 그래서 '리처'처럼 이미 짜여 있는 거대한 원작의 구조를 따라가는 느낌은 덜하다. 대신 니글리라는 사람이 어떤 인간인지 조금씩 들여다보게 된다.​그런데 시작부터 상당히 세다.​30대 남자가 옷을 홀딱 벗은 채 지하철에 몸을 부딪히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곧 이야기가 시작된다. 대충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지는 보인다. 이단종교집단이 있고, 그곳에서 만들어지는 약물이 있고, 사회에서 사라져도 아무도 크게 신경 쓰지 않을 사람들을 끌어들여 실험을 하고, 이용하고, 결국 비밀을 알리려는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 ​이런 이야기는 이상하게 계속 보게 된다.​앞에 올린 '굿모닝 베로니카'도 시즌 2는 이단종교를 둘러싼 사건이었다. '모범택시'에서도 비슷한 소재가 등장했고, 연상호가 원작을 쓴 '사이비' 시리즈도 종교라는 이름 뒤에 숨어 있는 인간의 욕망을 다뤘다.​사람이 종교에 빠지는 것 자체가 무서운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원래 가지고 있던 믿음과 외로움, 불안 같은 것을 누군가 이용하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특히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그런 곳에 빠져버리면 남은 사람은 어디까지 따라가야 할까. 돈을 가져다 바치고, 가족이 무너지고, 그 사람을 구하려다가 오히려 가족 전체가 망가지는 일도 현실에서는 벌어진다.​그래서 이런 소재를 보면 단순히 악당을 찾아서 때려잡는 이야기로만 보이지 않는다.​니글리 역시 혼자 움직이는 사람이다. 주변 사람들과 쉽게 섞이지 않고 자기 방식대로 움직인다. 하지만 리처처럼 결국 다른 사람들과 손을 잡는다.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하는 사람이 아니라, 필요할 때 제3의 인물들을 끌어들여 사건을 파헤친다. 그게 니글리라는 캐릭터의 재미인 것 같다.​처음에는 리처보다 액션이 약하면 어쩌나 싶었다. 리처는 사람이 아니라 거의 걸어 다니는 중장비에 가까우니까. 누군가를 한 대 때리면 그 사람의 인생이 끝날 것 같은 액션이다.​그런데 막상 니글리를 보니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리처와 똑같을 필요가 없다. 니글리에게는 니글리만의 방식이 있다. 몸으로 밀어붙이는 순간도 있지만 그보다는 상황을 읽고 움직이는 쪽에 가깝다.​그리고 무엇보다 니글리라는 사람이 궁금해진다.​리처와 함께 있을 때는 늘 리처 옆에 있는 유능한 동료 정도로 보였는데, 혼자 세워놓으니 그 사람에게도 과거가 있고 상처가 있고, 쉽게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원래 조연이었던 사람이 주인공이 되면 이런 재미가 있다.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뒷면을 보는 것.​아직 2화를 보려고 하는 중이라 이 이야기가 어디까지 갈지는 모르겠다. 줄거리가 어느 정도 보인다는 점은 오히려 마음에 든다. 요즘은 반전을 만들기 위해 반전을 쌓아 올리는 작품도 많은데, 이건 처음부터 보이는 악의 구조를 조금씩 파헤치는 쪽이다. 그러면서 니글리라는 사람을 따라가게 만든다.​그러다 문득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 피격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이야기가 떠올랐다.​스다 마사키가 야마가미 데쓰야를 연기한다는 보도가 처음 나왔을 때도 상당히 묘한 기분이었는데, 최근에는 제작이 중단됐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런데 더 황당한 것은 공개된 각본에 실제 사건과 전혀 다른 설정이 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 총격범을 진범이 아닌 희생양으로 만들고, 뒤에 종교단체가 있으며 진짜 암살자는 한국인 히트맨이라는 설정이었다고 한다. 실제 사건을 소재로 가져왔으면서 완전히 다른 음모극으로 만들어버린 셈이다. (다음)​처음 들었을 때는 나도 ’도대체 왜?’라는 생각이 들었다.​실제 사건에는 이미 종교 문제와 가족의 붕괴, 돈, 원한, 정치와 종교의 관계처럼 영화로 만들 만한 요소가 너무 많다. 그런데 거기에 다시 가상의 한국인 암살자를 집어넣어 버리면 현실을 들여다보는 이야기가 아니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어버린다.​물론 현실의 사건을 그대로 영화로 만들 필요는 없다. 창작자는 얼마든지 허구를 만들 수 있다. 다만 실제 인물과 실제 살인사건을 출발점으로 삼았다면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부터가 허구인지 보는 사람도 계속 의식하게 된다. 특히 정치인 암살처럼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사건이라면 더 그럴 것이다.​그래서 오히려 《니글리》 같은 작품이 편하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허구라는 걸 알고 보기 때문이다.​이단종교도, 약물도, 사람을 대상으로 한 실험도 모두 현실 어딘가에서 본 것 같은 소재지만 이 작품 안에서는 하나의 장르적 세계로 들어간다. 그러니 일단 니글리가 어떻게 사건을 파헤치는지를 따라가면 된다.​지금은 아직 2화다.​리처가 떠난 자리에 니글리가 서 있다.​리처처럼 모든 것을 부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방식으로 사건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이다. 앞으로 이 사람이 어디까지 파고들지 조금 더 지켜봐야겠다.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922/pimg_639256752046049860.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30626</link></image></item><item><author>교관</author><category>영화 이야기</category><title>굿모닝 베로니카 시즌 1</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28837</link><pubDate>Mon, 21 Sep 2026 11:4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28837</guid><description><![CDATA['굿모닝, 베로니카' 시즌 1은 보는 내내 답답해서 미칠 것 같은 드라마다.​범인은 처음부터 나온다. 숨길 생각도 별로 없다. 여자를 납치해서 갈고리에 매달아 놓고 가지고 놀다가 죽인다. 그것도 모자라 그 장면을 아내에게 억지로 보여준다. 범인은 육군 대령이다. 그런데 아무리 사람이 사라져도 잡히지 않는다. 흔적도 거의 남기지 않는다. 경찰이 수사를 하는데도 이상할 정도로 사건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그걸 지켜보다가 결국 베로니카가 움직인다.​그런데 베로니카가 무슨 유능한 형사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아직 형사가 되지 못했고, 현장 수사를 제대로 해본 적도 없는 경찰이다. 주로 실내에서 근무하던 사람이다. 그런 베로니카가 실종 사건을 이상하게 여기면서 범인의 아내와 접촉하고, 사라진 여자들을 찾기 시작한다.​문제는 뭔가 해보려고 할 때마다 막힌다는 것이다.​도움을 청하면 거절당한다. 위에서 수사하지 말라고 한다. 범인 앞까지 거의 다 가놓고도 놓친다. 특공대까지 투입하지만 엉뚱한 곳을 들이닥친다. 베로니카가 뭔가 알아냈다 싶으면 또 다른 벽이 나타난다. 보고 있으면 ‘아니, 거기까지 갔으면 그냥 잡으면 되잖아’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게다가 베로니카와 계속 부딪히는 반장도 있다. 경찰 조직 안에서 베로니카와 거의 경쟁자처럼 보이는 인물인데, 상당히 매력적인 외모를 가진 여자다. 베로니카 역시 예쁘다. 그래서 두 사람이 마주칠 때마다 묘한 긴장감이 생긴다. 그런데 정작 베로니카가 믿었던 사람들조차 하나씩 이상한 모습을 드러낸다.