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고인 하늘을 바라보는 일





비 고인 하늘을 밟고 가는 일은 쉬운 일일까 어려운 일일까


시인 여림은 비 고인 하늘을 밟고 갔다


가끔 비둘기 떼와 낮술을 마시기도 했던 시인은


하루 종일 살아야 한다는 근사한 이유 하나를 생각했다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못하는 오늘을 매일 맞이한 시인은 네가 가고 나서 비가 내렸다고 했다


햇살에도 걸리고 신호등과 지나치는 모든 것에 걸려


잡상인처럼 무릎을 포개고 앉아 견뎌온 생애와 버텨가야 할 생계를 간단없이 생각한 시인


시인은 말을 하고 싶어 영원한 침묵을 택했다


가끔 비 고인 하늘은 마음의 파문을 던져


흉터가 만들어 놓은 단단한 문을 벌린다


그대가 떠나고 난 뒤 하늘에서 시가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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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내가 아루굴라 샐러드를 좋아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나는 당신이 아루굴라 샐러드를 무엇보다 맛있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당신이 지난번에 만들어준 상은 4첩 반상이었어요. 간단하지만 어려운 기본상은 단순하지만 무척 맛있는 밥상이었습니다.


당신은 먼저 앙드레 가뇽의 조용한 날들을 틀어놓고 음식을 준비했어요. 조용한 날들을 듣고 있으면 마음의 고요한 부분으로부터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어요. 당신이 음식을 준비하는 뒷모습을 보며 연주를 듣고 있으면 어쩐지 이대로 먼지가 되어도 좋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퀘벡의 풍경을 들여다보듯, 조용하고 평온한 일상이 흘러가듯, 조용한 날들이 흐르고 당신은 주방에서 마술을 부리기 시작했어요. 탐스럽게 달구어진 프라이팬에 마늘과 참기름을 달달 볶았고 손질된 모래주머니를 잘라서 같이 넣어서 잘 저어 주었지요.


할라피뇨가 있었으면 더 맛있었을 텐데, 라며 당신은 작은 속상함을 드러냈어요. 괜찮아요,라고 나는 말했고 당신은 미소를 지으며 양파를 썰어서 같이 볶았어요. 그야말로 조용한 날들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순식간에 밥을 안치고 두부를 잘라서 된장국을 만들었고 쌉싸름한 맛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 아루굴라 샐러드를 만들었어요.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지만 당신만큼 아루굴라 샐러드 맛을 내는 곳은 없었어요. 간소하지만 풍족하고 탐스러운 만찬이 내 앞에 차려졌어요.


당신은 내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좋아했지요.


그런데 말이에요, 앙드레 가뇽의 조용한 날들 이 곡, 김삼순에서 현빈이 연주한 곡인 거 알아요? 라며 당신은 웃었어요.


조용한 날들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김성대 시인의 구인에 나오는 시구처럼 나의 이륙과 착륙을 수신해줄 사람은 당신이었고, 당신의 눈동자에 손을 담가 꿈을 정돈해 줄 사람은 나였습니다.


그야말로 조용한 날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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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여행


라디오에서 이상은이 부르는 ‘삶은 여행’이 나온다. 이상은이 부르는 ‘삶은 여행’은 깊이 있는 노래다. 이 정도의 노래를 만들려면 많은 경험을 하지 않고서는 가사를 만들 수 없다. 좌절을 맛보고 절망을 벌리고 들어가서 그 속에 웅크리고 있는 작은 희망을 보고 나온 것 같은 가사다


삶은 여행과 삶은 계란의 ‘삶’이라는 글자는 같다. 그건 참 기이한 일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삶’이라는 명사와 ‘삶다’라는 동사는 비슷한데 참 다른 뜻을 지니고 있다


따지고 보면 ‘삶’과 ‘삶다’ 사이에는 시간이 지나 익어가면서 영글어 가는 명확함이 있다. 그 사이에는 공백이 존재하고 그 공백을 어떤 식으로 채우느냐에 따라 명확함의 관념은 달라진다. 거기에는 기반도 있다


우리는 보통 기반을 잡는다, 라는 말을 왕왕한다. 기반이란 무엇일까. 기반이라는 단어와 의미에 대해서 굳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기반이란 기. 본. 반. 찬.이라는 뜻일까. 그렇다면 매일매일 기본 반찬을 챙겨 먹는 것이 기반이 좀 잡히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일까. 삶이라는 긴 여행에서 기본 반찬을 매일 챙겨 먹기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언젠가 끝나는 ‘삶은 여행’을 계속 듣고 있으면 조금은 불안하다. 사랑이 시작됨과 동시에 두려움이 따라붙는 것처럼 행복 속에 싹트는 껄끄러운 불안. 늘 행복하다가 한 번 불행해지는 게 나은 삶일까, 썩 행복하지 않다가 한 번 행복해지는 것이 나은 삶일까


삶이란 하루를 삶아 가는 행위가 모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삶이란 인간의 긴 여행이고 여행은 언젠가 끝이 난다. 소중한 널 잃은 게 두려워서 삶은 언제나 행복하지 만은 않다. 강해지지 않으면 더 걸을 수 없다


하지만 노래처럼 이젠 알 수 있는 때가 온다. 울고 싶다면 큰 소리로 울자. 우리 모두는 자유롭게 살아가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라는 걸


https://youtu.be/xVoMIDe-C2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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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피로처럼 여기는


슬픔이 내가 가진 마지막 저항이다



썩어가는 감정이 온몸을 떠돌다가


여기저기에 오래된 문 같은


흉터를 남기고


슬픈 냄새가 올라올 때마다


거기에 코를 박고 한참 있는다



희망을 바라지 않아


행복도 원하지 않고


절망이 더 믿음직하고


불행하지 않으면 고마운 생에서


컴컴한 곳을 멍하게 바라보면


작고 못생긴 꽃 한 송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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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정수리에서 나는 냄새와는 또 다르고,


아직 무른 살갗에서 올라오는 냄새와 태양의 열기를 받아서 때 묻지 않는 더러움의 냄새가 조카의 정수리에서 난다.


이런 예쁜 더러움은 세상이 옹호를 해줘야 한다.


곧 어른이 될 테고 그러면 정수리에서 나는 냄새를 없애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변명과 거짓을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문득 어른일 때의 정수리 냄새를 알게 되면 지독한 냄새에 고개를 돌리게 될지도 모른다.


아직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이,


조카의 정수리에서 은은하게 나는 살갗의 냄새.


우리는 타인에게 살갗이라 하지 않는다.


피부라고 하지.


하지만 나와 가까이 있는 사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피부는 살갗으로 부른다.


뛰어논다고 여름의 열기를 잔뜩 받은 내 조카의 무른 정수리에서 나는 살갗의 냄새가 나는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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