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요,

전 소심합니다.

아주 소심해요.

대범한 사람은

많은 사람들을 이롭게 하려고

노력하지만,

전,

저는 당신 한 사람에게

해를 주지 않으려

앓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소심함이 나를

지탱해주는

열원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대로

소심해질 수 있게

허락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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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어 놓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차갑게 느껴지는,


숨을 쉬면 맛있는 가을 뜸 뜨는 냄새가 나는,


마당의 나팔 꽃잎 뒤에서 수런거리며 이슬이 맺힌 밤을 기다리는,


두더지 녀석이 누울 곳을 찾느라 여기저기 구멍을 파놓은 화단을 정리해야 할,


정리가 끝난 화단을 보며 마당에 앉아 손톱을 깎아도 좋을,


비바람을 지나 황색 옷을 입은 초록의 그것들이 이내 떨어질 것만 같은,


그러나 아직 끝이 보이지 않아서 앞으로 죽 난 길을 따라가야 하는,


곧 나프탈렌의 미미한 냄새가 나는 솜이불을 꺼내서 덮을 거라는 포근함이 드는,


그리하여 그 냄새를 맡으면 눈물이 핑 돌 것만 같은,


아직 불러보지 못한 이름과 하지 못한 말을 괜스레 하늘을 보며 말하고 싶은,


티브이를 틀면 '가을의 전설'이 흐르며 백만 불짜리 미소의 트리스탄이 죽은 이사벨을 안고 오열할 것만 같은,


몸은 어제에 머무르고 싶은,


가을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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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날이 따뜻했지


하지만 어제와는 다른 온도의 경계가 있었어


계절의 냄새가 가득하고


뿌연 먼지 역시 가득한 날이었어



오늘을 견뎌내고 내일을 바라지만 눈을 뜨고 나면 내일이 아니라 다시 오늘이야


나는 그런 오래된 세계에서 나날이 변하는 바다의 날씨를 느끼며


날짜변경선 위에 올라서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그러고 보면 날씨라는 건 사람의 마음과 비슷해


같은 날이 없고 변덕도 심하고 말이야


이거다 싶으면 어느새 모습을 바꿔버리고 심술을 부리고


전혀 그렇지 않을 것 같은데 울어버리고


예상치 못하게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고



그래도 변덕 심한 날씨 덕분에 바다에 나오면 매일 달라지는 사색을 할 수 있어서 나쁘지는 않아


가끔 신발을 벗고 맨발로 바닷가를 걸을 때가 있어


비가 오고 난 다음, 화가 났던 모래가 기운이 빠졌을 때


모래 알갱이들이 발가락 사이를 파고들었다가 감싸는 느낌이 좋거든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면 이불에 비빌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야


그리고 신발을 들고 도로를 맨발로 걸어도 이상하게 보는 사람이 없어



너에게 두고 온 기억하나를 떠올리기 위해 맨발로 바다를 거닐다 보면


어느새 개와 늑대의 시간으로,


임계점의 선을 넘어가면 밤은 눈처럼 내리고 말아


의식의 뒤편으로


달의 어두운 부분처럼


밤은 그렇게 눈처럼 내려와서 고독이라는 이불이 되어 몸을 덮어줘


얼굴만 빼고 이불을 덮고 있으면 너무 따뜻해서 외로움이 식은땀처럼 흘러내려


옆에 있는 이와 포개짐으로도 그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고 시간의 그리움도 달래지 못해


이렇게 시간에 초조함을 덧입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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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맣게 물든

덴마크식 바다에 나왔다


바다는 매일 몇 시간 동안

까만 눈물을 흘린다


까맣게 보이는 바다에

너의 이름을 썼다 지우니

머릿속에 선명하게

너의 얼굴이 아로새겨진다


생각의 줄을 잡고 잡아당겨 보면  

어느새 너는 빛이 되어 서 있다


눈을 감아도 보이는 너는

나에게 나쁜 기억을 말해준다


어느 시인의 시에서 하늘의 별은  

유난히 반짝이는 사람을 가리킨다


나는 외면한다

하지만

그 별은 시간 속으로

나를 데리고 간다


고통이 심하면 이렇게

밝게 빛을 낸다


별은 빛으로 눈물을 흘리고

바다는 검은 눈물을 흘리고

너는 투명한 눈물을 흘리고


오늘은 있지만

너가 없는 오늘은  

더 이상 내가 될 수 없고

내가 아닌 오늘은

더 이상 하루가  

될 수 없다


내 모습은 너의

배경이 되었을 때

가장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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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방에서 나가야 하는데 문이 없다


게다가 조금 전부터 방이 점점 좁아지는 기분이 든다


그녀에게 전화를 하기 위해 폰을 꺼냈는데 숫자가 없다


방은 그새 변소로 바뀌어 있다


냄새는 소거됐지만 꾸물꾸물 기어 다니는 것들이 다리 위로 올라오려 한다


폰을 아무리 터치를 해도 숫자판이 나타나지 않는다


나는 겁을 잔뜩 먹고서야 꿈에서 깨어난다




일주일에 같은 꿈을 몇 번이나 꾸는지 몰라


꿈속은 언제나 불행이 도사리고 있어


잠이 들면 듬성듬성 떠 있던 불행이 촘촘해지고


형태가 뚜렷해져


나는 너에게 가려고 발버둥을 치지


꿈속에서 나는 외쳐


너는 공기와도 같아서


네가 없어지면 나는 숨이 안 쉬어진다고




200일 동안 행복을 그러모아도


20분 만에 무너지는 것이 행복이었어


삶이란 그렇다고 쳐도


비규정적인 세계에서까지 그럴 필요는 없잖아




아침에 일어나서 새벽에 잠들기까지


사람들을 대할 때 좀 더, 덜 친절하게


좀 더 상냥하지 않게


인간관계를 협소하고 협소하게


배신을 잘 하는 희망에게 한 마디를 하며


조금은 답답하게 보이겠지만 느리게 흘러


가능하면 나를 투명하게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어




그리고 중간에 네가 떠오르면


덴마크식 바다에 앉아 너를 떠올린다


그것으로 충분해


24시간 중에 2분간의 행복이면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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