​시즌 1 후반에 들어서야 왜 이렇게 수사가 안 되는지 조금씩 밝혀진다.​대령 하나만 잡으면 끝나는 사건이 아니었다. 경찰의 수뇌부가 이 사건과 연결되어 있었다. 베로니카가 아무리 뛰어다녀도 위에서 막아버리니 사건이 진척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시즌 1은 범인을 잡는 수사극이라기보다는, 베로니카가 자신이 속한 조직 자체를 의심하게 되는 과정에 가깝다.​잔인한 장면도 상당히 많다.​여자들을 잡아 창고에 가둔 뒤 등의 살갗을 뚫어 천장에 매다는 장면부터 상당히 불편하다. 범인의 아내는 남편이 여자들을 죽이는 장면을 강제로 지켜봐야 한다. 눈구멍이 뚫린 상자를 머리에 쓰고 그 안에서 남편의 살인을 바라본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장면을 보는 것보다, 그것을 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상황이 더 끔찍하게 느껴진다.​아내의 삶도 이미 망가져 있다.​남편에게 오랫동안 가스라이팅을 당한 탓에 정상적인 판단을 하기조차 힘들어졌다. 남편이 저지르는 끔찍한 일을 알고 있으면서도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다 결국 남편을 잡는 데 도움을 주려고 하는데, 그 대가가 너무 잔인하다. 불에 태워지는 장면은 시즌 1에서 손꼽히게 안타까운 장면이다.​그리고 베로니카가 믿었던 사람들도 무너진다. 자신을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서장도, 늘 자신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반장도 결국 사건의 반대편에 서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그래서 시즌 1은 베로니카에게 일종의 배신의 과정이다.​사건을 하나씩 해결하면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믿었던 사람을 하나씩 잃어가면서 자신이 몸담고 있던 세계가 얼마나 썩어 있는지를 알아가는 것이다.​결국 베로니카는 대령을 잡는다. 정확히는 대령을 불에 태워 죽인다.​그리고 여기서 베로니카가 완전히 달라진다.​시즌 2부터는 우리가 시즌 1에서 봤던 베로니카와 조금 다른 사람이 된다. 자신이 당한 일과 시즌 1의 사건에 가담했던 수뇌부들을 하나씩 찾아가고, 그들과 연결된 범죄자들을 직접 처단하기 시작한다. 경찰이라는 조직 안에서 정의를 찾으려 했던 사람이 조직 밖으로 밀려난 뒤 스스로 심판자가 되어버리는 셈이다.​그래서 '굿모닝, 베로니카'는 시즌 1과 그 이후의 느낌이 꽤 다르다.​솔직히 시즌 1은 추천하기가 쉽지 않다. 너무 답답하다. 범인이 누군지도 알고 있는데 왜 저렇게 못 잡나 싶고, 베로니카가 조금만 더 빨리 움직였으면 하는 생각이 계속 든다. 보면서 욕을 한두 번 한 게 아니다.​그런데 이상하게 계속 보게 된다.​대령을 어떻게 잡는지가 궁금해서 결국 다음 화를 누르게 된다. 그리고 시즌 1을 어떻게든 견디고 나면 시즌 2부터는 분위기가 확 달라진다. 베로니카가 더 이상 누군가의 허락을 기다리지 않기 때문이다.​시즌 1에서 그렇게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던 답답함이 시즌 2부터는 베로니카의 분노로 바뀐다. 그때부터는 누가 누구를 잡을 것인지 지켜보는 재미가 생긴다.​현재 시즌 3까지 나와 있다. 고어한 장면을 견딜 수 있고, 초반의 답답한 수사극을 참고 볼 수 있다면 시즌 1에서 포기하지 않는 편이 좋다. 나 역시 시즌 1을 보면서 몇 번이나 욕을 했지만, 결국 대령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보고 싶어서 끝까지 봤고, 그 이후부터는 오히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졌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921/pimg_639255881419133373.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28837</link></image></item><item><author>교관</author><category>영화 이야기</category><title>어 퓨 굿맨</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26970</link><pubDate>Sun, 20 Sep 2026 12:2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26970</guid><description><![CDATA[<br>골든글로브 작품 감독 남자주연조연상 후보에 오르고 타임지에서 뽑은 영화이기도 했고, 92년에 모든 평론가들이 뽑은 당대 최고의 영화였다. 감독은 로브 라이너, 촬영 로버트 리처드슨, 음악 마크 셔먼, 각본이 29살의 천재 브로드웨이 극작가 아론 소킨이었다. 주연배우들이 쟁쟁했다. 톰 크루저, 잭 니콜슨, 데미 무어, 케빈 베이컨, 커피 서덜랜드 등.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쿠바에서 가장 가까운 미해병기지 관타나모 기지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희생자는 산티아고 이등병이다. 그리고 두 명의 상병과 일병이 저지른 살인사건이다. 여기에 다니엘 캐피 중위와 여자인 조안느 겔로웨이 소령이 이 사건을 맡게 된다. 이것이 레드 코드, 우리 말로는 야간 집합이라고 알려진 자체 내 가혹행위를 통해서 저지른 것이 상부로 명령에 의해서 저지른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으로 출발한다. 산티아고에 소속된 소대장 캔드릭을 소환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부 사령관 중령은 이 모든 것이 사령관 제이섭의 명령이었음을 알려주고 자살하는 사건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대령인 제이섭을 잡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미국 국무회의 실력자였고 게다가 무죄판결이 날 경우는 반대로 명예훼손으로 몰입이 된다. 하지만 다니엘 캐피 중위는 자신의 모든 커리어를 걸고 제이섭 대령을 법정에 세워 한 판 승부를 벌인다. 마지막 장면이 당시 평론가들이 최고로 평했다. 톰 크루저와 잭 니콜슨이 맞부딪혀 싸우는 그 장면에서 톰 크루저가 아무리 열심히 해서 재롱을 떠는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데. 특히 마지막 재판 장면이 무려 11분이나 된다. 그 당시 톰 크루즈는 엔지를 50번이나 냈다. 지금의 톰 크루저로써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톰 크루저를 놀라게 한 것은 이 50번 연기를 잭 니콜슨은 똑같은 정도의 톤 앤 매너를 유지했다는 것이다. 같은 열기를 갖고 아주 흥분되고 격양된 표정을 똑같이 50번을 했다. 그래서 톰 크루저가 역시 잭 니콜슨 선생님은 저의 스승입니다,라고 무릎을 꿇었다는 일화가 있다. 이 영화는 그 보다 좀 더 복잡한 상업적 전략을 배경에 깔고 있다고 정성일 평론가는 말했다. 감독인 로브 라이너는 이 영화는 감독 한 사람이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영화라고 했다. 로브 라이너는 이 영화를 하는 것이 부담이 상당했다. 대표로 있는 영화사는 물량공세로 영화를 만들기보다 헤리셀리, 스탠 바이 미, 미저리처럼 배우와 이야기로 대중과 평단의 마음을 사로잡았는데 이 영화는 제작비가 에이리언 3의 제작비와 맞먹을 정도로 들었다. 29살의 천재 각본가는 로브 라이너에게 계속 신경을 긁었다. 원작은 재판정에서 시작하여 재판정에서 끝난다. 즉 영화가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시간과 공간의 일치를 요구했다. 그래서 로브 라이너는 각본가에게 소리를 치며 나도 할 수 있다고!라는 일화가 영화 관계자들이 모인 사람들의 증언이었다. 가장 고민은 캐스팅이었다. 로브 라이너가 가장 먼저 캐스팅한 배우가 톰 크루저였다. 92년 이전의 톰 크루저는 탑건과 7월 4일생의 이미지가 굳어 있었다. 두 가지는 양면성이 보이는데 두 가지를 합치면 새로운 모습이 된다. 이 영화는 탑건의 하층민 페르소나에 지나지 않았다. 하층민의 성격을 가진 주인공을 엘리트 페르소나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고 정성일 평론가는 말했다. 그리고 다니엘 중위의 아버지에 대한 페르소나를 잭 니콜슨이다. 이 모든 구조가 복잡하게 이 영화 속에 들어있다. 무엇보다 당시 미국 상황에 맞게 이 영화는 정치적인 면모를 가득 안고 있었다. 이 영화는 92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교묘하게 편승해서 만든 스타 영화다. 이 영화는 촬영일수 68만에 개봉했다. 촬영이 개시된 시점이 클린튼이 압승으로 끝났을 때였고, 개봉일은 클린튼 취임 전으로 잡고 있었다. 영화 속 재이섭은 부시를 똑 닮았고, 다니엘은 클린튼을 투영한다. 첫 시작에 죽은 두 병사는 한 명은 흑인이고 한 명은 백인 게이다. 이 영화의 모든 면에 당시 미국 정치적인 색채가 가득하다. 그래서 다른 나라는 미국만큼 이 영화에 몰입하거나 열광할 수 없음에도 스타 캐스팅 시스템으로 한국에서도 인기였다.&nbsp;아무튼&nbsp;이 정도로 몰입감 있는 법정영화도 없을 듯하다.&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920/pimg_639255036595062696.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26970</link></image></item><item><author>교관</author><category>영화 이야기</category><title>항구의 빛</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25376</link><pubDate>Sat, 19 Sep 2026 11:4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25376</guid><description><![CDATA[호쿠리쿠 지방의 작은 어촌 마을. 전직 야쿠자인 미우라는 조직 생활을 정리하고 이곳에서 어부로 살아간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를 완전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야쿠자였다는 과거는 미우라가 아무리 애써도 지워지지 않는다. 마을에 살고 있지만 어딘가 떠돌이 같은 사람이다.​그런 미우라 앞에 코우타라는 소년이 나타난다. 코우타는 시각장애가 있어 학교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고 따돌림을 당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코우타는 울지 않는다. 아이들이 뭐라고 해도 지팡이를 짚고 묵묵히 앞으로 걸어간다. 그 모습을 본 미우라가 코우타에게 마음을 쓰기 시작한다.​코우타에게는 더 아픈 사연이 있다. 부모는 야쿠자와 얽힌 교통사고로 죽었고, 코우타 역시 그 사고로 시력을 잃었다. 이후 그를 맡아 기르는 이모와 이모의 남자친구에게 폭행을 당하면서 살아간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코우타가 마음 놓을 곳은 없다.​그래서인지 미우라와 코우타가 가까워지는 과정이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았다.​둘은 나이도 다르고 살아온 환경도 전혀 다르지만 이상하게 서로를 알아본다. 미우라도 마찬가지다. 조직을 떠났지만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코우타 역시 세상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다. 결국 둘은 서로에게 조금씩 기대기 시작한다.​코우타가 미우라와 함께 있을 때 보여주는 얼굴이 특히 인상적이다. 계란처럼 둥근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평소에는 세상을 경계하듯 굳어 있던 아이의 얼굴이 미우라 아저씨와 함께 있을 때만 환하게 빛난다. 미우라 역시 그렇다. 이 사람에게 웃음이 생기는 순간도 코우타와 함께 있을 때다. 두 사람이 항구에 있을 때 두 얼굴에 빛이 난다. ​미우라는 코우타의 눈을 다시 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코우타를 위해 야쿠자의 돈에 손을 댄다. 결국 미우라는 자신에게 남아 있던 모든 것을 걸게 된다.​영화를 보면서 ‘왜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영화 속 인물도 비슷한 질문을 한다. 하지만 미우라에게는 그것 말고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평생 혼자였던 사람에게 처음으로 자신을 필요로 하는 아이가 나타났고, 그 아이가 자신에게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것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수술을 마친 코우타가 눈을 뜨고 가장 보고 싶었던 사람은 미우라 아저씨였다. 그런데 미우라는 사라지고 없다.​그리고 12년이 흐른다.​성인이 된 코우타는 경찰이 되어 마약 사건을 기가 막히게 해결하는 형사가 된다. 그렇게 살아가면서도 어린 시절 자신을 돌봐주었던 미우라 아저씨를 잊지 않는다. 그리고 마침내 미우라와 다시 만나게 된다.​하지만 미우라가 야쿠자 조직을 떠났다고 해서 야쿠자까지 미우라를 놓아준 것은 아니다. 그의 과거는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결국 그 그림자는 코우타에게까지 총구를 겨눈다.​영화의 이야기는 상당히 신파적이다. 결말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뻔함이 크게 거슬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영화가 보여주려는 것은 반전이나 기막힌 이야기보다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 어떤 존재였는가에 있기 때문이다.​휴대전화가 등장하지 않는 것을 보면 시대적 배경도 꽤 과거로 물러나 있다. 화면의 질감도 요즘 영화와는 확실히 다르다. 마치 1980년대 영화 필름을 보는 듯한 느낌이 있는데, 실제로 35mm 필름으로 촬영했다고 한다. 거칠고 따뜻한 화면이 영화의 정서와도 잘 어울린다. 디지털로 너무 깨끗하게 찍은 화면이었다면 오히려 이 이야기가 지금보다 훨씬 인위적으로 느껴졌을 것 같다.​배우들의 연기를 보는 재미도 있다. 주인공 미우라를 연기한 다치 히로시는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이 인물의 쓸쓸함을 잘 끌고 간다. 조연으로 등장하는 사이토 타쿠미의 양아치 야쿠자 연기도 꽤 볼 만하다.​영화는 어린 코우타와 성인이 된 코우타의 이야기로 나뉜다. 두 시간대를 놓고 보면 성인이 된 코우타의 이야기가 더 큰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결국 기억에 남는 것은 어린 코우타와 미우라가 함께했던 시간이다.​코우타에게 미우라는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었다. 미우라에게 코우타는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결국 이 영화는 야쿠자와 경찰, 마약 사건에 관한 영화라기보다 서로에게 기댈 곳이 되어준 두 사람의 이야기다.​세상에 혼자라고 생각했던 두 사람이 만나 잠시나마 서로의 가족이 되어준 것.​그것만으로도 미우라가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919/pimg_639254150117687942.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25376</link></image></item><item><author>교관</author><category>영화 이야기</category><title>도시괴담</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23663</link><pubDate>Fri, 18 Sep 2026 13:1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23663</guid><description><![CDATA[도시괴담은 등줄기를 서늘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무서운 건 귀신이 어디선가 튀어나오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매일 다니는 곳, 매일 사용하는 공간이 갑자기 무서운 곳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언젠가부터 장편 공포영화는 별로 무섭지 않은데 단편 공포물은 꽤 무섭다. 짧아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이야기가 길어지면 공포가 설명되는 순간이 오는데, 짧은 이야기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때쯤 끝나버린다. 옴니버스라 앞의 이야기가 재미없어도 다음 편을 기대하면서 보게 되는 것도 좋고.​사실 공포라는 게 멀리 있는 건 아니다.​어릴 때는 정전이 꽤 자주 됐다. 동생과 TV를 보고 있다가 갑자기 화면이 꺼지면 둘이서 꺄악 소리를 질렀다. 지금 생각하면 별것도 아닌데 그때는 정말 무서웠다. 집 안에 초를 하나씩 두고 있다가 정전이 되면 불을 켰다.​그런데 촛불이 밝지도 않았다. 촛불 바로 주변만 겨우 보이고 조금만 멀어지면 다시 깜깜했다. 오히려 그게 더 무서웠다. 불빛이 닿지 않는 반대편에서 뭔가 움직이고 있을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없는 공간인데, 어린아이에게 어둠은 없는 것도 만들어내는 공간이었다.​어린 시절이 지나면 공포의 대상도 바뀐다. 귀신보다 사람이 무서울 때가 있다. 그것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가까이 있는 사람이 더 무서울 수도 있다.​‘도시괴담’에서 재미있는 것도 바로 그런 부분이다. 괴물이나 귀신이 나오는 장면 자체는 사실 그렇게 무섭지 않다.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괴물이라는 게 너무 잘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걸 보고 있는 사람이 겁에 질려 있는 모습은 묘하게 무섭다. 사람이 정말 무서워하면 나까지 같이 긴장하게 된다.​이번 편 ‘문지방’도 그렇다.​아내가 친정에 가면서 남편에게 문지방 위에 붙여놓은 부적을 절대 떼지 말라고 한다. 옆 동에서는 남자 두 명이 실종됐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다른 편 ‘엘리베이터’에서 사라진 두 사람을 말하는 것 같다. 이런 식으로 에피소드들이 어딘가에서 연결되는 것도 이 시리즈를 보는 재미다.​그런데 남편이 말을 들을 리가 없다. 부적을 떼고 잠든다. 그리고 결국 일이 벌어진다.​나타나는 괴물은 솔직히 별로 안 무섭다. 주먹으로 한 대 맞으면 쓰러질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괴물을 보고 겁에 질려 있는 주인공을 보고 있으면 긴장된다.​나는 ‘도시괴담’이 그런 데서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괴물 자체가 무서운 게 아니라 사람이 무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것. 평범했던 집이나 엘리베이터 같은 공간이 어느 순간 낯설어지는 것.​어릴 때 정전된 집에서 촛불 하나를 켜놓고 반대편 어둠을 바라보던 것처럼.​공포는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918/pimg_639253339516752114.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23663</link></image></item><item><author>교관</author><category>영화 이야기</category><title>위스퍼 맨</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21672</link><pubDate>Thu, 17 Sep 2026 12:0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21672</guid><description><![CDATA[<br>출연 배우들이 워낙 쟁쟁해서 봤는데, 막상 보고 나니 재미와는 거리가 꽤 있다. 이렇게 연기 잘하는 배우들을 데려다 놓고 이렇게 만들었나 싶은 생각이 든다.​주인공 톰 역의 애덤 스콧은 여기서도 범죄소설가로 나온다. 얼마 전 본 영화 ‘호컴’에서는 공포소설가였다. 두 작품만 놓고 보면 ‘호컴’ 쪽이 훨씬 재미있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나온 영화에서 같은 배우가 비슷한 직업의 작가로 등장하는 걸 보면 묘한 생각이 든다. 할리우드에 배우가 그렇게 없나 싶기도 하고.​애덤 스콧은 역시 ‘단절’ 시리즈가 가장 좋았다.​톰은 아들 제이크와 조용한 마을로 이사 온다. 아내를 잃은 뒤 그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톰에게는 새로운 환경이 필요했다. 그런데 이사 온 집에서 제이크가 이상한 속삭임을 듣기 시작한다.​이후부터 이야기는 조금씩 어두운 쪽으로 흘러간다.​제이크는 집 안에서 계속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눈다. 톰은 그런 아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결국 소리를 지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이크가 사라진다.​사건을 쫓던 아만다(미셸 모나한)는 제이크의 실종이 십수 년 전 여러 아이를 납치해 살해한 연쇄살인범과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을 발견한다. 범인은 ‘위스퍼맨’이라고 불렸다.​그런데 이상한 건 위스퍼맨이 이미 감옥에 있다는 것이다.​톰은 결국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았던 아버지 피트(로버트 드 니로)를 찾아간다. 피트는 은퇴한 경찰이고, 과거 위스퍼맨을 검거한 인물이다.​제이크를 찾기 위해 피트와 톰, 그리고 아만다는 과거의 사건 기록과 단서를 하나씩 뒤진다.​이렇게 줄거리만 놓고 보면 꽤 재미있다.​게다가 배우들도 좋다. 로버트 드 니로와 마이클 키튼, 애덤 스콧, 미셸 모나한까지 배우들의 연기는 흠잡을 데가 없다. 화면도 좋다. 영화 전체에 어둡고 축축하고 서늘한 분위기가 깔려 있어서 범죄 스릴러가 가진 눅눅한 느낌은 제대로 살아 있다.​그런데 이야기가 깊어질수록 개연성이 자꾸 걸린다.​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과 설정도 계속 떠오른다. ‘데블스 아워’를 비롯해 여러 스릴러에서 봤던 요소들을 조금씩 가져와 한곳에 붙여놓은 듯한 느낌이다. 그래서 이야기가 앞으로 나아간다기보다 이미 알고 있는 장면들을 하나씩 확인하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가족의 상처를 이야기하고 싶은 건 알겠다. 아내를 잃은 톰과 아버지 피트 사이에 쌓여 있는 오래된 감정도 중요한 축이다.​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 감정들이 범죄 수사의 긴장감을 끌어올리기보다는 오히려 이야기를 옆으로 새게 만드는 순간이 있다.​차라리 가족의 상처를 조금 덜어내고, 제이크의 실종과 위스퍼맨을 둘러싼 사건을 더 집요하게 파고들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단서 하나가 다음 단서로 이어지고, 그 과정에서 관객이 범인을 의심하고 다시 뒤집히는 식으로 범죄 수사의 논리와 반전을 강하게 밀어붙였다면 훨씬 재미있었을 것 같다.​배우도 좋고 분위기도 좋다.​그런데 좋은 배우와 좋은 분위기만으로는 결국 영화가 재미있어지지 않는다.​보고 나서 가장 아쉬웠던 건 바로 그 부분이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917/pimg_639252434115301071.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21672</link></image></item><item><author>교관</author><category>영화 이야기</category><title>더 테러 시즌 1</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19720</link><pubDate>Wed, 16 Sep 2026 12:2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19720</guid><description><![CDATA[이 시리즈는 정적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재미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상하게 한 편씩 보게 된다. 잔인하고, 또 잔인하다. 그렇게 보다 보면 어느새 10화까지 와 있다. 특히 마지막 10화는 정말 충격적이다.​이야기는 1800년대, 북서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북극으로 들어간 탐험대의 이야기다. 시리즈 내내 눈이 내리고 사방이 꽁꽁 얼어붙어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공포스럽다. 그런데 추위만 견디면 되는 게 아니다. 식량은 떨어지고, 사람들은 굶주림에 시달린다. 몸을 썩게 만드는 질병까지 번진다. 거기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초자연적인 생명체까지 탐험대를 공격한다.​매일 보는 풍경은 끝없이 펼쳐진 눈과 얼음뿐이다. 어디를 가도 빠져나갈 곳이 없다. 그런 곳에서 사람은 조금씩 미쳐간다. 옆에서 함께 있던 사람이 극한의 추위와 병으로 하나둘씩 죽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도 정상적인 정신으로는 견디기 어려울 것 같다.​두 척의 탐사선은 거대한 얼음에 갇히고 구조는 오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선원들은 굶주리고 병들고 죽어간다. 그 과정을 굉장히 세밀하게 보여준다. 그래서인지 다른 고어 공포영화를 볼 때보다 오히려 더 잔인하게 느껴졌다.​게다가 정체불명의 존재가 나타나 사람들을 공격한다. 몸을 반으로 갈라놓고 다리를 물어뜯어 버린다. 화면 자체가 잔인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무서운 건 그곳에 내가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저런 곳에 며칠만 있어도 팔다리가 동상에 걸리고, 결국 살이 썩어 들어가 잘라내야 하는 상황이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북극의 풍경은 아름답다. 그런데 그 아름다움이 너무 차갑다. 화면을 가득 채운 눈과 얼음이 아름답게 보이면서 동시에 사람을 질식시키는 것 같다.​'옐로우스톤' 첫 시즌이 자연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하찮고 무력한 존재인지를 보여줬다면, '더 테러' 시즌 1은 그보다 훨씬 더 깊은 곳까지 인간을 밀어붙인다. 추위와 굶주림, 질병, 죽음이 계속 사람을 몰아세운다. 그러다 보니 인간의 절망과 두려움이 아주 구체적으로 보인다.​무서운 건 괴물만이 아니다. 사람이 굶주리고 죽음이 가까워졌을 때 무엇을 하게 될지 모른다는 것도 무섭다. 삶과 죽음, 질병과 신체훼손, 인간의 본성과 윤리 같은 것들이 계속 뒤섞인다. 여기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까지 끼어든다.​특히 마지막 10화에서 식량이 부족해지면서 결국 죽은 선원의 살을 떼어 먹는 장면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이상하게도 괴물이 사람을 죽이는 장면보다 그 장면이 더 오래 간다.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어디까지 내려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라서 그런 것 같다.​실제 1845년 존 프랭클린 탐험대가 북서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떠났다가 조난당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도 이 시리즈를 더 무섭게 만든다. 완전히 허구라고 생각하고 볼 수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람들이 저 얼음 속에 갇혀 있었고, 구조를 기다리며 죽어갔다.​지금 '더 테러' 시즌 2를 보고 있는데 시즌 1과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고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시즌 1보다 재미가 떨어져서 그런지 조금 집중이 안 된다. 아무래도 내가 좋아했던 건 시즌 1의 그 폐쇄된 공간과 끝이 보이지 않는 얼음, 그리고 거기서 서서히 무너져가는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정적인 공포를 좋아한다면 '더 테러'는 시즌 1만으로도 충분하다. 아니, 오히려 공포 시리즈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한 작품이 아닌가 싶다.​빠르게 놀라게 하는 공포가 아니라, 보고 있는 동안 조금씩 몸을 얼어붙게 만드는 공포다. 괴물이 나타나지 않아도 이미 무섭고, 괴물이 나타나면 더 무섭다. 결국 가장 무서운 건 그곳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인간인지도 모르겠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916/pimg_639251585418893676.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19720</link></image></item><item><author>교관</author><category>영화 이야기</category><title>소중한 날의 꿈</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17905</link><pubDate>Tue, 15 Sep 2026 14:3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17905</guid><description><![CDATA[이 영화를 보고 나면 기분이 좋아진다. 뭔가 통쾌해서가 아니다. 쾌변을 하고 난 뒤처럼 개운해서도 아니다. 지브리의 '귀를 기울이면'을 보고 난 뒤처럼, 그냥 마음이 조금 따뜻해진다. 이야기가 롤러코스터처럼 크게 굽이치는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표현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마음이 있고, 그 마음을 기다리다 보면 어느 날 문득 내 곁에 찾아오는 순간이 있다. '소중한 날의 꿈'은 그렇게 오래 잊고 있던 소중한 마음을 조용히 꺼내 보여준다. 주인공 이랑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그 시절의 서울에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라디오가 흘러나오고, 마라톤을 하고, 뜀틀을 넘고, 여고생들이 교복을 입은 채 뛰어다닌다. 거리에는 영화 포스터가 붙어 있고, 방앗간과 카세트테이프 가게, 레코드 가게가 보인다. 파란 비닐우산도 등장한다. 이런 것들은 단순한 ‘옛날 소품’으로 배경에 놓여 있지 않다. 하나하나 세심하고 집요하게 그려져 있다. ​빵집의 TV에서는 린다 카터가 출연한 '원더우먼'이 나오고, 벽에는 그 시절 달력이 걸려 있다. 골목 벽에는 '별들의 고향' 포스터가 붙어 있다. 영화 초반부터 김만수의 ‘푸른시절’이 흘러나오는데, 그 노래 하나만으로도 1970년대의 공기가 선명하게 느껴진다. 사람 손으로 직접 그린 듯한 영화관 간판도 좋다. ​그 영화관에서 이랑이 '러브 스토리'를 보며 눈물 콧물을 쏟는 장면도 재미있다. 이후 장면을 보면 이랑의 감수성을 느낄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 정확히 어느 한 시점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1970년대와 1980년대의 풍경이 섞여 있다. 특정한 한 해를 재현했다기보다, 1970년대에서 1980년대로 넘어가던 시절의 모습을 한데 담아낸 것 같다. 그래서인지 영화 속 풍경이 옛날의 모습과 자연스럽게 겹쳐진다.대사도 재미있다. 억지로 문학적인 표현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여학생들을 보며 남학생들이 “쟤 얼굴이 우리 엄마 닮았어”라고 말하는 식이다. 우주비행사를 꿈꾸는 철수가 학교 옥상에서 커다란 방패연을 만들어 몸에 묶고 뛰어내리려 하자, 친구들이 “야, 영희랑 놀아야지. 너 죽으면 교과서 바뀐다” 같은 대사들. 이런 대사가 참 좋다. ​멋을 부린 말이 아니라, 그 나이의 아이들이 실제로 할 법한 말이라서 웃긴다. 철수와 이랑이 가까워지는 과정도 좋다. 둘 다 이성에 대해 제대로 경험해본 적 없는 아이들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운명적인 사랑처럼 빠르게 흘러가지 않는다. 어색하고 서툰 채로 서로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며 가까워진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미소가 쓰윽. 이랑이 철수를 처음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보고 있으면, 지금의 아이들과는 참 다른 모습이라는 생각도 든다. 영화는 그런 사소한 차이를 굳이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당시의 공기 속에 자연스럽게 담아낸다. 그 공기가 참 예쁘다. 수채화처럼 번지는 색감이 영화 내내 이어진다. ​서울의 골목과 학교, 사람들의 옷차림이 모두 조금씩 빛바랜 듯하지만, 오히려 더 따뜻하게 느껴진다. 명동의 만화거리에도 영화 속 장면들이 벽화로 남아 있다고 한다. 영화에서 보던 풍경이 실제 거리의 벽으로 이어져 있다는 점도 이 작품과 잘 어울린다.​이랑에게 달리기는 전부였다. 늘 1등을 하던 이랑은 어느 날 달리기 시합에서 다른 아이에게 추월당한다. 그리고 일부러 넘어져버린다. 잘하는 것이 있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지만, 그것만 믿고 있다가 처음으로 무너지는 순간도 찾아온다. 이랑에게는 그날이 그런 순간이었을 것이다. ​자신이 가장 잘한다고 믿었던 일에서 처음으로 배신당한 듯한 기분. 나는 이 장면이 영화가 말하는 성장통을 가장 잘 보여준다고 느꼈다. 서울에서 전학 온 수민을 바라보는 이랑의 마음도 그렇다. 수민은 몸에 딱 맞는 교복을 입고 있어 예뻐 보인다. 이랑은 엄마에게 자기 교복은 왜 이렇게 크냐고 투덜거린다. ​별것 아닌 장면인데도 영화가 끝난 뒤까지 계속 생각난다. 아마 성장이라는 건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엄청난 사건 하나로 사람이 갑자기 어른이 되는 게 아니다. 하루를 보내는 동안 사소한 일들이 계속 마음을 건드린다. ​친구 때문에 흔들리고,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고, 잘한다고 생각했던 일에서 처음으로 밀려나고, 나보다 예쁜 아이를 보며 질투하고, 내가 가진 것과 남이 가진 것을 비교한다. 그러면서 조금씩 변해간다. '소중한 날의 꿈'은 그런 이야기를 한다. ​안재훈 감독이 연출했고, 각본은 '은중과 상연'의 송혜진 작가가 맡았다. 현실적인 감정과 잔잔한 여운을 만들어내는 두 사람의 감성이 영화 곳곳에 잘 배어 있다. 거창한 사건을 앞세우기보다 일상의 풍경 속에서 이랑과 철수가 겪는 성장의 순간을 담백하게 보여준다. ​현재 극장에서 상영 중인 '아가미'도 안재훈 감독의 작품이다. 구병모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인데, 같은 감독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 두 영화를 이어서 보는 재미도 있다. 성장통은 그런 것 같다. 눈을 떴다가 다시 눈을 감는 하루 동안에도 계속 마음을 찌른다. ​하지만 그 시간을 견디며 친구를 만나고,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고, 상처받으면서 조금씩 자라난다. '소중한 날의 꿈'을 보고 있으면 그 시절의 내가 잠시 돌아오는 것 같다. 그래서 영화가 끝난 뒤에도 기분이 좋다. 특별히 신나는 일이 있었던 건 아닌데, 오래 잊고 있던 무언가를 다시 만난 사람처럼 마음이 따뜻해진다. 이 영화는 유튜브에서 무료로 볼 수 있으니, 관심이 있다면 찾아보면 좋겠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915/pimg_639250795669043279.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17905</link></image></item><item><author>교관</author><category>영화 이야기</category><title>가을의 전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15490</link><pubDate>Mon, 14 Sep 2026 12:1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15490</guid><description><![CDATA[<br>가을이 오기 전 또 보는 ‘가을의 전설’은 거칠지만 부드럽고, 아름다운데 매혹의 공포가 있고, 통제에서 벗어난 선함의 종마 같은 트리스탄의 매력에 빠져들기에 충분했다.이사벨을 안고 오열하는 트리스탄의 슬픔과 가지고 싶은데 가질 수 없는 존재에 대한 경외가 대자연을 배경으로,달의 뒤편처럼 아름다운 영상 그 너머 보이지 않는 인간 내면의 세계를 보여준 ‘가을의 전설’.무엇보다 슬픈 고혹미가 흐르는 음악과 함께 다시 봐도 좋을 영화.<br>https://youtu.be/2Iio8QmZY8A?si=NKk7nknO-tIHkIwk]]></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914/pimg_639249850604825168.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15490</link></image></item><item><author>교관</author><category>영화 이야기</category><title>눈동자</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13124</link><pubDate>Sun, 13 Sep 2026 12:1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13124</guid><description><![CDATA[<br>공포 스릴러로 보면 신민아가 혼자서 영화를 끌고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쌍둥이 자매가 있다. 동생은 눈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어느 날 동생이 죽는다. 경찰은 자살로 사건을 마무리하려 하지만 언니는 동생이 자살할 리 없다며 직접 진실을 파헤치기 시작한다.​두 자매 모두 유전적으로 시력을 잃게 되는 병을 앓고 있다. 동생이 죽은 뒤 진실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이번에는 언니의 시력까지 급격하게 나빠지고, 결국 수술을 받게 된다.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사건을 쫓고,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와 맞서야 하는 이야기다.​원작은 스페인 영화 [줄리아의 눈]이다. 스페인은 역시 스릴러 하나는 잘 만든다. 소간지가 그걸 잘 캐치해서 수입하기도 한다. ​영화 자체는 흥미롭고 나쁘지 않다. 그런데 보면서 답답한 부분이 너무 많다. 많다기보다는 답담함이 강력하다.​스토커로 나오는 현민은 형사 도혁에게 정말 개 맞듯이 처맞는다. 엄청 맞는다. 이 정도면 정신을 잃어야 정상인데, 맞으면서 웃는다. 코피 좀 난 얼굴로 다시 일어나더니 칼로 사람을 찌르고 아무렇지도 않게 도망간다. 개성파 배우 김준배와 비 오는 날에 한판 붙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맞아도 벌떡벌떡 일어난다. 이쯤 되면 인간이라기보다 거의 불사신이다.​형사들도 너무 영화적인 스테레오타입이다. 정적이고 무표정하고, 사건이 터지고 나서도 별 역할이 없다. 이런 형사 캐릭터는 이제 좀 지겹다.​그리고 영화를 보다 보면 범인이 누구인지 대충 짐작이 간다. 그래서 ‘범인이 누구냐’보다는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미친 사이코가 되었을까’가 궁금해진다. 그런데 정작 그 이유가 너무 간단하게 나와 버린다. 범인의 행동은 그렇게까지 극단적인데 원인은 생각보다 싱겁다.​차라리 [줄리아의 눈]에서처럼 어두운 공간에서 몸을 움직이고 주변을 더듬으면서 조금씩 상황에 적응해가는 모습을 제대로 보여줬다면 훨씬 좋았을 것 같다.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범인에게 쫓기고, 그 상태로 뭔가를 해결해야 하는 이야기는 이미 꽤 많이 나왔다. 결국 이런 영화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얼마나 긴장감 있게 활용하느냐가 중요한데, 그 부분에서 원작이 오히려 더 인상적이다.​영화의 공간도 너무 밀폐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2010년에 나온 원작이 지금 영화보다 더 현대적으로 느껴진다.​결국 영화에서 기억에 남는 건 캐릭터 하나하나가 아니라 신민아의 연기다. 스토커의 집착이라는 키워드가 영화 전체를 끌고 가는 만큼, 심장을 조여 오는 심리적인 공포도 거의 신민아의 몫이다. 그 역할은 제대로 해냈다.​아쉬운 부분은 분명히 많은데 그렇다고 재미없는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이런 영화는 몇 가지 재미있는 포인트를 찾아가면서 보는 맛이 있다.​그게 뭔지는 각자 영화를 보면서 찾아보시길.<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913/pimg_639248984613812514.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13124</link></image></item><item><author>교관</author><category>영화 이야기</category><title>라이어니스: 특수 작전팀 시즌3</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11323</link><pubDate>Sat, 12 Sep 2026 12:3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11323</guid><description><![CDATA[라이어니스 시즌 3은 리처 시리즈만큼 재미있다. 마동석도 리처처럼 만들면 좋을 텐데. 한 주먹으로 모든 빌런을 때려눕히는 식이 아니라 리처처럼 얻어터지기도 하고, 기절하기도 하고, 끌려가기도 해야 한다. 그래야 마동석 시리즈도 지금보다 훨씬 재미있어지지 않을까. ​라이어니스에서 특히 마음에 드는 건 총소리다. 진짜 총소리처럼 들린다. 영화에서 들리는 총소리는 아무래도 영화를 위한 소리라는 느낌이 있다. 실제보다 크고 묵직하게 들리거나, 액션을 강조하기 위해 과장된 경우가 많다. 그런데 라이어니스의 총소리는 그런 느낌이 덜하다. 갑자기 총성이 터지면 정말 옆에서 총을 쏜 것처럼 날카롭고 건조하다. ​이런 사운드가 액션 장면의 긴장감을 더 끌어올린다. 시즌 2에서 조 샐다나가 연기하는 조는 상당히 히스테릭한 모습을 보여준다. 첩보 작전을 수행하면서 가족과 계속 충돌한다. 조는 이 일만 끝나면 가족에게 돌아가고 싶어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일을 너무 잘한다는 것이다. 정부 입장에서는 이런 사람을 쉽게 놓아줄 수 없다. 계속해서 위험한 작전에 투입되고, 그럴수록 가족과의 거리는 멀어진다. ​시즌 2는 이런 갈등에 엄청난 액션 스케일과 빠른 전개가 더해지면서 상당히 재미있었다. 로튼토마토 점수만 놓고 보면 시즌 3의 평가가 더 낮지만, 나는 오히려 시즌 3이 가장 재미있다. 시즌 1과 2에서 조는 무시무시한 사냥꾼이었다. 적을 찾아가 사냥하는 쪽이었다. 그런데 시즌 3에서는 상황이 완전히 뒤집힌다. 조가 쫓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조직에 기습을 당하고 납치까지 된다. ​발톱 밑에 숨겨둔 위치추적기까지 빼앗긴다. 사냥하던 사람이 사냥감이 된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가족이다. 시즌 1과 2에서 조의 활동 무대는 해외 오지나 타국의 카르텔 아지트 같은 곳이었다. 말 그대로 전쟁터에 가까운 장소였다. 그런데 시즌 3에서는 전투가 벌어지는 곳이 남편과 두 딸이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생활공간으로 들어온다. ​조가 지금까지 어떻게든 분리해놓았던 첩보전과 가족의 일상이 결국 한곳에서 충돌하기 시작한다. 이번에 라이어니스 팀이 상대하는 세력도 만만치 않다. 동유럽과 러시아의 정보망이 결합된 상대와 맞붙는다. 조는 비밀 작전을 수행하면서 미국 본토 깊숙한 곳, 그것도 국가 정보기관 내부에 적이 침투했다는 패턴까지 포착한다. 그런데 조가 기습을 당하고 납치된다. ​여기서부터 시즌 3의 재미가 본격적으로 살아난다. 조는 국가를 위해 싸우던 사람이지만 이제는 자신의 가족을 지켜야 한다. 시즌 1과 2에서는 쉽게 볼 수 없었던 처절한 사투가 시작된다. 지금까지 조에게 가족은 지켜야 할 대상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임무와 분리해두어야 할 존재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둘을 더 이상 떼어놓을 수 없게 됐다. 국가를 지킬 것인가, 가족을 지킬 것인가. ​시즌 3은 결국 이 질문을 조에게 던진다. 시즌 2처럼 시즌 3도 시작부터 특수부대의 작전을 보여주는 장면이 상당히 강렬하다. 액션의 규모도 크고 전개도 빠르다. 그런데 이번 시즌은 단순히 더 큰 작전을 보여주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조 자신이 사냥감이 되면서 이야기가 훨씬 개인적인 방향으로 좁혀진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시즌 3에 더 몰입하게 된다. 총 8화이고 현재 5화까지 진행됐다. 이런 첩보 액션과 특수부대 이야기를 좋아한다면, 지금까지는 꽤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것 같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912/pimg_639248132481156275.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11323</link></image></item><item><author>교관</author><category>영화 이야기</category><title>저주받은 도시</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07011</link><pubDate>Thu, 10 Sep 2026 12:1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07011</guid><description><![CDATA[존 카펜터 영화는 실망하지 않는다. 모두가 존 카펜터가 이 영화에서 실패했다고 했지만, 이 시대에 봐도 설정이나 아이들의 연기가 공포를 잔뜩 불러일으킨다. 미국의 한 작은 마을, 미드위치라고 불리는 마을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 후 마을 사람 모두가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이 장면을 어쩌면 란티모스가 부고니아에서 오마주 하지 않았나 싶다. 저주받은 도시에서는 첫 장면이지만, 부고니아에서는 마지막 장면으로 보여준다. 천천히, 학교, 상점, 바닷가, 길거리, 자동차 안을 보여주며 모든 사람들이 전부 정신을 잃고 쓰러져있는 충격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부고니아에서는 파멸을 보여주었지만, 저주받은 도시는 정신을 잃은 것이다. ​이 사건 후 임신이 불가능했던 여인이나 결혼하지 않은 처녀까지 10명의 여인이 한 날에 임신을 한다. 낙태를 하려던 여자도 아이를 낳기로 한다. 한꺼번에 태어난 10명의 아이들은 점점 마을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데. 10명의 은발머리 아이들 중 한 명은 버넬박사가 숨겨 해부를 한다. 이 아이들은 계속 어른들을 초능력으로 죽여 가며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낸다. ​존 카펜터가 이 영화로 비판받은 이유는 지루하다는 것이다. 다른 영화에 비해 지루한 면이 있다. 아이들이 눈에서 색다른 빛을 내면 어른들은 아이들의 능력에 잠식되어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이 아이들의 위험을 알고 덤벼든 어른들은 전부 아이들과 눈이 마주친 후 잔인하게 저 세상으로 간다. 아이들이 악마적인 초능력으로 어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모습은 오멘의 데미안을 닮았다. ​그리고 박사와 여자 아이가 하는 대화를 들으면 기생수가 이 영화에서 설정을 가져왔나 할 정도다. 아이들은 우리가 먹고 살아가야 하기에 인간들을 죽여야 한다. 그것에 왜 감정이 개입을 하는지 박사에게 묻는다. 그저 생존에 필요하기에 인간을 죽이고 더 나아가 마을을 벗어나 전부 흩어져 자신의 영역을 넓히려 든다. ​이런 설정은 기생수와 비슷하다. 이 아이들은 끝내 어떤 존재인지 설명이 안 된 채 끝난다. 영화에는 슈퍼맨의 크리스토퍼 리브와 스타워즈 제다이였던 마크 해밀이 나온다. 이 두 사람은 미국에서 슈퍼영웅 같은 상징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속수무책으로 그저 당하는 나약한 인간으로 그려진다. 마크 해밀은 다른 마을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아이들의 초능력에 의해 처참하게 죽는다. ​마지막 크리스토퍼 리브는 아이들의 초능력이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오지 않으려고 정신분석한 적인 벽을 만들지만 점점 힘에 부친다. 아마도 존 카펜터의 묘수가 숨어있는 캐스팅인지 모르겠다. 이 영화는 비판이 큰 대신 해석도 다분하다.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단순 복수나 보복을 위해 악마적인 능력을 발휘한다는 말도 있지만,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이들은 기생수처럼 그냥 그렇게 태어난 존재들이라고 생각된다. 아이들이 역동적이지 않아서 지루한 감은 있지만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장면은 공포로서 충분하지 싶다.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910/pimg_639246392685679099.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07011</link></image></item><item><author>교관</author><category>영화 이야기</category><title>지금 불륜이 문제가 아닙니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04802</link><pubDate>Wed, 09 Sep 2026 12:3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04802</guid><description><![CDATA[이게 재미없다고 하기는 애매하다. 그렇다고 재미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남들은 꽤 재미있다고 하는데, 나는 끝까지 보면서 계속 비슷한 생각을 했다. 재미가 없는 건 아닌데 이상하게 몰입이 잘되지 않는다. 뭔가 사건은 계속 벌어지고 이야기도 쉴 새 없이 앞으로 나아가는데, 정작 나는 그 사건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지 못한 채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가장 아쉬웠던 건 이야기의 중심에 여고생들이 들어오면서부터다. 처음에는 무지막지하게 밀어붙이는 전개가 나름의 힘이 있었다. 그런데 여고생들이 본격적으로 사건의 중심에 들어오면서부터 그 속도에 계속 태클이 걸리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여고생들이 등장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사건의 중요한 열쇠가 되고 이야기를 움직이는 구조는 충분히 이해한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인물들의 행동이나 사건의 연결이 지나치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드라마라는 게 어느 정도의 과장은 필요하다. 현실에서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 벌어져도 그것을 납득하게 만드는 힘이 있으면 괜찮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인물들이 움직이는 방식이나 사건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왜 저렇게까지 하지?’라는 생각이 자주 든다. 한 번 정도라면 그러려니 넘어갈 수 있는데, 그런 장면이 계속 쌓이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이야기에 빠져들기보다 작가가 다음 사건을 만들기 위해 인물들을 억지로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까지 받게 된다.​게다가 공개 방식도 개인적으로는 아쉬웠다. 한꺼번에 몰아서 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면 조금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뜨문뜨문 한 회씩 공개되다 보니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면서 긴장감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한 회가 끝나면 ‘그래서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 거지?’라는 궁금증이 강하게 남아야 하는데, 나는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서 그 긴장감이 조금씩 식어버렸다. ​배우들의 연기도 생각보다 아쉬웠다. 특히 출연진의 이름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김혜수와 조여정처럼 연기력으로는 이미 충분히 인정받은 배우들이 나오는데, 이상하게 이 작품에서는 두 사람의 연기가 조금 겉도는 느낌이다. 분명 장면 안에서는 열심히 연기하고 있고 감정을 쏟아내고 있는데, 그 감정이 이야기 속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지 않는다. 배우가 캐릭터를 끌고 가는 게 아니라 캐릭터와 배우가 따로 노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들이 있었다.​8화에 이르러서는 솔직히 쌍둥이 빌런이 저 답답한 가족들을 그냥 싹 정리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만큼 가족들의 행동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그렇게 해버리면 이야기가 끝나버리니까 결국 쌍둥이 빌런이 당하는 쪽으로 흘러간다. 여기서 또 답답함이 생긴다. ‘아니, 왜 이렇게까지 당하고 있어?’ 싶은 장면을 보고 있자니 긴장감보다는 어이가 먼저 생겼다. ​여기에 여고생들의 동성 간 사랑까지 주요하게 끌어오면서 이야기가 더 복잡해진다. 어떤 형태의 사랑이든 이야기의 소재가 될 수 있고, 제대로만 다뤄진다면 충분히 의미 있는 서사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그것이 이야기 전체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느껴지기보다는 또 하나의 자극적인 장치처럼 보이는 순간이 있다. 여고생들이 사건의 중심으로 들어오는 과정과 그들의 관계, 가족의 불륜과 욕망까지 한꺼번에 얽히다 보니 이야기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보다 ‘얼마나 많은 자극을 집어넣었는가’가 먼저 보일 때가 있다. 남들은 재미있다는데 나는 그렇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909/pimg_639245542251639473.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36999160/17504802</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